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시편-2008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1강-하늘과 땅의 접촉점,십자가-시편이라는 개미에 뜯겨 주님의 성실하심으로!

아빠와 함께 2014. 1. 6.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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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1 15:14:41 이름 : 한윤범

2008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1강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24편 7절부터 봅시다. 시편 24편 7절에서 10까지입니다. 818페이지입니다. 시편 24편 7절에서 10절, 제가 읽습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오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시편이 상상 외로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시편을 강해한다는 자체가 좀 버겁다. 서로 간에 버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구약성경에 시편이 있기 때문에 버겁더라고 약간에 맛이라도 보더라도 맛만 보더라도 일단 여기에 시편을 생각하는 정도는 해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됩니다.

방금 읽은 시편 24편을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문은 없는데, 영원한 문이 없기 때문에 그냥 점선으로 이렇게 할게요. 그냥 문이 아니고 어떤 문이다? 영원한 문이에요. 영원한 문은 소개된바 없습니다. 인간에게 알려진바 없습니다. 그냥 점선입니다. 있어도 사람들에게 알려진바 없기 때문에 없는 겁니다. 천국이죠.

없는데 문 바깥에 무슨 한바탕 무슨 일이 벌어져요.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 여기 ‘여호와’라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전쟁을 벌이십니다. 여호와께서 전쟁 벌이셔서 여기에 승리를 했을 경우에 비로소 알려진바 되는 그러한 영역, 그것이 바로 영원한 문이 있는 천국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전쟁을 일으키고 그리고 확실하게 승리했다는 것이 보장되지 아니하면 이거는 여전히 감추어진 것이고, 알려진바 없습니다. 저런 것도 다 있었나? 알지 못하는 곳입니다. 이 영원한 문들이 여호와께서 승리했다는 표시로 들어오실 때 이 영원한 문들은 비로소 왕을 영접하기 위해서 활짝 위로 문이 들려야 되는 거예요. 문이 들린다고.

그래서 여호와께서 오시지 않고,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고, 만약에 오셔도 승리 못했다면 여전히 이 문은 천국의 문은 감추어진 공간입니다. 이런 세계는 사람들에게 알려진바 없습니다. 사람들이야 죽어서 천국 간다 하지만 그걸 ‘투사’라 하지요. 자기 갖고 있는 자기의 자유, 자기의 목적성.

사람이 하는 일에 어떤 목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마 신도 어떤 목적이 있을 거야. 자기가 하는 것이 자유선택에서 이해하지 않습니까? 아마 신도 자유선택에 의해서 할 거야. 또는 남이 자기한테 해코지 하면 저놈 죽어라. 라고 저주하고 미워할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신에게 합당한 영광을 못 돌리면 화가 노발대발해서 벌줄 거야.

이 세 가지를 스피노자는 바로 가짜 종교의 특징으로 봤습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기질을 그대로 확장시켜서, 아마 신도 내가 이런데 내가 이런 성질을 갖고 있고, 내가 이런 포부를 갖고 있는데 아마 신도 나와 똑같은 포부와 기대가 있을 걸? 에이, 있다 치자. 그래서 있다 치고 그 대상을 신이라고 인정하자. 이렇게 하는 거예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 다시 한번 설명하면, 첫 번째는 ‘자유’문젭니다. 이거 한번 거론하죠. 두 번째는 ‘목적’이죠. 세 번째는 ‘기질’ 문젠데. 자유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가 인간으로써 뭐든지 나는 녹차를 먹을까, 커피를 먹을까? 아, 내가 선택했어. 난 녹차야. 우리가 이렇게 선택하잖아요. 자유롭게 선택하듯이 우리를 만드신 신도 아마 그러한 자유를 발휘할 것이라 해서 신의 자유에다가 신학의 원천을 걸어버립니다.

말, 용어 자체가 어렵게 나오는데, 모든 신학의 원천, 뿌리에다가 뭐냐 하면, 신의 절대 자유를 갖다 붓는다 이 말입니다. 이게 들어가면 ‘숙명론’, ‘예정론’ 뭐 이렇게 여러 가지 되겠지요. 어쨌든 간에 이걸 확대시킨 게 뭐냐? 신의 주권사상입니다. ‘주권사상’ 이걸 신학 묶어보니 ‘개혁주의사상’이에요. 이걸 삶과 연결시키면 ‘청교도주의’에요.

어떤 분이 우리교회에 어젠가 질문을 했는데 공부할 책을 소개해 달라 그런 질문을 했는데 답변은 제가 엉뚱하게 답변을 했습니다만. 공부를 하는데 교회사를 통해서 기독교를 알고 불교를 알아야 되는데 불교를 왜 알아야 되느냐 하면, 그 사람들은 자기 부인에 열중하는 사람이에요. 사이비 말고 진짜 불교는 자기를 부인하고 낮추는데 열중하는 사람이에요.

기독교 교회사를 알아야 돼요. 거기는 온갖 각종의 기독교의 형태를 띤 인간의 종교성이 마음껏 거기에 담겨 있거든요. 그 가운데 청교도의 역사도 있고. 이러한 기독교라는 것과 불교가 십자가의 원수로, 왜 십자가 원수가 될 수밖에 없는가를 공부하기 위해선 사전에 다 공부해야 돼요. 교회사를 공부해서 아, 기독교라는 것이 십자가의 원수고, 불교라는 것이 십자가의 원수구나. 둘 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급의 종교적인 성결이죠. 신앙이 아니고, 종교적인 성결과 거룩과 순진무구한 신앙심을 만들어내는 생산해내는 그러한 활동들을 해 온 겁니다.

근데 이런 것들이 다 들어가면 뭐냐? 신의 주권사상이고, 그 주권사상이 어디 들어 있느냐? 바로 인간의 우리가 자유로우니까 아마 우리를 만드신 분은 오죽 자유롭겠느냐하는 하나님의 자유성에다 거기에다가 나의 확대죠. 투사라 하면 어려우니까 쉬운 말로 나보다 더 우수한 질은 유지하면서도 성질은 유지하면서도 나보다 더 완벽하게, 완벽하게, 완벽하게 쳐올리면 나중에 완벽한 자유를 구사하는 어떤 대상, 그게 신의 주권사상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게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다 여기 해당되는 겁니다.

그중에서 특히 신의 주권사상에 거의 미친 듯이 히스테리한 정도로 이걸 사수하는 게 바로 탈레반, 이슬람 쪽이죠. 신의 주권사상. 바이어하고 흥정하다가도 금요일 ‘땡’ 치면 거기서 어느 자리에서든 절해야 돼요. 신의 주권사상. 여기에도 (      ) 있습니다.

여기 신의 주권사상에는 바로 신의 자유성. 신의 자유성은 이게 사실은 선택론, 예정론도 여기에 다 결부가 돼요. 그래서 유대교 같은 데는 아주 예정론이 굉장히 강렬하게 일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그러한 자유성을 가지고 자유를 내가 지금 최고의 자유를 믿겠다는 말은 이건 뭔 뜻이냐 하면, 현재 나의 자유가 내 성에 영 안 찬다. 이 말입니다. 나의 자유로운 행동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내 욕망에서 나오는데 내 욕망을 달성하기에는 내가 선택권이 세상에 너무 좁고,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항상 결핍을 느끼는 겁니다. 미흡, 모자람을 느낍니다. 사람이 많이 가졌다고 행복한 게 아니에요. 많이 가져도 모자란 것이 자꾸 발생되면 그 발생된 모자람만큼 슬퍼져요. 사람이 슬퍼지는 이유가 뭐냐? 만사가 내 뜻대로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전 목사님 사모님 안 오신다 했는데 오셨네요. 감사합니다. 안 오시는 줄 알았는데 오시니까 더 고맙고. 다른 사람들도 고마운데.

사람이 결핍이 있고 비움이 있으면 가만있질 못해요. 그걸 반드시 채워야 돼요. 안 채우면 잠을 못 자. 그러면 빌어야 되죠. 그런데 사르트르 그런 이야기했어요. 사람이 자기 자유를 행사하려면 반드시 남의 자유를 침해해야만 하는 조건 하에서 자기 자유를 발휘하게 돼있다 이랬습니다. 남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고 자기 자유를 발휘할 그런 수는 없다고 보는 겁니다. 상식적으로 봐도 그렇게 보이고 그래요.

그러나 사람은 그게 옳으냐, 그르냐는 그건 뒷전이에요.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라 자기한테 결핍이 있으면 이거는 참을 수가 없어요. 지옥 가서라도 참지 못한 자가 있잖아요. 거지 나사로 하고 앞집에 살았던 부자. 지옥 갔는데 그 지옥의 특징이 뭐냐? 결핍인 줄 몰랐지요. 세상에 있을 때는 부자기 때문에 만족스럽게 했는데 지옥 가서는 물 한 방울이 그렇게 아쉬워요. 물 한 방울이 없는 거예요. 여기 물 있는데 물 한 방울, 마음대로 마실 수 있잖아요. 물 한 방울이 없어서 거지 나사로가 손가락 찍어서 달라고 요청한 겁니다.

한국에 대운하를 만들고, 뭐 대학자율화, 지옥에 대통령 되려면 그런 게 필요 없어요. 대운하고 나발이고 필요 없어요. 물 한 방울 줍니다. 하면 지옥에서 대통령 돼버립니다. 그러니까 대운하고 4만 불 시대 어떻고, 경제성장률 7% 그런 구호 필요 없어요. 여러분 손가락에 물 한 방울 찍어 드리겠습니다. 찍어 주세요. 반드시 보장하겠습니다. 그러면 대통령 돼요.

그러니 지옥이란, 성경이 재미있는 것은 아까 제가 이야기했듯이 이 영원한 문들이 있는 천국이 있잖아요. 천국도 감추어진 세계지만 놀라운 사실은 지옥도 이 세상에서는 여전히 감추어진 세계에요. 다시 합시다. 여호와께서 전쟁을 벌여서 승리하지 아니하면 천국도 감추어진 세계요. 지옥도 감추어진 세계에요.

그래서 흔한 이야기로 성경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 전쟁 중심이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볼 때 예수님 전쟁 중심이 아니고, 우리는 무슨 중심으로 본다 했습니까? 첫 번째, 나의 이 끓어오르는 자유를 이 결핍을 신께서는 나보다 더 많은 능력을 가지시고, 그걸 전능하시다고 하죠. 그 전능하시다고 소문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가 결핍을 느끼는 나의 자유성을 얼마나 몇 퍼센트를 채워 줄 것인가? 그런 신을 인간은 부단히 찾고자하는데 그 찾는 것이 인류의 대표적인 종교가 뭐였습니까? 기독교과 하나는 불교였다 말이죠.

불교는 간단해요. 자유를 외부에서 채워 줄 거 뭐 있노? 내 스스로 내 안에서 자유라고 외치면 그만이지. 나, 자유자다. 외치면 그걸로 모든 게 자윤데 뭐, 신을 찾아서 주시옵소서. 그럴 필요 없다는 겁니다. 이게 불교사상이에요.

나는 자아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흐물흐물하고, 나라는 모든 것도 죽으면 다 흙으로 돌아가고 난 아무것도 없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사라지고 모든 것이 자유다. 이게 해탈 아닙니까?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게 불교식이고. 그건 아주 불도가 심한 사람이나 아주 도를 깨친 사람이나 되지, 일반 보통 불자들은 이런 수준도 안 돼요. 부적 갖다 붙여야 되고, 절에가 비는 것 따로, 점치는 것 따로 해야 돼요.

기독교는 뭐냐 하면, 하나님 저 아시지요? 알면 신의 전능하심 가지고 뭐 합니까? 그 솜씨. 내 사정 안타깝고, 내 사정 험악하고 어려움을 아시면 그 솜씨 있는 솜씨 가지고 솜씨를 부려서 나의 이 결핍을 채워주소. 그러면 받은 것 중에서 다 먹겠다는 게 아니고, 어느 정도는 떼서 십일조로 바칠 테니까 일단 주시면 십일조 바치나, 안 바치나 그때 한번 보세요. 제가 바치겠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전체를 주시면 10퍼센트 정도는 드릴 용의 있습니다. 

사르트르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자유라 하는 것은 존재가 풀리는 것, 이걸 자유라고 하는데 존재가 슬슬 풀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개골에서 입질이 슬슬 당기는 거예요. 존재가 슬슬 풀리는 걸 자유라 합니다. 그러면 자유가 아닌 게 뭐냐? 돌멩이죠. 돌멩이는 자유가 없어요. 냉장고, 이건 죽은 거잖아요. 죽었다 할 것도 없이 처음부터 죽었으니까. 그런데 존재가 슬슬 풀리는 것.

이것은 돌멩이 이걸 가지고 참 어려운 용어 나온다. ‘적자존재’ 그 자체로 있는 것 이건 돌멩이라 하고, ‘대자존재’라 하는 것은 나 어디 있지? 나를 내가 따로 만들어서 그 나를 보고 있는 내가 있고, 또 내가 원하는 ‘나’가 있어 나를 쳐다보면서 나인 것을 다시 확인하는 이걸 대자존재라 하는데. 이거 잊어버리죠. 골치 아픈 것, 유식한 것처럼 보이는 거 없애버리고.

어쨌든 뭐냐 하면, 내가 되고 싶은 곳까지 도달되는 그 과정을 가지고 자유라 합니다. 그래서 ‘자유를 달라’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놔 둬요. 이제 쉽죠. 자유가 뭐냐 하면, 중학생들 머리 좀 기르고, 여고생들 매니큐어 좀 할 때 내가 하고 싶은 걸 놔 둬요. 그걸 가지고 자유를 달라.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겁니다.

자유라는 것이 존재가 슬슬 풀리는 거예요. 그런데 풀려나올 때 어떻게 풀려나오느냐? 그게 성질이 나오거든요. 그걸 속성이거든요. 속성이 슬슬 풀려나오는,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본연의 성질이 슬슬 풀리는 거예요.

여자가 처음에 시집가서 시어머니, 시아버지 눈치 본다고 꼼짝도 못하고 있다가 한 삼 년, 사 년 지나면 슬슬 안 주인 노릇하면서 슬슬 성질이 나오죠. 요새 우에 사노? 요샌 자유롭다. 내 자존심도 내 주장도 어느 정도 먹힌다 하는 거예요. 우리 시집에선 내 주장도 먹혀들어간다. 슬슬 자기 개체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사르트르가 자유라 할 때는 철저하게 뭐냐? ‘개인주의’에요. 이걸 ‘실존주의’라 하는데 철저하게 개인주의에요. 그러니까 어떤 인간이든 자기 자유를 자기를 마음껏 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백 사람이 있으면 백 사람이 믿는 예수 다 다르다 이 말이에요. 백 사람이 믿는 예수는 백 사람이 다 달라요. 왜냐하면 각자 성질이 다르니.

그 성질이 그 자유가 어디까지? 신과 내통하고, 내통한다 하면 나쁜 말이지만 하여튼 성경대로 하면 교제하고. 신과 연결시켜서 내 미흡함, 내가 도달되는 것을 팍팍 빠른 속도로 그렇게 도달될 수 있도록 해줄 때 그때 참, 역시 나의 하나님은 최고다. 이런 어떤 신앙 생활하는 보람을 가지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앞으로 전에 이만큼 응답을 했기 때문에 올 2008년도 기도할 때 응답 팍팍 주세요. 작년도 응답 이만큼이니까 올해 해주세요. 이미 아는 사이되기 때문에 기도한다는 것은 딸랑딸랑 이렇게 흔들면 밥 주는 거예요. 기도하는 줄을 잡아당기면 위에서 밥이 쏟아지는 거예요.

그러한 자유하는데 이게 이렇게 되면 다른 사람과 대화가 안 된다니까. 왜냐하면 다른 사람 자유하고 각자 다르기 때문에. 지옥에 있는 부자는 물 한 방울 달라고 하는데, 아직 지옥이 있는지 천국이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세상에서는 가진 것도 모자라서 미흡함을 느끼고. 골프 치는 사람의 소원이 뭐냐? 홀인원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 세 번 칠 걸 한 번 쳐서 들어갔으면 좋겠다. 도박하는 사람은 장땡 한번 잡았으면 좋겠다.

우리나라 지방자치의 국회의원 없애라. 그 소망, 그 자유를 허경영 씨가 이루리라. 얼마나 고마운지. 국회의원 다 없애버려라. 아이큐 430 허경영 씨가 다 이루어요. 0.4% 나왔어요. 이인제하고 0.3% 차이에요. 

종교성이라 하는 것은 이거는 교회 불내고 절 불 태워도 소용없어요. 기독교나 불교나 종교성은 인간이 살아 있는 한 영원합니다. 그들의 자유를 마음껏 구가할 수 있는 그런 마당놀이, 그 마당놀이만 펼쳐주면 교회는 부흥됩니다. 마음껏 자유를 펼칠 수 있도록. 한 맺힌 것, 누구한테 당했던 것 그걸 마음대로 풀 수 있는 프리의 마당놀이의 장을 이렇게 형성해 주면, 교회와 절이라 하는 것은 특히 한국 땅에서는 영원합니다. 없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매일같이 자기 초월을 시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30등 했으면 25등, 25등 했으면 10등, 계속 자기 초월이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신과 연결시켜서 신으로부터 나의 자유성이 이거는 신도 보장해준 거다. 이건 뭐 나보고 탓하지 마라. 하나님이 보장했다. 증거가 뭐고? 지난번 기도 응답했거든. 기도 응답했다는 게 뭐야? 나의 이 자유, 나의 이 욕심은 죄가 아니고, 의로운 것이라는 것을 주께서 인정해준 효용으로 작년에 기도 좀 했더니만 응답되었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얻어서 앞으로 더 밀어붙일 참이다. 이래 나온다 말이죠. 이게 바로 신의 주권사상, 개혁주의, 청교도 이런 데 쭉 나옵니다.

청교도는 뭐냐 하면, 하나님께 그냥 달라하니까 미안스럽잖아요. 미안스러우니까 성화를 하는 거예요. 착한 만큼 복은 오게 돼있다. 이 공식. 하나님한테 뭘 달라하니까 미안스러우니까 좀 착한 일 많이 한 걸 근거를 잡아서 약간의 기도하면 응답이 되는. 그게 사람이 염치가 있는 거예요. 염치가 있는 사람은 청교도, 염치없는 사람, 막 달라 하는 사람은 무당들이고, 염치 있는 사람은 청교도에요. 주여, 주를 위해서 이렇게 충성했는데 이거 하나 안 해줍니까? 참 너무하시다. 하면 응답되거든요. 이게 청교도주의라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목적’이라 것은 뭐냐 하면, 이거는 철학적입니다.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이에요. 이건 보통 철학자들이나 공부 좀 한 사람이 아는데, 세상의 모든 것은 목적이 있다. 목적이 없는 세상이 없다. 신께서 목적을 갖고 있다. 누가 이야기하던데? 신을 만나봤어? 아니. 신이 만들었다는 인간이 목적을 갖고 있으니까 신도 목적을 갖고 있는 게 당연하지. 그래서 모든 것이 목적이라는 게 있다 말이죠. 그러니까 아까 1번 하고 2번 하고 사실은 똑같아요. 그런데 그 목적은 백이면 백 다 다르다 이 말이죠. 다 다르거든요.

예를 들어서 이번에 2008년도 대통령에 신의 목적은 이명박 씨가 되는 게 신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전라도 사람들은 정동영 되는 줄 알고 정동영에게 몰표를 보냈어요. 신의 목적이 거기 있는 줄 알고. 폭설이 내려서 전라도 덮어버렸습니다. 일 미터 와서 덮어버렸어요. 신의 응답이 아니다. 정동영이 아니었다. 이명박 쪽에서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고.     방금 제가 한 해석을 이명박 쪽에서.

그러니까 사람이 존재하는 자체가 목적 없는 게 없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 자기 목적 안 해 준다고, 수능시험 점수 안 나왔다고 쌍둥이 자매가 그것도 쌍둥이로 뛰어내려 죽고, 스물여덟 살 먹은 청년이 사법고시 세 번 떨어졌다고. 이번에 사법고시 된 여자는 서른 살에 일곱 번 떨어졌어. 일곱 번 되어 됐는데 지는 세 번 떨어졌다고 자살해버린 거예요. 네 번 남았는데 네 번 더 해 보고 죽지. 아이고, 바보. 참, 바보. 이제 나이 스물여덟 살 밖에 안 돼. 자살했어요. 세 번 떨어졌다고. 사법고시 세 번 떨어진 사람은 다 죽어야 돼.

사람마다 신의 모습이 그렇게 다 달라요. 이거는 그만큼 뭐냐? 신이라는 것은 자기 쌍둥이처럼 자기가 배가 불러서 자기가 잉태한 신입니다. 내가 출산한 신이에요. 내가 만든 신이에요. 구약에 나오는 우상숭배라는 게 우상숭배의 특징은 반드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앞에 반드시 붙어요. 나를 위하여 또는 자기를 위하여. ‘자기를 위하여’ 라고 뒤에 더하기 신 나오면, 이 신은 우상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진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천국과 보이지 않는 지옥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혼자서 부지런히 지금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사람들은 천국도 모르고 지옥도 모르면서 자기가 안데. 여호와께서 전쟁하는 그 취지도 모르면서 자기는 그냥 안데. 자기가 안다고 하면서 하는 말이 자기가 일방적으로 천국, 지옥 다 만들어놓고 신은 자기가 만든 개별적인 신, 하는 거예요. 이건 뭐냐? 결국은 자기를 위한 것은 반드시 우상이다. 가짜 신이다. 자기를 위한 가짜 신이 되는 겁니다.  

세 번째는 뭐냐 하면,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는 놈은 나는 못 참는다. 신께서 대신 갚아주기를 원합니다 하는 거예요. 내 돈을 떼먹는다든지 나를 해코지하는 놈 같으면 반드시 복수를 하는데 복수할 여력이 없으면 신에게 우회적으로 호소해서 신이 내 대신 나한테 해코지한 인간은 아주 맞아 죽도록 배려놓도록 저주받도록 그렇게 조치하는 그 성격을 가지고 우리는 매일같이 교회 나옵니다. 종교 생활하는 거예요.

그래서 목사님들이 교인이 하나 교회 왔다. 특히 새벽기도 하는데 안 나오다가 왔다. 인상 보니까 험악하구나. 무슨 일 터졌구나. 근데 일주일 나오다가 안 나오겠구나. 과연 안 나와요. 문제 해결 됐거든요. 왜냐? 전부다 자기를 위한 신이에요. 말씀에 관심이 있다? 없어요. 말씀에 무슨 관심이 있어요. 자기한테 관심이 있어요.

말씀이 관심 있는 것처럼 하는 것은 뭐냐? 자기한테 무슨 일이 벌어졌을 때 자기 힘으로 안 될 때는 아까 청교도 있지요. 청교도는 뭐라 했습니까? 뭔가 생색내지요. 주여, 말씀 보나이다. 그동안 성경 못 봤는데 성경 부지런히 봅니다. 하고 어, 해결됐구나. 그 다음부터 미쳤다고 보나. 해결됐는데 뭐하려고 보노. 안 보지요. 이게 청교도적인 그런 습성이 나오는 거예요. 전부다 자기를 위하여.

그러니까 이러한 종교성이 제가 아까 사르트를 이야기하면서 이미 인간이 대자존재, 나라는 것은 모르고 내가 상상한 나를 저만치 세워놓고, 자기는 여기 있고, 저 폭을 결핍을 채우려고 다가서려고 하는 그런 식으로 태어난 것이 인간인 이상, 하나님이라는 것도 결국은 진짜 하나님도 항상 우리한테는 감추어진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우상조차도 이게 고정된 것이 아니고, 한 오 년 믿으면 또 수정하고 오 년 믿으면 업그레이드 하고 맨 날 386에서 586으로 자꾸 하나님을 수정해요. 신학도 수정하고. 복음만이 십자가라고 피만이 구원한다하다가 나중에 목회 십 년 하다가 안 되니까 피 가지고 안 되더라. 딴 걸 보태야 된다.

저는 하나의 소망인데 하나의 계획인데 목적인데 올해는 책을 하나 제목을 하나 걸고 쓸려고 해요. 제목을 한 자로 정했어요. 뭐냐? [피] 제목이 한 자에요. 그러니까 이거 살려고 하면 서점에 가서 ‘피 주세요.’ 이렇게 살 사람 없지만. 제목을 아예 피로 정했어요.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전쟁을 하고 승리할 때에 그 승리의 모체가 되는 유일한 근거는 어린양의 피 밖에 없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에 나와요. 피 없이는 천국도 지옥도 감추어진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피가 고마운 것은 이게 내 피가 아니라는 게 고맙죠. 우리 피 안 아깝습니다. 피 하나 하려면 얼마나 라면 몇 개나 먹어야겠어요? 그런데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이 놀랍게도 내 피가 아니고, 예수님의 본인 피라는 것. 왜 본인 피냐? 그게 흠이 없거든요. 흠 없는 피가 돼야 돼요. 우리 피는 한 드럼해도 구원 못 받습니다. 문이 안 열려요. 문이 자동문인데 이 문은 희한한 문이에요. 깨끗한 피만 열리게 돼있지, 우리가 가서 열려라 참깨. 백 날 문 두드려도 안 열립니다. 영원한 문은 열리질 않아요. 피만 열립니다.

이제 성경이 대충 이렇게 하고 성경에 들어가겠는데, 성경이 어려운 이유가 구약성경에서는 여호와께서 전쟁하고 승리한다는 것이 누구를 상대로 했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초반에 어려우니까 천천히 해보겠습니다. 어려우니까 질문, 답변 이런 식으로 해보겠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사람은 사람입니까, 사람 아닙니까? 사람 맞지요. 이스라엘 사람은 누굴 위해 삽니까? 사람이니까 누굴 위해 산다? 자길 위해 살지요. 그런데 그 신은 누굴 위한 신입니까? 자길 위한 신이지요. 이것과 같은 건 뭐냐? 우상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다행스런 것은 이렇게 이스라엘 사람들, 이런 인간들 백 명이고 몇 십 만 모아놓고 이 껍데기를 무슨 껍데기를 씌워 놓았느냐 하면, 나중에 신약성경에 와서 구체적으로 그 실체가 드러나야 될 그림자 같은 구조, 하나님의 언약 구조인데 언약으로 만든 이 구조를 이런 자기 밖에 모르는 인간들을 강제로 뒤집어 씌워버렸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강제로 자길 뒤집어씌운 언약의 명령들, 말씀들, 규례들, 이것들을 가지고 뭐로 이렇게 변경시키겠습니까? 원래 진짜 하나님의 언약은 그 실체가 뭐예요? 신약의 뭡니까?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은 뭐 밖에 모른다? 자기 밖에 모르니까 하나님이 주신 그 말씀들을 저 멀리 메시아의 고난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은 전혀 없고, 종교적인 어떤 신기한 그런 법칙들인 줄 알고 곡해해서 자기를 위해서 다 적용시키는 거예요.

일 년에 세 번 씩 올라가라.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지키라. 예. 지키겠습니다. 지키면 복주죠. 이렇게. 모든 명령과 규례들 네가 마음을 다하여 했는데,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지키겠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백 날 해도 자기 마음이죠. 자기 마음을 위해서 다 합니다.

가나안 땅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장대 같은 사람들이 총무장되어서 어딜 넘봐. 완전무장하고 있으니까. 정탐하고 온 사람의 소식을 듣고 온 민족이 대성통곡을 합니다. 빼도 박도 못하고 가도오도 못했다. 책임져라. 대성통곡을 하고 울지요. 사사기에도 그게 나옵니다. 하나님의 언약대로 한다니까 대성통곡을 합니다.

오늘날 어떤 경우에 대성통곡을 하느냐 하면, 교회의 목사님께서 이제부터는 저는 세상적인 물질적인 축복 그런 설교하지 않고 예수의 피만 증거합니다. 그 소리 듣고 교인들이 대성통곡합니다. 이 교회 세운다고 집 바치고, 논 바치고 했는데 왜 목사님, 이제 와서 우리를 배신 때리십니까? 기도해서 얼마나 많은 복을 받았는데 이제 와서 예수님 핍니까? 이러려면 나가세요. 하고 대성통곡하고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모든 율법의 완성은 십자가에서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데 십자가와 연관시켜야 될 건데 십자가라 하는 것은 누굽니까? 나가 아니에요. 누굽니까? 나가 아니에요. 예수님이죠. 그러니까 나에게는 타인이죠. 타인이니까 내가 아니다 이 말이에요. 나는 나 잘 되라고 하나님과 관계하는데 하나님은 모든 법은 나 잘 되는 게 아니라, 예수님 잘 되면 예수님이 전쟁에 승리하면 그것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가 천국이고, 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 가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인데 우리는 자꾸 예수님이라는 타인을 향하여 모든 말씀이 주어졌다는 걸 모르고, 이걸 중간에 휙 끊어서 중간에 인터셉트, 가로채기를 해서 자기의 포부와 욕망을 달성하는 용으로 자꾸 오는 거예요.

저는 오늘날 찬송가 부르기에 부끄럽기 않느냐 했어요. 왜냐하면 찬송가에 뭐가 있느냐 하면,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세상에 그 노래 부르면서 부끄럽지 않느냐 이 말이죠.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주 예수라면 나는 뭐가 되도 괜찮습니다. 그런 내용이거든요.

그런데 이 청교도적으로 나가면 어떻게 돼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라고 불렀기 때문에 주여, 복의 부스러기라도 주세요. 조금만 소망해 달라고 그렇게 다시 주님한테 가는 것 같은데 가는 그 가운데 화살이 갑자기 가다가 맛만 근처 한 20센티 어디 가서 휙 돌아서 다시 나한테 와버려요.

여기가 예수님이 종착점이 아니라 예수님 한 번 걸쳐서 오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가 전부다. 이러면 되는데, 예수의 피가 전부가 아니고, 그 다음에 우리가 잘 돼야 돼. 라고 이상하게 예수의 피 이후에 그걸 가지고 ‘구원 그 이후’라고 합니다. 무슨 구원 그 이후가 있습니까? 예수의 피 이후에 그 다음에 남는 건 뭐예요? 그 다음에 공동체하고 있어요.

사르트르는 두 가질 봤습니다. ‘집합’과 ‘집단’으로 무리를 둘로 나누었어요. ‘집합’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그 구성원을 바꿔치기 해도 아무 일이 없는 것. 예를 들면 318번 버스 탈 때 버스 정거장에 혼자 서 있는 게 아니죠. 옆에 어떤 아주머니도 서 있단 말이죠. 왜 서 있습니까? 318번 타려고. 아저씨는? 318번. 어, 318번. 일시적으로 버스라는 제 삼자의 개입으로 여기 모인 사람은 318번 타려고 같이 모였지요. 이걸 집합이라고 합니다.

집합은 나의 개성, 나의 자존심 같은 거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318번 와버리면, 내가 잠시 어디 한 눈 팔다간 그냥 가버려요. 나를 인정해주지 않아요. 나 말고 다른 사람 들어가도 그 버스는 아무 일 없습니다. 집합이란 개념은 뭔 뜻이냐 하면, 나의 가치는 전혀 인정받지 않고, 우연적으로 그냥 모여든 집합이에요.

그 다음에 그런 집합이 있는데, 그 집합을 통해서 자기 가치가 일어나지 않으니까 그 다음에는 집합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집단으로 바꾸어 버려요. 이게 굉장히 위험해요. 집합은 나와 상관없는데 그냥 우연히 모였다는 게 집합인데, 그래서 십자가마을이 집합이냐, 집단이냐 아주 모호한데.

집단일 경우에는 유아발달논리에 보면 나와요. 청소년기에는 가정에서 이루지 못한 가정에서 자기 자유를 발휘하지 못할 때 어떤 특정 단체 그것을 자기와 동일시하는 시기에요. 만약에 서울대학 가고 싶으면 서울대학 전체를 자기와 동일시해서 그걸 목표로 해서 공부한다든지, 아니면 하여튼 자기가 원하는 것, 안 그러면 동방신기라면 동방신기 팬클럽의 그 집단을 동일시해서 하는 거예요.

이렇게 할 때는 거기에는 뭐가 있느냐? 이데올로기가. 그때는 똑같이 그걸 [공통통념]이라 하는데 어려운 말 많이 나온다. 사람들이 분명히 개인인데 똑같은 현상들이 일어나요. 예수님을 같이 믿게 되면 주님의 사랑이 일어나는 것처럼 공통개념이라는 게 생겨나요. 공통개념 작용을 뭐로 하느냐? 동일시해요. 같이 본다고. 그래서 동방신기를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나이 사십, 오십 되면 동방신기 하면 동쪽에서 온 중이냐 이래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동방신기 욕해 보세요. 아이들이 막 화를 내고 그런다니까요. 왜 그렇습니까? 동일시했기 때문에. 그게 어릴 때 청소년기라 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에요. 이게 어른 되도 그게 숨어들어갑니다. 숨어들어갔다 언제 나오는가? 칠십 넘어 치매에 걸릴 때 그때 나옵니다.

사람의 의식은 단층으로 돼있어서 한번 들어온 것은 없어지지 않아요. 밑에 계속 쌓입니다. 현상학의 시간론에 보면 나오는데, 계속 밑에 차곡차곡 쌓여서 이게 언제 나오느냐? 칠십, 팔십 되고 똥 싸고 오줌 쌀 때 그때 다 나와요. 더러워 못 봅니다. 똥, 오줌이 더럽다는 게 아니라 우리 아버지가 저런 인간이었던가? 더러워 못 봅니다. 아주 원초적인 적자존재, 배운 것 써먹읍시다. 적자존재, 돌멩이 같은.

참 그러기 전에 죽어야 복인데. 그러기 전에 죽어야 돼요. 안 그러면 미리 알리안츠나 해서 자식들 안 보이도록 간병인해서 멀리 뚝 떨어져서 하시든지. 그런 사람들만 같이 모인 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그게 집합이라 방금 배운 것 써먹어야지요. 연세노인병동. 집합이에요. 몇 명 죽어나가도 아무 일 없어요. 아이고, 애 태우는 사람 없습니다. 318번 버스 타는 것 똑같은데 뭐. 그냥 같은 치매 걸려서 제가 가 보니까 삼십 명 쭉 누워 있어요. 중간에 조선족 간병인만 왔다갔다합니다. 얼마나 은혜 받았는지요. 야, 이게 내 모습이구나. 하고 은혜 받았는지 모릅니다. 아무 감각도 없어요. 그냥 완전히 뇌사 상태에 빠진 것 같아. 가만히 있어요.

그런데 그런 노인들이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점검하려면 쉬워요. 뭐냐 하면, 욕해 보세요. 바~짝합니다. 아하, 살아있구나. 연세 많은 노인들에게 평소에 어린 양 하지만 대놓고 한번 싫은 소리하면 벌컥 하고 성질 나와요. 아하, 아직까지 오래 더 사시겠다. 그러니 사람이 살아있다 하는 것이 얼마 안 되서 곧 돌멩이, 적자존재로 한번에 가버리죠. 이게 나중에 내일부터 할 시편 보면 다 나옵니다. 왜 여호와께서 홀로 전쟁하고 홀로 승리해야 되는지 이유가 다 나옵니다.

집단이 될 경우에 그러면 동일시하면 개인은 없어지느냐? 여기서 말합니다. 집단이 된다 할지라도 놀라운 사실은 그것이 계속해서 자기 이상을 그 집단이 들어주는 조건 하에 가입이 되지, 들어주지 않으면 얼마든지 탈퇴나 똑같아요. 탈퇴해서 다른 집단을 구성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유라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집합에서 집단으로 갔다가 또 다른 집단으로 또 다른 집단으로 계속 가는 거예요. 이 교회 갔다가 저 교회 갔다가 집에서 들렸다가 집에서 하는 게 심심하면 모였다가 온갖 돌아다니는 거예요. 그것도 시편에 또 나옵니다.

아까 개인주의에 공동체운동, 이런 것을 동일성이라 하지만 그것이 나중에 또 허무하게 공동체 때문에 상처 받고 가슴앓이 하는 일이 벌어지지요.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한 것 정돈해보면 이렇습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구약에서 사람이라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강제로 뒤집어씌웠다 했지요. 뒤집어씌워도 이 사람들은 곧장 오해합니다. 아하, 나를 위해서. 여기서 뭐가 나온다 했습니까? 예정론 나오고 그 다음에 뭡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 받은 택한 민족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신약에서 뭐라고 했던가요? 아브라함 너희들은 천국의 본 자손은 쫓겨나고, 이방인들이 천국 가고 너희들은 천국에서 쫓겨나서 이를 갈고 울고 있을 것이다. 이래 하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자체가 이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원래 뜻이 아니다.

그러면 남은 시간을 신약에서 어떻게 완성되는지 그거 먼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시편은 구약이기 때문에 시편만 해버리면 절망할 수가 있어요. 아, 시편 했는데 안 되네, 안 되네. 끝난 일이네. 절망할 수가 있어요.

신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낯선 분이 왔어요. 근데 이 낯선 분이 왔는데, 오늘날 소위 교인들, 신자들, 또는 성도라 할 수도까지 있는데, 뭐가 자꾸 의심이 드느냐 하면, 우리가 하는 짓이 헛짓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자꾸 들 거예요. 우리가 하는 짓이 헛짓이다. 왜냐하면 뭔가 복음 이야기해도 먹어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전에는 한 서너 명 되는데 이젠 서너 명도 없고 아무도 없는 거예요.

갈수록 점점 더 전에는 복음에 관심이 없다고 탄식했는데, 요즘은 말씀 자체에 관심 없는 세대에요. 말씀을 봐야 뭐 복음이, 말씀대로 하면 이게 복음이거든. 이렇게 하는데 말씀 자체도 관심이 없어. 조금 더 나가면 아예 교회를 안 다녀. 누구하고 이야기할 때 소통을 해야 되는데 화제가 관심사가 이미 교회, 말씀, 복음 이미 여기서부터 점점 더 저만치 멀어져가는 거예요. 멀어져가니까 뭔가 이야기를 끄집어낼 바탕조차도 전혀 용납이 안 돼요.

그럴 경우에 그 다음에 무슨 문제냐 하면, 아이고, 믿음 없는 놈. 참, 세상에 믿음 있는 자를 보겠느냐? 이렇다니까. 처음엔 그렇게 나가다가 나중에는 뭐냐? 내가 혼자 지금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니냐? 내가 자기 착각에 빠져있지 않는가? 인간문화재도 아니고 말이죠. 인간문화재라면 나라에서 보상금 나오지, 이게 뭐고 말이죠. 아무도 안 하는데. 요새 누가 갓 만듭니까? 안 만들거든요. 

그때 신약성경 자체가 어떻게 보느냐 하면, 신약성경 자체는 바로 십자가 피 흘림, 십자가에서 더 나가봅시다. 십자가뿐만 아니고, 십자가에서 더 나가서 이 피,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이것이 십자가에서 피 흘린 게 이게 확실하다면,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맞다. 이렇게 나옵니다. 신약성경 전체가 그래요.

그러니까 마태복음 이거 싫다. 요한계시록도 엉터리다. 착각이다. 베드로전서 그거 뭐 옛날 구닥다리지. 다 삭제하자. 말해도 먹어주지도 않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으니까. 할 때 그러한 회의가 들 때 남이 아니라 이제는 본인한테 심지어 복음을 전하고 있는 목사한데도 이것이 안개처럼 방역차 모기약 뿌리듯이 허옇게 와서 마음을 낮추신다 말이죠. 차라리 문화 활동하는 게 낫고 이런 게 낫지. 예수 피 그것 보다고 애들 영어놀이방 하는 게 돈 버는 일이지, 예수 피 해서 듣지도 않는데 뭘 하느냐 말이죠. 이런 의심이 들거든요. 

신약성경에 그 하늘과 땅의 접촉점, 그리고 복음과 죄악 된 세상의 접촉점을 줬어요. 그게 뭐냐? 부활은 안 보이니까 말할 것도 없고, 이야기해봐야 소용없는 거고. 오직 뭐냐 하면,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말이죠. 그리고 이게 히브리서에 가면 이게 십자가에서 더 나가요. 바로 피다 이 말이죠. 예수님이 피를 흘렸다. 이래 나옵니다.

그렇다면 부활의 세계는 어디 있느냐? 십자가 안 쪽에 있어요. 십자가를 들어가야 비로소 아는 세계가 부활의 세계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뭐냐 하면, 소위 종교라 하면, 종교는 십자가는 안 보이고 십자가는 영 구미에 안 당기고 부활의 세계, 내가 흙이지만 다시 천사 같이 된다는 그 부활의 세계가 너무 탐이 나서 이걸 그냥 상상해서 만들어서 부활 세계를 쳐다보고 있는 겁니다. 출입처가 없지요? 출입처를 안 좋아하죠. 십자가 피는 안 좋아는 거예요. 부활이 좋은 거예요. 부활의 세계가 좋은 겁니다.

그리 되면 이건 뭐냐? 자기 착각에 빠지겠죠. 십자가를 통과해서 부활에 들어가게 되면 이 부활의 세계는 뭐냐 하면, 내가 구원 받지 않아도 될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공짜로 은혜로 나로 하여금 영생을 주었구나. 해서 모든 공로를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반면에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 부활의 세계에 들어가면 나, 천국 가서 뭐 할꼬?

만약에 우리 엄마 천국 안 오면 나는 천국 가서도 마음이 안 편할 건데 그땐 천국 생활이 지옥 생활인지 혼동되지 싶다. 내가 제일 사랑하는 아내가 만약에 지옥 가 있다면 내가 얼마나 가슴 아플 건데 차라리 아내와 함께 지옥 생활하는 게 낫지, 나 혼자 뚝 떨어져 천국 가면 뭐하노? 이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지금 출입구를 엉뚱한 곳으로 들어가서 엉뚱한 자기만의 상상의 세계를 펼치다보니까 십자가를 통과 안 하고 부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 많아요. 굉장히 많은 게 아니라 거의 대다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십자가에 대해서 네가 아는 게 있는가? 십자가가 좋으냐?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아느냐? 이런 식으로 계속 들이대죠. 왜냐하면 가짜 부활세계를 그리워하면서 교회 앉아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럼 목사님, 이거 사전 조사해서 쫓아내야 되는가? 저는 그렇겐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제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어떤 경우든 자리에 앉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내가 목사 권한으로 나가라, 마라 할 소린 없습니다. 다만 목사가 이야기할 것은 일단 오신 분들은 성도라 치고, 성도라면 아마 십자가 통과하는 것을 그렇게 매일같이 좋아할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이 자기가 아무것도 아닐 때 주어진 모든 것이 공짜로 주신 선물인 기쁨이 크거든요. 자기가 이만큼 가져야 된다고 생각할 때는 어느 정도 줘도 안 기쁘죠. 그런데 내가 이런 고난도 가질 필요 없고 난 죄인이라는 걸 알 때 모든 일어난 일들이 다 하나님의 십자가 공로로 준 것을 아는 기쁨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망해야 기쁩니다. 얼마나 깊이 망하느냐에 따라서 얼마나 깊이 기쁘냐가 나옵니다. 덜 망하면 덜 기쁘고, 많이 망하면 많이 기뻐요.

이런 입장이 신약이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가 시편을 하면서 시편으로 하여금 시편 안에 우리가 들어가게 되면 주님께서 방향성이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목적성 말고 방향성을 끌고 가는데 어디로 끌고 가느냐 하면, 바로 너 말고 예수님 쪽으로 시편 전체가 우르르 끌고 갑니다. 이 한 마디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쭉 끌고 갑니다.

끌고 갈 때 기존의 시편은, 시편이 150편이죠. 맞지요? 시편 150편을 나누어서 보통 해석했어요. 12편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 때 사울이 어떻게 했다. 이렇게 해석해왔는데 저는 이것을 나누는 것을 철폐해버리고 시편 150편 전체를 한 책으로 보자.

왜냐? 시편 150편 다 읽어보시면 어느 부분이라도 우리가 여기 있으면 개미에요. 시편 15편 개미, 17편 개미, 2편 개미, 1편 개미가 나에게 달라붙어서 우르르 떠밉니다. 떠밀어서 어디까지? 십자가 똑바로 보라고 십자가까지 데려가는 거예요. 이게. 나중에 시편 끝에 보면 뭐라 하느냐 하면, ‘새 노래’가 나오거든요. 새 노래 나오려면 이 헌 인간이 입에서 새 노래 나오려면 개미한테 얼마나 뜯겨 먹혀야 돼. 다 뜯겨야 돼요. 엄청나게 뜯겨야 돼.

그래서 우리가 지금 시편 강해하면서 뜯기시기 바랍니다. 뜯겨먹히고, 뜯겨먹히고 내 것이라는 게 없어. 내 것이랄 게 없어. 이건 내 거야 할 게 남아 있질 않아. 다 뜯어 먹혀서. 다 뜯어 먹힌 채로 어디 가느냐? 엽기적입니다만 우리의 피부 하나 세포 뜯겨 먹히면 어디 들어가느냐? 시편이란 개미 속에 들어가죠. 시편 23편 개미 속에 우리 살이 한 점이 뜯겨 들어가죠. 시편 23편이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로 갑니까?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의해서, 이게 시편 주제입니다. 시편 주제는 주의 성실하심.

주님의 성실하심에 의해서 말씀대로 이게 오며가요. 예를 들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라는 말씀이 이미 나를 뜯어 먹으니까 나는 시편 23편과 무관한 사람이 아니고, 천 날 만 날 이제 시편 23편만 고대해야 될 그러한 처지로 바뀐 거예요. 왜? 내 살점이 거기 들어앉아 있으니까. 시편 23편을 우리가 말씀을 이룬 게 아니고, 시편 23편을 주님의 성실하심이 이루어서 우리를 오늘날 십자가 속으로 데려가는 이 작업을 다음시간에 셜명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