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잠깐했던 것부터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간단하게 설명해 드린 내용을 정리해 보면, '신'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최초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신을 찾았다는 겁니다. “사냥을 할 때 사냥감이 지금 어디쯤 있는지 미리 저희에게 알려주옵소서, 신이여.” 이 '신'이라고 할 때는 항상 자기 이익과 무관한 신이 아닙니다. 내가 미처 모르는 어떤 다른 힘이 있다고 상정하고, 내가 살아가고 생존하는 데 어려울 때 그때 신이 나에게 힘이 돼 준다면, 나는 살게 되고 그것이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이라 믿었던 거죠. 행복으로요.
그런데 이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사람이 행복해서 뭐 할 거냐?" 하는 그 문제에 대해 비로소 해답을 제시해요. 그전에 있던 모든 철학과 신화는 뭐냐 하면, 행복. "그냥 내가 행복하면 돼. 행복이 최고야." 했습니다. 그 당시의 행복이 뭐냐 하면 바로 '생존'이었습니다. 워낙 살기 힘드니까요. 이건 오늘날 종교도 마찬가지죠. 신을 왜 찾겠습니까? 자기 힘으로 버틸 수 있으면, 구태여 신에게 몰입해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광신도'라는 평가를 받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모르죠, 또 재벌이 되어서 돈에 환멸을 느껴서 심심풀이로 신을 찾아볼까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 옛날 삼성의 이병철 회장도 마지막 죽기 직전에 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50가지인가, 100가지인가 질문을 남겼었습니다. "신은 누구인가?",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신은 어떻게 일하는가?" 거기에 대해서 어떤 신부가 답변을 한 게 아마 책으로 나왔을 겁니다. 이처럼 신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내 생존에 필요하고, 이왕 사는 것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거였습니다.
그런데 그 '행복'이라는 선을 넘으려면, 이런 발상이 있어야 돼요. "내가 행복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나는 신이 누군지 궁금하다. 내 행복과 관계없이.” 그런데 왜 궁금하냐? “신에게 복종하는 게 마땅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뭐가 됩니까? 이것은 나의 행복도 아니고, 나의 생존도 아닙니다. 그게 바로 '사명'이 되는 거죠. "신이 계시기에 나는 존재한다. 신이 있기에 나는 경배해야 한다." 이걸 누가 이야기했느냐? 바로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이 이야기한 겁니다. AD 5세기경의 유명한 사람이죠. 그 사람이 "나는 왜 신을 믿느냐? 존재하기 때문에 믿는다.” “그럼 당신의 행복은?” ”내 행복은 안중 없어.” ”그럼 당신의 생존은?“ ”생존은 안중에 없어.” ”내가 있는 것보다 먼저 계시기에 나는 마땅히 경배하고 섬긴다"라고 했습니다. 교회에서는 흔히 이걸 가지고 '사명' 또는 '사명감'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래서 이 강의의 주제가, “신학자들”. 신학자들의 속은 어떤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행복이나 생존을 넘어선 사람들입니다. 그것마저 고려하지 않고, 그저 신이 계시기에 경배하고 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나는 신을 알고자 한다” 그런 쪽에 속한 사람이 신학자라고 보면 돼요. 속은 어떤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미리 말씀드리는데, 이것이 일관되게 쭉 갔을까요, 변질되었을까요? 변질되었습니다. 왜 변질되었냐 하면, 자기 혼자 믿을 때는 그냥 신에게 복종하면 되는데, 로마 시대가 커지면서 '교회'가 생깁니다. 교회가 생기니까 그때부터 교회의 권력, 교회가 할 수 있는 큰소리, 교회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며 일종의 파워 단체이자 이익 단체가 됩니다. 교회 내에서 자기 생계를 보장받고, 단골을 얻고자 하고, 교회를 통해서 구제를 받거나 생계비를 지원받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익 단체로 결합된 것이죠.
그때부터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는 관심이 없고, "교회 오시면 여러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사 가는 날짜 문제, 고부간의 갈등, 시름시름 앓는 병, 이유 없이 떨어지는 아이 성적. 이건 분명히 신을 잘못 골라서 발생한 결과니까 제대로 된 신을 골라서 교회에 오시면, 그 보상으로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이 또는 신이 또는 예수님이 생존과 행복을 줄 것입니다"라고 하게 된 겁니다.
이 행복이란 말을, 교회에서는 여기서 '행' 자를 떼버립니다. 떼면 무슨 글자가 남습니까? '복'이죠. 복인데, 위에서 준다고 해서 이걸 뭐라고 합니까? '축복'이라고 하는 거예요. 축복. 그런데 '축복'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되면, 반드시 쌍으로 나타나는 개념이 있습니다. 바로 '저주'가 되는 거예요. 이것은 일반 교회 오시는 교인들이 이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에, 그 교인을 관리하고 키워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목회자 입장에서는 바로 축복과 저주를 기본 바탕으로 교회를 꾸려나갈 수밖에 없어요. "여러분, 잘 오셨습니다. 우리 교회 오시면 복 받습니다. 다른 데 갔으면 저주받을 뻔했어요. 이렇게 내가 시키는 대로 십일조 하시고 주일 성수하시면 반드시 복이 올 겁니다." 그것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 성경적인 진리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바로 이것을 원한다는 데 목회자의 인식이 있는 겁니다. 고객이 원하는 걸 줘야 그 사업이 번창할 게 아니겠습니까? 손님이 왕인데. 소비자가 왕인데요.
우리가 지금 신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처음에 신학적 뿌리를 이야기를 안 했어요. 이게 너무 어렵기 때문에. 신학의 뿌리부터 하면 이건 골치 아프기 때문에. 어쨌든 간에 제가 딱 끊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처음에 신학자들은 무엇을 포기했습니까? 인간의 행복을 포기하고 인간의 뭘 포기했다? 인간의 생존을 포기한 거예요. 왜? "신이 계시기에 내가 있고, 나는 신에게 복종하면 끝이다." 모든 인생의 해답은 그걸로 종결된 거예요. 가난하게 하든지 불에 태워 죽이든,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기꺼이 수용하겠습니다”라는 것이 초기 신학자들의 마음 자세였습니다. 그게 신약성경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죠.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었거든요.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해서 노후 대책이 보장되거나 가족들이 연금을 받는 것도 아니었어요.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성령이 충만해서 설교했더니 날아온 것은 돌이었고, 그 돌을 그대로 맞았고, 죽고 난 뒤에는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서서 영접하더라. 그래서 스데반 집사가 마지막에 한 소리가 뭡니까? "주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반복하며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그 이야기를 오늘날 목회자들이, 설교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야, 참 멋진 신앙인이다. 하지만 나는 저렇게까지는 못 해. 나는 거기까지는 안 나가겠어. 나는 그 이야기를 한두 번 들으면 몰라도, 계속 저런 이야기만 반복하면 내가 정작 노리고 온 '복 받는 법'은 언제 알려주나?" 하게 됩니다. 복이라는 목적을 위하여 그런 방식을 이야기해 주면 그걸로 우리는 수월할 텐데. "십일조를 하시면 복 받습니다", "주일 성수를 하시면 복 받습니다"처럼 수단과 목적을 딱딱 맞춰서 알려주면 알아듣기 쉽고 편하잖아요. 만약 잘 안되어도 "내 믿음이 부족한 탓이지 말씀은 틀리지 않았다"라고 정리하는 게 교인들 입장에서는 훨씬 마음이 편합니다.
그러나 신학의 원래 정신은 생존이나 축복, 저주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을 아니라고 단정 짓기 위해서, 신학이 오기 전에 인간의 심성 속에 신을 어떤 식으로 이해했는가? 그걸 지난 시간에 언급했던 겁니다. 동굴 이야기 등을 통해 설명했듯이, 고대 사회부터 인간은 너무 힘든 인생을 살기 때문에 필요한 정보를 얻고자 전능한 신의 개념을 끌어왔습니다. 구석기 시대, 이미 만 년, 2만 년, 3만 년 전 역사 이전부터 이미 그렇게 해왔단 말이죠.
그렇다면 그것이 지금 이 시대에는 사라졌을까요? 안 사라졌을까요? 이게 안 사라졌습니다. 합리적인 방법으로 트릭을 썼을 뿐이지, 인간의 심성 속에는 "지성이면 감천이다", "정성을 다하면 하늘도 감동한다"라는 그 논리가 지워지지 않습니다. 내가 성의를 다하면 하나님도 양심이 있으니 내 성의에 반응할 것이고, 나는 교회에 가는 만큼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기복적인 생각이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겁니다. 기복 신앙이라고 욕먹을까 봐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요. 교회나 절에 가서 봉사하며 땀 흘릴 때도 "언젠가는 이것이 내 자손 대대로 복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종교 유무를 떠나 모든 인간의 기본 심성입니다.
이 기본적 종교 심성에서 발전한 것이 바로 '이성'입니다. 이성. 따지는 거예요. 차이점이 뭐냐 하면, 종교적 심성은 '무질서'입니다. 무질서. 이 무질서를 지난 시간에 뭐라고 했냐 하면 '신들렸다'이고, 대표적인 무질서가 누구냐 하면 인물로는 '무당'입니다. 무당은 논리적으로 납득이 안 돼요.
"당신은 어떻게 해서 신들렸습니까?"
"글쎄요,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니까요. 신병을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운명인가 봐요."
“당신은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인데 왜 무당이 되었습니까?”
“글쎄, 그것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니까요?”
"당신이 섬기는 신은 누구입니까?"
"이순신 장군 신입니다", "강감찬 신입니다", "을지문덕 신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미래를 어떻게 예언하느냐 물으면 쌀을 뿌리거나 부적을 써서 귀신과 소통한다든지 부채도사를 부른다든지 합니다. ”저 사람은 죽은 조상이 구천을 떠돌고 있기 때문에 빨리 천도재를 드려야 저 사람의 자손은 재앙이 없다.“ 그런 중개인으로 살았는데, 놀랍게도 한민족이 우랄-알타이어족 계통입니다. 쉽게 말해서 샤머니즘의 후손들입니다. 단군이 조상이다, 단군이 뭐냐 하면 그 지역의 유력한 무당이었어요. 우리는 무당의 후손들입니다.
옛날 드라마 <주몽> 같은 걸 보면, 왕이 되는 과정에는 반드시 신화가 깔려 있습니다. 어머니 꿈에 신이 나타났다거나, 삼족오가 날아왔다거나 하는 식이죠. 박혁거세 신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보기에 눈에는 구닥다리 옛날 비과학적인 미신이 넘치는 옛날이야기라고 느껴지겠지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 종교적 신들림이 현대에는 '이성'의 형태로 모습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지금도 나로호, 인공위성이나 로켓을 쏘아 올릴 때 뭐 하는 줄 알아요? 고사를 지냅니다. 영화 제작이 끝나거나 시작할 때 미남미녀 배우들이 돼지 코에 5만 원 권 지폐를 꽂고 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건물을 지을 때 상량식을 하고 공장을 지을 때 제사를 지냅니다. 그리고 이것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바로 '조상 제사'입니다. 모든 민족의 공통점이 있다면, 딱 한 가지, 조상 제사입니다. 지금도 한국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에는 조상 제사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기독교화되면서 '추도 예배'로 바뀌었을 뿐, 밑바닥에는 항상 조상 제사 심성이 깔려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 조상 제사를 '우상숭배'로 간주하고 여호와의 날카로운 공격이 주어집니다. 백성들에게 조상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했을 때, 백성들이 순순히 동의했겠습니까? 거부했겠어요? 거부합니다. 거부해요. 말로는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택한 백성입니다" 하지만, 심성을 속일 수 없어요. 우리의 본성은 속일 수가 없거든요.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감정적인 존재입니다. 누가 밉다? 이거는 이유가 없어요. 누가 미운 데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미운 겁니다. 누가 좋다? 이유가 없어요. 그냥 좋은 거예요. 인간의 감정은 이성으로 억누를 수 있지만, 꿈속에까지 나타납니다. 이것은 제한할 수 없어요.
그래서 현대 신학과 철학에서는 인간의 기본 심성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현대 철학에서는, 뭐냐 하면 이것은 셰익스피어가 말했어요.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입니다. 모든 심성은 내가, 남이 아닙니다. ’내가’ 사느냐 아니면 ‘내가’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죽으면 인생 실패고 계속 살면 성공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느냐 죽느냐 사이에 나오는 아주 중요한 요소가 하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부분인데요, 바로 '복수심'입니다. 이것이 인간 모든 행함의 원천입니다. 모든 행함의 원천은 주체할 수 없는 복수심이에요.
예를 들어,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공부해라, 공부해라" 잔소리를 듣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애가 반항하다가 마음을 잡고 수능을 앞두고 열심히 공부하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병으로 돌아가셨어요. 나중에 아이가 서울대학교에 합격한 뒤, 막걸리를 들고 아버지 무덤에 찾아가 부둥켜울며 절을 합니다. "아버지 보십시오! 제가 아버지 말씀대로 서울대에 합격했습니다.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고 울면서 절을 한다? 이게 무슨 심리냐 하면, 역설적이게도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의 변형입니다. 사람은 복수하고 싶은 마음 없으면 행동하지 않게 되어 있어요, 모든 게. 어린 아이들이 젖 줄 때는 엄마 엄마 찾지요? 젖 안 줘 보세요. 울지요? 그 안에는 복수심이 담겨 있는 겁니다.
엠페도클레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기독교 이전의 고대 철학자들은 일찍이 이것을 밝혀냈습니다. 모든 것을 '대립과 경쟁'으로 보았습니다. 대립과 경쟁. 옛 철학자들은 '신들림'을 극복하고 신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이 만들어 놓은 만물의 변화에 주목했습니다. "신은 왜 이렇게 서로 다른 것들을 만들어 놓았을까? 그 원초적 재료는 무엇일까?" 탈레스는 '물(습기)'이라고 했고, “어떤 것으로 정할 수 없어”라고 한 아낙시만드로스라는 사람도 있어요. 이런 사람들의 주장에서 공통점을 찾아내야 하는데, 세상의 모든 변화를 그냥 변화로 보지 말고, 엠페도클레스라는 사람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했는데요. 그게 뭐냐? 모든 변화는 '대립과 경쟁'이거든요. 이걸 그 사람은 달리 표현했어요. 뭐냐 하면, 이를 '사랑과 미움'이라고 했습니다. 엠페도클레스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세상의 모든 것은 사랑과 미움으로 된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이 사랑과 미움으로 움직인다는 말은, 인간이 이성을 말하지만 이성은 결과를 정리할 뿐이고, 실제로 인간을 움직이는 동인은 감정(사랑과 미움)이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절에 다니고 해도, 사람 신을 믿고 신의 말씀대로 산다 하지만, 욱하는 성질, 상황이 닥쳤을 때 치밀어 오르는 '욱하는 성질'이 아무리 도 닦아도 소멸될까요? 안 될까요? 안 되지요. 왜냐? 새로운 사태가 벌어지게 되면, 아무리 참고 참고 절제하고 절제해도 새로운 사태가 벌어지면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혹시 길에서 수녀님들을 유심히 관찰해 보세요. 수녀분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제가 관찰하기로는 수녀분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남의 일에 간섭을 안 해요. 차 안에서 아이들이 떠들어도 입을 다물고 가만히 계십니다. 이미 수녀복 복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가끔 성질나는 중들은 승복 입고 달려들지만, 수녀들은 왜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을까? 왜 그렇게 소극적일까? 그것은 잔챙이들하고 안 논다는 이야기입니다. 굵직한 거와 놀아요. 국정원, 천안함, 탈북자 문제. 이게 어디서 나온 버릇이냐 하면, 중세 시대부터 신부나 수녀는 권력자들과 상대했지, 잔챙이하고 놀지 않았어요. 걔들은 격이 낮은 사람들이에요. 자기는 도를 닦았기 때문에 신의 형상에 누적된 사람입니다. 차분하게. 신이 차분하거든요. 이것도 다 철학에서 나온 거예요. 신이 차분하다고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이게 플라톤에서 나온 이야기예요. 위로 올라갈수록 신은 요동하지 않고 침착하며, 하급 신들일수록 촐랑대고 화를 잘 낸다고 했습니다.
이 플라톤 사상이 2세기경 '영지주의(Gnosticism)'로 나타납니다. 영지주의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인간에게 소망을 준다는 거예요. 영지주의가 그 당시에 많이 퍼졌던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에게 희망을 준다는 겁니다. 보이즈 비 앰비셔스(Boys, be ambitious).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영지주의가 야망을 가졌어요. 이 야망은 어떤 야망이냐 하면, "당신의 신분이나 직업과 관계없이, 도를 닦으면 당신도 신이 될 수 있다. 지금은 낮은 계급이라 서러움을 받지만, 여러분들이 보란 듯이 도 닦아서 신의 나라에 갈 때는 큰소리치라"라고 그러한 희망을 그 당시 사람들에게 유포를 시켰습니다. 많은 로마 시민들 가운데서 잘난 사람들 안 오고 서민들은 거기에 들끓었습니다. 게다가 영지주의는 예수님까지 거론했어요. 예수님까지 포용을 했습니다. 포용을 해서, "예수를 믿고 구원받되, 구체적인 해탈과 도를 닦는 방법은 영지주의에서 배우라"고 가르쳤습니다. 기존 신학자들이 보기에 저게 기독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서 아주 헷갈리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아하! 내가 신학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교회가 신학을 만들어서 이걸 유포를 시켜서, 저 영지주의를 타파해야 되겠다”는 그러한 아이디어가 생기는 게, 여기서 최초의 신학 정립이 이루어집니다. 우리 강의의 주제가 뭐냐 하면 80여 명의 신학자잖아요. "최초의 신학이 어디서 나왔느냐?" 누가 묻는다 하면요, "영지주의 때문에 나왔다"라고 답하면 100점입니다. 영지주의라 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은 서른 몇 개의 단계가 있고, 그 단계를 하나씩 밟아 가다 보면 신에게 도달될 수 있다는 사상입니다. 영지주의를 깨부수기 위해 나선 대표적인 교부 신학자가 바로 터툴리안(테르툴리아누스), 이레니우스(이레네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오리게네스) 같은 사람들입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영지주의가 다 퍼졌습니다. 이 신학자들이 영지주의를 공격하면서 신학 체계를 정립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 맞지요? 사람은 적과 대립하고 경쟁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자아)이 구축되는 겁니다. 자아가 구축돼요. 아이들도 대안학교 보내지 말고, 말썽꾸러기라고 공립학교에 보내야 될 이유가, 서로 미워하고 싸우기도 하면서 면역성, 사회에 적응하는 적응성이 형성돼요. 무조건 대안학교 보내면 면역성 없는 비닐하우스 화초처럼 되잖아요. 밖에 나가면 못 살아요. 세상 속에서 서로 미워하고 싸우기도 하면서 사회적 면역성을 키워야 하죠. 모든 것은 대립과 경쟁을 통해 스스로의 적을 만들고, 적과 싸우면서 그 결과물로 “나는 이런 존재라”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게 신이 만든 사회예요. 그렇다면 그걸 소급해서 보면, 신은 뭐다? 대립과 경쟁을 유발시키는 그런 존재.
제가 처음에 신에 대해서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신을 찾았다고 했죠?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가만히 있으면 행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가서 싸워 이겨야 그것이 나한테는 행복“이 되겠지요? 그때부터 필요한 것이 '무기'가 좋아야 승리하는 겁니다. 이 시대의 무기는 뭡니까? 이 머리(지식)가 좋아야 하고,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의사나 변호사가 되면 돈을 벌어, 돈이 있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이죠.
그러나 오늘 강의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세상의 이방 신들은 '행복'을 위한 신, 그것이 이방 신이라면 기독교의 신은 뭐라고 했습니까? 기독교의 신은 뭘 극복한다? 보통 세상 신은 행복이 끝이에요. 뭐든지 행복하기 위해 믿는데. 기독교의 신은 그것을 넘어서죠. 그것을 넘어서면 무엇이 있습니까? 바로 '사명'입니다. "신이 계시기에 나는 신을 섬길 뿐이다"라는 사명. 돈이나 나의 개인적인 행복 여부와 상관없이, 비록 내가 불행해진다 할지라도 그것이 신의 뜻이고 신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것. 이것이 초기 신학자들의 고상한 사상이었습니다. 상당히 고상해 보이지요? 속은 어떨지 모르지만 겉은 상당히 고상해 보입니다.
옛날 신화 시대에는 사람들이 주로 '여신'을 섬겼습니다. 여신은 풍요로운 가슴과 자궁이 있어서 자식을 낳아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아기를 낳아도 죽는 경우가 많아 생존이 힘들었기에, 신의 힘을 빌려야 행복하니까, 번성하고자 여신을 섬긴 겁니다. BC 5세기경 철학자 크세노파네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에게 신이 있다면 소의 모습일 것이고, 말에게 신이 있다면 말의 모습일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그려내는 신은 기껏해야 인간의 모습을 닮을 수밖에 없다.“ 훗날 이것을 그대로 잘 다듬은 사람이 나중에 등장해요. 나중에 마르크스 이전에 나온 철학자인데, 이름이 이렇습니다. 포이어바흐. 우리가 신학자를 공부하다 보니까 이름이 많이 나와요. 여러분들은 교재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외울 필요가 없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왜 사람은 신을 찾느냐?“하는 문제와, ”그 진짜 신의 정체가 뭐냐?“ 그런 걸 보는 거예요. 그런 걸 생각하는 거예요.
이해를 돕기 위해 옛날 영화 <부시맨> 이야기 하나 해볼까요? 경비행기를 타고 가던 조종사가 먹다 버린 코카콜라 병이 아프리카 부시맨 마을에 떨어집니다. 부시맨이 사냥하러 갔다가 딱 보니까 코카콜라가 있거든요. 코카콜라. 이쁘장한. 이것은 위에서 왔기 때문에, 이것은 철학적으로 아주 중요합니다. 현재 내가 노동한 것 외에 이질적인 요소잖아요. 이질적인 요소는 무조건 신적인 거예요. 이질적인 거, 낯선 것. 이것은 신이 나에게 허락도 없이 가져다 놓은 것이다. ”이것은 신이 준 선물이다.”
두 번째, 이것을 신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 제가 뭐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그 부시맨이 그 코카콜라 병을 되돌려주는 방법이 뭐였습니까? 상당히 재밌죠? 위에서 떨어졌는데 위로 던진다고 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코카콜라를 다시 신에게 돌리는 방법은? 잘 들으셔야 해요. 평소에 자기 집에서 지평선 끝을 봐요. 그러면 눈에 보이는 지평선은 내가 다녔던 나의 바운더리, 범위예요. 그러면 신은 어디 있느냐 하면 내가 미처 가지 못한 그 바깥 영역에 신이 살고 계시는 겁니다. 문화인류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원주민들의 생각을 연구해 보니, 원주민들은 ‘신은 숲에 있다’는 겁니다. 왜? 사람은 숲에 잘 안 들어가니까. 숲에는 정령이 있고 요정이 있어요. 옛날에는 그랬어요.
어느 날 부시맨이 행장을 차리고 여행 장비를 차리고 코카콜라를 가지고 그 경계선이라 여겼던 그 언덕에 가서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 제사 드리고 병을 놔두고 자기는 와버려요. 방금 제가 무슨 단어를 썼습니까? 제사지요. 제사가 신과 접촉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 제사입니다. 창세기 4장에 가인이 제사 드리지요? 그게 모든 인간의 마지막이 뭐냐 하면 그거예요. 조상 제사도 마찬가지고. 제사.
제사에는 4가지가 필요합니다. 제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제물입니다. 몰렉이라는 신은요, 아들, 남자 아이를 받는 그런 신이에요. 그리고 AD 6세기경에 마야 문명에서는 가뭄이 들면 젊은 처녀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현재 중남미 멕시코는 마야 문명이고요, 남미는 잉카 문명이에요. 지금도 마야 문명의 피라미드가 있어요. 그 제사장들이 제물을 바쳐요. 바칠 때 우리 같으면 ”와, 제사장 좋겠다. 자기는 제사만 드리면 되고 사람들은 자기를 대우하니까. 야, 제사장 직업 하나 괜찮겠다“ 싶지요? 만약에 제사를 드렸는데도 비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백성들이 제사장과 그 가족들까지 전부 죽여버렸습니다. 구약 다니엘서에서도 나오죠. 다니엘에는 꿈을 해몽하는 신하가 느부갓네살 왕 옆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왕이 꿈을 꿨을 때 이 꿈을 꾸고는 "내 꿈의 내용과 해석을 다 맞추지 못하면 나를 속인 것으로 알고 너희 지혜자들을 다 죽이겠다"라고 협박하잖아요. 무슨 수로 알겠어요? ”네가 꿈꾼 것을 왜 내가 알아야 하는데?“ 이게 말이 안 되거든요. 그래서 너무 억울해서 ”임금님, 억측이십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꿈을 이야기하시면 우리는 그것을 해석해 드릴 용의는 있지만, 내가 꾼 꿈을 알아내라는 것은 이것은 너무 심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하니까 왕이 하는 말이 ”그러니까 너희가 평소에 뭐라고 했느냐? 우리는 신의 뜻을 아는 사람이라고 했잖아. 왜 이제 와서 딴소리냐. 다 죽어라!“ 이렇게 나온 겁니다. 이렇게 다 죽어야 한다면 다니엘도 죽어야 했던 겁니다. 다니엘도 몰라요. 다니엘이 남 꿈꾼 걸 어떻게 압니까? 몰라요. 그런데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살짝 정보를 줬지요. 그 다음 날 아침에 ”임금님, 이런 꿈 꿨지요?“ ”허걱!“ 가만 돌아보니까 꾼 꿈이 맞거든요. 그래서 ”너만이 진짜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이고 나머지는 전부 다 사기꾼이니 다 죽여라“ 할 때에 다니엘이 ”살려 주소. 어차피 사기꾼인데 뭐 뭐“ 해가지고 거기서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제물을 정해야 합니다. 제물은 누가 정하죠? 제물 바치는 사람이 정하겠죠, 제사장. 제물과 제사장 있으면 제사 됩니다. 세 번째, 네 번째 필요한 것은요, 이것은 ‘환경’인데요. 그냥 제사 드리면 안 되고 시간 맞춰서 제사 드려야 돼요. 조상 제사할 때에 옛날에는 ‘땡’하고 12시 넘어갈 때 했어요. 12시 넘어 가면 그때부터는 귀신의 세계이기 때문에, 조상들이 설쳐대는 (우리 집에는 쥐가 설치지만은) 조상들이 설치는 시간이기 때문에 그때 드려야 해요. 그때 드리고 그 음식은 문밖에 내놓게 되면 아침이 되면 귀신이 먹고 간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따져 봐야 돼요. 과학수사에 가서 과연 분량이 줄어드는지 조사해 보면 별로 안 줄었지 싶어요.
그 다음에 ‘장소’입니다. 장소. 평소에는 TV 놓던 자리에 거룩한 장소를 만들기 위해서 병풍을 쳐버리죠. 평소에 제사장은 누가 하느냐 하면 아버지가 해요. 평소에 놀다가 그날만큼은 동네 목욕탕에서 때 밀고 와가지고 평소에 안 입던 두루마기 입고. 그 다음에 여자는 빠져야 되는 거예요. 이거 설명해야 돼요.
처음에 고대 신화에서는 여성부터 하는 겁니다. 여자에게 하나님의 신성이 임해서 임신하고 애를 낳아서 지금 이렇게 숫자가 많아진다고 본 거예요. 뒤르켐이라는 종교학자가 있는데, 그 사람의 이론에 의하면 우리가 믿을 수 없는 이론을 주장합니다. 그 사람은 뭐냐 하면 옛날 고대 사람들의 해골을 조사해 보니까 남자와 여자의 골격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이건 뭐냐 하면 태어날 때부터 남자, 여자가 힘쓰는 데 있어서 전혀 차이가 없었다는 거예요, 고대에. 그런데 지금에 와서 여자는 인형 가지고 놀고 남자는 마징가 제트하고 노는 것은, 그것은 사회의 도덕이 그렇게 남녀차별을 만들었다고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20세기 초반에 뒤르켐이라는 종교학자가 있는데,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라서 ”어떻게 저 여자에게 지방만 있을 뿐이지, 팔뚝에 근육이 있지?“. 우리는 잘 안 믿어지잖아요. 어쨌든 그런 이론이 나왔어요.
여성이 주도하는 그 사회를 뭐라고 하냐 하면 '모계 사회'라고 합니다. 모계 사회. 여자가 신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제사가 시간 맞춰서 밤 12시에, 그리고 장소는 안방 TV 놔두는 제일 중요한 장소에, 아버지가 제사장이 되어서, 제물은 우청룡 좌백호하는데. 이 모든 것은 뭐냐 하면 전통과 관습으로 내려오지요. 그래서 어떤 여자가 시집가게 되면 제일 먼저 어디에 참여해야 합니까? 제사하는 부엌에 참여해야 해요. ”얘 아가야, 나 죽게 되거든 밤은 이렇게 깎고, 배는 이렇게 앞에 놓고, 대추는 이렇게 쌓아놓고. 그래야 너는 우리 집안 사람이야, 우리 집안 사람.” 그러니까 결혼을 한 게 아니고 시집을 온 거예요. 시집. 시갓집. 시갓집 사람에 종속되는 거예요. 왜 그래야 되는 거냐 하면, 그 당시가 농경 사회이기 때문에 농경 사회는 노동이 한꺼번에 일을 해야 해요. 한꺼번에 일을 하게 되면 여기 우두머리가 있어야지, 만약에 우두머리가 없으면 중구난방 되고 일이 안 되잖아요. 모내기할 때 줄 잡아줘야 되고.
그러니까 대대로 취직하고 수출의 역군이 아니고 땅에서 농사짓는 사회이기 때문에, 항상 어른의 사상과 정신을 밑에 며느리와 아랫사람들이 수용하고 전달하고, 수용하고 전달해야 될 그러한 관습과 관행이 있는 겁니다. 그걸 제가 지난 시간에 신이라는 것은 ‘관습과 전통’에서 만들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독교 집안이면 기독교 집안, 불교 집안이면 불교 집안처럼. 둘이 종교가 다른 사람이 결혼하면 난리 나죠. 지금은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하기 때문에 괜찮은데, 에베소서 5장에 보면 나오죠. 남자가 결혼하거든 누구를 떠나라? 부모를 떠나라. 그 의미는 바로 예수를 믿게 되면 이 세상을 떠나라고 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여성이 신성이 있었는데, 언제부터 이게 BC 2500년경이라 하는데요. 수메르 문화 때부터 있었는데, 여성이 신과 관여하다가 모계 사회가 부계 사회로 바뀐 것이 언젠가 하면, 여성은 생식에 대해서 관여하고 남자는 그 대신 ‘정신’에 대해서 관여합니다. 인간의 정신. 정신이 세요, 아니면 ‘애’ 낳아주는 것이 가치가 있겠습니까? 사람은 말빨이거든요. 아무리 현장에서 용접 기술이 좋아도 말빨 없으면 팀장도 못 해요. 그리고 별 기술 없어도 말빨 좋으면 나중에 영업사원 되고, 나중에 진급이 잘 된다니까요.
그 말을 가지고 이번 80여 명의 신학자에서 제일 중요한 개념 하나 나옵니다. 방금 제가 쉽게 하기 위해서 말빨이라 했는데, 이걸 크게 쓰겠습니다. 이걸 붉은색으로 쓸게요. 이것 빼놓고는 강의가 안 됩니다. 바로 '로고스(Logos)'라는 겁니다. 이 로고스라는 것을 탈레스 이후의 사람들은 끄집어내었습니다. 로고스가 뭐냐? '로고스'는 헬라어 말인데, 우리 말로 번역하면 '말빨' 또는 ‘말’. 이걸 요한복음 1장에서는 이걸 가지고 '말씀'. "말씀(로고스)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할 때의 그 '말씀'입니다.
말을 쥐고 있는 사람은 '여성'이 아니고 '남성'. 그러니까 남자가 머리지 여자가 머리가 아닌 거예요. 고린도전서 11장.
”고린도전서 11장 3절”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여자의 머리는 남자,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 위로 관통하는 것은 말로, 로고스로 관통이 된다. 말로, 하나님의 계시로. 로마서 10장에 보면 이런 말 있어요. “아! 정말 천국 보여주면 가겠다. 지옥 보여주면 나 지옥 안 갈게”라고 하는 사람들아, 그럴 필요 없다. 네 앞에 말이 있으니, 말씀이 있으니, 그걸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로마서 10장 9~10절)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눈으로 보는 것은 너무나 감각적이고. “지옥을 한번 체험해 보면 좋겠다.” 체험이라는 것은 돌아서면 사라지는 거예요. 체험이라는 것은. 그런데 말은 어디 속에 들어갑니까? 기억 속에 들어가요, 기억 속에. 이게 두뇌 속에 들어간다고요. 말은 장기 기억에 들어가요, 해마. 여기에 들어가 버리면 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계속 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말을 쥐는 자가 권력자가 되는 시대.
그래서 옛날 고대 시대에서는 무당이 권력을 쥐고, 우리 한국 조선 사람은 무당의 자식이 되는 겁니다. 우랄-알타이 계통에, 샤머니즘 계통에. 단군도 말빨이에요, 말빨. 말빨인데, 여기서 수상한 게 있어요. 무당에게 "저 무당님, 무당님은 미래를 그렇게 잘 본다는데 쌀을 뿌리고 거북이 등껍질 갈라진 걸 가지고 전쟁에서 이긴다든지 하는 것이 어떻게 어디서 나옵니까?“ "당신은 몰라. 신의 기운(신성)을 받아야 해석할 수 있지 일반 사람은 해석이 안 돼"라고 하는 거죠.
아까 여성 신은 생식과 관련되어 있다고 했지요? 남성은 전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전쟁하면서 비로소 남성이 정신적으로 지배하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남자가 부계 사회가 되는 겁니다. 부계 사회가 되면서 여자는 집의 가구 또는 하녀, 그 이상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쁜 여자하고 결혼하고 싶다는 것은 이쁜 식모 하나 들이겠다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옛날에, 옛날입니다. 요새는 큰일 나지요.
부계 사회에서는 왜 남자가 말빨이 세지냐 하면, 옛날에 농토가 한번 농사하고 난 뒤에는 생산이 그만큼 안 나타나요. 그러면 살 방법은 뭐냐 하면 -애는 낳았지요, 식구는 많아졌지요- 하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남의 것을 뺏어오면 돼요. 사냥하기보다는 사냥해서 말려놓은 그 ‘포’를 몰래 가져오면 되잖아요. 처음에는 몰래 가져오지만 나중에는 경비대로 수비하니까, 그 다음에 철조망 쳐놓으면 그 경비 수비대를 더 강한 군사를 가지고 쳐들어가서 뺏으면 되는 거예요. 이게 기업의 정신이고 이게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어느 정도까지는 열심히 하면 돼요. 하지만 그것보다 더 원할 때는 뺏어와야 돼요, 뺏어와야 돼요. 교회에서 옆의 사람이 부자가 되었다, 보니까 교회 새벽기도 나오더라. 그럼 나는 어떻게 하면 돼요? ”저 사람은 새벽기도 나와서 부자 되었다. 나도 새벽기도 나가서 부자 되면 되겠다.“ 그렇게 되면 저 사람은 갑자기 기도 시간이 늘어나고, 그거 보고 나는 더 늘어나는 거예요.
이게 엠페도클레스가 이야기하는, 뭐라고 했습니까? 전도든 기도든 모든 행동에는 반드시 시기와 미움, 또는 어쩔 수 없는 복수심. ”내가 너한테 지는 건 도저히 용납이 안 돼“라는 복수심. 바로 이런 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우리가 숨겨놓은 양심의 속 내용입니다. 이유 없이 나 빼놓고 다 미워요. 그건 이유도 몰라요. 이상스럽게 나 빼놓고는 다 죽이고 싶어요. 다만 저 사람이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나에게 잘해주면 그때만 임시적으로 내 곁에 두고 싶지만, 만약에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사랑하지 않을 때는 ”나가 죽어라“라고 그런 심보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사회가 너무 무질서하고 나한테 손해가 오니까 그걸 억누른 것이 뭐냐 하면 ‘윤리와 도덕’이라는 겁니다. 윤리와 도덕. 그러니 성경 말씀대로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 없고, ”이 지렁이 같은 야곱아“ 한 것처럼 인간은 자기가 주체할 수 없는 어떤 악에 의해서 몸부림치면서 그걸 어떻게 자제하고자 도덕과 윤리를 가지고 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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