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인
2026년 7월 22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9:25-26
(9:25) 예후가 그 장관 빗갈에게 이르되 그 시체를 취하여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밭에 던지라 네가 기억하려니와 이전에 너와 내가 함께 타고 그 아비 아합을 좇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이 아래 같이 저의 일을 예언하셨느니라
(9:26)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젯날에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 또 말씀하시기를 이 토지에서 네게 갚으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 시체를 취하여 이 밭에 던질지니라
예후가 요람왕을 죽여서 그 시체를 나봇이 밭에 던집니다. 이는 전에 요람의 아버지인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 할 때, 엘리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예언이 있었습니다. “너는 저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하셨다 하고 또 저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
셨다 하라 …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가라사대 개들이 이스르엘 성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왕상 21:19,23) 이것은 곧 가해자와 피해자가 죽음을 통해서 만나게 하시려는 겁니다. 나봇은 남들보기에 자기 소유로 보는 포도원을 여호와 소유의 포도원으로 봐서 임금이 팔라고 해도 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합왕은 고민해 있었습니다. 백성들로부터 좋은 인상을 받은 왕이 되고 싶었던 겁니다. 하지만 그 부인이 되는 이세벨은 바알을 극진히 신봉하는 여자였습니다. 그녀는 생각하기를 백성들은 왕의 존경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힘에 복종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래서 힘으로 밀어붙였습니다.
이로 인해 나봇과 자식들은 죽었고 포도원도 왕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끝! 그러면 세상은 힘으로 제대로 평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세벨과 아합왕은 자신들의 최후에 대해서 몰랐습니다. 그저 시간 지나가면 늙은 죽는 자연사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의 예언은 이들을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왕상 19:15-17)
주님께서 하사엘과 예후와 엘리사는 특정 장소에 집결시켜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모든 인간의 최후를 미리 보여주십니다. 여기에 ‘칼’이 동원됩니다. 이는 인간 세계에서는 바알정신이 대세임을 감안하신 겁니다. 즉 아세벨의 통치 하에 북이스라엘의 대다수의 백성들은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신을 섬겼습니다.
그것이 권력층에서 원하는 바였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자는 엘리야 선지자 빼고 겨우 7000명 뿐이었습니다. 그만큼 일반 백성들은 당연히 힘을 신봉했습니다. 나봇과 다른 정신은, 곧 내 힘으로 일구어낸 것은 다 내것이라는 정신으로 무장되기를 바랐던 겁니다.
따라서 이세벨과 아합왕의 최후가 곧 보편적인 모든 인간의 최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후를 통해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죽여서 결국 만나는 내용은 예언을 실현케 하셨습니다. 이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죽음이 각자 고유의 죽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최종적인 죽음을 만나기 위해 할당된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즉 신약 때, 유일한 최종 피해자이신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모든 인간들이 가해자로 가담되어 있음을 알리는 그 죽음뿐입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죄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최종 여호와 하나님 편에 선 분이 세상의 힘으로부터 살해당한 바로 그 현장에서 밝혀지게 됩니다. 마태복음 23:35에 보면,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인류사를 관통하는 도랑을 만들어지면서 세상의 모든 변화는 예언된 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현실만 보이겠다면 자신들의 존재성으로 인하여 최후성이 늘 가려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 편에 선 자를 건드리게 되는 자의 최후를 분명한 죽음 사건으로 보여주므로서 이 최후에 모든 인류가 다 가담되어 있음을 말해주십니다.
모든 사람들은 개처럼 부릴 수 있는 권좌에 앉은 이세벨과 아합왕은 죽고 난 뒤에 도리어 하찮은 들개들의 밥이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인간의 진면목입니다. 개의 본성은 어떤 것일까요? 하나는, 먹이를 가차없이 뜯는 힘만을 발휘할 뿐입니다. 둘째는 개가 상대를 뜯을 때 상대가 누군지 상관없다는 겁니다.
결국 인간의 최후는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뜯어먹고 먹히는 사슬이 세상망입니다. 마가복음 7:26-28에 보면,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자기 존재에 도취되어서 자신의 최후과 진짜 모습을 모를 때, 개나 닭이나 나귀나 소를 통해서 비교시키십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사 1:3) 우리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단정지셨습니다.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요 6:65)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우리 겉을 뜯어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인간은 개의 속성을 지녀서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들을 하나님께서 생산하셨습니다. 그들의 행함이 아니라 오직 은혜입니다. 가슴이 뜯겨나가도 이 은혜를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5-6)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나온 은혜를 자랑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5강-열왕기하 9장 25-26절(최후인) 260722-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9장 25절에서 26절까지입니다.
열왕기하 9:25-26
“예후가 그 장관 빗갈에게 이르되 그 시체를 취하여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밭에 던지라 네가 기억하려니와 이전에 너와 내가 함께 타고 그 아비 아합을 좇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이 아래 같이 저의 일을 예언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젯날에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 또 말씀하시기를 이 토지에서 네게 갚으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 시체를 취하여 이 밭에 던질찌니라.”
여기 예후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예언에 의해서 특별한 업무를 부여받았어요. 선지자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열왕기상 19장 16절에 보면,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흘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이 예후라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북쪽 왕 아합의 부인 이세벨이 있는데요, 부부가 합세해서 열심히 바알을 섬겼는데 그 바알 신을 섬긴 그 여파, 그 영향으로 어떤 일을 저지르게 되었는가?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하다가 여의치 않으니까 아예 나봇을 죽였어요. 나봇과 나봇의 자식들을 죽였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지요.
그러면 나봇은 왜 죽었는가? 왕이 값을 후히 쳐 준다고 할 때 그 값을 받고 포도원을 팔았으면 되었겠지요. 그런데 나봇의 입장에서는 그 포도원이 자기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소유라고 나봇은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이게 여호와를 믿는 사람의 전통이고 그래야 해요. 그런데 그 여호와의 반대편에 ‘나의 것’이라 여기는 것, 나의 것으로 구축된 인생을 살고자 하는 쪽이 바로 여호와 신을 버리고 바알 신을 쫓아간 거예요.
바알 신과 여호와 신이 이제 확실하게 구분이 되었지요? “이 모든 것은 여호와 것입니다.” 여호와 신. “이 모든 것은 내가 노동해서 내가 이뤘습니다. 내 것.” 이것은 바알 신이지요. 사람들이 어디에 인기가 있느냐? 투표를 해보나 마나 어느 쪽이 인기가 있느냐 하면, 여호와보다도 바알 신이 역시 최고였어요. 인기가 아주 대단했습니다.
그러니까 아합왕 입장에서는 백성들이 왕을 따르고 왕의 말을 좋은 감정으로 받아들일 때 자기가 통치하는 나라가 잘되고 자기가 왕으로 존대를 받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아합왕과 이세벨은 편하게 생각해서 나봇의 포도원을 탐냈는데 “안 된다!” 올림픽 공원 잔타르크가 잠실투표소 막는 것처럼 막았어요. 안되면 죽이면 되지요. 그게 뭐 어려워요?
그래서 나봇과 그 아들들이 죽었어요. 죽었는데 이제 하나님의 예언에 의해서, 엘리야의 예언에 의해서 누가 등장하느냐? 여호와 믿는, 여호와를 섬기는 자를 죽인 그 바알을 믿는 자를 죽이는 그 역할을 하나님께서 예후라는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서 왕이 되게 해서 맡겼습니다. 그러면 예후에게 맡긴 일이 한마디로 뭐냐?
그것은 바로 가해자를 죽여서 이미 죽은 그 피해자와 가해자의 죽음이 죽음을 거쳐서 같이 만나게 해주는 거예요. 죽음 안에서. 살아 있을 때 만나지 않고 죽여서 그렇게 같이 만남으로서 뭘 얻겠다는 거예요.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의 예언에 종속된다. 그걸 알리기 위한 거예요. 어떤 사람이 죽든 인간은 각자 죽음이 개인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 죽음은 자기 고유한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고 이렇게 봅니다. 하나님 편에 섰던 나봇이 죽었잖아요. 구약에 나봇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걸 어디까지 끌고 가느냐 하면, 성경은 신약까지 끌고 가요. 신약까지 끌고 가면 최종적으로 하나님 편에 서서 죽었던 분이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의 죽음이 모든 인간을 죽게 하는 원인이라는 사실을 예언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밝혀주시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인간은 그냥 늙어 죽는 게 아니에요. 인간에게는 어떤 특별한 죽음, 특별한 죽음이 있는데 그 죽음은 하나님의 죽음이에요. 하나님의 죽음을 출발점으로 해서 각자의 죽음을 할당하는 거예요, 각자의 죽음을. 이 말은 뭐냐? 아합이나 이세벨이나 살아있을 때 기세등등했잖아요. 그런데 아무리 그들이 기세등등해도 인간은 죽음으로부터 멀리 못 간다는 거예요. 내빼지 못해요.
다시 그들에게 죽음을 가했던 그 원래의 자리에서 가해자, 여호와를 가해한 자로 호출당하고 소환당하는 그러한 입장에 있습니다. 이세벨이나 아합이, 그리고 다른 모든 인간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로마서 6장에서 ‘죄의 값은 사망’이라 했잖아요. 값이라 이 말이에요, 값! 인간이 죽는 것은 어떤 값을 치르는 것인데 무슨 값이냐? 죄다.
무엇이 죄냐? 하나님을 피해자로 만든 죄, 거기에 모든 인간이 예속되어 있습니다, 속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왜 죽는가? 하나님의 예언에서 못 빠져나와서 죽어요. 하나님의 말씀에서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에 죽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이세벨도 죽고 아합은 일찌감치 죽었지요. 아합은 일찌감치 전쟁하다가 화살 맞아 죽었고, 아합은 이미 죽었으니까 지금 예후가 죽일 사람은 이세벨입니다.
이세벨 죽일 때 이세벨이 죽기 전에 뭘 했느냐 하면, 눈 화장했어요. 이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열왕기하 9장 30절에 나옵니다. “예후가 이스르엘에 이르니 이세벨이 듣고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바라보다가.”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대목에서 이세벨 입장이나 우리 입장이나 생각해야 될 것은 ‘왜 인간은 자기의 최후를 모르는가?’ 하는 거예요. 왜 자기의 최후를 모르는가.
그것은 내가 여기 살아 있는 나의 존재성으로 인하여 나의 최후성이 자꾸 가로막힙니다. 성경에서 이 대목을 본 사람은 느끼는 게 뭐냐 하면, ‘사람은 가만 놔둬도 죽는 게 아니겠어요?’ 이점을 생각해 봐야 해요. 사람은 가만 놔둬도, 이세벨이 아무리 눈 꾸미고 머리 꾸며도 할머니 되고 늙으면 그냥 죽잖아요.
그러면 가만 놔둬도 그냥 세월 따라 죽게 되어 있는 것을 왜 예후가 설쳐서 굳이 이세벨의 죽음에 라벨을 붙이느냐는 거예요. 왜 그것을 특정하느냐 그 말입니다. 가만있어도 죽을 사람인데. 그것은 이렇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릴게요. 인간이 살아있으면 자기 최후가 내 살아 있음으로 인하여 자꾸 가려지고 막히게 돼요.
그러면 내 존재 때문에 사람들은 최후를 생각해도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그 최후가 내 고유한 나의 개인적인 최후라고만 생각해요. 그러나 개인적인 최후는 없습니다. 보편적인 죽음밖에 없어요. 아까 말씀드렸지요? 인간의 죽음은 자기 고유의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뭔가 외부에서 할당받은 거예요. 쑥쑥 집어넣은 거예요.
“너는 이래서 죽어야 해, 이래서 죽어야 해.” 백 명이 있으면 백 다 똑같은 죽음이에요, 똑같은 죽음. 인간들이 존재하는 한 이걸 파악을 못 해요. 네 죽음 다르고 내 죽음 다르고, 이렇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세벨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이 모든 흩어져 있는 보편적인 이 최후의 사건을 하나에 모아 모자, 집약해 보자, 이걸 집약해서 사건으로 만드는데 사건으로 만들려면 어떤 특정 장소가 있어야 돼요.
그 특정 장소로 북이스라엘 땅을 정해놓고 그 북이스라엘 땅에 사람들을 모으는데 사람들 모을 때 어떻게 모으느냐 하면, 선지자의 예언에 의해서 모아집니다. 열왕기상 19장 15-17절에 보면, “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흘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북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예언으로 등장인물, 뭔가 역할극을 할 사람들을 모아놓는데 모아놓는 이유가 뭐냐? 칼을 거론해요, 칼. 칼이라는 것은 최후, 살해당함, 인간의 마지막, 인간의 그 마지막은 어떻게 끝나는가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예언에 의해서 보여주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이 말은, “너 지금 시험 쳤나? 오늘 밥 먹었어?” 이런 이야기들 있잖아요, 그런 이야기가 한시적이고 임시적인 이야기지 진짜 인간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뭐냐? 자신의 최후에 관한 이야기여야 합니다. 인간이 늙어 죽는 게 아니에요. 인간에게는 최후가 있습니다. 늙어 죽는 것은 우리가 아는 최후고, 그 최후 말고 하나님께서는 죽는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고 어떤 사건에 의해서 모든 인간은 죽는다고 보는 거예요.
그 사건 안에 인간은 죽어야 될, 그것도 인간은 죽도록 확정될 수밖에 없는, 즉 누구에 의해서 확정된 거예요. 자연스럽게 늙어죽는 데 죽음이 아니라 누구의 개입으로 반드시 죽는 그 최후의 사건이 있는데 인간들은 자기 사는데 바빠서 그걸 다 놓쳐요. 늙어 죽을 것 같으면 그냥 살다가 늙어 죽으면 돼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기다리고 있다니까요 어떤 사건이, 심판 사건이!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의 최후의 사건, 자기를 노리고 있는 분이 계신 데 왜 그것을 생각 안 하고 그냥 무심코 살아가느냐 하는 거예요, 무심코. 정작 중요한 것은 늙어죽는 게 아니고 잡아다가 죽이거든요. 왜 하나님은 나를 잡아다가 죽여야 되느냐?
그게 이미 예언되어 있으니까 확정되었는데 사람들은 그 확정된 것에는 관심이 없고, ‘뭐 세월 따라 살다 보면 나중에 늙어 죽겠지.’ 이것이 바로 자기 존재에 의해서 막혀버린 최후성입니다. 자신의 최후성, 그리고 보편적 인류의 최후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칼이라는 것을 등장시켜서 인간은 의도적으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 이야기를 누가 하느냐? 선지자가 해요. 선지자는 뭐 하느냐 하면, 수직적 관점을 갖고 있는 거예요. 하늘 보고 땅 보고, 땅 보고 하늘 보고, 하늘과 땅이 연락되는 사람이 선지자입니다. 일반인들과 다르지요. 일반인들은 평면적이에요. 일반인들은 평면적인데 선지자는 수직적으로 연락을 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누가 하늘의 비밀을 알겠습니까? 당연히 선지자지요.
그래서 선지자가, 인간이 죽기 전에 인간은 왜 꼭 죽어야 되느냐에 대해서 미리 계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거예요?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세벨이라는 여자가 아무리 악한 일을 해도 나이 들어 할머니 되면 그냥 늙어 죽는데 왜 굳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늙어 죽게 하지 않고 딱 끄집어내서 사건을 일으켜서 죽게 하시는가?
이세벨이라는 여인이 그 당시에 권력을 쥐고 있었던 거예요. 권력을 쥐고 있었다는 말은, ‘인간이 살려면 저렇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이다’라는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줘요. 나봇의 포도원을 탐을 낼 때 그 남편 되는 아합왕은 당황했어요. “안 팔겠다는데 어쩌지?” 하니까 이세벨이 하는 말이 “비켜, 비켜, 비켜. 왕이면서 그것도 하나 처리 못 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래서 모함을 해가지고 나봇과 가족 다 죽이고 “여보, 나봇 죽었다~! 이제 포도원 당신 원대로 가져가.” 이렇게 했습니다. 아합왕은 ‘왕으로서 백성들에게 진실을 이야기해야 한다’라는 것이 아합왕의 생각이었고, 그 부인되는 이세벨은 ‘진실 같은 소리 하지 말고 힘을 보여줘야 된다.’ 왜? 사람들은 진실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고 가진 힘에 굴복해요.
힘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거예요. 힘 가졌다, 힘 가졌다, 최고 정점의 힘을 가진 자가 누구냐? 그 당시 이세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세벨, 너 이리 와. 예후, 너도 이리 와. 우리가 사건 하나 만들자.” 무슨 사건이요? ‘인간은 왜 죽는가? 인간은 왜 늙어 죽는 것이 아니고 굳이 죽도록, 죽기 위해서 작정 된 채 이 세상에 출생되어야 하는가? 인간은 그 존재에 의해서는 알 수 없는 그 최후를 내가 보여주겠다.’
그래서 예후가 이세벨을 치는데 칠 때 그 명분이 뭐냐? 나봇을 죽였기 때문에 그 나봇을 죽인 것과 이세벨을 죽인 것을 같이 만나게 해주라고, 그래야 죽는 이유가 드러난다고 하나님께서 나한테 예언을 하셨다는 것이 오늘 본문이에요. 이 말은 신약으로 하면, 예수님 죽는 것과 나 죽는 것과 연관성이 있다고, 매치하라고 하나님의 확정된 예언의 그 코스대로 가게 되어 있다는 그 말입니다.
열왕기상 21장 19절에 보면, 나봇이 포도원 빼앗기고 죽었을 때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합니다. 엘리야가 받았던 하나님의 말씀을 제가 읽어볼게요. “너는 저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하셨다 하고 또 저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셨다 하라.”
이게 아합왕 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면 부인되는 이세벨은? 이세벨에 대하여는 23절에 나와요.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가라사대 개들이 이스르엘 성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찌라.” 꼭 집어서, 이세벨을 꼭 집어서, 특정해서 하나님의 예언이 어떤 특정 인간에게 집약적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 그 특정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보편적으로 모든 인간을 대변해서, 대표해서 지금 아합과 이세벨에게 인간의 최후성, 최종적인 모습에 대해서 미리 알려준 거예요.
‘건들지 말아야 될 자를, 여호와를 찾는 자를 죽였기 때문에 개들이 와서 네 피를 핥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기에는 아합은 죽을 때 개한테 물려 죽지 않았어요. 화살 맞아 죽은 것으로 알고 있잖아요. 그래서 ‘아합왕은 개하고는 상관없는데?’ 이렇게 생각하는데 열왕기상 22장 36-38절에 보면, “해가 질 즈음에 군중에서 외치는 소리 있어 가로되 각기 성읍으로, 각기 본향으로 하더라 왕이 이미 죽으매 그 시체를 메어 사마리아에 이르러 거기 장사하니라 그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 씻으매 개들이 그 피를 핥았으니 여호와의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거기는 창기들의 목욕하는 곳이었더라.”
이것은 계시받은 엘리야도 몰랐어요, 구체적인 절차를. 엘리야는 그냥 ‘아합왕의 피를 개들이 핥는다. 아하 그렇구나.’ 그런데 상세한 것은 몰라요. 모르는 데 나중에 일이 터지고 보니까 아합이 죽고 난 뒤에 화살 맞았으니까 그 피가 전차에 묻었을 것 아닙니까? 아합왕은 이제 장사 지내고, 병사들이 병거나 묻어 있는 왕의 피를 못에서 씻어내는 데 거기에 동네 개들이 와서 그것을 핥고 있을 때, 만약에 엘리야가 받았던 계시를 아는 사람은 소름이 돋을정도로 움찔했을 거예요.
뭐가 무서우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어떤 도피를 하고 어떤 수완을 부려도 하나님의 그 말씀에서 내뺄 수 있는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짜릿하게 다가올 겁니다, 짜릿하게! 그렇다면 그것을 오늘날에 한번 적용시켜 봅시다.
창세기 2장 17절,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그 구체적인 절차에 대해서는 몰라요. 그러나 정말 이 성경 말씀 하나하나가 최후를 알려주는 말씀으로 듣는 사람 같으면요, 우리가 사는 게 정석이 아니고 우리가 죽는 것이 제 코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돼요. 어떻게 사느냐는 이것은 환상입니다. 이것은 헛꿈이에요, 헛짓하고 있는 거예요.
‘어떻게 죽을 것인가?’ 왜?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은 죽는다고 했으니까, 우리의 관심사는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어떤 절차를 거쳐서 주께서 미리 정하신 동일한 모든 인간의 최후에 내가 어떤 식으로 등록되는가, 그게 관심사가 되어야 되겠지요. 이제 아합은 죽었습니다. 그다음 하나님의 말씀에 또 누가 남았어요?
이세벨이 남았잖아요. 이세벨에 대해서 나옵니다. 열왕기하 9장 33절부터 보면 이세벨 죽일 때 예후가 직접 손대서 안 죽였어요. 32절에 “예후가 얼굴을 들어 창을 향하고 가로되 내 편이 될 자가 누구냐 누구냐 하니 두어 내시가 예후를 내다보는지라.” 이세벨 옆에 다른 군사들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 군사들 보고 이야기했어요. “어이, 군사들! 너희는 내 편이 될래, 그 옆에 있는 아줌마편 될래?” 그렇게 된 거예요.
33절에 “가로되 저를 내려던지라 하니 내려던지매 그 피가 담과 말에게 뛰더라 예후가 그 시체를 밟으니라.” 내시가 이세벨을 창을 통해서 밑으로 던졌어요. 그러니까 땅에 떨어져서 그 피가 담과 말에게 튀었다고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 시체를 예후가 밟았어요. 그다음에 37절에, “그 시체가 이스르엘 토지에서 거름 같이 밭 면에 있으리니 이것이 이세벨이라고 가리켜 말하지 못하게 되리라 하셨느니라.”
36절 끝에는, “이스르엘 토지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고기를 먹을찌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것도 소름 끼치게 예언대로 되었습니다. 자 그러면 ‘어떤 두 사람이 죽었네. 끝. 이게 무슨 보편적인 죽음이냐?’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여기 개들이 등장한다는데 주목을 해야 해요. 개를 누가 풀었느냐? 분명히 예언에는 예후의 칼, 그리고 엘리사의 칼, 이렇게 나와요.
칼을 들고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 죽이는 것은 개가 관여했습니다. 그러면 그 개를 누가 풀었느냐? 개를 선지자 쪽에서, 하나님 쪽에서 풀었겠지요. 평소에 이세벨은 권력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다스렸어요. 사람을 지배했다는 말이지요. 사람을 지배한 이세벨이나 아합왕이 그깟 동네 개같은 것 지배 안 했겠습니까?
지배했지요. 살아있을 때 개는 만만하게 보고 인간도 만만하게 보고요, 자기 수하에 있으니까. 이세벨과 아합이 통치할 때 그 통치에서 무릎 꿇지 않은 사람은 몇 명이었느냐 하면 겨우 7천 명밖에 없었어요. 그들만 여호와 섬기고 나머지는 전부 다 굴복했어요. 그런데 그 이세벨이 죽을 때, 그리고 아합왕이 죽을 때 개들이 달려들어서 뒤처리 했잖아요.
그러면 이세벨의 권력, 아합의 권력보다 하나님 쪽에서는 어느 권력이 더 세냐? 아합이나 이스벨은 평소에 그가 다루던 그 개만도 못한 존재지요. 살아있을 때는 인간을 지배했지만 죽어서는 개한테 짓밟히는, 개한테 물어뜯기는 그런 신세가 이세벨과 아합의 신세였습니다. 사람의 최후는 그 사람의 본질을 말해줘요. 살아있을 때 으스대는 것 소용없어요.
죽고 난 뒤에 누구보다 못하느냐? 개보다 더 못한 거예요, 개보다. 자 그러면 그 개가 이세벨의 살점을 물어뜯고, 그리고 아합의 피를 핥을 때 개들이 무슨 생각했겠습니까? 저는 개의 본성을 두 가지로 정리해 봤습니다. 개는 힘의 본성밖에 모른다. 두 번째는, 개는 자기가 물어뜯는 상대가 누구냐에 대해서 몰라도 된다.
왜? 자기는 배고프니까. 배고프고 물어뜯는 힘은 있으니까 물어뜯고, 그다음에 자기 배브루면 되니까. 그게 개의 본성이에요. 이 개의 본성, 마지막에 권력자라는 이세벨과 아합을 이 개와 만나게 하는 겁니다. 바로 이세벨은 힘을 탐했고, 그 상대가 누구든지 관계없었어요. 특히 이세벨 같은 경우는요 성경에 죽 보면 엘리야 못 잡아서 그렇게 애를 태웠어요.
‘내가 엘리야 안 죽이면 내 성을 간다.’ 이런 식으로 엘리야를 체포하려고 열심을 냈던 거예요. 엘리야 현상수배 내리고, 그래서 엘리야가 무서워서 도망했고, 로뎀나무에서 죽으려고 했었어요.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왕상 19:1-2).
‘내가 신에게 맹세하노니 내일 이맘때 너 체포한다.’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야가 그 현장에서 떠나서 도망친 거예요. 완전히 개입니다, 이세벨은. 그런데 그 개 밑에 수많은 개들이 다 복종한 거지요. 복종 안 한 사람은 남은 사람 여호와 믿는 7천 명밖에 없어요. 여호와 믿는 사람은 수직적인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고 개같은 인간들은 뭐냐? 수평적 관점이 다예요.
여기서 수직적 관점에 대해서 성경 시편 121편을 말씀드리면 바로 이런 관점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보리라. 높은 산이지요. 산을 보다가 산을 보던 시선을 수직적으로 높입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오리라.’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 121:3-4). 이게 수직적 관점이에요, 수직적 관점입니다. 그런데 그 여호와 말고 모든 힘은 뭐냐?
수평적 관점, 세상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힘을 모아서 그냥 그 힘대로 물어뜯고 싶을 때 물어뜯고, 지배하고 싶을 때 지배하고 그게 사람 사는 보람이잖아’라는 이세벨로 대표할 수 있는 그런 세계, 그 이세벨과 똑같은 본성을 가진 짐승 개들을 하나님께서 풀어버린 거예요. 개가 가서 처리하는 거예요, 개가 가서.
개의 습성, 보통 이런 이야기 하거든요. ‘개같은 인간’이라 하거든요. 그것은 잘못된 거예요. 개같은 인간이 아니고 인간 같은 개예요. 왜? 인간은 개한테 복종하니까. 개한테 물린 것으로 그 존재의 최후를 보여줬던 이세벨과 아합, 어떤 최후의 사건을 보여주고 역할을 했던 그 대표적인 인간 그 개, 개한테 물릴 수밖에 없는 똑같은 그 개같은 짐승에게 모든 인간은 고개 숙였잖아요.
누가요? 너와 내가 전부 다. 그래 놓고 자기가 인간이라고,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은 자기 최후를 몰라요. ‘자기가 개라는 것을 어떻게 인간이, 아무리 겸손해도 그런 것을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마가복음 7장 26-28절에 보면 족속이 어떤 수로보니게 여인이 나오는데 예수님께 간청을 했어요.
‘내 딸이 귀신 들렸는데 낫게 해달라’ 하니까 예수님께서 섭섭한 이야기를 해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노골적으로 주님께서 그 여자보고 “너, 개야. 자녀는 자녀고 너는 자녀가 아닌 개야.”
그런 욕을 들었으면 삐져가지고 마음 상해서 갈 만 한데,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옳습니다.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주님, 저 개예요. 저 갭니다. 그거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 개도 기회는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자녀가 남긴 부스러기는 그 집 개한테 줄 게 아니겠습니까? 저 주님의 개로 키워주세요. 그저 자녀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개라도 저와 함께 있다면 족합니다.”
이것은 시편 84편에 나오는 말씀 같아요. “성전에서 참새와 제비도 보금자리를 갖는다”(시84:3). 그 대목이 생각나요. 결국 예수님께서는 이 집합된, 응축된 사건, 인간의 최후를 보이는 사건을 어디까지 끌고 가느냐 하면 나봇의 죽음, 나봇의 피 흘린 그 자리, 그 죽음과 관련해서 이세벨도 죽이고 아합왕도 죽이잖아요.
그러니까 왜 굳이 특정해서, “이세벨 너 죽어! 늙어 죽는 게 아니고 그냥 죽어.” 죽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나봇의 피흘림이 중심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 23장 34-35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선지자들을 어떻게 대우했는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창세기 4장의 아벨,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 가리라.”
그 노선, 세계사를 중앙으로 가름하는 수로 또는 고랑, 도랑 역할, 중앙 도랑 역할에 거기에 여호와 편에 섰던 사람들이 흘린 피가 도랑을 이루어서 마지막에 예수님 십자가 피까지 연결됩니다. 따라서 그 의로운 피! 그 의로운 피, 거기서 나온 의로운 피, 단층, 고랑, 그 고랑에서 나온 힘에 의해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모든 인간을 죽여서 그 고랑에 끌어당겨요.
그러면 살아있을 때 비까번쩍 살아도 소용없습니다. “너는 너의 최후를, 이 의로운 십자가 피에 근거해서 미리 알았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자기들 각자 살기 바빠가지고 예수님 피 흘리는 거, 나봇이 피 흘리는 그것은 관심 없고 그냥 힘만 키우고 힘만 모으면 된다는 사고방식.
하지만 그거는 살아있을 때 하는 짓이고, 그들에게는 필연적으로 주님께서 십자가의 책임을 묻는, 그런 십자가로 심판할 그 최후가 너, 나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하나 예외 없이 다 적용이 된다는 그 사건을 구약 때 미리 보여준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서 여러분이 궁금해하는 거, 내가 보니 별로 궁금해하지도 않는 거 같아요, 그렇게 등장했던 예후는 어떻게 됩니까?
예후는 개 아닙니까? 예후도 개입니다. 이세벨 죽이고 아합에 관여했던 예후도 열왕기하 10장 31절에 보면,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뭔가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자기도 개,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개를 풀어서, ‘예후’라는 개를 풀어서 같은 개를 잡아먹은 거예요. 개가 되어서 늑대같이 주인을 못 알아보고 무는 경우 있잖아요. 그럴 때 개 대통령이 가만있겠습니까? 어떻게 하겠습니까? 강제로 제압하죠.
이게 이사야 1장 3절에 나온 거예요.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주인 보고 물어뜯는, 늑대같이 물어뜯는 그 개같은 거예요. 인간은 살아있을 때 ‘인간’이라 하지만, 인간이 아니고 개였습니다. 개인데 개같은 수준 낮은 짐승을 위해서 소 등장했죠, 나귀 등장했죠,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누가 등장하냐 하면 닭이 등장해요, 닭.
철딱서니 없는 베드로가 자기를 마귀가 쥐고 있는 것도 모르고, “제가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의로운 피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이 의로워요. 그런데 베드로가 뭣도 모르고 거기에 같이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너는 나를 배신할 준비나 해라. 네가 세 번이나 배신했을 때 그때 닭이 울 것이다. 너는 닭보다 더 못해.” 닭은 배신은 안 하잖아요. 닭, 개, 소, 나귀. 훨씬 뒤떨어진 게 인간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아, 어떤 자가 구원받느냐는 거예요? 다 개인데, 이세벨한테 전부 다 고개 숙이고요, 여호와 뭐 관심도 없어요! 전부다 힘 있고 재벌 이런 사람들에게 다 고개 숙이고 하는데, 어떤 인간이 ‘살아있을 때 잘 살자.’ 이러지 ‘나의 최후를 알자.’ 이런 인간은 없어요. ‘최후 이런 거는 몰라도 돼.’ 이러고.
요한복음 6장 65절에서 분명히 예수님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아예 딱, 단정했죠, 딱 선을 그었어요. 아무도 나한테 올 수 없다! 그렇다면 대책이 없잖아요. 대책이 없는데, 엘리야 시대에 대책이 있어요.
그게 로마서 11장에 나옵니다. 엘리야가 말하기를 “나만 여호와 편이고 다 돌아갔습니다. 이세벨에게 다 돌아갔습니다”라고 할 때 4-6절에,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아까 요한복음 6장 65절 기억나죠. “누구든지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믿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예수 믿을 사람, 나를 믿을 사람 없다”라고 단정, 확정을 지어놓고 그다음에 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남은 자를 줘요, 남은 자. 드라마 같은 데나 또 아이돌 춤출 때 보면, 괜히 그 젊은 남자 주인공을 -그냥 드라마 찍으면 되는데- 꼭 샤워 장면 넣어서 가슴 막 보여주죠.
개는 원래 물어뜯고 찢는데 이것은 본인이 찢잖아요. 자기 건강미를 나타내기 위해서 옷을 찢어버리잖아요.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가 힘으로 모아놓은 껍데기를 찢어버려요. 찢어버리면 그 안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은혜가 나와요. 은혜와 사랑, 주님의 예정하심, 이거 짐승돌입니다.
이거 정말…, 주께서는 네 안에…, 우리가 똑똑해서 남은 게 아니거든요. “은혜로 남았다면 너의 가슴을 한번 찢어보자. 너의 힘을 한번 찢어보자. 아직도 하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남아있는지!” 그 찢는 것은 말씀으로 찢어요. 히브리서 4장 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쪼개면 그 안에 뭐가 있냐면, 주께서 주신 주님 자신의 생명이 들어있으면 그 사람은 천하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사람은 천국 백성이고, 자기가 잘한 거, 잘난 거, 지 노력한 거, 그거 들어있으면 그거는 개입니다, 개예요.
그래서 최후에 신약 때 남은 자는 십자가에 예수님이 피 흘려서, 십자가의 ‘죄 용서하심’이 남아있는 자를 남겨서, 그들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백성은 어떤 어려운 경우라도 천국에 탈락되는 법이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마지막 그들 남은 자를 통해서 주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노력한 거, 잘난 거, 애쓴 거, 과감히 북 찢어버려서 정말 ‘내 것’이라는 것이 다 뜯겨져 나갔을 때 그 안에 주님의 피가 있는지,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있는지, 예수님의 생명이 있는지, 주께서 불러주신 은혜가 있는지 늘 들여다보면서 주께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