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의 끝
2026년 7월 26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4:5-11
(4: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4: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 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4: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4:8)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4:9)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4: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천국이든 지옥이든 관찰자로서의 인간은 거부당합니다. 오로지 말씀에 의해서 전달되는 그 내용만 실제 현실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 내용 속에 담긴 환경을 한마디로 말해서 ‘함께 삶’입니다. 결코 홀로 사는 자를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받아주지 않습니다. 천국에 들어올 이유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천사들을 보세요. 하나님 보좌 주변을 독차지 하면서, ‘언제 주님을 떠난 적이 있었느냐’라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보자 옆에 24 장로들이 자리하면서 천사와 동일한 찬양을 하나님과 주님에게 돌립니다. 바로 이러한 광경이 보여주고자 하는 취지는 이러합니다.
천국에 사는 자들은 지상에서 결코 홀로 사는 식으로 사는 자들이 아니다 는 겁니다. 굳이 천국가서 천국 생활을 하는 자들이 아니라 이 지옥 속에서는 주님과 동행하면서 사는 모습을 보였다는 겁니다. 그리고 동행의 최종 상태가 이처럼 영원한 합류입니다. 만약에 이 세상에서 홀로 사는 것이 즐겁고 재미난다면 이런 자는 천국과 연관된 삶이 아니라 지옥과 연관된 삶입니다.
인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단독자로, 혹은 자기 단일성에 미쳐서 살아갑니다. “나는 혼자다. 신난다”를 외치고 다니는 식으로 평소에 행동해 오고 있습니다. 반면에 천국에 간 구약의 성도들을 봅시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2-24)
뿐만 아니라 노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8-9) 따라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24장로들은 구원받은 인간을 대표하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 면류관이 어떻게 해서 주님에게 전달되는지를 봅시다.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계 4:10_여기서 ‘자기 면류관’으로 나옵니다. 타인의 면류관이 아니라 자기가 썼던 면류관입니다. 이것을 남도 아니라 주님의 것으로 기꺼이 던집니다. 도저히 자신이 쓰는 것이 용납될 수 없다는 과감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로서 이 24장로들은 본인들이 마음에 두고 있는 자기 가치는 없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자신이 계속 간직할 수가 없습니다. ‘동행’이라는 의미는 ‘나란히’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일방적인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은 상태로 동행하는 겁니다. 평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점을 유념시켰습니다.
실제로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점을 일찍감치 감안하시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즉 아름다운 집에 평안히 지내는 것이 도리어 징벌로 작용하는 겁니다. 인간들은 단독성을 지니고 그 단독성을 마음껏 발휘하는 방법으로 자랑하는 행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3:18-24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 그 날에 그들의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귀고리와 팔목 고리와 면박과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지환과 코 고리와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주머니와 손 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 그 때에 썩은 냄새가 향을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숱한 머리털을 대신하고 굵은 베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하고 자자한 흔적이 고운 얼굴을 대신할 것이며”
자, 그렇다면 주님께서 제시한 방식은 무엇일까요?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1-3) 예수님께서 천국의 사정을 지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주시는데 거론된 대상이 바로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은 독자성, 독립성이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의존성이요 자기 것을 따로 챙길 것을 모릅니다. 즉 ‘나를 위한 나의 면류관’ 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합니다. 어린아이는 늘 보호자를 찾고 보호자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는 자기 가치성에 미쳐버리지 않습니다. 몰입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에게 타인이 고정되었습니다. 부모에게로 말입니다. 이러한 의존성의 극단적인 양상이 바로 주님과 천사의 관계입니다. 천사는 주의 보좌에 밀착한 위치에서 찬양하는 것을 봐서 지상에서는 기능에 있어서도 철저하게 주님의 지시에 따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독자적으로 생각한 천사는 천국에 가 있지 않고 지옥에 가 있습니다.
그런데 천사의 이러한 기능이 순전히 주님의 구원에 관여했다면 어째서 주님이 아닌 일반인에게도 천국이 허용되었는가요? 이 사실을 천사의 기능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천사의 기능의 원판이 되는 에스겔에 나타난 천사에 대한 모습을 보겠습니다. 에스겔 1:10에 보면,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그런데 에스겔 10장에서 보좌에 붙어 있는 천사의 얼굴이 바뀝니다. “그룹들은 각기 네 면이 있는데 첫 면은 그룹의 얼굴이요 둘째 면은 사람의 얼굴이요 셋째는 사자의 얼굴이요 넷째는 독수리의 얼굴이더라”(겔 10:14)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 처음에는 인간 및 노아 홍수에 사라진 짐승의 얼굴로 천사의 기능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에스겔 10:14에서, 사자의 열굴 자리에 그룹이란 천사의 얼굴이 나타납니다. 이 그룹이라는 천사의 얼굴은 창세기 3:24에서는 생명나무의 길을 막고 인간이 통과하지 못하는 기능의 그룹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천사가 짐승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짐승의 기능을 발휘한다는 뜻입니다. 그룹의 기능이 삽입되어서 인간 세계를 활동했다는 말은, 인간은 절대로 구원될 없다는 사실과 관련있습니다. 인간이 결코 생명나무 과실을 따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드린 자만이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에 천사가 관여하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인간을 구원시켜 주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드러낸 사실이 바로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께서 해내신 일입니다. 죄로 인해 구원될 수 없는 자임을 분명히 밝혀주시는 취지의 중심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는 겁니다. 이 십자가 사건에 바탕 위에서 24장로는 자신이 받은 구원을 행위로 보여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제발 나의 일이 없어졌음을 평생 내내 명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7강-요한계시록 4장 5~11절(동행의 끝)260726-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4장 5~11절입니다. 신약성경 381페이지입니다.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신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시공간을 따져서 최종적으로 이미 그쪽 세계에 합류가 돼 있는 상태, 그것을 이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내가 봐야 있다는 게 아니고, 누가 보여줄 때 비로소 보여준 세계가 있습니다. 그 보여준 세계로 인하여, 그전에는 내가 봐야, 내가 관찰해야 내가 믿는다는 그것이 결국 최종적인 게 아니고, 중간에 와해 되고, 무너져야 되고, 부서져야 될 겁니다.
그 부서지는 장소가 바로 십자가였고,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가지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육신 가진 모든 인간은 부서져야 될 대상이라는 것을 우리한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여기 오늘 천국의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들이 우선적으로 이 말씀을 보면서 먼저 느껴야 될 감각은 뭐냐?
‘아, 함께 있구나. 함께 사는구나. 함께 영원하구나’ 전에, 이 세상에서 살 땐 항상 나 혼자, 모든 일을 내가 결정했고, 내가 관장했고, 내가 관할했고, 최종적으로, 단일적으로 남는 최종적인 단일성은, ‘나 여기 있다’라는 그걸로 굳히기 들어갔거든요.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그걸 느꼈다는 이 말이죠.
그러니까 지금 제가 하는 말이 좀 말이 안 되는 게, 제가 말하는 것이 마치 인생을 다 산 것처럼 말하잖아요. ‘그때 우리가 이 세상에 있을 때, 나 항상 혼자였어’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몇 년 더 살아봤어? 나이 80까지 살아봤어? 아직 할 일 남았으니까 데리러 오지 말라고 90까지 살아봤어? 아직 다 안 살아보고 무슨 말을 그렇게 단언하는 쪽으로 해?’ 아마 그렇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안 살아보고 어떻게 아느냐? 그럴 때 우리 성도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해야 돼요. ‘너 죽어 봤어? 80까지 안 산 건 맞는데, 90까지 안 산 건 맞는데, 너 죽어 봤어?’ 다시 말해서, ‘내가 최종적이다. 내가 제일 소중하다. 내가 가장 귀하고 마지막까지 나는 나를 붙잡고 나를 안 놓을 거야’라고 하는 그것이 죽음의 대상인 것을 네가 언제 알아봤어?
이렇게 묻는 거예요. ‘나는 나만 있으면 돼. 나만 살면 그만이야’라고 하는 그것을, 그런 태도를 하나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해봤냐는 이 말이죠. 마지막 죽는 순간에, 우리는 끝까지 ‘나는 내가 최고다’라는 생각을 유지하면서 죽어요. 그런데 감사할 것은, 그런 나를 죽여서 제거해 주시는 분이 계신다는 거예요. 그런 나를. 나는 나를 손 못 대요.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나는 나에게 나의 손을 뗄 수가 없어요. 난 지금껏 내 일을 위해서 살았지, 남을 위해서 산 적이 없습니다. 누가 나를 좀 죽여줬으면 좋겠는데, 우리는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내가 죽는 걸 가지고 죽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남이 죽는 것을 죽음이라고 하지 않아요. 남이 죽든 말든 내가 안 죽었으면 됐어요. 그만하면 살 만하다고 여깁니다.
그렇다면 제가 이렇게 길게 이야기할 때, 단 한 가지 때문에 길게 이야기한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은 끝까지 따라 붙이면서, 그런 나를 동행해서 죽여주시는 분이 계시네요. 동행해서.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서 딱, 이걸 느껴야 해요. ‘아, 혼자가 아니구나. 동행하고 있었고, 내가 전에도 함께 계신 분이, 함께 영원히 계실 나를 위해서, 늘 따라 붙이다가, 기어이 나를, 나는 혼자다는 나를, 나는 최고라는 나를 죽여 주셨구나’라는 그 세계가 바로 천국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천국이에요. 오늘 본문에 나오면서, 내용의 특징이 뭐냐? 내 생각이, 내가 내 생각이 먹히지 않는 세계에 도착한 거예요. 그래서 끝부분에 뭐가 나오냐 하면, 후딱 내가 잠시 썼던 그 면류관을 어떻게 해요? 다 같이 봅시다. 10절에, “ 이십사 장로들이” 인간 쪽에 있는 거예요. 인간 쪽에 대표자가 이십사 장로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십사 장로를 구약의 12지파와 신약의 12사도를 이야기한다는데, 그럴듯하죠. 이십사 장로. 왜? 이십사 장로들이 총합이니까. 12 더하기 12가 전체 구원받은 자의 총합을 24로 표현했으니까. 충분히 그런 생각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대표할 이십사 장로들이 할 일이 뭐냐 하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그다음에 할 일이 뭐냐? 자기의 면류관이에요, 자기의 면류관. 자기의 면류관인데, 자기가 없어졌잖아요. 그러니까 자기의 면류관을 쓰면서 하는 말이, ‘아니, 이게 왜, 내가 이게 왜 있지? 이것은 내게 합당한 면류관이 아닌데? 아니 이 면류관을 왜 내가 쓰고 있느냐. 이게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왜 내가 쓰고 있지?’
마치 자기 머리에서 독사가 기어다니는 것처럼, ‘이게 왜 나에게 있지?’라고 놀라서, 그 독사를 후딱, 독사를 후딱, ‘왜 내가 했지? 내가 쓸 게 아닌데’라고 내던지는 것처럼, 면류관을 줄 때, ‘여기 있나이다’라고 곱게 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면류관을 어떻게 하냐. 그냥 던져요. ‘내가 여기 왜 있지? 내가 미쳤지. 내가 왜 이걸, 이걸 왜 써’라고 하고 던지는 겁니다.
던지는 그 장면을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한번 해봅시다. 던지는 장면을. 제가, ‘한번 해봅시다’라고 하면, ‘목사님, 저는 면류관 같은 거는 쓴 적이 없는데, 면류관을 왜 던지는 시범을 한번 같이 보이겠는가’라고 하시면, 제가 여러분께 던질 수 있도록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신명기 8장 12~14절에,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이게 뭐냐 하면,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고, 네가 우양이 번성하며, 은금이 증식되는 게, 이게 하나님의 징벌이고 하나님의 저주라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원래 성도는요.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졌다가, 성도가 부끄러워서 그걸 던지듯이, 후딱 던지듯이 내 던져야 할, 그 역할이 우리 성도의 역할이에요. 그런데 신명기 8장에서, 하나님께서 염려하고 있는 거예요. 네가 배불리 먹고, 아름다운 넓은 집에 이사 가서 거하게 되고, 이렇게 될 때, ‘주여, 이걸로 족합니다. 예, 이걸로 충분합니다. 나는 이 집에서 나 홀로, 나 홀로 살겠습니다’
단일성, 단일성. 내 머리가, 내가 집어 던져야 할 게 뭐냐 하면 바로 이거예요. 세상 것을 얻었다고 해서, 더 이상 다른 생각을 먹지 않을 정도로, 거기에 가둬 져버리는 것이, 이게 악마가 우리에게 동행이라는 걸 지워버리고, 연합을 지워버리고, 단독적으로 우리에게, ‘너만 잘되면 돼’라고 그렇게 가르쳐 왔던 거예요. 그런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이 천국에 가게 되면,
‘엄마야,’ 본인이 놀라서, ‘이걸 내가 왜 쓰고 있지. 이걸 내가 쓸 근본이 아닌데’라고 후딱 갖다 버려서, ‘주님이 쓰셔야 합당하지’ 나는 이 생명이라는 것이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세상 것만 좋아하는, 그게 납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이번에는 여성분, 여성 동무들이, 갑자기 동무, 여성 동무들이 들으셔야 해요.
이사야 3장 18~26절, 3장 18절부터 보겠습니다. “주께서 그 날에 그들의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귀고리와 팔목 고리와 면박과,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지환과 코 고리와,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주머니와, 손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 그 때에 썩은 냄새가 향을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숱한 머리털을 대신하고” 대머리, 머리 심지 마세요.
“굵은 베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하고 자자한 흔적이 고운 얼굴을 대신할 것이며, 너희 장정은 칼에, 너희 용사는 전란에 망할 것이며, 그 성문은 슬퍼하며 곡할 것이요 시온은 황무하여 땅에 앉으리라” 남한테 그럴싸하게 내세울 만한, 내세울 만한 것이, 자랑하고 싶은 것이, 단독성 단일성이 되는 나의 단일성에서 출발한다는 거예요. 동행? 미쳤어요. 왜 동행하죠? 동업도 안 해요.
난 내 회사 차려서 내가 부자 될 거예요. 주식도 내가 51%로 제일 많이 갖고. 도대체 어떤 재벌을 욕하지 마세요. 부자를 욕하지 마세요. 우리는 타고난 거예요. 나의 단독성과 단일성. 함께 한다? 그게 천국이다? 안 가! 안 가요. 왜? 내 나라 아닌데, 왜 갑니까? 함께 한다는 것을 지금껏 살아오면서 배운 적이 없어요. 그냥 내가 나한테 맨날 이야기하는 것이, ‘나만 잘되면 돼. 나는 잘 살면 돼. 나만 행복하면 돼. 나만 부자 되면 돼. 나만 똑똑하면 돼’ 2등은 용납이 안 돼요. 2등으로 못 참아. 반드시 내가 최고가 돼야 해요.
더불어 함께 있다는 거, 무슨 더불어민주당? 인간은 ‘더불어’가 성립이 안 됩니다. 그런데 어딜 가요? 천국을 가요? 가기 전에 그러면 이 혼자 사는 것이 뽀개져야죠. 혼자 사는 것이 이게 작살나야죠. 지상에서 그냥 잘 먹고 잘살고, 뭐 넓은 집 이사 가고, 은금이 잘 되고, 돈도 많고 이것을 삶의 목표로 잡고 아득바득 살아온 거, 그것이 바로 천국에 못 오게 되는 단독성으로, 혼자 사는 재미로, 혼자서 하는 재미로 살아가는 자들의 특징이라는 거예요.
맨날 솔로예요. 맨날 솔로. 그러면 역시 우리 인간으로서는 또다시 대책이 없어요. 그러니 성경을 보게 되면 정말 천국은 인간을 안 넣어주기 위해서 아주 작심을 하는 나라 같아요. “인간이냐? 안 넣어줘” 그래서 오늘 본문은, 오늘 제목이 ‘천국에서 하는 일’이거든요. 정답이 뭐냐 하면, “천사가 해요” 천사가. 천사가 하고, 예수님이 천사한테 지시했고, 예수님과 천사가, 천사가 예수님하고 딱 붙어 있어요.
동행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이게 동행이다. 동행의 진수를 보여줘요. 그 동행의 진수를 보여주는 그 보호자, 보호자가 딱 붙어 있고, 그 앞에 24 장로가 ‘빨리빨리, 빨리 벗어! 벗어! 빨리 벗어! 벗어! 벗어! 나도 벗어! 너도 벗어!’라고 하면서 생명의 면류관을 타닥타닥타닥! 무슨 소리가 막 나요. 막 던지는 거예요. 그게 천국입니다. 그러면 천사는 뭐 하느냐. 천사는 그걸 보고 노래를 해요.
노래해요. 이미 벌써 돌아가신, 옛날에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께서, 제가 기억 남는 중에 특징이 하나 있는데, 우리 아버지가 꼭 식사, 아침 점심 저녁 식사 마치고 일어서면서, 꼭 노래를 불러요. 배부르다 이거죠. 예. 갈치찜이 만족스럽다는 이 말입니다. 흥얼거리며 노래를 부릅니다. 유행가를 부르는 거죠. 트로트를. 그렇게 천사가 노래를 불러요. 영원토록.
뭐냐 하면은 이번에 건질 자를 건져내는 수확에서 대만족했다는 거예요. 주님이 만족했고, 그 만족에 참여했던 천사들도 주님이 만족하니까 같이 만족한 거예요. 이게 동행입니다. 동행. 이게 동행이에요. 지상의 동행은 최성수(가수)나 부르라고 하세요. 하늘의 동행은 합류돼서, 영원히 고정된 거예요. 확정. 그 동행이 최종 상태가 되면, 천국에 함께 있음이 돼요.
함께 있음. 천국은 함께 있음, 지상은 그냥 동행. 이래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지상 생활에서 하나님과 동행한 자가 있느냐? 있지요. 창세기 6장 9절에 보면,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리고 창세기 5장 22절에 보면,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누가? 에녹이.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다음에 24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동행했던 그 에녹이, 동행의 관계가 소멸하는 게 아니고 완성 단계로 영원히 하나님과 합류하기 위해서 동행 된 채로 300년 살다가 그대로 동행을 유지하면서 천국에 골인했습니다.
노아도 그랬고요. 그럼, 우리는요? 우리는 뭐 하고 있죠? 동행 노래만 부르면 됩니까? 자, 미리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자기밖에 몰라요. 아, 지독해요. 정말. 그런데 이 땅에서 동행의 모습을 보이는 자가 있어요. 동행의 모습을 보이는 자의 특징은 뭐냐. 누구 곁에 동행하기 때문에 자기 자랑이 주님에 의해서 이렇게 거부당해요.
주께서 단독적인 내 자랑, ‘너는 못났어. 나는 나만 잘났어. 나만 잘났어’라는 게 그때, 그때마다 주님한테 제거돼요. ‘엄마, 또 1등 했어!’ 잘 났다, 그래. 장단을 맞춰주는 게 아니고, 아예 옆에서 제거해 줘버려요. 왜? 지옥 가기 때문에. 자기 잘난 맛은, 그대로, 그들은 지옥으로 그냥 골인입니다. 그게 마태복음 18장에 나옵니다. 18장 3~4절. 예수께서 어린아이를 하나 데리고 옵니다.
어린아이를 딱 세우고 하시는 말씀이, 천국에 있는 삶과 어린아이의 삶을 아예 연결해 버려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 앞에 누가 있지?”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같이 살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천국에 가지를 못한다. 여러분 어린아이가 혼자 살고 혼자 이야기하는 거 봤습니까? 어린아이가 자기 잘났다고 해도, 누구하고 이야기하잖아요. 꼭 이 어린아이는 이야기할 대상을 찾아요.
왜? 자동으로 동행이니까, 함께 사니까요. 여러분 지금 누구하고 이야기합니까? 이거는 수련회에서 할 건데, 뭐 독하게 수련회 참석을 안 하니, 아주 독하게 마음먹고 안 하니, 어쩔 수 없이 또 수련회 내용을 흘릴 수밖에 없어요. 이게 뭐냐 하면, 어린아이는 어른 되어도 어린아이일 수밖에 없다. 다만 차이가 아빠 자리를, 엄마 자리를, 다른 걸로 채우는 식으로 자기가 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게, 이게 어른이라는 거예요.
어린아이는 누가 돌봐주고, 누가 챙겨줘야 내가 산다는 것을, 이거는 지식이 아니고, 지식이 아닙니다, 본능적으로 한순간도 잊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이게 어린아이가 겁나면, 아빠 엄마 찾아갑니다. 어린아이가 코피 나면, 옆에서 돌봐줄, 닦아줄 엄마가 있고, 옷 갈아 입혀줄 아빠, 아빠가 옷 들고 오지요. 이게 어린아이예요. 주께서 우리한테 책망합니다.
“왜 자꾸 혼자서 어른 되려고 하느냐?” 개코 개도 모르면서, 어른 됐고 하니까, 자기 머리 위에, 자꾸 자기 자랑만 잔뜩 쌓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은, 나도 어른이니까, 나도 홀로 서니까, 다른 홀로 선 사람과 ‘이리 나와. 한 판 붙자’ 남하고 항상 게임하고 경쟁하는 그런 맛이 들어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지옥 맛입니다. 지옥에는 자기 잘난 척하는 인간이 다 가요.
그래서 이 제자들도, 제자끼리 “우리 가운데 누가 높습니까?” 이런 자랑질을 하니까 주님께서 가만두지 않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면 누구도 천국 못 간다” 끝으로, 이 어린아이, 어른처럼 잘난 척하는 어린아이를 방지하는 게 누구냐 하면, 천사의 일이고 천사의 몫입니다. 오늘 본문 한번 봅시다. 4장.
조금 어렵습니다. 4장 6절에, 보좌 앞에 뭐 있는데,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늘 지켜본다는 것이죠. 그다음에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라고 돼 있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 제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천사는 누구 같으냐? 천사 같아요. 천사는 천사 같습니다. 아니, 말 잘못했네. 천사가 천사 같은 게 아니고, 천사는 천사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천사에게 일을 맡기면서, 이 지상의 일을 맡기면서, 천사가 변신에 변신을 거듭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천사가 천사 일을 하는데, 하늘에서는 천사가 천사 일을 하고, 땅에서는 뭐냐? 천사가 송아지 일하고, 사자 일하고, 사람 일을 하고, 독수리 일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같다는 말을 붙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천사 일을 하게 되면, 이것은 결국 천사가 누구 일을 하느냐 하면, 주의 일을 하는 거예요. 이 땅에 오신 주님을 구원하는 일을 이 천사들이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주님이 지시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뭐냐? 사람 구원이 빠져 있어요. 사람 구원이 빠져 있는 경우에는 안 돼요.
주님은 구원받는데, 사람은 구원 못 받아요. 그래서 천사의 기능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천사의 기능에 그동안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가로막는 기능자로 천사가 있습니다. 그게 창세기 3장 24절에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여기에 나온 천사가 그룹이에요. 여기 나온 천사가 그룹입니다. 이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에스겔 1장에서는 오늘 요한계시록 말씀대로, “사자, 소, 독수리 그리고 사람” 이렇게 천사의 기능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에스겔 10장 14절에 보면, 여기에 소가 빠지고, 거기에 그룹이라는, 그룹이라는 천사가 이름이 들어가요.
그러니까 그룹 이름으로 천사가 들어감으로써, 인간들, 성도에게 “너는 생명나무 못 따먹어! 이거 확실히 알아, 몰라?” 압니다. “알기 때문에, 안다는 것 때문에 너를 구원할게” 이게 그룹 천사가 끼어들어 가야 할 이유입니다. 6일째에 만든 독수리, 사자, 소 그리고 사람, 다 6일째 만든 거예요. 노아 홍수 때 작살났죠.
이렇게 만든 건데, 에스겔 10장 14절에는 소 자리에 그룹을, 천사가 직접 들어감으로써, 완전히 멸망했던 이스라엘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근거가 천사 기능 속에 포함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에 와서, 오늘 본문에 와서, 여기서 그 사람에 속했던 사람 자리와 사람과 그룹의 그 동행과 총합은 보좌 앉으신 인자 되시는 분으로 이미 최종 확정이 났어요.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인자 되시는 분. 그러고 난 뒤에, 처음에 에스겔 1장처럼, 그 인자 되시는 분이 우리에게 이 땅에서 천사의 기능을 해서,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을 이렇게 너희들을 인도했다는 것, 이것을 말해줘요.
에스겔 1장에서 짐승만 있던, 짐승 기능의 천사에 있던 그 기능이, 10장에서 이스라엘이 망함으로써 그룹 기능으로 잠시 들어갔다가, 인간을 못 오게 하는 그 기능이 왔다가, 못 오게 한다는 게 박혀 있음으로써, 비로소 천국에 못 갈 내가 천국에 왔다는 고백 할 수 있는 자기 사람을 그 빈자리에 끌어당길 수 있는 여지를, 천사를 통해서 기능하게 하시고, 그리고 요한계시록 4장에는 에스겔 1장에 근거해서 천사의 기능이 다시 원상, 다 같이 인간이 포함된 천국을 이루었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이렇게 복잡해요. 어쨌든 간에 제가 끝으로 말씀드린 것은, 이러나저러나 동행, 이 땅에는 동행, 그리고 천국에서는 영원히 함께 사는 것, 후딱 면류관 같은 거는 받으실 분에게 돌려드리고, 우리는 내 자랑하는 것을 아주 작살나게 만드시는 천사의 기능을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뭘 압니까? 그저 이 땅에 단독적으로 태어나 가지고, 자기 자신, 자기 자랑에 환장해서, 그것만 남 앞에 자랑하는, 그런 으스대는, 그런 존재밖에 안 되는, 전혀 어린아이 같지 않은 그런 모습. 그러나 주께서 그 모든 죄를 다 사해 줌으로써, 도로 어린아이가 되는, 주님께 의지하는, 주께서 길러주시고 이끄시는 어린아이로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