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호

시민대학강의4-2

아빠와 함께 2026. 8. 22. 09:49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 머리가 아프고 온몸이 다 아플 때, 이건 뭔가 서로 통합되는 체제가 있다는 거예요. 통합된 체제. 그리고 누가 나에게 어떤 소리를 말하는데, 그 소리가 사실상 따지고 보면 ㄱ,ㄴ,ㄷ 이런 소리 아닙니까? 소리인데 내가 아파요. 누가 욕을 하니까 기분 나빠서 자살해버려요. 누가 망치로 때리지도 않는데 자기가 알아서 약 먹고 죽었어요. 웃기죠. 어린애는 어린애한테 그런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정박아한테 그런 일 없지요? 정박아한테 욕한다고 정박아가 자살하고 이렇습니까? 그런데 예민한 사람한테는 그냥 멀찍이서 전화로만 했는데 스스로 화나가지고 죽어버렸어요. 아! 육은 육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육보다 상위 계층 차원이 있구나.

그걸 혼이라고 하고. 그 혼을 인간만 있는 것이 아니고 동물에게도 공유하고 있다고 본 겁니다. 이걸 그런데 의학에서는 이게 밑에 시상하부가 있어요. 시상하부. 두뇌를 분석해보면. 시상하부에 보면 파충류 부분이 있어요. 가장 동물적이고 가장 생리적인 것.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두뇌는 진화해서 나중에 크로마뇽인까지 진화하게 되면 대뇌피질 부분이 커지게 되면 여기는 추상적인 개념을 해서, 그 점에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이다. 그러니까 현대 신경분석, 정신분석에서는, 두뇌를 해부학적으로 세포의 활성화, 두뇌세포의 고유의 활성화를 따지거든요.

그런데 옛날에는 그렇게 분해, 해부가 없었기 때문에, 그걸 뭐라 하느냐면, 전체를 통합하는 이것을 가지고 이걸 혼이라고 한 겁니다. 혼. 영은 뭐냐 하면은, 혼과 육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게 가변적인 눈에 보이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걸 반응하는 거죠. 그런데 인간에게는 또 하나가 여기서 있는데, 모든 종족은 다 신을 믿습니다. 그런데 신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불가감계, 불가시적인 것. 또 불가감력과 관련돼서 인간이 하는 것. 이걸 가지고 영이라고 하는 겁니다. 설명됐죠?

그래서 신학에서는 뭐냐 하면 키케로라는 사람이 이렇게 얘기했어요. 인간은 세 종류가 있다. 육적인 인간이 있고, -이게 보에티우스가 나와요- 23편에 나오네요. 보에티우스. “자연적 존재와 지적 존재와 예지적 존재가 있다. 자연적 존재는 그냥 동물인지 아닌지 분간도 안 되는 것. 지적 존재는 동물보다 좀 나은 것. 예지적 존재라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신의 말씀과 신의 뜻까지 파악하는 사람.” 이렇게 구분해서 나아가자는 거예요.

청중: 그러니까 영은 신의 속성이네요?
강의자: 영은 신의 속성이라고들 이야기하죠. 왜? 그래야 종교 국가에서의 질서가 유지가 되기 때문에.
청중: 그게 철학적이라면, 그럼 신학에서, 우리 성경에서는 그게 어떻게 나옵니까?
강의자: 예. 신학적으로 말하는 것도 똑같아요. 왜냐하면 신학은 철학에서 나오니까 똑같은데요.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바로 ‘히브리 사상’입니다. 히브리 사상에서는 인간을 세 개로 분석하지 않아요. 히브리 사상에서는 이렇게 되거든요. 히브리 사상에서는 3으로 나눈 것이 아니고 육신과 그 다음에 영과 혼을 같이 사용합니다. 같이 사용하는데, 두 개가 결합해서 인간이 되는 게 아니에요. 히브리 사상에서는. 이게 나중에 철학자나 신학자들이 창세기 2장을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만드시고 거기다가 하나님의 입김을 불어넣은 –루아흐- 입김을 불어넣으니까 인간이 되었다고 해서. 인간적인 요소는 물질이고 그 다음에 영적인 신의 요소는 영혼이다. 이렇게 본 거예요.

심지어 이건 니체도 그렇게 이야기해요. 나중에 니체도 할 겁니다. 니체도 이렇게 이야기했거든요. 그런데 실제로는 그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놓고, 인간이 육신 더하기 영혼, 육신 영. 이렇게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육신의 차원에서 다루게 되면 이건 육신이 되고, 영적 차원으로 다루게 되면, 그 순간은 영이 되는 겁니다.

쉬운 예를 들면 어떤 회사 운영하는 사장님한테 공식센터에 전화해 가지고. “사장님 세금 탈세하시면 안 되지요”라고 전화했어요. 그건 뭡니까? 국세청에서 그 사람을 뭐라고 봅니까? 하나의 기업하는 세금을 내야 될 기업인으로 보는 거죠. 그러니까 그 사장님 말하기를 “아이고 누굽니까?” “네 조세 세원과입니다. 회장님 한번 만납시다”. 만나고 보니까 자기 학교 후배야! “아이고 형님! 아이고 선배님!” 그건 어떤 관계죠? 갑자기 세금 문제는 다 날아가 버리고 뭡니까? 같은 선후배 사이가 돼버리죠. 동일한 인간입니다만은. 이쪽에서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저쪽에서의 다루는 관계성이 다르죠. 이게 육과 혼과 영이에요.

시편에 보면 하나님을 찬양할 때는 ‘내 영혼으로 찬양한다’. 이렇게 하죠. 그리고 일반적인 세상에서는 “이 육신적인 인간은 구더기보다 못하다” 하잖아요. 그 이사야 같은 데서는요. “이 구더기 같은 야곱아!” 시편에 보면 우리는 짐승만도 못한 존재. 왜? 잠시 있다가 없어져야 될 그런 흙 같은 존재. 이런 걸 육신으로 다루는 겁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신약성경의 개념으로 오게 되면, 사도 바울은 전도하는 내용이 뭐냐 하면. 헬라 개념들이 있는 거예요. 헬라 개념들. 사도 바울이 전도를 할 때, 그 전도 개념 용어 자체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예수님도 그렇고 어떤 인간이 쓰는 언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사회적인 약속이기 때문에 약속이고 기호거든요. 그걸 사용할 때는 사람들이 그걸 “아 이런 뜻이구나”하고 붙잡는 그 자체가 오해를 할 수 있도록. 말씀에 접근한다는 것은 곧 심판에 접근하는 겁니다. “아! 이 말씀이 이런 뜻이야!” 하고 딱 잡으면 그 자체가 “걸려들었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네가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말씀을 준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믿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즉 그 말씀을 지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말씀을 준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보게 되면, “그래! 이런 뜻이야. 이젠 나는 믿었어. 나는 이제는 알았어! 실천에 옮길 거야!” 라고 붙들 때. 자기의 육신적인 본성이 비로소 걸려든 거예요. 디모데전서에 보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할 때. “그래! 이제부터는 내가 예수 믿는 성도기 때문에 돈을 사랑하지 않을 거야!” 할 때 그 사람은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10계명이 뭡니까? 10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 나오죠. 제5계명이에요. 부모를 공경하라. 부모를 공경하라 할 때. “그래. 이제부터는 공경해야지!” 할 때는 그것은 걸려든 거예요.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공경할 수 있다고 자기 자신을 그런 식으로 부각시킨 그게 문제가 된 거예요. 율법을 준 것은 죄를 더하게 하기 위해서, 말씀 요소는 죄를 더 많이 걸러내기 위한 용도지. 그걸 지켰습니다 하는 용도로 말씀을 준 게 아닌데 사람들은 교회 말씀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이 날로 성화되고 성숙되고 신의 형상을 더욱더 많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하고 싶어 해요. 관심이 자기 잘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청중: 우리나라 말로, 정신이라 할 때는, 그거는 뭔가요?
강의자: 영혼과는 관계없습니다. 정신세계의 반댓말은 뭐냐. 물질세계의 반댓말이 정신세계예요. 그래서 어떤 철학자는 나중에 나옵니다만 어떤 철학자는 말하기를 정신마저도 물질에 포함시켜야 된다. 에리게나라는 사람이 있어요. 이것도 나옵니다. 정신마저 물질로 생각해야 된다. 다시 말해서 뭐냐? 인간이 다룰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이런 인간이 다룰 수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이 말입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 이 이야기 해봅시다.

됐죠? 자유의지가 있는 것하고 의지가 있는 것하고 차이점이 뭘까요? 자유의지가 있는 것하고 인간의 의지가 있는 것하고 차이점이 뭡니까?

청중: 자유의지는 내가 정하는 거예요.

강의자: 그렇죠? 아~참. 이거 답변하는 사람 별로 없어요. 왜 그냥 의지라고 하면 되는데 앞에 자유라는 말을 왜 붙였을까? 이건 뭐냐 하면은, 쉬운 말로 떼쓰는 거예요. “나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꾸려 나가겠습니다”라는 고집이 있잖아요. 그 자유의지. “주님은 내가 잘했는지 못했는지 판정할 뿐이지 사전에 내 일에 개입하지 마세요. 사전에. 내가 잘했으면 잘했다. 못했으면, 다음에 잘해! 이렇게 하면 되지. 사전에 개입하지 마세요”라는 그런 뉘앙스가 굉장히 강해요. 자유의지가.

구약 민수기에 보면 안식일에 나무 한 사람 있죠? 안식일에 나무 한 사람 같으면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안식일에 나무를 했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앞으로는 그러지 마세요”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나무 한 사람을 공개적으로 돌로 쳐 죽여서, 두 번 다시 안식을 지키냐 마느냐 하는 기회마저 박탈시켜 버리죠. 무섭죠. 그런데 그걸 죽이는데 그 사람을 몰래 죽이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 일가친척들 속에 돌 던져서 죽게 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사사로운 정보다 우선되는 것은 말씀이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인간의 정으로 항상 유유상종이라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끼리 단결하게 되어 있다. 그것을 고려한 겁니다. 인간이 힘을 모으면 모을수록 점점 더 하나님의 말씀과는 이게 단절되게 되어 있죠.

그래서 아까 연속해서 어거스틴은 이 플로티노스의 원 하나. 아주 기억하기 쉽지요. 중심이 있고. 세상에는 중심이 있다는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죠. 이 세상 모든 것은 목적이 있다. 목적이 있고. 풀잎 하나 목적 없는 것이 없다. 상당히 믿음이 있어 보이죠. 이것은 나중에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라는 신학자에 의해서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꽃을 피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철학이라고 다 나쁜 게 아니고 얼마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면 철학도 필요하다는 그런 쪽으로 나가요. 철학도 필요하다. 나중에 철학도 필요한 게 아니에요. 철학만 필요하다. 나중에 점점 그렇게 하게 되고 그 철학을 단단하게 증명을 가지고 붙여 버리면. 그것이 바로 science. 과학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즘 세계는 뭐가 필요합니까? 과학만 필요해요. 과학만. 그래서 모든 학문은 뒤에다가 과학을 붙입니다. 인문과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뒤에 과학을 붙여요.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증명되고, 미리 되풀이될 경우에만 진리로 파악하겠다는. 반복되지 아니한 것은 진리에서 탈락시키겠다는 의도가 굉장히 강합니다. 그러면 이 과학적인 교인들이 왔을 때 목사는 설교할 때 뭐 해야 됩니까? 과학적으로 해야 되겠죠. 뭐냐 하면 과학을 한다는 것은 반복했을 때 동일한 효과가 나야 되겠죠. 반복의 동일한 효과는 중간에 들어가는 게 이게 뭐냐? 이걸 크게 쓰겠습니다. 이게 뭐냐? 간증집회죠. 모든 설교는 어느 날 간증이 되어 있어요. 요렇게 했더니 요렇게 되니까. 당신네들도 한번 해보세요. 믿음으로 해보시면 반드시 이런 효과가 납니다. 듣는 사람은 아주 간편해요. 간편하기 짝이 없어요. 이게 전부 다 우리 현재 인간들이 과학적 사고방식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끄집어내는 이유는 뭐냐 하면. 이게 어거스틴이 말하기를. “죄 때문에 그렇다. 죄.” 그래서 정신과 우리 영혼. 영혼이라는 우리 개체. 그리고 정신으로 할 때 꽉 차 있는데. 정신을 뭐로 보느냐면. 이걸 어거스틴은 ‘죄’로 보는 겁니다. 이 세상은 처음부터 모든 것이 인간은 이 세상은 죄로 차 있다. 죄로 차 있다. 이 설을 무슨 설이라 하나? 이걸 가지고 원죄설이라 하고, 이것은 테르툴리아누스가 먼저 언급을 한 거예요. 테르툴리아누스가. 지금 어거스틴도 옛날 책을 다 본다 안 본다. 다 보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옛날 책을 보는 이유는 내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는가를 검증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내가 이건 내가 이렇게 하고 싶은데 내가 독단적으로 하게 되면 이단 소리 안 듣지 않을까? 하고. 파파박 찾는 거예요. “그렇지! 내가 이야기하는 거 똑같이 있구나!”. 그러면 나는 내 표 한 표를 더 얻는 거죠. 내가 든든한 후원자를 내가 하나 얻는 겁니다. 후원자를 얻을 때. 그때 그게 뭐냐. 관주를 달면서 어디서 인용하는가를 거기다 집어넣음으로써 그 사람 말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고 내 말에 내가 동의하면서 핑계를 그 사람 핑계로 대는 거예요. 김미화 씨가 석사학위 때 그거 없어가지고 성균관대학교에서 석사학위 취소한다고 뭐 이런 소리 나오잖아요.

죄로 차 있다는 겁니다. 죄. 그런데 여기서 어거스틴은, 죄가 되려면 누가 시켜서 하면 안 되고 누가 선택해야 돼요? 본인이 결정해야 되잖아요. 본인이 결정하니까 그냥 의지가 있으면 안 되고 뭐 있습니까? ‘자유의지’가 있죠. 자, 원숭이하고 치타하고 인간을 비교해봅시다. 치타에게는 치타 눈에 저 먹이가 보입니다. 저 아프리카 초원에서. 그럴 때 치타가 막 달려가죠. 본능적으로. 본능적으로 그것도 뭐가 됩니까? 의지라 할 수 있죠. 개한테 먹이 줄 때 개가 먹다가 고개 돌리는 경우 있죠. 고개 돌리죠? 그때 그 개 뭐라고 합니까? 개 의지로 보잖아요. 그런데 개는 뭐가 없습니까? 뭐가 없어요? 자유의지요. 자기 인생을 자기가 선택한다는 거예요.

선택한다면, 이걸 할 거냐 저걸 할 거냐에 대한. 자유의지라고 하는 것은 선택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선택한 것에 대해서 본인이 자기 잘못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되겠죠. 선악과가 늑대나 코끼리 앞에 선악과가 있는 게 아니고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 앞에 선악과가 있다는 말은? “인간들아 네가 하는 행동에서 네가 책임을 져야 된다”는 거예요. ‘네가 하는 행동에 책임을 져야 된다는 것’을 가지고 법이라고 합니다. 법은 그냥 주는 건 법이 없어요. 반드시 벌칙이 따라줘야 법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법을 알려면 반드시 위반을 해야 돼요. 아! 이게 모순이죠. 위반하지 않는 법은 법이 아닙니다. 내가 위반했을 때 소급해서 법의 전체가 확 들어와요. 위반했을 때.

차 타고 가다가 시속 70입니다. 전혀 안 걸립니다. 80으로 가다가 걸려봐야, “아! 5만 원이 이렇게 아깝구나!” 할 때. 그 다음부터는 “쟤도 어겼는데!” 하고 다른 사람도 고발하고요. 인간 세계는요. 사는 것은 위반하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위반을 하지 않으면 진리에 접근이 안 됩니다. 그래서 엄마가 그냥 주는 떡은 먹기 싫어요. 그런데 엄마가 먹지 말라고 하면서 떡을 두게 되면, 걔는 기어이 무슨 떡이기에 먹지 말라고 했을까를 도저히 참을 길이 없어. 책상 놓고 올라가서 먹어봄으로 말미암아. 비록 엄마한테 나중에 매 한두 대 맞겠지만, 꾸중은 듣겠지만, “아! 떡이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그냥 먹으라 하면 맛이 없는데, 내가 법을 위반해서 먹기 때문에 맛있던 거예요.

그래서 잠언서에 보면 나옵니다. 성경 구약에. “몰래 먹는 사과가 맛이 있다” 이 맛이라고 하는 것은, 객관성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당도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주관이 결정한다. 이걸 철학이 뭐라고 말하느냐. 인간의 모든 육적인 것은 위에 있는 혼이 결정하고 혼은 그 위에 있는 영이 결정한다. 이렇게 해서 영혼설이 나왔고 개신교에서 이걸 2분설로 나온 겁니다. 2분설이나 3분설이나. 전혀! 이거는! 복음이 아니고 그것은 성경 뜻이 아니고,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자유의지가 있는데, 자유의지가 있어서 죄를 지었는데, 이 인간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은 원죄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원죄와 죄의 차이점이 뭘까요? 원죄라 하는 것은 내가 짓는 거지만. 오리지널 SIN(죄). 원초적 본능이라 하는. 원죄라 하는 것은 “내가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 말고 다른 분이 죄를 지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여기서 골치 아픈 일이 벌어졌어요. 어거스틴은 여기서 해답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뭐냐 하면 남이 지은 죄가 어떻게 내 죄가 될 수 있을까요? 같이 잠을 자도 꿈은 다 다르잖아요. 한 침대에 같이 부부가 자면서도 꿈은 다르듯이. 남이 지은 죄가 왜 내가 지은 죄가 됩니까? 우리는 거부하고 싶죠.

그런데 그걸 거부하면 무슨 문제가 생기냐 하면, 남이 행한 의로움이 나의 의로움이 될 수 있는, 그 메커니즘이 끊어져 버려요. 아담이 지은 죄가 내 죄가 되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의가 내 의가 될 수도 없습니다. 그 메커니즘이 연결고리가 형성이 안 돼요. 다리가 브릿지가 정리가 안 됩니다. 그래서 얻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해서 이유도 모르는 채 무조건 남의 죄가 내 죄 됐다고 그냥 수용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수용할 수 없으면서 그걸 모르면서, 모르니까 그걸 모르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뭐라고 하냐면. 그냥 뭐라고 하냐면 “그냥 믿습니다! 무조건 무조건이야~ 무조건 믿습니다!” 이러는 거예요. 참 반칙도 많아요. 반칙도. 이게 무슨 반칙이에요? “그냥 믿습니다” 하면 다 통과해버려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유전설이 있고 하나는 창조설이 있어요. 유전설이라 하는 것은 아버지가 지은 죄가 자식에게 그대로 전달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있어요. 도킨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DNA, 이기적 DNA, DNA 속에 죄가 어디 있습니까? DNA를 아무리 조사해보면 디옥시리보핵산으로 되어 있고 산소, 탄소, 질소 이런 분자 구조로 되어 있어요. 분자 구조로 되어 있고 거기에 염기가 딱 붙어 있어서 염기라는 게 또 있어요. 그런 구조가 있어서,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죄가 보이질 않습니다. 왜 안 보일까요? 죄가 뭔지 모르기 때문에. 죄가 뭔지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들여다봐도 죄가 안 보이는 거예요.

인간의 영혼이 어디 있는가 싶어서 인간의 두뇌를 해부를 해봤어요. 두뇌 해부 해보니까 거기에 영혼이 나옵니까? 영혼이 두뇌 속에 영혼이 있어요? 없어요? 지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냥 두뇌 세포의 연결고리예요. 섬세함. 촘촘함. 거기에 무슨 양심이 나오고 거기에 무슨 이성이 나오고 거기에 무슨 사랑이 나오고 미움이 어디서 나옵니까? 도파민, 세로토닌 하는 이런 물질, 신경전달물질만 나올 뿐이죠. 그래서 현대 의학자들은 화내고 이런 사람에게 세로토닌을 줘가지고 슬퍼하는 사람에게 도파민을 줘가지고 사랑도 주고 믿음, 소망, 사랑을. 화학물질을 만들어서 집어넣어 주면요. 고린도전서 13장 말씀 다 틀려요. 믿음, 소망, 사랑은 영원한 게 아니고, 병원에서 돈 주고 약물로 넣으면 돼요.

앞으로 그런 시대가 올 겁니다. “예수 믿어야 구원받아” 필요 없어요. 믿음이란 약들을 독감 예방주사 맞듯이 한번 맞아버리면, 1년 내내 유효한 믿음이 유지될 거예요. 교회 헌금 내고 십일조 필요 없습니다. 병원에서 주사 한번만 맞으면 되는데. 그래서 현재는 조사를 해요. 도대체 믿음 부분은 어디며, 소망 부분은 어디며, 사랑 부분은 어디냐? 거기에다 전기적 자극을 해주게 되면 이웃사랑도 절로 나타나도록, 활성화될 수 있도록. 그런 연구도 지금 바짝 많이 발달되어 있습니다. 종교를 대체한 의학이 발달합니다.

자, 죄가 결국은 어거스틴이 “죄는 유전되는 게 아니다”라고 본 겁니다. 아무래도 유전이라고 하니까 좀 곤란한 게 한둘이 아니에요. 그래서 “창조된다고 이야기하세요. 창조된다고” 어떻게 창조되느냐 하면, 물질은 엄마 아빠에게서 생기고 영혼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영혼 따로 모아놓은 창고가 있어요. 창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붕어빵 구울 때를 보면, 우선 주전자에다가 밀가루 뿌리죠. 그러면 앙꼬는 어디 나옵니까? 앙꼬는 다시 앙꼬 바가지가 있어요. 거기에다가 떠가지고 뒤에다 뿌리면 되는 거예요. 저 해봤어요. 느낌 아니까. 해본 느낌 알아요. 그래서 물질은 부모가 이렇게 동침해서 낳고 그 다음에 하자마자 영혼을 그때 배당을 해주는 거예요. “이거는 여기다가”. 어거스틴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17세기에 현미경 발명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정자 속에 인간이 들어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다음부터는 인간은 정자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정자와 난자라는 두 개의 상호 다른 물질에서 결합이 돼서 생명이 나온다는 것을 그래서 과학이 발달이 되어서 알게 된 겁니다. 지금은 그런 과학이 없을 때의 시대에 신의 세계에 대해서 자기에 대해서 보는 겁니다. 그렇게 해놓고, 창고. 아까 창고 이야기했죠? 영혼의 창고를 이야기해놓고, 그 영혼의 창고라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 위해서 여기서 합니다.

조명설을 이야기합니다. 어거스틴은 일단은 영혼은 창조설. 두 번째는 조명설. 세 번째가 제일 중요한데요. 이게 시간론입니다. 시간론. 첫째, 영혼 창조설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여튼 영혼을 왜 창조했는가? 영혼을 창조한 이유는 개인의 자유의지를 보장하고. 자유의지가 왜 있느냐? 인간이 책임져야 되고. 인간이 자기 행동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되거든요. CCTV 돌려봤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동을 다 주시해야, 심판을 할 때 제대로 심판해야 되지. 만약에 인간의 행동을 안 보아버리면 뭐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심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거예요. 시험도 안 치는데 100점 맞으면 말이 안 되잖아요. 시험을 우선 처음에 쳐야 80점이든 10점이든 나오듯이요. 그래서 자유의지가 있어줘야 비로소 우리는 뭐냐 하면 여기서 죄의식을 발견하고. 그다음 나는 잘못되었습니다. 나는 잘못되었습니다. 용서하소서. 회개합니다. 이 모든 것이 자유의지가 밑바탕 될 때 비로소 이게 연속적으로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조명설은 뭐냐 하면. 조명설이라는 겁니다. 이건 굉장히 어렵지만 간단하게 설명하면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조명발을 받아야 대상이 파악된다는 이야기예요. 조명발을 받아야. 왜냐하면 인간은 어거스틴은, 의심함으로써 진리에 접근하거든요. 의심함으로써. 인간을 의심한다 이 말이에요. 저게 구름이 구름이 아닐 수가 있다. 구름이 아닐 수가 있어. 구름이 아니고 내 꿈일 수도 있어. 장자라는 중국의 철학자가 했잖아요. 내가 꿈속에 나비 꿈을 꾸면 그게 내가 나비고 나비가 꿈을 꿔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내가 인간이라서 나비의 꿈을 꾸었는지 이걸 무슨 수로 알 수 있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꿈속에서 꿈에서 탈출한 꿈을 꿔본 적 있죠? 저는 꿈속에서 꿈을 탈출하는 꿈이 꿈이다 하는 꿈을 꾼 적이 있어요.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선배격이에요. “나는 의심한다 고로 나는 비로소 사물을 파악할 수 있는 밑바탕이 갖추어져 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소크라테스와 비슷하죠. 내가 안다고 생각하면 무지한 자가 되고 네 꼬라지를 알라고 하는 것은 내 자신이 무지한 걸 알면 비로소 뭐가 보입니까? 그동안 내가 안다고 우겼기 때문에 가려졌던 진리면들이 보이게 되는 겁니다. 거기에 무엇이냐면, 선이해 또는 선입관. 선이해는 가다머가 주장한 겁니다. 선이해를 지워버려요. 선이해. 선입관을 지워버리는 거예요. 그럼 understand, 영어로 understand. 내가 보는 것이 아니고, 네 밑에서 나를 볼 때 비로소 이해가 된다는 겁니다. 슐라이어마허의 이론이에요. 나중에 나옵니다.

의심하면서 진리를 안다는 거예요. 그러면 저 구름이 구름이라는 것은 뭐냐? 분명히 나는 의심밖에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나는 부족하기 때문에. 내가 구름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것은 누구 공로가 아니다? 나의 똑똑함은 아니다. 그러면 누가? 누가 저게 구름인 줄 알게 하시는가? 바로 저 구름에게 빛이 임하는데, 그 빛을 주신 분은 바로 프로티노스의 이론에 의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신으로부터 발출된, 유출된 거잖아요. 그러니까 저 구름을 구름이라고 볼 수 있도록 내가 비춰줬을 때 그 빛에 의해서 나는 비로소 구름이라고 파악한다는 겁니다. 그걸 조명설이라고 해요. 조명설.

여러분들 이 이야기 들으면 그거 뻔한 거 아니냐 하는데 이게 굉장히 어려운 게 있어요. 예를 들어서요. 제가 여기 들어왔는데 나중에 강의 끝나고 보니까 삼다수가 여기 있다는 걸 알았어요. 끝나고 보니까. 그럼 삼다수 저기 있고 내가 여기 있단 말이죠. 두 시간 동안 계속 있었는데, 내 머릿속에 삼다수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던 거예요. 와서 “목마르다” 목마르다 하는 순간, 나는 의심하죠. “아이고 목마르다”라고 의심해가지고. “어디 물 없나?” 하고 딱 보니까, “어! 저게 언제부터 저기 있었지?” 있죠. 그것을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믿음 좋죠. 얼마나 믿음 좋습니까? “아이고~ 바보같이 원래 저기 있었던 걸 모르고, 내가 바보야”. 이건 현대인들입니다.

“하나님이여 지갑을 잃어버렸습니다. 지갑 찾게 해주옵소서” 하고 있는데, 집에서 지갑을 찾는데 아무리 봐도 지갑이 없어. 그래서 기도를 했어요. 너무 답답해서. “하나님 지갑이 어디 있나요. 지갑에 카드하고 60만 원 들어있습니다. 있어야 됩니다. 내가 어디서 잊어버렸지?” 하고 있는데. 눈 떠보니까 바로 앞에 지갑이 있었던 거예요. 이게 색깔이 비슷해서. 비슷한 색깔을 못 알아본 거예요. 그럴 때 나타난 느낌은 뭡니까? “괜히 기도했어! 기도 안 해도 저기 있는 걸 가지고. 왜 이렇게 기도해 가지고, 오늘 기도하느라 다 허비해버렸네. 중요한 걸 기도해야 되는데, 내가 기도 안 해도 찾을 수 있는데, 일부러 또 하나님이 애먹여가지고 이렇게 찾게 되었으니까. 아~ 하나님 미안합니데이~ 앞으로 이런 사소한 것은 기도 안 할게요!” 또 이렇게 하게 되죠. 바로 코앞에 있는 것도 기도하니까 찾아지는 경우를 많은 사람, 많은 교회 가는 사람들은. 그 간증을 합니다.

그럴 때 진짜 기도해서 찾은 거예요? 기도해서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깨닫게 해서 했다는 그걸 가지고. 조명설이라고. 기도했기 때문에 찾았다는 걸 조명설이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또 기억나게 하셨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못 살아간다는 겁니다.

플라톤의 상기설이 있어요. 상기설. 상기설하고 좀 다릅니다. 상기설은 이미 우리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이고. 조명설은 그때그때 하나님께서 조명을 해줘야 되고. 상기설은 뭐냐 하면 정신 바짝 차리면 다시 스스로 힘을 깨닫게 되는 건 상기설이고. 조명설은 하나님이 알게 하지 않는 이상은 아무리 내 속에 있더라도 나는 모를 뻔했습니다 하는 게 조명설이고. 그런 차이점이에요. 다른 사람 보기에는 둘 다 똑같이 들리겠죠. 그래서 정 모르시면 같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세 번째 시간론. 이 시간론이 어거스틴이. “대빵, 역시 천재야!”라는 소리를 듣는 게 시간론 때문입니다. 뭐냐 하면, ‘시간은 없다’는 거예요. 시간은 없다는 겁니다. 만약에 미래가 먼저 있다면 미래가 여기에 있다면 미래가 저 현재에 파고들어 왔을 것이고. 그러면 인간은 이게 미래인지 현재 일인지 분간을 못 할 거니까. 미래는 있어도 우리한테는 이미 없는 게 되고 과거가 있다 할지라도 그 과거가 여기 있다 할지라도. 그게 과거인지 현재인지 분간을 못 하기 때문에. 그걸 현재라고 본 것이기 때문에 과거는 있어도 없는 게 되기 때문에. 과거는 없는 것이고. 있는 것은 오직 뭐밖에 없다? 현재밖에 없다. 현재. 현재밖에 없다라는 말은 곧 뭐냐 하면. ‘흐름’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흐름’이라는 게 의미가 없다. 이게 어거스틴의 시간론입니다.

그러면 시간은 어디서 나오는가? 시간은 신에게도 시간이 없어요. 신은 모든 걸 한꺼번에 관찰합니다. 전부 다 이순신 장군, 강감찬 전부 다 좋아. 전부 다 한꺼번에 다 있어요. 아담이 죄지은 것. 십자가 지신 거. 마지막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것. 신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봐요.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어제도 계시고, 오늘도 계시고, 내일도 항상 계시다. 그런데 계시다고 말하면 항상 계시든지, 아니면 어제, 오늘이라는 말을 쓰지를 말든지. 먼저도 있었고, 지금도 있었고, 나중이라는 말을 쓰면서도, 항상 있다라는 말을 씀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다’가 주도권을 쥐고, 그냥 ‘어제’ ‘지금’ ‘나중’이라는 것은, 현재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냥 보조로 등장했다가, 사라져야 될 개념이 되는 겁니다.

청중: 영혼은 뭐예요?
강의자: 그래서 영혼인 거예요. 그래서 이걸 어거스틴은 플로티노스의 개념을 그대로 수용한 거예요. 영혼 개념을. 플로티노스 나오잖아요. 영혼이라 하는 것은 시간이 없는 게 영혼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달라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요. 항상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고 했습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항상 흘러가는 거예요. 그런데 어거스틴은 영생이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 영원이라는 개념을 항상 있다는 긍정적 표현을 한 것이 아니라 부정적 표현. 우리 인간들이 하는 그런 시간은 하늘나라에는 없습니다 이렇게. 그건 없습니다 다 지켜보니까. 그러면 없다면 왜 시간은 왜 생겼을까? 그 없는 것이 생기는 것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의 영혼 안에만 있습니다. “시간이 없다면서?” “없는데, 있습니다.”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영혼 안에는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다음 문제. 영혼 안에 있으면 우리가 죽었을 때 영혼이 어떻게 되겠어요? 영혼이 계속 살아있습니까? 영혼이 사라지는 겁니까? 영혼이 사라진다는 것은 여호와의 증인의 이야기고요.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영혼이 사라져요. 영혼이 계속 있다는 것은 이것은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거고요. 이집트의 종교에서 나온 거고요. 이집트 종교가 최초의 문명이거든요. 확산되고 나면 그것이 터키나 이라크로 가가지고, 무역하던 크레타 문명까지 넘어가서, 그것이 그리스 철학 속에 들어가고. 그래서 온 유럽에 다 퍼지죠. 영혼불멸설입니다. 영혼은 영원하다는 거예요. 불멸하다. 마치 뭐처럼? 불꽃처럼. 그래서 사랑을 말할 때 불꽃처럼 태우리라 하잖아요. 영원히 영원히 타오르기를 내 심정이 이 심정이라고 표현할 때 불꽃처럼 영원히 사그라지지 않고 영원히 타오르는 거예요. 태어나는 겁니다.

제가 질문이 뭐냐 하면 영혼은 없어지느냐? 계속 있느냐? 하는 그 문제인데. 그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영혼 자체가 없기 때문에. 뭐가 있어야 있고 없고가 되는데, 애초부터 있지도 않은 걸 가지고 있고 없고가 안 되잖아요. 영혼은 없는데, 영혼이 있다는 인간은 있지요. 신을 본 사람이 있습니까? 제가 문제를 낼게요. 하나님이 자기를 보여줬습니까? 인간에게 보여줍니까? 안 보여줍니까? 안 보여줬어요.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 만날 때, 모세가 하나님 보자 할 때 “너 내 보지 말라” 했어요. 그럼 안 보면 어떻게 하느냐? 안 보여주는 대신 뭘 주시느냐 하면 ‘소리’. ‘이름’을 줘요. 이름을 줍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오실 때 뭐라고 했습니까? 내 뒤에 오는, ‘보이스’. ‘소리’가 있죠. “나는 그분의 소리에 불과하다. 물러거라! 물러거라!” 한 것처럼. 소리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 소리, 스피커에서 나오는 그 소리, 그것이 이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신을 믿어서 주고받는 것이 아니고 신의 ‘이름’을 믿어야. ‘소리’를. ‘신의 소리’를 믿어야 돼요. 신의 이름. 신의 이름을 믿어야 되고. 신의 이름이 육신이 되는 것이지. 하나님이 육신이 아니에요. 주의 이름을 믿어야 돼요. 주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을 믿어야 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러면 예수님 믿으면 되느냐. 예수님 믿는다는 것은, 우리 인간 손에 있기 때문에 이건 아니고. 이름이 뭐가 되냐. 이름에서 뭐가 나오냐. 이게 능력이 나와요. 능력이. 우리는 뭘 믿을 때 하나의 대상으로 보잖아요. 대상으로 보는 것은 내가 하나의 내가 볼 때 대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나 여기 있는데, “내가 뭘 믿지? 어? 나같이 생긴 또 대상이 있네. 믿어야지” 이것을 우리는 보잖아요. 그런데 저쪽을 이름으로 쳐버리면 나는 뭐가 됩니까? 저쪽이 주님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이름이라면 나는 뭐가 되죠? 나는 아담의 이름이 되죠. 그런데 이름이 되어버리면 내가 여기 있다는 그건 의미 없고, 아담의 죄가 어떤 기능을 발휘하는가? 그게 중요하고. 저분은 어떤 기능을 발휘하는가? 저분은 의의 능력을 발휘하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죄의 죄를 보여주는 기능을 하고. 그 둘이 만남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면서 거기서 구원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실을 모르게 되면 어떤 대상을, 자꾸 대상을 믿고자 하는데, 이 대상은 나중에 치매에 걸리면 인간 자기밖에 몰라요. 심지어 치매 걸리면 자기 아들도 몰라요. “나보고 이야기했어요?” 우리 형님보고. “야야 저 아저씨가 누고?” “어머니 저는 누급니까?” “너는 내 큰아들이잖아.” “제가 둘째고요. 저기 어머니가 그렇게 만날 가고자 했던 큰아들. 서울에 사는 큰아들 아닙니까.” “큰아들인가? 내가 볼 때는 아저씨인데?” 형님은 충격받아 버렸어요. 오랜만에 내려와서 충격받아 버렸어요. 나이가 70 되어서 치매 걸려 가지고. “예수가 누구지?” 목사가 와가지고, “사도신경 외우세요. 주기도문 이렇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누구지?” “아이고 권사님 왜 이러십니까? 조금 전까지 정신 말짱한데 왜 이러십니까? 천국이 있습니다.” “천국이 뭐지? 몰라요.” “그러면 권사님이 아는 게 뭡니까?” 내가 배고프다는 걸 알지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인간이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죄가 먼저고, 죄가 인간을 죄짓게 만드는 거예요.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한 용도로서 인간을 사용했던 겁니다.

어거스틴에 있어서 영혼 문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뭐냐 하면. 영혼 속에 뭐가 있냐면 시간이 있죠. 문제가 여기서 문제가 돼요. 영혼이 만약에 지금 영혼이 예수님 믿는 영혼이 나중에 부활되어서 육체를 입어버리면, 이게 하늘나라에서,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서, 하늘같이 해같이 빛나잖아요. 그렇죠? 성경에 보면 그렇게 돼 있죠? “새로운 옷을 갈아입어라”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새로운 장막을 입게 되면 너는 해같이 빛난다”는 것은.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이야기고요. 해같이 빛나죠. 할 때 거기에 들어있는 인포메이션, 지상에 있는 인포메이션 정보는 어떻게 될까요? 지금 어거스틴에 의하면 영혼 속에 뭐가 있어요? 시간이 있잖아요. 시간이 있다면 이 사람은 천국 가서 맨날 뭐 하냐면, 추억 이야기를 해요. “내가 사회에 있을 때, 아! 그때 참 잘나갔는데~ 저 사람 내 둘째 마누라예요.” “당신이 말야. 잘 만났어!” 먼저 갔던 처가 나중에 오는 남편 만나 가지고 잔소리 늘어놓는단 말이지요. 그게 천국이겠습니까? 그게 지옥이겠습니까?

그래서 불교에서 극락 문제가 제일 큰 문제가 이런 문제예요. 지상에 있는 정보를 그대로 가져가게 되면, 이건 결코 극락이 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어떻게 돼요? 이 영혼 속에 있는 시간, 미래, 과거, 현재는 뭐만 있다? 인간의 영혼만 들어있죠. 그래서 어거스틴은 뭐냐 하면은. 기억과 관조와 기대 이렇게 말했어요. 미래 내용은 기대고, 이것은 현실을 파악하는 관조고, 과거는 기억으로 생겨난다는 거예요. 과거이기 때문에 기억이 있는 게 아니고, 기억이 있기 때문에, 그걸 과거라 하고, 현재를 주시하기 때문에 그걸 관조라 하기 때문에 그걸 현재라고 붙이고. 뭔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네~”라는 그런 기대가 있기 때문에 그걸 미래라고 붙이자 이 말입니다. 하지만 그 미래, 현재 딱 깨내어 버리면 남는 것은 뭐냐? 현재의 내 영혼의 작용, 영혼의 기능만 남아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늘나라 가게 되면. 뭐를 가지고 가느냐? 할 때. 중요한 게 있어요.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천국 갈 때는 반드시 뭘 통과하게 되어있어요. 그 통과하는 것을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데요. 뭘 통과하느냐? 노아가 높은 산에서 이렇게 딴 쪽에는 물이 차이고, 노아만이 물이 안 차이면, 높은 산에 갈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노아를 어떻게 했습니까? 아예 물속에 잠기게 했죠. 방주라는 그 막을 통해서. 그렇게 해서 노아마저도 심판을 그냥 관찰할 입장은 못 되게 만드는 거죠. 구원받는다는 것은 남이 지옥 가는 것을 혼자서 히히덕거리면서 “꼴 좋다. 잘됐다!” 구경하는 입장이 아니고, 본인이 뭐를 통과해야 돼요? 죽음을,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럴 때 그가 느끼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마땅히 심판받아야 마땅한 정보요, 경험이요, 기대요, 관조요. 추억이고 기억이라는 것을 알죠. 그러면 천국 가서 뭐합니까? 자기의 벗은 면류관을 자기가 쓸 입장이 못 돼서.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그걸 누구한테 반납합니까? 주님 발앞에 반납하지요. 그런데 이 사실이 죽어서 그런 게 아니고 성령을 통해 현재 살아 있으면서 그것을 경험케 한다는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그걸 자기 부인이라고 합니다. 십자가는 정과 욕심을 부인하는 거죠. 부인할 때 나오는 열매가 뭐냐?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 우애라는 이런 성령의 열매를 맺히는 거예요. “나는 모든 게 하는 게 죄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목숨 사는 것은 주의 은혜입니다”라는 그 온유와 화평이 나온다 이 말입니다.

그럼 누구를 심판하거나 누구를 저주할 수 있는 권한은 완전히 -같이 죽어가는 주제에 그럴 자격은- 일체 없습니다. 그래서 심판하는 것은 누구한테 맡기라고 했습니까? 모두 심판하는 것은 누구한테 맡겨라? 주님에게 맡겨야지. 네가 나설 쨉은 안 된다. 누가 불의로 잘됐고 부자 되고 어떻게 하든 간에, 그걸 원통해 하는 건 인정되는데. 네가 나서서 칼 갈고 복수하지 말아요.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죠. 진짜 믿음이 있는 사람은 복수하지 않습니다. 스데반 집사처럼 죽을 때 “주여! 저들이 하는 짓을 넓은 의미에서 모르고 있습니다. 좁은 의미밖에 모릅니다” 이렇게 할 뿐이지. 자기가 나서서 아들한테 대대로 “내 원수를 갚아달라고 해가지고 금강산에 가서 무술 닦고 내려오고” 이런 짓을 하지 않아요. 그래서 어거스틴에 있어서의 이러한 문제점은 영혼을 어떻게 천국까지 실어 나가는가 그 점에 대해서 입을 다물어요. 나중에 모르겠다 해요.

이 어거스틴에 있어서 또 그다음 두 가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또 한 문제점은 뭐냐 하면. 이거예요. 마니교가 문제인데. 마니교는 “선한 자는 그냥 선하고 악한 자는 그냥 악할 뿐이다.” 선이 악인 되고 악인이 선인 되는 법이 없다는 것이 마니교입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이걸 없애버렸어요. 선이 악인 되고 악인이 선인 될 수 있고, 원래 선인이 없기 때문에 아예 이거는 선인이 안 되고. 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이것 때문에 반대하는 사람이 누구냐? 펠라기우스예요. 펠라기우스 아까 잠깐 언급했죠? 이 펠라기우스는 뭐냐 하면 원죄는 없어. 원죄는 없다. 그래서 어린애들한테 세례 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애들은 살아온 인생이 짧기 때문에, 그만큼 죄지을 기회도 없기 때문에 용서받을 죄가 없다는 거예요. 죄 없는데 세례를 줄 이유가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 펠라기우스의 주장입니다.

또 하나의 어거스틴이 중요한 것은 도나투스파하고 싸웠는데 도나투스파는 뭐냐 하면 이겁니다. 세례 줄 때요. 세 가지 요소가 있어요. 하나는 삼위일체가 세례 주게 돼요. 성부, 성자, 성령으로. 또 하나는 세례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세례 주는 자가 있는데, 세례 주는 자가 개판일 때. 그 세례가 효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그 문제에 대해서 세례 주는 자가 개판 같으면 세례 자체가 무효다 하는 것이 도나투스의 주장이에요. 그래서 기존에 배신했던 감독들, 목사들 다 나가라 이렇게 했던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반대하면서 “삼위일체 세례” “맞아.” “세례 받는 자 회개해야 돼” “맞아.” 하지만 세 번째. 세례 주는 자의 인격하고 세례 효과하고는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교회가 주기 때문에, 공동체가 주기 때문에, 개인이 주는 게 아니기 때문에 “없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도나투스는 이단으로 규정되고, 어거스틴의 오른손은 올라갔습니다. 맞은 거예요. 거기서 나온 게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 알곡과 가라지를 찾지 말라고 어거스틴은 얘기해요. “이 세상에서 교회라고 완전한 것도 아니고. 현재 이 로마 제국도 완전한 것도 아니니까. 언젠가는 이 교회 자체를 완전한 교회로 봐가지고 거기다가 목을 걸고 이러지는 말아라. 누가 알곡인지, 누가 가라지인지,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시지, 인간이 나서서 그렇게 가려내지는 말아라” 하는 것은 어거스틴의 이야기였습니다.

이 어거스틴의 주장은 다음 시간에 하겠지만, 후대에 하면서 어떤 것은 찬성하고 어떤 것은 반대하면서 어거스틴이 하나의 물통이 되어 가지고, 그 뒤에 모든 신학은 그게 과연 옳았을까? 어떤 것이 문제였을까?로 쭉 이어져 내려오는데 현대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오늘 강의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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