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종말적 적용

아빠와 함께 2026. 8. 17. 09:52

종말적 적용 

2026년 8월 16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6:1-2

(6: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 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6:2)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사도 요한을 울게 한 그 봉인 것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 들어가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인간을 풀어낼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 그 안에 담긴 말씀을 공개해야 하는데 그 공개된 결과가 곧 이 세상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이 공개되면 비로소 인간들이 알 수 있을까요? 그래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미 인간 자체가 악한 세대에 포함되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이 세상이 악하든 선하든 관심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본인이 살아남느냐에 중점을 두고 살아갑니다. 인간은 오로지 자기가 존재함을 의식하고 이 중심 의식으로 주변 세계를 의식합니다.

그런데 의식하는 인간들이 의식하는 수단으로 언어, 즉 말이나 글이 동원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무엇을 대하든지 간에 인간들은 자기를 의식하는 언어로 풀어내려고 합니다. 쉬운 예로서 뭔가 일을 벌려놓고서는 주위로부터 비난을 들어오게 되면 구차한 변명과 핑계를 마구 쏟아놓게 됩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앞으로 잘하도록 하겠습니다.” 등등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식있는 인간들이 쏟아내는 변명이나 핑계나 자기 합리화를 듣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무의식을 주목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인간이 죽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죄가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위인도 없습니다. 생겨난 욕심을 통제할 수 있는 인간도 없습니다. 인간들은 의식적으로 통하는 언어를 아무리 동원해봤자 자기 욕망을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이는 이미 인간들은 무의식적으로 악한 세대의 힘에 휠싸여서 태어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말씀이 적용되는 현실을 보고 싶어서 요한계시록 5장에서 울었습니다.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계 5:4) 하지만 하나님께서 개방하는 현실은 사도 요한이 예상한 그런 현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악들이 계속 발굴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 현실은 좌가 창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죄의 창궐’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입각해볼 때 나타나는 창궐입니다. 인간의 의식으로 말과 언어로 표현되는 의식적 현실은 아닙니다. 도리어 현실 의식으로 무장하다가 돌발적인 사태나 사건에 의해서 새롭게 알게 되는 현실입니다.

즉 “세상이 이토록 악했어?”라고 의아해할 정도로 이해될 때, 비로소 현실을 읽는 나조차도 그동안 안일하게 악에 빠져 살았다는 사실이 덩달아 밝혀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과 ‘면류관’ ‘이기도 또 이김’은 이미 스가랴에 예언된 사항입니다. “내가 또 눈을 들어본즉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왔는데 그 산은 놋 산이더라 첫째 병거는 홍마들이, 둘째 병거는 흑마들이, 셋째 벙거는 백마들이, 넷째 병거는 어룽지고 건장한 말들이 메었는지라”(슥 6:1-3)

이 말들이 나오는 산이 ‘놋’산입니다. ‘놋’이란 그 묵직한 무게감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에서 일체 봐주는 것 없이 냉정하고 가혹하게 실시됨을 뜻합니다. 이러한 말, 곧 천사들의 활동에 대해서 역시 자기를 의식하고 세상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그 말씀에 부합되는 실증적 증거 확보에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심판 목록에 같이 들어있음을 감안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식은 자기에게 해로운 것에 대해서 대처하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천사의 심판을 이겨요?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들의 그 어떤 변명이나 핑계가 천사들 앞에서 통하지 않습니다.스가랴 6장에서 심판의 말들의 활동 다음에 면류관을 쓴 분이 등장합니다.

“은과 금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 고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슥 6:11-12) 고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이 이 순이라는 분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위의 이 말씀은 어디까지나 지난 날의 예언으로서 수평적 시간선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예언은 결사적인 반대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것은 기존의 영속적 역사관을 붙잡는 사람들의 역사 인식 때문입니다. 즉 그들이 납득되는 식으로 역사 안에서 계시가 정도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의식하는 인간이 일어난 사태를 잘 알아보므로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요한계시록에 입각해서 구체적인 점검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나 구약의 그 수평적 인식관이 신약에 들어와서 수직적 절단면으로 보여지게 됩니다. 옆에서 옆으로가 아니라 위에서 아래도 보게 하시는 겁니다.

스가랴 6장의 예언은, 순(새싹)이라는 분의 가련한 희생으로 성전이 완료되고 난 뒤에 승리의, 면류관을 쓰고서 하늘의 천사를 말 부리듯이 부려서 세상의 동서남북 각처로 보내져 심판 사태를 불러일으키는 장면이 요한계시록 수직적 표현방식으로 한꺼번에 드러나게 됩니다. 마치 고고학 발굴 현장처럼 일곱층으로 된 모습을 보입니다.

이러한 계시방법에 대해서 오늘날 성도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수직적 종말을 모습을 사람들의 의식이 가능한 수평적 역사서술로 옮겨야 할까요?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1: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이미 이 사실을 받아드린 성도는 아무리 현실 역사가 어떠한 모습을 드러내더라도 여전히 ‘악한 세대’인 것은 변함이 없음을 압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죄를 위해 몸 드리심’은 인간들의 의식으로 붙잡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 세상의 악을 들추어내고 심판 작업을 수행하면서 반복적으로 본질로서 드러나는 사항입니다.

이렇게 해서 성도는 ‘결과적으로’ 주님의 친히 예언 완성을 통해서 믿어지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주님께서 이 악한 세대의 심판은 차질없이 완벽하게 심판하심을 인정합니다. 이로서 “다 이루어주심”이 갈수록 감사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천지 창조 때부터 계획하신 바가 지금도 멈추지 않고 일관되게 추진됨을 감격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강-요한계시록 6장 1~2절(종말적 적용)260816-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6장 1~2절입니다. 신약성경 380페이지입니다.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레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아멘.

역시, 천국에서 일어나는 일, 천국의 질서와 활동에 대해서 언급한 겁니다. 이렇게 천국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우리가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이유는, 사도 요한도 마찬가지지만, 이 땅에 우리가, 이 땅 자체에 대해서 의식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 1절에 보니까,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라고 되어있지요.

6장 1절에 보니까,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때”라고 되어있어요. 뭐를 떼시는가. 도대체 뭐가 그렇게 대단하기에 그걸 일곱 인으로 봉인하셨고, 그 안에 내용이 뭐로 되어있는가. 언어로, 말로 되어있어요. 말씀으로 되어있습니다. 봉인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사도 요한처럼 그걸 바깥으로 보면서, ‘아, 저것이 꽁꽁 묶어져 있는데, 어떻게 저 봉인 된 걸 뚫지?’라는 그것은 사도 요한의 의식이에요.

사도 요한의 의식이라는 말은, 사도 요한 자신이 평소에 자기가 아는 언어, 말을 통해서 그동안 그것을 구사하면서 살아온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아는 그 말을, 그 설명과 이해와 의미와 이해와 해석이, 그 봉인 된 것을 뚫어낼 수가 없는 거예요. 뚫어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화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사람들은 기도할 때, 자기 기도를 자기가 들으면서, 이걸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는데, 기도하면서 내뱉는 모든 자기 의식된,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을, 자기가 여기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느끼면서 하는 언어이기 때문에, 그 언어는 주님이 실제로 응답하시는 그것에 막히게 되어있습니다. 주님이 실제로 현실화시키는 것은 주의 말씀이에요.

그리고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것은 내가 이해되는 내 말입니다. 내 말과 주의 말 사이가 끊어져있다는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선지자 같은 경우에, 말 하나하나가 굉장히 중요해요. 주의 말씀 하나하나가 어느 정도 중요하냐 하면, 온 천하보다 중요해요. 내 생명보다, 목숨보다 말씀이 더 중요합니다. 이것을 놀랍게도 사도 요한이 알았던 겁니다.

그래서 울지요. 구원받은 사람이 울 필요가 뭐가 있겠냐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옆에 사도 요한이 울고 있으면, 우리는 툭 치면서 말하기를, ‘아니 구원받은 사람이, 천국을 보는 사람이 울 일이 뭐가 있습니까?’라고 이렇게 하면, 사도 요한이, “저게, 저게 막혔잖아!” ‘저거 뭔데요?’ “주의 말씀이 막혔잖아!” 주의 말씀이 현실이 돼야 하는데, 저게, 그 말이 현실이 되는 저게 막혀 있으니까, 답답해서 지금 운다는 겁니다.

그게 5장이었고, 이제 6장에서 드디어, 예수님께서 일찍 죽임을 당한, 죽임을 당했다고 하는 말씀은 5장 6절에 나온 말씀이에요.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그 어린양이 뭐냐,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찍 죽임을 당하신 분이 드디어 한 꺼풀, 두 꺼풀, 세 꺼풀, 네 꺼풀, 다섯, 여섯, 일곱 꺼풀을 이렇게 다 뜯어냅니다.

왜 하필이면 7이냐. 왜 7이 될 수밖에 없는가. 그건 전에 설명을 잠시 했는데 다시 설명하면, 창세기 1장에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라고 돼 있죠. 이걸 규격화라고 하죠. 가정주부들이 서랍을 해놓고, 이거는 양말 넣어놓는 거, 이거는 속옷, 요건 추리닝, 딱딱 규격화해서 끊어져 있듯이, 첫째 날에 집어넣을 거, 둘째 날에 집어넣을 거, 셋째 날에 집어넣을 거, 여기 일곱째 날에 몽땅 다 집어넣지요.

노화 홍수 때는 6일 날, 아주 작살을 낸 거예요. 노아 홍수 때는 6일 날, 땅 위에 있는 것을 작살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규모 있게, 하늘의 질서에 맞추어서, 하늘의 그 기호, 숫자에 맞추어서 이렇게 천지 창조를 하신 겁니다. 이 천지 창조가 완성되려면 역시 7자에 맞추어서, 그렇게 맞추어서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이제는 재창조하게 됩니다.

이 ‘7’에 맞추어서, 악(惡)도, 창궐한 악이, 온통 악으로 차 있는 것을, 창조의 ‘7’에, 그 ‘칠’에 맞추어서 돔배기, 도마에다가 상어를 토막 내는 거, 경상도에서는 상어라 하지 않고 ‘상에’라고 하는데, 상에 고기를 제사할 때 하듯이 딱딱 끊어서, 일곱 덩어리 내서, 처음에 창조한 요소, 첫째 날에 일곱의 그 악이 창궐해 있다, 둘째 날에 창궐해 있다, 셋째 날에 창궐해 있다, 그래서 일곱째 날에 다 ‘디비뿐다’라고 하죠. 완전히 전체를 새롭게 창조의 틀에 맞춰, 새롭게 창조하는 거예요.

기존의 창조가 악이 창궐하기 때문에, 이걸 패를 까면, 첫째 인봉의 패를 까게 되면, 자연적으로 그 안에 뭐가 들어 있겠습니까? 첫째 서랍, 둘째 서랍, 셋째 서랍, 이렇게 쫙 있는데, 첫째 서랍에 쥐가 들어 있고, 두 번째는 바퀴벌레, 세 번째는 지렁이, 요거를 하나하나 할 때마다, 저주받아야 마땅한 것들이 그 서랍 안에 딱 들어있겠지요.

마지막 일곱째 서랍에는 누가 들어 있냐? 마귀가 들어있죠. 뱀, 마귀가 들어 있는 거예요. 서랍을 열어야 하죠. 서랍을 연 이유가, 지금 심판하시는 주님이 심판 주가 되었기 때문에, 일찍 죽임을 당한 그분이 심판 주가 되기 때문에, 심판하기 위해서 서랍을 하나, 둘, 세 번째, 네 번째, 전부 다 서랍을 뽑아내는 거예요.

이렇게 뽑아낼 때, 첫 번째 뽑아낼 때는 3분의 1의 악에 대해서만 관리하고, 두 번째 1, 2, 3, 4, 5를 칠 때는, 그중에 또 3분의 1, 세 번째는 1, 2, 3, 4, 5의 서랍을 열 때는 3분의 3을 다 합니다. 첫째 인, 첫째 나팔, 첫째 대접. 그 인(印), 도장 받은 거를 떼는 거, 봉인된 것을 떼는 것과 그다음에 나팔 부는 것과 그다음에 일곱 대접, 이렇게 3차례에 걸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악을 차례차례로 들추어내서 최종 심판에 이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왜 3분의 1을 이렇게 구분 지었느냐 하면, 3분의 1을 구분 짓는 이유는, 그 악을 징벌한 동시에 짝을 이루어서 천국에 들어가야 될 성도들의 그 본질도, 3분의 1씩, 3분의 1씩, 3분의 1씩, 조금씩 조금씩 이쪽에 징벌과 함께 덩달아서 이쪽에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강도가 어느 정도 큰 복을 주시는가를, 3분의 1씩 쪼개가면서 주시는 겁니다.

그게 한 때, 두 때, 반 때죠. 한 번, 두 번, 세 번,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께서 일을 하신다는 거, 진도 나가지 않고, 이 점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주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주께서 일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에 대해서 인간들은 도저히 모른다는 거예요. 왜? 인간은 자기 언어에, 자기가 아는 그 언어와 단어 속에서 현실을 살아갑니다.

그럼, 인간의 언어는 어디서 나오는가. 인간의 말을 구사한다는 것은 인간의 의식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인간에게 의식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에게는 의식만 있지, 인간 의식 말고 뭐가 있느냐? 인간 속에 무의식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과 하나님은 인간이 의식만 아는 그거 말고, 인간이 의식에 감춰져 있고, 의식이 있어서 눌려 있는, 의식 밑에 무의식 세계를 하나님은 겨냥하지요.

인간은 의식적으로 겨냥하고, 자기 자신을 그렇게 통제하고, 주님은 인간의 언어로 접근할 수 없는 무의식 세계에서 통제하고. 그러니까 인간의 언어 가지고는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해석해 낼 수가 없는 겁니다. 인간의 의식은 정확하지는 않아요. 그냥 의식적인 자기의 느낌을 줄 뿐이죠.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느 가정에서 제사를 폐지할 거냐, 계속할 거냐는 찬반 투표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5명이 찬반 투표를 했습니다. 했는데, 4명은 제사 폐지하기를 물었으니까, ‘예’하고 동그라미를 크게 쳤어요. 크게 쳤는데, 제사 지내야 한다고 우기는 시어머니는, 나중에 며느리가 표를 넉 장 까고 마지막에 다섯 번째를 까는데, 그 제사를 드리겠다는 시어머니가 제사 폐지를 반대하는 엑스(X) 표가 아니고 동그라미를 하는데, 동그라미가 너무 작아요. (MBC 드라마, 유부녀 킬러)

너무 적어. 그 이유 뭐냐 하면, 나는 제사 폐지하는 걸 찬성하기는 찬성하는데, 그래도 다 찬성하는 게 아니고 미련이 있다는 이런 뜻이거든요. 미련이 있으나 마나 뭐, 엑스(X) 표가 아니고 작은 동그라미도 동그라미잖아요. 이게 바로 인간의 의식이 언어에 담기면, 인간의 언어가, ‘됐나?’ ‘됐다!(큰 목소리)’라고 이렇게 하면 되는데, ‘됐나?’ ‘됐다...(작은 목소리)’ 이렇게 하 작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의식입니다. 그럼, 인간의 무의식에 대해서는 야고보서 1장 15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여기 보면 ‘욕심’이라고 돼 있어요. 인간의 죄는 의식적으로 죄짓는 것 가지고, ‘죄다, 아니다’라고 그렇게 판정하는 게 아니다. 왜? 인간은 의식적이기 때문에 말을 사용하잖아요.

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뭔가 행동 해놓고, 그렇게 뒤에 뒷말이 많아요. 안 하려고 했는데, 나는 그만두려고 했는데, 자꾸 이게 구질구질하게 굉장히 말이 많은 거예요. 말이.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말 좀 하지 마. 말 치우고 네가 접근할 수 없는 네 속에 있는 무의식에 접근할 거야”
그게 바로 욕심입니다. 욕심인데, 이걸 현대 학문에서는 욕망이라고 해요. 욕망.

욕망은 무의식을 다루는 데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거예요. 첫 번째, 욕망은 일단 인간의 핑계나 언어나, 이것들이 접근할 수 없는 세계이다. 두 번째, 욕망은 내가 한다, 안 한다는 의식이 접근할 수 없는 세계이다. 이거예요. 이걸 내가 하겠다고 마음먹고 하는 게 아니고, 하겠다는 그 이전에 이미 욕망이 나를 벌써 움직여 버렸어요.

그리고 인간의 말은 뒤늦게 ‘후회한다, 반성한다, 내가 그럴 뜻이 아니었는데’라고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뒤늦게 수습하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간단히 하게 되면 이렇게 됩니다.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산다’ 그래 놓고 뒤늦게, ‘그게 내 뜻이 아니었다고 변명조로 산다’라는 이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해놓고, 이게 내 마음이 아니고, 이거는 내 뜻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 말이 맞죠. 왜? 인간은 자기 뜻보다 더 강렬하게 내부에서 활동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과 인간의 욕심입니다. 인간은 타고난 거예요. 그래서 그 점을 생각한다면, 요한계시록 보면서 아주 신바람을 내면서, ‘하나님, 이란과 가자 지역에만 이렇게 이스라엘이 폭탄 때리지 말고, 저쪽 동네 북한 좀 때려주세요. 이게 하나님의 합당한 현실이잖아요’라고 이렇게 요구할 수 있죠.

그러나 보세요. 이미 자기의 의식을 의식하잖아요. 자신의 그것이 욕망이면서도 마치 이거는 정의로운 것처럼, 하나님이 일하시면 이렇게 일해야 하나님답다고, 하나님을 조정하려고 덤벼들잖아요. 그거는 안 된단 말이죠. 그래서 제가 할 말은 요한계시록은 해석이 안 됩니다. 인간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결론을 가지고, 현실이라고 이렇게 우기고 싶은 거예요.

어젯밤에 저한테 문자가 왔어요. 어떤 분이 저에게 이름도 안 밝히고, 동영상 3개를 보내왔어요. ‘목사님, 이거 한번 읽어보시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저한테 답변해 주세요’ 그때 한밤중이라 자고 있었는데, 왔어요. JYP 대표, 박진영이라는 사람이 지금 복음을 전한다고 막 동영상 많이 찍어 놨잖아요. 그중에 3개를 이렇게 보내왔어요. 그래서 제가 빨리 잠을 자야 하니까, 빨리 답변해야 하겠죠.

성경 말씀을 가지고, 인간 역사의 마지막을 시나리오로 짜는 것은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자유가 있는데, 어떤 시나리오도 주께서는 비켜 갑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되면, 그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짜맞춘 종말의 시나리오를 볼 게 아니라, 갈라디아서 1장 4절을 보시고 믿으시면 된다고 소개했어요. 그래서 그분이 이제 감사하다고 이렇게 왔는데, 갈라디아서 1장 4절이 뭐냐 하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라는 이걸 믿으시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나온 단어, ‘악한 세대’라고 하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시나리오를 어떻게 짜든 간에, 모조리 다 악해요. 모조리, 모조리 다 악해요. 왜? 이 세상을 파괴 시키는 그 당사자가 일찍 죽임을 당했거든요.

그냥 죽임을 당한 게 아니고, ‘일찍’ 죽임을 당했다는 말이, 일찍 죽었다는 것은, 인간이 현실을 해석하기 이전부터 예수님은 어린양으로 죽도록, 이 땅이 더럽고 그 더러움에서 죽음으로써 대처한다는 것이 역사 이전에 이미 확정된 사실이에요. 그게 일찍 죽임을 당한 거예요. 일찍 죽기로 돼 있던 분이 역사 속에 오셔서 일찍 죽임을 당하신 겁니다.

이 사실을, 인간이 이 세상을 살면서 나름대로 의식으로 언어를 동원해서 시나리오를 짜고, 그거 다 소용없지요. 몰라요. 사도 요한도 몰랐는데 지금 우리가 뭘 알겠어요? 일찍 죽임을 당하신 분에 의해서 이 세상은 지금 부정당합니다. 거부당해요.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갈라디아서 4장에, 이미 이 악한 세대 자체가 아니고, 아예 악한 세대, 이 악한 세대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이것만 믿어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예? 뭐 또 다른 걱정을 굳이 해야 돼요? 걱정 안 할 걱정을 꼭 해야 됩니까? 박진영이의 그 현실 시나리오 모른다고 해서, 이 갈라디아서 1장 4절이 취소됩니까? 아니잖아요. JYP 대표인 그 사람은 뭐냐? 대비해야 한다는 거예요. 대비. 일곱 짐승이 나타나서 일곱 인을 찍고, 뭐 대비해야 한다는 거예요.

대비를 한다는 것은 뭐를 안다는 뜻이거든요. 인간은 모르는데, 인간 모르게 일을 하는데, 무슨 대비가 됩니까? 인간 모르게 일을 하는데요. 그렇다면 여기 오늘 본문에 들어가서, 이 해석은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 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계6:1~2) 이렇게 돼 있잖아요.

이 이야기가 요한계시록에 이걸 봐서는 모르고요. 스가랴를 봐야 해요. 스가랴 6장 11~12절에 보면, “은과 금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 고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순(筍)이라는 것은 새싹이죠,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이렇게 돼 있어요.

여기는 이야기가 지금 면류관 나오고, 순이라는 분이 나와서 성전 건축으로 이야기가 됐죠. 순서가 그렇게 되죠. 근데 여기 순서를 하나 더 추가합시다. 스가랴야 6장 1~3절에 보면, “내가 또 눈을 들어본즉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왔는데 그 산은 놋산이더라, 첫째 병거는 홍마들이, 둘째 병거는 흑마들이, 세째 병거는 백마들이, 네째 병거는 어룽지고 건장한 말들이 메었는지라”

그러니까 스가랴 6장 이야기는 우선 말들이 나오고, 네 마리의 말들이 동서남북 사방으로 퍼집니다. 퍼질 때, 그 말들이 퍼짐으로써 바람같이 솟아, 바람같이 달리는 것이 말 모습이거든요, 바람같이 퍼지면서 이 세상을 심판하는데, 그 심판하는 이유가 산이, 놋산이에요. 놋으로 만든 산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은 이미 심판받기로 작정이 된 그러한 상황에서, 심판하라고 선포된 그 장소에서, 심판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네 마리에 서로 색깔이 다른 말들이 나와서 이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버린다.

그래 놓고 면류관을,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면류관을 씌우고, 그다음에 나오는 순서가, 순(筍)이라는 분이, 새싹이라는 그분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건축한다고, 이렇게 순서가 돼 있어요. 이렇게 돼 있는 것은 바로 평면적인, 스가랴에서는 역사가 계속 십자가를 향하여 가고 있는 평평한, 평면적인, 수평적인 시간대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시간대가 뭐로 올라갔느냐 하면은, 수직으로 올라가 있어요.

수직으로 올라가 있으면, 요한계시록 6장에서 이미 다 이루었어요. 다 이루고 난 뒤에, 고고학자들이 고고학 발달에 대해 지층 조사하잖아요. 지층 조사. 제일 위층, 아래층 하듯이, 그 지층을 전문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6장이에요.

그걸 못 봐서 애탄 것은 요한계시록 5장이었고, 전체를 수직적으로 ‘무엇에 대해서 다 이루었습니까’라는 것을 요한계시록 5장에서는 그걸 못 봐서 울었고, 6장에서는 ‘내가 처음부터 한번 보여줄게’하고 첫째 인을 떼니까, 그 지층 구조 일부가 나오는데, 그게 뭐냐. 스가랴에 예언된 그 시간 구조를 반대로 돌리는 거예요.

이미 순(筍), 연한 분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고, 희생해서 다 이루었고, 이루어진 그다음에 면류관 쓰시고, 그다음에 말들을 보내서 주님의 십자가 일에 방해했던 이 세상 전체에 대해서 복수의 칼날, 완전히 이 세상을, 천지 창조를 뒤집어버리는 일을 수행한다. 그게 바로 6장 1~2절입니다. 그 단면, 지층의 단면, 깎아진 단면을 우리가 보는 거예요.

뭘 대비해요? 대비할 게 뭐가 있습니까? 이미 우리 악한 세대에서, 우리 죄를 씻기 위해서 몸을 주셔서, 다 이루었는데, 뭐를 대비합니까? 그냥 노래나 작곡해라. 그거는 뭐냐 하면 바로, 남을 가르치겠다는 거. 가르칠 때, 의식 있는 자에게 의식 있는 것을 풀이해서 의식적으로 주입 시키겠다는 건데요.

우리의 성도는요, 우리의 의식이 아니고, 성령께서 우리의 욕망을 통해서 성령께서 우리를 기어 올라와서, 네가 이렇게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해서 사망을 낳는다는 이 사실을, 단층적으로 우리에게 한꺼번에 보여줌으로써 이런 죄, 해결할 수 없는 무의식적인 죄까지, 예수님 한 몸 드림으로써 해결되었음을 주께 감사하라고 이 책을 봉인을 푸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을 대할 때마다 우리가 몰랐던 죄가 다시 나오고, 우리가 얼마나 세상에 대해서 아직도 집착하고 미련 두고 있는지, 십자가의 복음으로만 충분하다는 그런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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