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꼼꼼한 기록

아빠와 함께 2026. 8. 2. 20:36

2026년 8월 2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5:1-7

(5: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5:2)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5: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5:4)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5: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5:7)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굳이 책이 필요할까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살아 있는 하나님과 살아 있는 인간 사이에서 그때그때마다 인간은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께서는 칭찬하시거나 책망하시면서 넘어가면 되지 않을까요? 왜 책, 곧 기록된 문서가 필요하지요?

그것은 처음 창조하실 때 구성된 모든 환경에서 인간이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중에서 맨 끄터머리에 만들어졌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만들어진 그 앞의 상황에 대해서 개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마치 서랍정리하듯이 천지를 만드셨습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5)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시면서 모든 것을 규격화하셨습니다. 각자의 제 위치를 정하신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이런 규격화에 대해서 인간은 관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자기 존재성보다 먼저 우선되는 것이 이런 규격화입니다.

이 규격화로 인하여 ‘7’이 수립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일곱인’ 그 예입니다. 여섯인도 아니요 여덟인도 아닙니다. 딱 일곱인입니다. ‘7’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결정입니다. 이 7에 대해서 인간은 해석할 수 있는 능력과 자질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철저하게 인간을 배제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마감하십니다. 여기에 대해서 인간은 어떤 식으로 이 하나님의 규격에 도전했습니까? 하나님의 기호와 규격에 대해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군소리말고 고분고분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악마가 개입됩니다. 하나님의 기호와 규격에 피조물은 관여할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뱀이라면 피조물은 하나님의 기호와 규격화에 전면적으로 허물어 버리기를 원했습니다. 생명수가 흐르는 에덴동산 정중앙에 두 개의 나무가 심겨져 있음에 대해서 어떤 불만을 가질 수 있을까요?

‘따먹는 날에 정녕 죽으리라’에 불만을 가지지 않을까요? 인간 자신에게 불행을 초래할 만한 위험한 환경이 되는게 아닐까요? 이런 위험 요소를 품고서 사는 것이 진정 이 에덴이라는 환경에 완전한 행복을 보장하기에 미흡한 것이 아닐까요? 만약에 하나님께서 두 개의 나무라는 ‘2’라는 기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에게 다음과 같은 의견을 묻는 것이 가정해 봅시다.

“따먹지 말라는 조항이 있는 것이 너희들이 이 에덴에서 살 때 부담없지. 내가 없애줄까?” 여기에 대해서 어느 인간이 “하나님, 그럴 필요없어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과일을 따먹고 영원히 저주받는 장치에 대해서 저도 만족해요”라는 말을 해줄 인간이 과연 있겠습니까? 이미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규격화와 기호적 창조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불만을 품게 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나름대로 존중의 뜻을 품고 접근할 수가 있습니다. 이왕이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하나님을 기뻐시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늘 철두철미할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그동안 충성을 다한 과거 업적이 무용지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이런 불안감을 생기도록 유도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면 인간은 한결같이 내부에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마음 아래에 깔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선에서, 자기 기준에서 마련된 자기 의견으로 개입하고 싶은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사는게 자신에게 다소나마 행복한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그때그때마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갖고 싶어서 그 결과 인간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겁니다. 따라서 왜 하나님께서 굳이 기록을 위한 책을 마련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이 울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 본인의 일기장을 펼치지 못해서 우는 게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록한 책의 내용이 어떤 평가를 품고 그동안 현실로 만들어졌는지를 몰라서 울고 있습니다. 즉 내가 한 행동을 주님께서 기록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기록된 내용이 먼저이고 그 내용대로 자신이 이끌림을 받았기에 그것이 어떤 평가로 마감되는 지가 궁금한 것입니다.
이는 평소에 사도 요한이 자신이 먼저 움직이고 그 움직임에 대해서 주님의 평가를 고대하는 식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예가 누가복음 10:17-20에 나오고 있습니다.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17-20) 즉 성도는 본인이 바르게 해서 구원받지 않는다는 도리어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1:24-27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어린아이는 결코 자기 판단을 의지하면서 사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자기 자신의 판단과 의지를 빼고 사는 자들을 말합니다.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라는 규정에 해당 되는 사람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기록된 책’이 두 권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2-15)

인간은 자기 존재나 존재성에 입각한 주장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지지 못합니다. 모든 시작은 오로지 주님과 아버지의 간의 기록에 준해서 시작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현실이 오직 책에 실린 내용만이 펼쳐짐을 감사하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8강-요한계시록 5장 1~7절(꼼꼼한 기록)260802-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5장 1~7절입니다. 신약성경 379페이지입니다.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하늘나라에서 일어난 일이에요. 땅에 있는 인간들이 관여할 사항은 아닙니다. 이처럼 성경의 결론 부분에서 인간이 손을 쓸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제가 부탁드리는데, 제발 성경 말씀 지키지 마세요. 우리가 관여할 내용이 아닙니다. 사람이 말씀을 지키게 되면, 그게 자기 의가 됩니다. 자기 잘남이 된다고요. ‘너는 몇 개 지켰어? 나는 이거 지켰어’라는, 큐티를 하면서 이러한 마귀적인 현상을 자꾸 보이기 마련입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악한 쪽으로 분류하는 것이 아니고, 자꾸 일방적으로 선한 쪽으로 분류해요. 그러한 분류를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누가 자기에게 손을 뗐느냐, 안 뗐느냐로 결정되는 거예요. 자기 인생에 대해서 일찌감치 손을 떼시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실은 나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주님에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에게 일어난 일은, 인간은 몰라요. 어디서 어떻게 일어난 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알 수도 없는 일을 내가 거기에 끼어들게 되면, 인간은 자기가 생각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돌리게 돼요. ‘하나님, 일을 왜 이렇게 하십니까?’라고 하면, 주님이 뭐라고 하시겠어요? “이게 너의 일이야?” ‘이건 제 일인데요’ “네 일은 아예 없어!” 너의 일은 아예 없는 거예요.

모든 게 주의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자신의 일에 대해서 관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꾸준히 관여해요. 관여하는 모습이 어떠냐 하면, ‘이건 하고, 이건 안 하고’라는 식으로 관여해요. 이건 하고 싶고, 이건 안 하고 싶고. ‘오늘 아침은 속옷 빨래할까, 겉옷 빨래할까? 오늘 저녁 반찬은 뭘 할까, 말까?’라는 이런 거. 이것이 바로 본인이 본인에게 본인 인생이라고 우기면서, 주의 일도 아닌데 자기 일에 그렇게 신경을 쓰는 겁니다.

그러면 일종에 요령을 한번 부려봅시다. ‘하나님, 오늘 저녁에 반찬 뭘 할까요?’라고 이렇게 하면 되잖아요. 그러면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 ‘라면 먹으라고 하면 라면 먹겠습니다. 굶으라고 하면 굶겠습니다. 올리브유에 샐러드 먹으라고 하면, 샐러드 먹겠습니다’라고 이렇게 해야, 준비하면서도 감사하고, 먹으면서도 감사하고, 먹고 난 뒤에도 감사가 나오죠.

왜? 시작과 끝을, 알파와 오메가를, 주께서 시작해서 주로 마감을 했기 때문에, 내가 개입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주께 감사하는 겁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의문점이 생기죠. 왜 우리가 관여해서는 안 되는가 하는 그 문제요. ‘내가 관여를 안 해야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면, 굳이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이걸 말꼬리 잡으면 이렇게 됩니다.

‘관여하지 않겠습니다’라는 것도 시건방진 주장이에요. 관여했다는 것과, 안 했다는 것을 내가 판정 내리면, ‘나는 일 안 할래. 잘래’라는 이것도, ‘이것은 하고 이것은 안 하고, 이것은 안 하고 이것은 하고’라는 그 분류에 또 말려드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결론 내리면 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해도 안 하고, 하지 말라고 해도 하는데, 어쨌든 간에 우리는 뭘 하는데, 하기 전에 주께 영광과 감사가 되는 법은 없고, 꼭 일이 터지고 난 뒤에, 일이 끝나고 난 뒤에, ‘아, 내가 주의 일을 너무 방해했구나’라는 것을 아는 가운데서, 그 전에 예상 못 했던 기쁨과 감사가 나오지요.

우리는 미리 알아서 선수 쳐서, 자기 단도리를 할 수 있는 그런 재주가 우리에게는 아예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것은 일이 터지고 난 후에 나오는 법이지, 미리 고맙고 감사하는 것은 위선에 불과하지, 해당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분명히 내 일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 인생에 관여하지 말라고 손을 떼게 만드시는가.

그게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5장에 내용이거든요. 왜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 태어나고, 우리가 행하고, 우리가 죽는 일까지, 모든 일은 주님께서 책에 꼼꼼히 기록했기 때문에 그래요. 책에 기록했다는 말은, “네가 네 인생을 평가하는 것은 차단하고, 결국 내가 책에 기록된 대로 너를 심판하고 평가하겠다. 책 한 권 만들겠다”라고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책을 만들면요, 나에 관한 내용만 책에 있을 게 아니겠어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의 지혜를 초월해서, 주께서 하는 책 내용은 나에 관한, 내가 쓰는, 내가 소설의 주인공 되는 그런 내용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저쪽 사람, 이쪽 사람,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 내가 아는 사람, 이 모든 것을 다 기록해서, 그 기록된 가치와 의미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끌어모았던 주님만이 판정을 내릴 수 있는 자격자가 되기 때문에, 우리가 쓴 책은 거절하고, 주님이 쓴 책 안에 내용만 주께서는 심판을 하시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내가 나를 심판할 권한은 없다는 거예요. 쓸데없이 반성하고, 쓸데없이 회개하고, 이런 짓도, 이건 오버하는 거예요. 뭘 알아야 반성하죠. 회개? ‘주여, 회개합니다’라고 하면, 주님은 “네가 뭘 알고 회개해? 네가 전부를 알아?” 전체를 아느냔 말이죠. 이러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지적은 이미 욥기를 통해서, 욥에게 지적을 했습니다.

‘하나님, 저 친구보다는 내가 낫지 않습니까?’라고 욥이 이야기하니까, 하나님께서 생뚱맞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하마가 새끼 낳을 때, 네가 거기 있었나? 하늘의 달과 별 만들 때, 네가 가담했어?”(욥38, 40:15~24) 그러니까 욥이 입이 있는데, 말을 못 해요. 말을 할 수 있다면, ‘주님, 그것은 내가 태어나서 행동하기 전에 만들었잖아요’라고 하겠죠. 지금 주님께서 우리한테 이야기하는 게 그거예요.

이번에 창세기를 수련회에서 했잖아요. 1강과 2강에서, 창세기 1장과 2장에 관해,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창세기 1장에는 인간이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없어요. 인간이 관여하고 싶어도, 태어나야 관여하죠. 인간은 제일 마지막에, 6일째 태어났어요. 제일 끄트머리에 태어났어요. 앞에 있는 1, 2, 3, 4, 5, 6에 대해서 인간은 일체, 아예 강제적으로 관여가 안 됐습니다.

관여가 안 됐는데, 관여되지 않은 상태에서, 주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창세기 1장 5절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저녁 되고 아침 되는 데 있어서, 네가 거기에 관여했어, 개입했어? 네가 의견을 개진했어?”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데, 우리는 끼어들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거는 우리가 끼어들 수 없었습니다. 그게 바로 첫째 날이라. 첫째 날. 하도 수련회 참석을 안 하니, 새로 강의할 수밖에 없어요. 그게 첫째 날이에요. 첫째 날은 숫자가 1입니다. 1이라는 것은 순서 정하기, 1, 2, 3, 4, 5, 6, 7, 순서 정하기에 인간이 관여한 적 없어요. 그러면 인간은 뭐냐 하면, 존재가 아니고 기호입니다. 규격화된 거예요. 하나님의 규격화.

이걸 알기 쉽게 하면, 이 세상은 쿠팡 물류 창고. 딱딱 정리정돈해서, 규격화된 거기에다가, 그 자리에다가, 전부 다 박아 넣는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틀 마련하고, 틀에다가 집어넣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이 틀 자리, 위치 자리 잡는데, 인간은 본인이 거기에 관여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왜 이런 위치예요? 왜 나는 저런 인생입니까?’라고 인간은 불평할 수 있는 그러한 자질을, 인간은 애초에 박탈당했습니다.

숫자 1, 2, 3, 4, 5, 6, 7. 그 숫자를 주께서 끝까지, 요한계시록까지 계속 밀어붙입니다. 여기에 보면,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5장 1절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일곱 인으로 봉하였다. 여기에 ‘7’이 나옵니다. 그래서 제가 강의하면서, 여기에 대한 이 결론이 너무 관계가 복잡하기 때문에, 간단하게 제가 결론을 이야기했죠. (수련회 강의 녹취 제2강, 페이지 3)

하나님의 창조는, 자리 또는 기호, 숫자에서 시작해서 사건을 일으켜서, 창조 사건을 일으켜서 나오게 되면, 존재가 있다. (기호-> 사건 -> 존재) 그 존재는 뭐냐? 처음에 있었던 그 숫자에서 벗어나지 않는 조건 하에 있던 존재였다. 그런데 인간이 창세기 3장에서 뱀과 결탁해서, 전면적인, 하나님이 하신 모~~든 원천적인 기호를 다 악마가 거부하게 했어요.

그 증거가 뭐냐 하면, 동산 한가운데에 물이 흐르는데, 그 물이 없으면 인간은 못 살아요. 그런데 물이 어디서 나오냐 하면, 중앙에 있는 두 개의 기호로 나왔습니다. 숫자가 2, 2입니다. ‘2’인데, 하나는 생명나무와 또 하나는 선악과, 숫자가 2입니다. 여러분들이 창세기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가져본 적 없어요?

왜 어느 나무는 따 먹어도 괜찮고, 어느 나무는 따 먹지 말라고 규정한 그 규정에 대해서, 왜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 사는 인간에게 의견을 묻지 않았느냐 하는 점, 여러분은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인간에게 이 선악과 나무를 따 먹지 말라고 주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따 먹으면 너는 죽어”라고 말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인간 보고 의견을 한번 물어봐야죠.

“인간아” 예. “너에게 에덴동산이 어떤 동산이고?” 살기 너무 좋은 세상입니다. “그래? 네가 살기 좋은 세상인데, 내가 너에게 더욱더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따먹으면 죽는다는 나무를 어떻게 내가 한번 심어봐, 그걸 안 심어봐? 너는 어느 쪽이 좋겠어?” 이게 소설이라면, 인간이 뭐라고 하겠어요? ‘하나님 그거는 부담되지요. 이왕 노는 거, 신나도록, 다 따먹어도 괜찮은 나무 심어야, 우리가 행복의 극치를 누릴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예. “그러면 다치지 않게, 네 인생을 망하지 않도록, 생명나무에서 생명수가 흐르는, 그 강이 흐르는 그 중앙의 나무를 그냥 생명나무만 심도록 그렇게 조치하면 너는 어떻겠어?” 우리야 아주 좋지요. “좋아, 좋아. 그러면 선악과나무는 없는 거다” 예. 잘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습니다. 왜 이러한 소설, 이런 아이디어는 왜 생각 안 하죠?

왜 그런 생각이 안 떠오를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은 은연중에 하나님께 화를 내고 살기 때문에 그래요. 분노하고 삽니다. 분노를. 성경을 보면 볼수록, 하나님은 매사에 영향을 입는 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내 인생을 끌고 간다는 데 대해서, 인간은 화와 분노를 갖고 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은 처음에 기호로 돌아갈 마음이 없다는 거예요.

이미 만들어진 거, 이미 존재하게 된 거, 내 식대로, 하나님이고 뭐고 간에, 하나님의 뜻이고 뭐고, 내 식대로 한번 밀어붙이고 싶다는 게, 내 평생의 포부가 되고 말았어요. 소원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시 기호로 돌아갈 마음이 없어요. 하나님은 그런 생각까지 꼼꼼하게 다 적었어요. “저게 마귀가 들어서, 이제는 하나님이 창조한 거, 처음 창조한 취지를 버리고 가는구나”

그러면 왜 생명나무와 있는 선악과를 따 먹었느냐는 이 말은, 피조물들은요, 피조물들은 그 존재 자체가 결국은 기호로 돌아와야 돼요. 존재와 기호의 차이점은, 존재는 자기 생각이, 자기 의견이 살아 있어요. 자기 의견이. 근데 기호는 일방적입니다. ‘주여, 내 뜻은...’이라고 하면, “입 다물어! 네 뜻은 이야기하지 마! 왜 네가 건방지게 너의 뜻을 나한테 이야기해?”

이 피조물 주제에, 그것도 범죄 한 피조물이 왜 ‘내 뜻은요...’라는 그 말을 나한테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게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마태복음 6장 27절, 제가 한번 찬찬히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라는 이겁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염려한다고 해서, 네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고 주께서 우리한테 오히려 되묻습니다.

이번에 수련회 하는데, 참석하겠다는 사람 중, 많은 사람이 엎어지고, 자빠지고, 난리가 났어요. 안 그러면 어떤 사람은 남편이 아프다든지, 남편이 코피가 나서 참석 못하고, 본인이 떨어져서 뼈가 작살나서 참석 못 하고, 뭐 온갖 것들이, 왜 아프고 그런 건지. 근데,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참석을 못 했다는 거예요. 주의 뜻은 뭐냐? 마태복음 6장 27절입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이, 네가 어떤 계획을 갖고, 어떤 목표가 있더라도,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 답변하라!” 못하죠. 마찬가지로 참석하고 싶어도 참석하는 게 아니에요. 내 키를 내 마음대로 못 하듯이, 인간에게는 ‘내 마음대로’가 애초부터 이거는 이미 악마에게 넘어간 사고방식에서 나오기 때문에, 주께서는 일체 이걸 거부합니다. 인정하지 않아요. 똑같은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0절, 그 본문도 읽어볼게요.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라고 이렇게 되어있어요.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을 비호하면서 강도 만난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면 강도 만난 이야기를 했으면, 그다음 이야기를 여러분들이 한번 써보세요.

‘나쁜 강도를 만났으니까, 얼마나 참 아프겠느냐. 그저 좋은 사람을 만나서 치료받으면 좋겠다’라는 식으로, 우리는 이런 쪽으로 나가는데, 여기서 주님께서 ‘참 나쁘다’라고 하는 나쁨에서 강도를 빼 버립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 사람은, 이 사람을 만나서 거반 죽게 한 그 주동자가 누구냐 하면, 강도예요. 그러면 누가 나쁘냐면, 강도가 나빠요. 강도가 나쁘지, 그 본 사람을 치료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사람을 나무라는 건, 두 번째 순번이어야 돼요.

진짜 나쁜 것은 강도고, 거기에 뭐 제사장 지나가고, 레위인 지나가고, 뭐 이렇게 지나가는 것은, 아무리 그 사람을 보고 안 도와줬다고 나쁘다고 해도, 역시 최고 나쁜 자는 누구냐 하면 강도예요. 강도에 대해서 나무람이 있어야 하는데, 일체 이게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입을 다물고 있어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 인간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기 때문에 그래요. 존재 자체를.

존재 자체가 이렇게 무엇에 문제가 되느냐. 존재가 돼버리면, 인간은 자꾸 자기가 일을 계획하고, 선택하고, 이거 할까, 이거 하지 말까를 매 한 순간도 이걸 중지한 적이 없어요. 멈추지 않아요. 오늘 예배 마치고 어디 갈까? 이것을 인간은 생각이 멈춘 적이 없습니다. 절대로 인간은 기호로 돌아오지 않아요. 쿠팡 물류 창고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내 자리가 있어요. 내가 만든 자리. 그 자리를 인간은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주님이라면 이러한 자기 인생 살겠다고 거기에 미쳐 정신 팔려있는 인간들을, 주께서는 어떻게 조치해서 하나님의 기호 분류 작업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 내용이 누가복음 10장 20절에 나옵니다.

제자들이 와서 아주 신나게 이야기합니다. 17~19절에 “사탄이 우리에게 항복했습니다”(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자기 존재지요.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아마 이 이야기만 들으면, 제자들은 ‘역시 주님이 우리 존재와 활동을 인정해 주는구나’라고 이렇게 생각하겠죠. 그게 오해였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 이게, 이 말씀이 여러분은 무슨 차원으로 이야기하는지 와닿습니까?

잘 와닿지 않죠? 그래서 또 제가 성경에 마태복음 11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에 심판이 이르는데, 전부 다 소돔과 고모라 같고 그것보다 더 심하다고 이야기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11장 25~27절,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여기서 주님께서 뭐를 쏙~ 빼느냐 하면, “너는 똑똑한 어른 될래, 아무것도 판단력이 없는 어린아이 될래?”를 우리에게 추궁하시고요, 하나님께서 어른들, 판단하고 계획하고 그래서 자기 인생을 착실하게 다지는 인간들은 천국에서 필요 없다고 내쫓습니다. 누구든지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가요. 그러면 어린아이가 뭐냐?

예수님이 스스로 아버지하고 이야기한 것을 소개하는데, “주여,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이 똑똑해서가 아니라, 판단해서가 아니라, 이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이것을 그들에게 숨기시고, 아버지와 나의 계시대로 이것을 알려주는 사람에게만, 알려주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방식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무엇을 잘라내야 되겠어요? 어떤 점을 잘라내야 돼요? ‘나는 존재한다. 나는 판단한다. 내가 계획한다. 나는 뭐든지 선택할 수 있다’라는 이것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인생을 살면서, 상황을 주면서, 이걸 끊임없이 잘라내는 작업을 합니다. 잘라내는 작업. 그러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뭐가 되느냐? 봉인된 책이 되지요.

봉인된 책. 주께서 친히 우리에게 일하시고, 일하신 그것을 우리가 어떤 점에서 이런 일을 나에게 벌이셨습니까, 어떤 점에서 우리에게 차 사고 나게 하시고, 어떤 점에서 우리가 남한테 실수하게 하시고, 어떤 점에서 남한테 핍박받게 하시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우리에 대해서 판정과 결론을 못 내리게 만드는 식으로 우리 인생을 끌고 가십니다.

어떻게 해답이 되셨어요? 우리는 앞에 일을 전혀 내려다볼 자격이 없다는 이 말이죠. 그래서 마태복음 6장 34절에 뭐냐.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앞으로 이렇게 하겠다’라는 그런 시건방진 일은 나한테 하지 마라. 참새도 내가 알아서 키우고, 들풀도 내가 알아서 키운다.

“느그들 지금 뭐 하고 있노? 느그들 인생 어떻게 살고 있어? 그게 신앙이야?” 그게 마귀 짓이지. 그게 신앙이냐는 이 말이죠. 인간은 칠(7)에 갇혀있어요. 7에 갇혀서, 7을 채우기 위해서, 물류 창고 7을 채우기 위해서 분류하는 겁니다. 분류를. 분류할 때, 그 분류의 일방적인 결정과 작업과 모든 마무리는 우리 주님이 하십니다. 이걸 성령 받은 사도는 알게 되었어요.

‘주여, 이걸, 내 인생이지만 내 인생을 풀 수가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그걸 풀 자격자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우리 주님이, 주님이 하시는데, 주님이 어떻게 했느냐 하면,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에 그걸 풀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인생을 사는 중이기 때문에 아직 죽은 적이 없어요. 그래서 죽고 난 뒤에 뒤돌아봐서 내 인생이 이렇다 할 수 있는 안목이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있어도 소용없고요. 따라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의 안목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에게 일거수일투족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이거는 내가 일으킨 사건이 아니고, 내가 관여해서 일으킨 사건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너는 생명책 기록에 분류되고, 저쪽은 행함책”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이기 때문에 따로 분류해서, 책이 두 권의 책으로 따로 분류해서, 저쪽은 지옥으로 이쪽은 천국으로 가는 그 작업을,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계속 실시해 왔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옵니다. 12절에, “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책이 두 권이 있다는 거 나오고요. 또 다른 책이 있는데 하나는 생명책이라.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천국. 행위 책에 기록된 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어디로 가느냐? 지옥으로. 이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자기 독단적인 결정이에요.

‘주님, 제가 누군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주님께서, “너는 너에 대해서 누군지를 알 필요가 없어. 내가 지금껏 너를 이렇게 이끌어 왔잖아. 그러면 됐잖아. 왜 굳이 네가 알아서 네가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시편 23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다음에 무슨 말이죠? 내게 뭐가 없다? 외우긴 잘 외우죠.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늘 감사하고 있습니까? 고마워하고 있습니까? 들풀로 사시고, 참새로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좀 뭐 안다고, 뭐 성경 꽤 읽었다고 하는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사달이 되고 말았습니다. 절망과 비탄과 낙담으로 돌아왔습니다. 주여, 우리가 주님을 알면서도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지를 날마다 뒤돌아보면서, 우리가 바로 죄인인 것을, 십자가와 더불어서 십자가 앞에서 죄인인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을, 주께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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