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세 명의 아기

아빠와 함께 2026. 7. 19. 22:09

세 명의 아기

2026년 7월 19일                      본문 말씀: 4:1-4

(4: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4:2)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4: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사도 요한의 육신은 아직도 이 지상에 살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현 세계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는 추가적인 지식을 주심이 아니라 사도 요한의 존재를 필연성에서 우연성으로 전환시키기 위함입니다. 이 작업을 성령님께서 하십니다. 지금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필연적인 것이 성령받게 되는 성도들에게는 우연성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성도 자체가 필연적으로 자아를 우기기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연성이란 필연적으로 내가 여기에 멀쩡하게 계속 살아 있어야 한다는 고집을 해체하신다는 말입니다. ‘나 여기 있다’는 사라지고, ‘주님의 몸의 일부’로서 여기 있다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동안 성령님의 활동을 몰랐던 시절에는 각 개인마다 독하게 자신의 오롯이 보존하고 독자적으로 수립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일반인들이 살아가는 세상 삶 속에서 수시로 개별적인 가치를 가질 수 없다고 충고해 주셨습니다. 사건,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고립적인 자아의 가치를 위해서 해결하려 해서는 안된다고 점을 일러주셨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상황 따라 남기신 말씀을 예수님의 승천 이후 아직 지상에 남아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유효하게 가르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육신이 여전히 예수님께서 수모당하신 그 세계를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일어났던 일이 반복적으로 그 후대 사람들에게 일어나게 됩니다.

자신의 존재를 필연적으로 생각하는 그들을 우연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주시고 계십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구절입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13-21)

이 본문에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에서 이 ‘자기’를 해체시켜 버리는 겁니다. 성령께서 주님의 말씀을 동원해서 잘게 쪼개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자아는 하나의 개체로 무게 있고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적으로 찾아드신 성령님의 활동으로 인해 그리고 몸의 일부로서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이 하신 말씀 내용이 적용되게 하십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은 지상 생활에서 자신의 무게를 빼야 합니다. 도리어 하늘의 계시만을 또렷하게 드러내기 위해 자아가 강조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사도 요한은 마음이 평온해야 합니다. 이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시므온을 통해서 잘 나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눅 2:25-32)

이로서 사도 요한은 하늘과 땅, 양쪽을 다 알릴 수 있는 기능자가 됩니다. 하늘의 사정이 땅에서는 닫혀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계시를 알려주게 되면 하늘로부터 요란한 나팔소리가 들립니다. 출애굽기 19:16에 보면, “제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산 꼭대기에 누가 나팔을 불지요? 천사들이 불지요. 그 나팔 소리와 더불어 하나님의 계명이 지상에 내려옵니다. 그러면 지상에서 언약 실시가 벌어지는 일이 일어나면서 ‘이는 하늘의 일이다’를 드러내기 위해 제사장이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 “제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수 6:5)

성령받은 성도들만이 이 나팔소리를 따라 하늘로 올라갑니다. “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 4:16) 오늘 본문에 보면 하늘 나라에서 24 장로들이 나옵니다. 이것은 천국이 철저하게 수치화 규격화 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천국의 좌석은 예약제라는 겁니다. 마태복음 13:25-30에 보면, 세상 밭에 알곡도 있고 가라지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 전체를 통해서 세 종류의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나 어른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종류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라지입니다.

그 다음 종류는 처음부터 끝까지 알곡입니다.
나머지 한 아이는 시므온이 보았던 아기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인간 세계에서는 온갖 변수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이 수치화되고 확정되었습니다.(계 21:10
- 23) 이것은 곧 두 개의 통조리 같은 겁니다. 변환이 가능한 변환들의 집체입니다. 그 안의 대상들에게 변화를 연속적으로 법칙을 적용해도 그 결과는 집합을 벗어나지 않는 겁니다.

천국이 그러하다면 지옥도 그러합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몸과 같이 성령을 받은 몸이기에 하늘과 땅, 양족을 다 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체적으로 무게를 지닌 것이 구름이지만 구름을 구성하는 알갱이는 모두 작어서 땅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실려 추학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언젠나 알갱이가 커면서 그때는 가차없이 추락합니다.

이처럼 성도는 말씀의 우발성으로 늘 쪼개져서 자기 존재를 주님 몸의 일부로서 조각나서 유지되어 하늘과 땅의 사정을 반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스스로 다루지 말고 주님의 우발성에 맡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6강-요한계시록 4장 1~4절(세 명의 아기)260719-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4장 1~4절입니다. 신약성경 380페이지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아멘.

사도 요한이 성령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음으로써 교회라는 것, 이 교회라는 것은 어떤 공간에 자리 잡고 거기에 영원히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고, 성령 안에서만 이리저리 움직일 수 있고, 거기서 교회가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성령과 더불어 주님의 지속적인 계시, 말씀이 계속 유입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통 구름에서 비 온다고 할 때 이런 이야기를 하죠. 습기가, 차가운 공기에 의해서 습기가 유입됐습니다. 유입이 되면 구름이 무겁겠죠. 구름이 무겁다는 이 말이죠. 구름이 무거우면, 평소에 구름은 하늘에 떠 있습니다. 이 구름이 하늘에 떠 있는 이유도 200년 전까지는 사람들이 그걸 설명할 수가 없었어요. 위에 있는 것은 다 아래로 떨어지기 마련인데. 구름의 무게도 만만치 않거든요.

굉장히 큰 무게를 갖고 있는데, 왜 무게가 있는 구름이 안 떨어지죠? 왜 안 떨어집니까? 국민학교 때, 선생님이 안 가르쳐 주던가요? 예, 말씀드리겠습니다. 구름이 하나로 보이지만 사라 사실은 하나가 아니고 무수히 많은 다수가 알맹이 형태로, 다수가 서로 연결돼 있어요. 연결돼 있는데, 물론 연결됐다고 해서 무게가 없는 건 아니니까, 무게 있으면 무조건 중력에 의해서 아래로 떨어지게 돼 있어요.

연결돼 있는데 이 연결된 알맹이들이 표면적이 넓어요. 표면적이 넓어서, 밑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이건 완전히 고무풍선 타듯이 이게 떨어지고 싶어도 열기가 확 올라오는데, 열기가 온몸을 둘러싸면 이게 또 위에서 뜨게 돼 있다고요. 내려가고 싶어도 못 내려가요. 그래서 여기에 습기가 들어오고, 무거운 습기가 들어와서 무거운 알맹이와 연결되면, 이제는 안에서 오는 공기의 열기에 뿜어냄을 이겨내면서 땅에 떨어지는 것이 비가 되는 겁니다. 비가 돼요.

이것은 우리에게 오늘날 뭘 이야기하느냐면, 성령께서는 우리의 입자를 아주 잘게 잘게 쪼개요. 쪼갭니다. 성령께서 뭐로 쪼개는가. 성령께서 주의 말씀으로 쪼개요. 요한복음 16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께서는 주님의 영이면서도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성령 받은 사람 잘 들으세요.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이 말씀을 전하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오직 자기에게 가르쳐주신, 자기에게 부여하신 예수님, 그것을 오전에는, 성령을 여자의 영이라고 했는데, 여성성, 그러니까 예수님이 홀로 이루신 것에 대해서 예수님이 하신 것만, 자신이 그냥 전달할 뿐이에요.

전달할 뿐이에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까? 쉽게 갑니다. 예수님께서 일반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합류했지요. 합류했으니까, 얼마나 많은 일들과 사건들이 일어났겠습니까? 그런 상황들을 만나잖아요. 그렇게 만나면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사건의 사건을 당하고 나면 또 말씀 전하고, 사건 당하면 또 말씀 전하고, 그걸 잔소리라고 합시다.

그런 잔소리를 계속 내뱉은 것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에요. 그 숱한 상황 속에서, 우리 주님께서 “이럴 때는 이렇게 해야 돼. 이럴 때는 이렇게 해야 돼. 이렇게 살아야 이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야. 아버지의 뜻이야”라고 계속해서 잔소리하듯이 계속 주셨다.

그러면 그 잔소리를 들었던 이 제자들이 그걸 어떻게 봤느냐 하면은 자신의 그 표면적이 알갱이로 깨지는 게 아니고, 자기를 하나의 단독자로, 하나의 개별로 간주해서, ‘아 나는 이렇게 하는군요. 나는 이렇게 하면 되는군요. 나는 이렇게 하는군요’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하나의 필연적 결합체, 단단하게 자기를 필연적 존재로, 반드시 살아야 하고 존재해야 할 필연적 존재로 구축하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그걸 인용한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자기 무게가 점점 더 자아가 굵어지고 무게가 나가는 거예요. 아까 구름 이야기하듯이, 무게가 나가면 반드시 뭐 한다? 추락한다. 떨어지게 돼 있어요. 자기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어요. 하늘에 붕 떠야 되는데 떨어지게 돼 있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제자들에게, 그리고 성령 받은 사람들에게,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한다고 했잖아. 왜 내 말대로 안 해.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하지”라고 이렇게 그냥 두리뭉실 말하지만, 구체적으로 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건 누구 이야기한 거 아니지만,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아버지 유산 문제로 나오니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뭐냐 하면, “너는 왜 유산 가지고 나한테 상담하러 오느냐. 생명은 재산의 넉넉함에 있는 게 아니야”(눅12:13~15)라고 하시면서 예를 든 것이, 어떤 농부가 갑자기 농사가 잘돼서 창고 짓다가, “오늘 밤에 네 영혼 데려가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는 그 말씀을 잔소리처럼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잔소리처럼 하는 그 잔소리가, 누가복음 12장의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올 때는 뭐냐 하면, 나, 단단하게, 딱딱하게, 하나의 단일체가 돼 있는 나를, 말씀이 나를 어떻게 하느냐. 쪼개는 거예요. ‘반드시 나는 멀쩡하게 살아나야 해’ 이거는 필연성입니다. ‘나는 반드시 죽으면 안 돼. 반드시 살아나야 해’ 이건 고집이죠. 아주 고집도 대단한 고집입니다.

이 고집을 말씀이 와서 쪼개면 뭐가 되는가. 하나의 표면적인 넓은 작은 알맹이가 돼요. 알맹이. 알맹이는 작은데 표면적은 넓어요. 그러니까 가볍지요. 가벼워요. 어느 정도 가벼우냐. 이 세상에 악마의 힘이, 권력이 다스리는 데 있어서, 예수님, 예수님이라는 존재의 입자는 그냥 하나의 떠다니죠.

주의 뜻은 뭐냐? 예수님의, 그리스도의 몸이 성령을 주셔서 몸이 되게 하고, 몸이 된 그들은 이 인간들의 고집 센 권력, 자기밖에 모르는 그 마귀 권력의 바다에서 가볍게 떠다니는, 예수님의 몸에 말씀의 파편들이 되게 하는 거예요. 파편들. 여러분이 바닷가에 가보면, 바다 위에서 헤엄치고 있으면, 옆에 뭐 지나가는 게 있죠. 스티로폼 쪼가리들이 있죠.

그 쪼가리들이 둥둥 떠다닌다고요. 가벼워서 떠다니죠. 쪼가리, 쪼가리를 모은다고, 내가 나라는 필연적 존재가 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말씀이 쪼개지면, 나라는 것은 쪼개지고 쪼개지면 뭐가 되느냐. 우연적 조각, 우연적 조각, 우연적 조각, 내가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연한 것이고, 여러분들이 교회 나온 것도 우연한 거예요. 왜냐? 이 관절이 아프면 교회 못 나갑니다.

진짜, 뭐 안 아프다는 게 아니고 겨우 참아서 나왔겠지만, 갑자기 집에 사고가 나면, 교회 못 나옵니다. 차가 퍼지면 교회 못 나와요. 우리가 정신 차리고, 정신 바짝 차려서 제대로 활동했기 때문에, 내가 신앙생활 잘한다는 생각은 안 돼요. 오늘 요한계시록 4장에서 사도 요한에게 성령을 줬다는 말은, 모든 교인들에게 성령을 줬다는 것과 같은 거예요.

성령을 주게 되면 사도 요한은 어디에 소속이 되느냐 하면, 하늘나라 소속이 됩니다. 아까 본문 봤죠. 하늘나라 소속이면서, 이 땅에 있는 사도 요한은 수시로 주시는 말씀의 쪼가리로써, 너는 그때그때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뜻이에요. 이미 소속은 뭐냐? 하늘나라예요. 하늘나라.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을 입어서 하늘나라를 봤는데, 뭘 봤느냐. 자기가 어느 나라에 소속돼 있는지를 봤어요.

하늘에 보좌를 펼쳤고, 거기에 천사들이 있고, 거기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있고, 거기에 사도 요한도 있고, 있는데, 이것이 이 땅에 아직 육신이 살아 있는 사도 요한에게는, 이 천국에 내가 있다는 이 하나님의 계시가, 지금 세상에 하나의 육신 덩어리로써 이 세상 바닥에, 파도에 뜨고 있는 그 파편, 파편 안에, 요한계시록 4장 1~4절이 거기에 담겨서, 육신의 파편으로 이 땅에 아직도 남아 있는 거예요. 집중돼 있죠.

여러분들이 하나의 깨진 거울 조각이라고 봅시다. 거울 조각으로 세상 살아가는 흐름에, 물결 타면서 흘러가는데, 그 거울 조각을 누가, 다른 사람이, ‘여기 무슨 거울 조각이 있지? 위험한데’라고 하면서 보니까, 거울 조각에서 비치는 것이 요한계시록 4장 1~4절, 하늘나라의 모습이 그 거울에, 거울의 반사에 비치는 거예요.

왜? 사도 요한은 성령 받았기 때문에. 설교 다시 합니다. 성령 받았다는 것은, ‘내가 이렇다’가 없고, 예수님께서 남기신, 파편처럼 남기신 말씀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 육신이라는 거울에 반사되도록 그렇게 하신다는 이 말이죠. 그러니까 사도 요한의 육신은 지금 하늘의 사정이 이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걸 보여주는 육신인 동시에, 우리는 속해 있는 것이 이 더러운 세상, 이 악마의 세상, 이 멸망할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에 양쪽을 다 보여주는 거예요.

양쪽을 다 보여주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은 하늘 입장에서 볼 때, 이 땅의 운명은 끝났다. 끝났는데, 이 땅에 사람들은 어떤 소리가 안 들려요? 하늘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소리가 안 들려요. 그 소리가 오늘 본문 4장 1절에 보니까 하늘의 문이 열리고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이 들렸다고 나옵니다. 나팔 소리. 그 관현악단의 담당자가 누구냐 하면 천사들이에요.

이거는 출애굽기 19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가니까, 시내산에는 아무도 없어요. 누가 산불 지키고 있고, 거기에 어떤 아저씨가 올라오는 게 아니에요. 그 시내산 위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어요. 사람은 없는데, 나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불지요? 천사가 불지요. 천사는 천사 안에, 중간에 누가 있지요? 우리 여호와 하나님 계시지요.

이거 진짜입니까? 이거 실제입니다. 이거 실제입니다. 이게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실제라는 말은 무슨 의미를 품고 있을까요? 우리의 시공간은 날아가야 될 시공간이고 우리의 시공간은 이미 확정 졌습니다. 확정 졌습니다. 모든 일이 끝! 마감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마감되었을 때, 그때의 편안함과 안심과 마음의 고요함과 평정함을 대표적으로 보여준 사람이 누가복음 2장 25~32절에 나옵니다.

이 사람도 뭘 받았는가? 성령 받았어요. 25절부터 보면,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령의 감동입니다,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마침’은 우연성입니다.

우연성이요. 필연성 아니고. 성도는 항상 모든 게 우연적이에요. 우연적. 수박 살 때도 맛있는 거 사는 것이 우연이에요. 이거 보고, 뭘 보고 사는 게 아니라, 전부 다 모든 게 우연입니다. 다슬기 사는 것도 우연이고, 잘못 사면 작은 것만 사고 껍데기만 살 수밖에 없지요. 전부 다 우연이에요. 왜 우연이냐. 우리를 하나의 입자로 보지 말고 파편으로 보세요. 파편.

살아가면서 파편으로 보세요. 파편으로. 조각조각 나야 돼요. 그래야 사는 게 가벼워요. 자꾸 자체적인 무게를 가지면 무거워서 못 살아요. 힘들어서 못 살아요. 자아는 솜사탕처럼 이렇게 뿔뿔이 사라져야 해요. 말씀으로 쪼개져서 흩어져도, 흩어져도 우리는 그 사건 사건에 떠다니는, 이 세상에 육신이 있는 한, 그냥 순간순간 뜨면서 그걸 하나로 조합해서 나라고 할 수는 없어요.

그냥 주님이 알아서 쓰실 거예요.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그때 나오는 말씀이 뭐냐 하면, 시므온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내 눈이 주님의 구원받았음을 반사시켰사오니, 이게 내 역할이니, 이게 성령 받았사오니, 이 소속이 확정되었사오니, 이미 내 나라가 어느 나라에 내가 이미 있는지를 내가 알게 되었사오니, 이제 종을 편안히 놔주시는군요.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이 빛을 이방인에게 되비치는 것뿐이라는 고백이에요.

성경에 보면 3명의 아기가 등장해요. 하나는 알곡, 하나는 가라지, 또 하나는 예수님, 이렇게 3명의 아기가 나옵니다. ‘내가 보니 가라지가 될 상(相)이네’라는 뭐 이런 거죠. 그 가라지에 대해서 마태복음 13장 29절에 나옵니다. 뭔가 뿌렸어요. 하나의 가라지가 될 아기를 뿌렸고, 하나는 알곡이 될 아기를 뿌렸어요. 뿌리니까 종들이, 천사지요, 천사들이 알곡만 보여야 하는데, 웬 가라지가 있어요.

그래서 주인님한테, “시커먼 가라지가 나타나네요. 그냥 뽑을까요?”라고 이렇게 하니까, 주인이 있더라, “가만두어라. 가만두어라. 추수 때까지 가만두어라” 그러면 추수 때 뭘 하느냐. 가라지는 가라지대로 따로 뽑고, 알곡은 알곡대로 뽑는데, 그 뽑는 일꾼이 누구냐 하면, 마태복음 13장 38~39절에 나옵니다.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40절에도 보면,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이것도 현재 우리를 통해서 이 말씀도 반사, 반사. 이걸 반사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우연적 마주침으로, 성령을 통해서, 바람 같은 성령을 통해서, 이 말씀이 우리 내부까지 침투가 가능해요.

성경은 여러분 늘 보시잖아요. 늘! 쉬지도 않고 보잖아요. 그러나 성경 말씀이 여러분 안에 침투되던가요? ‘이걸 알아야지!’ 알면 안 돼요. 말씀이 육신이 돼야죠. 육신이 말씀을 갖고 있으면 안 되지요. 말씀이 먼저고 우리는 그 뒤에 라니깐요.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나팔 소리가 나왔잖아요. 나팔 소리가 나왔고, 나팔은 나팔 부는 건 천사가 불어요.

그런데 천사가 사는 곳은 하늘나라고, 하늘나라에 나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이건 인간에게는 들릴 수가 없어요. 안 들립니다. 안 들리는데, 성령 받은 자에게는 이 나팔 소리와 더불어 하나님의 계시가 자기 안에 박히게 되고, 박힌 말씀은 반사가 돼요. 되비치게 돼 있어요. 그것을 바로 출애굽기 19장에 시내산에서 나팔 소리와 함께 시작해서, 개시돼서 주르르 내려왔던 그 말씀이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 안까지 들어오라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돌판까지 준비해서 친절하게 이 말씀대로 살라고 주신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주셨는데, 그 나팔 소리는 어떻게 되는가. 따라와요. 따라와서 말씀이 사건을 일으켜서, 그게 현실화할 때마다 나팔을 불어라는 겁니다. 나팔을 불어라. 민수기 6장 13절에서 여리고성 들어갈 때, 제사장들에게 나팔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나팔을 불게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 일은 인간 대 인간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드러낸다고 ‘빰빠라밤~~’ 나팔을 부는 겁니다.

성령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어떻게 되는가. 조율되죠. 때로는 쥐었다가, 놨다가, 쥐었다가, 놨다가, 쥐었다가, 놨다가. 루바토(Rubato). 피아노 칠 때, 원곡 말고 원곡을 이렇게 반주하는 사람이 들었다가 놨다, 들었다가 놨다가, 칸타빌레(Cantabile-노래하듯이), 이렇게 쭉~쭉~쭉~쭉 자연스럽게 작품이 되게 만들죠.

우리는 기계가 아니고 주께서 움직이는 작품처럼, 때로는 말씀이 깊이 있게 깨닫게 됐다가, 때로는 말씀이 ‘그렇구나. 그렇구나. 근데 3, 4회전 누가 이겼는데? 월드컵 3, 4회전 누가 이겼는데? 잉글랜드가 이겼어?’라는 이런 거. 갑자기 말씀을 모르는 게 아닌데, 주님이 연주해야 하는데, 자꾸 내가 입자가 돼서, 내가 개체가 돼서, 내가 단단해져서, 이제는 내가 내 인생 꾸려가기 위해서 악을 쓰면서 걱정과 고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거 무게 또 나왔어. 이게 해체가 돼야 되는데 가볍지를 못했어요. ‘하나님, 저 앞으로 못 살아요’라고 이렇게 하거든요. 못 산다고요? 말씀이 우선이에요. 내가 살기 위해서 말씀 주신 게 아니고, 말씀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해체되라고 우리에게 나팔 소리와 겸해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 나팔 소리가 오게 되면 오늘 본문에 24 장로가 나오죠.

이게 뭐냐. 규격화 또는 수치화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숫자 25가 아닙니다. 23도 아닙니다. 24입니다. 이게 12 패턴으로 일어나요. 12 패턴. 12 패턴 뒤에 또한 패턴, 완벽한 패턴이 그 12, 야곱의 자식이 12명이잖아요. 언약이 이 땅에 수치화하고 규격화하게 되면, 그걸 제가 말로 하는 것보다도 성경을 보는 게 낫겠어요.

요한계시록 21장 10절부터 보면,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또 성령이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그다음 11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고, 보석이 있다고 나오는데, 12절에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수치화시켰다는 것은 딱 맞게 좌석이 있다는 말이죠.

예약된 좌석이 있다는 이 말이죠. 규격화된 거예요. 이게 천사가 규격화되게 되면 지옥도 같이 규격화돼요. 그래서 저는 이걸 뭐냐. 두 개의 통조림이라고 해요. 두 개의 통조림. 한 번 들어간 통조림은 바깥에 못 나와요. 지금 사도 요한이 성령 받았기 때문에, 열린 문, 열린 문으로 들어가서, 그 세상에 곽 지어진, 구조화된 거기에, 완전히 오롯이 그 사람 속에 소속이 된 겁니다.

그 통조림 안에서 흔들면 흔들리죠. 변환이 가능한 변환들의 집합 대상에, 변환이 연속적으로 적용돼도 그 결과는 그 집합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집합론, 수학의 추상 대수학에서 집합론을 할 때, 이렇게 이야기해요. 하나의 통조림 안에서 흔들리죠. 뭐 용각산 흔들리면 소리 나죠. 흔들리지만, 비록 흔들리더라도 그 통조림 바깥으로 못 벗어나요.

성도라는 것이, 말씀이 흔들리면 흔들릴 수밖에 없어요. 우당탕탕! 하지만 이게 수치화되고 규격화된 24 장로가 있는 그 나라에, 사도 요한이 성령 받고, “너도 그 소속이야”라는 것을 나팔 소리와 더불어서 알게 된 겁니다. 이게 나팔이 이 땅에서 못 듣는 나팔이잖아요. 끝으로 데살로니가전서 4장 읽고 마치겠습니다. 4장 16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누가 딸려 올라갑니까?

나팔 소리 따라서 딸려 오죠. 그러면 지금 우리부터 나팔 소리와 더불어 성령을 주신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되질 않습니까? 이 땅에. 그래야 사도 요한처럼 소속이 하늘나라 통조림 안에 소속되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지옥의 통조림이죠. 그것도 규격화, 수치화 되니까 지옥의 통조림이죠. 지옥의 통조림 거기에 안 섞여서, 그게 그렇게 한 맺히고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마세요. 이 세상은 단 두 개의 통조림밖에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아버지, 사도 요한 참 좋겠습니다. 하늘의 계시를 들었으니, 얼마나 좋겠고 얼마나 마음이 편안하겠습니까? 이제 종을 편안히 놓아주시는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인 것처럼, 저희도 나팔 소리와 더불어서, 이미 모든 일은 확정되고 끝난 상황이라는 것을 천국이라는 통조림 안에서, 주의 계시 안에서, 우리의 마음도 편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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