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속건제

아빠와 함께 2026. 8. 20. 08:25

2026년 8월 19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12:1-3

(12:1) 예후의 칠년에 요아스가 위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사십 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시비아라 브엘세바 사람이더라

(12:2) 요아스가 제사장 여호야다의 교훈을 받을 동안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되

(12:3) 오직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더라

이스라엘에서의 왕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이방나라에서의 왕의 역할은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모습일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서의 왕은 하나님과 백성을 연결하는 일입니다. 이 연결에 필히 제사장들의 기능이 본질로 들어섭니다. 왕의 기능과 제사장의 기능이 이스라엘에서 어떻게 정리될 수 있을까요?

요아스 왕은 불과 일곱 살 때에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배후에 고모부인 여호야다가 있습니다. 여호야다 제사장이 알고 있는 왕과 제사장의 관계가 어린 요아스 왕의 행적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에 성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선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했습니다.

그 이유는 역대하 24:7에 나와 있습니다. “이는 그 악한 여인 아달랴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전을 깨뜨리고 또 여호와의 전의 모든 성물을 바알들에게 드렸음이었더라” 요아스의 할머니 아달랴와 그리고 요아스의 삼촌들이 성전의 성물을 바알신에다 바치고 말랐습니다. 따라서 성전에서 제사가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호야다의 교훈에 따라 움직이는 요아스 왕의 할 일은 제대로 성전을 운영하는데 집중됩니다. 이게 왕이 해야 될 일입니다. 이방민족은 인간 왕과 인간 백성들 간의 통치 관계가 전부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제사기능적 공간 안에서 하나님과 백성들을 연결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어떻게 만나지요? 그냥 백성이 하나님을 상상하면서 “저는 하나님 섬깁니다”라고 한다면 만남이 성사될까요? 쉽게 말해서 “나 멀쩡하고 하나님께서는 멀쩡하니까 따라서 이 관계도 멀쩡할 것이다”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성전이 아닌 곳에서 정성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면 그것으로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가 성립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백성들에게 먼저 제시하므로서 인간이 상식적으로 하나님에게 다가가는 그 모든 것을 거부하심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안일하고 편하게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내어보이는 것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제시하므로서 성전 중심의 제사를 통해서 자기 백성을 만나십니다.

그렇다면 성전 보존과 운영을 위해 회비(성전세)를 꼬박꼬박내고 가끔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찾아가서 제사에 참여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면 이게 정상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일까요? 요아스 왕은 집중적으로 성전 수리에 힘을 모읍니다. 그리고 이 성전 수리에 지도자층에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자원해서 참여시킵니다.

그 방법은 헌금모금함을 설치하는 겁니다. 그전에 제사장들인 성전수리비를 착복을 했지만 23년동안 그들은 성전 유지에 아무 것도 안했습니다. 그러다가 요아스 왕은 제사장에게 선언을 합니다. “너희들은 이제 성전 재건에 대해 개입하지 말라. 이 일에 백성들이 참여하게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백성들이 무척 좋아했습니다. “모든 방백과 백성들이 기뻐하며 마치기까지 돈을 가져다가 궤에 던진지라”(대하 24:10) 그렇게 해서 모금이 된 돈을 온전히 성전 수리와 보선에 쓰고 남은 돈은 성전 물건을 만드는데 쓰여졌습니다. “필역한 후에 그 남은 돈을 왕과 여호야다의 앞으로 가져온고로 그것으로 여호와의 전에 쓸 그릇을 만들었으니 곧 섬겨 제사 드리는 그릇이며 또 숟가락과 금, 은 그릇들이라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여호와의 전에 항상 번제를 드렸더라”(대하 24:14)

그런데 요아스는 백성들에게 제사장에게 돌아갈 몫도 잊지 않도록 합니다. “속건제의 은과 속죄제의 은은 여호와의 전에 드리지 아니하고 제사장에게 돌렸더라”(왕하 12:16)  백성들이 제사장의 존재와 생업에 신경 써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에게 있어 하나님과 만남이 어떤 환경을 동반해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것과 관련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이스라엘 전체는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품군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꾼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꾼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25:55) 그렇다면 모든 땅의 생산물은 주인이신 하나님께 다 드려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다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10의 9를 돌려받게 됩니다. 이게 바로 십일조입니다. 이 십일조는 하나님에 대해 소유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드릴 것을 드리고 하나님의 것을 90%나 돌려받아서 열심히 살면 제대로 하나님과 관계서 성립되는 겁니까? 아닙니다. 여기서 속건제 제도가 갖고 있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관계를 본질적으로 연결해 봐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피해입고 상처받은 타인으로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식으로 맺어지는 것이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입니다. 속건제에 담긴 의미는 레위기 6:4-7에 나옵니다. “ 이는 죄를 범하였고 죄가 있는 자니 그 빼앗은 것이나 늑봉한 것이나 맡은 것이나 얻은 유실물이나
무릇 그 거짓 맹세한 물건을 돌려 보내되 곧 그 본물에 오분 일을 더하여 돌려 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그는 또 그 속건제를 여호와께 가져 올지니 곧 너의 지정한 가치대로 떼 중 흠 없는 수양을 속건제물을 위하여 제사장에게로 끌어 올 것이요 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는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얻으리라” 즉 피해 입은 자에게 원상 복귀하는 것으로 관계가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 20%를 더 보태서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레위기 27:14-15에 보면, “사람이 자기 집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면 제사장이 그 우열간에  정가할지니 그 값이 제사장의 정한 대로 될 것이며 그 사람이 자기 집을 무르려면 정가한 돈에 그 오분 일을 더할지니 그리하면 자기 소유가 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하나님께 드린 것이 도로 자기 것으로 돌아가는데 있어 20%가 추가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것’에 참여 할 때에 우리 인간이 하나님에게 피해를 입힌 처지에서 돌려받는 점을 추가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와 같은 취지가 메시야로 오신 분에게 집약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 예수님께서는 속죄제물보다 더 깊이를 더하시는 표현으로 속건제물로서 나타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약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제 우리는 로마서 6:15의 말씀이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구약 때 율법 조항을 지키는 것을 죄 사함을 깔끔하게 끝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라는 속건제물의 위력으로 하나님과 천국백성의 관계가 형성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 소유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주님의 희생이 담겨 있음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9강-열왕기하 12장 1-3절(속건제) 260819-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12장 1절에서 3절까지입니다.

열왕기하 12:1-3

“예후의 칠년에 요아스가 위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사십 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시비아라 브엘세바 사람이더라 요아스가 제사장 여호야다의 교훈을 받을 동안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되 오직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더라.”

어떤 기준이라는 게 있어요. ‘이렇게 되어야 하나님 보시기에 옳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면서 그 기준을 일단은 어른들이, 부모들이 가르쳐줘요.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 된다.’ 그런데 점점 더 커가면서 그 기준을 누가 만드는가 하면, 본인이 기준을 정하고 남은 인생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두 사람 나와요. 한 사람은 여호야다가 나오고, 또 한 사람은 요아스 왕이 나옵니다. 요아스 왕은 일곱 살 때 왕이 된 사람이에요. 초등학교 1학년짜리가 왕이 된 겁니다. 뭘 알아요? 아무것도 몰라요. 시진핑? …핑, …핑만 알지 그냥 어린애인데 뭘 알겠어요? 그런데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 요아스 왕과 함께 했던 여호야다라는 분이 있는데 이 사람은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연락책을 했던, 하나님의 율법을 기준으로 삼아서 ‘이런 기준에 따라야 여러분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라고 기준을 제시하는 사람이 바로 제사장이고 그중에서 대제사장이 여호야다에요.

그런데 요아스는 일곱 살 때 왕이 되었어요. 그러면 여호야다는 뭐냐? 고모부거든요, 고모부. 고모의 남편을 고모부라고 해요. 일곱 살짜리 잘 들으세요. 이 고모부는 왕과 함께 사는 사람, 왕과 함께 산다는 것…, 왕이 몇 살? 일곱 살인데 고모부 되는 이분은 나이가 많아요. 나이 차가 80년도 넘을 정도로 많이 나요. 요아스의 고모부 여호야다가 죽을 때 나이가 130세였어요(대하 24:15). 요아스는 일곱 살 때 왕이 되어서 통치를 40년간 했어요. 왕은 죽을 때까지 끝까지 통치해요. 그래서 왕의 통치가 끝나면 그해에 죽었다고 보면 돼요. 대략적으로 그렇게 보면 돼요.

나이 많은 어른이 왕을 가르칩니다. 일곱 살 먹었으니까 무서워서라도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지요. 여기서 오늘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도대체 뭘 가르쳤는가?’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일곱 살짜리 왕을 두고 ‘진짜 이스라엘은 이렇게 살아야 돼’라고 기준을 줬는데 그 기준이 뭐냐 하는 거예요, 그 기준이.

그 기준은 쉽게 생각하면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믿고…, 여러 가지가 나올 수 있는데 그것은 다 추상적입니다. 실질적으로 요아스 왕의 초기에, 여호야다 고모부가 살아 있으면서 훈수를 받을 그때 무슨 일을 했는가? 그 일한 것이 오늘 본문 열왕기하 12장 4절에 나옵니다.

“요아스가 제사장들에게 이르되 무릇 여호와의 전에 거룩하게 하여 드리는 은 곧 사람의 통용하는 은이나 각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이나 자원하여 여호와의 전에 드리는 모든 은을 제사장들이 각각 아는 자에게서 받아들여서 전의 어느 곳이든지 퇴락한 것을 보거든 그것으로 수리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요아스왕 의 배후에는 여호야다가 있지요.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성전을 수리해서 온전한 성전, 성전을 깨끗하게 정상적으로 가동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해야 될 기준이라는 거예요, 기준. 그러면 ‘성전을 깨끗하게, 말끔하게 청소하고 수리한다는 이게 인간이 이 세상 살아가는데 무슨 기준이 되겠느냐?’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오늘 본문 열왕기하 12장 3절에 보면, “오직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요아스가 통치할 때 백성들은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섬겼어요. 그게 뭐냐 하면, 산당에서 섬겼습니다. 산당이라 하는 것은 산 위에 있는 제단이에요. 높은 산, 팔공산이라든지 지리산이라든지 높은 데서 작은 제단들을 쌓아놓고 거기서 하나님을 섬겼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그래서는 안 된다’라는 거예요. 여러분 기준이 뭔지 아셨습니까? 하나님의 기준이라 하는 것은 ‘이렇게 하라’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부터 먼저 지적하시고 그다음에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그 말은 뭐냐? 산당에서, 높은 산에 제단 지어놓고 섬기는 그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에요.

‘산당에서 섬기지 말고 지정된 장소,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라.’ 이것이 요아스 왕을 통해서 내린 제사장, 여호야다가 제시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기준입니다. 그러면 뭐 쉽네요. 왜? ‘산당에 안 가고, -높은 산에 등산하려면 힘들잖아요-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기도하면 되지 않느냐?’ 굉장히 쉽지요.

쉬운데 역대하 24장 7절에 보니까 아달랴 시대에…,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요아스의 할머니가 아주 심하게 바알을 섬겼어요. 그 아들들도 못지않았어요. 그 엄마를 빼닮은 아들들이 어떤 짓을 했는가? 하나님을 만나는 그 성전을 모독했어요. 조롱했고 모독했습니다. “이는 그 악한 여인 아달랴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전을 깨뜨리고 또 여호와의 전의 모든 성물을 바알들에게 드렸음이었더라.”

그러니까 국가의 중추가 되는 고위 관료들, 왕궁에 있는 사람들은 여호와를 포기하고 바알에 미쳐서 심하게 바알을 신봉한 반면에, 일반 백성들은 바알이라는 것이 낯설기 때문에 전통대로 –전통은 잘 없어지지 않아요- 여호와를 섬기는데 산당에서 섬긴 겁니다. 그것이 과연 여호와를 섬긴 것인가? 여호와께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한 거예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와서 여호와 섬겨야지 산당에 가서 여호와, 여호와 찾고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만약에 산당에서 여호와 찾으면 바알을 섬기는 자가 성전을 모독하는 것 못지않게 여호와에 대한 모독이 되는 겁니다. 일반 대중들, 백성들도 성전이 무너지든 말든, 훼파되든 말든, 성전에 거미줄이 있든 말든 ‘나 편한 대로 높은 산에 가서 여호와 믿으면 되잖아.’ 이런 식으로 하는 것도 여호와에 대한 모독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요아스가 한 게 뭐냐? 제사장들에게 명령했어요. 백성들에게 성전세를 거두었습니다. 성전세라 하는 것은 성전의 유지, 보수, 관리에 필요한 경비, 성전의 기구가 깨지거나 하면 다시 만드는 그런 것에 필요한 자금인데 그걸 거두어서 성전을 수리하도록 제사장에게 명령했습니다. 언제 명령했느냐 하면, 열왕기하 12장 6절에 보니까 “요아스왕 이십 삼년에….”

그러니까 요아스가 일곱 살 때부터 왕이니까 서른 살 때까지 성전은 완전히 폐허가 될 지경에 이르도록 제사장들은 관심이 없었어요. 그동안 성전세가 없었느냐? 있었어요. 있었는데 누가 가져갔느냐? 제사장들이 착복했습니다. 성전세는 세금이기 때문에 백성들은 무조건 냈잖아요. 무조건 낸 세금을 제사장들이 일종의 권력 가진 공무원처럼 여겨서 그 돈을 자기들이 착복했습니다.

이것을 누가 아느냐? 바로 요아스와 그 고모부 여호야다가 딱 알고 “이제부터 성전세 너희가 거두지 마. 너희들 뺄 거야. 성전 보수하는데 그동안 손도 까딱 안 했으니까, 이번에 성전 보수하고 수리하는데 너희 제사장들 뺄 거야.” 그때 이스라엘 최초로 헌금함이라는 것을 만듭니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한 궤를 취하여 그 뚜껑에 구멍을 뚫어 여호와의 전문 어귀 우편 곧 단 옆에 두매 무릇 여호와의 전에 가져 오는 은을 다 문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그 궤에 넣더라”(왕하 12:9).

매미채 말고, 예배당 들어오면 딱 놓여 있는 그 헌금함 있지요? 헌금함을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이렇게 합니다. “백성들아, 제사장들에게 돈 내지 말고 너희들이 직접 이 헌금함에 헌금을 해라.” 헌금하는데 이게 목적이 있어요. “성전을 수리하는 데에만 이 돈을 쓴다.” 이렇게 했더니만 백성들이 되게 좋아하는 거예요. 그게 역대하 24장 10절에 나옵니다. “모든 방백과 백성들이 기뻐하여 마치기까지 돈을 가져다가 궤에 던진지라.”

이 돈은 백성들이 직접 여호와께 드린 돈이에요. 그러면 제사장은 뭐하느냐? 그때는 돈이 금속이거든요. 그 돈으로 성전을 수리했는데 돈이 남았어요. 남은 돈은 성전의 기구, 제사의 기구를 만드는 데에 썼다는 이야기가 역대하 24장 14절에 나옵니다. “필역한 후에 그 남은 돈을 왕과 여호야다의 앞으로 가져온 고로 그것으로 여호와의 전에 쓸 그릇을 만들었으니 곧 섬겨 제사드리는 그릇이며 또 숟가락과 금, 은그릇들이라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여호와의 전에 항상 번제를 드렸더라.”

이것까지는 오늘 본문 열왕기하 12장 초반부에 나와 있어요.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이겁니다. 성전세를 왜 내느냐 하는 거예요. 성전세를 왜 내느냐? 하나님을 바로 믿으면 안 돼요? 꼭 돈을 내야 하나님을 믿는 겁니까, 돈을 내야?

구약 때 사람들은 십일조를 했는데 나중에 구약 이스라엘 끝부분에 가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했어요. ‘하나님 섬기는데 십일조를 꼭 해야 해?’ 그런 생각. ‘성전세를 꼭 내야 해? 안내면 하나님 안 믿는 거야? 그냥 빌면 되잖아.’ 이런 거요.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께 그냥 기도하면 되잖아. 꼭 돈을 내고 기도해야 해?’ 이런 거.

그것은 덜 순수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자, 그 점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야 돼요. 성전을 왜 수리해야 하느냐? 성전에서 제사드리기 위해서 성전은 수리가 돼야 돼요. 그러면 ‘제사 없이 하나님 믿으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을 그 당시 사람이나 오늘날 우리도 하게 되어 있어요. ‘제사를 안 드려도 되잖아. 하나님이 존재하고 내가 존재하니까 하나님, 거기 잘 계시지요, 오겡끼데스까, 저도 여기 잘 있습니다.’ 그런 말로 주고받으면 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아무 문제 없이 신앙생활 잘하는 게 되지 않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에 논리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고 그 복잡한 절차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결론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찾아올 때 타인이 입은 피해자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세계에 침범하는 식으로 찾아오신다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잘 계시지요? 저도 잘 있습니다.’ 이런 관계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은 피해 입은 분으로서, 인간들 때문에 하나님은 상처받은 분으로서 그 상처를 쥐고 상처를 입힌 그 백성에게 찾아감으로써 그 상처를 연결점으로 해서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줬고, 나는 상처를 입은 하나님이다’라는 관계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거예요.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 이런 거요. 궁예가 한 대사에 나오지요. 목욕값은 8천 원만 주면 끝나는 문제인데 모욕감을 주었다. 상처를 주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상처 입은 하나님, 이런 것을 아는 것은 신약에 와야 알아요, 신약에 와서야.

그러면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줬잖아요. 율법을 줬을 때 여러분 율법이 법이라 생각하고 ‘아, 율법을 지키겠구나’ 이렇게만 생각하는데 알기 쉽게 그냥 율법이라 하지 말고, 아무 흠도 티도 없는 가녀린, 어린애 같은 아주 고운 손길로 율법을 생각해 봅시다. 흠도 티도 없는 손길이 인간에게 왔는데 인간이 그 손가락을 부러뜨려버렸다, 휘어지게 했다, 손가락에 칼질을 했다, 손가락을 잘랐다, 손가락에 침을 뱉었다, 손가락을 발로 뭉개버렸다, 이러면 그 손가락을 내민 그 몸체 되시는 하나님은 아프겠습니까, 안 아프겠습니까?

아프겠어요, 안 아프겠어요? 손가락을 밟혀봐야 이게 얼마나 아픈 줄을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린 손으로 인간에게 왔건만 인간은 하나님의 손가락을 부수고 무너뜨려 버리고 짓밟을 때 그 관계, 그 관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성전에서 제사하는 방법을 도입한 거예요. 제사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물론 이방인 마찬가지지만- ‘나 멀쩡해. 내가 멀쩡하니까 이 멀쩡한 나를 멀쩡하신 하나님이 만들었을 거야.’ 멀쩡한 두 존재 사이에 ‘하나님이여, 우리가 곱게 좋은 관계를 유지합시다. 좋은 게 좋잖아요, 하나님!’ 이렇게 했습니다.

여러분, 상처받은 하나님이 인간한테 피해를 보고, 그 피해를 받았다는 사실을 통보하는 식으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찾아온다는 것, 그것이 진짜 하나님이 나타나심의 관계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로마서 6장 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를 여러분이 감을 잡아야 돼요.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이 대목이에요.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이것은 신약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구약에는 뭐가 주어졌느냐? 구약에서는 율법을 줬습니다. 율법을 줬는데, 율법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데 그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이 뭉개버렸어요. 그런데 신약에 와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버리고 하나님의 진짜 마지막 천국 백성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제시하는 법칙은 뭐냐?

이제는 율법에 속하지 않고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을 찾기 시작했어요. 은혜를 주셔서. “이게 은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보다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다.” 그 차이점이 뭐냐 하면, “율법을 줬는데 너희들은 율법을 모독했다.” 이것을 전제로 깔고 그 모독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얼마든지 저주하고 분노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저주와 심판을 대신 담당하신 분으로부터 다시 찾아갈 때 그것은 주께서 용서로 찾아가지요. 용서, 사랑. 그게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

그래서 고린도후서에 나오지요.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다른 말로 하면 ‘용서받을 때다. 불쌍히 여김을 받을 때다. 그냥 봐주고, 봐주고, 봐주는 때다.’ 그러면 이 봐주는 때라는 그 소식을 신약에서 들었으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돼요. ‘도대체 우리가 무슨 짓을 했기에 주께서 봐줘야 천국을 가는지? 죄 사함을 받아야 구원을 받지, 우리가 하나님을 상대해서 뭐 말씀을 지키겠다는 이것은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 그것을 알아야 되겠지요.

그 일을 하는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 그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제사장들의 몫과 제사에 필요한 기구들과 비용과 성전을 관리하는 수리비와 유지비를 누가 내야 되는가? 제사의 효과를 받아야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백성들 쪽에서 성전세를 내야 되는 거예요, 성전세.

이제부터 여러분이 생각해야 할 것은, ‘성전세 내고 성전의 효과를 알고 살면, 성전에서 제사장이 수고해서 우리 죄를 씻어준다면 우리가…’ 그 당시가 농경시대니까 밭을 갈았잖아요. ‘…밭뙈기에서 농사지을 때 그 모든 생산물과 땅 자체는 우리 것 맞지요? 우리 이름으로 등기되는 것 맞지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요?

대구에 땅이 있는데 만약 서울에 성전이 있다 칩시다. 가끔 서울 성전에 가서 제사 드리고 쪼르르 대구 내려와서 대구에서 한 2만이나 3만 평 농사지으면 그 소산물과 그 땅의 소유는 어디까지나 내 거다 그 말이지요, 내 거다. ‘성전세 드렸으니까 하나님 것 드리고, 내 것은 내 것 맞잖아.’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까, 라는 질문이 성립되지요.

아까 제가 이야기한 ‘주께서 피를 봤다’라는 것, 그게 결론이라 했지요. 그런데 그 결론에 도달하는데 복잡한 절차가 필요한데 지금 그 절차에 들어서기 위해서 제가 이 말을 던진 거예요. 땅은 내 땅입니까, 하는 거예요. 레위기 25장 55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군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군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땅 주인이 여호와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뭐냐? 땅 주인한테 걸려서 농사짓는, 세금 내는 품군, 남의 땅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이에요. 이제 슬슬 왜 하나님이 피해 봤다는 인상을 받는지 감 잡겠습니까? 땅 주인이 하나님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내 소유의 땅이라고 우기는 그것이 땅 주인에게 피해를 안기는 바가 된다는 겁니다. 피해를 주는 거예요.

오늘 본문을 봅시다. 열왕기하 12장 16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헌금함에 모인 것은 성전 수리하는 일군들에게 주고 제사장에게는 주지 말라고 당부했어요. 그런데 열왕기하 12장 16절에, “속건제의 은과 속죄제의 은은 여호와의 전에 드리지 아니하고 제사장에게 돌렸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따로따로 줬다는 거예요.

‘헌금함에 있는 것은 순전히 미장이라든지 기구 수리하는 목수들에게 온전히 가게 하되, 정상적으로 제사장에게 줄 속건제의 은과 속죄제의 은, 그 돈은 따로 제사장들에게 돌려라. 여호와의 전에 돌리지 말고 제사장에게 돌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성전 수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사해야 되는 공무원들, -제사장들이지요- 제사장들의 그 생업을 보장해 주는 그것도 하나님과 백성들이 하나가 되는, 같이 교류가 되는 방식이라는 그 말입니다.

그것을 아까 한 말에 집어넣어서 하겠어요. 제사장들에게 월급이 돌아갈 수 있도록, 봉급이 돌아갈 수 있도록 속죄제 은과 속건제 돈을 드리는 그것도 하나님께서 피해를 받은 자임을 드러내는 증거가 된다는 거예요. 이 절차를 따라올 때 힘들더라도 좀 참아야 해요. 이스라엘 율법에서 이런 것들이 굉장히 복잡하게 얽혀 있어요.

“제사 드리면 된다.” “아니야. 네게 있는 가옥, 그 집은 네 것이 아니야. 그거 하나님 거야.” “그러면 땅에서 나온 생산물을 하나님께 몽땅 다 빼앗겨야 합니까?”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장에게 물을 수가 있잖아요? “하나님 거니까 하나님께서 다 가져가야 합니까?” 제사장은 “오케이, 다 가져간다.” “다 가져가면 우리는 뭐 먹고 삽니까?” “십 분의 구를 되돌려 줄게.” 이게 뭐냐 하면, 십일조예요.

십일조가 십 분의 일을 드리는 게 아니고, 십 분의 구를 되돌려 받는 거예요. 안 받아도 되는데 하나님께서 십 분의 구나 줘요. 90퍼센트를 준다고요. 십 분의 일을 드리면 안 돼요. 다 갖다 바쳐야 돼요. 다 갖다 바치고 십 분의 구를 받는 거예요.

설날에 아이가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세배를 한다.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세뱃돈을 주면 아이에겐 내 거가 안 돼요. 부모한테 다 드려야 돼요. 그렇게 모아놓은 돈이 50만 원이에요. 부모가 나중에 아이 이름으로 45만 원 적금을 넣어준다? 아이는 어떡해야 돼요? 기뻐해야 되죠. ‘그때 절한다고 힘들었는데, 그게 내 노동인데…’ 아니에요.

하나님만이 사는 땅에 십 분의 구, 십 분의 구라는 하나님 걸 누리면서 같이 천국에서 사는 거예요. 이 구조가! 감사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죄인 주제에. 그러면 사람들 생각이 뭐냐? ‘백 퍼센트 다 받아야지, 십 분의 구만 받지 말고. 마지막 십 퍼센트 그게 아깝네.’ 이렇게 아까워한다면 주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그 생각이 나한테 상처가 된다’는 거예요. ‘나에게 모욕감을 준 거’예요. ‘날 조롱한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걸 빼앗기지 않으려 하는 악마적 속성이 있다’라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십 분의 일 드렸다고 합시다. 십분의 구를 받는 것이 맞는데 복잡하니까 그냥 십분의 일 드렸다 합시다. 그런데 여러분, 십분의 일 드렸으니까, 자기가 할 도리 다 했으니까 하나님을 모독한 게 아니잖아요.

하나님 앞에 정당하게 드렸고, 정당한 복을 받았기 때문에 계약상 하나님께 상처를 줬다는 것이, 내가 죄인이라는 의식이 거기서 성립이 안 되거든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속건제의 은’이라는 말을 했죠. 열왕기하 12장 16절, “속건제의 은과 속죄제의 은은 여호와의 전에 드리지 아니하고 제사장에게 돌렸더라.”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것만 설교하고 마치겠습니다. 제일 중요한 부분에 도착했어요. 속건제가 뭐냐 하면요, 레위기 6장에 보면 속건제가 나와 있어요. 레위기 6장 5절에 보면, “무릇 그 거짓 맹세한 물건을 돌려 보내되 곧 그 본물에 오분 일을 더하여 돌려 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하거나 남이 잃어버린 물건 가지고 자기 거라고 하다가 들켜서 주인에게 다시 돌려줄 때는 그냥 돌려주지 말고 20퍼센트, 5분의 1 가격을 추가해서 돌려주라는 그 말이죠.

어떤 사람이 100인치짜리 TV가 탐이 나서 훔쳤단 말이죠. 그 100인치짜리 TV값이 백만 원이라면 “아이고, 제가 도둑질을 했습니다. 여기 그 물건이 있습니다”라고 TV 돌려주고, 그다음에 백만 원의 20퍼센트인 20만 원을 더 보태서 그 사람에게 돌려주라 이 말입니다. 이게 속건제(贖愆祭)에요. 속건제는 제사를 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제사 드렸습니다. 이제 이걸로 퉁 칩시다.” 안 돼요. 이것은 내가 훔친 물건의 본 주인에게, 그 타인에게 찾아가서 20퍼센트를 추가함으로써 “나는 당신 앞에 죄인입니다”를 자백하는 것이 바로 속건제 제도에요. 그 속건제 은은 제사장에게 주라,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일반 백성들이 제사장에게 줄 때 “제사장 이리 와 봐. 이거 당신 월급이야.” 이렇게 주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돈 안 주면 당신 밥 못 먹고 살아. 고마운 줄 알아야 돼.” 이렇게 주는 것이 아니고 제사장 앞에 나설 때마다 ‘나는 당신 앞에서 죄라는 것을 들키고, 그 죄라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마음으로 20퍼센트를 더해서 줘라, 이 말입니다. 십일조는 내면 그냥 세금 내는 거고요. 그게 아니고 자신이 죄지었음을 알려주는 그 표시가 20퍼센트에요. 속건제의 은혜에요.

여러분이 생각하기를, 이렇게 생각해요. ‘그러면 우리가 도둑질도 안 하고 내 물건만 챙기고 남의 물건을 챙기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 20퍼센트 낼 필요 없지 않나?’ 이렇게 생각하겠죠. 레위기 27장, 거기서 성전세를 쭉 언급하면서 1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그 사람이 자기 집을 무르려면 정가한 돈에 그 오분 일을 더할찌니 그리하면 자기 소유가 되리라.”

5분의 1은 20퍼센트입니다. 19절에 “밭을 구별하여 드린 자가 그것을 무르려면 정가한 돈에 그 오분 일을 더할찌니 그리하면 그것이 자기 소유가 될 것이요.” 20-21절에, “그가 그 밭을 무르지 아니하려거나 타인에게 팔았으면 다시는 무르지 못하고 희년이 되어서 그 밭이 돌아오게 될 때에는 여호와께 바친 성물이 되어 영영히 드린 땅과 같이 제사장의 기업이 될 것이며.” 제사장의 땅(기업)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복잡하죠? 이게 이런 이야기에요. 아주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땅이 없어요. 자기 땅이 없기 때문에 임시로 임대차 계약하는 식으로, 하나님 땅인데 갈아먹기 위해서 자기 땅을 받았어요. 그래서 이 땅이 내 땅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 땅이라고 바치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요. 어떤 사람이 밭의 전부는 아니겠지요, 약간의 일부, 십분의 일이든 이십분의 일이든 그 일부를 ‘이것은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라고 할 때 여기서 제일 어려운 대목은, 인간이 하나님께 어떻게 바치느냐, 이 말입니다.

돈을 공중에 막 던질까요? 하나님께 어떻게 바칩니까? 밭의 흙을 보자기에 싸서 하늘에 던지면 바치는 게 돼요? 하나님께 바친다, 하나님께 바친다, 이렇게 성경에 많이 나오는데 어떻게, 어떻게 바치는데요? 어떻게 바칩니까? 바친다고 할 때 내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하는 이 의식은 모든 인간에게 다 들어있다는 거예요.

따라서 일단 바쳐놓고 ‘나는 안 바칠래.’ 해서 다시 무를 때는 20퍼센트를 더해서 무르도록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밭은 희년 되면 결국 어디로 가느냐? 제사장 밭이 되는 거예요. 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친다는 말은 그 백성과 하나님 사이 그 중간에 거하는 분이 있어요. 그게 제사장입니다.

자 정리해 봅시다. 제사장이 하는 역할은 뭐다? 제사장의 역할은 제사하는 것이다. 무슨 제사 말입니까? 우리가 남한테 마음적으로 피해를 입힌다든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 지은 죄를 속죄제라고 하고, 사람한테 지은 죄를 속건제라고 해요.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를 갖고 있으면 하나님과 함께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고맙게도, 너무나 고맙게도 제사장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당신이 바칠 때 어떤 마음가짐이 있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당신 마음가짐을 아니까 당신 마음가짐에 순수하지 못한 것이 있거든 20퍼센트를 보태서 내세요.” 죄를 씻어주는 데 있어서 어떤 방법을 딱딱 법적으로 알려준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알아서 회개해.” 이것은 너무 어려워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20퍼센트 딱딱 끊어서 해주니까 얼마나 간편하고 간단합니까? “제사장에서 20퍼센트 바쳐. 오케이?” “오케이.” 여러분, 구약이 더 편리하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구약 율법의 때가. 왜? 그러면 죄 사함이 없어지니까요.

그런데 구약이 끝나가고 신약에 들어오면서 이사야 53장, 유명한 말씀이죠.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5절). 이 대목이 나오는 이사야 53장이요. 그 이사야 53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0절에,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속건제물로, 속죄제가 아닙니다.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속건 제물입니다. 속건 제물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가해자가 있어야 하고 그 가해자 때문에 피해를 본 피해자가 발생되는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구세주로 올 때 그 십자가의 죽음은 속건 제물로 죽으신 거예요.

‘너희들 때문에, 네 죄 때문에 내가 피해를 보았다’라는 그 상처를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속건 제물입니다. 그러니까 십일조가 아니고, 10퍼센트가 아니고 20퍼센트에요, 20퍼센트. “아이고 하나님 그거 가져가세요.” 이게 아니고, 20퍼센트가 된다는 것은, 진정한 십일조는 뭐냐 하면, 자기 죄를 누가 대신 치렀다는 것을 아는 이 은혜가 진정한 제물에 합류하는, 그 제물 속에 뛰어들어서 그 십자가 안에 들어가서 ‘우리는 죄인이고 주님은 우리 죄를 대속하신 분’이라는 그것이 함께 살아가는 바로 영원한 백성이 되는 방법이에요.

그러니까 정리하면 성전이 있어야 되겠죠? 그다음에 제사장 있어야 되겠죠? 속건 제물 있어야 되죠? 속제 제물 있어야 되죠? 이렇게 해서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구약의 이 역할을 요아스 왕이 배후의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지시를 받아서 한 거예요.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아까 이야기했죠.

‘주님은 타인으로 와서, 상처 입은 타인으로서 우리를 침범하고 우리 인생에 개입해서 십자가를 앞장세움으로써 내 것, 내 것, 내 것이라는 이것 때문에 주님께서 모독받고 조롱받는 그런 분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분이구나.’ 그분이 진짜 하나님이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왕이 되셔서 우리에게 참된 백성에 대한 기준을 제시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십자가 외에는 다른 기준이 없는 이유를 알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죄지은 것도 모르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미리 지심으로써 우리가 매사에 내 것이라고 여기고, 내 인생이라고 여기는 그 자체가 주님의 십자가를 모독한 죄인 것을, 씻음받고 난 뒤에 깨닫게 해주시는 은혜에 늘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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