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시편-2008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6강-하나님의 속성-공통개념-예수의 피-다수가 하나에 예속되나 각각의 개인유지

아빠와 함께 2014. 1. 6. 16:36

(2008년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제 6강

지난 시간 마지막에 하나님의 공통개념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공통개념이라는 것은 저도 평소에 잘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여러분도 그동안 잘 들어보지 않았던 것인데 그것이 강의되어야 합니다. 매우 난해하더라도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해야 되겠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려주시기 바랍니다. 시편에서 시온을 선택했거든요. 시온을 선택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실 때, 다윗 개인만 선택한 줄 알았더니만 그 안에 들어가 보니 엄청난 것을 한꺼번에 선택하겠다는 그런 계획이 있었습니다.

이게 시온,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하셔서, 시온도 덩달아 선택하면서 여기에 하나님께서 기거하시겠다고 나옵니다. 교재 10페이지에 보면,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아들 되는 계약”, 아들이신 예수님만 달랑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줄줄이 그 안에 뭐가 크게 담긴 전체가 선택되는 그런 복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선택한다고 할 때에, “야! 너 이따가 우리 집에 와라”고 하면 될텐데, “내가 너를 선택했어. 너 거기 있어. 내가 거기서 살겠다”라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신을 본 사람이 있느냐. 신이 있으면 나에게 보여줘. 나는 신이 있다는 것을 못믿겠다. 여호와 하나님이 활동했다는데 누가 그걸 믿느냐”라고 주장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이 땅에서 선택이라는 작업을 벌이시면서 그 선택작업을 하나님이 안 보이는 곳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뭔가 남기는 식으로 하고, 그 남겨진 사람속에 신이 위에서 내려앉겠다는 겁니다.

교재 10페이지 시편 78:67-71에,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고 그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으며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양을 지키는 중에서 저희를 이끄사 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그 다음에 시편 132:10-14에 보면,
“주의 종 다윗을 위하여 주의 기름받은 자의 얼굴을 물리치지 마옵소서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으니 변치 아니하실찌라 이르시기를 네 몸의 소생을 네 위에 둘지라 네 자손이 내 언약과 저희에게 교훈 하는 내 증거를 지킬진대 저희 후손도 영원히 네 위에 앉으리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여기 보면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자기 거처를 삼”는 다고 되어 있습니다. “자기 거처”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놀랍게도, 우리를 시시하게 보시지 않고 아예 우리 자체를 자신의 거처로 삼겠다는 이 프로젝트가 실시되는 것을 통해서, ‘아하!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기는 계시는 구나’라고 알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누가 보기를 했나, 천국이 어디 있나, 이렇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 보면 하나님이 택하신 자속에 거처를 함께 할 정도로 확실하고 분명하게 뭔가 이 세상 속에서 손을 대고 뭔가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가야산 호텔 세우기 전에 허름한 호텔이 하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호텔이 세워진 것이 몇 년 되지 않았습니다. 그전의 허름한 건물만 알고 이 호텔을 구경 못한 사람은,

“가야산 밑에 새로운 호텔이 세워졌대.”
“그 산에 조그마한 여관 하나 있던데 그게 무슨 호텔이야.”
“아니야! 무슨 작업을 한 모양이라.”
“작업은 무슨 작업, 가봤자 산기슭에 조그만 모텔이나 하나 있는 거지.”

그렇게 알았는데 과연 와보니까 수십억의 돈을 들여서 엄청나게 호텔을 지어 놨다는 말입니다. 뷴명히 무슨 작업을 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어쩌고 …” “뭐가 그래요!”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이 지상에 어떤 작업을 남기는데, 다윗의 개인적인 선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 계획이 확장되어서 총체적으로 선택된 집단이 생겨나고 그 생겨난 집단속을, 알아서 잘해보라는 것이 아니라, 그 집단 속을 자신의 새로운 거처로(왕궁으로, 궁궐로) 자리잡았다는 이것이 상당히 놀랍고 새롭습니다.

선택된 다윗으로 말미암아 시온이 있다면, 선택된 시온은 유다지파죠. 유다지파 자체가 하나의 가문이고 그 가문에 하나님이 기거하신다고 되어 있고, 유다지파를 두자로 ‘성전’이라고 합니다. 건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했던 그 안에 있던 같이 선택된 유다지파(사람들)을 ‘성전’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눈에 보이는 예배당 건물이 아니죠.

하나님께서는 자기 택한 자들 속에 거기함으로써, “내가 택했잖아. 내가 택했잖아!”라는 것을 계속해서 천장에 울리는 그런 궁전에 자기 백성을 넣어 놓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소리가 늘 들려오도록 살아가신다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어려운 것은, 다윗을 선택했는데 어떻게 그것이 다수가 되느냐, 그 문제입니다.

한사람의 운명 속에 다수가 복속되는 일이 일어날 때 이 다수가 각각 개인으로 유지할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이것이 아주 예민하고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 다수가 어떻게 개인에게 복속, 예속되는 식으로, 그러면서도 어떻게 하나의 개체, 개체로서 유지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 김 대식 형제님이 계신데 제가 김 대식 형제님에게 가까이 가서 붙는다고 하나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각각 독립된 개체가 있고, 다른 동일성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붙어 있고, 따라 다닌다고 해서 두 사람으로 보지 한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죠.

어떻게 다수가 하나에 예속이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 힌트를 보기 위해서 고린도전서 5:3을 봅시다.

고전 5: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여기 보면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뭐라고 합니까? “몸은 떠나 있으나” 그 다음에 뭐라고요? “영으로는 함께 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각각의 개체가 떨어져서 살아가면서도, 어떻게 하나에 예속되고, 복속되는 경우가 있느냐, 하는 그런 문제에 있어서 고린도전서 5:3에서는 몸은 떠나 있으냐 영으로서는 한통속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제가 지난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공통통념’이라고 어려운 말로 했지요.

이것이 예수님의 피를 생각하는 것,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9:27에 보면 “…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해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게 되면, 자동적으로그 밑에 다윗의 자손의 혜택을 입는, 다윗의 자손이 오면 거기에 복속된 사람들이 함께 구원받는 혜택이 일어나고, 그 구원받는 혜택 속에 누가 거하신다? 하나님이 실제로 거하시는 그런 프로젝트, 약속이 현재 일어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것을 묻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가 행한 일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이 계시고 다른 곳은 하나님이 없는 겁니다. 여기 안에만 하나님이 계시는 겁니다. 그 출입구는 뭐냐? 다윗의 자손이 누굽니까? 출입구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면 거기에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분명히 각자 자기 심장이 따로 뛰고 있는데, 이것을 하나로 묶어 버리고, 하나로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벌어지는가? 이것이 바로 속성입니다. 다윗을 선택한 하나님의 속성이 이 다윗을 통해서 시온에 들어오게 되면, 시온의 모든 사람들은 이 신의 속성을 분배받게 됩니다. 속성이 있을 때 이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냐 하면, 그 속성이 너의 속성도 아니고 나의 속성도 아니고, 모두 하나에서 온 속성이기에 같은 공통통념을 유지할 수가 있는 겁니다.

국화빵을 구울 때 보면, 국화빵 기계에 밀가루반죽을 칸칸이 넣고, 그 다음에 앙꼬를 넣는데 앙꼬는 기분 좋으면 많이 넣어주고, 기분 나쁘면 적게 넣어주고, 이것은 주인 맘대로 입니다. 여기서 운이 좋은 소비자와 운이 나쁜 소비자가 생기죠. 그런데 그 국화빵 앙꼬대신 예수님의 피를 넣어보자고요. 불판을 돌려 가면서 예수님의 피를 전부다 넣는 거예요. 예수의 피를 넣어버리면 그게 뭐가 되느냐 하면, 공통통념이 되는 겁니다.

국화빵에 앙꼬 채우듯이 전부다 피를 붓는 거예요. 피를 붓게 되면 그것이 그 안에 사적인 성격이라든지 성질, 이것은 보지도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공통적으로 퍼부어진 사람은 그 안에 다윗이 받은 똑같은 축복 속에 놓여지게 되고, 그 속성이 옴으로써 축복을 그냥 받는 정도가 아니라, 주님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나는 죄인이다’ 할 때, ‘너만 죄인이냐 나도 죄인이다’라는 것을 자랑처럼 말할 수도 있는데, 다른 말로 하면 ‘너만 하나님의 종이냐, 나도 하나님의 종이다’라는 투로 번역이 될 수 있는데, ‘나는 죄인이다’ 할 때 죄인 앞에 ‘나’를 붙일수가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죄인이라 하는 것이, “내가 연구해 보니까 ‘내가 죄인이구나’” 하면 이 속성은 누가 만들어낸 속성입니까? 나에게서 나온 속성이죠. 나에게서 나온 속성에서 ‘나는 죄인이다’가 나오면 이게 하나의 주체가 되어 버립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이니까 구원해 주세요.” 이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뭐가 필요 없습니까? 죄인이라는 속성을 자기가 만들어내고 자기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태여 다윗에게서 내려오는 이것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거예요. 이것은 고상한 그 개인의 속성이 되어 버립니다. 공통적인 속성이 아니고 개인이 고수하는 죄인속성이 되는 겁니다.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 한 것이 있지요. 주체가 분열되어 있기 때문에, 안정되어 있는 어떤 성도의 모습을 내 모습과 동일시(상상계)하게 되고, 동일시하게 되면 그 안에서 하나로 묶기 위해서 상징계에 들어가면 법을 만들어 버립니다. 법, 교리, 혹은 신학 이런 것으로 묶어서, ‘나는 이 신학만 가지고 있으면 나는 그 안에서 구원된 사람이 맞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신학가운데 뭐가 포함되어 있는냐 하면, ‘나는 죄인이다’ 하는 신학까지 알았기에 나는 구원된 사람이 맞다고 나온다는 말이죠.

이야기의 방향성을 감 잡고 계십니까? 나는 죄인 맞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나도 구원받은 사람 맞다, 나도 주의 종이 맞다는 뜻이잖아요. 그런데 나는 죄인이다, 하는 그것을 통해서 구원에 대해서 안심을 하려는 그 자체가 주님중심이 아니고, 내가 날 구원받은 사람으로 취급해서 안정성을 얻으려고 하는 상징계, 상징계라는 말이 어려우면, 곧 일시적인 주체로 삼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법이라는 것이 일시적으로 자기 틀을 만드는 것인데, 법은 반드시 둘을 구분합니다. 법안의 세계와 법 밖의 세계를 구분합니다. 법 밖의 세계는 금지의 세계이고 법안의 세계는 허용의 세계입니다. 허용의 세계에 있으면 일시적으로 안심을 할 것 같지만, 항상 무엇을 넘보게 되어 있습니까? ‘저선을 한번 넘어보고 싶은데…미치겠다. 저것을 넘으면 내가 죄를 짓게 되는데, 내가 참아야지. 아! 그래도 못 참겠는걸. 아니야, 참아야 돼. 아니야, 그래도 못 참겠어.’ 어떤 법을 정하게 되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부모님들이 애 키울 때 그러잖아요. 부부가 자는데 커가는 애들이 부모이불 속에 들어오니까 못 넘어 오게 선을 그어 놓습니다. “이선을 넘어오지 마. 알겠지?” “엄마, 알았어.” 새벽 2시쯤 되면 넘어 오려고 합니다. “넘어 올래?” “아니야, 요기 까지만 ….” 세시쯤 되니까 넘어 왔어요. “왜 넘어 왔나?” “여기까지만 선을 좀 밀어줘.” 나중에 아침 되면 이불속까지 다 들어와 있습니다.

법이 있는 그 순간부터, 금지가 생기고 그 금지로 인하여 잠자고 있는 욕망이 또다시 일깨워집니다. 하지 말라는 그 순간부터 하지 말라는 것을 하고 싶어집니다. 그게 로마서 7장의 이야기입니다. “탐내지 말라”고 하면 도대체 무엇이길래 탐내는 것이 나쁘다는 말인가, 그게 도대체 뭐길래? 일단 하든 안하든 경험해 보고, 하든 안하든 내가 알아서 하겠다, 하면서 일단 경험을 해 보고 싶어 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그게 뭐길래 따먹지 말라고 했을까? 일단 먹어보고 그 다음에 알아서 하겠다는 겁니다. 일단 먹어보고 두 번 다시 안 따먹으면 되지, 이런 식입니다. 우리는 금지한 것을 소망합니다. 금지되지 않은 것은 우리에게 소망의 대상이 안 됩니다. 금지된 것 외에는 이미 허용된 것이기에 식상하니까.

그래서 만약에 내가 죄인이라고 했을 때,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고 했을 때 그것이 법안에서 허용된 것이라고 보지만, 그 안에 들어가면 천차만별이 됩니다. 입는 것, 먹는 것의 수준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겁니까? 허용된 수준까지 마음껏 늘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그것까지 넘어서게 됩니다. 법은 항상 넘어서게 되어 있고, 넘어서지 않으려면 금지를 하게 되어 있고 금지를 하게 되면 우리의 가장 기초적인 충동(리비도)이 올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금지가 있는 이상 우리의 삶이 피폐해져요. 교인들 얼굴이 안 좋으면 ‘아하! 금지된 것이 너무나 많구나’ 하는 느낌이 옵니다. 금지된 것이 많으면 삶이 피폐해집니다. 해도 괜찮다고 하면 갑자기 얼굴이 확 펴집니다. 나는 죄인이다, 하는 이 속성이 이런 식으로 법적으로 확정하게 되면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이유는, ‘나’따로 자존적이고 독립적으로 따로 살림차리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입니다.

내가 죄인인줄 아는 내가 얼마나 위대하냐? 내가 이점을 아니까,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라는 겁니다. “주여! 제가 죄인인 것을 알아 줄 테니까, 저의 가치를 하나님도 인정해주세요”라고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고 누가 계시는가 하면 자기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만든 집이 아니고 자기 집을 따로 챙기는 거예요. 자기가 만든 집에 자기가 원하는 온갖 하나님을 다 집어넣습니다.

나는 죄인이다. 나는 피 없이는 못산다. 맨 날 그 이야기를 해도 그 속성은 누가 만든 속성입니까? 내가 나 스스로 구원된 것을, 주체가 분열되지 않고 확정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법적인, 신학적인 것을 집어넣어서 이렇게 만든 겁니다. 이 주특기가 바리새인들 아닙니까? 금식하면서, 나는 죄인이다, 나는 부족하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죄인들 데리고“어이, 밥 먹으러 가자”고 갔습니다.

자기를 죄인으로 여기는 그런 죄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나는 진짜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했습니다. 진짜 죄인. 그렇다면 ‘나는 죄인이다’라고 해서 자기 구원을 확정하려 드는 사람 말고, 진짜 하나님이 거하시는 사람 같으면 ‘나는 죄인’이라는 속성은 어디서 주어져야 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볼 때 나는 죄인인 것을 알지요. 그러면 더 이상 그 속성이 담긴 이상은 나는 내 것입니까, 아닙니까?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나는 내 것이 아니고, 값을 주고 산 주님의 것이죠. 주님의 것이기에 내 안의 속성으로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나는 죄인이며 구원 받는것은 주님의 공로라는 속성이 내 안에 들어 있지요. ‘나는 죄인이며 주님의 피로 구원받으니까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나서면 안 된다는 말이죠. ‘나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나는 죄인이며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가 나와줘야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볼때 자기의 주체로서 다가서는 것이 아니고, 공통개념, 예수의 피로 다른 형제들을 찾게 된다는 겁니다.

국화빵에 예수의 피를 밀가루 붓듯이 죽죽 부었거든요. 죽죽 붓게 되면 국화빵이 되어서 하나 하나 개체가 성립됩니다. 우리는 하나 하나의 개체니까. 하나 하나의 개체로서 국화빵이 되니까 옆 사람이 말하기를, “야, 너는 뭘 자랑하는데?” 하니까 어떤 국화빵은 “나는 내 머리위에 예수의 피가 묻었졌단다. 예수의 피가 이렇게 부어졌다”고 예수의 피를 자랑하는 반면에 “나는 예수의 피를 바른 내가 되었다”고 하면, 더 이상 그 사람과 대화가 안 되지요.

앞에 국화빵은 뭘 이야기합니까? 지향점이 예수의 피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하나의 국화빵은 ‘그래서 나는 구원되었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내세우고, 나도 주의 종이다. 나도 죄인 맞다. 그러니까 주의 종이다’라고 나서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하고는 대화가 될 수 없는 거예요. 벽이 생기는 겁니다. “나도 예수 피 알고, 나도 죄인인 것을 아니까 나도 주의 종이라고 인정해 줘.” 이렇게 나옵니다. 주님이 계신 사람이 맞나, 그런 생각이 들어갑니다.

주님이 그 안에 계시면 속성만으로 대화가 되어야 할 텐데 속성으로서 따로이 ‘나’의 자립적이고 독립적인 ‘나는 구원된 것이 맞다’를 가지고 나서게 되면, 결국은 ‘너’와 ‘나’가 성립되어 버리잖아요. ‘우리’가 아니고. ‘너’ ‘나’ 되어서 ‘우리’가 되는 것이 아니고 ‘너’ ‘나’가 붕괴된 상태에서 ‘우리’가 성립되는 거예요. 그것이 다윗의 시온산의 특징입니다. ‘너, 나’ 없는 상태에서 ‘우리’만 있다니까요.

‘십자가마을이 예수님의 피만 사랑하는 사람들이다’라고 할 때, 사람들은 예수님의 피를 증거한다는 이것을 보지 않습니다. 뭘 보는가? ‘십자가마을만 성도인가?’ 라고 나옵니다. 그렇게 묻는 이유가 뭡니까? ‘너희만 주의 종이 아니고 나도 주의 종이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결국 대화가 되지를 않지요. 대화가 되려면 십자가마을 지우고 그 다음에, 나도 ‘주의 종이다’가 나오면 안되고, ‘나도 주의 십자가만 바라본다’ 이렇게 나와야지요.

‘십자가 바라보니까 나도 주의 종이야’ 이렇게 나오면 안 되고, ‘나도 십자가 피만 사랑한다’ 이렇게 나와야 서로 대화가 되는 겁니다. ‘너만 주의 종이냐, 나도 주의 종이다’ 이렇게 나와 버리면, ‘우리’가 아니고 ‘너’, 그리고 ‘나’만 있는 거예요. 그것은 ‘우리’가 될 수 없어요. 아무리 ‘나’가 모여도 ‘우리’가 될 수 없어요. 그걸 뭐라고 합니까? 그게 집합이죠. 집단이 될 수 없어요. 집단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지만.

나의 것이 된 ‘나’는 없어져야 됩니다. 주님의 것이 된 ‘나’가 있는 것은 되는데, 나의 것이 된 ‘나’는 없어져야 됩니다. 주님의 것이 되어 있는 ‘나’같으면, 주님이 어떤 일을 하셨다는 것을 가지고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주님이 너에게 뭘 주더냐?” 세상에 주님의 속성이 들어오는데, ‘피’가 들어오니까, 나는 졸지에 죄가 되어 버렸어요.

그리고 이 죄인된것을 구원하는 것도 그 속성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우리를 죄인되게 하고 하나님이 젖먹이를 가지고 승리하는 것처럼 그냥 공짜로 구원했다는 이 속성들을 부여받은, 머리에서 부여받은 속성들만 끄집어 내 놓고 이야기가 되면 그 모든 영광이 오직 누구에게 돌아갑니까? ‘너’, ‘나’가 아니라, 주님께 돌아가고 그것은 주님 안에서 ‘너’ ‘나’가 없고 ‘우리’가 되어 버립니다. 멀리 살아도, 서로 떨어져서 살아도 ‘우리’가 되어 버린다는 말이죠.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보면 ‘자랑하려거든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라’고 나오니까, 그리스도에게 받아 본적이 없는 이 사람은, ‘나도 그리스도만 자랑하니까 나를 알아 줘’라고 나오는 겁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거예요. ‘우리’ 되기를 싫어하고 기어이 꼼지락 거려서 내것을 따로 챙겨야 안심이 된다는 것은 바로 관심사가 그리스도가 아니고 주체의 분열에 가 있습니다.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선악과 따먹은 성질이 그대로 있는 겁니다.

시편 40편을 봅시다. 시편 40:6,7에 보면,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갑지가 웬 제 삼자가 등장합니다. 속제와 번제를 드리는 것은 각자 각자 개별자(주체자)로서 드리는데, 각자 주체가 되어서 드리는 예물을 하나님이 거절해요. 등장해서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제 삼자가 등장해서 모든 율법의 내용은 제 삼자를 겨냥하게 되어 있고, 우리를 비켜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졸지에 그분이 하는 일 앞에서 뭐가 되느냐 하면, 해도 소용없는 죄인으로 드러나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몰아주는 취지인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위대하시오’라는 게 성경에는 없습니다. ‘위대하신 분은 여러분이 아닙니다’라는 것은 성경에 있지만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위대하시기 바랍니다’라는 것은 없어요. 기쁨이라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 또는 다윗의 후손이 되었다, 또는 하나님의 약속의 대상자가 되었다는 자체 때문에 기뻐야지, 내가 딴살림을 챙긴 것 때문에, ‘야! 이것이 나만의 주체의 세계구나. 기분 째진다’는 이것을 기뻐하게 되면, 이것은 할렐루야가 아니라 무슨 소리를 해도 성경과 관계없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속성이 모아지면 그것이 주체가 됩니다. 그런데 그 속성이라는 것이 우리가 자아내는 속성은, 전부 다 내가 만들어낸 속성이기에 나(내 영광)를 위한, 나에게 봉사하기 위한, 나를 돋보이기 위한 속성들로 우리 안에 채워집니다. 나는 의사다, 나는 판사다, 나는 공부 잘한다, 나는 달리기를 잘한다, 나는 등산 잘한다, 이 모든 것이 다 ‘나’를 위한 겨냥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미 버림받은 자, 에덴동산에서 쫒겨난 자의 입장에서는 기껏해야 나오는 솜씨가 그런 솜씨밖에 없습니다.

그런 솜씨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그 솜씨를 통해서 죄와 선을 가리고자 한다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반듯하게 살려고 애쓰는 ‘나’를 지적하고 ‘나’를 모독하면 그것은 무조건 나쁜 것이고, 이러한 ‘나’를 자꾸 북돋아 주면 그것은 선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이 선과 악이란 개념자체가 누구중심입니까? 기름부음받은 자 중심이 아니고 내 중심이 되는 거예요.

‘내가 소속되어 있는 십자가마을을 왜 공격하느냐?’ 십자가마을이라는 집단과 '나’를 동일시 해버리면, 내가 소속되어 있는 십자가마을을 공격했다고 덩달아 화를 내고 있는 겁니다. 정작 우리가 화를 내야 할 것은, 십자가마을을 공격했다고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 말고 다른 것이 동원되어야 구원받는다고 여기는, 그 점에 대해서 우리가 제대로 화를 내야, 정말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답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마을 공격한다고 십자가를 공격하게 되면 십자가마을이름은 다른 것으로 바꾸면 됩니다. 십자가마을 말고 가야산마을로. 이것은 별게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가 답답한 것은 십자가마을이 예수님의 피를 이야기하니까, ‘너희만 옳으냐, 우리도 옳다’해서 이 사람이 뭘 겨냥하느냐 하면, ‘십자가마을 자체를 너희가 구축하고 있지?’라는 식으로 공격하고 싶어하는 그들은 또 뭐냐 이말 입니다.

바깥에 있고 싶다는 말 아닙니까? 바깥에 있어 버리면 ‘우리’가 성립이 안 되지요. 예수 피를 받은 사람을 한 형제라고 해놓고 바깥에 거하고 있으면 예수님이 오시면 바깥에 거하십니까, 안쪽에 거하십니까? 골치 아픈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갈릴레이 운동론에서 보면 어느 쪽이 바깥이고 어느 쪽이 안쪽입니까? 중심이 없으니까 따로 그런 것이 없지요. 이쪽에서 보면 저쪽이 바깥이고, 자기가 안이라고 하면 저쪽은 바깥이 됩니다. 자기가 바깥이라면 저쪽은 안이 되고 자기맘대로죠.

예수님의 십자가 속성이 되게 되면 우리가 개별적으로, 이 주체 자체, 나를 위한 선함, 나를 위한 구원 그 자체가 뭐가 되느냐? 악이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다른 식으로 풀이하면 , 기도하는 것도 죄요, 전도하는 것도 죄요. 설교하는 것도 죄요.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그게 왜 죄가 될까?’ 그게 왜 죄냐? 그렇게 해서 죄가 아니라, 죄를 뜯어보면 그런 것들이 죄의 항목으로 다채롭게 들어 있습니다.

설교하는 것이 죄고. 헌금하는 것이 죄고, 전도하는 것이 죄라고 이야기 해줘야 , 더 이상 설교한 주체, 헌금한 주체, 설교한 주체 그 자체가 결국 나는 나의 것이 될 수 없고, 우리는 이미 합격증을 받은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그것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증거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시편 18:25,26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

우리 안에 무엇이 오지요? 주님이 속성이 들어오지요. 속성이 다채롭습니다. 다채롭지만 두 가지 성질이 있지요. 하나는 주의 일에 거스리는 사람은 거스리는 속성이 드러나게 되어 있고,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주의 완전하심과 자비하심이 바깥으로 튀어 나오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부어진대로 바깥으로 튀어 나오게 되는 겁니다. 인간이란 처음부터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나’, ‘나’라는 것이 성립되었지, 처음 만들 때 부터 인간이란 따로이 절대적인 ‘나’라는 것을 정당한 것으로 허용 받은 적이 없어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골로새서 1:16 말씀대로 예수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다른 말로하면 하나님의 형상 되시는 분을 증거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 것으로 만들라고 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 형상의 실체 되시는 분을 증거 하라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것만 사람으로 취급되고, 하나님의 형상이 없는 것은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습니다.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다 시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존귀에 처하지 못하니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그냥 짐승이라고 해도 기분이 나쁜데 앞에 무엇이 붙습니까?

만약에 우리 주체가 살아 있으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멸망할 것을 왜 이야기 하는가? 헤어지자. 치워라” 하고 이야기할겁니다. “멸망한다면서 이야기를 왜 합니까? 멸망한다면서! 듣고 보니 기분 나쁘네!” 안 믿는 사람, 예를 들어 성철스님에게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하면 듣는 성철스님 기분 나쁘잖아요. ‘멸망할 줄 알면서 왜 따지냐’고 나올 것이고 ‘이단 이십니다’라고 하면 ‘이단인줄 알면서 왜 따지냐’고 나올 것이 아닙니까?

당신은 ‘나’는 ‘나’(주체)가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들여다 볼것은, ‘나’는 무엇이다, 거기서 ‘나’는 떼어 버리고 주님의 속성이 어떤 속성이 그 사람에게 흘러 들어왔나, 그것만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아하! 주님을 거스리는구나’ 그러면 끝나는 겁니다. 주님의 계획을 거스리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멸망하도록 하기 때문에 그렇게 거스리는 거예요.

그러면 얼마나 착해야 주님의 자비하심이 나오는가? 교재 10페이지를 다시 봅시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의 상식선에서 안 나오는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참 어렵습니다. “요셉의 장막을 싫어버리시며….” 왜 인간을 만들어 놓고 싫어 버리십니다. ‘싫어 버릴것 같으면 만들지도 말지 싫어하시면서 왜 만드십니까’라고 시큰둥한 반응이 나온다는 것은 그안에 뭐가 들어 있다? ‘왜 나에게 의견도 안 물어봅니까’ 라는 주체가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주체는 원래 마귀가 심어놓은 것이지 하나님이 만든 주체는 원래 그런 주체가 없어요. 마귀가 결정해서 자기 맘대로 만들어 놓은 거예요.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한다”(롬 9:13)고 할때 듣는 에서, 기분 나쁘잖아요. ‘싫어할 것 같으면 만들지도 말지, 왜 만들어 놓고 그렇게 합니까’라고 할 때, 바로 그 따위 식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독자적이고 절대적인 영역을 따로 만들어 놓은 거예요.

따로 만들어 놓으니까 ‘주님께서는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고 이것은 내 자리’라고 하는 겁니다. “잘할 테니까 내 안에는 들어오지 마세요!” 다시 정리해 봅시다. 우리의 속성은 국화빵처럼 누구의 속성이다? 주님의 속성이죠. 내 속성이 아니고 주님의 속성이 들어 왔다는 말은 이미 우리는 값을 주고 산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속성이 되면 우리는 졸지에 뭐가 됩니까? 십자가가 들어왔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뭐가 됩니까? 죄인이 되지요. 그리고 그 죄인을 누가 구원했다? 주님이 십자가 피로 구원한다. 그 십자가 피로 죄인을 구원하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시킨 일입니까? 다윗의 자손인 그리스도에게 시킴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 바깥으로 못 벗어나는 예수님의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속성이 우리 안에 온몸에 퍼져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에게 들어온 주님의 속성 때문에. 그런데 어떤 사람은 “목사님!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해놓고는 성경말씀에는 관심이 없어요.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자기다짐에 다짐을 하게 되면, 행여 하나님께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를 구원해주지 않을까, 하는 그런 주체가 성립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인인데 뭐, 다 알잖아. 죄인인줄 아니 더 이상 나에게 간섭마소. 내가 다 안다니까’ 이런 뜻이거든요. 주님이 들어올 자리가 없고, 자기만 들어올 자리가 있어요. ‘내가 죄인이니 나의 독자적인 개성을 인정해 달라’고 되어 버릴 때, 그것이 바로 주님 보시기에 자기가 측정한 죄인이고, 사실은 십자가가 들어와서 알게 된 죄인은 아닙니다. 십자가가 들이닥치면 그따위 식으로 생각하는 것도 뭐가 됩니까? 죄가 되는 겁니다. ‘아, 십자가 앞에서는 나라고 따로 주장할 것이 없구나’라고 되는 겁니다.

에베소서 4:5에, “…세례도 하나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참 신기하죠. 보세요. “세례도 하나”라는 말이 성립이 안 됩니다. 성령세례를 받을 때 받고 나면 그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나 성령세례 받았다”고 하잖아요. 이 말을 좀서 설명하면 ‘건드리지 마! 나 성령세례 받은 인간이야’라고 되는 겁니다. ‘나도 성령세례 받았어. 너만 받았어? 나도 받았어’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 사람이 따로 챙길 수 있는 성령세례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세례 받으면 특징이 뭐냐? 더 이상 내 것이란 없구나, 이렇게 되어야 성령세례를 제대로 받은 것인데, ‘내 몫의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까부는 것은 성령세례가 아니라 미친개세례를 받은 것인지, 그것은 “성령이 하나요”에 해당이 안 됩니다. 성령세례를 제대로 받게 되면, 따로 내 몫의 성령세례는 없음을 알 때, 성령세례를 제대로 받은 사람입니다.

‘너만 받았나? 나도 받았다’고 나오면 이것은 문제 있는 거예요. “세례가 하나”라니까요. 이것이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모든 사람이 함께 홍해를 건너갈 때 모두 한 세례를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1-5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이것은 사람이 뭐든지 받게 되면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죄인이기 때문에 곧장 누구 이름을 붙이냐 하면, 내 이름을 붙이는 겁니다. 책 받으면 대번에 자기 이름부터 쓰잖아요. 마찬가지로 성령이 왔다면 그것은 남의 성령이 아니고 나의 성령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그것은 성령이 하나가 아니지요.

성령이 오게 되면 내 것이라고 이름을 쓰는 것 자체가 죄인 것을 비로소 알게 되는 이것이 비로소 성령세례 받은 특징입니다. ‘아! 내 것이라고 따로 받겠다는 그것이 죄’라고 하는 것을. 성령세례 받고 난 뒤에, 과연 내 것이란 따로 없고 신의 속성만 받아서 하나의 개체를 이루는 것, 그래서 몸은 헤어져도 영은 ‘우리’가 모두 하나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방금 이러한 작업을 시편에서 시행되려면, 인간을 빼놓고 다윗을 선택했다는 작업이 선행됩니다. 이것도 어려운 말입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모든 것, 성령이 하나고, 십자가 피의 속성, 이 모든 것을 시편의 시대에 시행하려면, 하나님께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다윗을 하나 딱 선택을 해버리면, ‘나는 뭔데, 왜 나를…’이라고 사람들이 나서겠지요.

그것을 노리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어떻게 되느냐 하면, 선택하기 전에는 모두 다 같은 하나님인줄 알았는데, 새로 선택해준 그 선택의 하나님이 따로 있고, 선택을 받고 난 뒤부터는 다른 사람들은 갑자기 누구에게 와락 달려든다? 다윗에게 와락 달려들겠지요. 그 순간부터 갑자기 다 같은 하나님인줄 알았는데 다윗의 하나님 따로 되어 버리고, 다윗 외에 선택받지 않은 사람이 따로 나오겠지요.

시편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대목, 몰트만이 이것을 풀려고 애썼는데 안 풀립니다. 왜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았는가? 그러면 하나님이 없는 것인가? 하나님이 두 분이 계셨는데 한분만 남고 한분이 없어진 것인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아버지 어찌하여 버리셨나이까).” 진짜 버림을 받은 것인가? 아니면 버림받은 척을 한 것인가?

그것을 학자들이, 토마스 아퀴나스, 어거스틴 등 모두 다 이 십자가의 비밀을 풀어야 되는데,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여” 이 구절에 다 걸려 넘어졌습니다. 알 수가 없어요. 차라리 시나리오를 이렇게 짜면 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이렇게 막말로 나오지 마시고, “주여! 제가 제 백성을 위해서 대신 버림받겠나이다. 하지만 이것은 다 사전에 합의된 것 맞지요?” 이렇게 나와야 듣는 우리가 안심을 하지요.

‘버림받는 척이라도 하면,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구원 받는다’고 이렇게 각본이 짜여져야 하는데, 이것은 완전히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나옵니다. “사실은 버린 것이 아니지요?” 이것이 붙어야 되는데 “버리셨나이까”라고 나오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버림받았다는 말은 아들이 아니었다는 말인지, 왜 그렇게 우리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그러한 대화를 주고 받느냐는 겁니다.

그래 놓고는 나중에는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하죠. 그러면 앞에서 버렸다는 것은 장난(농담) 이었습니까? 이 대목을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해명을 해 봐야 됩니다. 제가 방금 힌트를 드렸습니다. 선택이 오기 전에는 그동안 같은 여호와 이름을 불렀습니다.사람이 같은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내가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나’라는 주체가 성립됩니다.

광장에서 “어이 아무개!” 라고 부르는 순간 그렇게 호명할 때, 그것을 ‘응시’라고 하는데 누구의 시선이 오게 되면, 나는 그것을 돌아보면서 ‘나는 아무개야’ 라는 것이 또다시 확인이 되지요. 그래서 현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그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왜? 내가 네 아버지 맞다. 내가 뭘 도와줄꼬?”라고 나오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를 때 “예! 이스라엘 여기 있습니다”라고 원만한 관계가 이미 수립되었다고 자부했던 사이입니다.

다윗을 선택하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다윗을 선택하는 그 순간부터 균열이 일어납니다. 어떻게 갈라지는가? 사람들이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이름은 애초부터 허락한 적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사람이 어떤 하나님(심지어 여호와를 불러도)을 불러도 전부다 그것은 뭐다? 다 가짜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진짜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선택했습니다. 다윗을 통해서 따로 선택했습니다.

하나님과 선택받은 사람(다윗)과 주고받는 호칭, 호명은 평소에 선택되지 못한 사람, 일반인들(다른 말로 하면 다윗을 빼놓고,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고)이 불러 댔던 이름들(주여, 여호와여, 성령이여, 삼위일체 하나님이여), 이 모든 것은 부를 자격도 없는 인간이 신의 이름을 부른 거예요. 그래서 왜 선택을 해야 되느냐 하면, 분리를 시키기 위해서 선택하는 겁니다.

선택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분리시켜서, 이 사람들 중에서 선택된 자만 알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을 사람들은 처음부터 몰랐었고 그동안 그냥 불러댄 겁니다. 신의 이름으로 분열된 주체를 봉합하기 위해서. 절대자와 나를 동일시함으로 말미암아 신에게 마치 구원된 것처럼 느껴질 때 이 주체는 안정감을 얻어요. 종교적 안정감입니다. 그래서 불러댄 겁니다. 오, 신이시여! 오, 신이시여!

그런데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없음을, 이렇게 선택된 자가 등장한 뒤에 비로소 아는 겁니다. 알 때, 이 선택된 자는 뭘 포함하고 있는가? 선택된 자는 그냥 선택된 것이 아닙니다. 이 엉터리 신을 불렀던 안에 선택된 자에 의해서 구원될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멋도 모르고 불렀던 그 하나님이 바로 버림받을 자가 기껏 부르는 이름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여! 우리는 버림받아도 마땅합니다”라고 부른 겁니다.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나는 마땅히 버림받아도 쌉니다. 그런 뜻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전에 중간과정으로 거칩니다. 그 운명을 거쳐야 나중에 “내 영혼을 받으소서. 다 이루었습니다”라는 것이 성립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 혼자서 구원받습니다. 진정 선택된 자로부터 선택되어서 구원된 자는 우리가 평소에 불렀던 하나님이 말짱 환상이고 사기였음을 어디서 비로소 압니까? 십자가의 버림받음 앞에서 비로소, 무릎을 치면서 에덴동산에서 쫒겨난 주제에, 버림받은 주제에 이름을 부르기는 뭘 불러요. 그것은 제자리 뛰기지요.

‘이름을 불러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진짜 제대로 우리를 대신하신 그분이 우리를 구원해 줘야 우리가 구원받습니다. 따라서 구원자는 내가 아니고 이미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