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호

시민대학강의4-1

아빠와 함께 2026. 8. 19. 08:16

활동하느냐를 파악합니다. 인간세계에서 거기에 그걸 아주 총괄적으로 정리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헤겔이라는 사람이에요. 헤겔. 헤겔은 신이 성육신 되었다, 신이 인간 되었다는 것부터 출발을 해요. 인간이 되었으면 나름대로 활동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활동을 했는데 신이 인간이 되셔서 결국 남긴 것이 뭘 남기게 되냐 하면은, 이걸 남겼어요. ‘국가’를 남긴 겁니다.

헤겔의 국가론은 나중에 나치 히틀러까지 계속 영향을 미치고, 엥겔스, 레닌, 스탈린에 미치고, 끝까지 계속 영향을 주고.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계속 영향을 미치는 거예요. 헤겔은 현대 국가만 아니고 고대 국가까지 다 포함해서 신은 왜 인간 세계에 국가를 만들었냐 그렇게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소박하게 교회에서 목사 설교 듣는 그 내용만이 신의 계시가 아니고, 그 계시가 실제적으로 구체화될 때 이거는 어린이집 속에서도, 청와대 속에서도, 그리고 철책 앞에서도, 노래방 속에서도 뭐를 끄집어낼 수 있냐 하면 신을 끄집어낼 수 있겠죠. 마사지하는 데서나 이런 데서도, 극장에서나. 그 80인의 신학자 책에 보면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것은 인터넷 속에서. 인터넷 속에서 신은 어떻게 되는가? 가정주부들이 하는 요리강좌, 요리강좌 속에서 신은 어떻게 모습을 보이느냐? 여기까지 생각을 해야 되죠.

그래서 왜 그런 것까지 언급을 하느냐 하면은, 일주일 동안 자기 생활하다가 신 만나기 위해서 잠시 예배당 가서 예배 드리면 신 만나고, 다시 예배 끝나고 오면 다시 자기 본래 자기 세계로 오고. 이런 것은 현대 신론에서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용납되지 않아요. 병원의 수술실에도, 그리고 로켓, 나로호를 올리는 로켓 현장에서도, 모든 분야에서도 신의 범위가 넓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신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그걸 뿌리째 보려면 전 분야를 다 다루어야 돼요. 전 분야를.

그 결론은 나와 있습니다. 포이어바흐가 결론을 내린 게 있죠. 신은 인간의 자기투영이라는. 신은 인간의 투영체다. 투영체라 하는 것은 건축 학생들 설계도 제도할 때 나오잖아요. 물체가 여기 있으면 물체를 조명할 때 위에서 비추는 모습과 옆에서 비추는 모습과 밑에서 비추는 모습과 그림자가 나오겠죠. 그림자를 조회해보면 3D 프린터 집어넣으면 고유의 물체가 나오잖아요. 이걸 투영이라고 해요, 투영. 인간이 자기가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신은 나에게 이렇게 이렇게 해서 시켰다고 신과 결부해서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겁니다.

도둑놈이 가스관을 올라갈 때 "당신은 왜 가스관을 올라가서 돈을 훔쳤느냐?" 물어보면 거기에 현찰이 있기 때문에 올라간다, 이것은 등산가들이 "왜 산에 올라갑니까?"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요? 산이 거기 있기에 올라가는 거예요. 가스관이 있기에 올라가지요. 가스관 없었으면 안 올라갔을 것이고, 가스관에다가 가시 같은 게 이렇게 있었으면 못 올라갔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 도둑질을 하는 것은 내 존재를 먹여 살리기 위한 신의 정당성이 되는 거죠. 물론 그 사람은 신을 언급하지 않지만 그 사람이 어느 날 교회 간다면 이것도 뭐가 돼요? 신의 거룩한 뜻이 된다고 하고 싶어 하겠죠. 그런데 포이어바흐는 이야기했죠. 신은 인간의 투영체다. 인간이 팽창하게 되면 뭐가 된다? 신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신을 축소시키면 인간이 되는 거죠.

그러면 내가 누구냐를 알기 위해서는 그냥 나를 연구하면 안 되고 뭘 연구하면 나를 알 수 있다? 신에 대해서 연구하면 되는 거예요, 신에 대해서. 신에 대해서 연구하면 그것이 내가 되고 싶은 이상형과 내 목적이 신의 뜻으로 반영되어서 자기가 그걸 다시 한번 회수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 신에 대한 갖가지 이론들이 80여 명의 신학자 속에 다 나옵니다. 첫 번째 22페이지에 보게 되면 제일 먼저 나오는 26번에 보면 뭐 나오죠? 레온티오스 나오죠? 레온티오스. 레온티오스 이 사람의 주장은 뭐냐 하면 첫 번째 끝에 보면 "이로써 개체성은 위격의 외부에서 우유적으로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위격 그 자체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용어가 무척 어렵죠.

쉽게 제가 이걸 풀이해보면 “하나님의 삼위일체에서 성자, 두 번째 위, 예수님. 성자에 대한 그 고유의 가치는 성부, 아버지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성자 고유의 입장에서, 고유에서 나온다. 본연에서 그 모든 속성이 나온다”라는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설명해도 그게 무슨 뜻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왜 꼭 해야 됩니까?" 하는 그걸 모르겠죠.

그러면 그전에 뭐라고 했냐면 그전에 삼위일체 논쟁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 예수님이 부여받은 것은 다 아버지로부터 와서 부여받은 것이다“라는 것 때문에 삼위일체 논쟁을 하면서 논쟁이 벌어졌거든요. 예수님이 십자가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예수님의 자기 뜻이 아니고 아버지가 시켜서 십자가 못 박혔다”라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예수님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지 본인의 의지나 본인의 생각은 그게 가미될까요, 가미되지 않을까요? 가미되지 않죠. 그러면 적당한 타협책은 없겠습니까?

십자가 지는 것은 총괄적으로는 아버지의 뜻이고, 십자가 지고 못 박히고 하는 것은 예수님 개인적인 자기의 의사고, 이렇게 되어버리면 문제가 되는 것은요, 어느 선에서 이걸 끊을 것인가? 어느 선에서 아버지의 뜻이고 어느 선부터는 예수님의 뜻인가 끊을 것인가, 이걸 누가 정합니까? 상당히 모호하죠.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방금 이야기했잖아요. 신은 예수가 되든 신이 되든 누가 되든 신은 누구의 투영체다? 인간 본인의 본인 내부에 있는, 자기가 그동안 미처 몰랐던 자기의 속내를 드러내는 겁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서 예수님도 나한테 자기 의사를 발휘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이 이야기거든요.

방금 우유적으로. 우유적이라 하는 것은 맛있는 우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연적으로 추가되는 것이 아니고 이런 뜻인데요. 우연적인 것이 아니고 위격 그 자체, 본인의 의사에 본인이 따로 생각해 놓은 그 뜻에 의해서 나온다. 이렇게 된다면, 이것이 현재 데카르트 이후에 주체사상이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요. "나는 신을 인정한다. 하지만 내 하는 모든 일은 누가 결정한다? 내가 결정할 거야. 이것이 바로 곧 신이 나한테 허락한 뜻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렇게 발전돼요. 그전에 레온티오스라는 사람이, 이게 650년 전에 사망했지만(주: 생몰년 오류 자막/설명 구상), 그전에 무수한 세월이 있지만 그전에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대한 힌트를 준 사람들이 있어요.

여기 제일 끝에 보면 수아레스 1548년 나왔는데, 제일 끝에 35페이지에 수아레스 이전에 둔스 스코투스, 스코투스라는 사람이 있어요. 스코투스가 몇 번째 신학자로 제가 정리를 했냐 하면은, 39번째 둔스 스코투스라는 신학자가 있어요. 이 신학자 이후에 수아레스가 있고. 수아레스라고 한다면 젊은 사람들은 잘 알아요, 유명한 야구 선수거든요. 젊은 애들은 지금 LA 류현진밖에 몰라요, 지금 야구 선수요. 2등은 누가 하느냐, 거기에 관심 있어요.

여기서부터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은혜로 주신다“라고 시작했던 토마스 어거스틴. 오늘 어거스틴 할 겁니다. 어거스틴으로 시작했던 것이 점점 탈색되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반대하는 게 아니에요.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이 협동해서 구원한다, 라고 어거스틴과 반대했던 펠라기우스라는 사람이 있어요. 좀 이따 할 거예요. 이 펠라기우스 이 사람은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은혜로 하는 것이 아니고 은혜에 대해서 인간이 반응해줘야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생각 침례교 사상과 유사해요.

나중에 칼빈, 루터 할 때 침례교, 감리교, 성결교 다 나올 거예요. 펠라기우스에 대해서 어거스틴이 말하기를,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주님께서 협동해서 한다면, 동업을 한다면, 한쪽이 ”야 우리 이번에 이 제품 만들자“ 할 때 한쪽이 ”아 나 안 해“ 이러면 그 회사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회사 안 되죠. 아무리 하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용서를 해도, 믿는 사람이 ”나 믿겠어요“ 손들고 나올 경우에만 구원받고, ”나 안 믿을 거야“라고 반대해버리면 구원이 안 된다고 보는 게 펠라기우스의 이론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구원될 자는 이미 창세전에 예정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창세전에 예정이 되어 있다.

어떤 단어의 뜻을 이야기할 때는요, 그 단어만 이야기해서 설명해도 몰라요. 예정의 반대말이 뭐냐를 알아야 반대되는 개념을 붙여야 ”아 이 뜻이 이 뜻이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화장실에 남자 신사 모습이 있으면 그건 뭐하는 건지 몰라요. 그런데 그 바로 옆에 여자 치마 입은 여자 숙녀의 모습, 그것도 색깔도 분홍색으로 남자는 파란색 해놓으면 ”아 이게 화장실이구나“라는 걸 알아요. 그래서 언어라고 하는 고유의 의미는 없고 대비되는 언어와 같이 나란히 함으로써 의미가 등장하는 겁니다. 예정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놀랍게도 이게 ‘예지’예요, 예지.

예정이라 하는 것은 저 사람이 반드시 구원받기로 이미 그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태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선이나 악을 행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을 경우에(로마서 9장 이야기입니다)—없을 경우에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누구하고 의논했냐 하면 자기 아들 예수님하고 의논해서 이미 결정 나버렸어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예정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인데, 펠라기우스는 예정이 되어버리면 무엇이 성립이 안 되느냐 하면 예정이 되어버리면 자기 구원에 대해서 자기 행함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내가 안 행해도 구원받는데 미쳤다고 행합니까?

안 행해도 구원받는데 뭔가 신이 이렇게 이야기하면 거기에서 반응을 나타낼 때 나타낸 사람은 ”아이고 착하다“ 해서 구원해주고, 반응을 ”나 신을 거부해, 나 무신론자야“라고 하면 그건 지옥 가고. 이게 훨씬 더 우리 이성에 맞고 합리적이지, 인간이 어떻게 거부하고 관계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너는 무조건 와“ 이렇게 돼버리면 인간의 고유 품위라는 가치성이 찾을 길이 없잖아요. 그럼 인간이 찾을 길이 없으면 도둑놈이 실컷 도둑질하고 ”나 예정됐다“ 하면 천당 가게 되면, 그건 뭐 이 세상에 윤리 도덕이고 뭐고 질서고 이게 논리가 없지 않습니까? 없지요. 그래서 펠라기우스 같은 것은 뭐냐 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해서 인간의 행함의 자리를 하나 집어넣어 놓자.

하나님의 은총 더하기 인간의 행함을 하자. 이것이 펠라기우스지만 이게 나중에 루터 이후에 칼빈에 가면 이게 뭐냐 하면 알미니안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나온 게 무슨 교리냐 하면 이게 감리교가 돼요, 감리교. 거기에 대해서 장로교는 그걸 극구 반대하고. 거기에 ”하나님이 예정했다“는 어거스틴이 이야기한 거고요, 하나님에 의해 예정되었다. 그 다음에 문제가 또 있어요. 예정됐다는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고 문제가 뭐냐 하면은, 그러면 지옥 가는 사람도 이미 창세 전부터 확정되었느냐 하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어거스틴이 입을 다물어버리는 거예요. 입을 다무니까 만약에 천국 가고 싶고 예수님 사랑해서 구원받고 싶어도 애초부터 그가 지옥 가기로 작정된 사람은 그러한 분투 노력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되면 무엇이 날아가 버리냐 하면 이게 날아가 버려요. 이게 뭐죠? 자유의지가 날아가 버려요, 자유의지가.

자유의지가 날아가 버리면 인간은 인간이 아니고 로봇이 되고 이건 기계가 돼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뭐냐, 내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어떤 의미를 잡을 때는 반대되는 것과 대조하면서 의미가 생성된다“라고 했지요. 인간이 뭐냐를 현대 인류학이라든지 현대의 모든 사회과학에서는, 그래서 인간이 뭐냐를 할 때 그 인간의 의미를 찾아내서 갖다 붙이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동물입니다, 동물. 인간은 뭐냐 하면, 인간은 동물과 네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직립보행한다는 거예요, 직립보행.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직립보행. 또 하나는 뭐냐 하면 불을 사용하는 거예요, 네안데르탈인. 그 다음에 도구를 사용해요, 도구. 뭔가 막대기를 가지고 한다든지 맹수를 사냥할 때 돌을 쓴다든지 도구 사용. 네 번째가 뭐냐 하면 사회성을 위해서 ‘언어’를 사용하는 겁니다. 이게 동물과 다르고, 이 동물과 다른 것을 신학자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가지고 동물에게 없는, 하나님에게만 공유되어 있는 속성이 들어왔다 해서 그걸 공유적 속성,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인데 그걸 또 둘로 나눠요. 하나님의 형상인데 그러한 형식적인 형상이 있는 반면에 또 동물하고 다르지만 내용상 들어있는 형상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양심이 있고, 측은지심, 의로울 수 있고 착하고 거룩한 것.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이 정이라는 것 또는 성이라는 것. 성. 동양철학은 세상의 우주 전체가 성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겁니다. 그 성의 요소가 인간 창조할 때 들어가서 인간에게는 성이 있는데, 인간은 날 때부터 누구나 착한 심성을 가졌다고 보는 겁니다. 성선설이죠, 성선설.

거기에 반해서 인간은 착한 것은 그냥 착해지는 것이 아니고 절제해야 착해진다는 걸 말한 사람이 바로 순자가 이야기한 성악설이라고 이야기하고, 날 때부터 인간은 다 누구든지 도둑놈도 착하다고 본 것은 성선설. 이거는 맹자가 그렇게 언급을 한 겁니다. 이러한 것이 BC 4세기경에 중국에서 이미 나왔지만 그 이전에 같은 시기에 서양에서도 헬라철학 때도 그런 이야기를 해서 스토아학파 같은 게 있죠.

그럼 한번 정리해봅시다. 인간이 뭘 만들었다? 아까 정리한 거 나오시죠? 인간이 뭘 만들었다? 신이라는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신은 아무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신을 만드는 이유가 분명해졌죠.

신을 만들면서 신을 경유해서 뭐가 나옵니까? 이게 윤리와 뭐가 나오냐 하면 도덕이 나오죠. 도덕은 개인에게 속하고 윤리는 개인을 둘러싼 그 사회와 집단의 질서 체제를 위해서 윤리라는 게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양철학에서 윤리라는 건 간단하죠.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를 위하고 형제간에 친하게 지내고 나라에 충성하고, 이게 뭐예요? 이게 이미 태극이라는 것. 신의 개념은 자연의 개념이거든요, 내추럴. 자연은 그냥 스스로 있는 것은 내추럴. 자연 개념에 의해서 결국 끄집어내겠다는 것은 뭐냐 하면, 자연이 좋아서가 아니라 뭘 끄집어낸다? 이 사회라는 공동체를 어떻게 윤리와 도덕 속에서 각기 제자리를 점유해 제대로 사느냐, 그것과 관련되어 있어요.

서양이나 동양이나 모든 사회는 계급으로 되어 있고 계급은 어디서 나오냐 하면 소유에서 나온 겁니다. 계급은 소유에서 나온 거예요. 로마 시대도 그랬거든요. 로마 시대도 계급이 네 계급이었고, 플라톤은 계급을 세 개로 나눴습니다. 제일 위에는 통치자가 있고 중간에는 싸우는 자, 셋째는 허접스러운 일을 하는 자, 농부, 상공인들. 플라톤은 그렇게 봤고 그게 플라톤의 그러한 것이 나중에 로마 시대 때... 로마 시대는 BC 7세기부터 BC 2세기 때 점령하고 한 그 다음부터 천년 이상 계속, 동로마 같은 경우 1453년에 망했거든요, 천년제국입니다. 그래서 로마 제국의 신학의 특징은 뭐냐 하면 천년왕국이에요. 천년왕국이라는 개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더 이상 천국은 있다, 없다?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요아킴이라는 사람이 "이게 천국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해서 그 다음부터 이단 소리 들었죠.

모든 신학을 보게 되면 반드시 체제 사수와 관련되어 있죠, 체제 사수. 역사란 누가 쓴다? 승자가 쓴다. 승리한 사람의 역사를 쓰면서 "왜 우리는 승리해야 마땅하고 왜 신은 우리를 도와줘야 마땅한가"를 정당화하는 식으로 교과서나 모든 역사가 흘러가기 마련이다 이 말이죠. 거기에 고대 민족에서 뭐가 관련되어 있습니까? 신과 관련되어 있어요. 신의 윤리와 도덕이 되면 이 국가는 들뢰즈의 철학에 의하면 이 국가는 어떤 국가냐 하면, 고대 국가는 왕의 개인적인 왕의 주체성을 반영하는 국가였어요.

왕이 제일 높고 그 밑에 있는 쫄따구들은 "정말 왕이 왕답습니다"를 충성 봉사하는 그러한 부하 직원으로서의 국가가 고대 국가예요, 고대 국가입니다. 이게 빌미가 뭘 빙자해서? 신을 빙자해서. 현재 우리나라도 대통령이 취임해서 신년 초에 뭘 합니까? 목사들, 장로들 모아놓고 뭐합니까? 조찬기도회 하죠, 조찬기도회. 그게 지금 유럽에서도 계속되거든요. 미국도 되고. 조찬기도회, 현재 시대에 대한 신으로부터 인정받겠다는 겁니다, 인정받겠다. 사실 따지고 보게 되면 이런 거예요.

교회에서 목사들이 설교를 할 때 설교 내용의 요지를 압축해버리면 이겁니다. "우리 교회만이 이단 아니고 정통이니까 여러분 잘 오신 겁니다. 우리 교회 다니고 등록하시면 여러분 오늘 죽어도 천당 갑니다." 그 취지와 맞물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의 대리자인 이 목사 말을 충성하는 사람은 어린애 같은 좋은 믿음이고, 내가 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어린애 같은 믿음이 아니라서 이거는 인정받지 않는 믿음입니다“라는 그런 반복적인 세뇌 작업이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특히 개척교회 하는 목사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해야 돈이 생길까?' 이건 기존 교회도 마찬가지고. 제가 누구하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 교인하고 어느 날 커피숍에서 이야기를 하는데 자꾸 저한테 달려드는 거예요. 뭐냐 하면, “교회 목사를 믿지 마세요. 진짜 교회 다니신다면 목사를 믿지 말고 성경이라는 하나님 말씀을 보세요”라고 하니까 그쪽 아주머니가 계속 나한테 달려들기를 이렇게 달려들어요. “그래도 목사한테 양떼를 맡기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뭐냐 하면 진짜 목사를 존경하든지. 그런 경우는 거의 없어요. 교인들이 목사를 거의 존경 안 해요.

하지만 그런 소리를 하는 이유는, 목사를 존경하든지(그런 경우는 없지만) 두 번째 경우가 많아요. 뭐냐 하면 “내가 목사를 목사라고 인정해주는 만큼 목사 너도 내 자존심을 건드리지 마라” 하는 2번이 강해요. 어떤 인간이든 손해 보는 인간은 없습니다. 우리가 신학을 하면서 다시 한번 정리하는 것은, 정말 이게 신이 누구냐를 가로막는 것은 남이 아니고 바로 신을 믿는다는 '내'가 신의 뜻을 가로막고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루터는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이유가 하나밖에 없어요. 바로 여기에다가 신과 인간 사이에 이걸 끊어버리는 겁니다. 신,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 모든 신은 내가 만든 우상이었습니다. 그걸 제가 첫째 주에 이야기했죠.

신을 믿는 이유는 무슨 행복? 누구 행복을 위해서? 옆 사람의 행복, 김 집사, 최 집사가 아니고 ‘나의 행복’을 위해서 신을 믿는 거예요, 나의 행복을 위해서. 교회가 신을 믿는다면 저 교회 말고 내 교회, 내가 돈을 투자한, 십일조 갖다가 받아 던져 넣은 그 교회 잘되기 위해서. 내가 다니는 이 교회 잘되기 위해서 그 신을 이용하는 것밖에 안 돼요. 따라서 교인을 믿는다든지 자기의 믿음을 믿으면 안 돼요. 그거는 남들도 그만한 권한이 있다고요. 여기서 자유의지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보편개념으로 슬슬 나오죠. 보편개념이 있다 할지라도 이게 개인에게 들어가버리면 이 보편개념이 다 깨져버립니다. 다 깨져버려요. “나는 이것을 신의 뜻으로 했다”라고 하면 다른 사람이 “내가 보기에는 네가 마귀의 뜻인데, 내가 보기엔 너는 마귀가 시켜서 했어” “아니야, 하나님이 시켜서 했어” “내가 보기엔 내가 하나님의 뜻이야.”

이게 두 사람 모이고 세 사람 모이면 모조리 전부 다 지가 하는 것만이 뭐가 된다? 신의 뜻이 되어버려요. 이거 고르기아스 아닙니까? 이건 뭡니까? 소피스트거든요. 프로타고라스 아닙니까? "인간은 만물을 측정하는 척도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거기에서 반대했다고 했지요. 그렇게 되면 사회 질서가 어떻게 되는가, 개인주의, 이기주의밖에 남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 해가지고는 공동체가 안 된다. 그리스 철학의 특징은요, 국가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개인이 있는 거예요. 이게 폴리스 도시국가의 특징이 그렇습니다.

이탈리아가 이렇게 있고요, 시칠리아섬이 있고 아드리아 반도가 있고 이게 발칸반도거든요. 발칸반도 밑에 여기에 펠로폰네소스 해협이 있고, 여기 코린토스, 스파르타, 여기 아테네, 이거 델피, 올림피아 이렇게 돼있다 이 말이에요. 여기 이게 도시국가인데 500개 내지 천 개의 도시국가가 여기 쭉 있었습니다. 500개, 천 개의 도시국가가 있어요.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협소한 곳에 살기 위해서는 이 사람들이 농업을 할 수 없었어요. 뭘 했느냐 하면 이 사람들은 무역을 해야 되는 거예요. 무역을 한다는 것은 물건만 사온 게 아닙니다. 그쪽의 종교와 그쪽의 사상과 문화도 다 가지고 오는 거예요. 여기에 크레타섬이 있거든요, 크레타섬. 이걸 미노아 문명이라고 해요. 이게 서기전 2000년에서 1600년경인데, 처음으로 유럽의 문명이 여기서부터 시작된 거예요. 여기서 와서 미케네 문명으로 가가지고 다 확산된 겁니다. 고고학적으로 따져보게 되면요.

그래서 이런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개인이 먼저가 아니고 국가가 먼저예요. 국가를 위해서, 국가가 있어야 우리는 전쟁에서 싸울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스파르타식 교육 다 압니까? 애 태어나가지고 웅덩이에 던져가지고 살아남아 기어 나온 놈은 살리고, 못 나온 놈은 죽여버리고. 그것도 그 마을에 장로들이 와서, 유지들이 와서 “얘는 안 되겠습니다”라고 죽여버리고. 7살만 되면 기숙사 생활 해가지고 부모를 떠나고. 그리고 여자나 남자가 좀 힘이 세다 싶으면 그 남자는 여러 여자와 자식을 낳을 수 있고, 어떤 여자가 힘이 세다 싶으면 여러 남자와 동침해서 자식을 낳게 되고. 그리고 비실비실한 남자와 여자는 이거는 자식도 낳을 자격도 없고. 왜 그렇냐 하면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그 인적 자원을 미리 확보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그렇게 국민들을 가르친 거예요. 그래서 그 힘을 기르기 위해서 4년마다 올림피아에서 뭘 하냐 하면 올림픽을 했잖아요, 올림픽을. 그런 식으로 해서 이것은 BC 300년경에, 그 이후에 400년경에 이 페르시아라는 나라하고 전쟁 붙어가지고 승리했지 않습니까?

서로 싸우다가도 적이 오면 같이 동맹하고. 그런 것들이 뭐냐 하면 국가를 위해서 우리가 있다, 따라서 개인주의는 욕심내면 안 된다, 그런 것과 또 관련돼 있어요. 그것이 그대로 로마로 이동했고 그 로마에서 꽃피운 기독교가 그 사상을 받았고, 중세의 모든 신학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신은 우리에게 그냥 준 게 아니고 중간에 뭐가 있다? 국가를 통해서 줬기 때문에. 아까 계급이 있다는 것은 무엇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했습니까? 계급은 소유, 그 당시 소유는 땅이었습니다. 돼지를 많이 가진 사람, 라티푼디움 해서 로마에서는 대형 영지를 가진 사람이 귀족이 되는 거예요, 귀족. 그래서 호민관도 뽑고 한 겁니다.

그걸 공화주의라 하는데, 그러한 하나님이 축복을 해줬기 때문에 소유가 부자가 되었고, 부자 하나하나는 신의 축복의 결과이기 때문에 부자를 부자라고 인정해주는 그것이 우리가 이 민족이, 국가가 믿는 신에 대한 마땅한 도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각자 그 자기 위치에 있어줄 때 응집력이 있죠, 응집력이. 국가 응집력이 있고 응집력 가지고 뭐합니까? 제가 전에 이야기했는데 사람이 힘이 남아돌면 뭐 한다고요? 전쟁해요, 전쟁. 전쟁해서 로마는 현재 영국까지(유럽이 이렇게 돼있잖아요. 이게 영국이고) 이 영국까지 전부 다 점령을 다 한 겁니다. 그 남아도는 잉여, 잉여의 힘, 남아도는 힘은 노예를 투입했고. 노동은 누구의 몫이고? 노예의 몫이고. 노는 것, 시와 노래 이런 것은 누구의 몫이고? 귀족들의 몫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아주 합당하게 이 세상을 딱딱 제 자리에—제 서랍에다가 양말 넣을 때, 속옷 넣을 때 딱딱 집어넣듯이 인간은 모든 것이 서랍에 딱 제 자리를 찾아가도록 하는—이것이 정당한 국가의 체제다. 이것이 나중에 헤겔로 이어진다 이 말입니다. 그것이 신을 빙자해서 한 거예요. 과연 성경에 나온 신은 그런 신이었던가요? 2천 년 신학이 발달하고 역사하게 되면 바로 현 국가체제에 대한 옹호와 변증, 그걸로 모든 게 신도 거기에 변화적으로 다 소모가 되는 겁니다. 요새 말로 하면 “우리 교회는 정당해”라는 그쪽으로 신학이고 성경이고 전부 다 해석이 거기로 빠진다 이 말입니다. 내가 부자 된 것은 마땅한 신의 축복이라는 것을 정당화하고 긍정하게 되면 경쟁적으로 교회에서는 부자 되려고 기도하게 될 것이고, 기도해서 어떻게 해서 부자 되었을까? “십일조 하니까.” 그런데 십일조를 뽑아낼 수도 있을 것이고, 십일조 하는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고. 어떻게 했는가? ‘주일성수’했다. “아! 주일성수와 십일조가 양대 기둥이 되어 가지고 한국 교회가 커졌구나. 그럼 주일성수 이 두 개만 하면 우리도 언젠가는 복 받아서 부자 될 수 있습니다”라는 희망을 주잖아요. 낙관적이 되잖아요,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이런 수법은 이미 교회사에서 다 써먹던 수법이에요. 루터 때 농민 반란이 왜 일어난 줄 압니까? "십일조 폐지하자!"라고 일어난 거예요. 루터는 그것도 반대했지만. "이 인간 같지도 않은 게 어디 반란해." 주일성수하는 목적은 설교 듣고 기도하러 온 것이 아니고 광고 시간이 중요해요, 광고 시간이. 왜? 광고 시간에 "선교사 보내는데 돈 내라" 하는 이야기예요. "교육관 짓는데 투자하라"는 이야기.

모든 것은 이 ‘교회’,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회가 어떻게 유지하느냐 여기에 목회자의 자존심이 걸려 있어요. 내년에 교회를 유지하면 "이건 훌륭한 목회자라고 상 받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이거 목사 하다가 6개월 만에 원금 다 까먹고 나중에 포장마차 할 값도 없어가지고 마누라 이혼하고, 마누라 맨날 피아노 레슨 해서 이렇게 가지고 빌어먹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되게 되면 “나는 목사 아닌 모양이다” 이렇게 세상 현상을 가지고 스스로 점검하는 거예요. 여기 대전에 침신대가 있지만 지금도 수많은 목회자가 쏟아져 나옵니다. 젊을 때는 대정부 반대하면서 뭔가 젊은 사람을 끌어모으다가, 좀 한 10년 지나면 본색 드러내가지고 “십일조 안 하면 저주받습니다” 해서 돈 끄집어내고. 가는 코스가 또 그것도 안 되면 노래방 하고 아이들 공부방 해가지고 나중에 어린이집 해가지고 보조받고.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이 이미 개인으로 왔을 때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학의 방향이 뭐냐 하면 신학 믿는다고 하지 말고, 딱 깨놓고 보자, 당신들이 믿는 것을 다 끄집어내라, 다 끄집어내놓고 그것이 성경과 맞는가 비교해보자. 그럼 밑에서부터 차올라오는 신학을 시작하는 겁니다. 그게 토마스 아퀴나스예요. 토마스 아퀴나스, 그 다음에 둔스 스코투스. 그런데 윌리엄 오컴, 윌리엄 오컴 잠시 한번 볼까요?

여기 몇 번이냐 하면은 40번. 윌리엄 오컴이 뭐라고 이야기했는지 아마 여러분 들어보면 기절초풍할 겁니다. 31페이지 밑에서 다섯 번째 줄에 "인간이 따를 수 없는 도덕률을 부과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다." 하나님의 의지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요. 여러분 말할 때 참 이게 신학자들이 어려워요. 하나님의 의지는 뭔 뜻이냐 하면은 내가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의지라는 그런 뜻이에요. 나에게 이런 의지를 주신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의지다 이 말입니다.

그 당시 신을 안 믿으면 이거는 큰일 나니까 신과 결부시키되, 어쨌든 간에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에 대한 독자적인—나중에 근대 주체사상인데—가치를 챙기기 위해서 이렇게 하나님의 의지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의지라는 말은 그전에는 무엇을 뜻했다? 하나님의 의지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속성이다, 이렇게 이야기했겠죠. 하나님의 속성이 되어버리면 나는 하나님의 의지가 아니고 하나님의 이성이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나는 하나님의 이성에 대해서 내 이성은 뭐가 됩니까? 완전히 이거는 종이 되잖아요. 그러면 나는 불쾌하잖아요. 내가 누구의 종이 된다는 것은 이거는 듣기만 해도 짜증 날 일이다 이 말이죠. 내가 내 마음대로 하고 싶지 누구 간섭받는 거 얼마나 싫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이성이 있다’라는 말을 신학에서 뭐로 바꾸냐 하면 '하나님의 의지가 있다'고 바꾸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지가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이성이라 하는 것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지를 따라서 움직이는 나의 이성이 곧 뭐가 되겠어요? 소급해서 신의 인성이 되겠죠. 그럼 내가 뭘 한다는 것 자체가 신의 뜻이 되는 겁니다. 그 뒤에 봅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의지하셨다." 무슨 행동을 하기 전에 먼저 어떤 의욕을 가졌다는 말은 당장 그것만으로 선이 됩니다. 예컨대 불륜은 악이지만 그것이 악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불륜을 명령했다면 불륜조차 칭찬받을 선이 된다. 야, 참 기분 좋지 않습니까, 남자들? 남자들 들어봐. 이게 기쁜 소식 같아, 이게 복음 같아. 사도 바울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인간은 뭘 해도 뭐가 된다? 죄다, 이렇게 이야기했죠.

뭘 해도 죄다. 내가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게 아니고 내가 뭘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전히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가 있다 이거죠. 그래서 우리는 믿습니다. 뭐냐? 세리와 창기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말은, 강도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은 강도가 잘했다는 말이 아니잖아요. 창녀가 잘했다는 말이 아니고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이것을 신약 용어로 ‘그리스도 안’이라고 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는 죄인이 뭐가 되느냐 하면 의인이 돼요. 굉장히 어려운 논리가 여기 들어갔습니다. 중세 때나 초창기에는 이걸 설명할 길이 없어요. 왜 설명할 길이 없냐 하면 이게 사실 루터, 칼빈도 이 점을 풀지를 못했어요. 왜 그러냐면 중세 때의 사고방식을 이어왔기 때문에 그런데.

신이 있잖아요. 신이 있으면 출발을... 고대 그리스 철학의 출발이 ‘존재’입니다, 존재. 파르메니데스거든요, 파르메니데스. “모든 변화하는 것은 그냥 변화가 변화할 뿐이지 실제로 존재는 변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했거든요. 그 제자가 제논인데 “날아가는 화살은 정지되어 있다” 하는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게 뭔 뜻이냐 하면 물이 이렇게 흘러가도 우리는 물이 흘러간다고 보잖아요. 그냥 흘러가는 물을 바가지로 떠보세요. 이쪽에 물을 뜨나 저쪽에 물을 뜨나 이쪽에 물을 뜨나 똑같은 뭡니까? H2O 물이잖아요. 존재라 하는 것은 변한다, 안 변한다? 안 변하죠. 변하는 것은 ‘변화가 변하’죠, 변화가 변한다고요. 자기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실재 개념이고 이게 삼위일체까지 이어지는 겁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성뿐이다, 성부다. 하나님 만나서 변하고 성자, 성령은 변한다”라고 하는 것이 바로 유일신에서 이야기하는 거고. “성부는 성부로서 변하지 않지만 성자도 성자로서 변하지 않는다”라는 것이... 위격이라는 삼위, 위격, 그걸 위격이라고 하는 거예요. 위격인데, 그러면 신이 몇 분이에요? 성부, 성자 세 분 되니까 이거는 구약과 안 맞잖아요. 구약은 유일신이잖아요. 그걸 맞추기 위해서 뭐냐 하면, 용어를 삼으로 할 때는 위격이라, 페르소나(Persona), 위격이라 하고, 이걸 일신으로 할 때는 체를 써요, 일체. ‘우시아(Ousia)‘로 써버린다고요. 단어를 새롭게 배치를 함으로 말미암아 세 분이며 한 분이며, 하나가 삼이라는 공식으로 넘어가고 말았어요.

그런데 그것을 중세 때부터 계속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지만, 그것을 신을 누가 믿는다? 내가 믿죠. 내가 믿는다. 믿음의 주체가 누굽니까? 나. 나로부터, 나의 존재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이건 아무리 설명해도 성경의 복음이 설명이 안 됩니다. 왜? 뭐가 방해가 되기 때문에? 내가 방해가 되기 때문에. 예수 믿어도 ’내‘가 믿고, 기도해도 ’내‘가 하고, "내가 한 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 내가 헌금한 거지 내가 한 게 아니고 성령의 은혜로 헌금했습니다"라고 말하는 본인이 누구고? ’나’고. “전도한 것은 내 힘이 아니고 성령님께서 나한테 역사해서 나로 하여금 하게끔 했습니다“ 하는 것을 ‘내’가 믿습니다, 내가 믿습니다. 어느 문장을 해도 내가 빠지질 않아요, 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서 기도할 때 되면 기도한 처음 한 30초는 자기가 잊어버려요. 그런데 30초 이후 지나가게 되면 무엇이 상상되느냐 하면, 그거부터는 지금 기도하는 폼, 기도하는 폼새를 보여주고 있는 자기 모습이 지금 근사한지 그게 지금 걱정돼. 그걸 지금 상상하고 있습니다. 찬송가 1절 가사 부를 때는 찬송가 생각나죠? 4절쯤 되게 되면 ”지금 찬송가 4절까지 좀 지겹다. 찬송가 또 3절짜리 없나?“. 이런 생각 들고. ”지금 소프라노가 지금 잘 나오고 있고, 지금 테너가, 베이스도 제대로 바리톤이 맞고 들어가는가?“라고 이런 생각한다니까요? 그리고 4절쯤 되면요, ”찬송가 끝나고 뭐 할 건데?“ 이거 생각한다니까요. 주기도문 외워보세요. 주기도문 외워볼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해놓고 끝에쯤 되게 되면 ”주기도문 하고 뭐 하지, 설거지할까? 어디 놀러 갈까?“ 그거 생각한다니까요.

이제 어거스틴 하겠습니다, 어거스틴. 그걸 어떻게 푸는가 한번 보세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신을 믿어도 결국은 돌아오는 것은 누구밖에 없다? 나밖에 없다. 그래서 루터가 어거스틴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어거스틴부터 신학이 오히려 타락했다는 거예요, 어거스틴에 와서. 어거스틴 몇 페이지에 있는가 하면, 오늘 교재 23페이지에 29번. 29번째 신학자 어거스틴 있죠? 어거스틴의 생각은 이겁니다.

인간이 있기에 신이 먼저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 이야기는 뭐... 이거는 교회 안 다니고 잘하는 이야기다. 우리 옛날 할머니들 뭐라고... 신은 뭐라고 하면 조물주라고 했죠, 기독교 들어오기 전에. 조물주 뜻이 뭡니까? 세상을 만들어낸 어떤 분이 계시다 이 말 아닙니까? 조물주. 조물주에서 파생된 자가 다들 귀신, 그런 영적인 것을 귀신이라 했고. 그래서 떡 할 때 귀신, 이사 갈 때 귀신, 결혼할 때 귀신. 그 귀신들한테, 그리고 그때 그 지역에 또 귀신들이 있어요. 그쪽 지역에 가면 그쪽 귀신의 말을 이렇게 뇌물 주든지 이렇게 해서 잘 보여야 무사히 통과되고 이런 거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인간 짓기 전에 신이 먼저 있다면 인간과 신이 어떤 경우라도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겁니다, 어떤 경우라도. 연결되어 있는 연결 부위를 찾자는 겁니다. 연결부위를 찾자. 신은 보이지 않잖아요. 보이지 않는데 보이는 것은 같은 인간들밖에 없지요. 이걸 ‘종’이라고 합니다, 종. 그리고 다른 동물들과 다른 짐승들과 있으면 그걸 동물 ‘류’라고 하고. 종보다 한 단계 추상적으로 높은 개념을 또 취해요. 인간이 신을 연결할 때 여기서 플로티노스라는 사람의 아이디어를 차용합니다. 그래서 플로티노스라는 사람이 27번에 나오죠. 여러분, 지금부터 플로티노스에 대해 잠깐 언급을 하겠는데, 이 플로티노스 사상을 들어버리면 이런 생각 들 거예요.

”뭐 우리 이제 더 할 거 없습니다“. 왜? ”신에 대해서 전부를 다 이야기했기 때문에“. 플로티노스가. 그 뒤에 나온 사람은 플로티노스가 한 말을 기계처럼 되풀이한 것뿐이에요. ”고객님“ 할 때 있잖아요, 기계음 나오죠. 그것처럼 나머지 모든 신학들은 플로티노스가 말해놓은 기계음에 불과한 거예요. 왜냐하면 플로티노스는 원으로 그린 거예요, 원으로. 꼭 원불교 같아요. 원으로 하나되어 있고 중심으로 있고 중심이 신이고, 여기에 반경, 반지름이 있고 반지름이... 여기서 영혼이 있고 이 사이에는 정신으로 꽉 차 있다는 겁니다. 영혼은 점점 살아가면서 정신을 통과하면서 신에게 도달한다는 겁니다. 여기 22페이지 밑에 중간에 보면 있습니다. 하나를 중심으로 신에게, 하나를 중심으로써 점차 파악해 가는 거예요.

여기 반경이니까 여기 수많은 인간들이 배치되어 있겠죠, 배열되어 있겠죠. 너, 나, 여자, 남자, 어린애, 할아버지, 돌아가시는 분, 산 사람 있지만, 그 모든 것은 정신이라는 걸 통해서 전부 다 하나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냐 하면 이걸 오늘날 말로 ‘유출설’이라고 해요, 유출설. 호스에다가 물을 뿌리면 물이 나오잖아요. 뭘 통해서? 호스를 통해서 물 뿌리죠. 그 물은 가로수의, 전신주의 물은 어디서 나온 거예요? 수돗물에서 나왔고 수돗물과 가로수 사이에 뭐가 있습니까? 고무호스 있었죠, 고무호스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진공은 있다, 없다? 진공은 없는 거예요. 모든 것이 물이 그냥 가로수에 있는 게 아니고 뭔가 경과했고 통과한 거예요.

통과하고 경과한 것이 뭐냐 하면 이 세상에 꽉 차 있는데, 이 정신은 뭐냐? 신의 속성이 됩니다, 신의 속성. 신의 속성, 신의 자비와 편재성과 온유함과 이 모든 것. 신의 자비를 온유라고 하는데 사실은 플로티노스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이건 어거스틴이 그렇게 이야기했고, 플로티노스는 뭐냐? 인격적인 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신의 솜씨, 이렇게 보시면 좋아요. 아름다움. 그러니까 시인과 예술가들은, 교회 안 다니는 예술가, 음악가들은 자기가 비록 교회는 안 다니지만 자연을 통해서 뭘 봅니까? 신의 장엄한 숭고의 미를 찾아내잖아요, 숭고의 미.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꽉 들어차 있다고 보는 겁니다, 아름다움으로. 이 이론을 어거스틴이 가져옵니다. 가져와서...

인간이 영혼이 있다면 그 영혼은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신을 닮아가는 목적이 있다. 토마스 아 켐피스가 그렇게 이야기했죠, 예수 그리스도 닮기. 현재 모든 장로교, 성결교, 특히 성결교, 장로교, 침례교도 마찬가지지만, 예수 믿고 그냥 입 닥치지 말고 더욱더 말씀에 정진해서 신을 닮아가자. 그리고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죽였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하는 모든 이론도 이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주신 것은 그냥 썩어버리자고 한 것이 아니고 말씀을 준행함으로 말미암아 신의 영광과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애써 악은 버리고 선을 채택함으로써 보다 더 깊은 선의 세계로 나아가야 된다"는 그 모든 것이 플로티노스의 그림 한 방에 끝났습니다. 그림 한 방에 끝나버렸어.

어거스틴은 이 내용을 신학적인 내용을 채우는 겁니다. 그 채우는 것은 두 번째 시간에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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