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죽은 자
2026년 7월 12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3:14-22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3: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하늘의 보좌’ 앉는다는 것은 주님과 않은 곳에 같이 앉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 세상을 다녀가신 코스에 충실해야 합니다. 주님 코스 따로 인생 코스 따로가 된 상태에서는 ‘함께 하늘에 앉음’이 성립되지 못합니다. 참으로 하나님과 같이 앉은 자라면 주님의 안목을 공유하는 자에 해당될 뿐입니다.
하늘에 주님과 더불어 같이 못한다면 당연히 지옥에서 악마와 더불어 함께 영원히 지옥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는 곧 인간이 독자적으로 영원히 자기 존재를 지속시킬 그 어떤 권한이 없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교회가 구원받는다’고 한다면 ‘나 교회가 말하는 구원말고 딴 구원의 자리를 마련할래’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7 초대 사이를 주님이 거니는 것으로 이미 규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계 1:13,20) 즉 ‘내가 만드는 교회’는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교회되게 하여 주시지 않으시면 아예 ‘교회는 없다’됩니다. 따라서 교회에 대한 미련이나 아쉬움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주님 우편에 앉은 조건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기는 자’입니다. 못이기면 어떻게 될까요? 볼 것도 없이 지옥에 가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천국 기관으로서의 교회의 조건에 인간적인 의도가 스며들 수 없게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적인 의도’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충고와 자문에 충실해서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의도를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의 교회란 ‘현상’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본질을 드러내는 의도가 아닙니다. 이사야 45:15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한결같이 ‘숨어계시는 하나님’입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 45:15) 왜 하나님께서 숨어계시는 분이어야 할까요?
그것은 이 세상 자체가 근본적으로 인간들이 스스로 타락했다고 인정하지 않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아는데 인간들은 자신이 어떤 지경인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의 역할은 세상으로 하여금 인간 자체가 얼마나 하늘의 기준에 미흡하고 반대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일입니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자세는 이사야 53:7-8에 나옵니다. “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인간 치고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역할을 눈치챈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입을 열지 아니하시고’, 다른 인간들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져야 마땅한 사람’으로 인식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은 시편 118:22 예언의 성취입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사람들이 오직 했으면 예수님을 버렸겠습니까? 그만큼 인간들은 알아서 자신들을 망칠 생각을 못합니다. 가룟 유다 같은 경우, 그는 스승이 버린 죄책감이 얼마나 극심했겠습니까? 결국 그는 자기를 버리는 대신 자기가 자기에게 처벌을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 몰라라’하지 않았음을 자신의 본질을 거두어들일 수 있다고 여긴 겁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밝혀주시는 인간의 본 모습은 요한계시록 16:9-11에 잘 나와 있습니다.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 또 다섯째가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더라”
인간들은 독하게 버티듯이 살아 남을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나와 있는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은 인간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강도를 높이는 절차입니다. 하지만 인간들 입에서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은 기대하지 마세요. 그들은 ‘아주 망하짐’은 그들의 사고방식에서는 아예 없습니다.
이것은 일곱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도 평소에 다음과 같이 삽니다.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5-17) 이들이 이런 식으로 현실에 대처하는 이유는 안 죽고 싶어서 그러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복음도 하나의 생존 요령술에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어떤 자국을 남겼는지 관심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들로부터 일체 ‘소용없는 존재’로 취급받았습니다. “Just when I needed you most”, 즉 (당신은) 내가 꼭 필요할 때 (떠났다)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신 줄 아시겠지요.
사람들이 스스로 안 망가지기 위해서 예수님의 복음을 이용하는 것을 주님께서 거부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시험을 이겨 ‘하늘에 예수님과 함께 할 위인’은 없습니다. 즉 인간은 예수님과 물 열고 대화할 대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입을 다무시지만 인간들은 안 망가지려고 온갖 말을 다 내뱉게 됩니다.
반면에 사도 바울의 편지인 에베소서 2:5-71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즉 이미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아계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자, 요한계시록 말씀을 채택하시렵니까 아니면 에베소 말씀을 채택하시렵니까? 예수님과 인간이 대화가 안 되는 이유는 시간 인식의 차이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아직도 자신의 미래가 남아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에 있어 성도는 남아 있는 시간은 없습니다. ‘더 산다’가 아니라 ‘더 살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에 있어 성도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
요한계시록 교회는 현상을 보여주는 기능을 통해서 살아서 구원될 자가 없음을 보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죽은 자로서, 세상에서 살려는 모든 짓이 얼마나 저주스럽고 악마적인지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5강-요한계시록 3장 14~22절(이미 죽은 자)260712-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3장 14~22절입니다. 신약성경 379페이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아멘.
교회라는 것은 있다가도 없는 거예요. 한시적인 걸로 나타나는 것, 그걸 현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전부 다 현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확고한 그 현상 안에 보이지 않는 식으로 잠복 돼 있는 원리가 있는데, 그 원리는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5~7절에 보면, “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서 2장 6절에서, 이미 하늘에 앉았다고 돼 있어요. 근데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3장 21에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이렇게 돼 있어요. 못 이기면, 말씀을 못 이기면, 세상 쪽으로 가서 못 이기면 어떻게 할 것인가. 탈락이죠. 그렇다면 에베소서의 이 말을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요한계시록 3장에 이 말씀을 외울 것인가.
한쪽은 탈락할 수도 있다고, 요한계시록은 탈락할 수도 있다고 하고, 에베소서는 “아니, 아니, 이미 합격했어. 이미 하늘에 앉아 있어” 이것은 우리가 어느 쪽을 선호할 것인가에 대한 그 문제가 아니라, 요한계시록에서는 분류 작업을 하는 그 현상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현상입니다. 본질은 현상을 드러내면서, 본질은 계속 세상 적으로는 들키지 않는 쪽으로 자리 잡고 있어요. 본질은.
그러나 이 에베소서 2장에서는 이미 본질을 다 까발립니다. 다 드러냈어요. “너, 하늘에 앉았어. 하늘에 앉았어” 그럼 에베소에서 왜 사도바울은 그렇게 하느냐? 에베소서는 성령을 받은 자에게는, “이미 모든 것을 아느니라”라고 이렇게 돼 있고, 여기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일곱 교회라 하는 것은 세상의 현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일곱 교회는 언제든지 촛대를 옮길 수 있다는 조건을 달아놨어요.
“네가 이 말대로 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겨버린다” 촛대는 일곱 개예요. 일곱 개에서 어디를 가도 일곱 개는 짝을 맞춰서 일곱 개를 옮깁니다. 근데 일곱 개가 한 번 지나간 쪽에는, ‘아, 가짜였다. 가짜였다. 가짜였다’가 계속해서 나타나는 현상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오늘날 하나님께서, 에베소에 있는 사도바울이 말한 그 성령 받은 교회가 된 사람은, 어떤 기능과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3장에 나온 일곱 교회의 역할을 해줘야 해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세상에 나와서, 현상적으로 이런 것들이 바로 교회가 아니라는 그걸 들춰내는 기능에,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 활용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들어보니까, 여러분이 고민할 문제가 아니죠. 일단 사도바울에게 가서, 그다음 실컷 요한계시록 삶을 살자고, 이러면 되는 거예요. 그럼, 사도바울은 이렇게 원리적으로 이미 합격했다고 이야기하는 그 이유가 뭐냐.
그것은 사도바울이 에베소서 2장에서 이야기했듯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십자가로 이미 모든,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성령이 나오는데, 그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디를 자꾸 보느냐 하면,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 쪽으로 끌려가게 돼 있어요.
이거는 에베소서를 알고 요한계시록까지 함께 알았던 사람이 세상에서 산다면, 그건 두 개를 합쳐보면 나오는 결론은 굉장히 간단합니다. 아, 이래서 십자가구나. 이래서 ‘십자가, 십자가’ 하는구나’ 지금 약 선전 하는 거 아닙니다. 이래서 ‘십자가, 십자가’, 이래서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라고 하는구나. 이걸 다시 요한계시록 입장에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기에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보면,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라고 되어 있잖아요. 이 문장을 딱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뭐냐 하면, 과연 인간이 주님과 의논 상대가 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문을 열었다고 칩시다. 문을 열어서, 앞에 주님이 계십니다.
그럴 때 인간이, ‘어, 주님이네요’라고 이럴 인간이 과연 있겠어요? 없습니다. ‘누구세요? 누구세요? 여기는 내 영토인데, 당신은 왜 내 영토에 허락도 없이, 초청도 없이, 영토에 들어오려고 합니까? 내가 모르는 사람은 우리 집에 발 들이지 않습니다. 나가세요’라고 밀어낼 거예요. 이게 바로 현상적인 교회예요. 그 교회를 이렇게 예수님하고 인간하고 대화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 그 근거가 뭐냐.
그것은 16절부터 나옵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그러니까 ‘나는 나한테 충실하다’라는 이런 쪽으로 살아가는 것이 본인의 영토예요. 본인의 위치입니다.
자기가 머뭇머뭇하고, 차든지 덥든지 하지도 않고, 미지근한 이런 상태, 이런 상태가 뭐냐 하면은 바로 추락하지 않는 인생이라고 보면 돼요. 추락이라는 건 떨어진다는 뜻이죠. 여러분, 사과가 왜 떨어지느냐? 뉴턴(Isaac Newton, 1643 ~ 1727, 영국의 과학자) 이라는 과학자가 사과가 떨어지는 이유에 대해서, 남들은 그냥 넘어갈 건데, 아주 깊이 있게 생각했습니다.
뉴턴이라는 과학자가 말하기를, 사과가 떨어지는 이유는 지구하고 사과하고 사이에 보이지 않는 힘이 있는데, 지구가 더 세기 때문에, 사과가 가지에서 버티다가, 버티다가 나중에 늙으면, 늙은 사과는 뚝 떨어져서 지구 쪽으로 떨어진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럴 때 많은 사람들이, 또는 그 후대 과학자들이 그 둘 사이에 떨어지는 그 인력을 한번 보여봐라, 눈으로 보이도록 내보라고 하는데, 없어요.
그냥 힘이 당겨서 더 센 쪽으로 떨어진다고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렇게만 알아도, 현재 로켓을 지금 목성까지, 달 세계까지 왔다 갔다하고, 난리도 아니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은 둘 사이에 중력 때문에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거는 성경적이 아닙니다. 이거는 복음적이 아니에요.
그리고 뒤에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 미국의 물리학자) 이라는 사람이 등장했어요. 사과가 지구로 떨어지는 게 아니고, 사과라는 그 물체와 지구 사이에 물질이 질량을 갖고 있으면, 시간과 공간이 휘어져서, 만약 공을 던지면 그 곡률을 따라서 그 중앙에 이를 때까지, 이렇게 공이 돌아 돌아서 뺑뺑 돌다가 가운데로 툭 떨어지는 것처럼, 시공간에서 지구가 돌고 사과가 떨어지는 것은, 시공간의 흐름에 따라서 사과가 이런 식으로 지구에 달라붙는다고 그렇게 설명했습니다.
별빛이 그 태양의 질량 때문에 휘어져 들어온다는 것을 적도에 가서 증명하고 난 뒤에,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원리라는 거, 그게 시공간이 휘어져서 그렇게 되는 거라고 증명한 거죠. 그것도 맞다고 교과서에 나와요. 그런데 그것도 아니에요. 뉴턴도 아니고, 아인슈타인의 시공간도 아니에요. 그럼 뭐냐? 정답은 이렇습니다.
사과가 하나 있으면, 사과 맨 위쪽(꼭다리)이 있죠. 그리고 사과 맨 밑바닥 있죠. 그 위치의 차이만큼 시간이 가는 게 달라요. 시간이 다르게 가요. 위에 사과 꼭대기는 지구와 좀 더 멀어졌기 때문에 시간이 빨리 흐르고, 맨 아래쪽에는 시간이 느려져요. 시간의 입장에서, 사과에 자아가 있다고 생각합시다. 사과의 자아가 빨리 죽는 걸 원할까요, 오래 사는 걸 원할까요?
오래 사는 걸 원하죠. 그래서 오래 살려면 어디에 붙어야 하느냐 하면, 지구와 가까운 쪽에 있으면 지구 쪽에는 질량이 커서, 시간이 느리게 가거든요. 시간의 차이. GPS가 시간 교정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에 그래요. 시간이 차이가 난다고요. 시간의 차이가 그만큼 오래 살 수 있어요. 그래서 사과는 오래 살고 싶어서 지구한테 붙어 있다. 이게 현재 정설(定說)로 돼 있습니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과학적으로 아무리 설명하고 해도, 복음적으로 인간 자체에 대해서는 이게 맞아요. 왜 미지근하고, 왜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으냐?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더 살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예수를 믿고,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이 위협이 된다는 것을 법으로 정해놨잖아요. 7월 7일부터 5.18이 북한군 개입되었다고 하면 막대한 벌금 내는 거 아시죠?
우리 사람하고 예수님하고 대화가 안 됩니다. 대화가 될 수가 없어요. 기도하는 것도 헛소리이고, 자기가 자기 보고 하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이사야 45장 15절에 보면 하나님은 숨어 있어요.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인간이 대화에서 불러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숨어 있어요. 숨어 있는데, 그 숨어 있는 분이 어디로 숨어들었는가가 이사야 53장 7절에 나옵니다.
이것은 제가 이번에 안양 강의할 때, 이 본문을 언급했어요. 그 대목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래서 안양 강의 제목이 ‘입 다문 메시아’예요. 입을 열지 않았어요. 왜? 추락하기 때문에.
이 인간 세계에서 추락하기 때문에 사람과 말이 섞일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하고 이야기할, 말 섞을 대상이 아무도 없어요. 말하지 않고 이 땅에서 뭘 만드느냐 하면, 구원을 위한 숨은 자리를 확보합니다.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어린 양의 죽음의 자리를 따로 만들어요. 따로 만들고, 그 누구도 자진해서 죽음의 자리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주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십니다.
참 신기하죠. 이 신기한 일이 시편 118편 22절에 이미 예언되어 있습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라는 이 대목. 건축자들 ‘에이, 이 돌 아무짝도 쓸모없다. 소용없다’라고 갖다 버립니다. 다 소용없어요. 갖다 버려요. 누가요? 건축자. 건축자가 누굽니까? 인간이잖아요. 인간은 왜 건축합니까? 살려고. 살려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아무 짝도 소용없습니다.
여기서 영어 방언을 하나 하는데, 그 발음에 대해서는 용서를 표합니다. ‘Just When I Needed You Most’ 이걸 번역하면, ‘내가 가장 네가 필요할 때, 너는 없었다’라는 거예요. 팝송 노래 제목이에요. 내가 가장 필요했을 때, 네가 없었다는 겁니다. 네가 날 떠났다는 겁니다. 그 떠난 분이 주님이에요. 내가 가장 필요할 때, 주께서 응답하지 않습니다. 우리와 말을 섞지 않아요.
숨어서 구원해야 되기 때문에, 우리가 요청해서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 쪽으로 갈 수 없기 때문에. 왜? 우리는 타락했다고 하면서 제대로 타락을 안 해요. 타락하면 되잖아요. 자기 위신 때문에 타락을 안 해요.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선악을 알기 때문에, 인생을 멋있게 마감하고 싶어요. 심지어 자살한 가룟 유다의 자살할 때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애절하고, 얼마나 자기를 한탄하겠어요. 그러나 그 죽는 순간에 자기의 결정은 뭐냐. ‘내가 스승을 팔다니, 이런 못된 인간. 내가 나를 용납하면 안 돼’라고 자기가 자기를 죽였잖아요. 그냥 망가지면 되는데, 자살할지언정 내가 나를 망가지게 하는 것은 내 사전에 없다. 이게 너나 나나 전부 똑같습니다. 사람에게 버림받는 것은 도저히 용서 되질 않죠. 용서가 안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렇게 숨어 있을 때, 다시 이야기합니다. 요한계시록의 교회는 에베소서 교회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교회는 현상을 가지고, 교회라는 이름의 현상을 가지고, 이 세상 사람들이 왜 지옥 가고, 왜 천국에 못 오는가를, 교회를 통해서 드러내기 위해서, 그리고 교회도 또 영향을 받고요, 드러내기 위해서 활용되는, 쓰이기 위한 요한계시록 교회입니다.
그 일곱 교회 현재 아무도 없어요. 지금 터키에 가도, 그리스에 가도 일곱 교회 없습니다. 그러면 이 교회에서, “이렇게 하면 내가 하늘나라 보좌, 내 옆에 앉게 해줄게. 단, 조건은 이기는 자에게” 이것이 이기는 자에게만 이런 게 있고,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자만이 생명의 면류관을 준다는 이런 조건들이, 우리들로 하여금 이 요한계시록 2장, 3장을 보고, 이걸 믿고, 지켜서 구원받겠다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게 만드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계시록 2장, 3장을 보면서 많은 교회가 우리도 이런 교회처럼 돼야 한다고 왜 외칩니까? 많이 외치거든요. 그러나 그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16장 9절과 11절을 몰라서 그래요. 요한계시록 16장 9절과 11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16장 9절에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
10~11절에 “또 다섯째가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첫째 대접, 둘째 대접, 셋째 대접, 그리고 첫째 인, 둘째 인, 셋째 인, 첫째 나팔, 둘째 나팔,.... 계속해서 갈수록 현상적으로 하나님께서 일곱 교회의 촛대 주위를 거닐면서, 교회 바깥에 있는 쪽으로는 하나님께서 심한 심판과 저주와 압박을 가합니다.
압박을 가해야 그들의 본색이 드러나요. 인간의 본색이 드러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어려움을 주면 줄수록, 그들은 회개치 아니합니다.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회개합니까? 교회도 회개하지 않아요. 저쪽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회개 안 하면 뭐 하느냐. 이를 깨물고, 입에다가 막 솜 집어넣어서 이를 깨물고, 악착같이 이 세상의 어려운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상황 속에서도 이를 악물고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내가 잃어버리는가 봐라. 내가 반드시 살아남을 거야’
이것이 바로 일곱 교회를 통해서 비춰 본 이 세상의 실제 모습이고, 이게 세상의 현실입니다.
이를 악물고 회개치 않습니다. 이를 악물고. 그래서 일곱 교회는 나가리(무효) 됐지요. 일곱 교회가 다 날아갔죠. 왜? 조건을 달았으니까. “이기는 자에게”라고. “세상은 이런 줄 알지. 세상은 이렇게 벌을 받아도, 벌을 받고 회개 안 하지? 그런데 너희는 이럴 때 더욱더 회개하면 내가 살려줄게”라는 조건을 일곱 교회에 달아도, 일곱 교회도 마찬가지로 그들과 똑같이 된 거죠.
그래서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은 버티는 자가 언제까지 버티는가를 내가 손 좀 보겠다는 거예요. 결국 버텨서 구원받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게 요한계시록의 전체 내용이에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보실 때, 신나게 봐야 해요. 아주 감사, 감사, 감사로 봐야 해요. 이제 끝으로 그런 인간이 있으니까? 어려울 때는 욕하고, 난 이제 교회 안 나온다는 이게 정상이지, 그게 감사가 됩니까?
그럼, 요한계시록에서 제대로 감사하는 건 누군데요? 요한계시록에서 제대로 감사하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에요. 목 베인 영혼들이에요. 살아도 죽은 사람이에요. 살아도 죽은 사람. 말씀에 입각해서 죽었는데 누구와 함께 죽었는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 죽은 자만이 느긋한 마음으로 요한계시록을 바라봅니다. 끝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이 이야기, 이 이야기가 에베소서 말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겠습니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이런 관점에서 다시 한번 보시면 이해될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본질로 돌아왔잖아요. 요한계시록의 현상에서 다시 본질로 돌아왔는데, 본질은 성령의 몫이에요. 숨어 있는 주님이 숨어 있는 영을 우리에게 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의 지하에 사는 사람인 것처럼, 위에서 세상을 다시 볼 수 있는 눈을 밝혀라.
이게 성령의 역사거든요. 나는 죽었는데, 세상은 아직 죽어 있는 것도 모르고 살려고 애쓰니까, 그 현상이 참 우습구나. 아주 신난다. 이렇게 바라볼 수 있는 자유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 지켜서, 성경 말씀 지켜서, 주님하고 대화해서, 잘 알아먹어서 구원받고자 하는 이것이, 이미 그게 실패인 것을, 세상은 압력으로 그렇게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을 도리어 신나고,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