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자유 아니고 탈출

아빠와 함께 2026. 8. 12. 23:14

자유 아니고 탈출 

2026년 8월 12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11:1-3

(11:1)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그 아들의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왕의 씨를 진멸하였으나

(11:2) 요람 왕의 딸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의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도적하여 내고 저와 그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여 죽임을 당치 않게 한지라

(11:3) 요아스가 저와 함께 여호와의 전에 육 년을 숨어 있는 동안에 아달랴가 나라를 다스렸더라

아달랴는 북 이스라엘  바알 나라의 건설에 패바한 것에 대해서 극한 분노를 보이고 싶습니다. 게다가 사랑하는 자식인 아하시야 왕이 북쪽 혁명에 연류되어서 죽은 것에 대해 심정이 상해서 이제 남쪽만큼은 바알 종교의 유지를 받들어 예후 못지 않는 권력을 쥐고 바알 나라 건설에 박차를 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쪽 유다 나라의 전통에 입각한 다윗 계통의 왕 후보자들을 다 죽였습니다. 비록 막내 아들로 태어난 1살짜리 요아스 왕자를 죽이는 데는 실패했지만 6년간 권력을 독점하면서 권력의 맛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북이스라엘처럼 권력을 쥔 인물이 정권 잡는데 성공해서 종교를 바알에서 여호와로 바꾸면 제대로 된 하나님 나라가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잠시나마 남쪽 유다 나라에 6년 동안 권력이 공백을 했을까요? 그것은 국가라는 권력이 하나님 나라 건설 유지를 위해서 마땅히 갖추어야 될 질서의 틀로 여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왕이 있다면, 우리는 왕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물어봐야 합니다.

사람들은 국가 질서가 안정될 때, 자신의 삶도 안정을 취할 수 있기에 행복의 중요한 요건이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제발 국가의 왕은 휼륭한 분이 되셔서 종교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경제적으로 백성들을 골고루 풍족한 삶을 보장하는 나라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고대하는 이유는 이런 환경이 백성들 자신들에게 자유를 보장해준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오해는 이스라엘 땅이 이스라엘 민족 소유의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땅이라는 점을 잊었기 때문에 생긴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은 ‘탈출’을 통해서 성립합니다. 도저히 탈출이 불가능한 그 대제국 애굽 세계에서 철저하게 예속과 노예된 생활을 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유’이었지 결코 ‘탈출’이 아니었습니다. ‘자유’는 인간들이 원하는 것이고 탈출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히브인들에게 있어 국가는 자신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여유를 보장하는 질서체제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을 위해 행복의 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국가로부터 탈출을 통해서 결구 ‘나-아님’의 자리로 이동하기를 원했습니다. ‘나-아님’은 보통 사용하는 ‘타인’을 뜻하지 않습니다. ‘나’ 자신을 부정하고 부인하는 ‘새로운 나 자리’를 뜻합니다. 이러한 ‘나 아님’의 자리가 성립되려면 그런 ‘나’를 낳는 새로운 질서가 필요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강제 추방된 후에 더는 인간에게 ‘새로운 질서’를 기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조치는 너무 단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과 하와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그런데 막상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에게 다음과 같이 여운의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창 3:22) 즉 피조물에게는 결코 선악을 아는 상태에서 영생을 얻는 경우가 없게 하시겠답니다.

하지만 이미 인간은 선악을 아직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런 ‘나’는 생명나무에 있는 곳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나-아님’의 자리로 이동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로부터의 탈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자손들을 애굽에 가서 번성케 해놓으시고 강제로 ‘탈출’케 하십니다.

여기에 등장되는 것이 바로 ‘죽어서 피를 내어야 할 어린양’입니다. 이 어린양으로 인해 히브리인들은 국가 그 자체로부터 탈출이 됩니다. 이 어린양으로 인해 애굽의 바로왕은 자신의 대를 이를 맏아들을 잃어버립니다. 이 아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살해된 겁니다. 이는 곧 국가의 질서를 붙드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서 실해된다는 겁니다.

이처럼 어린양의 등장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질서도 있지만 반면에 죽어야 될 지경에서 죽지 않고 살아난 질서로 생겨납니다.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죽어야 하는 나’ 대신에 ‘죽지 않고 살아나야 할 나’들의 집단입니다. 기존의 국가는 어린양과 결부된 이스라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처럼 국가 권력의 장악한 자는 모든 자를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권력을 쥐고 있는 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들은 죽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정말 아담과 하와가 죽었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을 걸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곧장 죽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대대로 그 아담과 후손을 죽이는 질서가 ‘국가’라는 이름으로 형성되게 됩니다. 모든 인간들이 각자 선악 지식을 갖고 있기에 악마의 말대로 그들 내부에 신이 되고 싶어합니다. 즉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뭐든지 해내며 살아가는 사람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야망은 특정인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다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를 가질려면 모든 경재자들을 죽여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권력의 생리입니다. 인간은 순간순간 삶의 현장에서 타인을 제치고 자기 자신만이 의사를 관철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성사되려면 주변 사람들은 실제로 살해되거나 그들이 그들나름대로 신의 능력이 극히 제한되어 내 명령에 전적으로 복종하기를 기대합니다. 이게 바로 나의 절대적 자유를 위해서 상대방이 죽거나 언제든지 나 자유를 위해 기꺼이 죽을 자들이기를 원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제사장 여호야다가 반란을 일으켜 아달랴의 권세를 무너뜨립니다. 그렇다면 북이스라엘처럼 여호와를 신봉한다는 예후의 나라가 되어야만 할까요? 아닙니다. 여호야다는 제사장으로서 어린양의 희생을 가지고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입니다. 이 제사장이 조치는 율법입니다.

“여호야다가 왕자를 인도하여 내어 면류관을 씌우며 율법 책을 주고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매 무리가 박수하며 왕의 만세를 부르니라”(왕하 11:12) 즉 ‘율법을 따라 탈출’입니다. 생명나무의 질서와 선악과질서의 접합선에는 피가 발생됩니다. 이 피는 율법에 의하면 생명 없는 곳에서 나타나는 생명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메시야를 가차없는 죽여 피를 흘리게 하는 이 국가, 그 가운데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오셨습니다. 최후의 왕이시오 모든 율법을 다 이루신 분입니다. ‘율법 갖고 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선악적으로 잘난 척 해서 스스로 복받을 만하다는 절대자 노릇을 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8강-열왕기하 11장 1-3절(자유 아니고 탈출) 260812-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11장 1절에서 3절까지입니다.

열왕기하 11:1-3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그 아들의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왕의 씨를 진멸하였으나 요람왕의 딸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의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도적하여 내고 저와 그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여 죽임을 당치 않게 한지라 요아스가 저와 함께 여호와의 전에 육 년을 숨어 있는 동안에 아달랴가 나라를 다스렸더라.”

아하시야 왕의 어머니 아달랴는 사실은 북쪽 인사입니다. 쉽게 말해서 북쪽을 공산주의라 하고 남쪽을 자본주의라 한다면, ‘공산주의를 철저하게 주장하고 신봉하는 그 사람이 남쪽 대통령의 엄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북쪽의 예후가 하나님의 예언을 앞장세워서 북한에서 공산주의자들, 곧 바알 섬기는 자들을 다 죽여버렸어요. 그런데 남쪽에도 왕초가 있어요. 공산주의가 있다는 말이지요. 남쪽 왕도 물들어서 북쪽의 공산주의자와 잘 친했는데, 소위 말해서 좌파인데 북쪽에서 혁명이 일어나서 바알 섬기는 자들을 다 죽일 때 누가 덩달아 같이 죽어버렸느냐 하면, 북쪽에 병문안 갔던 좌파 왕이 예후라는 혁명가한테 죽임을 당했어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든 사상이나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식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잖아요. 자기 자식이 죽고 난 뒤에 그 엄마(아달라)가, -북쪽의 혁명가가 아직까지는 남쪽까지 영향을 안 미쳤으니까- ‘내가 남쪽에 공산혁명을 일으켜야겠다’ 곧 ‘바알 종교화 시키겠다’ 해서 어떻게 했느냐?

그때 남쪽의 권력에 공백이 생겼어요. 왕은 그 아들의 아들이 왕이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북쪽에 가서 죽어버렸어요. 왕의 자리, 그 권력이 비어 있을 때 아달랴(아하시야의 엄마)가 생각을 해보니까 분명히 그 빈자리에 아들의 아들, 즉 자기 손자들 중의 하나가 남쪽 전통과 유업을 잇겠다고, 다윗의 혈통을 잇겠다고 할 것이 뻔하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공산혁명이 안 되잖아요. 나라를 바알 종교화시키는 것에 실패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이세벨의 딸답게 철저한, 뼛속까지 바알 종교를 신봉하는 아달랴가 북쪽 예후라는 혁명가에게 당했던 아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바알 종교 전통과 다른 남쪽에 있는 다윗 혈통의 손자들을 다 죽였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냐 하면, 이 땅이 여호와가 소유권을 갖고 있는 약속의 땅이에요. 하나님께서 애써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넣었는데 바로 그 땅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겁니다. 하나님의 취지는 뭐냐? 하나님이 만들어준 그 왕의 자리는 다윗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정신, 여호와의 정신, –언약이라 해요, 다윗 언약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뜻을 후대까지 이어가고 이어가기 위해서 남쪽에 성전이 있고 왕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잠시 그 권력에 공백이 생기게 만들었어요.

아달랴를 통해서 왕의 대가 끊어지는 위기, 즉 바알을 신봉하는 그 여자를 통해서 잠시 권력이 주어지게 하고 남쪽 나라를 다스리게 했습니다. 몇 년 동안? 본문에 보면 7년 동안 다스리게 했어요. 하나님이 왜 그렇게 했는가? 북쪽에 있는 예후는, 여호와 하나님의 엘리야 선지자에게 받은 계시대로 한다고, 칼을 휘둘러서 바알 섬기는 권력자들을 전부 다 몰살했잖아요.

그러나 그것은 비어 있는 권력이 아니에요. 인간 왕이 갖고 있었던 그 권력의 자리를 공백이 없이 다른 사람이 또 그 권력을 차지한 겁니다. 그러나 남쪽의 유다는 권력 자체가 잠시 뻥 하니 뚫렸어요. 그래서 아무도 없어요.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권력의 자리에 아무것도 없을 때 ‘도대체 인간이 왕이 된다는 그 배후에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겁니다.

북쪽은 권력의 공백 기간이 없었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바알 믿는 자들이 사라지고 예후라는 –사실은 믿지도 않지만 겉으로는 바알을 물리쳤으니까 여호와 믿는 것처럼 보이는- 자가 권력을 차지했으니까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느냐? ‘역시 나라가 되려면 왕의 자리가 비어 있으면 안 돼. 신앙을 가진 대단한 왕이 나라를 통치해야 이 나라가 잘돼’라는 생각을 하게 되겠지요.

‘봐라. 예후라는 장군이 나서서 바알 섬기는 자들 다 죽였으니까 이제 북쪽은 완전히 여호와를 섬기는 나라가 되었잖아. 역시 여호와를 믿는 나라는 저 정도로 완벽하게 이단들이 없어지고 다른 종교는 없이 여호와만 높이는 나라가 되어야 해’라고 쉽게 생각하겠지요. 그게 오산입니다. 그게 오산이에요.

지금 사람들은 뭘 모르냐 하면, ‘훌륭한 왕이 나타나서 여호와 신앙으로써 우리를 다스리게 되면 우리도 훌륭한 신앙의 국가 백성이 된다’라는 계산을 하는데 이런 계산은 오산입니다. 너무 경솔해요. 미리 핵심 부분을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국가로부터 벗어나야 해요, 국가로부터. 국가 자체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국가가 유지되게 되면 이것은 백성 본인들이 좋든 나쁘든 간에 권력에 꽁꽁 묶이게 되어 있어요. ‘그 권력이 어떤 권력이든 나라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면 우리는 좋잖아.’ 이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나 막상 남쪽 유다에 그 권력이 없었을 때 그 없는 자리를 차지한 권력자는 남자가 아니었고 여자였습니다. 아달랴였어요.

어떤 수상한 여자가, 다윗의 성전이 있고 다윗의 약속된 유다 나라의 잠시 비어 있던 권력을 마저 차지했다는 것은 요한계시록 13장 2절의 내용을 이렇게 미리 구약적으로 보여준 것이 되는 겁니다. 어떤 권력이 있는데 그 권력의 배후에…, 이런 이야기에요.

어떤 나라에 대통령이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나라에 대통령이 있어서 우리 국민들 행복하게, 잘 먹고 잘살게 해주면 좋겠다. 주식도 9천이나 만도 넘어갔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잖아요. 어느 누구도 이렇게 생각 안 해요. 그 왕, 대통령 배후에 누가 있느냐를 아무도 묻지를 않아요. 왕의 배후에 누가 있는가?

요한계시록은 알려줍니다. 배후에 누가 있느냐 하면, 용이 있다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13장 2절,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용이, 악마가 인간을 앞잡이로 세워서 국가라는 것을 통치한다. 공식은 간단해요. ‘나타난 국가는 숨어 있는 악마가 인간을 지배하는 정치적 방식이다.’

어렵지 않지요. 간단하지요. 한 나라는 힘의 질서체니까 그 질서체인 국가 배후에 악마가 있다는 생각을 못 하고 ‘훌륭한 대통령(왕)이 우리를 잘 먹고 잘살게 해주고, 행복하게 하고, 치안을 유지해서 안정적으로 우리 자식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게 하고, 젊은 애들 취직 잘 되게, 아가씨들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 꾸릴 수 있게 한다. 물론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지는 말고’라는 그 정도 조건으로 건전한, 그리고 하나님 앞에 사랑받을 복된 나라를 자꾸 생각하는데 국가 통치자 배후에는 용이 있습니다.

용이 짐승에게 권력을 줘요. 그리고 지도자인 짐승이 그 권력을 행사하게 돼요. 그러면 용이라는 것, 악마가 국가를 만들고 그 국가가 인간 지도자를 배후에서 조종해서 인간들로 하여금 통치케 하는 그 의도가 뭐냐 하는 거예요, 악마의 의도가? 악마의 의도를 알려면 우리는 창세기 2장과 3장에 나오는 에덴동산의 두 개의 나무를 생각해야 해요.

처음에 선악과 나무와 생명나무, 두 개의 나무가 있던 자리에서 뭐가 흘러나왔어요. 뭐가 흘러나오느냐 하면, 네 줄기의 강이 흘러나와서 에덴동산을 축축하게 다 적셨습니다. 에덴동산 뿐 아니고 처음의 모든 땅들을 다 적셨어요. 그게 생명의 강물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더라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창 2:9-10).

아직까지 선악과가 다치지 않은 이상 아담과 하와는 계속 하나님의 품 안에서 살았어요. ‘산다’가 성립되었습니다. ‘산다, 살아있다’가 성립되었어요.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7)라고 했어요.

여기서 잘 들어야 해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의 지식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따먹지 말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분명히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언급을 했어요. 그런데 그 언급을 할 때 뭘 언급 안 했느냐 하면요, ‘네가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생명나무를 너에게서 치워버리고 생명나무 있는 곳에 가까이하지 못하도록 너를 추방한다’는 그 이야기는 사전에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사전에 하나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한 것은 ‘정녕 죽으리라’였지 ‘선악과 따먹으면 생명나무 못 따먹도록 내가 막고 너는 생명나무 있는 곳에서 추방될 것이다.’ 그 이야기는 사전에 인간에게 언급하신 적이 없다니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그 이야기로 끝내시지 ‘생명나무 과실은 못 따먹게 하겠다. 그래서 나는 너희를 추방하겠다’라는 말을 새삼스럽게 끄집어내시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생명나무 과실을 못 따먹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돌아가는 이익은 뭐지요? 하나님께서 새삼스럽게 원하는 것은 뭡니까? 이상하게 말을 바꾸시는 것같은 느낌이 든다는 말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정녕 죽으리라’ 했으면 선악과 따먹는 순간 헉, 하고 숨이 막히면서 그 자리에서 죽어버려야지요.

그렇게 죽어버리면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찾아올 수도 없지요. 죽어서 시체가 되었는데 뭘 주께서 말을 건넵니까? 말을 못 건네지요.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 정작 죽지도 않고요. 생명나무부터 먼저 걱정을 해서 인간에게서 치워버리고, 그다음에 뱀, 마귀죠, 마귀하고 여자하고 남자하고 저주하는데 급급하셨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전에 말을 아꼈던 그 취지가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정녕 죽으리라’ 할 때 그 죽음을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가 없는 상태에서 본격화시킵니다. 이래요. 생명나무 과실은 따 먹어도 안 죽어요. 그런데 ‘죽으리라’ 하는 것은 선악과를 따 먹었을 경우에 죽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렇게 알았어요.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추가적인 말씀이 있어요.

추가적 사항을 주시는데 그게 뭐냐? 이미 선악과 따먹은 상태예요. 따먹은 상태에서 창세기 3장 22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들 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나님들 보고, ‘하나님들’을 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자기 하나님 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었대. 그러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와 같이 되었으니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새삼스럽게 추가적으로 알려주는 내용은, ‘인간은 선악을 아는 채로 어떤 경우라도 영생을 얻으면 안 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겁니다. 선악을 아는 채로 영생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인정을 못 하겠다는 거예요. 인정을 안 한다면 그다음 조치가 뭐냐?

하나님께서는 두 개의 질서를 만들어요. 하나는 뭐냐? 선악을 아는 채로 영생을 아는 그룹이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만의 세계에요. 그리고 피조물이 선악은 알았지만 절대로 영생은 누리지 못해야 할 또 하나의 질서가 있어요. 그러면 질서가 두 개가 되는 거예요. 생명나무 중심의 질서와 선악과 따먹은 ‘정녕 죽으리라’의 질서, 이 두 개가 생기는 겁니다.

이 두 개가 생기는데 생명나무 말고 다른 한쪽에 ‘정녕 죽으리라’가 실효성 있게 계속해서 죽음의 세계가 되려면 거기에 누가 있어야 하느냐 하면, 선악을 알게 한 악마가 통치자가 되어서 인간들로 하여금 계속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고, 또 죽이는 그 작업이 이루어지는 질서가 필요한 거예요. 그 질서가 두 자로 뭐냐? 국가입니다, 국가. 그게 국가에요.

국가의 통치자는 백성들을 죽이는 자에요. 죽이는 힘을 독점하고 있는 자가 왕이에요. 그리고 백성들은 죽는 것이 싫어서 그냥 힘에게 복종하는 조건으로 ‘살려만 주이소’하고 발발 떨면서 늙어 죽을 때까지 ‘살았다, 살았다…’ 이러면서 죽음의 힘에 빨려 들어가는 그러한 질서의 구성원이 바로 백성입니다. 그게 애굽입니다, 그게 애굽이에요.

여러분, 애굽에 하나님이 모세를 보낼 때 애굽 사람들을 겨냥해서 보낸 것이 아니고 딱 한 존재만 다루기 위해서 지팡이 들려서 모세를 보낸 거예요. 그게 누구냐? 바로 왕을 죽이기 위해서, 바로 왕을 죽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냈고 과연 바로 왕의 맏이가 죽어요. 바로 왕의 맏이가 죽는다고요.

바로 왕의 맏이가 죽는다는 말은, 내 자식이 죽어서 대가 끊어졌다는 그 말은 살아 있는 내가 더 이상 대를 이을 수 없으니까 내가 살았다는 말을 못 하죠. 아들은 나의 끝자락이에요. 자식이 죽었다는 말은 ‘내 끝은 죽음의 질서 안에서 못 벗어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자식이 죽었다는 말은 자식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자식이 죽었다는 말은 ‘내 끝자락은, 내 끝장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정녕 죽으리라’의 실효성, 실제로 ‘정녕 죽으리라’의 질서체를 따로 만들어서 그 덩어리 자체가 ‘정녕 죽으리라’의 반복이 이뤄지는 거예요. 그 계시를 북쪽 이스라엘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남쪽 유다 나라로 표현해요, 남쪽 유다 나라로. 오늘 본문 열왕기상 11장 1절에,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그 아들의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왕의 씨를 진멸하였으나”

왕의 씨를 진멸했다. 다 죽여버렸어요. 요 이야기에요. 죽이는 역할이 왕, 권력자가 하는 일이라니까요. 죽이는 역할입니다. 내 질서에 굴복 안 하면 죽인다는 말은 ‘백성이라는 존재는 언제든지 왕에 의해서 죽을 수밖에 없다. 이미 죽은 자와 다름없다’라는 것을 왕은 항상 자기의 법을 통해서 이야기를 해왔고 그런 자격자가 뭐냐? 권력의 자리에요.

죽이는 그 권력의 자리를 아달랴가 엿보고 후딱 들어온 거예요. 왕자들을 왜 죽였느냐? 왕의 후보감들을 다 죽여버릴 때 왕의 권력의 자리가 자기한테 독점이 된다는 말이지요.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나도 권력 좀 쥐어봤으면 좋겠다” 하는데 오늘날도 해당되고 본문에서도 해당돼요.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출애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여러분도 속으로 답변해 보세요. 여러분, 출애굽이 탈출입니까, 자유입니까?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신 적이 없어요. 자유를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없는 자유를 만드는 방법은 왕만이 할 수 있어요. 왜? 자기 권력의 경쟁자를 다 죽여버리는 이유가, 자기가 돛대거든요. 자기만 자유잖아요.

자기가 홀로 자유자 아닙니까? 자기 말고, 자기 밑에는 없잖아요. 까불면 다 죽여버리니까. ‘나는 왕의 자리에 내 자유를 반납하겠습니다.’ 이런 사람들만 밑에 있기 때문에 왕만이 자유를 누리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본 창세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자는 누구냐? 왕만 따먹은 것이 아니고,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전부다 선악 지식을 알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선악 지식을 알고 있으니까 악마가 시키는 대로 ‘네가 선악을 알게 되면’ 그리고 악마의 말이 뭐냐? ‘네가 신이 된다.’ 신이 된다는 것이 뭐예요? 네가 최고 권력자고 네가 완전한 자유자가 된다는 그 이야기잖아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뭐든지 해도 되는 네가 된다’는 그 말입니다. ‘옛날에는 그것을 하나님만이 갖고 있었지만 너도 그것 따먹으면 하나님이 된다.’ 그렇게 되거든요.

그러다 보니 국가에서 백성이나 왕이나 전부 다 자기 마음먹은 대로 욕심대로, 욕망대로 다들 그렇게 하고 싶어요. 다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 국가는 뭐냐? 내가 자유롭게 되는데 있어서 그 나 같은 나들이 굉장히 많아요. 신들이 되고 싶어 환장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인구가 5천만이라면 5천만 전부가 각자 각자 신들이 되고 싶어요. 다 자유자가 되고 싶어요.

그 자유자가 되고 싶은데 누가 나를 힘들게 하느냐? 내가 자유자가 되려고 하는데 나 같은 그 나들이 나를 힘들게 하거든요. 그래서 그들을 쳐내든지 아니면 나에게 복종하게 하든지, 그것을 할 수 있는 자가 누구냐? 아까 말한 그 비어 있는 권력의 자리를 아달랴가 차지하면, 그래서 왕이 되면 그다음부터는 자기만 자유자가 나머지는 자기한테 굴복하겠지요.

북쪽의 예후가 여호와 이름으로 혼자 자유자가 된 거예요. 북쪽은 왕 혼자 자유자에요. 그런데 남쪽은 하나님이 자유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출애굽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탈출을 의미하는 겁니다, 탈출. 어디서 탈출이냐? 국가 자체로부터 탈출하자. 국가 자체로부터의 탈출을 어떻게 하는가? 이렇게 탈출하는 겁니다.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 아닌 자’로 탈출해요. ‘나’가 ‘나 아닌 자’로. 보통 세상에서 ‘나 아닌자’를 ‘남’이라 하잖아요. 남, 타인이라 한다는 말이지요. ‘나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 안 돼요. 내가 저 사람처럼 되는 그 남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너’가 있는데 ‘너 아닌 자’가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남이 되지 말고, 네가 부러워하는 남이 되지 말고 ‘너 아닌 자’가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이냐? 이미 나는 선악을 알기 때문에 자유자이고 싶어요. 그것을 떠나야 해요.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이것이 행복이다.’ 바로 그 사고방식에서 떠나야 돼요. 떠나는 방법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없어서 권력이 센 왕한테 아부하고, 빌빌 기면서 나름대로 소박한 자유다, 하지만 언제 최고 권력자가 나를 죽일지를 알 수가 없어요. 불안불안해요.

그러니까 인간은 ‘나 아닌 자’ 되는 데 실패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남쪽의 경우에 누가 있느냐? 열왕기하 11장 10절을 봅시다. “제사장이 여호와의 전에 있는 다윗왕의 창과 방패를 백부장들에게 주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다윗이 나와요. 4절에 “제 칠년에 여호야다가…” 여호야다는 누구냐 하면, 제사장입니다.

여러분, 제사장은 왕이 아니에요. 제사장은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에 들어간다는 것은 내가 누구를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 아니어야 비로소 하나님과의 만남이 된다’라는 것을 아는 자가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에 들어설 수가 있습니다.

성전에서 뭘 만나느냐 하면, 나 아닌 분이 나에서 못 벗어나는, ‘국가에서 못 벗어날 뿐만 아니라 나로부터도 못 벗어나는 나를 탈출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성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먼저 아는 사람이 제사장이에요. 탈출입니다, 자유가 아니고 탈출이에요.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에는 애굽에 있었어요. 애굽에 있을 때 그들은 탈출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냥 애굽에서 행복하게 잘 살기를 원했어요. 그래야 내가 원하는 것은 행복이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행복이니까 ‘바로 왕께서 자비를 베풀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더라도 행복하게 해 줬으면 좋겠다.’ 그걸 원했던 거예요.

그런데 모세가 오니까 그 바로왕이 자기 화에 받쳐가지고 애굽을 점점 더 속박했어요. 있는 자유도 뺏어버렸어요. 전에는 짚을 주고 벽돌 만들라 했는데 짚도 주지 않고 벽돌 만들라 하면서 숫자는 그 전의 숫자대로 다 채우라 할 때에, 악에 받친 거죠, 바로왕이. 그런데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만든 거예요.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유를 찾지 말고 탈출하라는 거예요, 탈출!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탈출할 마음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어린양이 피를 바르라’ 했습니다. 어린양이라 하는 것은 내가 아니에요. 나 말고 ‘다른 무엇’이에요. 하나님께서 어린양을 보냈다는 말은 생명나무 쪽에서 무언가 움직였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일을 계획해서 움직인 거예요. 생명나무와 격리됐는데 이쪽 선악과 쪽에서는 탈출이 안 돼요.

탈출이 안 되니까 하나님께서 생명나무 쪽에서, 선악과에 매여 사는 하나님의 백성을 찾아오는 거예요. 생명나무 어린양으로. 그 어린양이 찾아올 때 어린양은 그냥 찾아오지 않았어요. 어떻게 찾아왔는가?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접합지점에서 하나님께서 계획한 것은 뭐냐? 이 선악과, ‘정녕 죽으리라’ 하는 이 악마가 다스리는 세계에서, 생명나무에서 오는 쪽을 죽여버립니다.

죽여버리면 여기 뭐가 나오느냐? 피가 나와요, 피. 피가 나온다고요. 그 피를 하나님이 유도해서 피 흘리는 어린양을 애굽에 보냄으로 말미암아 생명나무의 질서가, 영생의 질서가 이미 여기 ‘선악과 질서 속에 접해 있다, 드디어 도착했다’를 알리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이게 ‘피’에요.

그 어린양의 피를 반복적으로 모시는 작업을 하는 자가 누구다? 제사장입니다! 지금 남쪽의 혁명은 왕이 한 게 아니에요. 장군이 한 게 아니고 제사장이, 여호야다 제사장이 한 거예요. 평소에 칼 들지도 않는 그 사람들에게, 그 관할하는 사람들에게 뭘 나눠주느냐? 창과 방패를 나눠주는데 그게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다윗왕의 창과 방패예요(왕하 11:10).

‘다윗왕의 창과 방패를 줬다.’ 그러면 그 이야기를 모른다 치고 제가 먼저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사장이 준 창과 방패를 들고 군대를 동원해서 아달랴를, 바알 신을 섬기는 여왕을 죽였다. 그래서 정권 잡았다.’ 이야기가 이렇게 돼버리면요, 이거는 북쪽하고 똑같아요. 국가로부터 탈출해야 되는데 국가로부터 탈출이 된 게 아니고 다른 권세자가 혁명에 성공한 셈이 돼죠, 혁명에 성공한 셈이 돼요.

여러분, 내란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시죠. 계엄해도 내란이 돼요.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시겠죠. 계속해서 인간은 탈출이 없어요. 그냥 목숨 살려달라고 구걸하는 조건하에 이 땅에서, 국가 밑에서 사는 거예요. ‘예, 전기세 잘 낼 테니까 좀 살려주세요.’ 이런 거예요. 국가 밑에서 탈출이 안 된다고요. ‘약간의 자유만 주신다면 고맙게 여기겠습니다.’ 이게 인간이 살아가는 요령입니다, 인간들이. 생명 없어요. 영생 없습니다.

어떻게 하느냐? 12절에 해답이 나옵니다. “여호야다가 왕자를 인도하여 내어…” 그러니까 태어난 지 한 1년이 된 거예요. 그 후로 6년 동안 통치했으니까 나중에 요아스가 여호야다에게 나올 때 21절에 보면, “요아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칠 세였더라.”

한 살 때부터 6년 동안 통치받고 1+6=7, 7년 만에 이제 왕이 되는데 그 6년 동안 왕의 권력이 공백 기간이었고, 계속 12절을 이어서 보면 “…면류관을 씌우며 율법책을 주고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매…” 율법책을 주고! 그러니까 이거는 인간이 왕이 되는 게 아니에요. 율법이 왕이 되는 거예요, 율법이!

율법이 왕이 되고,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율법이 왕이 되고, 그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분이 인물로 나타난, 인격으로 나타난 율법의 완성이 누구냐?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에요. 왕은 이미 지정됐어요. 왕은 지정됐는데 조건이 뭐냐? 모든 율법을 다 이룬 왕이 지정되어 있습니다. 지정되어 있고, 신약에 예수님이 올 때까지 왜 인간의 왕들은, -여호와 믿습니다, 교회 다닙니다, 해도- 결국은 그들은 뭐냐 하면은 인간 권력, 인간 권력 중심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탈출…,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왕입니다. 내가 대통령입니다. 대통령이라면 TV에 나올 때마다 “여러분, 저 대통령 그만하라고 해주세요. 실제로 왕은 우리 주님이 왕인데 왜 자꾸 내가 대통령 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다음 5년 기다리지 말고 국민들이 일어나서 대통령 쫓아내고 ‘주님이 왕이시다’ 이렇게 좀 이야기해 주세요”라고 할 사람 누가 있습니까? 저는 시켜주면 합니다만. 이왕 안 되는 거 말은 못 합니까?

나 아닌,… 왕이 돼도 좋아요. 하지만 ‘내가 왕이 아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윗이 시편에서 이야기 했어요. 다윗이 언제? 왕 되고 난 뒤에? 아니요. 쫓겨 다니면서. 왕은 왕인데 왕답지가 않아요. 사울 왕에게 쫓기면서, 쫓기면서 “여호와는 나의 왕이시니…” 자기는 왕이면서도 계속 왕이 아니래요. 누가 왕이냐? 여호와가 왕이라는 거예요.

그런 위인이 이 세상에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기존에 인간의 왕에게, 눈에 보이는 왕에게, 국가에 물들은 ‘나’로부터 ‘나 아님’ 쪽으로 탈출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이 탈출이 안 되는데 아까 본 그 요한계시록의 악마에 의해서 주님이, 진짜 왕이 살해를 당합니다. 그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라고 하거든요. 요한계시록 전반에 걸쳐서.

예수님이 살해당함으로 말미암아 “그 피가, 생명나무가 너를 건지러 왔다.” 이게 바로 옛날에 출애굽할 때, 탈출할 때 어린양의 피가 신약에 오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세례요한은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그 세례요한이 이야기했던 어린양은 나중에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잖아요. 이게 바로 레위기 17장에 나오는 예언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성전에서 흘린 피가 인격화될 때, 바로 그분이 우리 왕인 걸 알면 그 사람은 바로 ‘생명의, 영생의, 선악에 관계없이 –선악은 잊어버려야 되니까- 생명의 왕에게 복속된 하늘나라의 새로운 백성이다.’ 이런 공식이 확립되는 겁니다.

선악은요, 반드시 탈출을 원하는 게 아니고, 선악은 자기가 돛대고 신이고 ‘내가 자유자다.’ 그걸 외치게 되어 있어요, 선악을 알게 되면. ‘나 봐라, 별로 악한 거 아니잖아. 나 착하잖아. 착하니까 나는 내 마음대로 해도 하나님이 착한 나니까 하나님께서 복 줄거야.’ 이거는 자기가 으스대면서 ‘신’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신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나 아닌 자리로 이동을 못 하고 있는 거예요, 나 아닌 자리로.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는 죄인으로서 목사가 된 거예요. 왜?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거기 때문에. 따라서 목사로 하여금 죄인되게 하시는, 설교하고 강의하는데 쭉 죄인되게 하시는 것은 누구 몫이냐? 바로 주님께서 설교를 통해서 그 사람의 죄인 됨을 확인시켜 주는 겁니다.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도 ‘나 설교 들었으니까 나는 대단하다.’ 이게 아니고, 설교 들으면 들을수록 세상 권력에서 빠져나오는 이 모습이, 이게 바로 ‘예수님께서 피를 가지고 대신해야 될 죄의 모습이구나’를 발견하는 거죠.

그래서 끝으로 말씀드리면 신약의 성도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제사장’(벧전 2:9)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예수님이 ‘왕’인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보면 돼요. “율법 가지고 튀자! 탈출하자!” 율법책 따라서 탈출하자. 그 탈출의 환경이, 예수님을 맞이한 환경이 바로 구약 때부터 서서히 남쪽 유다 나라를 통해서…, 그다음에 어떤 왕이 세워져도 그 왕은 다시 또 권력 위주입니다. 다시 또 자기가 왕이다, 이렇게 나와요.

그걸 계속 제거하면서 어떤 인간도 예수님만 한 완전한 왕은 그 앞서 어떤 왕도 없었다, 앞으로도 없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율법의 완성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힘이 된다는 거, 능력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우리를 구원했다는 그 접합점의 증거가 바로 제사장들이 들고 갔던 그 어린양의 피였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우리가 알아서, 주께서 원하는 것은 탈출인 것을 새삼스럽게 우리가 감사하고, 탈출된 자로서 주님이 왕이라고 늘 고백하는 행복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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