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드디어 여기 기독교 사상가들이 이렇게 되어 있는데, 기독교 사상가들 13페이지에 보면 이렇습니다. 동방은 모든 죄의 문제를 피상적으로 여겼고, 서방은 윤리적으로 심화시켰다 이렇게 되어있는데 무슨 뜻이냐 하면요. 동방은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말은 인간을 신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하나님의 호의로 온 거예요.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 사람이 되신 것은 “고생 많지? 내가 너를 신으로 만들어 줄게, 예수 믿으면 신으로 만들어 줄게”라는 쪽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동방은.
그러면 이 동방이 어디냐, 동방이 어딘지 알아야 돼요. 이게 서방, 동방 나누는데 로마가 멸망한 것이요, 동방 서방 달라요. 476년에 달라져요. 이거 한번 유럽 그림을 한번 그려볼게요.
이렇습니다. 여기에 이렇게 있거든요. 스칸디나비아,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이쪽은 러시아, 덴마크, 여기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이거 프랑스, 이거 포르투갈, 스페인, 이거 이태리, 스위스, 오스트리아, 폴란드, 헝가리, 여기 쭉 유고슬라비아 연방 있고, 위에 있고, 여기 그리스, 요거 터키, 이거 지금 시리아, 이 밑에 이스라엘, 그리고 여기 이집트. 딱 갈라서 이쪽 서방, 이쪽 동방이에요. 이렇게 보시면 돼요. 옛날에 나폴리 나라가 이게 중요했어요. 중앙에는 지금 로마가 있죠. 로마가 있는데 이제 유럽 역사를 보게 되면 여기 아헨이라고 있습니다. 아헨, 이 동네가 한때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이기도 하고요. 여기 이제 파리가 있고, 파리보다 더 중요한 게 리옹이 있었어요. 한참 이렇게 중요했는데 역사가, 런던이 여기 있겠죠. 이쪽에 서방이고, 이게 동방입니다.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 비잔티움이라고 이야기해요.
비잔틴, 비잔티움이라 하는 것은 콘스탄티노플, 여기 지금 이스탄불 옛날 이름이 비잔티움이에요. 이걸 비잔틴 제국이라고 하고, 이건 뭐냐 하면 라틴 제국, 이쪽에 있던 교구를 가지고 라틴 교구라 해요. 교구라고 하는 것은 초창기에 성경을 가르쳤던 곳인데, 초창기에는 교회가 별로 없었어요. 왜냐하면 핍박을 많이 받은 교회라서. 교회가 이쪽 동방에 있는데, 전에 제가 이야기했지만 이 교부들의 신학을 이야기할 때 유스티누스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이 사람은 이쪽 사람이에요. 팔레스타인 사람인데, 이레니우스—이름을 뭐 이레네우스라고 해도 괜찮아요—이레니우스하고 터툴리안하고 이래서 이거는 라틴 교구라고 하고, 이 투톱이라고 했죠. 판을 둘로 나누면 이해하기 쉬워요. 이쪽에 클레멘트라는 사람과 오리게네스(오리겐). 이 사람은 이쪽에 알렉산드리아, 이쪽에 동방 계통입니다.
알렉산드리아가 이쪽에 있는데 동방 계통은 안디옥이라는 여기도 중요하지만, 여기 콘스탄티노플 이것도 중요하고 하는데요. 어쨌든 옛날에 알렉산드리아가 중요한 거예요. 그러면 로마 제국의 영토가 어디까지 되느냐, 로마 제국은 이것뿐만 아니에요. 여기 시칠리아 섬이 있거든요. 이 시칠리아 섬 가까운 데가 현재 튀니지, 카르타고라는 옛날 이름, 이 카르타고 여기에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이라는 유명한 교부가 있었어요. 어거스틴이라는 사람이 있거든요. 어거스틴이 왜 유명하냐면 루터, 칼빈이 어거스틴을 그대로 모방했다고 보면 돼요. 어거스틴에게 뭐가 나오냐면 예정론이 나오거든요. 예정론.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하고 싸웠어요. 펠라기우스는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했고, 어거스틴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주장했으니까 루터나 칼빈 입장에서는 누가 짱이냐 하면 어거스틴을 완전히 옹호하는 거예요.
어거스틴, 그리고 어거스틴의 사상은 사도 바울에게서 나왔다고 루터가 이야기를 했어요. 근데 루터가 잘못 생각하는 건데, 틀린 생각이에요. 어거스틴은 사도 바울하고 직접적인 관계없어요. 어떻든 자기 신앙을 정당화해서 뭐든지 갖다 붙이는 게 주특기예요. 이 동방에서는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했듯이 동방에서는 뭐다? 신이 인간이 되신 것은 ‘힘겹게 살아가는 인간을 사랑해 주고 구원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라고 하는 반면에—그러니까 사는 것이 형편이 어려울 때 이렇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왔다—라틴(서방)에서는 뭐냐 하면 원죄가 있다, 원죄. 인간의 죄가 있다 이래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게 되면 이제 동방에서는 인류 전체를 가지고 구원하겠다는 의지가 강해요. 그래서 동방 신학에서는 철학도 결국은 예수님이 주신 것이라고 보고, 서방에서는 철학이 어떻게 구원하느냐, 성경 말씀이 구원하지, ‘그리스 철학과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터툴리안이. 철학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구원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어떻겠어요? 상당히 기존 철학과 싸워야 되겠죠.
그런데 동방 교회 쪽에는 “모든 인간은 다 신이 만든 거잖아”. 여러분 그 당시에 사람들이 골라잡기를 한다면 어느 쪽을 골라 잡겠습니까? 동방의 인기가 높겠죠. 서방은 너무 짜요. 너무 폐쇄적입니다. 동방은 뭡니까, “개방을 해야 됩니다! 아무나 오세요! 아무나 와 가지고 예수 믿으면 그게 하나님의 사랑인 줄 알고 믿기만 하면 사랑의 하나님 품에 안겨서 구원받습니다”. 이게 동방 쪽이에요. 근데 서방 쪽에는 “어딜 함부로 들어와! 교리 배워!”. 그래서 서방 쪽에서 뭐가 생기냐 하면 신조와 교리가 발달해요. 당신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검증해 보겠다 이거예요. 신조니까 딱 생각나는 게 지금도 하고 있는 신앙고백, 예배할 때 신앙고백 하잖아요. 그걸 왜 만들었냐 하면 그것에 동의하면 우리 편이고 동의 안 하면 이단인 거예요.
그러면 이 동방 쪽에서는 선배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정식으로 책을 쓴 게 아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중요한데, 동방 쪽에서는 뭘 중요하게 여기냐 하면 바로 교회의 계급을 중요시하는 겁니다. 교회의 계급을 중요시하고, “교회가 권위는 있어야지, 이렇게 느슨해서 무슨 교회가 되느냐. 교회에 딱 왔으면 11시 예배드리면 11시까지 와야 된다”고 하는데, 11시 반 정도 오고 10시 15분에 부랴부랴 왔어. 설교하는데도 문자 보내고, 설교하는 사람은 뭔가 전달하고 싶은데, 받을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전달하려고 하니까, 그래서 톤이 올라갈 수밖에 없고. 또 톤이 높다고 톤 낮추라하고.
그래서 목사가 말하면 무조건 순종하고. 목사 말을 안 들으면 지옥 보내는 방법이 뭐냐? 성례식. 성례식 세 가지죠. ‘견진’과 ‘세례식’과 ‘성찬식’. 세례식은 물 주고 신자라고 자격을 주는 거고, 성찬식은 이 떡과 이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요 몸이요 하는 것, 견진이라 하는 것은 이미 세례받은 사람이 계속해서 성령이 충만하도록 의식을 행하는 것. 의식을 행할 때 그 세례식, 성찬식, 견진식을 집사가 합니까, 장로가 합니까? 누가 합니까? 바로 신부가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만큼, 성만찬에 참석을 못 한다? 그러면 아무리 왕이라도 이건 지옥 가는 거야. 중세 때 봉건 사회, 기독교 사회에서 아무리 왕이라도 왕 노릇 하는 건 인생 금방이잖아요. 죽고 난 뒤에 지옥 가면 안 되잖아요. 그럼 누구 말을 들어요? 신부 말을 들어야 되고, 세속에서는 왕의 권한이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교황 밑에 있는 거예요. 교황이 성 베드로 성당 짓겠다고 돈 내라고 하면 돈 안 낼 수가 없는 게, 만약에 돈을 안 내거나 적게 내면 성찬식에 참석을 안 시켜버리면 지옥 갈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당시에 면벌부(면죄부)를 파는 거예요. 면죄부. 죄를 씻어주는 것, 또는 벌을 감해주는 거, 뭐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어떤 설교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의 돈이 땡그랑하고 헌금함에 떨어지는 순간 당신의 영혼은 구원을 얻습니다.’ 기부 할 것 없어요. 돈 놓고 영생 먹기. 영생과 돈을 바꾸는 거예요. 근데 그 당시에는 신부가 그렇게 이야기하고, 신부의 연합체. 교회 전체가, 교황이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아마추어 일반 교인이 거기서 이의를 못 달잖아요. 마찬가지거든요.
“십일조 하면 복 받고 안 하면 어디 가다가 십리도 못 가서 다리가 부러지고…” 이걸 누가 이야기한다? 이걸 모든 목사가 이야기하기 때문에, 일반 교인으로서는 그게 진짜 뜻인 줄 알고 따르죠. 그게 일종의 면죄부입니다. 면죄부. 십일조 해서 복 받는다는 게 세상에 돈 받는 하나님이 어디 있어요?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지 언제 돈을 받아 챙깁니까? 진짜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을 마귀가 틈새시장을 노리고 들어간 거예요. 인간이 하나님을 모르니까 마음 놓고 사기쳐도 되는 거예요.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피로 이미 끝났습니다. 피로 용서받으면 그걸로 이제 축복이고 어떻게 살아도 영생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건 예수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어요. 십자가입니다.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예요.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를 반복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지, 그냥 죽었다 살아났다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고, 지금도 성령께서 십자가로서 늘 자기를 부인하게 만들고… “나는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린도전서 2장에서 이야기했잖아요. 십자가입니다.
근데 십자가를 전하면 교회가 되지를 않아요. 행복하기 위해서 왔는데, 죽으라고 할 때, 십자가에서 죽으라고 하는데 누가 오겠습니까? 안 오죠. 여기도 보세요. 사람 없잖아요. 그래서 “적은 무리여, 너무 외로워하지 마라. 영생으로 가는 길은 좁고 착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한 거예요. 얼마나 적으냐, 12제자도 다 떠나버리고 달랑 누구만 남았어요? 예수님만 남은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10장에 보면 세상의 모든 철학과 학문은 그리스도만 안다면, 모든 것은 다 비늘 떨어지듯이 다 떨어져 나가야 돼요. 아! 능력은 십자가에 있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죽으심, ‘너를 위해서 내가 죽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하지, 나머지는 전부 다 철학 부스러기, 신학 부스러기, 삼위일체 부스러기일 뿐이에요. 전부 다.
그렇다면 13페이지에 보면 원죄를 이야기하다 보니까 라틴 교회에서는 뭐가 중요하냐면 개인 구원이 중요해요. 개인 구원이 중요해져버렸어요. 교회가 중요한 게 아니고, “개인 구원받기 위해서 교회 말을 들어야 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점점 더 개인주의가 발전해서 나중에 스콜라 철학이라고 해서 신학과 철학을 결합한 게 있어요. 스콜라 철학이 8세기부터 시작해서 10세기를 거쳐 루터 나올 때까지, 루터 이후 16세기까지 신학과 철학이 이어지는데 그걸 스콜라 신학 또는 스콜라 철학이라 합니다.
점차 하나님 위주에서 하나님 덕보자라는 쪽으로 철학이 발전합니다. 그 끝에, 그 연장선상에 누가 나오냐, 데카르트가 나와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그렇게 언급하고 그게 유행함으로써 거기서 근대 시민의식이 발생하고, 귀족 중심 사회가 뒤집어지고 민주주의 제도가 드디어 스며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의회 제도가 생겨서 “왕, 너도 우리 말 들어.” 왕이고 귀족이고 일반사람이고 오직 무엇을 묻느냐 하면은, 오직 법에 의해서 묻고, 이 법은 계약에 의한 것, 존 로크의 사회계약설에 의해서 모든 것은 법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이걸 법치주의 국가라고 하는데, 사실 이건 로마에서 이미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로마 이후에는 제국이 없잖아요. 바벨론 이후에는 제국이 없어요 요한계시록에서.
넘어갑시다. 동방 철학에서는 그것에 대해 문제가 생겨버렸어요. 어떤 문제가 생기냐 하면, 신이 인간을 찾아오는데 누가 찾아오느냐? 신과 인간 사이에 누가 찾아오는가? 로고스(Logos)가 찾아와요. 로고스. 이거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나오는 대목이에요. 로고스가 찾아오니까 이제 문제가 시작되는 겁니다. 삼위일체 논쟁이 시작됩니다. 로고스가 신이라면, 신과 인간을 연계하기 위해서 로고스가 왔는데, 말씀이 왔는데, 예수님이 왔는데, 또 로고스가 신이라면 신과 인간 사이의 연결고리가 뚝 끊어져 버리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러면 여기서 어떤 아이디어가 생기겠어요? ‘로고스가 인간의 육신만 입었느냐, 아니면 사람이 되었느냐. 인간이 되었느냐?’ 하는 두 논쟁이 삼위일체 논쟁입니다. 간단하죠? 삼위일체 끝났어요. 삼위일체가 뭐냐 하면은. 원래 하나님은 하나예요. 원래 하나님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라는 것은, 플라톤 철학에서도 이미 나왔고, 구약에 보면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신은 하나란 말이죠. 하나의 신을 믿어야 되는데, 중요한 것은, 라틴 신학에서 죄의 개념을 다루다 보니까 “너 죄인이다” 하고 끝나면 안 되잖아요. 너 죄인이다 해놓고 그 다음에 뭐가 있어야 돼요? “너 몸이 더럽네?”라고 끝나면 안 되잖아요. “씻어야 되겠어”. 이게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너 죄인이다, 하지만 네 죄를 내가 당장 씻어줄게”라고 하려면 신이 신으로만 계시면 안 되고 인간이 되어야 하잖아요.
인간이 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는 신이 됩니까, 인간이 됩니까? 인간이 된다고요. 인간만 되어버리면 이건 모범설이 돼요. 모범설이 뭔지 알아요? “인간 치고는 착하네, 건져줘야지” 이리 돼버려요. 그러면 로고스가 신이 아닌 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로고스가 신이 되려면 어느 쪽을 또 놓아야 돼요? 또 인간됨을 또 놓아줘야 돼요. 그러면 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도 설명해야 하거든요.
그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16페이지 위에서 다섯 번째 줄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아버지의 양태로 처리했다.” 노에투스의 성부고난설. 성부고난설이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에 죽을 때 아버지가 딱 내려와서 아들 역할을 했다는 거예요. 사실 아들이 아니고 아버지인데 아들 모습으로 보였다는 거죠. 사벨리우스의 양태론(가면설)도 같은 내용이에요. 성부, 성자, 성령은 가면(마스크)을 바꿔치기한 거다. 회사 가면 사장님, 집에 오면 아버지, 교회 가면 장로님, 바꿔치기하는 거죠.
이 사람들이 이렇게 주장해서 얻고자 하는 게 뭘까요? 신은 세 분이 아니고 한 분이라는 것을 유지하고 싶었던 겁니다. 신이 만약 세 분이 되어버리면 다신론이 돼요. 그러면 구약의 유일신과 끊어져 버려요. 그렇게 되면 구약이 필요없게 되어버려요. 구약이 필요없다는 것은 영지주의하고 똑같이 되어버려요. 영지주의를 반대하려면 신은 하나고 예수님은 모범적인 사람이라고 하든지, 안 그러면 하나님이 아들 노릇을 했다고 이야기 하든지 둘 중 하나밖에 없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라틴 교구는 그렇게 보지 않고 “로고스가 인간의 육신을 입었다”고 본 거예요. 로고스가 육신을 입으면 이 인성은 껍데기가 되고 안에는 신성만 들어 있게 되죠. 로고스가 살을 입었다. 육신을 입었다 하면, 육신은 별로 안 중요하게 돼요. 그러면 예수님이 우신 것은 누가 운 거예요? 눈물 흘리신 것은 육신이지만, 마음 아파하신 것은 안에 있는 하나님이 아파하신 건가? 이런 경우냐 아니면. 로고스가 인간이 되었다고 할 때, 우리 인간성과 예수님의 인간성이 만나려면.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 이렇게 되거든요.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죄를 체휼하시고, 다 느낌 아니까. 예수님 안의 문제예요. 예수님 안에서 로고스가 인간이 되었다면, 인간이 영·혼·육으로 되어 있는데 로고스는 영·혼·육 중에서 어느 부분을 차지하느냐는 문제가 생겨요. 그래서 “로고스가 인간의 지성(혼)을 대신하고 있다” 이렇게 주장하는 게 동방신학자들의 주장이었어요.
이제 대충 알았으니까 16페이지부터 봅시다. 아리우스. 아리우스는 “신은 형용할 수 없고 인간은 신을 완전히 알 수 없다”, 이걸 부정신학이라 하고. 아리우스의 기본 문제는 신과 세상을 어떻게 연결시키느냐였는데라는 문제였는데, 이 문제에 대해 아리우스에게 도움을 준 것은, 로고스였다. 로고스를 일종의 2급 신, 피조물 중 가장 탁월한 첫째 피조물이자 창조의 중재자로 봤어요. 예수님은 피조물이라는 거죠. 요새 활동하는 이단 가운데 이거 주장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여호와의 증인이죠. 이게 아리우스파예요.
이 아리우스파가 당시 유럽의 대부분을 차지했어요. 그리고 이것을 반대한 아타나시우스는 파문당하고요. “그게 아니고 예수님도 신이다”라고 이야기하다가 파문당하고 이단 취급 받았어요. 나중에는 그게 니케아 회의에서 회복되었지만, 니케아 회의 이후에도 파면됐어요. 권력에서 밀렸어요. 왜? 대세가 아리우스였으니까. “하나님은 한 분이다” 얼마나 쉬워요? 그런데 예수님도 하나님이라고 하면 시어머니를 두 분 모시는 꼴이 되잖아요. 성부를 섬기려니 성자가 섭섭할 것 같고, 성자한테 몰입하려니 성부가 섭섭할 것 같고. 어느 장단에 어느 박자에 맞춰야 할지? 사람은 두 주인을 못 섬기잖아요. “예수님 찬양합니다”하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아버지가 섭섭해하는 것 같고, “예수님 찬양합니다”하고 해놓고 “성부도 더 찬양합니다”. 이렇게 해야 마음이 또 편해지고. 가만 보니까 성령이 또 삐진 것 같아. “성령님도 역시 찬양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원에서 기도할 때 “주여” 하다가 “예수님” 했다가, 성부한테 한 번, 성자한테 한 번, 성령한테 한 번 골고루 나누어 부르는 거랑 같아요. 완전히 카지노에서 패 돌리는 것 같아.
그래서 아리우스파가 대세를 이뤘던 겁니다. 차라리 “하나님은 한 분이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 그분은 사람 모습이지만 안에는 로고스가 있어가지고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 죄를 용서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게 얼마나 복음적 기독교냐?”라고 하는 게 그 당시에는 대세였어요. 이게 아리우스파입니다.
이에 비해 아타나시우스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게서 났다."."태어났으니까 아들 아니냐 아들. 아들 같으면 아버지만큼의 그만한 권한은 없다”고 본 거예요. 그걸 가지고 양쪽 다 있는 성경 구절을 다 찾아내요. 이 성경은 이게 맞는 것 같고, 저 성경은 저쪽이 맞는 거 같고. 아타나시우스는 “났다는 것은 아버지와 동일한 실체(본질)임을 의미한다”고 주장했어요. 실체. 노는 동네가 우리하고 다르다는 거예요. 여기서 ‘실체(후포스타시스)’ 개념이 등장하니까. 또 이 실체 개념이 문제가 돼요. 실체가 하나잖아요. 실체가 하나인데 어떻게 하나님이 세 분이 되느냐? 골치 아파요. 이 문제가 또 나온 거예요.
그래서 실체가 하나라는 말을 나중에는 “본질(우시아)은 하나이고, 세 위격(후포스타시스/프로소폰)을 가진다”고 정리했어요. 본질은 하나요, 세 위격을 가진다. 3위 1체. 이것이 삼위일체입니다. 이 아타나시우스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예수님도, 성령님도 다 하나님이라고 결정한 것이 325년 니케아 공의회입니다.
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공헌한 사람들이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인데, 가이사랴의 바실리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입니다. 바실리우스와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형제간이고,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바실리우스의 친구입니다. 이 사람들의 주장은 본질은 같지만 삼위가 서로 사귐을 가진다는 것이었어요. 사랑 안에서. 18페이지 봅시다. 삼위가 일하실 때 한 분만 일하는 게 아니라 세 분이 함께 일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리시고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듯, 따로 일하시는 게 아니라 같이 일하기 때문에 하나의 본질을 이루는 다 같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 다음 22번, 아폴리나리우스라는 신학자는 “완전한 신과 완전한 인간이 결합하면 괴물이 된다”면서, “그리스도가 인간 본성을 흡수한 신적 존재라고 본 것이다”라고 본 겁니다. 뭐냐 하면 아폴리나리우스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들아 따져봅시다. 예수님이 길을 걸을 때 신이 걷는 거예요 아니면 인간이 걷는 거예요?”라고 할 때, 인간의 공유적 속성에 따라 인간도 그럴 수 있으니까. “그건 인간이 걸은 것이다”. “그럼 인간이 길을 걸으면서 아버지 생각하는 것은 이건 신성이에요 인성이에요?” “그건 신성이지”.
이렇게 돼버리면, 그건 괴물에 불과하다고 했어요. “인성이면 인성이고 신성이면 신성이지. 어떻게 신성과 인성이 따로 한 분 안에 신성도 아닌 것이, 인성도 아닌 것이 어떻게 같이 있을 수 있느냐? 하나로 몰아주자. 신성이다. 인성을 흡수한 그것도 하나님이다”라고 하자. 믿음 좋지요? 믿음 좋아도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니케아 공의회에서 신성과 인성 다 살리는 방향으로 이미 정해져 버렸거든요. 그게 신조예요 신조. 그 신조에 어긋나는 것은 무조건 이단이다라고 했어요.
그래서 저번에 말했죠. 삼위일체에 어긋나면 다 이단이다라고 했죠. 그러나 성령 안 받은 게 이단이에요. 성령 안 받게 되면 십자가를 모르는데, 십자가 복음을 안 받으면 저주받아요. 그렇잖아요? 이 십자가 복음 아니면 저주받습니다. 근데 십자가를 대체해서 삼위일체 이런 것 주장하면, 그것은 성령 받았다고 볼 수 없어요. 십자가 앞에 설 때만 인간은 자신을 뭐로 안다? “내가 저주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알지. 삼위일체 앞에 서버리면, 자기는 똑똑한 사람 되어버려요. “아 삼위일체까지 안다니 너무 똑똑해. 너무 대견스러워” 이렇게 돼요. 이것은 자아도취에 빠진 거예요. “나 미쳤어. 내가 왜 이리 훌륭해? 내가 너무 훌륭해서 미치겠어” 이렇게 돼요.
그 다음에 키릴로스(키릴)와 네스토리우스의 논쟁을 봅시다.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가 될 수 없고, 단지 인간 예수, 즉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고 주장했어요. 자, 여러분이 방금 배웠으니까. 이게 뭐가 문제가 되는지 한번 보세요. 네스토리우스는 이단 취급 받았는데, 이게 뭐냐 하면은.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해야 맞다는 거예요. 이 소리 해서 이단 되었다니까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떼어서 생각해야 된다. 그걸 양성론이라 합니다.
이에 반해 키릴로스는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결합했다”는 단성론적 입장에서 네스토리우스의 양성론을 비판했습니다. 결국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으로 정죄되고 단성론이 승리해요. 지금 니케아 회의에서는 인성과 신성이 둘 다 있고 둘 다 연합되어야 되는데, 네스토리우스는 그걸 떼놓자는 거예요. 연합하지 말고, 떼놓자는 이야기입니다.
그거하고 구원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 짓하고 있었던 거예요. 지금도 한국교회 마찬가지고요. “강도야!” “예!” “삼위일체 배웠어? 올라오라”. “강도를 오늘 밤에 낙원에 보내려고 하는데”, 천사가 “잠시만요! 이 사람 삼위일체 잠시 배우고 가실게요”. 이렇게 해서 강도가 천국갑니까? 참내. 죄 용서는 누구 권한인가 하면은요. 지가 학문을 터득했느냐를 보는 게 아니고. 그냥 예수님이 건져주면 구원받게 되어 있습니다. 건져줄 때 예수님의 피를 적셔서 건져주는 거예요. “내 살과 내 피를 먹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을 것이다”. 그 방식으로 구원하는 거예요. 삼위일체를 연구했다고 잘했다 해서 구원해 주는 것 아닙니다. 이단이다 삼단이다. 그게 내 보기에 이단이라.
지금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셔요 이 세상에서는. 심판주는 예수님이 심판주인데, 자기들이 심판주 되고 있어요. 한국교회가. 웃기지도 않아요. 내가 묻고 싶어요. “당신 삼위일체에 대해 아나?”라고 묻고 싶어요. 물어보면 답변도 못 해요 또. 신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앵무새처럼 해서 그래요. 그게 삶이 되지 못하고. 삼위일체가 삶이 돼야 되는데, 삶이 되지 못하고, 그냥 지식으로 알고 자신은 프로라고 자처하고 있는 거예요. 아마추어를 한 수 가르친다고, 그래야 돈이 생기니까.
그래서 431년에 이단 되었습니다. 아폴리나리우스는 단성이라고 해서 이단 되고, 이번에는 네스토리우스는 두 성이 결합해서 이단 되어 버리고.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신성, 인성 다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그 다음에 둘이 결합 됐다고 다 이야기해요. 결합되면 말하면 돼요. 연합. 연합이라고 이야기했어요. 결합되면, 연합되면 소통이 되거든요. 참 웃겨요.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가 되어 버리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냐 하면 빽을 썼어요. 빽을. 우리가 기도하는 걸, 누구한테 먼저 해요? 마리아한테 하잖아요. 그러면 마리아가 어머니니까 어머니한테 압력을 줄 수 있어요. “아들아” “예” “누가 나한테 이렇게 기도하는데”. 예수님이 “그거 기도 안 됩니다”. “내가 엄마 아니냐 엄마. 내 봐서 들어줘” “예, 알겠습니다” 이렇게 빽을 쓸 수 있어요. “쟤가 어릴 때 성당도 안 갔는데, 어떻게 하느냐?” “성당 안 가면 그럼 지옥 갑니다” “야~ 내가 엄마잖아. 저 후손들이 지금 내 빽을 믿고 나한테 기도하잖아”.
그걸 통공, 또는 통고라고 해요. 같이 보고, 같이 기도를 해주게 되면, 성당 안 다니고 술고래처럼 살아도, 후손들이 미사 드리게 되면 성인들이 기도를 해 줘가지고, 마리아한테 가요. 마리아가 누굽니까? 예수님의 어머니니까 어머니 빽 써가지고 아들 마음을 움직여서 연옥에서 빨리 빽 써가지고, 빼내주는 거예요. 그놈의 연옥이나 세상이나 돈 아니면, 돈 가지고 안 될 일이 없어.
연옥도 돈 써가지고 하는데요, 돈 써서. 후손들이 돈 써가지고 빼내준다니까요. 무슨 그런 하나님이 다 있어요. 그런 하나님이. 무슨 연옥설이 있습니까? 뭐 하나님이 사람을 살리지 못해 환장을 했어. 그게 바로 동방 신학에서 나온 거 아닙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아이고 인생들아 불쌍하구나. 내가 건져줄게. 예수 믿으면 다 구원해 줄게”. 세상에 그런 게.
그럴 거면 애초부터 생명나무 길을 막지 말아야지. 자기가 생명나무로 알아서 찾아가게 하려면 무조건 건져 줘야지요. 생명나무 길을 막지는 말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애써서 생명나무까지 이끌어 왔는데, 천사가 “어디를 감히!”라고 막으면 안 되잖아요. “예 여기입니다”하고 아리따운 아가씨들 와가지고 천사들 와 가지고 “생명나무로 오신다고 고생 많이 했습니다”. 이게 뭐냐? 천로역정이에요. 천로역정. 천로역정 해가지고 온 사람들, 현재 여기예요. 세상에 이게 그게 무슨 복음이에요? 천로역정이. “고생하면 구원받습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고생 안 해도 구원받습니다. 왜? 모든 인간은 어차피 고생이니까. 어차피 네 박자 아닙니까? 쿵짝 쿵짝. 그 속에 울음도 있고 슬픔도 있고 웃음도 있고 인생은 다 네 박자 쿵짝이라.
그 다음에 데오도레는 이 사람은, 이단이에요.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이 결합돼 있다. 그리스도 안에 완전한 신성과 인성이 결합돼 있다. 그래서 이 학파의 후계자인 네스토리우스는 예수의 인성은 결코 섞일 수 없으며 신성과 인성이 혼합돼서도 안 되고 결합 되었다고 했다. 아니 혼합된 것이나 결합된 것이나 참내. 이 사람도 마찬가지. 그게 뭐 그리 중요합니까? 신성과 인성이 혼합됐느냐 결합됐느냐. 그래서 데오도로나 네스토리우스나 다 이단 취급됐습니다.
거기에 그 다음에 450년에 또 하나의 이단이 등장했다는데 이게 유티케스라는 이단이 등장해요. 유티케스는 뭐냐 하면은, 그리스도가 성육신 이전에는 두 본성이 있었으나 성육신 이후에는 하나의 본성밖에 없다. 즉 인성을 신성이 흡수했다. 인성이 신성에 흡수된 것은 아까 무슨 아폴리나리우스 또 등장하지요. 그러니까 계속 등장하는 거예요. 계속. 아이디어가요. 이 사람들이 이렇게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요. 뭐냐 하면은 신학이 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납득을 시킬 수 있느냐 이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대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가니까 납득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되겠죠. 그래야 사람들을 꼬셔가지고 교회 사람들 모두 모으고, 부흥될 수 있잖아요. 신학도 이거는 고객 관리 차원에서 신학도 이게 달라져요.
그 다음에 그림 한번 봅시다. 그 그림 보기 전에 20페이지 봅시다. 20페이지 보면 필리오케 혹은 필리오퀘 라틴 원어는 필리오퀘입니다. 논쟁이 돼 있어요. 요 뜻이 뭐냐 하면 다른 뜻이 아니고 "그리고 아들로부터"라는 글이 필리오퀘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이 논쟁이 있는데 867년경에. 서방신학은, 서방 신학 아까 했죠. 서방 신학은 로마 중심. 그리고 이 동방 신학은 이제는 알렉산드리아 중심이 아니고, 로마가 망하고 난 뒤에 이쪽에 콘스탄티노플 비잔틴 중심입니다. 지금의 이스탄불이죠.
성령은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로부터 발출한다 이렇게 돼 있어요. 자, 차이점이 뭐냐 하면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온다. 그럼 성령의 출처가 몇 군데입니까? 서방에서는? 두 군데 얘기해요. 왜 서방은 두 군데 되느냐 하면, 아들도 신이니까. 아들도 신이니까, 두 군데 다 나와야 된다. 반면에 동방은 출처를 하나로 몰아붙이자. 성령은 아들 통해서 아버지로부터 온다. 왜 이렇게 하냐 하면은 전에 수련회 할 때 했지만, 퇴근해서 집에 와 보니까 냉장고가 있더라는 겁니다. 냉장고가 있는데. 누가 집에 냉장고를 보내줬냐 하니까. 그 장모님이 하시는 말이 “우리 딸 아버지가, 나한테 냉장고 사 가지고, 이 집에 딸네 집에 보내라고 했다. 이게 네 장인어른이, 나를 통해서 이 냉장고를 보냈다”. 납득되지요? 근데 냉장고가 달랑 하나잖아요. 하나인데. 장모님이 하는 말이 “냉장고는 장인으로부터도 보냈고 나로부터도 보냈다” 그럼 냉장고가 몇 대 돼야 돼요? 냉장고가 두 대 돼야 맞잖아요. 그 논리가 동방 신학이에요.
성령이 왔다면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해서 우리한테 전해졌다 하는 말이 맞는 거고 이게 동방신학이고, 아니야 성령은 아버지로부터도 오고 따로 아들로부터도 온다 라고 해야 맞다는 거야. 왜? 그래야 아까 그 니케아 회의 때의 세 신학자가 얘기한 뭡니까? 성부 성자 성령 전부 다 동일한 고유한 자기 권리가 있다 했죠. 근데 삼위일체에서 삼위가 맞다는 거죠. 근데 동방은 일체가 맞다는 거죠. 3위가 우선이냐 1체가 우선이냐? 이 싸움이 아직도 지금 등 돌리고 갈라서 있습니다. 하나는 동방 정교회. 러시아까지 다 포함한 정교회. 도스토옙스키가 믿었던 그 동방정교회, 이쪽은 천주교. 그래서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이게 필리오퀘입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어느 쪽이냐? 기독교는 어거스틴 쪽이고 이것은 라틴 신학들입니다. 그래서 이 삼위일체 속에는 필리오퀘 논쟁에서 성령은 아버지뿐만 아니고 아들로부터 온다는 것이 지금의 모든 개신교 신학교에서 다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거 하고 구원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이 어디서 오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성령을 받게 되면 내가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 피를 바라보게 돼 있죠. 그리스도 죽으신 것 외에는 일체 알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거는 성령이 아니면 아무도 이 비밀을 알 자가 없다. 사도 바울이 말한 복음은 십자가지요. 우리가 뭘 아느냐는 의미 없습니다.
그러면 한번 물어봅시다. 아브라함이 필리오퀘를 알았습니까? 아브라함이. 그럼 아브라함이 지금 지옥 가있네요? 야곱이 필리오퀘를 알았어요? 삼위일체를 알았습니까? 야곱이나 이삭은 삼위일체를 접했지요. 그냥 하나님을 접했지 안 게 아니라는 거예요. 삶 자체가 복음을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죠. 그래서 아브라함은 예수님 보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의 증인이 아니고 누구 증인? 예수의 증인. 성령은 누구의 증인이 된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자, 거기에 그 20페이지 끝에 보면 라틴. 삼위일체 정리해 봅시다. 라틴 교회는 이제 라틴 교회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이 서방 교회. 라틴 교회 전통적으로 존재론을 인격론으로. 기존의 철학은 인격적인 신이 아니에요. 근데 기독교는 철학과 다른 점은 이게 인격적이라는 거예요. 근데 인격체의 신이 되기 위해서는 로고스를 뭐로 바꿔야 하냐면, 인격적인 신의 대행자로 로고스를 그렇게 만들어야 되거든요. 만들어 보니까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양성의 위격이 이게 문제가 돼버린 거예요. 그래서 삼위일체가 발생된 것입니다. 논쟁이 있던 거예요. 그에 비해서 동방교회는 그리스도 사건의 내적 역동성을 보장한다. 위에서부터 내려와서 아래쪽을 구원해 주는 겁니다. 로고스가.
자, 이거 차이점 아시겠습니까? 라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분석함으로써 분석을 잘하면 구원받는 거고, 여기 동방교회는 아버지가 예수를 보내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거고. 그런 겁니다. 이 도식에서 이레네오스, 이레네오스 알죠? 아까 이레네오스는 교환 사상에 기초가 마련돼 있다. 로고스는 아버지의 모상이고 아버지의 형상이고, 예수의 육체는 로고스의 모상이다. 이 성부 하나님에서 로고스가 되고, 로고스에서 인간을 만드니까. 로고스는 성부의 형상이고 로고스는 아담의 형상이고. 인간 육체의 모상, 로고스의 형상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인성은 그 길 이 길에서 뒤처져 있다. 만회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영혼이다. 예수님의 영혼은 완전한 순종과 전폭적인 헌신을 다한 로고스와 결합돼 있다. 이것이 이미 오리게네스 사상 속에 이미 포함돼 있어 이런 사상들이 다 포함이 돼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삼위일체가 들어보니 좀 약간 좀 웃기지요? 삼위일체하고 구원받는 거 하고 아무 상관없지요. 자, 이제 삼위일체 정리된 겁니다! 3이냐 1이냐, 1이다 3이다. 쓸데없는 소리 하고 있네.
마지막으로 이걸 봅시다. 이 그림에 보면, 그리스도가 선포한 강조점의 이동인데. 이 책이(그림이 있는) 천주교 책이기 때문에 바울로로 돼 있어요. 이게 바울 그 밑에 마르코, 마가 그다음에 마태오, 마태 그 다음에 요한 이렇게 있는데. 그 복음서마다 내용의 강조점이 다르다는 겁니다. 왜 바울이 제일 먼저냐 하면, 바울 편지가 연대기상 제일 빨라요. 편지가. 마태가 제일 빠른 게 아니고, 데살로니가전서가 제일 빨라요. 그 완성된 게. 마태복음 첨부터 없었어요. 마태복음 그건 나중에 나온 거예요. 누가는 누구의 제작 비서입니까? 바울의 비서지요.
한번 봅시다. 바울의 시각에서는 아버지와 영과 십자가, 십자가 되어 있지요. 십자가. 참 책에서 십자가 보는 거 오랜만입니다. 십자가. 그다음에 뭡니까? 알파 오메가 있죠. 오메가. 요거 오메가. 바울에서는 곧장 종말이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종말이 곧 온다고 이야기했거든요. 그랬는데 마가에서는 뭐냐 하면, 이 종말이 오긴 오는데 그 전에 뭐가 있어야 돼요? 세례 받아야 돼요 세례. 아버지의 영으로 세례, 십자가가 아니고 십자가는 나중이고, 성령으로 세례받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십자가가 죽고. 마가에서의 강조점은 아버지와 영과 세례받는 예수님이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이건 이 사람이 그냥 주장한 거니까.
그 다음에 마태는 뭐냐 하면 십자가는 역시 중간에 있고, 그 다음부터는 종말보다 교회의 시대가 있고, 그다음에 종말은 뒤예요. 교회에 대해서 언급한 게 마태복음에 나온다. 어디 나오냐?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했으니까 교회가 중요해졌다. 그래서 마태복음이 저작되면서 아마 교회가 생기고 난 뒤에 교회를 강조하기 위해 마태가 쓰지 않았냐 그런 이론을 지금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그림은 한스 큉의 책에 나온 거예요. 한스 큉의 <그리스도교>라는 책이 있어요. 두꺼운 책인데 거기 나온 그림이 이겁니다. 지금 현재 신학자들이 이런 생각한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그 다음에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고 그 다음부터는 지금 무슨 시대입니까? 성령의 시대예요. 모든 게 성령 안에서 모든 게 이루어집니다. 그럼 종말은? 종말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 종말은 점선으로 돼 있어. 중요하지 않아.
그 다음에 오리게네스, 오리게네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인데 오리게네스는 뭐냐 하면 아들과 성령이 육신이 되고, 그 다음부터는 십자가가 있는 종말이 돼있다. 그래서 이 신학이 중요한 것은, 그 뒤에 나오는 모든 신학들은 결국 오리게네스의 아이디어에 의해서 연장선에 있다 이렇게 보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 한스 큉이 말하기를, 오늘날 신학은 바울하고도 다르고 마가하고 다르고 마태하고도 다르다. 성경하고 같다 다르다? 다르다는 것을 이 그림으로 설명을 해 준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 페이지에 그림 봅시다. 그림 보면 여기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있죠. 이게 어거스틴입니다. 삼위가 이렇게 나란히 되어 있죠. 이게 뭐냐 하면, 아까 얘기한 상호 소통하는 것, 즉 어거스틴에서 삼위일체가 완성됐다 하는 걸 설명하는 거예요. 중간은 이제 과정인데 어거스틴이 되게 되면 완성이 되는 겁니다. 자, 이렇게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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