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호

시민대학강의3-1

아빠와 함께 2026. 8. 12. 08:10

신학자 잖아요. 지난 시간부터 첫 번째 등장한 것이 탈레스. 세상의 모든 것이 축축하니까 물로서 되었다, 탈레스. 신이라는 것은, 신이 이 땅에서 물을 주었고, 물에서 모든 것이 나왔다. 창세기 1장에 보면 비슷한 말이 있죠. 처음부터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있다 이렇게 돼 있죠.

두 번째가 아낙시만드로스, 이게 저번에 말씀드린 건데 이것은 하나로 정할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을 아페이론이라 하는데, 무한정.

세 번째가 아낙시메네스, 이 사람은 공기. 공기가 농축되면 그게 물질이 된다 하는 이야기를 했고.

네 번째가 피타고라스. 이 피타고라스 이 사람은 아주 천재라 할까요? 물질이 아니고 그냥 수, 모든 수. 피타고라스는 어떻게 알았냐 하면은 기타 있잖아요, 기타 손을 잡고. 기타 손을 딱 쥐고 딱 하니까 수적인 비례에 따라서 일정한 소리가 나니까 '아, 이 우주라는 것이 정확한 숫자에 의해서 딱딱 정리되었다, 배열되었다.' 그렇게 언급한 겁니다. 벌써 이 피타고라스 정도 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언급하는 거예요. 신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거기서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보이는 세계를 만들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 다음에 아낙사고라스는 어떤 근본적인 씨앗이 있다 해서 오늘날 과학의 원자론의 시작이 되는 겁니다. 원자론. 시작되는데 그 구체적인 원자론은 다 데모크리토스 거기서 되지만, 원자론에서 인간은 이렇게 나눌 수 없는, 쪼개고 쪼개도 결국은 나누어지지 않는 어떤 씨앗이 있다. 보통 도토리도 씨앗이 있죠? 민들레도 씨앗이 있고. 이 모든 만물은 씨앗이 있다 이렇게 시작한 것이 아낙사고라스고.

그 다음 다섯 번째 파르메니데스라는 사람은 그야말로 상당한 천재예요. 왜냐하면 세상이 아무리 달라져도 그 존재만큼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이 얼면 뭐가 되죠? 얼음 되지요. 얼음이 녹으면 물 되지요. 라면 끓일 때 물 뜨거우면 수증기 되지요. 수증기, 물, 얼음 돼도 뭐는 동일합니까? 물이라는 존재는 동일하잖아요. 그래서 이 세상의 변화라는 것은 그냥 변화할 뿐이지 변화하지 않는 것은 오직 존재다. 그 존재를 숫자로 1로 표시하면 하나, 하나의 존재에서 나왔다 이런 겁니다. 이 사람의 사상을 받은 사람이 플라톤이라는 사람인데 그것은 오늘 이 시간에 할 거예요.

그 다음에 여섯 번째 헤라클레이토스, 이 사람은 반대입니다. "흐르는 물에 두 번 목욕할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이것은 뭐냐, 모든 것은 고정되지 않고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겁니다. 파르메니데스는 변화해도 그 물질은 하나다 하는 것이 파르메니데스고, 헤라클레이토스는 어차피 모든 것은 변한다, 이 불 같은 것, 모든 것이 고정된 게 없다, 인간? 인간도 변한다. 그런데 파르메니데스는 인간의 존재는 하나다, 그 의견 대립이 있어요.

지금 이 모든 것은 신이 이 세상을 어떻게 만들었냐 그 이야기입니다. 특히 여섯 번째 거론한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사람이 신학자로 등장하는데 여기에 중요한 게 있어요. 교재 중간에 보면 로고스라는 이야기가 나와요. 로고스. 이 로고스라는 게 모든 만물의 어떤 법칙을 가지고 로고스라 부릅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 법칙이 있다는 것. 동양 철학에서 이걸 '이(理)'라고 해요. 그 개설한 강좌에 보면 명리학 있죠? 사주 보는 거, 점치는 거, 주역 하는 거요. 그게 뭐냐 하면 헤라클레이토스의 이론에 의하면, 이른바 로고스예요. 장래는 음양의 조화에서 어떻게 달라지느냐가 본인이 갖고 있던 본래 법칙, 오행 법칙이 있는데 그 오행 법칙이 서로 맞아떨어져서 미래가 결정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어느 시에 태어났고 어느 날짜에 태어났으면, 그 시와 날짜는 로고스에 의해서 결국 내 인생은 이렇게 된다는 것을 경험상 정리한 게 주역이라는 겁니다. 그게 사실은 서양에서 헤라클레이토스가 이미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리고 또 하나 헤라클레이토스가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은, 로고스 안에서 –음양. 동양으로 말하면 음양인데- 서로 대립적인 요소가 있다는 겁니다. 그 대립적인 요소가 서로 부딪히면서 모든 것이 변화가 된다. 그냥 변화되지 않고, 당구공이 가만히 있으면 움직이지 않죠? 당구공은, 큐대로 당구공을 쳐버리면 다른 당구공이 와서 쳐서 움직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말은 자체적으로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뜻입니다.

나중에 헤라클레이토스 뒤에 스토아학파라는 게 나올 거예요. 스토아학파는 세상의 모든 일은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딱 불교에요 불교. 인연이 있다. 만남에서, 인연에서 되었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 관계라는 뜻이에요. 내가 나 된 것은 어떤 원인이 있는데 그 원인에 의해서 내가 나가 되었기 때문에 세상을 그렇게 슬퍼하지 말자는 주의입니다. 세상은 좋은 게 좋다는 이야기죠. 이게 기독교로 들어와버리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로마서 8장에 나오는 말씀하고도 연결되는 것처럼 느껴질 거예요.

그래서 내가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이라는 것은 이렇게 신을 이야기해도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의 행복. 내가 얼마나 행복하냐?, 내가 얼마나 편하냐? 그것과 연결해서 신을 염두에 둡니다. 사실은 그게 우상숭배이지만.

그 다음에 나오는 엠페도클레스. 엠페도클레스는 이것만 기억하면 되요. 세상의 모든 것은 사랑과 미움으로 되어 있다. 사랑하고 미움. 딱 두 가지밖에 없어요. 사랑은 뭐냐?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이고, 미움은 ”좀 떨어져 나가도! 나 당신과 있기 싫어“하고 떨어져 나가는 것이고. 세상의 모든 움직임은 사랑과 미움. 미움과 사랑으로 결합되어있다. 붙어 사는 것은 아직 사랑한다는 뜻이고, 갈라서는 것은 더 이상 사랑이 없고 밉다는 뜻이고.

그리고 데모크리토스는 아까 씨앗에서 나온 원자론을 이야기했죠. 지금의 과학이 말하는 분자나 원자론 있잖아요. 이미 데모크리토스에서 이미 언급과 힌트를 준 거예요.

그 다음 프로타고라스. 프로타고라스는 지난 번에 설명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진리라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 나름이다. 모든 진리는 내가 어떻게 진리라고 이야기하는가에 따라서 진리가 결정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프로타고라스를 조롱을 했어요. 뭐라고 조롱했느냐하면은,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 하지 말고 돼지가 만물의 척도라 해도 상관없지 않느냐. 니 돼지야“라는 식으로 욕을 한겁니다.

자, 오늘 11번째 소크라테스를 봅시다. 소크라테스 많이 들었지요?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는데 이건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닙니다. 아테네의 델피 신전에 여신을 섬겼거든요. 그 신전에 기둥에 있던 당시 격언이에요. 그 당시 사람들이 다 알고있는 겁니다. 거기에는 ‘너 자신을 알라’하는 뿐만 아니라, 다른 문장도 있어요. 어떤 문장이 있느냐하면은, '어떤 환경에 있든지 네 자리를 지켜라' 하는 문장도 있어요. 니 자리 지켜라.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고 이야기 했기 때문에 그게 유명해 졌어요.

그런데 소크라테스 사상에 대해서 전에 제가 뭐라고했던가요? '세상의 모든 진리는 모르고 찾아가는 중이며 우리가 하는 것은 차선책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얼마나 겸손합니까? 사람이 “나는 뭐 알았다”하지 말라. “그것도 하나의 차선책에 불과하다. 진짜 그 진리라 하는 것은 다른데 있다. 우리는 그냥 이 세상의 차선책만 취할 뿐이다”라고 한겁니다.

그 사상을 누가 물려받는가? 그 제자가 있어요. 그 제자가 누구인가? 물려받은 제자가 유명한 플라톤입니다. 그 플라톤이 스승을 닮아서 뭐라고 이야기했냐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플라톤은 세상의 모든 것은 물질에서 정신으로 나아간다고 했습니다. 물질은 눈에 보이잖아요. 책상. 보이는데, 정신은 눈에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안보이지만 정신은 있잖아요. 안보이지만. 우리가 기계가 아니잖아요. 우리에게 정신이 있잖아요 정신이.

그러면 정신이 우리의 두뇌에 있습니까? 두뇌를 쪼개보면 거기에 두뇌 세포가 있지요. 두뇌 세포는 있지만 두뇌 세포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거기에 정신이 있어요 없어요? 없는거에요. “아하! 세상의 모든 것은 눈에 보이는 물질과 보이지 않는 정신이 결합된 거구나”라고 플라톤은 이야기 했습니다. 이것은 이미 그 선생님 되는 소크라테스도 언급을 했어요. 그 내용은 교재에 나와있습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근육질과 보이지 않는 정신에 의해서 결합되어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 정신을 뭐라고 하느냐하면은, 영혼이라고 이야기해요. 영혼. 기독교가 들어오기 400년 전 이미 철학에서 사람은 물질과 영혼으로 되어 있다고 이미 정리했어요 안했어요? 정리했지요. 사람이 물질과 영혼으로 되어있다. 육과 영으로 되어있다는 것이 이미 기독교 들어오기 전에 정리했다는 말은. 그게 기독교 사상이다? 아니다? 아니지요 아니지요. 그게 기독교 사상이 아니라 철학에 불과한 거에요.

그런데 교회에서 목사들이나 교회들이 이해를 할 때, “그래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과 영혼을 만들었어". 이렇게 되어버리면 그것은 플라톤 사상이지 기독교 사상으로 볼 수 없어요. 나중에 그것을 기독교 사상이 베낀거에요. 베낀거. 왜 그것을 교회가 베꼈을까요? 왜 그것을 교회가 이용했을까요?

불교같은 경우에는 ”고생스러운 세상에서 욕심을 줄이면 행복해질 수 있다”.-인간은 행복이 목적이니까요- 해서 자기 자신을 치지만. 그런데 기독교는 뭐냐? 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뭐,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니까 어쩔 수 없고, 영혼과 하나님 주신 복음과 연결이 될 경우에는 육도 살고 영도 살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기독교에서 훨씬 편리하지요. 불교에서 맨날 머리깎고 도 닦는 것 보다도, 평소에 그냥 세상살이하다가 주일에 예배당 와서 예배 참석하는 것으로, 그런 식으로 영혼 구원을 받으면, 나중에 물질도 같이 영광스럽게 된다는 구조가 훨씬 편리한 것이죠. 종교로서.

돈과 과학이 발달해도 뭐는 채워 줄 수 없습니까? 물질은 채워줄 수 있는데, 이 정신의 편안함을 채워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기독교가 플라톤 사상과 결합이 되어서 그 수많은 천년세월. 로마의 천년세월, 그 이후의 신성로마제국, 유럽의 정신 사고를 플라톤 철학과 결합해서 충족시키고, 만족시키면서 그 가운데 나온 것이 뭐냐 삼위일체가 등장한겁니다. 오늘 강의는 주가 삼위일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거기에 집중할겁니다.

자, 이 플라톤의 아이디어가 이렇습니다. 물질에서 정신으로 나아가는 것은, 이 변화되는 것은 생성이라 하는데, 이 생성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은, 이 눈에 보이는 이것을 플라톤은 그냥 눈에 보이는 세계라 하지않고, 이걸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현상계'라고 합니다. 현상계. 눈에 보이는 현상계. 눈에 보이는 아래쪽이 현상계라면, 위쪽은 뭐라하냐면, ‘형상계’. 형상계.

기독교에서 뭐라하죠? 인간은 어떻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라고 하지요. 기독교 들어오기 전에 플라톤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어요. “신의 형상이 인간의 영혼을 만들었다”라고 그렇게 보는겁니다. 인간의 영혼은 물질에 속한 것이 아니라, 정신에 속한 건데. 이 정신 세계는 ‘형상계’와 관련되어있어요. 물질세계는 ‘현상계’와 관련되어있고. 이 플라톤 이야기를 하게되면, 이 기독교 복음보다 훨씬 더 쉽게 되어있어요. 아주 편리하게 되어있습니다.

생성이니까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변화’이지요. 헤라클레이토스. 아까 이야기했지요. 모든 것이 변한다고요. 모든 게 변하면 내가 달라지면, 나는 없잖아요. 원래 나라고 하는 것은 안 달라져야 되는데. 내가 달라져버리면, 내가 누구누구라고 매일 달라지면 안되잖아요. 그렇잖아요? 불교에서는 우리는 자꾸 없어지니까, 유식 불교에서는 우리 자체를 없애지만. 우리를 없애도, 없애놓고 남는 뭐를 자꾸 남기고 싶잖아요 인간은.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존재’라고 합니다. 존재. 쉽게 말하면 ‘나’.

세상은 달라져도, 현상계는 끊임없이 변하는 '생성'의 세계이고, 형상계는 변하지 않는 '존재'의 세계입니다. 나이가 60, 70이 되어도 뭐는 변하지 않는다? 나는 변하지 않는다. 어릴 때 찍은 사진이, 비록 그 시절의 얼굴이 아니더라도, “쟤 누구에요?”라고 하면, “걔 나야 나!”라고 지속성, 연속성을 유지할 수가 있는 거에요. 이게 지금 기독교 사상이 아닙니다. 이거 무슨 사상이라고요? 플라톤 사상입니다. 이 플라톤 사상이 나중에 세월이 지나서 계속 나아가면 이게 기독교 신학이 되요. 칼빈, 루터,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의 밑바탕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이 80인의 신학자를 하면서, 그 바닥을 들춰내야되요. 마태복음 7장에 보면,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지요? 무너져야 되요. 반석 위에 지은 집만, 마지막 심판때 살아남잖아요. 신학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신학에 대한 정보를 앎으로서 자기의 구원에 보탬이 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철학이에요. 신학의 모습을 한 철학. 밑바닥에는 철학이에요. 특히 그 밑바닥에는 플라톤 철학이 깔려 있습니다. 이 이론이 700년 후에, 신 플라톤 주의가 나와요. 플로티누스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신플라톤주의인데. 신플라톤 주의에서 기독교 신비주의 사상이 거기서 시작이 되는겁니다.

하던 이야기 마저하면, 존재가 되는데, 존재는 영속성이니까 숫자로 치면 2일까요. 3일까요. 4일까요? 존재는 영속성이고 지속성이니까. 숫자로치면 뭐가 될까요? 1. 그래서 이거는 하나에요 하나. 그래서 신은 하나에요. 그런데 생성되는 것은 여러 가지 나뿐만 아니고, 많은 것들이 있으니까. 여럿이 되는겁니다. 여럿. 하나의 세계는 형상의 세계. 여럿의 세계는 현상계의 세계. 이렇게 나눕니다.

여기서 이제. 문제점이 있어요. 뭐냐하면은, 여기서 "여럿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느냐"는 그 문제에 직면했어요. 여럿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느냐? 플라톤은 대답이 없습니다. 왜 플라톤이 대답을 하지 않느냐하면은. 물질과 정신은 분리되어있거든요.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이미 인간에게 정신이 이미 갖춰졌다면 물질이 어떠한가는 정신보다는 중요해요 안 중요해요? 안 중요하지요. 돈이 많다. 어제도 SK 그룹의 회장 부회장 전부 다 구속 됐잖아요. 그 사람들이 하루세끼 밥 못먹는 사람입니까? 돈이 많은 사람이죠? 돈이 많은 사람인데 지금 교도소에 가 있잖아요. 지금 구속되었으니까요. 그런데 홀로 사는 할머니. 영세민인데 지금 교도소 안가고 대전시에 살고있잖아요. 자, 둘중에 어느쪽이 행복합니까? 세상적으로 봤을때는? 돈이 있으나 없으나, 마음만 정신만 괜찮으면 행복하지요? 플라톤이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여럿에서 하나로 어떻게 가느냐라고 그것을 생각하지 말자. 왜? 이미 정신적으로 안정이 되어 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그것에 대해서 따지거나 구태여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플라톤 자체가 철학인 동시에, 종교하고 비슷하죠? 이 세상에 변화하는 것. 그냥 생성하는 것. 생성 해봐야 끝이 없거든요. 생성하는 것은 계속 생성하니까. 날마다 변화하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애닳지 말라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부모가 되어서 자식을 가르칠 때, “얘야 너는 공부 잘했으면 좋겠다”라고 한다고 해서, 자식이 공부 잘해집니다? 공부 잘 할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고. 그럼 부모입장에서 어때요? “잘 할때는 행복하고, 못하면 불행하고”. 이러면 부모의 정신이 안정감이 없잖아요. 그럼 부모는 어때야돼요? 어른이니까. “그래 공부 못할때도 있고, 잘할때도 있느니라”라고 안정감 있을 때는. 이것은 뭐가 되느냐하면, 형상계에 가까우면 이게 정신적으로 물질을 이긴 셈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살자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에요.

그러나 제자가 있어요.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제자가 있습니다. 제자가 말합니다. “그렇게 못살겠다!”라는 겁니다. 왜 못사느냐. 사람이 욕심이 있는데, 사람에게는 희망과 기대치와 소망이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이런 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그것은 비현실적입니다. 선생님. 나는 따져야 되겠습니다" ”뭘따져?“ ”이 형상이라는 것이 어디서 나왔는지 따져야겠습니다. 선생님은 위에 정신세계 따로 있고, 물질에는 이게 없다고 하는데. 저는 반대합니다. 하나님 형상은 저 멀리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사물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하는 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어딨느냐? 개개인마다 다 들어있다라고 보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에요. 하나님의 형상이 개개인마다. 개개인마다 들어있으니까 이것을 신학하는 사람들이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이런 사람들이-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이 사람의 이야기와 신학, 기독교와 결합시키면 기독교 윤리가 나올 수 있어요. 기독교 윤리라는 것은 뭐냐하면은, "당신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니까 그걸 잘 키울때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하고 언급을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형상이 저 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속에 이미 들어있어요. 그 들어있는 것을 끄집어 내서 잘 개발하게 되면 – 성경말씀에 거룩하라. 거룩하라라는 말씀 나오잖아요- 더 거룩하면 할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라고 할 때 교회에서 대중들에게 말빨이 서고, 뭔가 할 말이 생기고, 윤리적으로 사람을 개종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겁니다. ”똑바로 살아라. 술끊고 담배끊고 똑바로 살아라“라고 이런식으로 언급을 할 때, ”그래. 술끊고 담배끊고 나는 이제부터는 천사가 되는거야“라고 어떤 희망을 줄 수 있지요. 살아 있을때는 현상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는 형상계에 가야되기 때문에. 형상계 가기 전에, 현상계에서 형상계로 입학 할 만한 마음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마음 준비 하기위해서는 누구의 지시를 따라야한다? 목사의 지시를 따라야 하고, 목사의 지시를 왜 따라야하는가? 왜냐면 목사는 성경의 전문가니까. 아마추어가 전문가의 말을 잘 따르게 되면, 우리는 죽어서 어디간다? 신의 나라에 합류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기독교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결부해서 이렇게 사용할 수 있다는 거죠. 이게 기독교 오기전에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있는 겁니다. 그게 옳은 이야기 일까요?

신학에는 조직신학(교리신학)이 있고, 교회사(역사신학)가 있고, 목회학이 있어요. 그 다음에 뭐냐? 성경신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신학이라 하는 것이 신구약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목회학은 교회 행정학, 예배당 어떻게 하면 세금 줄이느냐 이런거. 장로나 목사하는 일은 이런 거 하는 거. 교회사라는 것은 교회 사회, 교회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중에 제가 아까 이야기 한, 교리신학. 그 조직신학 교리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신과 인간의 '공유적 속성'이 있고, '비공유적 속성'이 있다고 합니다. 들어 보신 적 있으십니까? 교리 신학에. ‘공유적 속성’이라 하는 것은, 신의 형상을 입은 인간이, 짐승과는 달리 신과 유사한 속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하면, ‘거룩하고, 선하고, 착하고 양심‘ 이런 것들. 그럼 ’비공유적 속성‘은 뭐냐 하면은, 인간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해내지 못하는 것. 전지전능한 것. 미래를 미리 예측하는 것. 그 다음에 절벽위에서 뛰어내려도 안죽는 것. 죽었다가 다시 부활되는 것. 이런 인간이 못하는 것을 비공유적 속성이라 하는거에요.

그래서 그것을 가르치게되면, 공유적 속성은 개발하면 되고, 비공유적 속성은 성령의 은사로 부여받으면 되는거고. 그러면 개발하는 거나, 부여받는거나, 그 마지막 도착지점은 어디에요? 바로 누가 잘된다? 내가 잘된다! 내가 잘된다니까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야! 내가 신처럼 될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교회에서 얻을 수가 있는 거에요. 이게 오늘날 기독교의 내막입니다.

그런데 이 사상의 선배가 있어요. 기독교 사상 나오기 전에 선배가 있는데. 그 선배가 성경에 뭐라고 하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 절제와 자기 관리를 함으로써, -관리와 절제를 그냥 하는 게 아니에요. 날짜 정해서 해요. 고난 주간. 이렇게 날짜 정해서, 스케줄에 따라서- 내가 하나님의 원하는 모습과 형상으로 점차 접근해 나가고, 달라질 수 있는 그런 희망을 그 당시 백성에게 준 겁니다.

그들이 금식하면서 자기 자신을 때리면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스케줄에 따라서 하는 그 시점에, 예수님은 무엇을 하시느냐 하면은, 죄인들과 함께 술잡수셨어요. 음식과 술 드셨어요. 그러니까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우리는 회개 금식을 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술과 음식을 먹는 구나”라고 할때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

우리가 그 성경 내막을 알기 이전에, 그것을 알려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사상이,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얼마나 유사한가를 알아야해요. 얼마나 유사한가를 알아라. 그것을 앎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말씀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라는 거죠. 주께서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실 때, “아! 이런 내용일 거야”라고 쉽게 생각해서는 어긋납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예상을 넘어서요. 하지만 인간들은 주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가 갖고 있는 이러한 철학에 대해서, “내가 신이 될 수 있는 아이디어에 대해서 예수님이 어떤 힌트를 줄 것이냐”라고, 그 힌트만 뽑아 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하여튼 인간은 신이 못되서 환장했어요. 이게 선악과 따먹은 후유증입니다. 환자의 후유증이에요. 당뇨걸린 사람은 당뇨 후유증이 있잖아요. 인간들은 모두 아담부터 환자가 되어가지고, 어떤 환자냐하면, 신이 자기 자신만 알아달라는, -자아 실현의 욕구라하는데요. 제일 밑에가 생존의 욕구고, 제일 끝이 뭐냐? 자아실현- 천상천하유아독존. 이것은 불교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이 오직 자기 자신만 사랑하고 끝까지 궁극적으로 자기밖에 몰라요. 이게 환자들이라니까요.

그런데 이걸 고칠 약도 없어요. 병원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그 짓 하다가 늙어서 죽으면 그만이에요. 저주를 외부에서 찾지 마세요. 저주라하는 것은 내가 이 몸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저주입니다. 배고프다고 밥먹여줘, 잠온다고 침대사줘. 뭐 사고싶다고 백화점 물건 사줘. 도대체 이 육신의 뒤치다꺼리 하다가 평생을 다 보냅니다. 이 육신. 그러면서도 이 육신은 보람도 없이 쭈그러지고, 탈모약 뿌려도 머리털 빠지고, 그러다가 나중에 치매 걸리면, 불뚝불뚝 화내가지고 자식들 괴롭히고. 치매걸려서. 도대체 나란 존재가 뭐냐 이말이죠. 지밖에 모르면서.

교회가서 비는 것처럼. 자기 새끼 공부 잘하고 사업 잘되는 그것만 빌고, 자기 교회 부흥되고 목사도 선교사 보내서 돈뜯고. 이게 뭡니까? 이게. 얼마전에 000 이 사람 죽었지요? 그 사람이 처음에는 돈 벌려고 별들의 고향. 이런 것 책 짓다가. 나중에 죽을 쯤 되어서, ‘진리가 무엇이냐’. 이것에 대해서 글 썼어요. 어제 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하지만 무슨 소용있습니까? 진리도 모르면서. 연구해서 알 것같으면. 기껏 연구해봐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못 따라갑니다. 이 사람들은 천재적이에요. 그래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렇게 유명한 겁니다. 후배 사람들이 아무리 연구해도, “야~ 공부많이 했네. 옛날 사람이지만 공부 많이 했네”.

이 모든 공부의 끝은 뭐냐? ‘인간이 어떻게 선해질 수 있느냐’. 윤리입니다 윤리. 인간의 마지막은 윤리에요. 선과 악에 관한 아이디어를 얻어서, 악은 죽이고, 선을 행하면, 나는 어떤 존재가 된다? 신처럼 저주나 징벌을 받지 않고, 징계를 받지 않는, 나는 뭘해도 복을 받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된다.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를 교회나 불교나 성당이 그걸 충족시켜서 장사를 하고 있는거에요. 장사.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는데, 교회 가보세요. 전부 다 훌륭한 사람들이에요. 헌금도 많이 해. 인자해. 자비로워. 성령의 열매라. 희락과 자비. 이게 넘쳐나. 속에는 썩어가면서. 목사부터 그래요 목사부터. 위선자인데.

그다음에 15번째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 봅시다. 12페이지. 스토아학파는 뭐냐 하면, 세상에 '로고스'라는 게 많이 등장해요. 로고스는 아까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이미 언급했죠. 선배들이 말하는 로고스가 뭐라고 했습니까? 세상에는 이치가 있다는 겁니다. 그 이치가 로고스, 소위 말하면 과학의 법칙처럼 보면 됩니다.

과학의 법칙에서 물이 왜 위에서 아래로 떨어질까요? 지금의 과학은 물이 아래로 떨어지는 이유가 중력 때문이라고 하죠. 중력이 물 분자를 당겨서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위아래라고 하는 게 사실 없어요. 중력이 센 쪽으로 약한 쪽이 끌린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현재의 로고스에서는. 그런데 조금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서로가 서로를 당긴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엠페도클레스는 서로 당기는 걸 중력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사랑'이라고 표현했어요. 감정적인 은유를 사용해서 끌어당기는 건 사랑이고, 떨어지는 것은 '미움'이라는 거죠. 같은 성끼리 떨어지는 게 미움이고, 다른 성끼리 끌어당기는 것은 사랑이고. 세상은 사랑과 미움, 즉 떨어지는 속성과 결합하는 속성으로 모든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은 곧 우리의 미래나 장래의 운명도 이 두 가지로부터 예측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이게 바로 중국의 주역 같은 거잖아요. 그 주역을 우리 신체에 적용시키고 오행을 대입하면 한의학이 되는 겁니다. 한의학의 근본은 우리 몸을 우주의 일부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이 몸 자체보다 몸 바깥에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환경에 따라 몸의 모든 기와 경락의 기가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좋은 환경에서는 건강되고, 나쁜 환경에서는 아토피 생긴다. 비염생기고.

스토아학파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에 따라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이렇게 등록금 내고 공부하지만, 이 교재에 있는 내용만 해도 여기 개설된 모든 강의가 다 들어있어요. 음악, 예술, 특정 문화 등 모든 분야가 다 들어있는데 그걸 세분화한 것이 바이올린 같은 겁니다. 발레를 하는 이유는 몸이 음파로 인하여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즐거워하기 때문이에요. 바이올린을 켜게 되면 이 음의 진동을 받아 내 몸과 장기들이 같이 뛰놀면서 행복해지는 겁니다. 술 먹고 2차로 노래방 가서 놀면 스트레스가 확 풀리죠? 내 몸이 일종의 빈 울림통 악기이기 때문입니다. 빈 통에서 소리를 내면 울림을 통해 서로 교류가 되고, 내가 내뱉은 것이 나에게 영향을 주면서 다 같이 행복해지는 거죠. 행복이라는 건 자연과 일치가 되면서 얻어지는 겁니다. 우울증 걸렸을 때 노래 부르면 되는데, 그게 음악 치료의 원리입니다. 음악 치료, 미술 치료, 심리 치료가 다 옛날 철학 속에 나와 있는 이야기고 우리는 그 뿌리를 보는 겁니다.

스토아학파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살라는 주의인데, 이건 완전히 불교와 같습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스토아학파=불교' 이렇게 이해해도 맞습니다.

그 다음에 에피쿠로스학파는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연'이라고 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우연에 불과하다는 거죠. 스토아 학파는 우리의 욕심을 줄이라고 합니다. 왜 욕심을 줄이라 하느냐면, 설명해야되는데요. 불교에서는 뭐라하느냐면, 인간의 모든 고통이 마음의 욕심에서 나온다고 보고 욕심을 줄이라고 가르칩니다. 이게 뭐냐하면은, 내가 원인이 되어 세상을 이기적으로 살다 보니, 내가 욕심이 생기는 건데, 외부의 자연과 일치되면 행복해지므로 욕심을 비우라는 것이죠.

그래서 불교가 말하는 것은 뭐냐? 욕심을 줄이라는 겁니다.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 머리를 깎든지, 채식을 하든지, 아니면 템플 스테이해서 꿇어앉아서 어깨에 장군죽비 맞든지. 하여튼 어떤 수단을 다해서라도 욕심을 줄이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욕심을 줄이겠다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욕심이 되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하면은, “마음 없다!?” 그 마음을 없애려고하면 뭐가 없나, 마음의 중심인 내가 없는거에요. “나 없다!” 욕심없애기 위해서 안되거든, 마음없애기 안되거든, 나를 없애면 된다는 거에요. 그거 됩니까 안됩니까? 절이라는 게 뭐냐하면 마음없애기 욕심없애기 그걸 가르치는데 아닙니까?

나중에 절에 전기세 많이 나와보세요. 전기세 물세 많이 나오면 화납니다. 마음다스리기가 어딨어요? “그래 전기세 많이 나오는 것도 자연의 이치다”.이렇게 안합니다. 따집니다. 왜? 하도 돈이 없어서. 그래서 뭐 하느냐하면은, 절에는 전부 다 사주팔자보고, 점쳐주고 굿해주고, 도를 닦으세요라고 해서, 목돈 챙겨가지고 유지를 해요. 전부다 점쟁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거기 오는 고객들도 점치러 오는거고요. 갑자기 “남편이 아픈데 어떻게 해야됩니까?”“부적붙이세요”. 전부다 점쟁이라고 보면되요.

이제 기독교도 앞으로 손님없으면 기독교가 점을 쳐야되요. “안수받으세요. 헌금 일천번제 하세요. 중보기도하세요. 그러면 나중에 축복 받을겁니다”. 이게 점쟁이 수준이에요. 옛날에 구약 때보면 여호와 섬기다가 뭘 섬겼습니까? 바알 아세라 섬겼지요. 바알 아세라라는 것은, 개인적인 겁니다. 이스라엘 중심이 아니고, 내가 잘되는거에요. 종교가. 우상숭배라하는 것은 뭐냐하면,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은 전부다 우상 숭배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아니거든요, 성경에 구약에 우상숭배 나올때는, 개인적으로 나를 위해서 한다면 무조건 우상숭배고,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 그것은 선지자고. 그런 차이가 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에피쿠로스학파는, “신경쓰지 말자”. 야 이것은 어떻게 보면 “막살자”. 세상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우연이니까, 그냥 신경쓰지 말고 살면 즐겁다. 자 이렇게 스토아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특히 에피쿠로스 학파가 이렇게 범람하니까, 여기에 대해서 기존의 철학자들이 화가 날 수 밖에 없지요. 왜냐? 결국 막살고 모든 것이 우연이니까 의미없다고 봐버리면, 뭐가 안되요? 윤리, 도덕이 안되지요.

도덕과 윤리의 차이점은, 도덕은 내 개인이 성찰하는 것을 도덕이라 하고 윤리라는 것은 이웃사람과 국가간의 관계를 윤리라고 합니다. 그 차이가 나요. 교회와서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도덕적인 것이고, 교회 와서 다른 집사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 가지는 것은, 윤리에 관한 거에요.

그러면 죄는 뭘까요? 제가 질문을 죄는 뭘까요라고 질문했는데, 다른 말로 하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으로써의 '죄'는 무엇일까요? 결국 죄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지었다고 생각하는 그것과 윤리적으로 다른 이웃과의 관계가 깨졌다고 할 때 그게 죄죠. 그래서 죄가 뭐냐하는 것은, 도덕과 윤리로써 죄를 해결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선악과 따먹은 인간들의 편견이고, 인간들의 진리관입니다.

율법을 주었을 때 그 율법은 인간의 윤리와 도덕을 개선 하기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율법은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기위한 용도가 있어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나왔지요. 어떻게 나오느냐하면. 율법에 보면, 윤리,도덕적인 면도 보이지만 –십계명같이 보이잖아요. 하나님을 니 목숨을 다해서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고- 그 중간에 뭐가 있습니까? 중간에 무슨 법이 있다? 제사법이 있죠? 제사법에서 뭐가 나옵니까? 한자로 뭡니까? ‘피’가 나옵니다. 그 ‘피’ 언약이 인격화되면, 그게 누구에요?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누가 착하냐가 문제가 아니고, 그건 선악적인 사고방식이고. 생명나무는 누가 착하냐가 아니라, 예수님.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뭐가 없다? 영생이 없느니라. 완전히 달라요.

선악과를 따먹은 자에게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율법을 줘 버립니다. 율법을 주면 –사실 율법을 준 것은, 저주 아래있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줬는데- 사람들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래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죄는 줄이고, 착한 일은 늘여야지”라고 생각하는거에요. 왜? 그렇게 되면 나는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을 이미 바리새인들이 선배격으로 해왔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이야기했죠. 그런데 그 바리새인들이 결국은 뭐냐? 거짓 선지자였다는 겁니다.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쫒아내고 권능을 행했습니다”라고 할 때, "나는 도무지 너를 모른다“라고 하는거에요. 모른다.

그 바리새인적인 사고방식으로 예수님 제자들도 갖고 있었어요.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고 묻기를 뭐라고 물었죠? "저 사람 소경된 것은,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할때에. 그 죄의 개념이 어디서 나왔어요? 바로 율법에서 나온거잖아요. 자신들은 죄를 안 지었기 때문에 자기들은 봉사 아니다 이말이거든요. 자기들은 소경될만큼 죄짓지는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저 사람은 소경되었기 때문에. 날때부터 소경된 것이,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 죄때문입니까?“라고 할 때에,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되었다“고 이야기 하면서, ”본다고 생각하니까 소경이요. 내가 소경이라고 생각할때는“ 뭐다? ”나는 본다“라고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참 어렵지요. 왜 어렵냐하면은, 우리가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어려운거에요. 따먹었기 때문에, 교회 가서 착한 사람 한번 되어 보겠다고 나서기 때문에, 이게 예수님에게 전부 다 왜곡되어 말을 해버린 겁니다. "착하면 복 받아서 대대로 자자손손 부자 되고 공부 잘하고 고부간의 갈등이 해소되고, 대신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나쁜 짓 하면 그집은 대대로 가계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목사의 안수아니면 안된다". 안수라는 것도 돈이 들어가요. 모든 게 자본주의에서는 돈입니다. 돈 안내고 복받은 법이 없어. 십일조 내서 복받고, 주일성수해서 복받고. 전부다 이게 사기거든요. 그런데 그 사기를 쳐야 사람들이 납득을 해요. 다같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사기쳐야 납득이 돼요.

복이라 하는 것은, 주님 사랑하면 그 자체가 복이에요. 얻는 거 없어도, 공부 못해도, 가난하게 돼도.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주를 사랑하는 자에게 저주가 없을지다“.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오늘 죽어도 그게 복이에요. 그냥 그리스도의 증인되는 것이지. 자기 잘남의 증인되면 안되는 거에요.

왜 오늘날 한국 교회가 이렇게 된 것은 서로가 서로를 베꼈기 때문이에요. 말씀에 관심이 없고, ”저 교회는 어떻게 커졌지?“. 그냥 모방 하는 거에요. 시스템을 모방하고, 그 목사 1대, 2대 설교하는 것을, 부목사가 모방해서 따라 하게되요.

이 결혼식에 와서 설교하는 것 보세요. 결혼식의 설교가 뭡니까? ”부모한테 잘해야 복받는다“. 이것은 윤리지. 육에서 나온 윤리지. 예수님이 만약에 결혼식에 주례를 서신다면 어떻게 말했겠어요? 장가간 자 시집간 자 다 육체에 뭐가 있을 것이다? 고난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뭐라 했습니까? 사람들이 노아시대에 홍수나기 전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 갈때에 갑자기 홍수 임해서 멸망한 것처럼. 인자가 올때도 그러하리라. 그걸 주제로 설교하는 사람 봤습니까? 못봤습니까? 못봤지요. 그게 주님 뜻입니까? 세상살이죠.

항상 자기를 부인해야돼요. 항상. 자기 부인을 하고 십자가를 져야돼지. 그냥 이 세상을 모방하면 안되요.

10분 쉽시다. 두 번째 시간에는 삼위일체에 대해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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