이근호

시민대학강의5-1

아빠와 함께 2026. 8. 24. 18:24

위쪽을 쳐다보다가 중간에 위 쳐다보는 것이 정리가 되면서, 그때부터 아래로 쳐다보게 되는 겁니다. 신이 누구냐? 신은 우리 인간들 속에는 신이 안 보이니까. 분명히 위에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거에요. 그래서 옛날에 멕시코에 마야 문명 같은데, AD 600년경에는 피라미드를 쌓았어요. 피라미드가 이집트에만 있는 게 아니고 멕시코에도 있어요. 잉카제국 같은 경우에는 마추픽추라는 게 있잖아요. 전부 다 그게 옛날에 다른 데도 전부 다 신전들이 있어요. 그거는 위에 있다는 거예요. 성경에 봐도 산당이라고 해서, 산 위에 기도원 같은 게 옛날부터 있었고. 위에 있다는 겁니다. 위에 있기 때문에 상당히 뭐냐 하면 신비로워요. 신이라는게 신비롭고 신비롭기 때문에 우리는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가 있는 겁니다.

신과 인간 사이에, 신의 내막을 모르니까 여러가지 갖가지 의견들이 있다 보니까, 신이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가 되는 거예요. 신이 여러 개가 되는 걸 가지고 뭐라고 하냐면 다신론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신론. 여러분 신이 여러 개 되는 것이 신이 정상이라 생각합니까? 하나라는 게 정상이 돼요. 어느 게 정상이라고 생각합니까? 여러 개가 정상이에요. 왜 여러 개가 정상이냐 하면은, 신이 하나가 되어버리면 자연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 하나가 아니고, 번개 치는 것도 있고 지진이라는 것도 있고, 여러 개가 되니까. 하나에서 여러 개를 뽑아낼 수 있는 그 어떤 아이디어나 지혜를 어느 인간이 정리한 게 없어요. 정리한 게 없다. 이 말이죠. 예를 들어 궁합 보는 신하고 이사 갈 때 신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당연히 다르죠.

궁합 볼 때는 궁합 보는 방법이 있을 것이고. 이사 갈 때 신에게 알아보는 그 방법을 궁합 볼 때 똑같이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게 없어요. 없다. 이 말이죠. 그리고 아들을 안 낳고 딸만 낳았을 때 아들 낳기 위한 방법은 또 따로 있어요. 아들 낳는 방법은 이렇게 골짜기에서 제사 드려야지 아들 낳기를 원한다면서, 이사갈 때처럼 팥을 뿌려버리면 애 낳는 거하고 상관없잖아요. 그리고 차를 새로 구입했을 때, 차 사고 나지 말라고 신에게 비는 방법하고, 아들 없을 때 아기 낳는 방법하고 같을까요? 다를까요? 이게 옛날부터 이게 달라요. 이것은 제가 그냥 다르다고 하는 게 아니고 옛날 조상 때부터 들어보면 다 다르거든요.

다르다는 말은 이걸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원리를 누가 “이게 옳습니다”하고 제시할 수 없어요. 왜? 자기가 신이 아니잖아요. 신이 아니기 때문에 차라리 모르는 상태에서는 -어차피 신이 항상 인간의 필요를 위해서 만든 게 신이기 때문에, 자기 재수 좋아라고 만든 게 신이기 때문에- 그때 그때마다 신에게 비는 방법을 인간들이 계속 끄집어내다 보니까, 방법이 다르니까, 제사 방법이 다르니까, 신도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신이 원래 다신인데, 이게 일신으로 바뀝니다. 언제부터 일신으로 바뀌었냐 하면 바로 BC 600년경에 그리스라는 -그리스 현재 지금 그리스죠. 지금 그리스- 그 동네부터 철학이 발달하면서 여러 가지 신을 하나로 통합하는 작업에 나선 겁니다. 거기에 등장한 게 뭐냐 하면, 다신에서 일신으로 바뀔 때, 여기 등장한 것이 인간의 이성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이성이 등장해요. ‘똑똑함’, ‘현명함’, ‘따지는 것’ 이런 걸 이성이라고 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AD 50년경에 사도바울이 1차, 2차 3차의 전도여행을 통해서 전도하면서, 여기서 인간이 이성을 통해서 신은 다신에서 일신으로 바뀌잖아요. 다수에서 신이 일로 바뀌는데, 신이 일로 바뀌는 그 시대로부터 500년 이후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기독교의 신에게로부터 뭐가 오느냐하면, 인간이 신을 아는 것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받은 계시가 있다는 겁니다. 이거는 뭐냐 하면 바로 유대교. 유대교에서 나오는데, 유대교는 신을 직접 만나서 계시 받은 사람 있지요? 이름이 모씨집안인데. 모세잖아요. 모세는 자기가 신을 만들어낸 게 아니고, 시나이산, 시내산에 올라가 가지고, 직접 손에 들고 왔죠. 돌판. 이게 얼마나 분명하고 정확했으면, 그때부터 유대인들에게는 양보라는 게 타협이라는 게 없습니다. 신의 계시에서 일체 타협이라는 게 양보라는 게 일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직접 신이 글자를 썼기 때문에. 후벼팠잖아요. 직접 글자를 썼기 때문에, 이거는 감히 인간들이 -신은 이렇다 저렇다. 이사 갈 때 팥 뿌리고, 아들 없을 때는 이렇게 하고- 그런 모든 방법들을 일수에 붙이고, 오직 신은 하나님의 십계명에 기본해서 그 십계명을 지키지 못했을 때는, 제사드리는 방식으로 제사법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은, 지금까지의 신은 인간의 이성으로 통합했는데, 인간의 이성으로 통합했다는 이걸 다시 설명 좀 드리면, 다신에서 일신으로 바뀌거든요. 다신에서 일신으로 바뀔 때. 복습하는 의미에서 했던 걸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다신에서 일신으로 바뀔 때에, 철학자들이 왜 다신에서 일신으로 바뀌었냐 하면 제사가 너무 번거로워요. 그리고 돈이 들어요. 제사가. 제사하는 제물들이 깨끗해야 되거든요. 또 값비싼 거란 말이죠. 사람이 누구한테 선물할 때 성의가 있어야 되는데, 신에게 선물하면서 나쁜 것 이런 거 주면 안 되잖아요. 좋은 거 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좋은 거 하다 보니까 이게 뭐냐 하면은, 집안 좋은 부잣집에서는 좋은 제물을 바치니까, 하나님께서 신께서 그걸 보고 “아이고 기특하다”해서 복을 더 주고, 없는 집에서 이렇게 하찮은 제물을 주니까, “이것도 선물이야?, 이거 한번 혼나야 되겠구먼!” 이래서 부자보다 복을 덜 받는 거예요. 역시 신의 세계도 돈 놓고 돈 먹기. 빈부의 격차가 신의 세계도 마찬가지에요. 교회에서 헌금 많이 하면, 장로 빨리 되고. 적게 하면 장로 탈락하는 거. 똑같은 원리 원칙인거에요.

그러니까 제사가 너무나 유치해 보인다. 제사 없는 신을 만들자. 그래서 일신 만든 거예요. 제사들에서 복을 따내는 그런 얍삽한 짓 하지 말고 신이 있다면, 인간이 직접 따져서 해보자. 그러니까 신을 아는 이걸 나는 이성이라 해서 이성. 이게 뭐로 바뀌었냐면 이게 로고스로 바뀌어요. 로고스. 따져보니까 신이라는 것은 최고의 자리이기 때문에 최고의 자리는 둘을 용납하지 않아요. 최고의 자리에. 준결승, 준준결승, 결승치러 가지고 최고의 태양은 두 개가 아니에요. 하나예요. 하나만 인정하거든요. 신을 하나만 인정하다 보니까 “신은 하나밖에 없는 신인데 다양한 것이 있는 것은, 그 신이 만들 때 로고스로 만들기 때문에 그렇다”.

꼭 로고스를 만들어야 될 이유가 뭐냐 하면, 로고스를 만들었다는 로고스가 어디 있냐 하면 인간 속에 있거든요. 인간 속에 이성이 있습니다. 따지면 질서 개념입니다. 뭔가 이렇게 아름답다는 것은 질서가 있을 때 아름답잖아요. 얼굴이 제 코, 입 그대로 있어야 아름답지. 코가 여기 붙어있고 귀가 여기 있으면 아름답지 않잖아요. 그래서 인간에게는 최고 진선미, 최고의 진리와, 최고의 선과, 최고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은 인간 속에 이미 신의 속성과 신의 요소가 들어있다는 거고, 들어있으면 신을 찾는 것은 간단하죠. 자기 속에 있는 최고, 최고, 최고, 최고의 극단 극단 극단의 최고 선함과 착함과 최고의 아름다움과 최고의 진리성을 끄집어내면, 그것은 바로 신이 집어넣어준 이성이기 때문에, 그 이성의 밧줄을 타고 올라가게 되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게 되면 결국 인간은 신과 만난다는 간단한 문제잖아요.

그런데 이거하고 기독교하고 차이점이 뭐죠? 철학은 인간의 이성 가지고 타고 올라가면 그 끝에 꼭대기 위에 제일 높은 층에 신이 계시다고 본 거고. 여기에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흘러나온 기독교는 뭡니까? 직접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거예요. 받았다고 하니까 이 둘 사이에 이게 타협이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될 수가 없죠. 하나는 밑에서 올라오는 것이고. 하나는 위에서 내려오는데 이게 밑에서 올라오는 게 어차피 인간 속에 다 들어있으니까, 양보할 수 있지만, 유대교 같은 위에서 모세가 직접 하나님의 글씨 쓴 돌판을 봤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걸 다른 인간들이 생각한 거하고 견줄 마음이 있겠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어디에 !신이 주신 거하고 어디에 감히 비교해!” 그렇게 이게 대립이 되어서 순교도 많이 당했죠. 이게 타협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타협이 안 되면, 어떤 손해가 있느냐 하면, 교회에 손님이 안오잖아요. 교회 숫자가 뭐지요? 그러면 교회란 기독교가 부흥이 안 되잖아요. 발전이 안 되죠. 그러면 부흥되는 방법은 뭡니까? 이 하나님의 계시에다가 이것을 타협 보면 되는 거예요. 포함시키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바로 이 하나님의 계시가 곧 로고스며, 이 로고스가 사람으로 되어 있을 때, 그게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온 사람은 전에는 모호하게 “나는 착한 걸 좋아해 나는 아름다운 걸 좋아해 나는 선한 걸 좋아해” 모호하게 생각했다가. 교회 와서 딱 보니까. 그 착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아하~ 하나님의 형상이 내 속에 들어있구만”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죠? “여러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잘 키워서, 하나님을 본받고, 예수를 본받으시면,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성자로서, 또는 성도로서 나중에 품격 있는 사람이 되어서, 죽어서 천국에 합류할 수 있습니다“ ”아! 그러면 되는구나“

그러면 교회에서 할 일은 ”교회에서 일단 예수 믿으시고. 구원 받고 난 뒤부터는 말씀대로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사시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화의 과정, 거룩의 과정입니다“.어렵지 않잖아요? 굉장히 모든 게 간편하게 되었죠? 그래서 술 먹고 담배 피우고 개떡까지 살다가 ”이렇게 살아서 나 인간 안 되겠다. 지옥 갈거같다“ 할 때 어떻게 돼요? 교회 와서 뭐부터 하면 되요? 교회 와서 술부터 끊고, 그 다음에 담배 끊고, 그 다음에 목사 시키는 대로 착실하게 하고, 바자회 나오고, 이웃 사랑하고, 구제하고 봉사하고, 누가 복음 전파한다는 그 하나님이 거룩한 일에 선교회비 내고, 주의 종이라는 목사를 섬기고, 그렇게 하게 되면 그 모습을 누가 지켜보고 있다? 하나님이 지켜보고 있으니까. ”하나님 저 어떻습니까?“ ”아이고 착하구나“ ”그러면 저쪽은 안 착한데요?“ ”그거는 상급이 없는 거야“ 하니까 예수님 믿고 구원 받는 것은 동일한데, 천국 가서 얼마나 복을 더 많이 받느냐 하는 것은, 보너스의 문제거든요. 성과급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건 상급을 쌓아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상급 쌓는 방법이 뭐냐 하면, 두 가지예요. 교회 와서 봉사하고, 헌금 많이 하고. 그 두 가지.

이제 교회가 유지되는 방법에 대해서 여러분 이제 아셨지요? 이 소리를 어디서 듣겠습니까? 저 아니면 누가 이런 걸 말하겠어요? 교회가 그동안 유지된 방법은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있어야 되고, 돈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돈 낸 만큼 그만큼 성화 거룩하다는 것을, 그러니까 아무리 속으로 착하지 않아도, 실제로 돈을 현금으로 기부하는 그 선한 행위. 또는 자기를 포기하는 그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찰칵찰칵 사진 찍어 가지고, 거룩한 천사 같은 모습이라고 하는 거예요. 거기에다가 교인 끌어모으기 위해서 남편까지 교회 데려오고, 기도 많이 해서 중보기도 해서 자식까지 다 기독교식으로 해가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빛과 소금되도록 교육을 시키면, 그것은 금상첨화로, 아주 교회에서는 칭찬받는 교회가 되죠. 이것은 바로 여기 이쪽과 신비로운 계시와 이 계시를 하나로 결합시킨 타협책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로마에서 번창하기 시작합니다.

”아~ 신은 우리의 행복을 원하시는구나. 내가 나의 행복을 원하는데, 하나님도 나의 행복을 원하는구나. 그래 행복하자. 많이 가지고 많이 복 받아서 많이 부자 되어서 행복하면 이건 곧 신이 원하는 바다. 지지리 군상에 못 사는 인간들은 저주받아서 그런 거니까. 이 땅에 저주받고, 죽어도 저주받고.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이 땅에서 기도해서 복 받고, 죽어서 천국 가고“ 이러한 선택, 유대교가 말하는 ”우리는 선택된 특별한 족속이다“라는 그런 인식을 로마에 확산 시키면서 누구나 그런 특별한 족속에 가입하려고 전부 다 개입한 거예요.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발령해서, 기독교를 정식 공인하고. 그 뒤에 왕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면 일체의 공직의 공무원이 될 수 없게 만들어서 이제는 기독교에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고, 국교를 기독교로 만들어 버려서 왕으로부터 밑에 말단 동서기까지 전부 다 기독교 신자로 교체 시켜버렸어요. 군대 같으면 군대 장군이 기독교 신자라면, 쫄따구 전부 다 무릎을 꿇게해서 세례 시켰습니다. 심지어 불가리아 같은 데, 선교할 때는 왕이 기독교 신자거든요. 전 백성을 강가로 모아가지고, 전 백성을 세례를 다 줘버렸어요. 불가리아 같은 경우.

그리고 영국 같은 경우에 전도할 때 어떻게 전도했냐 하면 타협을 했습니다. 노르망디라고 해가지고, 현재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바이킹족이거든요. 바이킹족들이 날씨 추우니까 자꾸 밑에 내려와서 정착할 땅을 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로마 제국에서 타협을 해서, 뭐냐 하면 ”너희 따뜻한 땅 원하지? 농사짓을 땅 원하지?“ ”원합니다“ ”그럼 땅 줄 테니까. 종교 바꿀 용의 없나?“ ”아이고! 종교 바꿀 용의 있습니다!“ 그래서 전부 다 기독교 된 거예요. 왜 그렇게 전도가 수월했느냐 하면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지상에서 원하는 것은 권력입니다. 힘입니다. 왜? 개척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말을 못하는 이유가, 힘이 없기 때문이고. 큰 교회는 왜 큰소리치느냐 하면 그게 힘이 있기 때문이에요.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하는 정치적 동물이라고 했는데- 남들이 나를 어떻게 알아주느냐가 사는 보람을 계속 제공합니다. 남의 시선이 내가 보는 시선보다 더 세요. 남의 시선이. 남의 시선에 내가 부러움이 되려면 남이 갖지 못한 힘을 내가 가져야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마귀한테, 시험 받을 때 마지막 시험이 뭐냐 하면, ”권력 줄게 나한테 절해라“ 그거잖아요. 권력 줄게. 처음 시험이 뭔지 알죠? 빵 돈 줄게. 돈 줄게. 이 돈으로 살아라. 두 번째 뭐냐? 두 번째 시험이 뭐냐? 니가 인기 있어야 살 맛이 난다. 인기 줄게. 세 번째가 뭐야? 권력 줄게. 그러니까 기본은 생존에 있는 생계비와 그리고 남한테 살아갈 때 남들이 부러워하는 인기와 그리고 권력. 세상을 다 쥐는 권력 줄게 나를 섬기라. 주님께서는 그걸 거부했거든요. 왜 그걸 거부 했냐 하면, 마귀가 그걸 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 속한 어떤 인간도 이 세 가지의 카테고리에서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심지어 교회까지. 인기 있는 교회, 돈 되는 교회, 세상에 큰 소리 유지 행사할 수 있는 교회. 어떤 행사에 보면 앞자리에 신부들 앉아 있잖아요. 왜 그렇습니까? 이게 권력과 결탁되어 있어요. 권력과. 이 세 가지가 있다면 더 이상 부러울 게 없는 거예요. 신은 바로 이 세 가지를 제공하기 위해서 신을 믿는 것이지. 신이 좋아서 믿는 게 아니라, 이 세 가지를 줄 때만 좋은 신, 살아있는 신이라고 인정하고 믿겠다는 거예요. 이것은 뭐가 다르냐 하면, 근본, 십자가 정신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십자가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말만 십자가 붙었지. 밑에는 이게 권력과 결합되어있는 거예요.

이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증명하는 것이 뭐냐? 로마의 1500년 역사입니다. 유럽의 1500년 역사가 이걸 증명한 거예요. 그리고 1500년 지나고 난 뒤에, 유럽은 ”신은 사기였다. 교회는 사기였다“ 하고 뛰쳐나갑니다. 지금 이 교재 제일 마지막에 숫자가 몇 명이냐면 43명이죠. 이게 다음주에 제가 56명까지 소개 할겁니다. 56명 신학자들이 신에 대해서 관심 있다가 점차 무엇에 관심 있느냐 하면, 인간에 대해서, ”신이 그렇다면 나는 뭐냐?“ 하는 쪽으로 관심이 가면서, 이것이 27번째부터 드디어 내리막길로 갑니다. 내리막길인지 어느 길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신으로부터 관심사가 신의 입장으로부터 점점 관심 어디에 있다? ”내가 뭐를 이룰 수 있느냐?“ 쪽으로 옮겨집니다. 그게 근대 주체 사상이에요. 존 로크, 홉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피히테, 헤겔, 칸트 계속해서 계속해서 거기다 과학까지. 과학의 갈릴레오 갈릴레이까지 계속해서 쏘아지고 있어요. 그 시점을 가지고 르네상스라고 합니다. 재생이라는 뜻. 르네상스.

그림에 있어서 드디어 배경 위주로 하는 것이 인물 위주로다. 배경 위주에서 인물인데 그 인물이 이제는 가만 서 있던 인물이 뭔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죠. 피에타 같은 경우에. 김기덕 감독의 영화 ‘피에타’ 같은 경우에 보면. 마리아품에 누워있는 그 예수. 예수를 안고 마리아가 있을 때, 마리아는 비탄에 잠깁니다. 피에타의 이름 뜻이 비탄이라는 뜻이에요. 그거는 중세 때는 상상도 못해요. 왜냐하면 마리아는 표정이 없어야 돼요. 너무 거룩하니까. 너무 고상하니까. 항상 천사의 얼굴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르네상스가 되면서 그 예수를 안은 마리아의 모습은, 슬픔에 잠기는데 일반 자기 아들을 잃어버린 보통 어머니로 바뀝니다. 보통 어머니로.

이야기를 계속해 보겠습니다. 신에게 뭘하다가 결합이 되면서 나온 게 뭐냐? 삼위일체가 나왔죠. 삼위일체. 삼위일체에 대해서, 신의 계시는 이미 확정 단계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더이상 삼위일체에 위반되는 것은 다 이단되는 거예요. 삼위일체에 위반되는 것. 그리고 교회가 어떻게 말아먹든 관계없어. 삼위일체만 이야기하면, 무조건 그것은 이단은 아니고, 정통이고. 정통된 교회 가게 되면 그 말을 들어버리면, 그 사람은 죽어도 천국 갈 수 있는, 유일한 정통적이고, 이단이 아닌 참된 교회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참된 교회냐 아니냐의 기준이 뭐냐 하면은 “혹시 삼위일체를 제대로 가르치십니까? 가르친다고요? 그러면 거기에 등록하겠습니다.” “그런데 삼위일체를 아십니까?”“삼위일체는 우리는 거부합니다” “아! 이게 이단이구나” 교회사에 나오는 모든 이단들은 어디에 위반돼서 이단된 거예요? 삼위일체에 어긋나서 이단된 거예요. 여호와의 증인. 신천지.그리고 통일교. 그리고 안식교. 몰몬교. 구원파. 지방교회. 그리고 신앙촌. 박태선. 천주교를 기독교에서 이단이라고 소리 안 하죠. 왜? 거기서 삼위일체를 배웠으니까. 전부 다 목적 ‘삼위일체’예요. 저번에 오신 분도 강의에서 저한테 이야기했죠. 삼위일체가 기본이라고 이야기하죠. 보세요. 그렇게 알고 있잖아요.

삼위일체 내막도 모르면서. 삼위일체는 교회가 눈에 보이는 유일한 구원의 중계소인 것을 확정하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식으로 질서화시킨 것이 바로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복음이 아니고, 성경 진리가 아니라 교회에는 정당하다는 것. 교회는 누가 뭐라도 정당하다는 것. 이 교회 건드리는 것은 신을 건드린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삼위일체 교리로 완전 무장을 한 거예요. 이렇게 보시면 돼요. 그러면 삼위일체의 교리가 뭔가를 교회나 성당에나 물어보세요. 아무도 답변 못합니다. 답변을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너무 불합리하기 때문에. 불합리하기 때문에 뭘 담을 수 있느냐? 불합리하기 때문에 의외로 신비를 발산할 수가 있어요. 신비성을. 알면 시시하잖아요. 그런데 너무 신비롭기 때문에. 감히 범접하지 못하고 근접하지 못하고 그냥 우와! 하고 지켜보는 그 가운데, 교회와 성당은 자신의 권위와 신적인 카리스마를 보존할 수 있다는 전략이 먹혀든 거예요.

그래서 삼위일체 끝나고 난 뒤에 이제는 삼위일체 교리를 그 다음에는 교세화 또는 세력화 시키는 사람이 있었으니 지난 시간에 했던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이제는 삼위일체가 세상적으로 힘을 발휘하는 실제적인 교리로서 자리 잡게 되는 겁니다. 삼위일체를 안에 품고 만든 교회에서 주는 성찬식과 그리고 세례식은 유효하다는 거예요. 여기 세례받을 때 물 뿌림 당하고, 그리고 성만찬 할 때 빵과 포도주스. 포도주를 먹는 자는 단순히 인간 이미지이고 조작된 일이 아니고 그것은 신께서도 일부러 만드신 -쉽게 천국가라고 일부러 만드신- 하나님의 특별한 제도라는 겁니다. 그걸 천주교에서는 뭐라고 하냐? 그걸 가지고 성사라고 하고, 두 가지 중요한, ‘성체성사’와 그리고 ‘세례성사’ 또 하나 필요한 것은 ‘견진성사’. 견진성사는 한번 예수 믿고 난 뒤에 계속 거듭나서 거듭해서 성화 생활하라고 힘주고, 성령의 힘 주라고 하는 성사인데. 이 성사는 일반 신부는 못하고 주교급들이 하는 거예요.

주교는 보통 네 가지의 교복을 갖고 있고, 그 위에 그걸 관리하는 참사 회원들이 있어요. 참사회원들이 있어가지고 평신도도 주교를 보좌해서 해주는 거예요. 평신도도 될 수 있고 신부도 될 수 있고. 천주교의 질서 잡기라는 것은 뭐냐 하면 주교가 있고 그 위에는 카디널. 추기경이 있고. 추기경의 위에는 교황이 있고 교황 위에는 누가 있습니까? 위에는 그리스도가 있고, 그리스도 위에 누가 있냐 마리아가 있어요. 어머니니까. 그리스도는 마리아 말 들어야 돼요. 그런데 그리스도에 기도 안 되면 마리아를 통해서 우회해서 빽쓰면 돼요.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 대중들이 원해요. 대중들이 종교심들이 그걸 원한다니까요. 골치아픈 삼위일체 성경 이야기하지 말고 딱 뭐를 딱 하게 되면 딱 구원받는 그 방식을 그 법칙과 방식을 우리한테 이야기해달라는 거예요.

이거는 일반 봉건주의 사회 일반 사람뿐만 아니고 왕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왕질하는데 백성들 말 듣도록 해줘” 하니까 “좋다. 해줄게” 해서 교황이 나선 거예요. 왕권신수설을 해도 왕은 사람이 건드리면 안 되고 혁명이나 쿠테타하면 안 되고 왕은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것이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이 교황이 관을 머리에 씌워줘버거든요. 교황이 심어준 게 모든 그 당시 유럽 사람들은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인이거든요. 예수님의 대리인이 그만큼 카리스마 있고 권위 있는 사람이 왕에다가 관을 씌워줘 버리면, 그 왕은 누구의 권위를 받냐 하면, 신적인 권위를 받으면서, 봉건 사회에서 자기 밑에 있는 영주들과 영주 밑에 있는 기사들과 그 밑에 있는 농민들을 농노들을 이렇게 질서 잡게 잘 관리할 수 있는 사상적인 정신적인 힘을 부여받는 거예요.

제가 아까 했잖아요. 이 세상에서 뭐가 필요하다고? 필요한 것은 권력. 인기. 너무 인기 없으면 권력 끊어져요. 인기, 권력과 그리고 그 모든 기초는 -바로 나만 일하고 자기는 노는, 노동에서 나오는 돈, 잉여 생산물에서 나오잖아요. 돈에서.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중세 유럽을 거치면서, 세상이 뭐냐?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힘과 힘의 겨룸, 돈과 돈의 겨룸, 인기와 인기의 겨룸 그렇게 투쟁의 장. 그게 바로 세상입니다. 거기서 뒤떨어지면 그거는 뒤처지는 것이고. 거기서 운 좋게 되게 되면 올라서면, 그거는 평생 땅땅거리면서 사는 거예요. 그게 세상이에요. 굉장히 간단하죠. 가진 자가 계급을 만들었고, 계급은 세습되고. 한번 양반은 계속 양반되고, 한번 상놈은 계속 상놈되고. 그걸 뒤집으려면 1789년 프랑스 대혁명처럼 혁명을 일으킬 수밖에 없어요. 그걸 상승화시키자 계속해서 유지하자 하는 게 뭐냐? 공산주의, 사회주의 운동입니다.

사회주의 개념이라는 것은 고상한 게 아니고, “니만 즐기나? 우리도 좀, 우리 없는 것도 즐겨보자!” 해서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사회주의 운동이고. 그걸 좌파라고 이야기하죠. 좌파. 그 사회주의가 권력을 잡으면 뭐가 됩니까? 독재가 될 수밖에 없죠. 불만들이 모여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날개가 두 개예요. 좌파 아니면 우파. 우파는 보수고. 좌파는 개혁 성향이고, 야당이고, 보수는 한 번 놓친 권력을 잃지 않으려고 하고. 그걸 어떻게든 뺏으려고 하고. 선거혁명도 혁명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것은 그렇게 살다가 한 80 살다가 치매 걸려 가지고 죽으면. 그 다음에 죽고 당한 뒤에 또 무슨 일이 있는지 본인은 모르고. 그냥 사라질 뿐이고. 그게 바로 인간세상이에요.

그래서 인간 세상에서 어떻게 연줄을 닿아야 돼? 누구하고? 저 천국과 연줄을 닿기 위해서는 이러한 연줄, 여행사가 있어야 여행하듯이 천국 가는 여행사가 필요하잖아요. 그 여행사 노릇을 성당이나 교회가 해달라고 대중들이 요청하는 거예요. 대중들이요. 그것을 해줄 테니까. 그만큼 교회가 유지될 수 있도록 자금을 팍팍 써라 이렇게 나온 겁니다. 자금을 써야되요. 그래서 이미 교회는 거의 권력체가 되는데, 삼위일체가 정립되고, 아우구스티누스 이후에는 교회는 이제 안전빵이죠. 이제는 정신적으로 모든 게 정립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정해진 상태에서는 일언반구 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이미 교리가 정립됐기 때문에 그 교리에서 누가 입만 떼면 뭘 들고 나오죠? 뭘 들고 나온다? 아까 이단이냐 아니냐 점검하는. ‘삼위일체’를 들고 나와가지고, “당신을 한번 봅시다. 삼위일체를 당신이 동의하면 삼위일체로 위에 건설된 이 권력체에 끽소리말고 복종해. 그런데 그 복종 못하겠다고? 그렇다면 삼위일체에 당신이 어긋나는가 보자! 여기에 어긋나네요”이렇게 되는거에요.

왜냐하면 삼위일체는 설명이 안 되거든요. 설명이 안 되니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하여튼 상대방을 잡으려고 하면 삼위일체에 어떤 기준을 가도 다 잡을 수가 있게 되어있어요. 그게 삼위일체예요. 예수님이 인간이라고 하면 그건 어디 걸리느냐 하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거는 삼위일체에 또 어긋나거든요. 예수님은 양성에 어긋나거든요. 신이라는 것에 어긋나요. 그러면 예수님이 신이라고 하면 그거는 인간이라는 걸 부정한 걸로 간주해요. 예수님의 의지가 두 개라 하면, 그건 단일의지론에 걸리고, 하나라고 하면 다원론에 또 걸려요. 결국 이건 삼위일체는 일종의 핑계고, 결국은 기존의 보수적인 권력에 함부로 까불지 말라는 뜻이에요. “어딜 감히 여기에 대들어!”. 그것을 그게 바로 질서고, 질서는 인간들의 안정이고, 안정은 인간에게 뭘 주느냐? 인간에게 행복을 줍니다.

가정의 행복. 식구들이 말썽 없어야 돼요. 아버지 말대로 질서가 잡혀야 돼요. 질서가 잡혀야 가정이 안정이 되고. 안정이 되면 비록 바깥에서 힘든 일이 있더라도 그 안정된 가정에 와서 마음적으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정이 복잡해버리면 뭐가 안 돼요? 행복이 주어질 수가 없어요. 가정이 복잡하게 되면 그만큼 마음에 질서가 없는 게되요. 이거는 가정이 복잡하면 그 대신 마약, 도박, 술 담배, 줄 담배 이런 걸 스포츠, 로또 스포츠 이런 거 해가지고 자기의 안정을 딴 데서 찾을 수밖에 없죠. 그러면 인생 파탄납니다. 이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거거든요. 그래서 “신의 뜻이 뭔지도 관심 없고. 예수님이 누군지 관심 없고. 그저 나의 행복만 해준다면 얼마든지 나는 거기에 대한 응당의 보상을 해줄 용의가 되있습니다”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가짐입니다. 이게 바로 마귀에 속한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마귀. 이 세상에 속한 마귀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여기 처음으로 보에티우스 나와요. 드디어 봅시다. 보에티우스. 이 보에티우스가 딱 등장하거든요. 이 보에티우스가 딱 등장하면서 제일 먼저 시비 걸은 게 뭐냐 하면은. 제일 먼저 시비 걸은 것이 그겁니다. 사람하고 개인하고 이게 다르다는 거예요. 보에티우스 30번이에요. 보에티우스. 예를 들어서 만약에 철수. 철수라는 것은 “철수야. 대답해! 철수야!” “저 말입니까?” “철수가 있구나!”. 철수는 있어요. 그런데 사람은 어딨죠? “사람아!”하면 아무도 안 보죠. 내 이름을 불러줘야지. 그래서 이 보에티우스는 처음에 뭐냐 하면 딱 이제 “사람은 없다. 사람은 없다. 다만 개인밖에 없다” 그거 이야기했습니다. 분명히 삼위일체는 안 건드렸죠. 안 건드렸지만 어떻게 나옵니까? 그 당시 신부들은 심사하겠어요? 심사안하겠어요? 대번 신부들이 딱 들어가죠. 딱 들어오죠. “네가 그렇게 주장하는 저의가 뭐냐? 이 봉건 질서 사회를 무너뜨리려고 하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 봉건사회라고 하는 게 요새 사회와 달라서 봉건사회라고 하는 것은 전쟁을 위한 사회입니다. 전쟁하기 위해서는 군사가 필요하죠. 군사가 필요하고 “니는 나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보디가드. 군사가 돼주는 대신, 내가 너한테 갖고 있는 땅을 줄게. 그 땅은 니가 팔아먹든 누구에게 나눠주든 상속하든 그건 니 마음대로 해라” 이게 바로 봉건사회입니다. 왕은 영주에게 땅을 주고 영주는 군사를 키우는 거예요. 그러면 영주는 땡 잡았네요? 땅 공짜로 얻고? 공짜가 아닙니다. 전쟁할 때 있는 모든 말. 그리고 무기, 투구, 칼, 훈련 전부 다 비용은 영주 본인이 제공해야 돼요. 영주 본인이. 그리고 영주에 속한 사람들은 직접 경작하는 땅이 있어요. 그걸 직접 무료로 구획해 놔야 돼요. 왕과 영주 사이에 그런 계약이 있거든요. 그 계약에 그걸 영주는 또 거기에다가 하청을 줘요. 똑같은 계약으로. 하청주고. 하청 주고 기사는 또 하청 줘요. 하청에 하청해나가다 말단이 뭐냐? 땅 없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을 가지고 농노라고 해요. 농노. 노예도 아닌 것이 농민도 아닌 것이, 농민도 농민인데 잠깐 헷갈리는 사람들. 실컷 농사를 짓고 그 농사를 짓고 거기에 대한 세금은 바치는 것 같은데, 이건 그럼 소작되죠. 소작. 소작인 같은데, 왜 노예냐? 그 땅을 벗어날 수가 없어요. 벗어나면 죽습니다. 대번 벗어나서 다른 데 가면 연락합니다. 심지어 결혼도 다른 지역과 결혼 못해요. 그 지역 내에서 처녀 총각 만나서 결혼해야 돼요. 결혼도 누구 허락맡아서? 영주의 허락을 맡아서 결혼해야 돼요. 그게 바로 봉건사회입니다.

이 봉건사회와 비슷한 사례가 일본의 사무라이들. 사무라이는 맨날 칼만 갈고 있는 인간들. 그러면서도 사무라이가 칼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을 어떻게 한다? 역시 또 자기가 부리죠. 양아치로서 조폭이 밑에 있는 양아치 부리듯이 그 사회. 왜 사회가 그러냐? 그 모든 사회는 오직 이걸로만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전쟁’으로만 유지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전쟁을 할까요? 전쟁을 하는 이유는 땅이 척박해요. 좋은 땅은 제한되어 있어요. 그런데 저수지도 없고, 천수답이에요. 그냥 하늘만 쳐다보는 그런 좋은 기후에 좋은 토지에. 양지의 토지에다가 말 잘 듣는 노예까지 그것은 많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보면 90%가 뭐였습니까? 전쟁이죠. 전쟁. 이거는 구약말고 우리나라 고대에도 그랬어요. 전쟁이 아닙니다. 전쟁. 전쟁에 승리했다고 안심놓으면 안 돼요. 전쟁은 또 뺏으러오니까. 그래서 옛날 우리 우랄 알타이 족속에 속한 북방 민족이 계속해서 남쪽으로 따뜻한 곳, 따뜻한 곳, 따뜻한 곳, 얼지 않는 바다를 향하는 계속 내려오다보니까 들어온 사람이 바로 북방 계통으로 들어온 것이 바로 평양으로 해서 한국에 들어왔고. 저 베트남 쪽에서는 뭐냐? 더 시원하고 더 시원하고 올라오다 보니까 이게 남방 계통이 만나서 그 북방 계통, 남방계통이 만난 지점이 뭐냐? 한반도가 되겠습니다. 한반도는 족보가 인종이 두 종류입니다. 남방계통. 남방계통의 특징이 뭐냐? 쌍꺼풀이 있다는 겁니다. 북방계통은 쌍꺼풀이 없다는 거예요. 집사님 쌍꺼풀? 남방계통입니다. 그 북방계통이 섬으로 가는 것이 뭐냐 하면 JAPAN. 일본입니다. 일본. 일본의 특징은 전부 북방계통입니다. 생김새가 상호가 다 달라요. 타이완 쪽으로 올라오는 것은 남방계통이고 그렇습니다.

이거는 뭐냐 하면 청동기 시대 때는 바다가 좁고 육지가 많았어요. 옛날 황해도 섬 같은 게 육지가 됐을 때, 그때는 개간하는 사람이 희박하기 때문에, 좋은 땅은 먼저 본 사람이 임자가 되어있었어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은 자연적으로 깡패가 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칼 쓰는 자가 왕이 되는 시대가 옛날 고대사회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궁예. 조폭이거든요. 궁예. 조폭 중에서도 점잖은 조폭이 왕건. 다른 위쪽의 조폭. 그거는 또 견훤. 이쪽에 귀족 출신의 귀족 재벌 출신의 조폭은 뭐냐? 김유신. 일반 대중들은 그냥 소박하게 농사짓던 사람인데, 뜯어먹는 인간들은 왜 그렇게 많은지? 그게 바로 고대사회였습니다. 참 민주주의가 고맙죠. 민주주의가 고마운 거예요.

보에티우스는 어딜 건드렸냐하면은 “사람은 없다. 오직 개인밖에 없다” 라고 하면서, 보편적인 개념은 없고 개별적인 개념만 있다고 한 거예요. 이게 뭐 문제 됩니까? 맞잖아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철수, 영이 모여서 사람된 거 맞잖아요? 그게 뭐가 틀렸습니까? 뭐가 문제인데? 이게 문제 돼요. 왜냐하면, 신은 말뿐이기 때문에. 신의 말뿐이라는 말은?. 신은 있다? 없다? 없다는 말보단 “모른다” 그냥 신은 없는데 있는 이유는 개개인의 사상들이 모여서 신을 구축했다. 보에티우스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난리 났지요. 조사하고 난리 났습니다. 신이 없으면 뭐가 무너집니까? 교황이 가짜가 되고 신이 없으면 교황한테 왕관 뒤집어 씌운 -아직까지 보에티우스는 그 시대 아니지만-그 인간들이에요. 동안 속임수를 써가지고 “니가 농노가 된 것은 신의 팔자고, 니가 기사가 된 것도 신의 팔자고, 내가 귀족이 되는 것도 신의 운명이고, 왕이 왕 된 것도 신의 운명인데, 그래서 질서가 되는데”. 만약에 신이 허물어 져버리면, 삿대질 하겠죠. “니 뭐야? 언제부터 양반인데?” 이래되는거에요.

(녹음 끊김)
(다시 이어짐)

북한은 바로 북한은 존엄성의 질서 가지고,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한 나라가 되려면 강자를 강자로 인정해주고 약자를 약자로 밟아야 나라가 돼요. 약자를 밟지 아니하면 나라 꼴이 안 됩니다. 나라 꼴이 안 돼요. 약자를 밟지 않으면.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이 사회가 자기 필요한 대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요. 신하고는 관계없어요. 우리가 지금 ‘80명의 신학자’를 하지만, 이 신학이라는 것이 약간 핑계요. 신은 핑계요, 변명거리고,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핑계거리로서 신학이 발달합니다. 여러분 우리 강좌에서 이거 하나 아시면요. 정말 많은 걸 아신 거예요. ‘핑계’입니다. 실속이잖아요. 실속은 내가 얼마나 많은 신을 빙자해서 내가 남한테 인기 얻고 존경받고 내가 돈 되고 생계 유지하고 노후 대책되고. 그런겁니다. 취미생활도 가능하고. 취미생활이 가능한 것은 이미 남이 벌어준 게 있어야. 그 노동의 덕분에 내가 즐길 수가 있죠. 일종의 노예가 있어야 내가 즐길 수가 있어요. 지가 돈 버는데 급급하면, 밥빌어 먹고 사는데 취미생활이 어딨습니까? 이 사회라 하는 것은 남이 희생해줘야 내가 살고 남이 울어줘야 내가 웃을 수도 있는 사회예요. 그것을 신이 있을 때, 신이 지배한 세계에서는 어떻게 신이 거기에 따라서 그때그때마다 형태와 내용이 변질되는가. 우리가 80명의신학자를 통해서 그것을 추적해 보는 겁니다.

그 다음에 31번째 봅시다. 라트람누스. 라트람누스는 어디다 시비거는 사람이냐 하면은. 그 당시에 화체설에 있어요. 화체설이라 하는 것은 2만 원짜리 샐러드가 아니고. 체가 변한다. 화. 체가 뭐냐? 예수님의 이 빵이 변해서 예수님의 살이 되고, 이 포도주가 변해서 예수님의 피가 되는 거예요. 화체설보다 더 나가면 예수님께서 자기 피를 보여주기 위해서 잔을 주었고 자기의 살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빵이 되게 했다.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따라서 일반 대중들은. 그 당시에 인쇄술은 구텐베르크가 만든 인쇄술이 있거든요. 그런데 인쇄술이 없기 전에는 전부 다 책이 귀했어요. 두루마리든지 양피지 그런 거 했거든요. 책이 없기 때문에 성당에서는 책 없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스테인드글라스로 모자이크색의 그림을 그려가지고, 그림을 그려가지고 성경 내용을 이야기해 준 겁니다. 대부분이 글을 몰랐어요. 왜? 글을 몰라야 될 팔자로서 신에게 그 자리를 할당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글은 귀족들만 알면 돼요. 그래야 질서가 잡혀요. 질서가. 그게 신의 이름으로. 삼위일체 이름으로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런데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쉽게 천국가는 방법은, 입맛보고 그냥 행동하게 하는 거예요. “자, 지금 예수님 보고 싶습니까?”“보고 싶습니다”“자, 이 잔을 마시세요”“왜요?” “이 잔을 마시게 되면 당신의 죄를 용서하는 피를 마신게 됩니다”“진짜입니까?” “진짜입니다” 왜? 어떻게? “우리가 그런 권위를 교황에게 그런 권위를 받았기 때문에”. 그런데 라트람누스는 도저히 양심상 그 거짓말을 할 수 없어서 하는 말이 “예수님의 살과 피라고 하는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하고 들고 나오는 거예요. 죽으려고 환장을 했습니다. 이거 성당을 말아먹으려고 지금 성당에서 그런 소리 해보세요. 대번 경찰 부릅니다. 남의 행사 이벤트 방해한다고. 그래서 1050년에 베르첼리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받았어요. 그러니까 이단으로 정죄 받지 않으면 구원이 없을 정도예요. 이단 돼야 구원 받을 정도가 지경이에요. 이단 소리 안 들으면 구원 못 받을 지경이 이 지경입니다.

라트람누스는 그것뿐만 아닙니다. 예정론을 이야기했어요. 예정론인데 이중 예정론을. 이중 예정이 뭐냐 하면은. “구원 받는 사람은 이미 창세전부터 정해 놓았습니다“ 하는 것은 그냥 예정론이고. 이중 예정론은 뭐냐 하면. ”지옥 갈 사람도 정해 놓았습니다“했을 때 이중 예정론이라고 합니다. 지옥 갈 사람도. 그러니까 그게 사실은요, 앞에 이야기하게 되면 뒤에 맞는 이야기인데. 사람들은 뒤쪽은 이야기 안 해요. ”여러분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정돼서 구원받았습니다“라고만 이야기하고. 어떤 사람이 손들기를 ”그러면 지옥 가는 사람도 예정되었어요?“라고 물으면 ”너무 너무 나가지 맙시다. 성경에서 너무 나가는 것도, 너무 좌우로 우로나 치우치지 마라 했습니다. 그거까지 너무 심하게 나가지 마시고 우리가 성전에서 가라! 할 때까지만 가고 그 뒤에는 이야기 하지 맙시다“ 해가지고 말 끊어버려요. 그런데 성경에 나와요. 지옥 갈 사람도 이미 예정되었어요. 그거는 뭘 증명하는가? 책으로 증명하는데. 한쪽은 요한계시록에 보면 책이 두 권밖에 없어요. 세 권도 아니고 네 권도 아닌. 두 권밖에 없는데 한쪽은 뭐냐 하면 명단이 있는데, 그 리스트가 뭐냐?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 명단 따로 있고 그것 외의 모든 명단은 저쪽 행위책에 있습니다. 행위책에. 책이 두권입니다. 전화번호부 같은 게 두 권 있어요.

그래서 라트람누스는 더 나가서, 성만찬이 그냥 단순한 예수님을 기억해야 하는 상징이라면, 성만찬을 할 때 집사가 하든, 교회 사찰이 하든 관리자가 하든, 누가 평신도가 하든 상관없지요? 그렇게 되면 뭐가 무너집니다? 사제. 신부의 권위가 와르륵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천주교는 그 봉건제도 질서를 위해서 그들의 권력을 위해서 용납하지 못하고 이단으로 선언한 겁니다. 10분 쉬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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