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버스
2026년 8월 5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10:18-19
(10:18) 예후가 뭇백성을 모으고 이르되 아합은 바알을 조금 섬겼으나 예후는 많이 섬기리라
(10:19) 그러므로 내가 이제 큰 제사를 바알에게 드리고자 하노니 바알의 모든 선지자와 모든 섬기는 자와 모든 제사장들을 한 사람도 빠치지 말고 불러 내게로 나오게 하라 무릇 오지 아니하는 자는 살리지 아니하리라 하니 이는 예후가 바알 섬기는 자를 멸하려 하여 궤계를 씀이라
외부적으로 나타난 현상만 보면 예후 왕은 참으로 하나님의 지시에 충실히 따랐던 사람처럼 보일 겁니다. 하지만 그는 자아를 버릴 생각을 못합니다. 즉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과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다는 것을 자기 선에게 같이 보았습니다. 자아가 있는 인간들은 모든 해석을 자아의 정당함에 근거해서 내리게 마련입니다.
예후에 의해서 진행되는 바알 세력 척결과 일망타진 작업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자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애초에 엘리야의 예언에 나오지도 않는 인물입니다. 우선 열왕기상 19:16-17을 통해서 예후의 받은 사명이 무엇인지를 봅시다.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바알종교 척결을 예후 선으로 온전하게 완료가 된다면 굳이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라는 말씀이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후가 실시하는 바알 종교의 창산 작업을 유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허점을 갖고 있는지 말입니다. 건성으로 보게 되면 바알 종교는 완벽에 완벽에 도달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후가 바알 신봉자들을 일망타진하는 법령에서 모순점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큰 제사를 바알에게 드리고자 하노니 바알의 모든 선지자와 모든 섬기는 자와 모든 제사장들을 한 사람도 빠치지 말고 불러 내게로 나오게 하라 무릇 오지 아니하는 자는 살리지 아니하리라 하니 이는 예후가 바알 섬기는 자를 멸하려 하여 궤계를 씀이라”는 대목에서 달리 말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떨까요? “저 예후왕도 바알 종교를 무척 좋아하고 장려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저와 같이 대규모 바알 섬기는 행세에 많이들 참가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입니다. 바알 섬기는 자들 보기에 참으로 예후가 바알을 지극정성으로 섬기고 우호적 태도를 갖고 있다면 ‘참석하지 않는 자는 다 죽인다’는 엄포는 불필요한 겁니다.
왜냐하면 같이 바알을 섬기기를 좋아한다면 동료 의식에 입각해서 말해해도 겁박주지 말고 부드럽게 우호적으로 권유해야 바알 섬기는 자들이 심리적으로 안심놓고 편하게 바알 집회에 참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후의 트릭은 허점이 있는 트릭입니다. 그렇다면 왜 ‘참석하지 않으면 죽인다’는 협박성 멘트를 날려야 했을까요?
그것은 그의 마음이 바알 종교 척결보다 우선되는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왕 권위의 단호함을 이 기회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강하게 어필하기 위함입니다. 백성을 향하여 그 어떤 명분이든 ‘죽인다‘는 강압적인 명령을 내린다는 것은 일이 마감되고 난 뒤, 백성들 전부가 왕의 권세 밖으로 감히 빠져나갈 생각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함입니다.
쉽게 말해서 권력욕에 환장한 사람입니다. 여호와의 계시를 받았다는 것을 명분으로, 이후에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대드는 자는 다 죽인다‘가 아니라 ’여호와 믿는 것을 정책으로 내세운 이 예후에게 대드는 자는 다 죽인다‘는 식으로 권세가 계속 효력을 발휘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겁니다.
예후는 자아가 기대한 상황 외에, 그런 자아를 바라보는 다른 외부 상황을 놓치고 있습니다. 반면에 예후와 더불어 바알 척결 작업에 참여한 자를 봅시다. 그 사람은 여호나답입니다. 이 사람은 애초에 예후가 예상못한 사람이지만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예후가 거기서 떠나가다가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이 맞으러 오는 것을 만난지라 그 안부를 묻고 가로되 내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과 같이 네 마음도 진실하냐 여호나답이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가로되 그러면 나와 손을 잡자 손을 잡으니 예후가 끌어 병거에 올리며”(왕하 10:15)
이 사람의 정체에 대해서 예레미야 35장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후손에 의해서 여호나답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을 대하는지가 증언됩니다. 여호나답은 어떤 특별한 노선에 해당되는 인물입니다. 그 노선은 레갑의 노선입니다. “내가 레갑 족속 사람들 앞에 포도주가 가득한 사발과 잔을 놓고 마시라 권하매
그들이 가로되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겠노라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영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도 재배치 말며 두지도 말고 너희 평생에 장막에 거처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우거하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 하였으므로
우리가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의 우리에게 명한 모든 말을 순종하여 우리와 우리 아내와 자녀가 평생에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거처할 집도 짓지 아니하며 포도원이나 밭이나 종자도 두지 아니하고 장막에 거처하여 우리 선조 요나답의 우리에게 명한 대로 다 준행하였노라”(렘 35:5-10)
이들 레갑족속에 속한 자들은 이 땅에 대한 기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자아를 외부에서 보는 그 분의 안목을 공유하는 자들입니다. 마치 서울에 있는 학교에서 경주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버스를 탔는데 버스가 목적지 경주에 도달하기 전에 대구가 좋다고 대구에 다 내려버리면 경주에 도착하지 못한게 됩니다.
성도가 만일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에 가려면 갈수록 천국의 모습이 눈에 들어와야 합니다. 천국의 모습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보좌‘입니다. 즉 백성 백성을 위해 처참하게 희생당하신 그 희생을 모습을 같이 공유하는 자가 천국 백성일 겁니다. (계 5:7) 이것은 성도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성공과 실패를 가름하는 것을 벗어나게 하십니다.
쉽게 말해서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의 나사로였습니다. 그리고 변화산에 등장한 엘리야와 모세는 홀로 산 사람들이 예수님과 더불어 함께 움직인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류의 사람들이 레갑족속의 속한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렘 35:19) 이들은 예후과는 달리, 오로지 율법이 결국 도달하는 그곳을 향해서 항상 땅에서 발을 뗄 준비를 하면서 사는 자들입니다. 구원 버스 중도에 내리지 마세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자신을 땅에서 죽은 자로 간주하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6강-열왕기하 10장 18-19절(구원 버스) 260805-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10장 18절에서 19절까지입니다.
열왕기하 10:18-19
“예후가 뭇백성을 모으고 이르되 아합은 바알을 조금 섬겼으나 예후는 많이 섬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큰 제사를 바알에게 드리고자 하노니 바알의 모든 선지자와 모든 섬기는 자와 모든 제사장들을 한 사람도 빠치지 말고 불러 내게로 나오게 하라 무릇 오지 아니하는 자는 살리지 아니하리라 하니 이는 예후가 바알 섬기는 자를 멸하려 하여 궤계를 씀이라.”
예후가 바알을 섬기는 자를 척결하라는,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예언을 듣고 이제는 실천에 옮깁니다. 옮기는데 권력이 있어야 하겠지요. 이미 자기는 왕의 권력을 차지했습니다. 권력을 이미 차지했으니까, 왕으로서 백성들에게 얼마나 인기를 얻느냐가 그에게는 급선무가 아니었고, 왕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지시를 실행에 옮기는 일이 예후에게는 급선무였습니다.
그래서 예후는 북이스라엘 가운데서 바알을 섬기는, 바알을 선전하는 모든 선지자와 바알에게 제사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기능자들, 제사장들, 그리고 그 추종자들, 권력자들을 다 한곳에 집결시켜 놓고 부하 80명을 밖에 둬서 제사가 끝나면 모조리 다 죽이는 걸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게 열왕기하 10장 24-27절에 나옵니다.
“무리가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려고 들어간 때에 예후가 팔십 인을 밖에 두며 이르되 내가 너희 손에 붙이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도망하게 하는 자는 자기의 생명으로 그 사람의 생명을 대신하리라 하니라 번제 드리기를 다하매 예후가 호위병과 장관들에게 이르되 들어가서 한 사람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죽이라 하매 호위병과 장관들이 칼로 저희를 죽여 밖에 던지고 바알의 당 있는 성으로 가서 바알의 당에서 목상들을 가져다가 불사르고 바알의 목상을 헐며 바알의 당을 훼파하여 변소(화장실)를 만들었더니 오늘날까지 이르니라.”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하나님의 예언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예후의 입장에서는 ‘이만하면 하나님 일에 충실히 순종했으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나는 하자가 없다’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트릭은 왜 쓰느냐?’에요. 성경에는 궤계를 썼다고 되어 있는데 거짓말을 해서 한 집단으로 모으는데 그 모으는 방법에 있어서 예후가 모순적인, 정신없이 그런 소리를 한 것인지 뭔가 잘못되게 이야기를 한 것이 있어요.
열왕기하 10장 19절을 다시 보게 되면, ‘나는 너희들보다 더 바알을 더 잘 섬기는 왕이 될 것이다. 그러니 전국에 바알을 섬기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 다 오게 하라. 같이 제사하자’라고 궤계를 쓰면서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오게 하라’ 했는데 그다음 말입니다. “무릇 오지 아니하는 자는 살리지 아니하리라.”
이 말이 지금 예후가 하려고 하는 것과 안 맞아요. 다시 말해서 ‘바알을 섬기는 사람들 다 나와서 바알을 섬기게 되면 내가 당신네들 만큼은 살려주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습니다’라고 할 정도로 바알 섬기는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거짓말을 했지요. 그런데 ‘그 설득에 넘어가지 않은 바알을 섬기는 사람들이 있다면 예후가 살리겠는가, 아니면 죽이겠는가?’ 하는 문제가 남아요.
예후의 설득에 넘어가지 않고 몰래 빠지는 사람이 있다면 나중에 그 사람도 찾아내서 죽일 거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앞에 트릭을 굳이 쓸 이유가 없어요. 노골적으로 솔직하게 이야기해야지요. “나는 이제 여호와만 믿습니다. 따라서 바알 섬기는 사람은 여호와의 명대로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알 섬기는 사람들을 찾아서 죽이는 것과, “내가 바알을 잘 섬기겠습니다. 우리 한곳에 모입시다.” 해서 죽이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지요.
제가 굳이 시비 거는 것처럼 하는 이유가요, 지금 예후는 자신의 권력욕의 의도가 하나님의 통치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손으로 북이스라엘을 통치하겠다는 욕망을 여호와를 빙자해서 그것을 정당화하고 있는 거예요. 정당화하는 그 방법이 뭐냐? 왕이 ‘뭘 안 하면 다 죽인다’라는 법령을 정한다는 말은, 그 법 자체가 자기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거예요, 자기 통치를.
그런데 예후는 ‘바알을 섬기는 자는 내가 용납하지 않겠다’라는 정체를 나중에 드러냄으로써 ‘이 권력은 여호와 때문에 사용하는 것이지 결코 이 권력에 욕심이 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라는 식으로 여호와께 변명조로 나와버려요. 그래서 다른 사람 보기에 하나님의 일에 충실한 것 같지만 실은 내심 남을 통치하고 지배하는 그 쾌감에 자기가 지금 홀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트릭을 쓴 거예요. “나는 왕이다. 이제부터 바알 섬기면 죽인다.” 이러면 될 문제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내가 바알을 누구보다 더 섬기거든요! 나랑 같이 바알을 섬깁시다.”라고 트릭을 쓰는데 그렇게 되면 그 뒤의 말이 없어야 해요. “나는 바알을 섬기는데 나처럼 바알 섬기는 사람 다 오세요. 바알 안 섬긴다면 할 수 없고요. 그것은 각자 자유에 맡기겠는데 나는 바알을 섬깁니다”라고 해야 이게 말이 부드럽게 연결되지 않습니까? 이게 앞뒤가 맞는 이야기잖아요.
“나는 바알을 섬기겠습니다. 만약에 같이 안 섬긴다면 죽입니다.” 그러면 ‘내가 당신 죽이겠다’라는 것이 바닥에 깔린 거예요, 아니면 ‘나는 바알 좋아합니다. 이제부터 바알을 잘 섬기겠습니다.’ 그게 우선 되는 겁니까? 누가 봐도 이것은 바알 섬기겠다는 것을 핑계로 대고 권력욕에 환장한 사람이고, 나중에 “실은 내가 여호와께 충성했거든요!” 하고 짜잔, 하고 자기 정체를 드러내서 바알 섬기는 자들을 죽이더라도 역시 남을 죽여서라도 내 권력의 통치에 하자가 없게 하는 그 본심이 더 강렬한 겁니다.
따라서 예후의 외부적으로 보이는 화려한 이것을 진짜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시면 안 되고,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따로 숨어 있어요. 숨어 있는 그 뜻이 뭐냐? 바알을 섬기는 그것을 정화하는데 있어서 1번, 폭력으로 한다. 2번, 진짜 여호와의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서 한다. 어느 쪽이냐 하는 거예요.
지금 예후는 어느 쪽이냐 하면요, ‘적이 있어서 그 적을 물리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된다’는 그러한 결과를 지금 자기는 획득하고 싶은 거예요. ‘어? 저거 바알 섬기네. 하나님, 저게 바알을 섬깁니다. 하나님의 적들이니 제가 하나님의 편에 서서 저 적들을 치겠습니다. 하나님의 원수를 쳤으니까 그러면 하나님과 내가 한 편 먹었다는 그것을 제가 받아들여도 괜찮겠지요?’ 이런 마음으로 바알 섬기는 사람을 척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자아를 굴복시킬 하등의 의사가 예후한테는 없어요. 말을 복잡하게 했는데 간단하게 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이 수학여행 간다고 버스를 탔어요. 서울에서 경주로 수학여행 간다고 버스를 탔는데 가다가 대구쯤 왔는데 “야, 여기 경치 좋네.” 하고 대구에서 우르르 내려버리면 어디에 도착 못 합니까? 원래 수학여행의 목적지인 경주에 못 가잖아요.
그렇지요? 성도가 되었으면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천국에 오도록 하나님의 언약으로, -구약 때는 언약이지요? 신약 때는 예수님의 복음으로!- 천국에 오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는데 소위 ‘우리는 천국 간다. 우리는 예수 믿는다. 십자가 피로 내 죄를 사하는 것을 인정한다’라고 하면서 실제 행동은, 경주라는 천국 풍경이 보이지도 않는데 대구가 풍경이 좋다고 거기서 다 내려버렸어요.
신앙생활 처음에는 복음 좋다 하면서 한 1, 2년 가다가, 또는 복음적인 교회가 좋다고 하면서 몇십 년 교회 다니다가 지금 가만 행동하는 것 보니까 눈에 보이는 그 광경은 천국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복 받아서 잘 먹고 잘사는, 이 땅에서 내가 대우받고 사는 여기에 홀린 거예요. 예후하고 똑같아요. 사사기에 나오는 이스라엘과 똑같아요.
“역시 하나님 믿으니 무탈하고 이렇게 여유 있게 사는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 하겠어요? “야, 그거 천국 아니야. 그것은 천국 광경이 아니야. 천국 모습이 아니라고!” “천국은 다음 버스로 가지요. 지금은 여기가 좋습니다.” 하고 그다음부터는 복음도 관심이 없고, 말씀도 관심이 없고, 우르르 내려서 자기 소망, 자기 기대에 푹 빠져서 예후같이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권력을 행사하고 그것 사용하는데 미치고 거기에 재미를 느끼고 있어요. 그래서 다 내려버렸어요.
참 한심스럽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에게 묻고 싶어요. 지금 당신이 탄 버스에서 보이는 광경은 어떤 광경이 보이십니까? “참 행복하기 그지없어요.” “뭐가 행복한데요?” “아~무 근심 걱정이 없네요.” 주님 보시기에 한심스러워서, “근심 걱정이 없는 게 천국이 아니고, 천국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아픔과 고통, 십자가가 점점 크게 보이는 그 광경이 보일 때 그게 바로 천국의 모습”입니다.
왜? 요한계시록에 보면, 일찍 죽임당하신 어린양의 모습이 눈앞에 등장할 때 버스 안내양이 “여기가 바로 천국입니다. 이제 내리세요. 우리 대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으니까,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이제부터 여러분의 자아, 여러분이 어떤 인간이라는 것은 일체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행복/불행, 성공/실패, 천국에서는 일체 거부합니다. 예수님께서 고통스럽게 죽으신 그 어린 양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여러분의 수학여행입니다.” 하면 거기서 내려야지요, 거기서.
예수님의 고통과 아픔,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 나의 행복을 덮을 정도로, 내 행복 추구가, 내 만족스런 인생 자체가 아예 사라지도록 그게 덮이는 광경으로 나타나야지요. 천국 다 오지도 않았는데 다 내려버렸어요. 다 내렸어요. 말씀에 관심도 없고 복음에 관심도 없어요. ‘나는 이 조시로 그냥 편안하게 살래.’ 이것만 남아 있어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정리하면, ‘예후는 자기의 외부가 보이지 않는다.’ 예후는 자기의 권력을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사용하면서 자기가 이 모든 절차를 끝내고 난 뒤에 자기에게 주어질 권력의 포만감, 넉넉함, 자기 힘이 있다는 거기에 만족할 마음 태세, 준비가 되어 있어요. ‘이것은 나의 세계다.’
그러나 천국은 나의 세계가 사라지고, 없어지는 세계가 천국입니다. 내 생각은 끼지도 못하는 세계가 천국입니다. 주님이 그동안 하신 일이 내가 해왔던 것을 완전히 뭉개버리는 세계가 천국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살고 있어요? 애가 많고 적고, 지금 그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것은 지금 대구 아닙니까? 경주가 아니잖아요. 수입이 적고 많고가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것은 은근히 기대하는 나의 내부 세계 아닙니까? 힘을 가진 나의 내부 세계라고요. 외부 세계가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과연 하나님의 뜻에 참여한 자 중에서 진정 하나님께서 심어놓은, 하나님 자신의 고통과 아픔을 갖고 있는 외부 세계라는 분이 과연 있느냐? 있습니다.
그게 열왕기하 10장 23절에 나와요. “예후가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으로 더불어 바알의 당에 들어가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15절에 보면, “예후가 거기서 떠나가다가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이 맞으러 오는 것을 만난지라 그 안부를 묻고 가로되 내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과 같이 네 마음도 진실하냐 여호나답이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가로되 그러면 나와 손을 잡자 손을 잡으니 예후가 끌어 병거에 올리며” 이렇게 해서 예후가 여호나답이라는 인사를 영접했어요. 여기는 ‘여호나답’인데 ‘요나답’이라는 것도 같은 이름입니다.
예후가 여호나답을 자기 사람으로 끌어당겨서 여호나답과 함께 바알의 잔당을 소탕합니다. 그러나 여호나답 이 사람들은요, 예레미야 35장 2-10절에 보면, 이 사람들은 예후하고 달라요. 자기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가, 거기에는 관심조차 없어요. 전혀 비권력적입니다. 내 소유의 권력이라는 것은 아예 생각도 안 해요.
그저 하나님의 이 말씀, 율법, 나중에 메시아 오시면 완성되는 그 약속의 노선안에 그냥 접어드는 그것으로 자족하는 사람이 이 레갑 족속의 여호나답이에요. 성경에서 이 레갑 족속은 드문드문 등장합니다. 그런데 등장하는 그 시점은 이스라엘이 거의 백 프로 하나님에게 버림받는 그 계기에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도 있다’라고 소개할 그때 레갑의 자손이 나와요.
그냥 말로 하지 않고 제가 그 대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예레미야 35장 2절부터인데요. 1절에,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때에 여호와께로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라고 되어 있고요. 2절에 “너는 레갑 족속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을 여호와의 집 한 방으로 데려다가 포도주를 마시우라.” 하나님께서 일부러 테스트를 해요.
그래서 예레미야가 시키는 대로 레갑 족속에게 갔어요. 3-5절에, “이에 내가 하바시냐의 손자요 예레미야의 아들인 야아사냐와 그 형제와 그 모든 아들과 레갑 온 족속을 데리고 여호와의 집에 이르러 익다랴의 아들 하나님의 사람 하난의 아들들의 방에 들였는데 그 방은 방백들의 방 곁이요 문을 지키는 살룸의 아들 마아세야의 방 위더라 내가 레갑 족속 사람들 앞에 포도주가 가득한 사발과 잔을 놓고 마시라 권하매.”
예레미야가 레갑 족속에서 포도주를 권했습니다. 권하니까 6-7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들이 가로되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겠노라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오늘 본문 열왕기하 10장에 나오는 그 여호나답이지요? “…우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영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도 재배치 말며 두지도 말고 너희 평생에 장막에 거처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우거하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 이건! 이 레갑의 자손들이 하는 이 수학여행은 무슨 수학여행이에요? 천국 볼 때까지 나는 버스를 중간에 스톱시키지 않겠다는 거예요. 포도주도 안 마시겠다, 이 땅에 집도 안 짓겠다, 파종도 하지 않겠다, 포도원도 재배하지 않겠다, 그러면 뭐 어떻게 살려고? “뭐 집도 짓지 않는다면 당신네는 어디에 거주하는데?” “우리는 평생 장막에 거주하겠습니다.”
‘텐트치고 살겠다고?’ 이동용 캠핑카 비싼데요? 한 3억 할 텐데요. 그런 뜻은 아니겠지요. 이 땅에서 유람하는 재미로 살지는 않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포도주 안 먹겠다 하니까 하나님께서 딱 예레미야에게 나타나서 “봤지? 네가 들었지? 요나답을 선조로 하는 그 레갑 족속이 이 시대에 어떻게 너에게 바라는 것을 예레미야야 네가 똑똑히 들었지?”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그들로 하여금 포도주를 마시우라고 이야기했습니까? 지금 레갑 족속 말고 예레미야 그 당시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뜻도 무시 정도가 아니고 아예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그냥 이방 민족이 살아가는 그것처럼 ‘내가 끌어모은 힘 가지고 눈에 보이는 이 땅에서 행복하게 편하게 한 번 살아보련다. 호강하는 이것이 인생 성공이 아니냐?’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도외시하고 전부 다 이방 민족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했던 거예요.
그것을 내부가 아니라 외부, 곧 이스라엘과 함께 살면서도 이스라엘 내부에 거주하는 사람이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마치 이 땅을 늘 떠나야 할, -집도 없고 포도원도 없고- 늘 떠나야 할 그러한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천국 가는 운반체로 씨앗 뿌리듯이 그 땅에 뿌려놓은 거예요.
그래서 예레미야로 하여금 “레갑 족속에게 가서 대조를 해봐라.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우기고 유대인이라고 우기는 그 사람들, 여호와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완전히 바알을 섬기는 그들과, 진실로 여호와의 말씀 하나 붙들고 살아가는 레갑 족속과 한번 대조를 해봐라. 내가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는 그 이유를 그제야 알 것이다. 가나안 땅에 산다고 해서 그거 이스라엘 아니야! 레갑 자손같이 그 땅에 같이 살면서도 ‘이 눈에 보이는 땅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런 마음 자세로 살아가는 자가 하나님 여호와의 계명에 부합되는 사람이다.”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예레미야 35장 18-19절에서, “예레미야가 레갑 족속에게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 선조 요나답의 명령을 준종하여 그 모든 훈계를 지키며 그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행하였도다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자, 이 뒤에 ( ).
하나님께서 레갑 자손에게 보상을 주시는 겁니다. 그 보상이 뭐냐는 거예요, 그 보상이. 그 보상이 뭐냐 하면,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이게 보상이에요. 이게 보상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요, 이 말이 무슨 말인지를 알기 쉽게 하려고 제가 누가복음 16장을 찾아봤어요.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천국과 지옥을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지상에 있을 때는 부자로 있었던 사람이 있었고요, 그 집 앞에 거지 나사로가 있었어요. 지상에서는 누가 봐도 부자라는 그 사람, 그리고 그 집 앞에 있는 거지 나사로라는 또 한 사람, 이렇게 부자와 거지라는 그 둘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6장 22-23절에,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라고 되어 있고요, 그다음에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있다고 했어요.
이 차이를 보세요. 거지 나사로는 그냥 ‘천국에 갔다’가 아니라 누구의 품 안에 들어갔어요. 누구의 품 안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창 12:3)겠다고 한 그 아브라함, 아브라함 품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복 받을 사람을 이 땅에 거지꼴로, 나사로 꼴로 하나님께서 남겨뒀다가 이 땅에서 죽으면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복 받은 사람으로서 아브라함 품에…, 그러니까 거지 나사로가 혼자가 아니었어요.
아브라함 품에 영원히 천국에 있고, 반면에 부자는 지옥 가니까 달랑 자기 혼자만 남았어요, 자기 혼자만. 평소에 이 땅에 살 때 ‘하나님, 눈에 보이지 않는 나의 외부 되는 분을 내가 보고 싶어요. 그분, 나 때문에 상처 입고 고통당하신 주님이 보고 싶어요. 나는 그분의 품 안에 있다는 것을 내가 확인하고 싶어요.’ 그런 마음으로 산다면 그 사람의 수학여행은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경주까지 가요.
그런데 처음에는 “예수님의 은혜로…” 어쩌고 하면서 중얼중얼, 대다가 나중에 대전 지나서 대구쯤 오니까 ‘아, 신앙생활 왜 이리 지겹노! 언제까지 참아야 해? 예수고 뭐고 다 아는 거 그만 치우고 그냥 남들 사는 것처럼 세상 재미나게 여유 있게 살면 그게 사람 사는 행복이 아니냐?’ 이래가지고 차에서 주르르 다 내려버렸어요, 다 내렸다고요.
열왕기상 19장 16-17절에, 하나님께서 예후에게 엘리야를 통해서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흘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그렇다면 이 예후가 바알의 선지자들을 몰살하는 데 있어서 그 칼을 휘둘렀는데, 그 칼을 피하는 자가…, 예후는 다 죽였다고 했거든요. 다 죽였다고 했는데 예언에 의하면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가 남아 있어요. 남아 있는데 그 남아 있는 자를 누가 처리하느냐 하면, 엘리사의 칼이 처리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예후와 엘리사의 차이가 뭐냐? 엘리사는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서 이 나라를 통치한다는 명분을 앞장세웁니다. 그런데 예후는 자기 외부에 누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자기가 상대해야 할 적들, 나의 위신과 자존심을 키워줄 이 적들 쳐부수는 데 거기에 정신이 몰두되어 있습니다. ‘저것만 이기면 나는 스타다. 나는 승리자다.’ 얼마나 이 자아성에 확고한지요.
대외적으로 ‘나는 하나님 앞에 충성한다.’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내가 자기 바깥 누구의 품에 안겨야 되는지, 그것은 전혀 고려 안 해요. 자기 정당성이에요. ‘나 하나님의 명을 받아서 하나님의 일을 했다. 뭐 어쩌라고? 내가 잘했잖아.’ 그런 거예요. 그런데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줄줄 흘리고 다녔어요. 그걸 누가 마감하느냐? 엘리사가 죽입니다.
그러면 엘리사는 혼자였을까요, 아닐까요? 여기서 ‘엘리사의 스승은 혼자였을까요, 아닐까요?’라는 질문으로 넘어가야 돼요. 엘리사의 스승이 누구냐? 엘리야입니다. 엘리야가 죽을 때 레갑 자손과 마찬가지예요. 엘리야는 시체가 이 땅에 없어요. 왜? 땅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의 설교의 결론은 간단해요. ‘여러분, 땅의 사람입니까, 땅의 사람 아닙니까?’ 이 질문과 통해요. 요한복음 3장 같아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요 3:6). 그런데 육의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가 없습니다.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늘나라 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요 3:6).
자,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땅의 사람입니까, 하늘의 사람입니까? 요한복음 3장의 질문을 열왕기하에서 동일하게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엘리야, 엘리사 다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 바로 마태복음 17장 변화산 이야기에요. 변화산 이야기 하도 많이 했는데 많이 해도 수학여행 가다가 대구에서 다 내려서 또 잊어버릴 수가 있기 때문에 다시 말씀드립니다.
마태복음 17장 1절에,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분명히 여기에는 예수님 한 분과 그리고 제자 3명, 총 네 명이 올라갔어요. 그리고 변화산이라는 그 땅, 저도 가봤어요, 변화산이라는 그 땅에 올라가면 항상 네 명이 있어야 해요. 올라갔는데 거기에 추가적으로 몇 명이 더 등장했느냐 하면, 두 명이 더 등장했어요.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마 17:2-3).
네가 거기서 왜 나와? 모세, 엘리야가 왜 나옵니까? 모세 엘리야가. 여러분, 단어에 이런 단어가 있어요. ‘현실’이라는 단어가 있고 ‘실재’라는 단어가 있는데, 영어로서는 구분이 안 돼요. Reality 또는 Real. 문맥상 구분해야 하는데, 현실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으로 눈에 보이는 것의 총합, 이게 현실입니다. 느끼는 것.
그런데 ‘실재’라는 것은 인간의 의식에 포착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하는 것을 ‘실재’, Reality, 이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 자기가 개인적으로 의식되는 것이 다인 줄 알고 있어요. 그렇게 다인 줄 알고 있으면 여러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처럼 놀라버려야 됩니다. 분명히 예수님 한 분, 우리 세 명, 4명이 돼야죠. 숫자로 one, two, three, four가 돼야 해요. 그런데 five, six가 왜 나와요, 거기에.
이게 뭐냐 하면, 너희들이 지금 천국 가는 버스에, 중간에 five, six가 나올 때까지 계속 타야 된다는 거예요. 눈에 보인다고 해서 그게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신앙생활 50년 했다, 복음 안 지 30년 됐다, 뭐 어쩌라고? 거기서 뭐 어쩌라고요! 점점 자기 생각 옅어지고 주님 생각이 더욱더 크게 떠오릅니까? 더 강화됩니까?
자기 외부가 있어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경험한 자기 기억 속에 있는 내부를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성도가 되었으면 갈수록 주님의 기억과 공유해야 된다.’ 주님의 기억과 공유해야 되는데 인간은 자기 기억, 그게 전부예요.
성경에 보면, 선악과 따먹었습니다. 이거는 주님이 알고 있는 기억이에요. 우리는 ‘에이, 그거는 몰라도 돼, 뭐. 옛날이야기인데.’ 이러고 말아요. 엘리야가 구름 타고 올라갔다. ‘에이, 옛날이야기인데.’ 예후가 자기 광기로 자기 권력에 미쳐서 사람들 다 죽였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있는데 분명히 같이 했던 그 자손이, -뿌리가 다르잖아요, 뿌리가- 그 여호나답이 있는데, 이거는 자기가 지금 철저하게, 자기가 다 했다고 설치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여호나답과 예후를 우연히 만나게 해줬을까요? 우연히! 예후가 가는 곳은 지옥이고 여호나답이 가는 곳은 천국입니다. 왜냐? 그 이유가 뭐냐? 근거가 뭐냐? 여호나답은 소원이 뭐냐? 어떤 품이 있어요, 품. 아브라함의 품처럼. 나를 품어줄 그 품을 나의 존재보다 강렬하게 느껴졌던 겁니다, 더 강렬하게.
자기 인생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실망하지 않아요. 집 계약을 했는데 사기를 당했어요. 실망하지 않아요. 분명히 국어 100점을 기대했는데 50점을 맞고요.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거는 내 기억 속에 있는 나의 세계잖아요, 나의 세계. 내 소망의 세계잖아요. 변화산에서 야고보와 요한과 베드로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나는 이 현실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실재 세계가 있었던 거예요.
내 의식에 포착되지 않았던, 그러나 주님의 기억 속에 있는 그런 세계. 그게 동행이죠, 동행. 또는 품. 거지 나사로가 거지로 살 때 얼마나 설움 받았겠습니까, 구박을 받았겠습니까? 심지어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 지옥에 있는 그 부자에게 무시당했어요. ‘어이, 저 나사로 좀 보내서 생수 좀 한 병 보내줘.’
끝까지, 지옥 가도 인간 안 되는 것은 인간 안 돼요. 지옥 가도 사람 안 됩니다. 왜? 자아밖에 모르기 때문에, 자기 세계밖에 모르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 고통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레일처럼, –레일이 두 가닥 있잖아요- 이 모든 일어나는 우리 삶에, 일어나는 사건 요소요소에 주님이 일하는 것과 다른 말로, 성령이 일하는 것과 육적인 내가 일하는 것과, 그걸 비교하고 대조시키고 대비하는 식으로 우리를 말씀으로 이끄십니다.
그 차이를 아는 사람은 꾸준히 천국 갈 것이고, ‘옛날에 좀 믿었는데…’, 하면서 자기만 보인다면 그 사람은 성령이 제기하는 그것에, 악마의 힘에 의해서 거기에 닿지를 못해서 성령이 가는 길 말고, 주님 가신 천국 말고 지옥으로 정신없이 가는 거예요. 그래 놓고는 ‘내 인생이 성공했니, 실패했니…’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어요.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신앙이란 방향 문제입니다, 방향. ‘지금 내가 어느 쪽으로 가고 있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어린 양 주님이 점점 더 크게 느껴지고, 더욱더 고마워지고, 더욱더 내 모든 근심 걱정을 덮을 정도로 큰 기쁨으로 다가오신다면 그쪽이 천국 쪽입니다. 천국, 주님이 기다리는 쪽이예요.
그런데 좀 인생 성공하고, 뭐 어떤 행운이 찾아오고, 자기가 좀 폈다고 해서 그거 신나서, ‘하나님, 뭐 내 아는 성경 아는 지식만 해도 이제 됐습니다.’ 이런 식으로 주저앉는 것은 수학여행 가다가 중간에 풍경 보고 좋아서 차에서 내리는 거밖에 안 돼요. 따라서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네 노선이 예후 쪽이냐, 여호나답 쪽이냐?’를 묻는 말씀, 사건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예후 쪽인지, 아니면 여호나답과 같은 노선에 있는 것인지를 우리가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느냐,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아까 제가 언급을 했죠. 예수님이 갖고 있는 기억을 공유해야 되지, 나 혼자 아는 기억을 주님께 알아달라고 억지를 부리면 안 되겠죠. 그래서 진짜 끝으로 고린도후서 5장 14절, 거기 보면 성령께서 오실 때 우리에게 무엇을 일러주느냐?
제가 고린도후서 5장 14절을 먼저 읽을게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를 앞장세우기 때문에 우리를 쪼개서 이미 죽었다고 간주하고 그 죽음 안에 주님의 기억이 살아있는지, 네 기억뿐인지를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 ‘대신하여’ 죽은 분이 우리 안에 같이 있으면 우리는 이미 아브라함 품 안에서 우리의 그 예후같은 육적인 것, 그리고 그것보다 더한 모든 죄가 모조리 죄로 들추어질 때, ‘아, 이 버스는 정말 내가 주인이 아니라 주님이 주인으로서, 주님의 기억이 우리를 천국까지 데려가는 그런 진행중에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만드는 그것이, 바로 이 살아있는 말씀의 위대함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 안다고 게으르지 말고 진정으로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해석되는 말씀의 위력, 찾아오는 성령의 위력을 늘 같이 맛보면서 이 힘들고 어려운 인생을 주와 동행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