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 관점
2026년 8월 23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6:3-4
(6:3)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더니
(6:4)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네 마리의 말들이 이 땅에 내려와서 설칩니다. 그런데 설칠 때마다 인간세상에서 싫어하는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싫어한다’는 것은 세상 살기에 불편한 상황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의 인간 삶은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8-19)
자신을 성도라고 여기고 이 본문 설교를 보게 되면, 은근히 자기 의견을 피력하게 마련입니다. 말 네 마리가 뭐가 필요할까? 흰말 한 마리만 설쳐서 이기고 또 이기면 그것으로 족하지 아니한가? 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붉다, 검한 황록색이라는 것은 구약의 예언서에 나오는 불길한 징조를 색깔로 표현한 것입니다.
즉 희다고 하는 것은 하늘 나라의 최종 승리한 바를 지상에 적용하면서 벌어지는 성격을 밝은 색으로 묘사한 겁니다. 이 흰말이 하시는 일의 결과가 성도의 출현을 낳게 했다면 이것은 분명 ‘공짜’라고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을 모든 것은 흰말 활동에서 유래한 공짜 결과를 받고 있음을 인정합시다.
그래 놓고 둘째 말과 셋째 말고 넷째 말을 대하게 되면 속시원한 하나님의 활동으로 연결될 겁니다. 즉 왜 네 마리의 말의 활동이 필요한가는 첫번째 말의 활동 결과를 감사한 마음으로 다른 말들의 활동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느긋한 입장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질 겁니다.
마치 대형 영화 스크린을 바라보는 기분으로 이 세상을 조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부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봉인된 말씀이 현실로 이어지면서 성도이든 아니든 모든 이 세상의 인간들은 그 어느 느긋한 마음으로 현실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현실을 좋은 쪽으로 평안한 쪽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하나님에 의해서 좌절당합니다.
그 이유는 생명은 고통 속에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망하기 싫고 죽기 싫다는 본심을 발굴해서 하나님의 세상 멸망시키기의 정당함을 세워야합니다. 이 원리는 구약 이스라엘 때부터 실시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특별한 민족으로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이방민족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당사자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저주 자체를 인간들은 반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주어지는 저주의 크기란 인간들의 행함에 근거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그 저주의 크기로 주어지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이 살던 곳이 풍족하고 여유있고 안정과 평안이 보장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언약의 내용과 뜻에 대해서 관심없습니다. 그들은 쉽게 언약이 없는 이방민족에 동화되어 갔습니다. 언약을 앞장 세우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선지자들은 붉고 검은 황색과 녹색이 아롱진 색깔로 표현되는 이스라엘의 미래상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붉음에 대해서는 “ 아침에 모압 사람이 일찍이 일어나서 해가 물에 비취므로 맞은편 물이 붉어 피와 같음을 보고
가로되 이는 피라 필연 저 왕들이 싸워 서로 죽인 것이로다 모압 사람들아 이제 노략하러 가자 하고 이스라엘 진에 이르니 이스라엘 사람이 일어나 모압 사람을 쳐서 그 앞에서 도망하게 하고 그 지경에 들어가며 모압 사람을 치고”(왕하 2:22-24)
즉 범국가적인 전쟁은 아니지라도 소규모 전쟁과 전투가 빈번하게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이러한 우환은 개인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집단적으로 다루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온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매달려야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소규모 전쟁이라도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무척이나 살기가 괴로운 법입니다. 즉 서민들은 직접 전장에 나가지 않고 피신해 있어도 전쟁 결과에 대한 보복과 배상에서 면제될 수 없고 모두 함께 담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검은 말에 대한 구약의 예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광야에는 칼이 있으므로 죽기를 무릅써야 양식을 얻사오니 주림의 열기로 인하여 우리의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으니이다”(애 5:9-10)
청황색 말의 활동은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네 가지 중한 벌 곧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온역을 예루살렘에 함께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중에서 끊으리니 그 해가 더욱 심하지 않겠느냐”(겔 14:21) 일단 이러한 예언은 예수님의 예언에 의해서 새로운 근거에 따라 더 명확하게 전달하십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8-9) 이러한 재난의 예언에 대해서 그 어느 인간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알하심의 공짜 활동에서 성도 본인도 같이 철저하게 예외없이 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이러합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인간들은 다 저주로서 제거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성도도 또한 불신자와 더불어 함께 고생과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성도는 이러한 삶의 어려움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합당한 정당성이 있고 그것을 그대로 실제로 발휘한다는 점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자아말고 다른 자아가 따로 하늘나라에 있음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개의 자아를 인식하고 있는 자에게는 공짜 관점을 늘 감사합니다. 나타나게 됩니다. 온갖 분란과 어려움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에게 해롭고 불편한 것에 대해서 최대한도로 방비에 나서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기껏, “나 계속 더 살고 싶어요. 잘 살고 싶어요. 나는 망하는 인생이 싫어요”라는 속마음을 그대로 노출하는 것에 해당됩니다. 타인을 보고 그들을 탓하겠지만 결국 그 원망의 끝은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태의 반복을 통해서 성도는 자기 안에 자기만이 살아남기를 원하는 마음이 들어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다루실 때 집단적으로 다루십니다. 개인적으로 누가 특출하게 성실하게 바르게 산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안 망하기는 것이 아니듯이, 이스라엘에게 특별하게 주신 기준은 이제 전체 인류에까지 확대되고 파급되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철저하게 당했던 것처럼 이제는 전 인류가 철저하게 당할 차례입니다.
네 마리의 말이 어떤 밀이지 알기보다는 그러한 재앙을 유발하는 말들의 배후에 예수님께yj 이미 다 이겼다는 사실은 힘든 지옥 생활 속에서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도가 경험하게 되는 특별한 배역을 영광스럽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1강-요한계시록 6장 3~4절(공짜 관점)260823-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6장 1~2절입니다. 신약성경 380페이지입니다.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더니,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아멘.
요한계시록에 있어서, 6장에 보면 말들이 나오는데, 6장 2절에 보면, “내가 이에 보니 흰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말이 한 마리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요. 흰말 한 마리만. 둘째 말은 붉은 말, 셋째 말은 흑말, 넷째 말은 청황색 말. 이렇게 네 마리의 말이, 왜 굳이 하나님이 일하실 때, 네 마리의 말이 필요할까.
첫째 말인 흰말이 신나게 이기고 이겼으면, 뭐 다른 사람들은, ‘아이고, 흰말 잘 한다. 면류관 쓰신 분이 최고네!’라고 하면, 모든 게 끝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붉은 말이 왜 나오고, 검은 말이 왜 나오고, 청황색 말이 왜 나오는지. 이 말 색깔이 단일 색깔, 흰말이 아니고 붉은 말, 흑말, 청황색 말이 나온다는 것은, 각자의 기능이 구분되어 있다는 뜻인데요, 왜 그렇게 복잡하게 구분하느냐는 겁니다.
‘흰말로 해서, 이기고 이기면 그걸로 될 건데, 왜 이런 게 필요하냐. 아, 요한계시록 복잡하다. 복잡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하겠다. 그래야 내가 구원받겠다’라고 이렇게들 생각하는데, 요한계시록 들어가면서 제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모든 것은 공짜입니다. 공짜. 요새 영화를 볼 때, 보통 경로우대는 8000원 줍니다. 젊은 사람들은 보통은 만 원 이상 내고 보는데, 우리는 표가 비싸다고 하는데, 만약에 감독에게 그 이야기했으면 대번에, ‘너 8천 원 가지고 이 영화 한번 만들어 봐’라고 하겠죠.
8천 원 가지고 못 만들지요. 그냥 카페에서 이야기하는 것 만 찍어도 10억 드는데, 아무것도 안 해도 최소한 20~30억 나가는데, 그것도 짧은 30분짜리 독립영화 찍는 것도 30~40억 가까이 드는데, 그런 큰 영화 하나 찍으려고 하면, 400~500억 투자받아서 하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영화를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공짜로 보는 거예요.
영화에 배우로 참여한 것이 아니고 관람하는 겁니다. 영화사에서 영화 하나 만드는데, ‘아이고, 대박 나야 해. 대박. 대박 안 나면, 내 돈만 날리는데’라고 보는 사람이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냥 구경만 하세요. 구경만. 문제는 요한계시록이라는 이 영화를 촬영할 때, 구경만 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냥 스크린에 나오는 이미지만 보면 되지만, 주님의 요한계시록 촬영은 우리의 삶을 가지고 우리 내부에 파고들어 와서 이 말씀을 적용하기 때문에, 우리가 살짝, 아주 살짝 골치 아프게 된 겁니다.
공짜다! 맞습니다. 사는 건 공짜인데, 공짜이기 때문에, “내가 네 인생을 어떻게, 어떤 말씀에 준해서 영화를 찍든지, 너는 군소리하지 마라”라는 그 이야기입니다. ‘공짜인데, 나 놀래’라는 게 아니라, ‘공짜인데, 군소리하지 말고, 말씀이 현실이 되어서 당하거든, 그냥 당하는 대로 당해버려’ 왜? 이미 너는 하나님이 말씀을 위해 쓰려고 너를 이용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더 이상 구원에 대해서는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본문을 다시 보게 되면, 말들이 나와서 설칠 때, 우리가 성경에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그 말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것부터 궁금합니다’라고 하는 이런 분들도 있을 수 있어요. 말을 봐야, ‘저 말은 시커먼 말이다, 저 말은 하얀 말이다’라고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구약 이사야 55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8~9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라고 되어있어요. 그냥 공짜인 줄 알고 살아. 뭘 따지고, 흰말은 어디 있고, 붉은 말은 어디 있고, 이런 거 따지지 마. 네가 따지지 않아도 네 마리 말은 하나님 지시 앞에 충실하게 이걸 현실로 만들 거라는 겁니다.
현실을 만드는데, 문제는 우리가 관람객이 아니고, 우리의 현실 속에 있는 우리의 몸까지 말씀이 침투한다는 겁니다. 그 침투하는데, 첫 번째 흰말은 범세계적인 전쟁, 이기고 이기는 게 전쟁이잖아요. 전쟁. 두 번째 말은 뭐냐, 국지적인 전쟁, 또는 국가 안에서 일어나는 내란, 그리고 투쟁.
세 번째 검은 말은 경제적인 궁핍과 폭발적인 물가 상승, 이런 거고요. 여기 6절에 보면,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 듯 하는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되로다”라는 이 말은 노동자가 하루 일당 벌어봤자, 한 끼 정도밖에 안 되는 그러한 양식을 얻을 정도로 평소보다 약 10배 이상 인플레이션이 되는 그런 시기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가 단순히 관람한다는 것이 곤란하죠. 왜냐 하면 우리는 이 현실 세계 속에, 경제구조 속에서 지금 살아가고 있는데, 물가가 10배나 뛴다? 그러면 안 되죠. 진라면 4봉지 한 묶음에 2,500원 하거든요. 이건 사본 사람은 압니다. 그런데 10배 뛰면, 이게 2만 5천 원. 진라면 네 봉지에 2만 5천 원 하면 상당히 비싸죠. 그러니까 그걸 아껴 먹으려면, 네 식구 한 끼 식사밖에 안 되잖아요.
네 번째는 어떠냐 하면, 가난과 그리고 전염병이 퍼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현실을 그냥 공짜라고 알고, 구경하자는 식으로 할 거 같으면, 우리가 이 말씀에 대해서, ‘뭐 네 마리 말이 알아서 할 건데, 나는 몰라도 돼’라고 넘어가고 싶은데, 문제는 우리가 현실에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주께서 하시는 일에, ‘싫다, 거부한다, 좋다’라고 할 것도 없이, 거기에 휘말려가고 있다는 거예요.
특히 이 경제구조 속에서 우리가 휘말려가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뭐 ‘공짜다. 거저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십자가 은혜로 감사합니다’라는 이런 소리 하다가 갑자기 하나님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막 터져 나오지요. 그리고 기근과 가뭄, 이런 게 주가 되면, 우리는 갑자기 운문댐 저수율 23퍼센트에 화가 막 치밀죠. ‘대구시 동구 주민들의 물은? 그럼 물은 어디서 먹는데?’
운문댐에서 온다는데, 여기 공산댐은 얼마 되지도 않고, 그럼, 배급제로 수돗물 준다고 하면 대체 어떻게 하라고. 이건 대통령이 잘못했다고 말은 하지만, 결국 그 원망은 대통령 제끼고 어디로 갑니까?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우리가 뭐 기우제를 안 드렸습니까? 뭐 잘못한 게 있습니까?’ 뭐 잘못한 게 있겠죠. 그러나 모든 죄를 사했다고 하면, 뭐 살만큼은 해줘야 하는데, 이건 뭐 가뭄이 들고, 경제가 어렵고, 또 병이 돌아요.
현재, 미국에서 홍역이 돈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이 사람이 존 F 케네디(미국의 제35대 대통령)의 조카이고, 지금 미국에 보건복지부 장관이에요. 이 사람이 뭘 싫어하느냐 하면, 예방접종을 너무 싫어하는 거예요. 그 사람의 주장에 의하면, 예방 접종해서 아기 낳을 때, 장애가 있을 확률이 높다는 논문을 봤다는 거예요. 그 논문이 가짜 논문인데, 그걸 본 거예요.
예방접종을 하면 안 좋다는 그 속이 어디로 밀려 들어왔느냐 하면, 한국 기독교에 밀려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 큰 교회 권사님들이 평소에 예배 마치고 하는 일이 뭐냐. ‘백신 맞지 마. 이상한 아기 낳을 수 있어’ 백신뿐만이 아니죠. 약 사 먹는 것도 안 좋고, 암 걸려도 자연치료 하는 게 좋다는 이거. 그 이야기가 나올 때, 그 이야기를 딱 듣는 순간, 그런데 신경 쓴다는 것은, 네 자로 말할게요. ‘죽기 싫다’
좀 길게 이야기하면, 이 세상 떠나기 싫다. 그게 뭡니까? 좀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나 편하게 살고 싶어’라는 그런 이야기잖아요.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예수님이 떠나고 난 뒤에 남아있는 생애에, 이 네 마리의 말이 아주 활개를 쳐서, 곳곳에 지진과 가뭄, 그리고 작은 전쟁이든, 큰 전쟁이든, 전쟁이 끊일 새가 없고, 우리는 한국에 있으니까 우크라이나, 가자 지역에 현 실상을 잘 모르지만, 그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사는 것이 힘들겠어요.
‘전쟁은 내가 했나? 우리 군인들이 했지. 우리 민간인은 손대지 마라’라는 이런 소리 해도, 소용없어요. 제가 동대구역 갈 때마다, 플랑카드(현수막)에 쓰여있는 게 있어요. 철도노동조합에서 붙인 플랑카드가 늘 눈에 띄거든요. 걸어놔도 너무 오래 걸어놔요. 그 플랑카드에 이렇게 되어있어요. ‘우리가 죽을 때까지 직장을 달라!!’라는 이게 플랑카드에 쓰여있어요.
한국철도공사 노동조합에서 주장하는 게, ‘죽을 때까지 일하게 해달라!’ 내가 속으로, ‘너희들이 뭐 했다고?’ 지들이 뭐 했는데, 여기가 천국이에요? 천국입니까? 나이 80세 되어서 곡괭이 하나 들고 철도 하나 툭 건드리고 나자빠져서, 연금부터 해서 한 달 월급 천만 원 달라고 하면, 이게 말이 됩니까? 뭐가 대단하다고, 그걸 떡하니 갖다가 붙여놨단 말이죠.
외치면 다 되는 그런 세상이에요? 그 사람들에게 할 것은 뭐냐 하면, 천국이 있으니 빨리 죽어서 이 세상에서 꺼지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어요. 빨리 사라져라. 자꾸 남 괴롭히지 말고. 보통 경제가 어려울 때는, ‘재정경제부 장관이 문제가 있다, 그거는 SK 하이닉스가 기금을 두 배로 준다는 것을 만들어서...’라는 이런 온갖 것을 말하지만, 성경에 보면 그건 다 헛소리입니다.
헛소리이고 탓을 누구 탓을 하느냐면, 경제 문제에 대해서 셋째 인(印), 검은 말 탓을 해야 해요. 그럼, 본격적으로 성경 내용을 봅시다. 이 흰말, 붉은 말, 검은 말, 청황색 말, 이 말들이 등장하는 이유가, 그 근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이게 구약 이스라엘 때문에 생긴 예언이에요. 이스라엘. 좀 어렵게 가겠습니다. 여러분이 실력이 있기 때문에, 어렵게 가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일을 할 때, 이스라엘에게 특별히, ‘세상일을 이 법칙에, 이 중심에서 일합니다’라고 가르쳐준 것이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에게 딱 줬습니다. 주면서, 줄 때의 취지는 이겁니다. ‘우리 개인은 생각하지 말자. 이스라엘은 집단이다. 집단에 한꺼번에 준다. 똑같은 상황을 허락한다’ 그러니까 개인 문제는 생각하지 말자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전체에 동일하게 준 환경에 의해서 이스라엘 역사와 그들의 삶이 결정되는 거예요. 개인이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좋게 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집단으로 하나님 앞에 좋게 보여야, 그게 하나님께 복을 받아요. 개인의 노력과 성실함은 여기서 빠져야 해요. 그러나 이 자본주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노력한 만큼 자기에게 이득이 오고, 자기만 행복하고 자기가 부자 되는 그것을 용납하는 제도가 바로 자본주의입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그걸 다 빼앗아 가죠. 다 가져갑니다. 반면에 자본주의는 그게 아니에요. 내가 요령껏 벌어서 얻은 거, 이건 내 것이다. 그래서 세금 매기면, ‘이 사회주의자야!’라고 이렇게 되죠. ‘이건 뭐 공산당도 아니고, 왜 그래?’
삼성에 주식 투자해서, 삼성 회사에서 나에게 배당금을 230주 나눠준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삼성전자 주주는 뭐가 되느냐. 하나의 공동체가 됩니다. 이스라엘은 공동체예요. 그 주인은 공짜로 주시는데, 누가 주느냐.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관장하는 것이지, 이스라엘 개인이 하는 것은 이스라엘 변화에 아무런 영향력을 주지를 못합니다.
우리가 워낙 자본주의 속에 살다 보니까, ‘운문댐에 저수율이 낮다. 한 쪽은 비가 너무 많이 왔다. 거제에 비가 너무 많이 온 것은 우리 거제 주민들이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교회를 안 와서 그렇다’라고 자기들끼리 생각하겠죠. ‘와도 너무 많이 왔습니다. 800mm가 뭡니까? 벌써 며칠째 길이 막혔습니다. 왜 다른 지역은 아닌데, 이 지역만 때리십니까?’라는 그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라니까요.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실 때, 인간의 잘잘못을 아예 묻지도 않으신다니까요. 괜히 개인적으로 사는 것이 힘들다고 해서, 내가 벌을 받는다는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참, 이거 보면 복음 전하면서 속 터지는데, 자꾸 교인들이 벌을 받는다고 이야기하는데, 오늘 분명히 이야기할게요. 하나님의 심판과 벌의 크기는 예수님과 아버지의 벌어진 간격의 크기만큼만 저주와 벌이 주어지는 거예요.
벌을 내리고, 심판을 하고, 지옥 불에 가는 것은, 내 행동을 잘못해서 가는 게 아니고,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벌어진 간격이 고스란히 저주의 크기로 주어지는 겁니다. 자꾸 스스로 선악적으로 따지지 말고요. 어떤 사람은 벌도 안 오고, 건강하고, 돈도 잘 벌고, 자식도 공부 잘하고, 출세 잘하고, 취직도 잘 한다는 그게 벌이에요.
그거 천국 아니거든요. 왜 자꾸 남과 비교합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을 다 없애버립니다. 인간을 없애버리면 타인이 없는 거예요. 타인이 없으면 저절로 누가 없느냐. 내가 없어요. 내가 없는 나는 어디에 가 있느냐. 천국에 가 있는 나가 새삼스럽게 발견될 겁니다. 내가 모르는 나가 따로 마련되어 있고, 익히 아는 나는 경제난과 전쟁의 소식과 여러 가지 전염병과 같은 이런 어려움에 우리가 처하도록 만들어요.
비가 안 와서 가뭄 드니까 수돗물도 잘 못 쓰고, 이런 것을 하는 것은 제발 좀 네가 관리하는 너 자신에게서 손을 놓으라는 이야기죠. 손을 놓는다는 것은 뭐도 포함되었느냐 하면, 나의 윤리와 도덕으로 복 받겠다는 그런 방식의 나를 그냥 포기하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말해요. 열심히 일하면 성공한다고. ‘하아.........’ 진짜 ‘하아’라는 한숨만 나옵니다.
여러분, 성공은 운빨이에요. 화투 안 쳐봤습니까? 운빨이라니까요. 운(運). 노력한다고, 개업한다고 다 잘 되는 거 아니에요. 다들 열심히 해요. 심지어 직장에서는 오후 6시까지만 일하다가, 개인 업체 생기면 하루 14시간 일해요. 14시간 일해도 90퍼센트는 다 망해요. 다 망한다고요. 우리 동네 보세요. 가게들 다 내놨어요. 그거는 뭐 운빨인데.
왜 세상을 내 중심으로 봅니까. 나쁜 짓을 해서 망했다고요. 나쁜 짓을 해도 안 망한 사람 더 많아요. 나쁜 짓을 해도 복권 1등만 잘 당첨 됩니다. 뉴스 보면서 그래요. ‘아니, 저렇게 착실한 사람이 어떻게 음주 운전 차에 치여서...’ 그거 착실한 사람 아니에요. 날 때부터 죄인이에요. 무슨 착실한 사람이 있습니까. 어떤 교사는 못 된 학부모 만나서 276번의 악플 전화를 받아서 자살했답니다.
왜 죽어요, 왜 죽어? 그걸 왜 죽어요. 전화는 끊으면 되고, 전화 자꾸 오면 교사 그만두면 되지, 왜 죽는데? 왜 자꾸 남 탓하는데요? 그게 바로 타인이 나의 모델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은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해버렸습니다. 네 종류의 말(Horse)로. 이제는 누가 망하냐. 이방 나라야, 네 차례다. 하나의 바(Bar)가 있으면, 한쪽의 기준을 위로 들어버리면, 그 기준의 적용 범위가 이방인까지 양쪽 좌우로 퍼져버려요.
세상의 중심이 언약이 있는 이스라엘 중심이거든요. 그러면, 이스라엘을 번쩍 들어버리면, 전에는 이방인과 이스라엘과 차이가 없었는데, 이쪽을 들어버리니까, 이스라엘이 갖고 있던 중심점이, ‘어...~~~어...’ 같이 연결되어서 이방 쪽으로 쏠리면서, 이스라엘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여호와도 모르는 이방 민족이 몽땅 다, 네 마리 말의 활동 때문에 다 같이 망하게 되어있어요.
이 세상은 다 같이 망하는 인간인데, 왜 남들 자꾸 곁눈질하면서, ‘나는 이런 인간이 되겠다’라고 하는 거예요. 모든 건 공짜입니다. 거저 주신 거예요. 구원받는 것도 거저 주신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란 말인가. 청황색 말이 오게 되면, ‘아, 저게 청황색 말이구나. 저게 말의 활동이구나. 전염병. 경제가 어려운 것은, 이건 검은 말이구나’
검은 말, 청황색 말, 이것은 이미 안 찾아봐도 여러분이 다 아셔야 해요. 에스겔에도 나오고, 예레미야에도 나오고, 이사야에도 나오고, 이런 말 이야기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가뭄 이야기, 전염병 이야기, 기근 이야기, 전쟁 이야기가 구약의 선지서 전부 다예요. 그때는 누구를 치느냐. 이스라엘, 이스라엘, 이스라엘, 계속 이스라엘을 그렇게 폭격한 거예요.
근데 이스라엘 망하고 난 뒤에, 그 법칙이 우리 모든 이방 민족에게 다 간 겁니다. 왜?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벌어진 간격, 그 저주가 예수님 떠나고 난 뒤에 예수님을 죽였던 이 세상에 그 몫이 고스란히 다 주어지는 이 세계에 지금 우리 육신이 놓여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전쟁, 경제, 전염병 때문에 힘들다고 할 때, 이런 계기를 통해서 모든 것이 요한계시록 6장 대로, 그대로 되어가는 것을 주 앞에 찬미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구원받으려고 몸조심하고 추스르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알아서 일어날 전쟁 다 일으키고, 일어날 지진 일으키고, 일어날 가뭄 일으키고, 전염병 일으키고, 사람들은 하나님께 원망하고, 그 세상을, 지옥의 그 모습을, 우리가 마지막 인생을 살면서, 보게 하면서, 십자가로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 진짜 내가 이스라엘, 하늘나라를 사모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