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무대
2026년 7월 29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10:10-16
(10:10) 그런즉 너희는 알라 곧 여호와께서 아합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그 종 엘리야로 하신 말씀을 이제 이루셨도다 하니라
(10:11) 예후가 무릇 아합의 집에 속한 이스르엘에 남아 있는 자를 다 죽이고 또 그 존귀한 자와 가까운 친구와 제사장들을 죽이되 저에게 속한 자를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
(10:12) 예후가 일어나서 사마리아로 가더니 노중에 목자가 양털 깎는 집에 이르러
(10:13) 유다 왕 아하시야의 형제들을 만나 묻되 너희는 누구냐 대답하되 우리는 아하시야의 형제라 이제 왕자들과 태후의 아들들에게 문안하러 내려가노라
(10:14) 가로되 사로잡으라 하매 곧 사로잡아 목자가 양털 깎는 집 웅덩이 곁에서 죽이니 사십이 인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10:15) 예후가 거기서 떠나가다가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이 맞으러 오는 것을 만난지라 그 안부를 묻고 가로되 내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과 같이 네 마음도 진실하냐 여호나답이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가로되 그러면 나와 손을 잡자 손을 잡으니 예후가 끌어 병거에 올리며
(10:16) 가로되 나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 하고 이에 자기 병거에 태우고
인간은 태어나면서 누구나 자기 만의 무대를 꾸밉니다. 끊임없는 자신에게 살 가치나 존재할 가치가 본성적으로 작용하고 있기에 계기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성과 가치를 감출 생각이 없습니다. 즉 자기 존재와 활동의 정당성을 한시도 잊지를 못하고 삽니다. 북쪽 새 왕이 예후는, 이러한 자기 본성과 엘리야를 통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지시가 결합된 인물입니다.
자신의 활동함과 정당성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계시를 주었기에 거기에 대한 보답이나 반응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열심을 극도로 높이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다닙니다. 실제로 예후는 북이스라엘에게 바알을 섬기는 권력층을 제거하는데 원활하게 일이 진행된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는 열성이 지나쳐서 하나님께서 제거하라는 대상이 아닌 자들끼리 주저 없이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바로 아하시아의 가문의 조카, 42명이었습니다. 예후는 워낙 자신이 제대로 하나님의 일을 추진하기에 그 과정에서 제거 대상이 안 되는 자들을 제거한다고 해서 전체 일 진행에 문제가 없다고 본 겁니다.
하지만 예후가 모르고 있는 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자를 그냥 가만히 놔두어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늙어 죽게 되는 자들이 왜 예후 자신의 손에 조기에 죽게 하는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것은 ‘바알을 믿는 자’나 ‘여호와를 믿는 자’나 이미 다윗의 등불이 켜져 있지 않는 노선에 속한 자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저를 만나니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더라 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두 조각에 찢고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이는 저희가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숭배하며 그 아비 다윗의 행함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치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나의 법도와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함이니라
그러나 내가 뺀 내 종 다윗이 내 명령과 내 법도를 지켰으므로 내가 저를 위하여 솔로몬의 생전에는 온 나라를 그 손에서 빼앗지 아니하고 주관하게 하려니와 내가 그 아들의 손에서 나라를 빼앗아 그 열 지파를 네게 줄 것이요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왕상 11:29-36)
그렇다면 왜 예후는 ‘여호와 하나님께 열심있다’고 자부하고 나서는 것일까요? 그 역시 이미 북이스라엘 사람으로서 버림받아야 될 나라의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앞장세우고 나설 때 어떤 한계가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또한 예후 왕의 활동은 오늘날 신약 시대의 성도를 규정하는데 있어 제거되어야 될 요소로 보여주게 됩니다.
이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1.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
2.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
3. 주를 위해 사는 사람
예후는 자신을 3에 해당되는 ‘주님을 위한 사는 사람’으로 자처했습니다.(왕하 10:16)
3의 입장에서 보면, 1과 2의 사람들은 죽어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자신을 계속 살아 있을 만한 사람으로 주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또한 구약 사람의 한계이기도 합ㄴ다. 왜냐하면 그들 시대의 사람들은 다윗의 등불이 장차 신약 때에 곧 종말 때에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것을 여전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시편 115:1에서, 인간의 존재 이유가 분명히 나옵니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옵소서” 다니엘 때에 와서 다니엘은 인간 중 최고 지도자인 느부갓네살의 꿈을 낚아 채서 알게 됩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특심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단 2:31-35)
하나님께서는 인간은 결국 하나의 진흙으로 만든 물질에 간주하십니다. 따라서 인간은 상체에 신경 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지막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결국 인간은 바람에 날려가고 같은 물질이 돌이 날아와서 그 빈 자리에 태산을 이룹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꾸준히 자기만의 무대를 꾸면서 일생을 보냅니다. 그러나 사람의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람들이 도저히 극복하지 못하는 선언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요 어찌 저를 버리시니까”(마 27:46)
여기서 ‘어찌하여’란 말씀은 자신이 하나님에게 쓰이다가 버림받을 줄을 알지 못했다는 겁니다. 절망의 외침이죠. 이는 시편 22:1에서 다윗이 먼저 하나님께 외치 말씀입니다. 즉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쓰시다가 버리시는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점을 ‘버림받기 위해 쓰신다’는 알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은 없고 그냥 하나님께서 연출하시는 무대에서 버림받기 위해 쓰여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어느 누구도 예외없이 인간이라면 반드시 하나님 무대에서 그러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어서 탄생한 사람이 성도입니다. 성도는 1,2,3 과는 달리 4에 해당되는 분류입니다. 즉 “주님만이 살아 계시다”입니다.
이미 죽어서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연출하신 무대를 같이 관람이 가능한 자가 바로 오늘날의 성도입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 성도는 더는 자기 생각으로 사는 자가 아닙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죽은 자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6강-열왕기하 10장 10-16절(하나님의 무대) 260729-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10장 10절에서 16절까지입니다.
열왕기하 10:10-16
“그런즉 너희는 알라 곧 여호와께서 아합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그 종 엘리야로 하신 말씀을 이제 이루셨도다 하니라 예후가 무릇 아합의 집에 속한 이스르엘에 남아 있는 자를 다 죽이고 또 그 존귀한 자와 가까운 친구와 제사장들을 죽이되 저에게 속한 자를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 예후가 일어나서 사마리아로 가더니 노중에 목자가 양털 깎는 집에 이르러 유다 왕 아하시야의 형제들을 만나 묻되 너희는 누구냐 대답하되 우리는 아하시야의 형제라 이제 왕자들과 태후의 아들들에게 문안하러 내려가노라 가로되 사로잡으라 하매 곧 사로잡아 목자가 양털 깎는 집 웅덩이 곁에서 죽이니 사십이 인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예후가 거기서 떠나가다가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이 맞으러 오는 것을 만난지라 그 안부를 묻고 가로되 내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과 같이 네 마음도 진실하냐 여호나답이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가로되 그러면 나와 손을 잡자 손을 잡으니 예후가 끌어 병거에 올리며 가로되 나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 하고 이에 자기 병거에 태우고”
예후가 작심해서 북이스라엘에 친(親)바알 계열을 죽이는데 어떻게 죽이는가? 다 죽입니다. 왜 다 죽이냐? 남김없이 다 죽이는 이유가 뭐냐? 그는 여호와의 말씀이 자기에게 도달했고 자기는 그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는 것을 예후 자신의 손으로 이것을 성취하고 실현해야 되는 사명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10절에 “여호와께서 그 종 엘리야로 하신 말씀을 이제 이루셨도다”인데, ‘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데 있어서 엘리야를 통해서 내가 사명자로서 이 일 추진하는 것을 도중에 금지할 수 없다. 철저에 철저를 기하고 철두철미하게 여호와 믿는 사람 말고 바알 믿는 사람, 고관대작은 전부다 죽이는데, 하나님이 엘리야를 통해서 말씀하신 대로 아합의 집에 있는 사람을 다 죽인다.’ 이게 바로 자기가 받은 사명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뭔가 무리수가 등장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이죠. 12절에 “예후가 일어나서 사마리아로 가더니 노중에 목자가 양털 깎는 집에 이르러 유다 왕 아하시야의 형제들을 만나 묻되 너희는 누구냐 대답하되 아하시야의 형제라”
아하시야라는 사람은 북쪽의 바알 종교를 척결하는 척결 대상자 명단에 없어요. 지금 예후가 명단에도 없는 사람에게 시비 걸고 있는 겁니다. “너 누구냐?”하니까 “예. 이세벨 왕후한테 문안드리고 그동안 북쪽 사람과 소위 같은 귀족이니까 왕족이니까 친하게 지내기 위해서 왔습니다.”라고 했어요.
이 사람들이 아하시야의 형제라 했는데 사실은 아하시야의 형제는 없어요. 죽은 아하시야 형제들의 자식들입니다. 역대하 22장 1절에 보게 되면 “예루살렘 거민이 여호람의 말째 아들 아하시야로 위를 이어 왕을 삼았으니 이는 전에 아라비아 사람과 함께 와서 영을 치던 부대가 그의 모든 형을 죽였음이라” 모든 형을 죽였기 때문에 막내 아들인 아하시야가 왕위에 올라온 겁니다. 그러니까 형은 이미 다 죽고 그 아들들을 예후가 만난 거예요.
만났으니까 “어? 그래? 명단 한번 봐.” “명단에 남쪽 사람 왕족을 죽이는 건 없는데요?” “그래? 그럼 그냥 가자. 내가 엘리야에게 하나님께 받은 명단은 북쪽 바알 섬기는 사람이기 때문에 저 사람들은 그냥 손대지 마라.” 이렇게 갔어야 되는데, 하나님의 사명감이 오버했습니다. 넘쳤습니다.
넘쳐서 14절, “목자가 양털 깎는 집 웅덩이 곁에서 죽이니 사십이 인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남쪽 왕족이 42명이나 죽었습니다. 그렇게 해놓고 16절에 보니까 “가로되 나화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 이렇게 했어요. 원래 척결 대상자도 아닌데, 명단에 없는 사람을 죽여 놓고 자기는 지금 남쪽 사람까지 북쪽에 바알 믿는 사람과 친하다는 이유 때문에 죽이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어요. 이게 예후입니다.
그런데 지난 수요일에도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사람이 태어나서 누구를 잡아 죽이는 걸 생의 목표로 삼는 그런 사람 있습니까? ‘나는 누구 하나 꼭 보내고 죽는다.’ 그걸 삶의 목표로 잡는다는 자체가 좀 이상하죠. 왜냐하면 정말 바알을 섬기고 여호와 하나님을 안 믿는다면 그 사람은 가만 놔둬도 늙어죽어요. 늙어죽습니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될 것은, 이세벨도 그렇고 나머지 사람도 그렇고 가만있어도, 바알을 믿든 뭘 믿든 가만 놔둬도 사람들은 죽잖아요. 그렇게 늙어죽는 것도 그냥 하나님이 주신 벌이라 생각한다면 굳이 예후가 나서서 설쳐댈 하등의 이유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예후라는 것을 택하여 바알 믿는 사람을 죽이라고 하는 그 이유는, 예후라는 사람이 남쪽 사람이 아니고 북쪽 사람이에요. 북쪽 사람은 바알을 믿든 안 믿든 하나님의 아히야 예언에 의하면 이미 하나님 앞에서 잘린 사람들입니다.(왕상 11:29-36) 하나님의 약속에서 성전 없는 곳, 다윗 언약에서 배제된 자들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예후라는 이런 사람이 바알 믿는 사람을 잡으라는 하나님 사명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묻는 거예요. “예후야” “예.” “너는 바알을 안 믿어?” “안 믿죠. 나는 여호와만 믿죠.” “여호와 믿는 너도 바알을 믿는 그들과 다를 바 없어. 똑같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똑같아. 똑같다는 거예요.
쉽게 가면 이렇습니다. “너 뭐 믿어?” “바알 믿어.” “야, 이거는 죽어 마땅해.” “너 뭐 믿는데?” “나 여호와.” “그래, 너는 착한 신을 믿기 때문에 넌 죽지 않고 복되게 오래 살아야 돼.”라는 인식이, 북쪽 사람, 다윗 언약을 모르는, 다윗 언약에 대해서 배제된 북쪽 사람이 갖고 있는 잠재성이고 공통점입니다. 내가 바알을 선택하느냐? 저주. 내가 여호와를 선택해서 믿으면? 복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둘 다 똑같다.” 둘 다 똑같아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정리해봤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것-1번. 종교적인 영향력, 종교입니다, 신앙이 아니고 종교적인 영향력을 입었을 때-2번과 3번. 그래서 일단 1번과 2번과 3번을 한번 정리해볼게요.
1번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 잘 아셨죠? 또 1번이 뭐더라? 하지 마셔요. 1번은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2번은 뭐냐? ‘나를 위해 사는 사람’이에요. 좀 어렵습니다. 1번은 뭐라고요?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 2번은 나를 위해 사는 사람. 3번은 뭐냐 하면 ‘주를 위해서 사는 사람’, 이게 3번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기에는 제가 일방적으로 1번, 2번, 3번 이렇게 분류를 했는데 그 분류에 의하면 여러분들이 ‘아, 1번하고 2번하고 3번하고 그런 차이가 있구나.’ 이렇게 생각이 들겠죠. 제가 1번, 2번, 3번을 나열한 것은, 1번, 2번, 3번 셋 다 차이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내가 주를 위해서 산다고요? 그거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거예요. 아무 생각 없이.
지금 예후는 어느 쪽에 속하느냐 하면요. 3번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결과는 뭐냐? 1번입니다. 여호와 빙자하고 바알 빙자했지만 사실 예후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본래적인 권력욕에 미쳐가지고 ‘내가 권력을 쥐었으니까 이참에 말씀에 입각해서 이 권력을 제대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쓰자. 이게 엘리야에게 받은 나의 사명이다.’라고 설쳐댄 거예요.
그래서 브레이크가 안 들어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왕하 10:16) 지금 여호와를 보라는 거예요, 여호와에 대해서 열심을 다하는 나를 보라는 거예요? 나를 보라는 거예요, 나를. 여호와를 빙자해서, 여호와의 말씀, 예언을 빙자해서 그 성취와 실현을 빙자해서 예후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아요.
왜? 권력 욕망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조절 안 됩니다. ‘나의 열심’ 여기에 형용사를 붙인다면 ‘여호와에 대한 불타는 열심’,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 그걸 본인이 조정하거나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겐 없습니다. 없어요.
그래서 북쪽 사람이, 남쪽의 유다가 아니고, 다윗 언약, 다윗의 등불이 있는 그 나라가 아니고, 등불이 이미 꺼져버린 북쪽, 이미 꺼지고 등불이 연결 안 되어 있어요, 그 북쪽 나라에서 여호와를 거론하든 바알을 거론하든 부처를 거론하든 예수를 거론하든 모든 인간들은 아-무 생각 없이 삽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1번에 머물러 있어요. 1번에 머물러 있는데, 그럼 2번이 뭐냐? 2번 잊어버렸습니까? 2번은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사람이 평소에 나발 불면서 ‘나는 나를 위해 산다. 나를 위해 산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나를 위해 삽니다.’ 이렇게 자기를 위해 산다는 것을 떠벌이며 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아무 생각 없는데, 언제 나를 위해 산다는 게 있느냐 하면, 누가 자기를 건드릴 때 그래요.
“너 어떻게 살아가? 너 무얼 믿고 살아? 누굴 위해 살아?” 이렇게 건드리게 되면 사람들은 기분 확 잡치게 됩니다. 갑자기 공격 성향을 띄어요. 여러분, 이 문장을 한번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만남은 공격’입니다. 인간의 대화는 공격이에요. 공격 성향 없이 대화하는 법이 없습니다. 방어라는 이름으로 공격하고 공격이라는 이름으로 방어하면서 철옹성 같은 자신의 진지를 갖추어놓는 데에 모든 열정을 다 쏟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예후입니다.
예후는 뭐 남이 간섭하는 것 딱 싫어요. ‘내가 여호와 하나님께 열심으로 산다니까. 이 하자 없는 인간, 이 오류 없는 인간. 누구든지 나 건드리면 가만 안 둘 거야. 왜? 내가 모든 권력을 가졌으니까.’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자기가 평소에 자기를 위해 사는데 여호와 이름을 빙자해서 마음껏 지금 놀고 있는 거예요.
지금까지 1번, 2번, 3번 했는데 4번은 계속 지금 유보시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4번은 감당하기가 좀 곤란해서요.
북쪽을 이방민족으로 보고, 최고의 권력자가 바알을 믿든 여호와를 믿든 사실은 그 여호와가 바알의 연속이고 연장이에요. 바알 신의 확장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도 이야기했잖아요. 열왕기하 10장 31절,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여기다 제가 한 마디 한다면, 한 발자국도 1인치도 떠난 적이 없다.
여호와의 죄로 여호와라는 바알을 믿는 자를 지금 심문하고 그걸 척결하고 그게 바로 잘못이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 주제도 바알에 있으면서 같은 노선을 쳐버린 겁니다, 권력욕에 미쳐가지고. 그래놓고 말하기를 “여호와께 열심이 있다.” 이런 식으로 자기를 위선자로 만드는 거예요.
예후의 이 이야기가 구약성경에 나와 있는 이유가 있어요. 신약에 있는 진짜 성도하고 구약에 나오는 예후하고 한번 비교해보라는 거예요. 얼른 보면 ‘여호와’, ‘여호와’ 일관적으로 같아 보이죠. 아닙니다. 여호와를 믿는다고 열심내는 인간의 한계를, 하나님께서 구약 사건을 통해 그 사례를 우리에게 보여준 겁니다.
‘주를 위하여’라는 3번이 있어도 그것은 1번 영토의 연장에 불과한 거예요. 이걸 주식으로 설명하게 되면, 1번-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이, 주식 1500에서 2000을 왔다 갔다 할 때. 오랜 세월 했어요. 그런데 주식이 3000되었다. 오? 주식이 오르네? 야, 이거 대통령 잘 찍어서 주식 오르는구나. 주식 3000될 때, 이것이 나를 위하여-2번. 그런데 주식 오르니까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주식에 바짝 신경을 썼더니만 주식이 9000까지 올랐어요. 그러니까 ‘아, 내가 주를 위해서 사니까 하나님께서 9000까지 줬구나.’ 그런데 9000이 오늘 6000됐는데?
그러니까 어디로 가느냐 하면, 다시 ‘나를 위해서’로 내려가요. 주를 위해서 살겠다고 아무리 다짐을 해도 미끄럼틀에 누가 초를 칠해놨는지 자꾸 3번 갔다가 2번 가고, 또 3번 갔다가 2번 가고. 3번-주를 위해 살다가 결국은 2번-나를 위해서. 또다시 용기 내어서 ‘아니야, 이렇게 살면 지옥 가. 주를 위해 살아야 돼.’ 주를 위해 살다가 또다시 3번 갔다 2번으로 내려오고.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어디에 속하느냐? 1번에 속해요.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거예요. 예수를 믿어도 아-무 생각, 예수를 안 믿어도 아-무 생각. 믿는 자 안 믿는 자 똑같아요, 1번으로. 예수 안 믿는 사람보고 “당신은 어느 종교를 갖고 있습니까? 당신은 예수를 왜 안 믿습니까?” 누가 이야기한다면 그 사람은 1번에서 2번으로 가요. “나요? 나는 나를 위해 살아요.” 그러면, 전도했던 사람은 “아이고, 그렇게 살면 지옥 가죠.” “그럼 질문한 당신은 누구를 위해 삽니까?” “나 3번입니다. 주를 위해 삽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1번, 2번, 3번 마찬가지에요. 원래 아무 생각 없이 사는데 누가 자기에게 질문한다든지 대화한다든지 뭔가 자기를 점검하고 테스트하려할 때 인간은 “나? 나를 위해 살아요. 그러니까 건드리지 마세요. 짜증나니까. 안 그래도 더운데 짜증나니까.”
그래서 평소에는 나를 위해 산다고 떠벌일 필요 없다고요. 아무 생각 없이 살아요. 그래서 사람과 사람 만날 때 뭐라고 합니까? 이렇게 하죠. “야, 오늘 날씨 덥죠?” “아, 네. 덥네요.” 그게 뭐 바알 섬기는 겁니까, 여호와 섬기는 겁니까? 아무 생각 없어요. 그냥 날씨 더우면 덥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후는 어떤 식이냐 하면, 만나서 하는 말이 “오늘 날씨 어때?” “오늘 많이 덥습니다.” “죽어라, 인간아. 너는 바알을 섬기다니.” 이러고 있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누가 말을 거니까, “나한테는 종교 같은 거 없습니다. 나는 종교 같은 거 없고 나는 그냥 평소에 편안하게 뭐 생각하는 것이 24시간 내 생각만 하고 살죠.” 이랬는데 예후가 말하기를 “죽어라. 여호와를 안 믿다니. 이거는 네가 죽어 마땅해.”
이게 무슨 뜻입니까? 여호와를 안 믿기 때문에 죽어 마땅하고, 여호와를 믿는 자기는 살아 마땅하고.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예후, 그렇게 행동하는 예후. 내가 보기에 그런 예후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아무 생각 없이.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 늙어죽게 되어 있어요. 굳이 예후를 보내서 조기에 설쳐가지고 “내 칼을 받아라.”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예후를 통해 사람을 죽일 이유가 있습니까? 그게 뭐 바알을 믿든 관계없이 그냥 가만있어도 죽어가는 인간을 굳이 하나님께서 예후를 통해 바알을 믿는다고 죽이는 이유가 뭐냐?
다니엘 2장 31-35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특심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왕이 꿈에 신상(神像) 본 것을 자기가 해석 못하는데, 다니엘이 남의 꿈을 자기가 다 끄집어내서 이렇게 딱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해석이 필요하죠. 이게 뭐냐? 왕이 대표로 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왕이 대표니까 다른 인간들은 왕과 동일한 삶을 살겠죠.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을 신상으로 여기고 살아가는데, 하나님께서는 이게 꼴 보기 싫다는 거예요.
신상이 어떠냐 하면, 처음에는 금이고 은이고 이래요. 배, 넓적다리는 놋이고.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걸 보지 말라는 거예요. 상체 관리하지 말고 하체, 그것도 제일 끝에 있는 발은 흙으로 되어 있어요. 그것도 진흙. 그러니까 인간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그냥 흙이라는 물질이었어요.
인간이라는 물질이 내가 바알을 섬기나 여호와 섬기나, 인간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그냥 물질로, 흙이라는 물질로, 철이 섞인 흙이라는 물질로 그냥 다룹니다. 다루어지는데 자기가 인간인 줄 알고 내가 여기 있다고 하는 거예요. 있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어디서 난데없이… 물질이니까 같은 물질, 돌멩이를 보내요.
화려한 우상이에요. 멋져 보이죠, 상체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체를 겨냥해서 그 돌이 날아와 버립니다. 그러면 여기 내가 있다고 여긴 나 있음이 가루가 되어서 내가 있던 자리에 내가 없어요. 그 자리에 나를 친 돌이 태산을 이루는데 그 태산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이야기에요. 하나님의 나라는 남쪽에 있는 성전, 다윗 언약, 다윗의 등불 계통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나라가 임한다니까 여러분들이 성경에서 생각나는 대목이 있겠죠. 그게 바로 마태복음 6장10절에 나오는 주기도문의 한 대목이에요. 주기도문에 나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다음에 나오는 구절이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 어떻게?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리이다” 어디를 향하여? 인간도 아닌 게 인간인 척하면서 자기 잘난 척하는 것들을, 물질인데 사람이라고 위선 떠는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공격하게 되어 있어요.
시편 115편 1절은 바로 이러한 인간들의 속성을 주께서 일찍이 아시고 단호하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여기 시편 115편 신앙인을 통해 고백케 한 내용입니다. 그 고백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한번 더 나와요.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게 하옵소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께서 뭐를 겨냥해서 위에서 아래로 치고 내려오는 겁니까? 인간도 아닌 게 자기 영광에 도취되어 미쳐가지고 ‘나 잘났지?’ 이런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의 가짜 영광을 공격하고 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따로 임한 게 아니고 그 자리, 우리가 흙인 줄 모르고 사람인 양 여기는 이 자리를 파괴하고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이 자리에 임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을 북쪽 예후만 방해한 게 아니에요.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 말씀의 성취에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 정말 하루하루가 방해되죠. 그래서 주기도문 계속 보면 그다음에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그렇게 오게 되면 우리는 하루치만 허락받는 거예요, 하루치만. 우리의 생애는 압축이 돼서 하루하루만 제공받는 겁니다.
이 비슷한 이야기가 여러분 잘 아는 이야기, 주일학교에도 많이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7장 24-26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하나님의 말씀은 기초가 반석을 전제로 해서 말씀이 주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모래는 백날 말씀해봐야 그것은 말씀이 쌓이질 않습니다. 왜? 모래 위에 지은 사람은 1번, 2번, 3번이에요. 아무 생각 없이 살아요, 그냥. 뭐 나를 위해 살지도 않아요. 나를 위해 산다는 것은 누가 말 걸 때 “그래, 나는 나밖에 몰라.” 이렇게 하지만, 평소에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살아요,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생각 없이 교회 나오고 아무 생각 없이 절에 가고 이래요.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절에도 안 나오고 교회도 안 나오고. 뭐하고 사느냐? 아무 생각 없이 살아요.
자, 그렇다면 문제 해결되어야 될 게 아닙니까? 갑자기 이제 4번 카드를 끄집어낼 타이밍이 되었는데요. 4번 하기 전에 1번, 2번, 3번 다시 봅시다. 1번-아무 생각 없이 산다. 2번-나는 나를 위해 산다. 1번인데 누가 대화 걸면 2번이 나와요. 3번-아니야, 그렇게 살면 지옥 가는 거야. 천국 가려면 주를 위해 살아야 돼.
4번은, 주식이 억이 되었어요. 4번은 뭐냐 하면, 주만 살아계시다는 거예요. 주만 살아계시다. 그게 신약 성도입니다. 주만 살아계시다. 주만 살아계시기 때문에 내가 1번이 되든 2번이 되든 3번이 되든 그걸 자랑질 안하고 “주는 살아계십니다.”라는 고백이 일상생활에서 계속 나오는 거예요. 주만 살아계시다.
그러면 주만 살아계실 때 갑자기 ‘나는 어떻게 사느냐’의 관심사는 여기서 끝났습니다. 주만 살아계시니까 모든 말씀이 주를 향하니까 그다음부터는 ‘주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걸 알면 되겠죠. 주님에게. 다윗의 등불 따라서. 북쪽 아닌 남쪽에 있는 다윗의 등불 따라서 주님은 어떻게 살았는가?
주님은 이렇게 살았어요. 십자가에서 이렇게 살았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6절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제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하셨어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이렇게 외치지 않았어요. “주님, 저 버려도 다시 살릴 거죠? 미리 다 아는데? 그럼 나 죽여주시면 주께서 저를 사흘 만에 살려줄 거니까” 이건 예수님이 알고 있어요. 마태복음 16장에서 그렇게 이야기했으니까. 인자가 죽고 난 뒤 사흘 만에 살아난다 했으니까(21절). “그렇게 해줄 거죠? 그럼 저는 죽습니다.” 이렇게 아주 신바람 나게 돌아가신 게 아니고 어떤 말이 있느냐 하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여기서 죽는다는 말이 없어요. 버리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외치는 이 말씀이 십자가의 완성과 관련되어 있는데요.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포함해서 모든 인간을 쓰시다가 버리신다 이 말이죠. 쓰시다가 버리시는 거예요.
예후를 쓰시다가 예후를 버리시는 거예요. 이사야를 쓰시다가 이사야를 버리고. 모세를 쓰시다가 모세를 버리고. 엘리야를 쓰시다가 엘리야를 버리고. 이제 그다음에 누구 차례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다가 우리를 버리십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자기를 위한 인생의 무대를 만들었어요. 자기가 그 무대 연출자이고. 연출할 때 1번, 2번, 3번을 왔다 갔다 하면서 연출해요. ‘아, 주식을 팔까 말까?’ 이게 자기가 연출하는 자기 무대잖아요, 자기 무대. 철옹성 같은 자기 진지를 위하여. 그게 자기 무대에요. 자기 무대에서 ‘저 사람을 쓸까 말까’ 전부다 재고 있죠.
그런데 하나님도 자기 무대가 있어요. 자기 무대에 등장하는 게… 오늘 본문 같으면 지금 예후가 누굴 죽이는가 하면 요람을 죽였어요. 아합은 이미 죽었고. 요람을 죽이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합 왕가가 나봇 포도원 주인에게 한 짓을 인하여 아합의 아들인 요람을 죽여서 나봇이 죽었던 매장지에다 그걸 던져 넣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왕하 9:26), 그 말씀을 실현했고요. 또 하나는 예후가 오버해서 죽여야 될 명단에도 없는 아하시야를 죽였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짜놓은 그 무대 있잖아요. 연극 무대. 그 연극 무대에 요람 등장하고 죽고, 아하시야의 조카들이죠, 그 사람들 죽고. 그 죽이는 역할에는 예후가 거기 또 등장하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무대에 딱 집어넣고 다루시고. 그걸 하나님께서 연출도 하시고 관람도 하시는 거예요. 음, 일 잘 되고 있다.
그럼 오늘날 우리 같은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구약은 그렇다 치고,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무대에서 어떤 입장에 있는가? 그게 마태복음 24장 37-39절에 나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오시기 직전까지 모든 인간은 자기가 만들어놓은 무대를 자기가 연출하면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누가복음에 보면 장사까지 포함되어 있어요. 자기 인생을 살고 있는 거예요. 어떻게? 아무 생각 없이. 정말 아무 생각 없어요, 인간은. 교회 다녀도 아무 생각 없고 절에 다녀도 아무 생각 없고 안 다녀도 아무 생각 없어요. 그냥 아무 생각 없어요.
그런데 인자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오시는데, 그 인자되시는 분이 오시기까지 전에 뭐를 했느냐 하면 십자가에서 이런 말씀을 했어요.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그러니까 “안 버릴 요량으로 쓰셨으면서 이제 와서 왜 저를 버리십니까?”라는 거예요. ‘어찌하여’라는 말을 살려야 돼요. ‘어찌하여’라는 의미를 살려야 돼요. 주님은 뭐 아버지랑 다 알고 짜고 치는 고스톱입니다, 이래서는 안돼요.
시편 22편에 나오는 그 말씀이거든요.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말씀이 나오는 대목으로 가는 거예요. 여기서 다윗이 ‘어찌’라고 하는 것은 “나는 아버지께서 버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라는 다윗의 고백이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겁니다.
다윗은 3번인 거예요. “하나님, 좀 따져봅시다. 나 주를 위해 살았습니다. 주께서도 그런 언질을 줬잖아요. 그렇다면 저 사람은 자기를 위해 사니까 저 사람은 2번이지만, 나는 3번이니까 저 사람은 버림받아도 나는 버림 안 받을 타당성과 정당성과 근거가 저한테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참에 와서 저를 왜 버리십니까?” 왜 버리십니까?
주님께서는 뭘 아시느냐?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쓰시다가 버린다는 사실을 우리 주님은 아셨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 쓰시다가 버려지는 의미가 뭐냐? 버리기 위해서 쓰신다는 사실을 주님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 코스. 인간의 연약한 죄 있는 육신의 몸을 지녔기 때문에 죄 있는 육신이 갖고 있는 한계, 어떤 인간도 하나님께 가는 데에 극복해내지 못한, 극복 못한다는 그 경계선을 예수님만 외칠 수 있어요.
예수님은, 내가 버려지기 위해서 쓰여진다는 것, 그리고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라는 그 말씀을 어떤 인간도 따라올 수 없고 오직 나만 쓰시다가 버리는 것에서 버리기 위해 쓰신다는 그 코스를 극복하고 아버지와 함께 된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 고백을 하시는 거예요.
이걸 더 쉽게 이야기하면, 모든 인간은 다 죽어 마땅한데 그 죽어 마땅하다는 이야기를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분은 우리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부활이라는 것은 죽어야 있는 거예요. 안 죽으면 부활이 없는 겁니다. 안 죽고도 부활하는 것은 인간이 지어낸 거고요. 진짜 부활은 죽어봐야 진짜 부활을 아는데 이 인식은 예수님만이 처음으로 성령을 통해 알게 된 거예요.
그렇다면 끝으로, 신약성경에서 성도의 위치는 뭐냐? 예수님 옆자리(하나님 옆자리-같은 말입니다)에다 인간의 자리를 비워놔요. 그리고 그동안 하나님께서 인간세계를 통해서 무대에서 연출한 모든 것을 같이 관람하게 합니다. 그게 뭐냐? 1번, 2번, 3번이에요.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요. 아무 생각 없이. 성경 알아도 소용없고 몰라도 소용없고.
그런데 4번은 뭐냐 하면… 이게 에베소서 2장 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하늘에 딱 앉혀주는 거예요. 앉혀주면서 뭐하라고? 하나님이 그동안 인류사 연출한 것을 보여주면서 얼마나 하나님이 정당하게 연출했는지를, 그리고 인간들은 인자가 올 때까지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을 딱 보게 하셔요.
그러면 옆에 앉아있는 그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이미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만이 하나님 옆에 앉을 수 있어요. 그게 부활의 자리에요. 죽은 자만이. 그럼 죽은 자라니까 아깝잖아요. 4번에 해당되는 사람은요, 자기 자리에서 아깝다 안 아깝다, 살았나 죽었나,라는 인식 자체가 이미 소실된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4번은 뭐였습니까? 주식이 억 되는 거예요. 주가 억 되는 것, 코스피 억 되는 것, 뭡니까? ‘예수님만 살아계시다.’라는 그 고백으로 인하여 그 고백을 통해서 본인도 살아있는 예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살아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이 말씀이에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살아있는 건 맞는데, 그러나 이것은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고, 주님이 날 위해 죽었다. 죽음이라는 것을 이미 겪게 하시고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과 함께 나는 땅에서는 죽었고 하늘에 생명이 있는 산 자로 내가 지금 이 땅에 살아있습니다. 살아있으면 뭐하는데? 하루치의 생애를 받아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다 이루어졌음을 기쁨으로 고백하는 그 일이죠.
그럼 마지막으로 이 말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럼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겠어요? “그게 바로 주를 위해 사는 거야.”라고 누가 또 아는 척하고 충고하잖아요. 그거는요, 주식 9000이에요. “그래, 나는 이젠 주를 위해 살아.”하면 미끄럼틀에서 미끌어져가지고 다음 되면 벌써 아무 생각 없어요. “나는 살았으니까 나는 복 받아야 마땅하고, 너는 너를 위해 사니까 지옥이나 가라.” 이러고 있으면 그 자체가 이미 주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살아있는 그걸로 다시 미끌어져버리죠.
바로 그런 그 모습까지 느긋하게, ‘여태껏’이란 것은 다 빼고 지금 이 순간 날마다 주와 함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세상을 느긋하게 볼 수 있는 그러한 제4의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믿는다고 떠벌이면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이 얼마나 주님 보시기에 한심스럽고 오버하는 태도고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그러한 철딱서니 없는 생각인지 저희들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그래서 모든 일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던 그 연출 밑에서 십자가에서 일하신 하나님에 대해 감사하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즐거움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