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해하는 국가
2026년 7월 15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9:1-3
(9:1) 선지자 엘리사가 선지자의 생도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너는 허리를 동이고 이 기름병을 손에 가지고 길르앗 라못으로 가라
(9:2) 거기 이르거든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를 찾아 들어가서 그 형제 중에서 일어나게 하고 데리고 골방으로 들어가서
(9:3) 기름병을 가지고 그 머리에 부으며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노라 하셨느니라 하고 곧 문을 열고 도망하되 지체치 말지니라
엄연히 북이스라엘에 왕이 생존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따로 예후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이는 전에 사울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을 왕으로 중첩되게 세우신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삼상 16:1)
선지자를 통해서 주어진 현실상은 오랫동안 인간들의 습성상 몸에 익혀진 현실상과 맞지 않아서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께 계시를 받은 선지자들은 이처럼 항상 위험에 노출된 발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후라는 군대장수에게 기름부어 왕이 되게 하신 이유는, 인간이 나서서 나라를 새롭게 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열왕기하 11:29-32에 보면, “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저를 만나니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더라 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두 조각에 찢고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할 것 같으면, 북쪽 이스라엘은 벌써 이하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이스라엘에게 주는 야곱의 언약에서 배제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온전한 하나의 나라로 유지해야 되는데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의 12지파는 10지파와 두 지파로 찢어지게 됩니다. 그나마 두 지파만큼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다윗의 등불, 즉 다윗 약속에 의해서 지켜줌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유다 나라도 나중에 ‘악마의 자식’의 노릇을 하면서 지배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팻말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있으니 그 당시 유대인과 대제사장들은 그것을 시비걸었습니다. ‘자칭’이라는 말을 집어넣으라는 겁니다.(요 19:21) 그들은 참된 유대인의 왕 되시는 분을 살해하므로서 그들이 ‘자칭’ 유대인으로 행세한 것으로 들통나버리게 된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후 왕도 바알 신앙을 신봉하는 모든 자들을 살해했습니다. 그러나 예후에게 내려준 하나님의 뜻은 ‘실해’가 아니라 ‘죽이라’는 지시였습니다. ‘죽이는 것’은 ‘이미 죽은 자’에게 죽음이 합당한 것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지시입니다.
반면, ‘살해’라는 것은 ‘살아 있다’고 간주되는 자를 자신이 비축해 놓은 힘으로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살해’하는 자는 희생된 자의 죽음과 더불어 자신에게 그만한 힘이 소유하고 있음을 잃어버리는 않고 드러내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예후가 힘을 비축하고 있다는 의식을 가진 이유는, 그는 북이스라엘 왕과 관리와 바알의 선지자들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유다 왕까지 죽여버립니다.
“유다 왕 아하시야가 이를 보고 동산 정자 길로 도망하니 예후가 쫓아가며 이르되 저도 병거 가운데서 죽이라 하매 이블르암 가까운 구르 비탈에서 치니 저가 므깃도까지 도망하여 거기서 죽은지라 그 신복들이 저를 병거에 싣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다윗 성에서 그 열조와 함께 그 묘실에 장사하니라”(왕하 9:27-28)
예후는 권력 행사를 오버합니다. 이는 남아도는 권력을 대외적으로 자기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쓰고 있는 겁니다. 이런 마음 자세는 본인부터도 바알의 사고방식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애굽나라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인간들의 힘 비축에 준해서 세워지는 국가 요건을 완전히 뺀 국가를 위하여 일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즉 모세는 결코 ‘메시야’가 아닙니다. ‘메시야’가 못된다는 말은 하나님 아버지와 온전히 교류가 가능한 인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일하시는 것’과 ‘힘 소지’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일은 ‘전달상태’를 나타냅니다. 반면에 ‘힘’은 소유상태를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일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모든 힘을 소유하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적을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죄’를 드러내셔서 그 죄를 철저하게 지옥에서 심판하시므로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모세 때에 아브라함 자손들이 4대째 애굽 땅에서 머물러야 했는데 이는 바알 종교의 형태가 죄가 충분히 관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창 15:14-16)
그 ‘죄’ 관영은 다름이 아니라 바알종교입니다. 바알종교의 특징은 신을 섬기는 본인이 살아 있다고 자부하고 더 철저하게 살아 있기에 힘을 실어달라는 그 요청이 정당화되는 종교입니다. 바알 종교는 바람과 비와 폭풍을 관장해서 농사에 최적화된 신으로서 오랫동안 가나안 땅을 접수한 신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전부가 이 바알종교화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를 책임질 수 있는 인물이 없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모세와 엘리야 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눅 9:30-31)
그렇다면 신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라는 어떻게 세워지는 겁니까? 요한복음 12:25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4-25)
따라서 예수님만이 메시야시며 아버지의 마음에 합한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을 충분하고 넉넉하게 미워해도 기쁘고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힘을 비축하기 위한 하나님이 없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4강-열왕기하 9장 1-3절(살해하는 국가) 260830-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9장 1절에서 3절까지입니다.
열왕기하 9:1-3
“선지자 엘리사가 선지자의 생도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너는 허리를 동이고 이 기름병을 손에 가지고 길르앗 라못으로 가라 거기 이르거든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를 찾아 들어가서 그 형제 중에서 일어나게 하고 데리고 골방으로 들어가서 기름병을 가지고 그 머리에 부으며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노라 하셨느니라 하고 곧 문을 열고 도망하되 지체치 말찌니라.”
이스라엘 왕위에 지금 여호람이라는 왕이 있습니다. 그 여호람왕이 멀쩡히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지자가 기존의 왕에게 알리지도 않고 그의 부하 장군인 예후라는 사람에게 몰래 따로 선지 생도를 보내서 기름 부어서 왕이 되게 했습니다. 그러면 왕이 동시에 몇 명이냐 하면, 두 명이 돼요.
이런 경우가 또 있는데,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이 이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새에게 가서 그의 막내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한 겁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삼상 16:1).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세계에 혼란을 일으키는 거예요. 현재 이미 대통령이 있는데 강원도의 어떤 청년이나 대구의 어떤 청년에게 찾아가서 “네가 지금부터 대통령이다. 하나님께 대통령으로 기름 부음 받았기 때문에 네 할 일을 다 하라”라고 하면 기름 부음 받은 당사자가 굉장히 난처해져요. 곤란하지 않습니까?
현실 속에 있는 인간이거든요. 그래서 현실 속에 있는 인간이 그 현실을 헤치고 나간다? 그런 일은 없어요. 그런 재주가 없습니다. 당황스럽기 짝이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오게 되면 말씀이 온 모든 성도들의 공통점은…, 성령이 왔을 때에 한합니다. 그냥 교회 나오는 것 말고요. 성령이 와서 성령으로 기름 부으면 그 기름 부음을 받은 성도는 황당하고 당황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제가 뭘 어쩌라고요? 그동안 착실하게 내가 내 식대로 산다고 열심히 했는데 지금에 와서 성령 받아버리면 성령 받기 전의 삶과 받은 후의 삶을 어떻게 달리하라는 말입니까?” 난감하지요. 어떻게 해야 기름 부음의 가치가 고스란히 살아나는 그러한 삶을 보여줄 것인가? 상당히 애매합니다.
예후라는 사람이 기름 부음을 받을 때의 이 이야기는 열왕기상 19장 15-17절에 이미 예언되어 있어요.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흘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라고 하나님께서 엘리야한테, 그러니까 엘리사가 선지자 되기 전에 이미 엘리야한테 이미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령,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딴 뜻이 아니고, 세상을 바라볼 때 자신의 기억력으로 세상을 보는 게 아니고, 나보다 이 전에 주어졌던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내력을, 그 스토리를 추적해 보는 거예요.
‘계시는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선지자에게 일방적으로 주셨다. 따라서 내가 지금껏 살아온 것은 이 사람 저 사람 말 듣고 내 인생 살아왔는데 이제는 그것 치우고, 선지자 – 선지자 – 선지자…의 계통에서 따라서 주신 말씀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따라가야’ 되지요.
그렇게 하라고 선지자에게 성신이 오듯이 오늘날 성도에게 성령이 오시는 겁니다. 선지자라는 것은 하늘과 땅을 내통하는 분이에요. 블랙홀이 있다. 블랙홀이란 깜깜한 어둠이지요.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는 깜깜한 어둠. 그런데 블랙홀 안에서 밝은 빛이 나오는데 그 굴을 따라가 보니 웜홀이 나왔다. 웜홀, 벌레의 굴이라, 벌레의 굴처럼 되어서 블랙홀 속의 웜홀로 다른 세계로 빠진다는 뜻이지요.
그러면 그 비밀통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위해서 만들어놓은 통로가 되겠지요. 어두운 세계에서도 빛의 나라로 통신이 가능한 것, 연락책이 가능한 것, 그 터널을 성도에게 알려줍니다. 그러면 성도는 성령 받은 순간 이 마지막 시대에 선지자가 되고, 선지자가 되면 그 통로를 발견하고 그 통로를 통해서 주어지는 주의 말씀이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봐야 되지요.
그런데 블랙홀에서 밝은 세계로 다시 빠져나가는 그 사이의 웜홀에는 뭐가 작용하지 않는가, 시간이 작용하지 않습니다. 물리적인 가설에서 그래요. 실제로는 증명이 된 것은 아니고 가설입니다. 전혀 시간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 시대에서는 늙어 있었는데 저 시대에 가니 그대로 청춘이라든지 그럴 수도 있지요.
따라서 선지자를 따라가는 것, 선지자를 따라가게 되면 세상이 달리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내용이 이렇습니다. 선지자는 선지자대로 일을 하면서도, 그 선지자를 찾지 않고, ‘선지자가 나에게 힘을 부여했다. 나는 그 힘을 갖고 이제 이스라엘 왕으로서 이스라엘 나라를 통치해야겠다. 천하를 통치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예후라는 사람입니다.
예후라는 사람은 북이스라엘 사람이에요. 북이스라엘 사람이 북이스라엘을 새 나라 만든다? 그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말도 안 돼요. 북이스라엘을 북이스라엘로 만드는 지시를 하나님께서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역시 선지자에 나와요, 선지자. 열왕기상 11장 29절부터 보면, 거기에 아히야 선지자가 나타납니다.
열왕기상 11장 29-32절까지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저를 만나니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더라 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두 조각에 찢고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아히야 선지자가 입은 새 옷을 찢어서 몇 조각을 내는가? 12조각을 내요. 그리고 그중에서 10조각을 여로보암에게 주면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31). 그러면 남는 것은 두 지파에요. 12지파가 되어야 야곱의 약속대로 온전한 이스라엘이 되는데 이게 12조각이 났다는 것은 이미 이스라엘은 물 건너갔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10지파 가져가라. 그러면 나머지 두 지파는? 32절에, 두 지파는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찢어버리고 유다 중심, 다윗혈통 중심의 새로운 유다 나라를 새로운 이스라엘의 시작점으로 봐서 아히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줬습니다.
자, 이점은 뭐냐? 북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을 새롭게 한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런 일은 없어요. 그러면 남쪽 유다는 유다인이 새롭게 하느냐? 아닙니다. 그러면 북쪽은 새롭게 되지 못하고 남쪽도 새롭게 되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야곱에게 약속했던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는가?
유다 나라에서 왕이 나타나요. 유다 나라 다윗의 혈통에서 왕이 나타나는데 그 왕이 나타날 때 자칭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간주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 죽이면서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팻말을 떡 붙여놨어요. 그러니까 그걸 보던 유대인들이 기분 되게 나빴지요.
‘유대인의 왕’이라는 거기에 굉장히 신경이 거슬려가지고 빌라도에게 요청했어요.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은 잘못 썼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야 합니다”라고 유대 제사장들이 요청했어요. 요한복음 19장 21절에 있어요.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그런데 빌라도는 그걸 거절했습니다.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22절). 예수님이 하나님의 예언대로 자칭 유대인이 아니고 진짜 유대인의 왕이라면 예수님을 죽이는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고 자칭 유대인이에요, 자칭 유대인. 그리고 그들은 요한복음에 의하면 악마의 자식들이에요.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새롭게 하는 그것도 실패, 혈통적으로 남쪽 유다 출신도 실패.
왜 실패하는가? 중첩된 왕,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준 예언대로 새로운 왕이 된 예후가 설치고 다닙니다. 설치고 다니는데 그 사람이 받은 임무는 뭐냐? “바알을 믿는 자들은 다 죽여라.” 바알 믿는 자는 다 죽이라는 이게 예후 왕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후 왕은 사람을 죽이지 않고 살해했어요. 죽이지 않고 살해했습니다.
죽이는 것과, 살해하는 것의 차이는 뭐냐?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이미 죽은 자에게 죽어 마땅함을 통보하는 행위는 이건 죽이는 거예요. 그런데 ‘저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데 내가 칼 들고 가서 죽인다.’ 할 때는 이것은 죽이는 것이 아니고 살해하는 겁니다. 예후가 왜 죽이지 않고 살해하느냐? 예후는 내가 갖고 있는 힘, 저 바알 종교를 섬기는 자를 죽일 수 있는 힘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여기서 여러분이 잠간 어려운 이야기를 좀 들으세요. 여러분, 일하는 것과 힘을 갖고 행사하는 것이 달라요. 일하는 것은 힘을 전달하는 거예요. 시키는 대로 하는 겁니다. 그런데 힘을 저장한다는 것은, 누가 시켜서 힘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소유하고 있는 힘으로, 내 힘으로 저쪽에 힘을 가함으로써 ‘내 힘에 의해서 죽은 자는 내가 힘 가진 것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너는 죽어야 된다’라는 그런 관계로 엮이게 되는 겁니다.
참 어렵지요? 상당히 어려워요. 이걸 물리학에서 ‘엔트로피’라고 이야기합니다. ‘힘이 일하는 것은 엔트로피법칙이 되지만, 힘을 힘으로 가지는 이것은 엔트로피가 될 수 없다.’ 이런 내용의 과학 용어가 있어요. 어쨌든 간에 선지자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데, 내가 남에게 뭔가 힘을 가할 수 있는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이게 북이스라엘적이고, 아주 쉽게 말해서 ‘바알을 믿는 자를 다 죽이는 본인이 바알을 벗어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이것을 로마서 3장에서는 간단하게 이야기했어요.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예후는 바알 믿는 사람을 다 몰살시키면서도 본인이 그 몰살시키는 행위가 죄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거예요.
‘바알을 치는 나는 의로운 행위를 하는 것이고, 내 손에 죽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기 때문에 죽는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왕이 두 명이라 했지요? 그런데 열왕기하 9장 21절에 보면, “요람이 가로되 메우라 하매 그 병거를 메운지라 이스라엘 왕 요람과 유다 왕 아하시야가 각각 그 병거를 타고 가서 예후를 맞을쌔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토지에서 만나매.”
여기 요람은 예후왕과 더불어 있었던 북이스라엘 왕이예요. 아파서 누워있던 그 왕입니다. 그런데 유다 왕 아하시야가 마차를 타고 거기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예후가 시키는 대로만 안 하고, ‘북이스라엘의 바알 신을 믿는 그 왕족들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을 다 죽이라’고 되어 있는데 거기 있던 유다 왕 아하시야를 죽여버렸어요.
그게 열왕기하 9장 27절에 나옵니다. “유다 왕 아하시야가 이를 보고 동산 정자 길로 도망하니 예후가 쫓아가며 이르되 저도 병거 가운데서 죽이라 하매 이블르암 가까운 구르 비탈에서 치니 저가 므깃도까지 도망하여 거기서 죽은지라.” 오버했어요. 오버했습니다. 여러분, 이 바알 신을 누가 만들었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만들었어요.
하나님의 적은 하나님이 만드신 겁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만이 뭘 갖고 있느냐? 하나님만이 힘을 갖고 있어요. 하나님 외에는 어떤 것도 힘을 소유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우리도 하나님처럼 힘 갖고 있다’고 으스대면서 인간을 지배했잖아요. 하나님께서 사탄으로 하여금 그런 짓을 하도록 유도한 거예요.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의 적이 있으매 그 적에 대한 하나님의 정당성이 의가 되는 거예요. 영원한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으로 스스로 규정할 수 있도록 적을 만드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적이 만든 신이 있는데 그 신이 바알이라는 신이에요. 하나님이 사탄을 통해서 바알신을 유도하게 하신 겁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바알 신을 만드신 것이 되어버렸지요.
그리고 어떤 인간도 이 바알 신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인간도! 바알 종교를 믿는다고 치는 그 예후도 바알 종교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자기가 북쪽 이스라엘의 왕이니까. 그러면 이 서클, 이 원리, 논리를 한꺼번에 집약해서 딱 때려서 이야기한다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인간도 메시아는 아니었다.’ 어떤 인간도 메시아는 아니다.
요 논점, 요 논점을 가지고 거꾸로 순환구조를 다 돌리는 거예요. 어떤 인간도 메시아가 아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것은 왜? 왜? 왜? 하나님의 원수에 매여 있기 때문에 메시아가 아닌 거예요. 그러면 메시아는 우리하고 어떤 차이인 데? 하나님의 원수로부터, 사탄으로부터 유일하게 벗어난 분이 예수님 한 분밖에 없어요.
그러면 예수님만 벗어났다는 말은 다른 쪽은 뭐냐? 마귀의 종으로 종노릇하면서 살아왔다는 거예요. 에베소서 2장 1-2절에 나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그동안 우리가 마귀의 종노릇하면서 살았다는 그게 나오거든요. 아무도 메시아가 될 수 없어요. 그렇다면 그 논점을 가지고 구약을 다시 보겠습니다. 제가 문제를 던지고 답변하겠습니다. 왜 모세는 애굽의 왕이 될 수 없었는가? 모세가 바로의 왕자 입장에 있었으면서도. 왜 하나님은 모세를 추대해서 히브리인들 중에서 장관 세우고, 그리고 히브리인들을 학대하던 애굽의 본토인들을 노예로 삼고, 그쯤 해야 드라마 최종회가 될 만하지 않습니까?
그동안 설움 받던 것 확 풀리지 않습니까? “봤지? 완전히 역전됐잖아, 역전!” 인간의 사는 재미는 복수하는 데 있어요. 복수, 보복하는데. 왜냐하면 내 손으로 보복을 할 경우에만 내가 신이 되고요, 그 복수할 수 있는 자격과 권한을 이미 예비적으로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는 신이 뭐냐? 바알 신입니다. 바알 신은 내가 살아있기 위해서 필요충분조건으로서의 신이에요.
옛날 가난한 사람들은 농사짓던 사람들이거든요. 그러면 적당한 때 단비 오고, 적당한 때 바람 불게 해주고, 적당한 때 필요한 것 다 해주는 그 모든 신,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의 토착민들의 신이 바알 종교예요. “바알한테 빌면 농사 잘된다. 과수 농사도 잘되고 가축도 잘 기르게 된다. 이것은 수백 년, 수천 년 노하우야. 그러니까 여호와 거론하지 마. 우리는 여호와 없어도 풍족하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들 들어오기 전부터도 잘만 살았어.” 거기에 그들은 유혹받은 거예요.
바알 신은 우리가 여기에 존재해야 할 이유의 정당성을 보장해요. 이거 하나에 사람들 뿅 갔습니다. 전쟁할 때도 바알 신을 앞장세워서 전쟁하고, 자기를 지켜주는 거예요. 왜 모세는 애굽 나라의 왕이 되지를 못하는가? 그 이유가 창세기 15장에 이미 예언되어 있습니다. 항상 앞선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서 그 말씀이 어떻게 실현되는가, 어떻게 차질 없이 완성되는가, 그렇게 완성되도록 하나님께서 얼마나 힘을 실어주고 있는가를 봐야되겠지요!
창세기 15장 13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자손을 애굽에서 4백 년 동안 있게 하면서 괴로움을 당하도록 했습니다. 괴로움을 당할 때 초반에 나오게 하지 않고 왜 4대, 4백년동안 자손들이 괴로움을 당하게 하느냐?
그 이유가 창세기 15장 16절에 나옵니다. 대기상태에 있어요. 그게 뭐냐? “네 자손은 사대 만에…” 1대가 백 년이니까, 4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이겁니다. 아직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뭐냐? 거기가 바알 종교 숭배하는 지역이에요, 바알 종교.
바알 종교가 충분하게 또렷하게 여호와를 대립하는 그 레벨까지 커야 됩니다. “많이 컷데이, 요거!” 이런 거 있잖아요. “막묵을라카네!” 그렇습니다. 주께서는 바알 종교가 여호와 종교와 맞먹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여호와 믿는 백성들이 살고 있던 남북 나라 전체를 바알 종교가 접수케 하셨습니다. 접수하는 방법은 뭐냐? 죽이는 방법이 아니고, 살해하는 방법이에요.
죽인다는 것은, 이미 죽은 자에게 하나님께서 ‘너 죽은 자다’ 하고 통보하는 그것이 죽이는 것이고, 살해한다는 것은 ‘너나 나나 살아있잖아. 그런데 우리가 바알 종교 믿거든. 살아있는 너 죽여버린다. 겁나지? 겁나면 여호와 버리고 복종해.’ 이게 바로 사사기부터 내려온 살해위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누가 나를 죽여서 내가 죽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나의 언약에 의해서, 약속에 의해서 내가 알아서 죽는다, 나는 스스로 죽는다’고 했어요. 요한복음 10장 17-18절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 스스로 버린다고 했어요. 스스로 버림받기 위해서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죽였던 겁니다. 아버지하고 예수님하고 창세 전에 한 약속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버린 것도 되고, 예수님 스스로 죽는 것도 되고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살해함으로써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르는 자가 아니고 자기 내부에 힘을 비축하는 자들이었다는 것이 들통나요.
힘을 비축하면 그것은 여호와 종교가 아니고, 이름을 ‘여호와’라 해도 소용없어요, 그것은 바알 종교의 특징이 그래요. 비축된 힘이 왕이 되고, 왕은 비축된 힘을 활용함으로써 그 힘에 모든 백성을 굴복시킴으로써 국가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아까 그 질문 다시 하겠습니다. ‘왜 모세는 애굽 나라의 왕이 될 수 없는가?’
기존의 인간세계가 생각했던 그 나라의 요건이 빠져있는 나라를 하나님께서는 생각한 나라에요. 기존의 인간들이 생각한 나라, 힘을 비축해서 만든 나라, 그 힘으로 타민족이나 다른 사람을 노예 삼고 지배하는 식으로 힘의 관계망으로 있는 나라가 아닌 나라, 그 나라를 모세는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기존에 힘으로 유지되는 그 나라를 뚫고 기존의 나라에서 상상도 못 하는 새로운 나라가 등장해야 되겠지요. 지금 예후는 하나님 믿고 ‘하나님이 나보고 바알 처리하라고 선지자가 예언했어. 내가 바알 종교 믿는 자를 죽이는 것은 정당해.’ 이렇게 날뛰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이스라엘 왕답다’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스라엘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개선될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남쪽에도 없고 북쪽에도 없어요. 예후는 자기가 오버하고 있다는 것, 그것을 몰라요. 여러분, 태양이 요새 뜨겁지요. 태양에서 열이 나고 빛이 나는 그 이유가 무엇인가? 오랫동안 알지 못했는데 과학자들이 연구했어요. 태양 중심의 큰 온도와 압력 때문에 수소 원자들이 전자를 잃어버리면 순수한 수소 양성자들만 남거든요.
수소 양성자 네 개가 뭉쳐서 헬륨 원자 1개가 되는 그 과정을 핵융합이라 합니다. 이때 융합되면서 에너지의 차이가 생겨요. 헬륨은 0.7퍼센트만큼 양성자 네 개를 합친 것보다 에너지가 더 적어요. 양성자 네 개가 헬륨으로 되면서 남아도는 힘이 있어요. 그 남아도는 힘이 E=mc^2이라는 그 공식에 의해서 폭발하니까 그 폭발하는 힘이 저 먼 태양에서 지구까지 도달하는 거예요.
지금 예후는 힘이 남아돌았어요. 힘이 남아돌아서 북쪽만 바알 종교 믿는 걸 없애도록 되어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게 나라 되는 건 아니에요. 왜? 힘을 의지하는 본인이 바알 종교와 일치한다는 사실은 모르고 ‘하여튼 나는 바알 종교가 적이다.’ 하고 생각했는데 그 힘을 어디까지 사용했는가 하면, 다윗의 등불, 다윗의 나라인 유다 나라 왕을 죽인 거예요.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들어 버렸어요. 태양이 너무 빛나서, 태양이 너무 뜨거워서 오버한 거예요. 자 이쯤 해서 여러분들은, ‘그렇다면, 그렇다면 기존의 나라처럼 힘을 비축해서 단단히 세워지는 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세워집니까?’라고 여러분들이 궁금해하실 거예요. 궁금합니까?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세워지는가? 일단 권력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13장 26절에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26-27절 보면,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질문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습니까?”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습니까?’라고 질문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28절에,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그랬어요. 뽑을까요? 29절에 해답이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방법이 나옵니다. “주인이 가로되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가만두어라. 가라지 뽑다가 알곡 다친다. 가만두어라.” 가만두어라! 이 종의 특징은 뭐냐? “우리가 뽑을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가만둬, 가만둬! 네가 뽑고 자시고 하지 마.” 인간이 인간의 나라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자격은 애초부터 없다는 거예요,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우리에게 일 맡길 이유가 없잖아요. ‘우리가 힘을 발휘하고, 기도발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이 필히 나오겠죠.
요한복음 12장 25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가 돼야 해요.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가 돼야 한다. 예후는 자기 생명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왕이니까 왕답게 설쳐야 되지, 그거 하느라 바빠요. ‘내가 얼마나 힘이 있는 줄 알아? 이거 하나님이 주신 것이야. 한번 발휘해 봐?’
주님의 방법은 “가만두어라!” 예후는 “제가 뽑겠나이다.” 이 예후의 특징이 그대로 오늘날 우리의 특징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주여, 주를 위해서 제가 무엇을 할까요?” “너나 미워하세요, 너나. 너나 잘하세요!” 잘할 것도 없어요. “너 자신이 얼마나 미워서 제거해야 되는 대상인지, 그거나 정신 차려서 아세요. 지금껏 네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지금껏 네가 살아온 것이 뭐가 있다고! 너는 네가 가라지인 줄 모르고 알곡인 줄 착각했지. 그냥 가만있어! 하나님 일은 내가 해.”
여기서 그 이야기가 섭섭하게 들리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예요. 그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여력이, 비축되어 있는 힘이 내 안에 많이 있다고 여기고, 내 안에 힘이 있는 그것을 모아서 그게 나라고, 그 나를 안 미워하고, 안 미워하고 도리어 반대로 남한테 나를 자랑질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 이리 나와, 나하고 한번 붙어보자.” 그래서 제가 아까 그랬잖아요. 인간의 삶의 동기는 하나, 복수하는 심보예요, 복수하는 심보. 복수하는 심보입니다. ‘너 프랑스 나와, 나 스페인하고 붙자.’ 이런 거 있잖아요. 누구 편 먹고 대리 싸움 붙이는 거, 닭싸움이나 개싸움 붙이는 거, 그걸 월드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월드컵.
주께서는 우리나라를 사랑하셔서 애초에 32강에서 똑 떨어지게 만들었어요. 아예 미워하도록, 스스로 축구협회를 미워하도록 만드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바알 종교, 힘을 비축하는 종교, 내가 살아있잖아, 살아있는 나를 더 살게 하려는…, ‘하나님이여, 저에게 더 살 힘이 필요합니다’라고 입만 열면 요구하고 요청하고 기도하는 우리, ‘이러한 우리 자신을 미워해야 생명이다. 그렇지 않으면, 미워하지 않으면 너는 생명이 없다.’
이유가 뭐냐? ‘너 메시아 아니거든, 너 메시아 아니잖아!’ 우리가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메시아도 모르는 게, 하나님 아버지도 모르는 게, 아버지 아는 척하지 마!’ 아버지 아시는 분은 예수님, 오직 메시아밖에 없어요. 그러면 엘리야는 뭡니까, 모세는 뭡니까?
그 점에서 누가복음 9장 31절에 보면,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나타나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주님, 저희를 위하여 언제 별세하십니까?” 그 이야기했어요.
그러니까 모세, 엘리야가 우리 보기에는 대단한 인물이지만 모세, 엘리야는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들 선지자 관계에서 뭐냐 하면, 일을 하면 할수록 자기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다.’ 이 말이에요. 메시아 아니면 왕이 아니잖아요. 메시아 아니면 왕이 아니에요. 그 나라의 왕이 아니에요. 왕은 따로 오셔요.
자기 백성이라고 우기는, 하나님 백성이라고 우기는 그들에게 살해당하는 모습으로 유일한 제물로서, 죽는 제물로서 오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밖에 없어요.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 기쁜 소식이라는 점에 대해서…, 끝으로 이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분명히 하세요. 기쁜 소식에 자꾸 누가 끼느냐 하면, 기쁜 소식을 지적으로 알고 있는 내가 기쁜 소식에 방해자가 돼요. 마치 내가 예후예요, 예후. 복음 알았으니까 뭐 큰 일 한번 해보자고? 큰 일? 우리는 큰 일 할 메시아가 아닌데, 큰 일 할 생각조차 하지 마세요.
제가 지난 부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저한테 많은 사람들이 목사님, 저 인천에 있는데요, 서울에 있는데요, 수원에 있는데요, 추천해 줄 만한 교회 있으면 추천해 주세요. 어떤 목사님을 찾아가면 됩니까, 그래서 제가 말하죠. 두 가지 조건을 갖추세요. 첫째는 뭐냐 하면, 자기가 사기꾼이라는 것을 설교 시간에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
둘째 하면 또 첫째 잊어버리지 마세요. ‘내가 사기꾼입니다.’ 두 번째, ‘나는 교회를 말아먹으러 온 사람입니다.’ 부동산, 건물 이런 것이 교회가 아니라는 것, 교회를 말아먹으러 온 사람이라는 것. 왜 그런 쪽의 목사를 추천하냐 하면, 인간의 교회를 말아먹어야 주님이 세운 교회가 멀쩡하다는 사실을 드러낼 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자기가 사기꾼이라는 것은 자기가 메시아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진짜 목사가 아니고, 오늘 이 시간에 갑자기 하나 더 생각나는데, 하나 더 추가시키겠습니다. 세 번째가 뭐냐 하면, 그게 기쁜 거예요. 그 이야기하는 게 너무나 기쁘고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그 이유가 요한, 그다음에 뭡니까? 요한, 복음이죠. 요한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 마가복음, 기쁜 소식. 그 기쁜 소식이 뭐냐?
요한복음 14장 1절에서 3절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선지자가 뱉은 말씀이기 때문에 반드시, 선지자가 내뱉은 말씀은 반드시 실현이 되죠.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너무너무 기쁘죠. 왜? 하늘에서 내통하는 선지자의 말씀이기 때문에, 하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기쁨이 있다면 까짓거, 사기꾼이라는, –이거 바른 소리다- 사기꾼, 우리 교회 망했습니다. 이거 한다고 그게 그렇게 고민거리가 되고, 근심거리가 되고, 내 기쁨을 앗아갈 요소가 됩니까? 아니죠. 그래서 비로소 우리는 압니다. ‘가만두어라, 가만두어라! 수학 100점? 국어 100점? 가만두어라.’ 그다음에 뭐가 또 50점 맞을지를 몰라요.
‘가만두어라.’ ‘가만두어라’라는 말은 ‘가만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가만두어라’, 그다음에 우리 주께서 시키시는 일을 하면,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우리를 안 미워하고, 왜 나 위주로 살아가는 바알 신앙 종교인인지가 들통나는 기쁨, 그것이 바로 복음의 기쁨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메시아도 아닌 주제에 떠들면서 음흉하게 자기 챙길 것을 챙기는 이중플레이가 우리가 바알의 종교인으로 출발했기에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 요건인 것을 이제야 발견하는 기쁨으로 주께 찬송하면서 감사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