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시간에 감정적인 것이 이성적으로 바뀐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사람 이름들이 무수히 많이 나오지만, 그 이름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고요. 그 사람들의 원리만 설명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감정적인 것을 다스리면 이성이 되는데, 이성인이 된다는 말이 곧 신이 격노한다, 분노한다는 것과 연결됩니다. 인간의 심성을 바깥으로 드러내면 그게 로마·그리스 신화가 되는 겁니다. 한때,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로마 신화 책들이 서점에 많이 나왔어요. 그런데 그걸 현대인들이 보면서 의아해하는 것은,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우리가 왜 봐야 하느냐는 말이죠. 우리 전설의 고향도 다 모르는데, 우리나라 전설의 고향도 모르는데, 이 로마·그리스 신화를 왜 봐야 하느냐 말입니다. 물론 기업하는 사람들은 외국 바이어와 이야기하기 위한 상식은 되겠지만, 이게 무슨 교훈이 되겠습니까?
여기는 질투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빼앗고, 그야말로 추잡스럽기 짝이 없는 신들이잖아요. 신들이 아주 추잡스럽기 짝이 없어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인간 속에 있는 추잡함을 바깥으로 드러내면 그게 신들이 되는 겁니다. 그걸 설명할 때 신들이 되는 거예요. 우리 속에 있는 그 감정을 신으로 드러내면 되는데, 그것을 두고 아낙사고라스라는 사람은—자꾸 사람 이름이 나오네요—아낙사고라스라는 사람은 이걸 뭐라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에이, 허구다." 왜냐하면 같은 그리스 사람이었거든요. "이게 무슨 신이야? 이게 지금 애들 장난치는 거지, 무슨 신이야?"라고 하거든요. 여러분, 베트남이나 라오스, 캄보디아 여행 가보세요. 거기에 어떤 신을 믿느냐 하면 힌두교 신을 믿거든요. 힌두교 신들을 보면 새끼 신들, 여신들이 많아요. 신들이 많습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다신(多神)'이라고 합니다. 신들이 많은 거죠.
신이 많은데 그 신들을 보게 되면, 주로 신들끼리 연애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그런 내용입니다. 왜 옛날 사람들은 저 추잡하고 말도 안 되는 걸 어떻게 신이라고 섬겼을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신은 본받을 게 있어야 신이잖아요. 옛날의 신은 본받을 게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내가 있고 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었어요. 참, 이거 설명하려고 하면 어렵지만,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할 때 그때부터 처음으로 인간은 주체로서 내가 있고 내 바깥에 신이 있게 된 겁니다. 그러면 그전에는 뭐냐? 신이 먼저 있고 내가 있는 거예요. 그렇기에 내가 누구를 미워하고 질투할 때는 신이 내 심성 속에 그것을 집어넣어 준 겁니다. 신이 집어넣어 줄 때 이 나쁘고 저질스러운 것은 그때그때마다 신에게 뇌물을 줘서 달래주면 내 운명이 조용하고 평탄하게 되는 겁니다.
왜? 자기가 자기를 다스릴 수가 없기 때문에. 신이 유발한 사태로 인하여 내가 벌컥 화를 낸다, 그리고 화나고 난 뒤에는 후회되니까 "신이여, 얼마면 되겠습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구약의 사사기 17장에 보면 미가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엄마가 실수해서 자기 아들을 저주해 버렸어요. "내 돈 가져간 놈 저주받아라" 이렇게 된 거예요. 나중에 아들이 "엄마, 그거 제가 가져갔는데요" 하니까 큰일 난 거죠. 내 입으로 저주를 했으니까. 그래서 얼른 신상에게 재물을 갖다 바쳐서 그 저주를 풀게 한 겁니다. 그걸 요새 말로 하면 "공덕을 쌓으셔야 합니다", "도를 아십니까"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당신은 분명히 내가 보기에 지금 운수가 대통인데 다 써먹지를 못했다. 그래서 나한테 돈 주고 제사 드리면 당신에게 주어진 그 행운을 마음껏 발휘해서 대단히 성공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 말대로 "천도재 드립시다" 하면, 이판사판인데 백만 원 쓰시고, 나이만큼 돈을 내라며 29살이면 29만 원, 30살이면 30만 원 이렇게 하자는 거예요. 우리가 보기에는 세상에 그 말도 안 되는 것에 말려드는 사람이 있겠냐 싶지만, 말려드는 사람이 많아요. 왜 많으냐 하면, 어차피 신은 누구를 위해 존재합니까? 나를 위해 존재하는 거예요. 내가 내 행복을 위해서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부처도 믿어보고 해서, 어느 쪽의 영빨이 세냐에 따라 슈퍼에서 물건 고르듯 선택하겠다는 겁니다.
이성은 뭐냐? 딱 그겁니다. 이성은 '일신(一神)'이에요. 신이 하나예요. 다신에서 일신으로 바뀌면서 드디어 이성적인 신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신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성질 급하면 안 돼요. 질투하면 안 돼요. 미워하면 안 돼요. 점잖아야 돼요. 점잖게 만들어 놓고 위로 올려버립니다.
"신이시여. 거기서 정기적인 제사나 받으시고, 쓸데없이 간섭하지 마세요. 우리가 알아서 잘 모실 테니까." 요새 말로 하면 치매 걸린 시아버지 안방에 모셔놓고 "아버지는 딴소리하지 말고 용돈이나 주시고, 추석 때 절이나 받으시고, 우리 자식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 잘 모실 테니까" 하며 뒷방 어른으로 모셔놓고, 정기적으로 제사 드리면 신은 우리의 제사와 재물을 받으시고 흐뭇해하시며 복을 주시는, 그냥 "네 하나님 뜻대로, 매사에 네 희망대로 살아라" 하고 그렇게 해주는 쪽으로 –일신- 신이 하나가 된 겁니다. 그러면 제가 방금 말한 일신은 간섭합니까, 간섭하지 않습니까? 절대로 세상에 간섭하지 않아요. 간섭하지 않는다면 복은 어디서 받느냐? 로고스(Logos)가 대타로 와요. 신은 회장님이고, 월급 받는 사장(CEO)은 로고스가 하는 거예요. 로고스가. 아, 이 아이디어 멋지지 않습니까?
세상에 있는 모든 변화에 대해, 저 점잖은 분은 점잖게 계시라고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면요, 사람이 요동칠 때 신마다 일일이 다 해주려고 하니까 귀찮다는 거죠. 그러니까 사람이 심성이 나쁜 짓을 해도 언젠가는 나도 좀 인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포부가 있잖아요. 그 포부를 미리 앞당겨서 점잖은 신으로 대체해 두는 거예요. 아까 크세노파네스라는 사람이 뭐라고 했습니까? 말이 신을 그린다면 말의 모습일 것이고, 원숭이라면 원숭이의 모습일 것이라고 했죠. 신이라는 것은 인간이 되고 싶은 최종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거든요. 내가 점잖고 싶다, 지금은 촐싹거리지만 어쨌든 좀 점잖아야 나답다 싶으면 점잖은 분을 모셔놓고 그걸 본받으면 되는 거예요.
그 관계를 두고 플라톤은 '신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서서히 기독교에 가까워지니까 기독교 용어들이 막 나오죠? '신의 형상'이란 뭐냐 하면, 신과 인간 사이에는 같은 공통점이 있다는 겁니다. 이런 걸 신학교에서는 '공유적 속성'이라고 해요.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개혁주의 신학은 무얼 두고 하냐면은,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루터교, 영국 국교회 같은 것들이 있죠.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에 나왔던, 천주교에서 갈라진 새로운 교파를 개신교라고 합니다. 거기서 나온 신학이 개혁주의 신학인데, 개혁주의 신학은 루터가 한 게 아니고 스위스의 칼빈이라는 사람이 외쳤어요. 루터는 개혁주의 신학을 외친 게 아니라, 그 사람은 십자가 복음을 이야기한 겁니다. 십자가 복음의 특징은 무엇이냐? 모든 사람은 속에 성령이 있기 때문에 성령이 있는 것을 성령이 아닌 자가 관여할 수 없다는 겁니다.
신약 요한일서 2장 27절에 나오거든요.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라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디모데전서를 보면 가르치는 은사가 나와요. 가르치는 은사가 있으니 가르쳐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요한일서에 보면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하니, 이게 가르침을 받으라는 말인지 받지 말라는 말인지 신학자들이 그걸 정리를 해줘야 하는 거예요. 일반 교인들이 그걸 보고 헷갈리니까요. 대표적인 것이 야고보서에 나오잖아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라고 해놓고, 로마서 4장에서는 의롭게 되는 것이 행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니까 헷갈리는 겁니다. "처음에는 믿음으로 시작해서 그다음부터는 다시 믿음 찾지 말고 행함으로 나가자"라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는데, 그 아이디어가 칼빈의 개혁주의 이론입니다.
근데 그것은 불교로 치면 무엇이냐 하면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같은 거예요. 죽은 유명한 성철 스님이 주장한 것은 돈오돈수예요. 돈오돈수가 뭐냐 하면 깨닫는 것도 순간이고 부처가 되는 것도 순간이라는 겁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이야기죠. 그런데 돈오점수는 무엇이냐 하면, 처음에 불교에 입문할 때 깨달음을 얻는 것은 기독교로 말하면 성령의 영으로 믿는 것이고, 그다음부터 부처가 되는 것은 점차 점차 수양을 해야 성불에 가깝다는 이론을 내세운 겁니다. 성철 이런 사람들은, 이 사람은 조계종이에요. 조계종의 바탕에는 참선이 있어요. 유식 불교라는 게 있는데, 유식하다는 뜻이 아니고 '식(識)'을 논하는 불교입니다. 그쪽을 보면 참선이 중심이에요. 벽에 점 찍어놓고 그걸 보면서 깨닫는 거죠. 못 깨달으면 장군죽비로 때리면서 "깨달았느냐?" 하고, "예, 깨달았습니다" 하는 겁니다. 깨달음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 불교 교리에 되어 있어요.
그래서 스토아 철학이나 에피쿠로스 철학을 보면 이런 불교적 요소가 많이 섞여 있습니다. 불교는 근본적으로 무엇이냐 하면, 인간의 모든 불행은 고통에서 온다, 따라서 행복해지려면 고통을 없애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고통이 그냥 없어집니까? 배고파서 먹고 싶고, 먹고 나면 더 맛있는 걸 먹고 싶잖아요. 그러니까 차라리 고통을 느끼는 그 마음을 없애면 되겠죠. 그런데 마음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나의 '자아'에서 나오거든요. 자아에서 마음이 나오고, 마음이 불만족스러우니까 그게 고통으로 느껴지니, 고통으로 느껴지니 불행하니까. 원초적으로 뭘 잘라내면 되겠어요? 자아를 제거하면 되는 거예요. 그게 무슨 사상이냐 하면 바로 '무아(無我) 사상'입니다. 그런데 무아 사상이 되니까 힌두교 사상하고 또 충돌하네요. 초기 불교하고요. 초기 불교는 윤회설입니다. 돌고 도는 거예요. 교재의 디오니소스에 보면 나와있는데요. 모든 동물은 우리 인간과 형제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죽고 나면 내 혼이 쥐에 들어갈지, 소에 들어갈지 모르니까요. 불교사상이 나오던 시대에 옛날 철학에도 이미 이런 윤회 사상이 나와요.
윤회가 되려면 윤회의 주체, 주인공이 있어야겠죠. 주인공이 누구겠습니까? 남입니까? 누굽니까? 바로 '나'죠. 그런데 유식불교에서는 뭐를 없애야 한다? 나를 없애야 한다. 이게 불교 내에서 문제가 되고 말았어요. 윤회는 윤회를 거쳐 해탈해야 하는데, 결국 해탈한다는 말은 누구 좋으라고 하는 이야기입니까? 결국 착한 일을 해도 그 복이 나에게 돌아오는 거예요. 불교 신자들이 열심히 절에 가는 이유가 다른 게 아니에요. 보시하고 시주하는 이유가 딴 게 아닙니다. 내가 이름 모르게 하게 돼도 그 복이 내 대에 오든지, 아니면 내 자손에게 업보로 쌓여서 출세하고 돈 잘 버는 성공한 사람이 된다는 일종의 보험을 들어놓는 식으로 착한 일을 하는 거예요. 70세까지 보험 갱신된다 안된다는.
종교는 보험이에요. 천주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주교에서도 내 남편이 비록 성당에 안 다니더라도, 나부터 잘해 놓으면 내가 구원받는 그 이상의 공덕을 쌓으면, 그 선이 하늘나라의 성자들 장부에 기록되어 있다가, 나중에 남편이 성당 안 다니고 죽었을 때 성당에 미사를 넣어요. 미사 넣는다는 말이 쉬운 말로 돈을 넣는다는 겁니다. 돈을 내고 미사를 드리면 신부가 죽은 사람을 위하여 기도를 해주는데, 고린도전서 15장에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를 받는다는 구절이 있거든요.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죽은 자를 위해서 하는 의식이 있다 이렇게 나오거든요. 나와요 성경에 보면. 그걸 근거로 빽을 세우는 거예요. 후손이 빽을 세우는 거예요. 그 죽은 남편이 막상 죽고 보니까 "아~ 이거 완전히 대전하고 서울하고 다르네" 죽어보니까 이게 만만치 않거든요. 이미 자기는 끝났지요. 그런데 패자부활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뭐냐 하면은, 저쪽에서 후손이 빽을 세워주면, 연옥에 있다가 빨리 연옥의 고통으로부터 빼내는 것은, 사식(보석금)을 얼마나 넣느냐에 따라 달린 거죠. 그 보석금은 바로, 얼마나 착했느냐. 그걸 관장하는 분이 바로 성모 마리아입니다. 그래서 천주교 신자들이 성당 들어가기 전에 초를 막 꽂고, 절에 있는 불자들이 불상 앞에서 절하는 거나 다 이게 뭐냐 하면은, 다 '고객 만족'이에요. 교리고 뭐고 다 귀찮고, 내 속에 있는 "지성이면 감천이다", "정성만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한다"는 심리죠. 그러니 그 고객 숫자가 줄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유지되려면 그 수법을 수입할 수밖에 없어요.
교묘하게 들여온 대표적인 게 '중보기도'입니다. 중보기도. 내가 중보자처럼 돼버리는 거예요. 그냥 기도는 시시하고, 특정 대상을 딱 지목해서 기도해야 특별 기도가 된다는 겁니다. 이거 무서운 오류예요. 기도로도 모자라겠다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기도 끝에 무엇을 붙입니까?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의미를 잘 몰라서 그래요. 주의 이름을 알려면 구약부터 다 알아야 합니다. 주의 이름이 무슨 이름인지. 인간의 이름과 전쟁하는 이름이 주의 이름인데, 그냥 주문처럼 예수 이름만 붙이면 그 응답이, 다 결재가 나는 줄 알고 있어요. 이런 중보기도가 들어온 지 벌써 20년이 되었으니까 파급되었죠. 또 이런 게 있어요. '일천번제'라는 것도 있어요. 가계의 저주를 끊어낸다는 건데, 완전히 천도재와 똑같은 겁니다. 성경의 일천번제는 솔로몬이 한꺼번에 천 마리 희생제물을 잡은 거예요. 이게 열왕기상 3장이나 역대하 1장에 나오거든요. 그런데 그걸 매일 천 번 동안 돈 천 원씩 내며 드리라고 하니, 도대체 복리로 계산하면 얼마입니까? 교회가 사업이 되고 말았습니다.
로고스라는 것. 우리가 강의 마치고 딱 하나 남는 게 있다면 '로고스'입니다. 하나님은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너무 무서워서 가까이하기에 곤란해요. 그런데 친근한 분이 계셔요. 그분이 바로 로고스예요. 로고스라는 아이디어는 기독교에서 나온 게 아니라 그게 바로 헬라 철학에서 나온 겁니다. 로고스가.. 신은 점잖게 계시고 로고스는 분주하게 움직이고, 분주한 분이 일일이 찾아가서, "뭘 도와줄고, 뭘 원하지, 어떤 희망을 가지고 있지? 내가 희망 들어줄게"라고 원할 때. 이 로고스가 교회로 들어오면서 교회가 기독교가 되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었고, 그렇게 생긴 교리가 바로 '삼위일체'입니다. 개신교든 천주교든 삼위일체를 건드리면 다 이단이 됩니다. 추석 마치고 삼위일체에 대해 시작합니다. 삼위일체의 뿌리를 볼 겁니다. 뿌리를 뽑는 게 아니고 보는 거예요. 말 잘못하면 큰일 나죠. 도대체 삼위일체가 어느 사상에서 그것이 나왔는가를 살펴볼 겁니다. 성경에는 없는 단어거든요. 우리가 아는 기독교인의 상식은 뭐냐? 성경 말씀이 기준(Kanon)인데, 어떻게 성경말씀이 이게 기준이 아니고, 어떻게 되어가지고 삼위일체가 이단과 정통을 가르는 기준이 되어 버렸는가? 도대체 사람들이 무슨 짓을 했느냐, 그 무슨 짓에 대해서 그것을 살펴볼 거예요. 왜? 주제가 뭐냐? 바로 80인의 신학자니까요. 거기에 관여했던 신학자.
추석 연휴가 지루할 수 있으니, 연대를 미리 짚어보면 이렇습니다. 325년, 381년, 431년, 451년. 네 가지의 회의로 끝나버립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지금의 터키 이스탄불 근처),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431년 에베소 공의회, 451년 칼케돈 공의회. 전부 터키 지방인데, 옛날에는 이 터키 동네 기독교가 아주 융성했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출발이, 사도행전 1장에 나오듯 예루살렘에서 출발해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퍼져나갔기 때문이죠. 출발점이 어디죠? 예루살렘이죠. 예루살렘으로부터 퍼지기 때문에. 항상 옛날 사람들도 항상 원형은, "언젠가 예루살렘에 한 번 가봐야지" 하는 고향을 찾듯이, "적어도 기독교인은 예루살렘에 가야 해" 같은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생각은 달랐어요. 역사로 보면 예루살렘이지만, 묵시의 성질은 나에게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게 되면 그게 성지예요. 그 현장이 바로 성지라는 겁니다. 비행기 타고 멀리까지 갈 필요가 없어요.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는 그 현장이 바로 성전이고 그게 바로 성지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역사를 생각하게 되면 예루살렘이 되겠죠. 지금 예루살렘 구도심은 4개 구역(유대인, 이슬람, 아르메니아인, 기독교인)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제가 등기등본 떼어보라 했지요? 역사가 바뀔 때마다 소유권을 주장하다 보니 피자 조각처럼 나눠준 거예요.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보면, 이슬람 사람들이 기독교 구역에서 십자가를 만들어 팔아요. 이슬람 사람들이. 장사가 되니까요. 지금은 그냥 시장통이라고 보면 됩니다. 의미 없습니다, 안 가봤지만 다큐멘터리 보면 나와요.
여러분들, 제가 아까 말했잖아요. 신학은 아까 어디서 생겼다고 했습니까? 무엇과 다투면서 생겼다고 하지요? '영지주의'입니다. 영지주의를 기억하기 어려우면, 영지버섯 생각하시면 됩니다. 영지주의 때문에 나왔다고 했지요. 영지주의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예수님은 하나의 천사에 불과하고, 구약의 하나님은 진짜 못된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착한 하나님이다. 이렇게 한 거예요. 구약은 너무 화만 내고, 구약 시편을 보면 "저들이 저주를 받게 하소서, 자녀들은 고아가 되게 하시고 집안은 과부가 되게 하소서" 같은 시가 거룩한 성령에 의해서 쓰였거든요. 이게 무슨 사랑의 신입니까 하고 선입관이 깨져버려요. "아 구약 신은 별로 좋은 신이 아니구나, 역시 우리가 믿을 신은, 구약은 빼놓고 신약으로 사랑사랑사랑 사랑의 신을 믿어야지". 이렇게 되니까 신학자들이 보기에는 뭐가 연결이 안 됩니까? 구약 흐름과 신약 흐름이 연결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그걸 연결시키려고 하니까. 또 납득이 되어야 하네. "아 같은 분입니다" "같은 분이 왜 여기서는 이 소리 하고 저기서는 저 소리 해요. 그게 더 납득이 안 되는데" 그래서 유스티노스, 이레니우스, 테르툴리아누스 같은 로마 쪽 교부들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같은 학자들이 영지주의에 맞서면서 신학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그 신학 체계가 뭐냐? 간단합니다. 정말 간단합니다.
교회 법 만들자. 교회 법을 만드는 거였습니다. 교회 법을 만들면 교회는 들어오기 전엔 개방적이지만, 일단 들어오면 폐쇄적인 단체가 됩니다. 법을 만들면, 법의 집행자가 있어야 하고 그 집행을 받는 사람이 생겨야죠? 그러면 교회 내에 뭐가 생기죠? 계급이 생기죠. 계급에서 제일 높은 사람을 '주교'라고 합니다. 그게 그당시에 키프리아누스나 테르툴리아누스 같은 신학자들이 전부 다 이걸 주장했어요.
"교회 말 안 들으면 조져버려라."
"근거를 대라" 하면
"누구든지 자기 죄를 모르면서 성만찬에 참석한 사람은 하나님이 개입해서 죽이든지 병들든지 그렇게 만든다".
그래서 교회가 독점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성만찬'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나누는 의식을 독점해 버렸어요. 나중에
"주교님"
"왜?"
"저 천국 갑니까 아니면 지옥 갑니까?".
거기에 대한 답변은 간단해요.
성만찬에 참석해서 떡과 포도주를 먹고 집에 가서 아무 일이 없으면, 당신은 제대로 성만찬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자이기 때문에 오늘 밤에 죽어도 천국 가고. 만약에 성만찬 먹고 난 뒤에 갑자기 속이 슬슬 아프다든지, 집안에 우환이 생기면,
"아! 내가 죄를 분별하지 못하고 거룩한 하나님이 계시다는, 내 살이고 내 피라는 그 몸을 먹었기 때문에"
그때는 다음에는 잘하면 돼요. 한번 벌 받았으니까 정신 바짝 차려가지고, 성만찬 한다 싶으면 주의를 돌아봐야 돼요.
"가만있어 보자. 내가 누구한테 돈 빌리고 안 갚은 게 있나"
하고 정신 차려가지고 먹어보는 거예요. 먹어보고 한 일주일 내에 아무 일 없으면
"됐어! 나는 구원받았어!"
얼마나 간편합니까? 여자들 임신했을 때, 배 가를 필요 없잖아요. 오줌 받아서 선 두 개 나오면 임신했지요? 잘 모르지만, 드라마에서 보니까 그렇다 해요. 맞지요?
성만찬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러니까 성만찬은 누가 주도하느냐? 일반인은 안 돼요. 누가 하느냐? 이걸 주교(목사, 신부)가 해야 돼요. 그러면 세상의 임금은 칼을 쥐고 있지만, 신부는 뭘 쥐고 있습니까? 칼보다 더 센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쥐고 있는 겁니다. 이 주도권 싸움이 중세 유럽 역사 내내, 교황이냐 아니면 군주냐 그 싸움이 중세 교회와 유럽 역사를 이끌어갑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도 그래서 당한 겁니다. "어디서 지구가 돈다니 지옥 가려고 환장했어?" 이러면 "깨갱 제가 잘못됐습니다. 다시는 그런 소리 안 하겠습니다" 하고 나가면서 하는 소리가 "그래도 지구가 도는데 도는 거 맞는데..." 하면서도 권력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던 거죠. 사람들이 정말 약해요. 본인이 정말 성령 받았으면, 지구 돈다고 누구 앞에서도 이야기해야 될 것 아닙니까? 누가 너희를 가르칠 필요 없고, 네 속에서 성령이 친히 너를 가르치면 담대하게 진리대로 해야지. 성만찬 거기에 기죽어서. 그것 인간들이 만든 건데요. 천주교는 세 가지 한다고 했지요? 성체성사, 세례성사, 견진성사 등을 강조합니다. 견진성사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아까 돈오돈수처럼, 한 번 성령 받았다고 해서 성령이 계속 있는 것이 아니고, 계속 충만하기 위해서는 수시로 교회의 지도와 훈육을 받아서 성령이 계속 흐르고 흐르도록 계속해서 신부로부터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견진. 계속 견인해서 이어져 나간다는 성사. 거룩한 하나님의 일로 보는 거예요.
이 하나님의 일에는 누가 관여합니까? 하나님의 일에는 하나님이 직접 관여한다는 거예요. 아 이거 무서운 미신입니다. 이 지상에서 어떤 행동을 할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쉬고 있다가 "어! 나보고 오라는 이야기구나! 가야지!" 이렇게 합류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천주교의 성만찬 성체성사입니다. 제가 신부입니다. 만약에 신부가 빵을 입에 넣어줄 때,
"하나님 지금 우리가 하는 것 보이시지요? 이것 먹을 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야 됩니다. 타이밍 잘 맞아야 돼요 하나님!"
그리고 신부가 향을 들고 하는 것은 구약의 제사장 모습이거든요. 그게 왜 있느냐 하면은, 옛날에는 민중들이 글을 몰랐기 때문에, 바실리카 양식의 성당 벽면에 모자이크나 그림으로 성경 내용을 묘사했습니다. 성베드로 성당에 가면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의 작품들도 성경 내용을 주입하고 가르치기 위한 거였어요. 그걸 가르치는 겁니다.
그 중심 역할을 누가 하느냐? 신부가 한 겁니다. 신부도 주교급 있고 하잖아요. 그것은 뭐냐 하면은, 그 시대의 사회의 각 계급이 제자리를 지켜야 나라에 질서가 잡힌다는 식이죠. 농부는 농부 일을 하고 신부는 신부 일을 할 때, 그 자체가 천년왕국이 되는 겁니다. 역사가 필요 없어요. 그 자체가 이미 완전한 천국이니까. 영화 <설국열차>라는 영화에 나오지요. "나라가 유지되려면 니 자리에 가만히 있어" "앞칸은 앞칸으로서의 자리가 있고, 뒷칸은 뒷칸으로서의 자리가 있고". 이건 플라톤의 <국가론>에 나오는 이론입니다. 네 개의 계급이 있는 거예요. 이 계급을 통해서 여기 있는 영지주의자들을 심사하고 종교재판을 벌써부터 시작한 겁니다.
"신부님, 제가 구원받겠습니까?"
"너 전에 영지주의에 갔잖아."
"갔습니다."
"이리 와. 이제는 정식으로 예배당이 있고, 교회의 법이 있으니까, 이 교회 법을 지키면 구원받아요."
하면 그 사람이 의심해 가지고,
"교회 법을 지키면 구원받는다니요. 그것을 하나님이 인정했습니까?"
"인정했습니다."
"왜 그런데요?"
"왜냐하면 우리 로마의 주교는 베드로예요. 베드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베드로와 연결되면 왜 구원받지요?"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베드로보고 하는 말이 '네가 나중에 교회의 반석이 되리라'."
그래서 첫 번째 교황이 베드로입니다.
선녀와 나무꾼 있잖아요. 두레박이 내려와야 올라갈 수 있잖아요. 첫 번째 두레박이 뭐냐 하면 로마교회예요. 이렇게 체계를 잡으니까 교회가 알렉산드리아, 안티옥, 콘스탄티노플, 로마 등에 있었지만, 결국 로마 교회가 최고 권위를 가지며 주교가 '교황'이 된 겁니다. 그렇게 해서 유리한 점은 뭐냐? 교회 오는 사람으로 하여금 최종적인 질서체계가 잡히죠. 하나니까. 일자(一者)니까. 1이니까. 중구난방이 아니고, 이리가면 이 소리 저리가면 저 소리 하면 안 되니까, "아 전부 다 스톱, 스톱, 조용해. 내가 진리야"라고 하게 되면 정서적으로 사람이 안정이 돼요. 안정이. 그래서 이런 제도를 취하는 재단이 감리교예요. 감리교도 처음에는 감독이 없었어요. 감리교도 처음에 웨슬리가 부흥운동을 할 때는 감독이 없었지만, 조직이 중구난방이 되면 안 되니까, 이탈자가 생기면 안 되니까, 대장을 하나 만들어서 감독제도로 해서, 감독 위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거예요. 영국의 국교회도 마찬가지고, 루터교도 약간 그런 제도를 취하고 있고요.
그래서 종교개혁 주간이 되면 장로교 신학 교수들이 "위아래를 좀 뒤집어라. 평신도가 위에 있고 목사는 아래에서 섬기는 머슴이다"라고 통곡하듯이 외칩니다. 매년 10월 말이 되면 그렇게 개혁을 외치는데, "개혁주의는 그게 아닌데, 왜 이게 삼각형이 돼 버렸느냐. 좀 뒤집어라"라고 할 때, 그 신학 교수 말이 맞습니까? 그 신학 교수들의 말은 성경에서 나왔다기보다는 근대 주체사상에서 나온 거예요. 민주주의의 평등 사상이나, 자유. 인간의 가치는 하늘이 준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라는, 존 로크의 천부인권설에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제도가 바뀐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온갖 제도를 다 시도해 봐도 인간을 제로로 구원하는 제도는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거듭나야 구원받는 것이지, 육으로 난 것은 다 육이에요. 그러니 교회 조직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 마세요. 그냥 시장통이고 사람들 모였다고 보시면 돼요. 성만찬, 세례식, 그거 한다고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하지만 목사의 권위는 이런 법과 행사를 만듦으로써 생겨났고, 거기서 권력이 나왔습니다. 그 권력에 맞서—나도 권력을!—노리고 325년에 '아리우스'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지금은 이단으로 간주된 사람인데요. 아리우스는 당대 인기가 최고였습니다. 뭔가 재미가 나려면, 적과 동지가 구분되어야 재미가 나요. 기억에 오래 남거든요.
이에 맞선 사람이 '아타나시우스'입니다. 이 사람은 학력도 높지 않고, 세력이 약한 소수파였고, 아리우스파가 대세였습니다. 아리우스의 이야기를 잠시 하면, 아리우스의 생각은 이랬어요. "성경에 예수를 '맏아들'이라고 했지 않느냐. 맏아들이라면 아버지와 엄연히 순서와 등급이 달라야 한다. 왜냐하면 맏아들이니까. 물론 아들 가운데서는 최고지만, 아버지하고는 엄연히 다르다. 순서 정하자, 순서. 수직적으로 아버지가 위에 있고 그 밑에 아들이 있다. 이렇게 정하자."
거기에 대해 아타나시우스는 "성부, 성자, 성령을 수직이 아니라 동등하게 나란히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것이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문이 되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다 같이 영광을 받으실 분이라는 거죠. 한쪽에 치우치고 한쪽을 낮추는 그런 것은 없다. 아리우스는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낳기 전에는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는 뜻이다. 무엇을 낳아야 존재하지 낳기 전에는 없지 않느냐. 따라서 예수님은 없을 때도 있었다"라고 말을 함으로써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부, 성자, 성령은 영원부터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없을 때가 있었다니 그게 무슨 망발이냐. 그것은 마귀가 입에 심어줘서 그런 소리 했다"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렇다면 지금의 교회는 어떠하냐? 지금 교회는 삼위일체 교리의 교리적 형성 과정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만두속(삼위일체 교리)에 만두피(교단과 형식)만 입혀서 사용하는 식이죠. 이미 속은 누가 만들어놨어요? 옛날에 이미 삼위일체로 칼케돈에서 완성이 되었거든요. 뭐만 입히면 됩니까? 만두피만 입히면 되는 거예요. 만두피가 뭐냐에 따라서 우리 교단이 뭐다 하는 것이지, 안에 있는 속은 동의한다는 겁니다. 이미 다 동의하는 것을 왜 관심 두죠? 교인들에게 가르치기만 하면 되는데요. 우리 강좌에서는 그 '만두속'을 한번 파헤쳐 보자는 겁니다. 파헤쳐 보면 정말 아찔합니다. 속을 파보면 이게 뭉쳐 있지 않아요. 각 생각들이 모두 다 담겨 있는 겁니다. 담겨 있으니까 하나가 되지 못해서 언어가 일관성이 없어요. 일관성이 없을 때는 표현을 부정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뭐는 아니고, 뭐는 아니고"라고 하지, "뭐다"라고 말은 못 하고.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라든지, 삼위이면서 본체는 하나라는 표현은 인간의 이성적인 언어로 완벽하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냥 만두속이 그렇대요. 만두속을 한번 파보자는 이야기예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삼위일체를 믿는다고 구원받느냐 하는 거예요. 삼위일체는 거부하거나 수용할 대상이 안 돼요. 언어로 뭉쳐지지 않았기 때문에. 언어로 연결이 안 돼요. 그걸 믿는다 안 믿는다는 말이 안 된다니까요. 예를 들면,
"달리는 기관차가 맛있다. 이것을 믿나 안 믿나?"
"기관차가 왜 맛있어요? 기관차는 빠르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달리는 기차는 참 맛있어. 믿어라! 믿나 안 믿나?"
"말 같은 소리를 해야 믿고 안 믿고 하지."
말이 정립이 안 됐는데 그걸 믿고 안 믿고가 의미가 없잖아요. 삼위일체라는 것은 의미가 없는 거예요. 성경에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받게 되어 있습니다. 삼위일체가 아니라니까요.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지, 삼위일체와 관련되어 있지 않아요. 역사라는 것이 사람을 아주 바보로 만들어 버려요.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고, 그래서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게 되면 오늘 밤에 죽어도 천국 갑니다. 이게 성경의 복음이에요.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리신 공로로 가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된 거지, 왜 이리 슬그머니 삼위일체가 끼어들어 가지고 말도 안 되는 것을 외우라 합니까? 아타나시우스 외우는 거 보면 복잡해요. 사도신경 외우면 구원받습니까?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안 믿는 남편한테 사도신경 백 번 외우게 해서, 치매 걸린 남편이 다 외우게 되면 구원받습니까? 권총 들고 믿으라 하면 그게 믿음입니까? 손들고 나오면 그게 믿는 거예요? 손들고 나올 땐 믿었는데, 나중에 가서 "그때는 내가 술 먹고 술주정했습니다" 하면 끝나는 문제고. 나중에 아무리 예수 믿어도 치매 걸려서
"할머니 예수님이 누구시지요?" 하면,
"몰라!"
이럴 땐 어떻게 하려고요.
"자 목사님 오셨는데 마지막 고백입니다. 이 순간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시고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몰라몰라."
찬송가 불러도 "몰라", 사도신경 외워도 "몰라".
그 사람 지옥 가겠습니까? 천국 가겠습니까?
이미 교회가 그런 문제를 야기시켜 놓았어요. 신학 자체가 문제가 되는데, 아리우스가 그런 주장을 하게 된 배경에는 그 이전의 노에투스, 사벨리우스, 프락세아스 같은 사람들의 주장이 있었습니다. 들어보면 다 일리가 있어요. 그들은 "구약의 하나님이 한 분이신데, 어떻게 신이 둘(성부와 성자)이 될 수 있느냐"라는 의문을 제기했던 것이죠. "내가 알기로는 구약 성경의 하나님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어요. 그렇지요? 그러면 신은 두 분입니까, 한 분입니까? 신은 한 분이잖아요. 한 분인데 어떻게 해서 신이 하나가 된 건데, 왜 둘이 나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뒤에 숨어 있었다. 숨어 있다가 짠 하고 나타났다"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문제가 되느냐 하면은, 구약 사람들은 결국에는 숨어 있는 것을 몰랐으니까, 구약 사람들은 전부 다 지옥 가게 되었어요. 그런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소리 듣고 고민에 빠지는 거예요. 그래서 기껏 하는 게 결론은 뭐냐 하면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교회 법을 믿지 않는 것은,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베드로를 교황으로 삼았는데, 베드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교회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법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성만찬에 참석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유가 어떻든 교회에서 인정받아야 한다.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아무리 해도 지옥 갈 수밖에 없다. 왜? 이게 하나님의 법이다"라고 말해요.
그래서 아까 유명한 신학자들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교회 법입니다. "군대도 계급이 있듯이, 교회도 계급이 있다"고 키프리아누스라는 사람이 이야기했어요. 이 말은, 쫄다구 들어오면 나이고 직업이고 형제고 다 무시하고, 누구 말을 들어라? '선임자'. 병장의 말을 들어야지요, 쫄다구가. 그 식대로 교회를 꾸려나가겠다 했는데, 성공했어요, 성공 안 했어요? 대히트를 쳤습니다. 그때부터 콘스탄티누스가 교회의 수장이 되면서, 교회 안 다니는 사람, 다시 말해 세례 안 받은 사람, 성만찬에 참석 못 하는 사람은 공무원 취직을 못 하게 되었어요. 교회가 권력 단체가 된 겁니다. 지금도 큰 교회 가는 이유가, 거기 가면 정수기도 많이 팔 수 있고, 보험도 잘되고, 거기 약국 약사가 큰 교회에 등록하게 되면 간접 광고가 돼요. 큰 교회에 가면 처녀 총각이 나와서 중매가 가능해요. 큰 교회는 친목 단체이고 일종의 두레 마을과 같아요. 상부상조하는. 결혼해도 부조가 많이 들어와. 개척교회는 부조도 안 들어오고요. 나한테 돈이 들어오고 돈이 되면 행복이 되고, 스데반 집사 같은 그런 생각 없어요. 나한테 행복 되면 신도 마음대로 이용하겠다는 거.
추석 잘 쉬시고, 다음 시간에 이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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