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시편-2008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2강-예수 그림 퍼즐 짜맞추기-욕망이 인간을 만든다-나를 기쁘게 하는 예수=환상= 현실실

아빠와 함께 2014. 1. 6. 16:30

2008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2강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간이 되었음으로 시작하도록 합시다. 지난번 시간에 한 것, 시편은 어렵기 때문에 그림으로 나가려해요. 그래서 동영상 안 보면 듣는 사람은 무슨 이야기인지 못 알아들을 거예요. 구득영 목사님 녹취하는데 애를 먹도록

지난번 시간에 시편의 말씀은 어디를 겨냥하느냐? 예수님의 피, 십자가. ‘피로 다 이루었다 .’ 이걸 겨냥하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기 뭐가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은 억지로 하나님의 언약구조가 여기에 마치 굴레를 뒤집어씌웠어요. 언약은 모세언약, 다윗언약 여러 가지인데 성전을 만들고 그러는데 뒤집어씌우니까 그중에 시편도 포함되죠.

말씀을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씌우니까 이 사람들이 이걸 뭐로 오해하느냐 하면, 장차오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천국이 이루어진다고 생각을 안 하고 이 말씀을 자기가 지켜냄으로써 마치 자기가 천국 가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그런 시도를 한 겁니다. 

그래서 제가 첫 시간 마지막에 뭐냐 하면, 그럼 이 말씀이 인간을 가만두지 않고 개미처럼 달려들어서 뜯어먹는다고 이야기했지요. 뜯어먹는 내용이 시편에 쭉 나오는데.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이렇게 저를 시련을 주십니까? 힘들게 살고 고난을 주십니까? 그런 식으로 뜯어먹는데.

그런데 여기서 이걸 구약 이스라엘 사람은 이렇고. 그렇다면 이걸 다시 해봅시다. 시편 말씀에서 십자가 나온다. 이걸 이렇게 해도 되고, 그걸 바꾸어서 해도 돼요. 장차오실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서 뭐가 나왔느냐? 시편 말씀이 먼저 나왔다. 이렇게 해도 그게 옳은 겁니다.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루기 위해서 미리 무슨 낚싯밥 던지듯이 하나님 말씀을 주셨다. 당신이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 있느냐? 저는 베드로사도한테 기댈 거예요. 사도행전 나오지요. 시편에 다윗이 이야기해놓고,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겁니까? 다윗이 장차오실 예수님을 겨냥해서 한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 속에 장차오실 메시아의 영이 미리 앞당겨서 다윗 속에 들어앉았기에 다윗을 뭐라고 하느냐? 선지자다. 자기 속에 장차오실 분의 영이 들어있어서 장차오실 분의 십자가와 부활하심을 미리 앞당겨서 다윗이나 선지자를 통해서 그 주변에 그 지역에 그 시대 사람들에게 장차오실 메시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래서 선지자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 말이 맞지요. 장차오실 예수님의 하실 일을 보여주기 위해서 미리 시편을 했다이 말이죠. 그런데 이걸 누구한테 이야기했느냐 하면, 시편 말씀이 인간에게 다가올 때 이거 잘 들어보세요. 여기 인간은 시편 말씀을 마중 나가서 저 뒤에 있는 십자가 이거는 보이지 않고, 자기가 이걸 지키려고 시도한 거예요.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래 되니까 복 있는 사람 되려고 이 시편 말씀을 묵상하려고 시도한 거예요.

이게 잘못인데 소위 인간은 적자존재, 돌멩이가 아니니까 인간 속에 자기 속에 언어, 말이 있습니다. 말이나 문자가 나오지요. 하여튼 이걸 언어라 합시다. 인간이 자기가 생각하는 언어 틀이 있어요. 언어체계가 있다. 오늘 두 번째 강의가 어려운데 쉽게 가려고 애를 씁니다.

인간은 어떤 자기 생각을 펼칠 때 그냥 펼치지 않고 말로 펼치고 생각을 펼치는데, 자기가 갖고 있는 이 생각의 틀이 있는데 여기에다 뭘 일방적으로 집어넣느냐 하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길을 좇지 아니하고, 하니까 ‘복’, ‘악인’ 이 개념을 십자가에서 보지 못하고 자기가 평소에 생각했던 복, 평소 생각했던 악인, 나에게 해코지한 나쁜 놈, 이런 것들이 들어있기 때문에 시편 말씀을 볼 때에 마중을 나와요. 

마중을 나와서 야, 복 있는 사람은 주야로 묵상하는구나. 주야니까 아침에 두 시간, 밤에 두 시간 나는 복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흉내를 하는 척을 내려고 하지요. 이게 아까 제가 이야기한 기독교의 종교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렇습니다. 결론 나오면 곤란한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렇거든요. 우리 성도가 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예를 들어서 이 그림이 있습니다. 여기 어떤 남자 그림이 있는데 제가 찢어보겠습니다. 이런 건 녹취할 때 어떻게 녹취하는지 몰라. (쫘~악) 이렇게 찢었어요.

찢어놓고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설명하기를 야, 그 찢은 그림을 모자이크로 돼있는 걸 대충 그림을 만들어봐라. 하면 찢은 선 맞춰서 할 수 있잖아요. 찢어놓고 맞춰 보겠습니다. 못 맞추겠다. 하여튼 대충 이런 쪽이죠. 맞죠? 이거 할 때 기도했습니까? 이거 할 때 무슨 말씀을 지켰습니까?

결론적으로 이래요.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가지고 지키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가 어떻게 그려지는가 짜맞춰보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 보고. 이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이게 성도에요. 이 외에 다른 성도는 없습니다. 성도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의 그림을 자기의 상황 속에서 짜 맞추어 보여주면 돼요.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에 어쨌든 간에 천국 가려고 말씀 지켜서 애를 쓰는 반면에 성도라 하는 것은 성령이 이미 선지자에게 이미 성령이 임해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처럼 성도에게는 새삼스럽게 구원받으려고 애쓰지 않고, 성도의 남은 삶은 뭐냐? 나에게 이렇게 은총을 주시고, 영생을 주신 그분은 바로 이런 분입니다. 하고 짜 맞추는 그 모습을 드러내기만 하면 그게 성도의 삶의 전부데요. 그 외에 없어요. 그 외는 없다니까요.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는데 그 설교 가지고 뭘 한다고요? 그 설교만을 해서 그리스도만 짜 맞춰서 드러내면서 아이고, 참. 오늘 예수님 분명히 알았네. 하고 점심 먹고 집에 가면 돼요. 그러니까 세상살이 하면 되는 거예요.

뭐 철야해서 온갖 열심히 해서 뭘 따내는 게 아니고,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이 구세주인 것을 알았기에, 여기서 문젭니다. 이미 알았기에 안 사람으로써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내가 구원받은 것은 이분입니다. 라고 이야기하도록 평생을 살게 돼있는 게 성도다 이 말이죠. 이게 뭔 종교에요? 애들 퍼즐 게임하는 것과 똑같다. 이게 무슨 종굡니까? 애들 갖고 노는 놀이지. 이게 무슨 종교가 되겠어요? 종교 생활 왜 하느냐 말이죠. 

자, 예를 들어봅시다. 민수기. 제 아내가 당부하는데 제발 좀 흥분할지 말라고. 흥분기가 오네. 민수기 14장 31절 한번 봅시다. 민수기 14장 31절 누가 읽어보세요. “너희가 사로잡히겠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예, 됐습니다. 지금 땅을 탐지하러 간 사람이 야, 이거 땅을 탐지해보니 우리가 들어가 보고 싶어도 들어가고 싶기는 싶은데 우리 힘으로는 못 들어간다. 하고 원망이 늘어졌어요.

그래서 이것은 어른도 못 들어가고 애들도 못 들어간다. 이렇게 하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모세를 통해서 하기를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한 유아들, 어린애죠. 만약에 우리가 가면 어린애들 다 잡혀간다. 그렇게 생각했던 그 유아들을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로써는 불가능하지요. 불가능한 세계를 어디로 간다? 하나님께선 하신다 이 말 아닙니까?

성경에서 불가능하면 불가능한 줄로 알고 쓸데없는 종교적인 노력을 하지 말았어야 돼요. 그리고 우리가 오늘 시편 공부하니까 시편 8편 봅시다. 유명한 말씀인데 거기 봅시다. 시편 8편 2절,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여기 보면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신다고 돼있지요.

이게 뭔 뜻이냐? 민수기 14장 31절 말씀 생각해보세요. 아, 우리는 못 들어갑니다. 안 됩니다. 천국 좋기는 좋은데 그 천국은 우리 힘으론 도저히 성사가 안 됩니다. 우린 죽었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갑시다. 하고 온갖 절망적인 상황에서 너희들이 안 되지, 안 되는 너희들 그래서 너희 어린애들 다 사로잡힐 것이 분명하다고 장담했던 그 어린애들 내가 친히 인도할게. 라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시편 8편 2절 봐도 마찬가집니다. 젖먹이와 어린아이가 무슨 전쟁에 나가서 싸움을 합니까? 걔들이 무기를 칼을 들 힘이나 있습니까? 전쟁터에 가면 집에 가자고 엄마 찾기 바쁘고, 집에 돌아가서는 징징대기 마련인데 무슨 어린애가 젖먹이가 어떻게 전쟁의 용사가 돼요. 이건 안 되지요.

안 되니까 안 되는 것을 이미 된 사람이 누가 안 되는 걸 되게 하셨는가를 퍼즐 게임하듯이 짜 맞추는 것이 시편이란 말이죠. 강의 끝났어, 끝났어. 제가 첫째 시간에 그렇게 쳤던 개혁주의, 청교도 왜 그렇게 치는 이유가 뭡니까? 그들 속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안 되는 걸 기어이 하겠다는 의지가 들어있어요. 그것은 마귀가 좋아할 신학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꾸 쓸데없는 희망을 주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천국이란 그 진짜 천국을 아는 사람은 이거는 열 번 깨어나도 안 되는 나라야. 우리가 이 나라 들어가다니 이거는 말도 안 돼. 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러면서도 바로 이 분이 들어가게 하셨어. 라고 들어가게 안 되는 걸 들어가게 하신 그분을 증거하는 삶, 이게 이미 성돕니다. 성도는 그 외에 다른 성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 점을 제가 설명하려고 하는 거예요. 성경 한번 찾아봅시다. 창세기 3장 23절인데, 여러분 다 아시지만 같이 한번 봅시다. 창세기 3장 23절. 다같이 시작, “여호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돼있지요.

‘쫓아내시고’가 실감나야 됩니다. 교회생활하면서 이게 실감나야 돼요. ‘쫓아내시고’가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쫓아내시고. 그 다음 그 뒤에 뭡니까? 내 힘으로 에덴동산에 복귀하는 것을 도저히 허락하지 않은 상태가 이게 유일한 현실임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수용해야 됩니다.

야, 쫓아내셨던 그 강력한 힘이 얼마나 센지, 내 힘으로 도로 천국 간다? 이거는 말도 안 되는 거다. 만약에 내 힘으로 천국 갈 수 있다면 그건 애초부터 성경 자체가 엉터리든지 안 그러면 내가 지금 엉뚱한 예수를 믿든지 둘 중에 하나에요.

쫓아내실 때 왜 쫓아내시는가? 네 힘으로 두 번 다시 이곳에 오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하는 차원에서 다시 내가 세상에 다가간다. 예수님께서 다가오시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이렇게 설명해도 어떤 사람은 그거는 너무 절망적이다. 쫓아내시는 건 인정하겠는데 그래도 샛문은 샛길은 하나 마련해줘야지, 오는 사람은 낙이나 있겠나?

뭐 안 된다. 절망이다. 기도해도 안 돼, 헌금해도 안 돼, 전도해도 안 돼, 교회봉사해도 안 돼, 목사 말 들어도 안 돼. 교회부흥 되도 천당 못 가. 이러면 사람이 교회 말아먹는 거지. 교회 하겠다는 말이야, 못 하겠는 거야. 집에 가서 기다리라는 말 밖에 안 되는데 그래서 되느냐? 성경에 보면 나와요. 시편에 기다리는 말이 나옵니다. 성경을 제대로 안 보니까.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안 되는 걸 하신 분을 증거하기 위해선 그 방법 외에는 없어요. 다른 방법이 없어요. 안 되는 걸 하실 때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에게 매이지 않고 그분한테 매이게 돼있어요. 안 되는 걸 되게 하신 분에게 매이게 돼있지, 안 되는 걸 죽자고 안 되는 놈에게 백 날 매여 봐야 역시 안 되잖아요. 왜 우리 자신의 행함에 목을 답니까? 안 되는데.

왜 안 되는가? 그래서 제가 이렇게 하면, 그러면 이근호 당신 말대로 하면 기독교 이천 년 역사, 신학자들 전부다 사이비고 이단이고 거짓이란 말인가? 이렇게 한다면, 저는 처음부터 이야기해요. 처음부터 인간은 이단이었습니다. 뭘 새삼스럽게 신학자들 이단이냐 하지만 전부 이단이었습니다.

왜 이유를 왜 그들이 왜 인간의 행함은 안 되는지를 지금부터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이 설명하는 것이 상당히 난해하더라도 참으시기 바랍니다. 왜 참어도 되느냐 하면 우린 이미 결론을 알기 때문에. 이거 알죠? 다시 한번 찢을까요? 이거 종교 아니죠? 그냥 짜 맞추는 거죠. 놀이 아닙니까? 놀이하듯이 인생사는 거예요.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스도가 이분이 하셨다는 걸 증거하면 되니까.

어렵습니다. 자, 여기서부터 어디서 출발하느냐 하면, 인간에게 나름대로의 언어가 나온다. 이 대목부터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인간에게서 언어가 나온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지금부터 둘째 시간 끝날 때까지 하는 내용은 여러분한테 이해를 요청하기가 상당히 제가 죄송스러운데 그러나 제가 흥분 안 할 테니까 가만히 들어보시면 아, 저런 생각도 있구나. 하고 보시면 됩니다.

사람이 칠판지우개를 볼 때 만약에 잠자고 있었다면 칠판지우개는 없지요. 그런데 내가 만약에 의식이 깨어 있으면 칠판지우개가 아, 저기 있구나. 아는 겁니다. 그럴 때 지우개가 아무리 열 개가 있더라도 내가 의식을 못하면 나한테는 지우개가 없는 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우개가 또 앞면만 보여요. 뒷면은 안 보여요. 전체가 안 보인다고. 밑면은 안 보이잖아요. 안 보여도 우리는 이 밑의 면만 보여줘도 대번에 지우개인 줄 압니다.

그렇다면 정직하게 봐서 앞면만 보이고, 옆면만 보임에도 불구하고 전체 윤곽을 본다는 것은 이것은 의식에서 새롭게 구성을 하는 겁니다. 물체를 대상을 구성을 하니까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진짜 이 지우개의 통일체가 사실 우리 의식 안에 우리 마음 안에 정신 안에 구성 돼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 바깥에 있는 지우개가 우리 안에 들어올 때 나는 지우개 있다. 나는 안에 있다 아는 거죠. 그러면 과연 내가 잠잘 때 지우개는 없습니까? 있단 말이죠. 지우개 있잖아요. 자, 예를 들어서 예수님 재림하셨다. 오후 2시에 예수님의 재림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2시 반에 안 믿었어요. 3시에 믿었습니다. 4시 반에 안 믿었어요. 재림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인간의 의식이 계속 쭉 이어지려고 한다면 만약에 예수님께서 이게 재림이라면 글자 씁시다. 쉽게 갑시다. 오후 2시 깨니까 예수님께서 짠~ 재림있구나. 오후 2시 반에 짠~ 재림있네. 계속 보여줘야 돼요. 계속 보여줘야 있는데 만약에 안 보여주면 어, 없네, 없잖아. 재림은 없어. 없는 거야. 3시 되니까 짠~ 있네. 3시 반에 또 안 보여주니까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완전히 미친 건데. 이게 뭐냐 하면, 나에게 재림이 계속해서 있어지려면 계속해서 예수님의 재림이 계속 생각나야 하느냐, 안 그러면 재림을 예수님께서 글자 써서 보여줘야 하느냐? 하는 그런 문제가 등장합니다.

이건 무슨 뜻이냐 하면, 나에게 재림이라는 걸 믿는 의식이 지속될 때에 내 안에서 내가 알아서 지속시키느냐, 아니면 바깥에서 계속 지속케 하는 어떤 요인들, 원인들을 계속 제공해야 하는 그 문제다 이 말이죠. 평소에 신앙생활하며 그런 거 안 따져봤지요. 빌면 빌고, 말면 마는 거지 뭐. 그래 생각했지요.

자, 이렇게 되고 보니까 그러면 재림이 일년에 두 번씩 재림 설교해도 오늘도 재림 믿고, 내일도 재림 믿는 것은 두 번씩 설교한 목사한테 책임이 있는 게 아니고, 그런 공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내가 재림을 믿어야 돼. 구름타고 오셔. 분명히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그걸 계속해서 유지하려고 나의 노력의 결과 아닙니까? 나의 노력에 달려있죠. 예수님께서 맨 날 재림만 하면 십자가는 언제 설교 합니까? 안 되거든요.

그러니까 나의 노력에 달려있다 이 말이죠. 결국 나의 노력에 달려있다는 말은 나의 노력에 달려있는 재림이 더 지속하려고 애를 쓰려고 노력하는데, 어제 알았던 재림의 요소가 구름타고 오는 걸 깜빡 잊어버렸어. 그냥 재림하시는 게 아니라 구름타고오시는 걸 잊었는데 천사들이 나팔소리 나는 걸 잊어버렸어. 그런데 오늘은 구름타고 오시고, 나팔소리까지 업그레이드 되서 다시 가서 알았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다음에 다음 주 되서 뭔가 받쳐서 재림은 생각나는데 이게 재림이 죽은 자가 먼저 일어나지 않으면 산 자가 올라간다. 그게 헷갈린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지속하려고 애를 써도 내 몸의 컨디션이나 또 사업이 바쁘다보면 깜빡 잊어버릴 수가 있어요. 근데 잊어버린 순간 주께서 재림해버리시면 나는 졸지에 지옥 가는 거예요.

여기서 인간은 뭐냐 하면, 오고 오는 모든 것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려고 하는 그런 중심센터를 만들어내요. 그걸 가지고 ‘주체’라 하지요. 뭘 하더라도 이건 내 것이니까 내가 알아서 보존한다는 중심센터를 만들어요.

만약에 예를 들면 연애하는 사인데 어떤 여자를 만났다. 매일같이 만나진 않잖아요. 탤런트도 아니고. 가끔 만난다. 가끔 만날 때 누구시더라? 이러면 귀싸대기 맞아요. 누구시더라? 아니 만났잖아. 아, 이제 생각난다. 이래 되면 안 되거든요. 늘 평소에 생각해야 된다고. 그러니까 평소에 지금 이런 대상이 안 떠오르더라도 뭔가 구성해서 나만의 것으로 차곡차곡 저장해놓은 그러한 중심센터, 그게 인간에게는 주체라는 게 있습니다. 고게 주체에요.

예를 들면 기타를 친다. 기타를 칠 때. 운전면허 처음 배울 때 더듬거리다가 한 십년 하면 어떤 때는 길 좋을 때는 핸들 놓고 까불기도 하고 그렇거든요. 처음부터 십 년 해도 덜덜 하면 문제 있잖아요. 이미 운전에 익숙해진 게 나만의 것이 있단 말이죠. 

그것처럼 나만의 것으로 이미 변화된 것, 그것이 바로 뭐냐? 나는 운전에 능숙해. 라는 나만이라는 주첸데 안에 속성이 있습니다. 나는 운전 능숙해. 나는 일본어 할 줄 알아. 나는 수영도 한다. 이런 식으로 ‘나만’이라는 것 안에 여러 가지 자기가 할 수 있는 속성. 나는 저 사람도 기억한다. 저 사람은 기억하기 싫어도 기억한다. 이런 식으로 나는 이번에 이명박이 찍었다. 이런 게 쭉 담겨 있는 거예요.

그 중에 하나가 나는 기타도 잘 친다. 있는데 한 2년 뒤에 피아노를 배우고 난 뒤에 기타는 천박해. 피아노가 아주 귀족적이다. 그 다음부터는 의도적으로 나는 피아노친다가 추가가 되면서 기타 치는 자랑을 남한테 내세우기 싫어요. 기타는 지가 개나 코드 잡고 치면 다 치는 건데 피아노는 얼마나 어렵다고. 레슨 받아야 돼요.

그래서 나는 뭐냐? 이제는 기타 친다를 자랑했는데 자랑거리가 바뀌었어요. 피아노 친다로 바뀝니다. 그러니까 주체가 새로운 사건, 피아노 쳐 볼래. 새로운 사건을 만나면서 주체가 달라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어떤 사건과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 사건에 준해서 그때그때마다 주체라는 것이 변신을 시도합니다. 그거하고 이 언어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관계있어요. 좀 기다려보세요. 관계있습니다.

자, 또 하나 예를 들면, 시편 1편을 봅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라는 문장 나오지요. 현재 우리와 같이 서한건설 퍼런 옷 입은 사람한테 이 이야기하면, 왜 우리하고 이거하고 무슨 관계있느냐고 튕겨버립니다.

지금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제일 지금 뭔가 주체가 습관화되어서 보지만 한번 따져보세요. “복 있는 사람은” 이 말을 왜 꼭 알아야 됩니까? 이거 몰라도 되잖아요.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있습니까? 이걸 왜 알아야 돼요. 몰라도 된다 이 말이에요.

지난 주일날 그런 설교했는데 형법 260조, 폭행죄. 타인을 폭행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만 원이하의 벌금, 구류, 과료에 처한다. 이래 돼있어요. 그런데 폭행을 안 해본 사람한테는 그건 관계가 없는 거예요. 언제 그것이 다급하게 다가오느냐? 폭행했을 때. 그때 얼른 찾아보고 알아봅니다. 얼마 나오겠노? 이래 되죠. 폭행 안 한 사람한테 상관없는 거 아닙니까?

자기 주체에 나란 주체에 이 시편 1편이 왜 꼭 들어와야 됩니까? 들어올 이유가 없다니까. 서한건설 직원한테 이 말씀하면 안 듣습니다. 화장실 담배나 피우지 안 본다니까. 아까 1층에 담배 피워서 한 소리했는데.
복 있는 사람을 이걸 왜 봐야 되느냐? 그래서 전에는 이거는 신자니까 본다. 이거는 습관화 된 소위 교회 다니는 습관화 되지만 맞벌이 부부 돈 벌러 가고 교회 빠져나가면 나중에 성경 안 봐요. 복 있는 사람, 악인 해도 그 사람 잡니다. 교회 와서 자버리고 있어요. 내 주체와 관계없어요.  

그렇다면 이거 한번 봅시다. 수능시험 물리Ⅱ에 나온 11번 문제. 열역학 문제거든요. T1에서 T2로 올라가는데 이게 정적과정이고, 여기 이렇게 내려가는 것은 이 밑에는 A, B, C. 이건 단열과정이고, 이거는 등온과정이다. 여기서 A에서 B에서 C로 왔기 때문에 안에서는 내부에너지 변화는 없다. 이럴 때 다음 중 맞는 것은? 문제 나왔다 말이죠.

서한건설이고 뭐고 간에 이거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게 현실이기 때문에. 적어도 대학에서 물리를 한다든지, 회사에서 토목이라든지, 안 그러면 보일러나 어떤데도 이게 에너지 효율에 관한 이야기란 말이죠. 에너지 내부에 열이 왔을 때 그 내부가 어떻게 일을 할 수 있느냐? W1 뭐 나옵니다. 어떻게 일을 하느냐? 일을 할 때 기체 원자가 일하는 것은 U=3/2RNT란 해석이 나와요. 이게 기체의 83주울, 몰 나오는데 이걸 해야만 보일러를 고칠 수 있다니까.

지금 이게 밥 짓는 할머니한텐 관계없어요. 관계는 없지만 밥 짓는 아줌마 점심 지으려면 이거해야 돼요. 이거 한다고 누구 아무도 욕 안 합니다. 왜냐하면 현실 에너지 세계 아닙니까? 물리가 에너지 세계라 했다 이 말이죠. 에너지 세계라 했기 때문에 여기에 어떤 열량을 가할 때 일은 어떤 식으로 바뀌는가 그 문제를 묻고 있는 거예요. 하나의 보일-샤를 법칙이라 해서 나옵니다.

이게 현실이라. 현실로써 이게 문제가 좋아서 푸는 게 아닙니다. 이거 하나 풀어야 대학에 좋은데 합격해요. 풀려면 에너지 관계를 알아야 돼요. 에너지라 하는 것은 현실의 에너지 분야가 현실적으로 모였다는 것을 전부다 수긍을 하고 인정을 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이걸 합니까? 왜 안 합니까? 이게 현실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어떤 대통령이 된 사람이 와서 모든 고3들은 성경 시편을 공부해야 된다. 나오면 그때 그 사람들은 복 있는 사람, 이거 외운다고 바쁠 거고, 여기 놀고 있는 전도사, 목사들은 그때는 돈 벌이 나갑니다. 왜? 성경 과외 나가니까. 성경이 논술에 들어가니까. 하게 되는 거예요.

하지만 그럴 경우는 없지만 만약에 그럴 경우가 있다면 그 학생들은 그걸 하면서도 이거는 수능 자체가 현실이지 수능에 나온다는 그게 현실이지, 진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악인들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라는 것은 이건 아마 현실은 아니야. 다만 성경이란 구닥다리에 옛날 사람들이 읽던 교훈집에 나왔던 내용이죠. 현실은 아니다 말이죠. 뭐가 현실이냐? 이거 한 문제 맞추면 점수가 올라간다. 이게 현실이지, 성경대로 현실은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이건 뭐냐? 또다시 불가능이죠.

인간의 힘으로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곤란해요. 왜냐하면 우리 현실은 이 물리Ⅱ 11번 문제 이게 현실에 가깝지, 이거 하나 가르치려고 애 공부하면서 파출부해가면서 이거 가르치려고 과외비 대지, 언제 성경공부하려고 고3 애보고 야, 니 교회 가야지. 그런 이야기가 어데 겁 없는 엄마가 교회 가라고 고3 애보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현실을 모독해도 분수가 있지. 고3 애 교회 가서 대학 떨어지면 그 책임추궁을 우에 당하려고. 참 곤란하지요.

현실이 아닌 것을 멀리하고 현실인 것만 수용하겠다. 라는 생각이 어디서 뿜어 나온 겁니까? 나의 주체에서 뿜어 나오게 돼있습니다. 그 이유를 대라고 하면 창세기 3장 23절. 왜? 이미 우리는 천국에서 쫓겨나야 될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에요. 우리는 인생은 천국에서 쫓겨나야 될 이유를 가진 사람이래요. 천국에서 쫓겨날 이유만 있는 게 아니고, 두 번 다시 자력으로 갈 수도 없는 이유도 우리 속에 같이 담아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힘으로 우리가 천국을 갑니까? 안 되지요. 안 되는 거예요.

아이고, 목사님, 저는 딴 소린 몰라도 우리는 시편 1편을 현실로 믿습니다. 라고 했을 때 그 시편 1편을 ‘믿습니다’하는 그 현실은 어디서 나온 현실이냐? 나의 주체 안에서 나온 나를 위한 현실, 내가 생각한 내가 업그레이드로 날마다 변신하는 내 주체에서 나온 현실이에요. 그게 실제 현실이 아니고, 내 주체에서 나온 현실이라고요.

이 점이 잘 이해가 안 될 건데 그림을 하나 그리겠습니다. 오징어 같은 그림이 하나 나오는데 설명해드릴게요. ‘S’인데 이걸 주체라 했습니다. 영어 쓰면 유식하게 보이니까 삼가야 되는데. 주제라 하는 것은 변동이 돼요. 변동이 되니까 이걸 잘라버립니다. 이건 분열된 주체라 잘라버립니다. 주체가 누굴 만나느냐 하면, 오브제 아(A)라고 하는데, 이건 그냥 이거는 맹목적인 목적, 이유  없는 목적을 갖고 있어요.

어떤 타인, 타자. 타인이라 하면 사람만 하는데, 어떤 외부사건. 외부사건을 만나면서 그래서 뭘 하느냐? 저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은, 저 사람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나의 없는 것을 갖고 있어요. 나의 없는 것을 갖고 있으니까 나의 없는 것이 새롭게 발견되는 그 순간부터 나의 노림수가 되고, 나의 먹이감이 돼요. 나의 사랑함이 된다고. 내게 없다는 단지 이유 때문에 밤잠을 못 이루죠.

가난한 집에 살 때는 그럭저럭 살다가 강남에 이사하고 난 뒤에 그때부터 살게 갑자기 많고 바꿀 게 많아요. 그냥 아파트 살면 그냥 아파트 살면 되는데 좋은 아파트 바닥 다 뜯어내고 이태리 수입한 것 깔 때 같이 깔아야 돼요. 그걸 안 깔면 잠을 못 자지요. 뭔가 못났으니까. 내게 없는 것을 내게 없다는 이유 때문에 잠자고 있는 욕망을 야기 시켜버렸어요.

그렇게 해서 타인이 갖고 있는 이것과 자기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일치시키려고 합니다. 동일시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 동일시하려 애를 쓸 때 지금의 나와 그 사람처럼 될 때 나를 합쳐서 지금의 나라고 보는 겁니다. 예를 들면 지금 서른 평 사는데 오십 평짜리 집을 봤다. 너무 좋다. 우리 강 집사님 말씀하는데 대구에 오십 평짜리 아파트 있답니다. 근데 집사님이 친구 집인지 올라가봤던 모양이죠. 그렇게 좋답니다. 오십 평에서 내려다보니 앞산 빼놓곤 밑에 다 있으니까.

그렇게 좋을 때 야, 좋은 것을 알게 된 그런 자아와 나를 일치시키면서 현실은 그렇게 못되잖아요. 못된 나와 그렇게 되고자 하는 나까지 합쳐서 현재 지금의 나와 일치시키는 거죠. 그리고 일치시킬 때 그 순간 그 사람은 본인에게 뭐가 되느냐? 그게 바로 현실이 되는 겁니다.
현실이 되는데 문제는 이 타인의 현실이 될 때 그러면 나가 두 사람이죠. 나가 여기 있고, 현재 못된 나, 되고 싶은 나가 있습니다. 나2죠. 나2고, 나1 둘이 합쳐서 나 상실인데. 이쪽에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너 왜 그것을 원하는데? 이러고 온다고. 너, 왜 그것을 원해? 왜 너는 그것을 원하느냐 할 때 답변, 답이 없어요. 답이 없다는 문제 아닙니까?

너, 그 오십 평 아파트 왜 원하는데? 답이 없어요. 답이 없으니까 무슨 답이 나오느냐 하면, 기쁘니까. 그러면 제가 묻죠? 왜 너는 기뻐야 되는데? 라고 물을 때 여기에 어떤 소크라테스고 뭐고 맹자고 여기에 답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너는 왜 기뻐야 되는데? 그럴 때 정답이 뭐냐? 그때는 나를 이야기하면 안 돼요. 나라면 나보고 지적하니까 나를 없애고 이렇게 해야 돼요. 기쁨이 나로 하여금 그것을 좋아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욕망이 나를 좋아하게 만들었다 해야 돼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그러면 네가 주인이 아니고, 네 속의 욕망이 너를 만들어가네. 이래 되거든요. 그렇다. 하는 거예요. 그럼 욕망은 어디 있는데? 하면 그건 정답이 있어요. 뭐냐? 욕망이 어디 있는진 모르겠는데 새로운 사건이나 누굴 만날 때마다 가만있는 욕망이 근질근질해서 또 활동을 개시해요.

자기는 기도 한 시간 동안 할 수 있는데 옆에 갑자기 두 시간짜리 집사가 와버리면 그 다음부터 교회 분위기 두 시간 안 하면 기도 안 한 게 돼요. 그러면 왠지 모르게 나는 뭐냐? 기쁨을 그 사람한테 빼앗기고 나는 뭐가 되냐? 슬픔이 되죠. 그러면 나는 원래부터 기뻐야 되는데 슬픔이니까 중간에 뭡니까? 결핍이 생기죠. 그 결핍을 기어이 따라 잡아야 돼요. 나는 기도는 못하지만 헌금은 제법 하는데. 이래서 자꾸 말 핑계 대잖아요.

그 말 핑계가 뭐냐? 이게 바로 언어라는 거예요. 이게 우리 입에서 나오는 겁니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건 전부다 뭐냐? 결국 핑계. 핑계는 언제 대는가? 정답이 없을 때. 그리고 이 굴레에서 벗어날 사람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자, 그럼 이걸 그대로 적용해 보겠습니다. 당신은 왜 천국 가고자 합니까? 기쁘니까. 왜 천국 가는 게 기쁩니까? 몰라요. 그러면 천국 보여주면 기뻐하겠습니까? 그건 아니죠. 왜냐하면 보여주는 천국은 그걸로 소멸되고, 그것보다 더 나은 천국을 또 기대하게 돼있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이 어디까지 터져있는지 본인은 모르니까. 본인이 욕망을 관리할 수 있으면 그것까지. 그 정도 해라. 되겠는데

욕망이 인간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내가 어디까지 마수가 뻗을지 본인은 몰라요. 본인은 바다에 뜨는 돛단배라서 바다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돛단배 입장에서는 바다의 깊이를 알 수가 없지요. 그냥 바람이 흔드는 대로 돛단배가 움직이다가 육십 평생 살다가 화장터 가서 죽을 수밖에 없지요. 그렇다면 일엽편주 떠도는 거지요. 일엽편주 생각하니 편승엽의 ‘차차차’ 생각나네.

일엽편주처럼 떠도는 거예요. 당신은 왜 예수를 믿고 싶은데? 즐거우니까. 거 봐. 당신의 예수 가짜잖아. 이유 없이 즐거우니까 믿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 이유를 모른 채 예수를 믿으니까 그 예수는 백발백중 가짜에요. 왜냐? 나를 슬프게 하는 예수 같으면 애초부터 젖혀놨거든요. 나를 슬프게 하는 예수는 다 젖혀놓고 나를 기쁘게 하는 예수를 골라잡은 거예요. 언제? 2008년도에. 2009년도 어떻게 갈지 몰라요. 2008년도 좋았던 예수가 2009년도에 바뀝니다. 또 다른 예수로 변신돼요. 

이 설명을 후기 라캉의, 라캉도 후기해서 실제론, 상상론 있는데 그 용어를 다 빼고 알짜배기만 설명한 거예요. 사람들이 이걸 가지고 ‘환상’이라 하는데, 라캉의 의하면 환상이라 하는데. 사람들은 환상을 깨면 몸 둘 바를 모릅니다. 왜냐하면 환상이 있어서 그나마도 내가 환상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나다’라고 내세울 수가 있어요.

물론 여기서 말이 어렵기 때문에 설명을 안했는데 ‘환상=현실’입니다. 현실이 곧 환상이죠. 모든 현실은 환상으로 조직 돼있어요. 환상이 아닌 현실은 없습니다. 왜? 바뀌니까. 그리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그게 바뀌고, 또 새로운 사건이 터지면 그것도 바뀌고 다 바뀌고. 그리고 사람이 사는 것이 기껏해야 팔십 년 이기 때문에 그리고 알아봤자 전 세계를 다 알고 있는 게 아니거든요.  

제가 주일날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내과에 보면 협심증을 약물 치료할 때는 베타제를 차단제로 쓰고, 그 다음에 그게 잘 안 들을 때는 장기적으론 칼슘길항제를 사용해서 증세를 살핀다고 내과에 나와 있습니다. 협심증을 치료할 때는. 우리하고 무슨 상관있습니까? 아무 상관없잖아요.

그러니까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관련된 분야만 해서 이게 인생의 전부니, 세상의 전부니, 진리가 이거니 하지만 지금 협심증도 모르고, 형법 260조도 모르면서 그걸 상관없고, 지가 현재 자기 욕망이 요청하는 것, 내가 만났던 사건을 결핍을 야기 시킨 그 결핍을 메우는데 전력투구할 때 필요한 것들만 뽑아서 지금의 내 주체, 나는 이렇습니다. 라고 내세우는 것 밖에 안 돼요. 이게.

옆에 교회 크게 지면 크게 짓고 싶고. 늘푸른교회 교회 새로 했는데 앞으로 보세요. 세 들지 말고 단독 짓고 싶을 거예요. 안 그래요? 지금은 안 그렇지만. 지금은 상가에 있죠? 지하에 있어요. 그거 말고 새로? 상가 말고 새로 문화센터까지.

그렇게 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말로 할 때 하나님이 하신 일, 그게 언어죠. 하나님이 하신 일, 그게 언어 아닙니까? 요번에 일이 된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언어 아닙니까? 그런데 언어는 뭐라 했습니까? 모든 게 지금 나를 변호하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나를 위한 하나님이죠. 쉽게 말하면. 예수가 됐든, 성령이 됐든.

바로 이러한 입장에서 우리는 시편을 봐도 성경을 봐도 거기에서 전부다 다가서는 겁니다. 그걸 피할 방법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있으면 우리 힘으로 천당 가죠. 없습니다. 전부다 그것뿐이에요.

그렇게 되니까 나라는 것은 나는 없고, 나의 속에 있는 알 수 없는 욕망이 나를 만들고, 그 욕망을 가지고 나라는 것을 정착하는 그 순간, 이러한 나의 언어체계가 그걸 정당화시키죠. 나는 ~이다. 나는 이런 말을 했다. 그 말한 그것으로 나는 이런 고백을 했기 때문에 나는 신자 맞다. 라고 나를 겨냥해서 일시적으로 스톱, 지금 나다. 하는 그것까지. 이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이걸 ‘상상계’라 합니다. 상상계라 하는 것은 어린아이나 원숭이가 거울보고 깜짝 놀라는 거예요. 야, 나 저기 있네. 하고 일치시키는 그걸 상상계라 한단 말이죠.

그런데 나중에 새로운 게 되려면, 상상계가 깨어지면서 또 다른 새로운 세계가 왔을 때 분열이 일어나죠. 빨리 나를 찾아야 될 텐데 도대체 헷갈린다, 헷갈려. 나는 조금 전까지 믿는다고 했는데 이런 일이 터지다니 믿는 사람 맞아, 아니야? 나도 모르겠어. 라고 헷갈리게 되는 겁니다. 나도 모르겠다 했는데 어디서 기도하다 들리기를 근호야, 니는 주의 종이다. 주여, 감사합니다. 주의 종 맞군요. 라고 일시적으로 그걸로 자리를 잡지요. 전부다 이건 자기 변호, 자기 핑계, 자기 의입니다.

그러니까 신학을 한다든지, 뭘 철학을 공부를 해도, 신학을 하든지, 교회사 하고 뭘 해도 현재 자기 굳히기 하죠. 자아 굳히기를 이거는 남한테 보여주고자 하는 게 아니라 본인 자체가 그런 일마저 찾아갈 수밖에 없어요. 달리 방법이 없어요. 무슨 사업을 하든, 그냥 집에 놀든지, 잠을 자든.

그래서 이런 것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바로 잠자면서 발견했죠. 꿈속에서. 꿈에 내가 생각하지 않은 게 나오더란 말이죠. 나중에 보니까 그게 세상에 있는 것이 뭉쳐져서 응축되고 치환되어서 그렇게 되었다. 라고 프로이드가 무의식 쪽에서 봤는데. 이런 무의식으로 말미암아 이게 전부다 변하는 나를 그냥 그때그때마다 핑계 삼아 자기를 다시 사로잡고 또 사로잡고 잡아서 결국은 나는 ~이다. 이거 평생을 하다가 다 보내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하이데거란 사람은 아주 구박을 하고 비난을 했어요. 왜냐? 이거는 사기다 이 말이죠. 왜냐? 내가 생각하는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이걸 기독교 표현으로 할까요? 내가 믿는다는 것을 믿을 만한 나는 없다는 겁니다.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라고 누가 이야기할 건데. 내가 이야기하더라. 그렇게 이야기하는 니는 믿는 거 맞나? 몰라. 몰라요.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하는 그것을 내가 다짐을 하는데 내가 다짐을 한 다짐은 누가 보증해주느냐 말이죠. 그걸. 없지요. 그래서 하이데거는 사기라 했어요.

그러면 뭐냐? 이 전체를 내가 예수를 믿는다. 그걸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하지 말고 이걸 사건으로 봐라. 나는 믿게 된 사건을 당했다고 생각하라 말이죠. 그렇게 사건을 당해 버리면 그런 사건을 일으킨 주체자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 주체자가 있을 때 나는 나에게 믿음을 주신 그분을 나는 그분이 만약에 예수님이라면, 나는 예수님이 주신 믿음을 선물로받았다고 에베소서 2장 8절에 나오지요.

예수님이 선물로 나에게 믿게 했다. 내가 믿게 하신 것은 예수님이다. 라고 했을 때 뭐가 문제가 돼요? 나를 믿게 한 것은 예수님인 것을 나는 믿습니다. 할 때 그 믿음은 누가 보증해주냐 말이죠. 그게 사긴지 어떻게 아느냐? 결국은 뭐냐? 나를 믿게 한 것은 예수님입니다. 라는 것을 알게 된 그것이 바로 납니다. 라고 또다시 자기를 확증시키고 싶어서 그런 핑계를 대는 게 아니냐 이 말이죠. 핑계 대는 게 맞잖아 이 말이죠. 따질 때까지 따져보자.

그러니 하이데거가 해결점이 없어요. 해결할 수가 없어요. 아이고, 시간 다 됐다. 해결 10분 쉬고 합시다.    

김성환  08-01-13 21:03  

"예수님이 선물로 나에게 믿게 했다. 내가 믿게 하신 것은 예수님이다. 라고 했을 때 뭐가 문제가 돼요? 나를 믿게 한 것은 예수님인 것을 나는 믿습니다." 동감합니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24:8) 이단자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뿌린 언약의 피 사건으로 말미암아 무상의 선물(은혜)을 거저 받은 것. 이 사건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게 만들었던 사건임을...

이근호  08-01-14 13:43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과, 예수를 믿는 나를 증거하는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 차이 만큼의 차이가 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려면 예수를 믿는 그 '나'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요소가 그 가운데서 함께 들어가서 증거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언약의 본질과 위배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이단성이 바로 다음과 같은 발상입니다. "이미 나는 십자가를 믿어 구원이 된 상태이다. 따라서 이제 나의 삶은 부활의 능력을 실천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신자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