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시편-2008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5강-관계론적 실체관-공통통념-주께서 피흘리셨다,나는 불포함

아빠와 함께 2014. 1. 6. 16:34

(2008년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제 5강

시편 3편을 볼 것인데 먼저 시편 15편을 보고 다시 시편 3편을 보겠습니다.

시편 15:1-5

“여호와의 주의 장막에 유할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찌라도 변치 아니하며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불안하십니까? 대단히 불안하십니까? 가슴팍에 합격증을 가지고도 불안하십니까? 여호와의 장막에 거하지 못할까봐서 불안한 겁니까? 시편 3편을 하기 전에 시편 15편을 보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첫째시간 끝부분에서 이야기한 것을 다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개체가 있고 ‘신’이라는 개체가 있으면, 그런 관계의 신은 당장 내가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나의 욕망이 자아낸, 내가 확장된 신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미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입장에서는 이런 것 자체가 허용이 안 됩니다. 추방되기 전 같으면 몰라도 이미 추방되었다는 것 자체가, 우리는 추방될 수밖에 없는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영원할 이유가 없는데 그 이유를 백날 확대해서 신의 범주까지 나를 확대해서 넓힌다고 할지라도 그 자체가 바로 추방될 이유, 또는 소질을 그냥 드러내는 것 밖에는 안 됩니다. 이것은 종교성입니다.

그런데 이런 종교성의 인간은,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장막에 유할 수 없다”고 하니까, 이런 인간은 끝장난 겁니다. 신의 존재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천국에 넣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장막에 거할 자는, 신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이런 식으로 죽 나와야 됩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서는 성립이 안 되지요. 이렇게 살수 있다면 애초부터 쫒겨나지도 않았겠지요. 쫒겨난 자를 향하여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여탕을 기웃거리는 사람에게 우선 수건을 가져와야 하며, 비누와 샴푸를 따로 챙겨야 하며, 빗을 가져오되 여자이어야 합니다, 하면 앞에 있는 조건을 다 챙겼어도 마지막에 여자이어야 합니다, 여기에 다 걸려 버립니다.

아무리 준비하고 준비해도 여자이어야 한다, 여기에 걸려서 아무도 여탕에 못 들어가죠. 여자이어야 한다, 이 말은 남자는 가라, 그 말 아닙니까? “여호와의 장막에 유할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자 누구오니이까” 할 때 이것은 개체로서는 여호와의 장막에 유할 수가 없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과 더불어, 함께 있을 때 여호와의 장막에 함께 유할 수가 있습니다.

영구한 실체는 보장받지 못하지만 우리 나름대로의 동일성은 갖추어 있어야 됩니다. 개체가 없다면 연기처럼 ‘나’라는 것이 아예 없게 되면 그것은 아예 비현실이고 실제가 아니게 되니까. 실제로 뭔가가 있잖아요. 내가 생각하는 그것을 옆 사람이 생각을 못하잖아요. 분명히 개체라고 주장할 수는 있는 주님 주신 자기 나름대로의 동일성이 있어야 됩니다.

어떻게 해서 이것이 가능하냐를 설명하기 위해서 두 가지를 이야기 하겠습니다.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이론과 또 하나는 갈릴레이(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운동이론의 차이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이라는 것은 ‘잠재태’라고 해서 그 어떤 존재에 품어져 있는 속성인데 이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면 사물이 자극을 받게 되어서 움직이는데, 움직일 때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자기 능력, 역량이 발휘되어서 움직인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입니다.

내가 움직이는 것은 움직이려는 의지가 있었고, 힘이 있었기에 움직임이 있었다, 이것이 운동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런데 갈릴레이의 운동이론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운동이란 상대적이다, 라고 합니다. 운동이란 것은 딱 잡아서 운동이라는 그런 것은 없고, 내가 보기에는 운동했네, 내가 보기에는 운동 안했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아테네에서 배를 띄우는데, 노예들이 배를 저어서 갑니다. 아테네 항구에서 볼 때 항구는 정지되어 있고 배는 운동합니다. 그런데 배에 짐이 실려 있다면 짐칸에 있는 짐하고 배는 운동을 합니까, 안합니까? 운동을 안 하지요. 정지되어 있지요. 왜 정지되어 있는가? 시편 15편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니 잘 들어보세요. 같이 운동하기 때문에 그것들끼리는 정지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정지된 입장에서 볼 때는 배만 가는 것이 아니고 그 배안에 있는 짐칸의 짐도 운동하고 있는 거예요. 여호와께서 활동하실 때 우리가 개체를 주장하면, 여호와께서 활동하세요, 나는 이 근호목사님에게 강의 잘 들었습니다, 주께서 다 하시는 구나, 나는 이제 퍼져서 놀겠다, 이렇게 됩니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에 입각해서 저쪽에서 운동하고 나는 노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하나의 관계로서 몸과 지체에 들어가면 저분이 운동하면 우리가 운동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 몸과 한 지체이기 때문에 여호와가 원하는 것을 우리가 안하고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우리는 배안의 짐칸에 있는 짐이기 때문입니다. 저분께서 운동을 일으켰기에 운동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운동을 거부하겠다! 거부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분위기 자체가 그 분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관계론적인 실체관이라고 합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더 알기 쉽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가 텅텅 비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비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여기 계시고 우리가 여기 있다면 그 사이에 단단하고 휘어질 수 없는 고정된 막대기가 있다고 봅시다. 주님께서는 “얘야! 좀 착해라. 시편 15편을 못봤냐?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아라”라고 호소하는 것이 아니고, 막대기를 흔들어 버립니다. 막대기를 흔들어 버리니까, 우리가 가는 곳이 이미 공의를 일삼는 곳에 가 있습니다.

“행악지 아니하고 정직하게 행하고 공의를 일삼”는 힘의 막대기로 내가 가는 곳에서 “행악지 아니하”는 현상이 일어나 버리는 겁니다. 다른 사람 보기에는 “이 근호 목사님은 참 착하다”고 하는데 착한 것이 아니고 막대기가 꽂혀서 가는 겁니다. 여호와께서는 막대기처럼 우리를 휘두를 때 우리는 같은 운동(영역, 필드)속에 함께 놓여져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신약성경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명령은 일시에 해결되어 버립니다. 개체를 자꾸 생각하니까, ‘주여!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했는데 한 5분만 분을 품으면 안되겠습니까’라고 하는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주님은 운동하라고 했지만 나는 끄덕도 없습니다.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맨 날 이러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7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이것을 개체쪽으로 생각해서 내가 지키려면, 3초내지 10초도 유지가 안되고 진전이 되지 않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어렵지만 이야기해 봅시다. 주체가 있으면 언어가 나옵니다. 언어는 상상계 - 상징계에서 법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상상계란 어떤 대상(이미지)과 자기를 일체시키는 것(동일시)이고,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일체시키던 것이 그만 시들해 집니다.

“아니네. 저 사람이 전부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네.” 50만원짜리 옷을 입고서 좋다고 했는데, 200만원짜리 옷을 보고 나면, 이것은 옷도 아니네, 실망했다, 자기의 과거의 행적에 대해서 업그레이드를 하면서 그 과거에 대해서는 이제 식상(권태, 예를 들어 중년의 위기같은)하다고 합니다. 최 재천 생물학교수(이화여대)가 한 이야기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이모작 이론입니다. 인간의 평균수명이 길어졌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이모작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남자나 여자나 한번 결혼(일모작)하고, 나중에 한번 더 결혼(이모작)해서 제 2의 인생을 사는 것이 시대에 맞다는 겁니다.

상상계는 ‘나는 저것과 일치되면 그것을 만족하다’ 했는데, 예를 들어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할줄로 알라”고 할 때, 그것을 법(상징계)으로 정해서 그 정한 상징계가 다시 상상계가 되거든요, ‘나는 이만하면 되었다’ 하고 딱 잡을 때, ‘나는 이렇게 살거야’라고 딱 잡을 때, 그 범위 내에서 마음껏 자기존재의 자유가 발휘되어 풀어져 나옵니다.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라는 그것이 허락되었기 때문에, 전에는 찌게 하나면 족하다고 했지만 이제는 매일같이 맛있는 팔보채, 탕수육등 맛있는 것 다 동원해서 먹으면서 “주여! 내가 법 지켰잖아요”라고 나옵니다. 라면같이 시시한 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이제는 “먹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에 허용된 범위 내에서는 마음껏 먹는 것을 누리려고 하는 겁니다. “입는 것”, 오백만원짜리 사입죠, 뭐. 그래도 성경말씀을 위배한 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성경을 볼 때에 이것을 법적으로 자기주체로 자꾸 심어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는 식으로 말씀을 주장하는 겁니다. 이런 주체가 생겨버리면 어떤 성경말씀도 하나님의 본래 뜻은 관계없이 사도바울의 명령들과 모든 말씀들을 시시때대로 지킨다고 하면서 기어이 자기의, ‘나’만이 즐기는 ‘나’만의 영광성은 하나도 포기안하고 그대로 은밀하게 간직하려고 합니다.

그래 놓고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다 했다고 합니다. 그래 놓고는 자기만의 세계를 또 간직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럴 때 시편 15편이 동원됩니다. “네가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였느냐”라고 들쑤십니다. 들쑤시면 ‘이만하면 되었다’라고 여긴 그것이 깨지잖아요. 깨어질 때 “내가 벗에게 행악했습니다”라는 그 순간, 그것이 바로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는 유일한 순간이 되는 겁니다.

‘내가 당신에게 참 잘못한 것이 많습니다’라는 그 순간, 그보다 더 이웃을 사랑하는 순간이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이 밥 퍼 주고 뭘 퍼주는 것이 아니라, ‘나는 당신에게 나의 자유로 말미암아 당신의 자유를 훼방했던 죄인입니다’라고 다가설 때 그것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최고의 사랑은 회개입니다. 자기 죄를 아는 것이 최고의 사랑입니다.

하이카, 광고할 때 보세요. 두 여자가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다가도, “내가 잘못 했습니다” 하잖아요. “아닙니다. 제가 잘못해서 떠났습니다.” CF가 상당히 도움될 때가 많아요. 임금님이 소녀들을 불러놓고 소고기맛을 보여주면서 하는 CF가 있습니다.

“맛이 어떠냐? 한우 맞지!”
“한우가 맞습니다.(여럿이 이구동성으로)”
“(되바라진 소녀가 나서면서) 내 입에서는 한우 맛이 안 나는데 어떻게 맛이 난다고 …(말꼬리를 흐린다)”
“(임금이 칭찬을 하면서) 그렇다!”
“(되바라진 이 소녀 한마디 더 하는데) 한우와 한우가 아닌 것은 하늘과 땅차이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되, 씹어보고 예수성도 아닌 것은 뱉어 버립니다. 예수 맛이 안 나는 것은 성도가 아닙니다. 성도와 성도 아닌 것은 하늘과 땅차이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주님께서 제공했다고 할 때 이 막대기는 변하지 않고 같이 움직입니다. 말씀의 능력대로 시편 15편대로, 우리는 거기 같은 운동영역 속에 있기 때문에 같이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그럴 때 우리는 시편 15편을 보면서,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자 누구오며”할 때 ‘여호와의 장막에 유할자는 주님밖에 없습니다’라는 것을 고백할 때 주님과 같은 운동영역속에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의입니다. 주님의 공로입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은 주님의 공로지 내가 말씀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주님의 공로를 높이는 겁니다.

‘당신이나 나나 똑같은 죄인이야’ 라고 했을 때, 그것이 바로 이웃에게 다가갈 수 있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전도한다고 할 것이 아니라, ‘나는 예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다가가야 되지요. ‘당신은 우리에게 한수 배워야 한다’는 그것은 선교도 아니고 전도도 아닙니다. ‘죄인이기에 이 멀리까지 왔습니다’라는 이런 자세로 해야 합니다.

사진 찍고, 그러지 말고 그들과 함께, 다시 자기의 죄인 됨이 드러나서 낙원에서 추방된 이 죄인도 주님의 공로로만 다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예수님의 공로만 증거하면서 해야 됩니다. 그 일을 하는데 왜 멀리 나갑니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아요. 지금 한국 땅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가 있는데 왜 바다건너 멀리 가야 합니까?

지금 이런 소리 하는 저도 내일 미국 간다고 할지 모르죠. 막대기가 가게 하면 가는 것인데 꼭 자기가 가고 싶으면 막대기 핑계를 댑니다. 솔직하게 가고 싶다고 하지 막대기가 이렇게 했다고 하죠. 이제 그 문제가 나옵니다. 그 문제를 좀 설명 드리고 시편 3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주님의 막대기에 의해서, 또는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같은 운동영역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 죄인으로 드러나고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의인으로 드러난다는 말이죠. 이렇게 될 경우에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러면 성도가 하는 일은 모두 진리냐, 다 옳은 것이냐,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죄인입니다, 하는 말만 붙이면 무슨 짓을 해도 다 허용이 되고 그게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것이 되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실컷 나쁜 짓을 해놓고, ‘나, 죄인입니다’라고 하면 다 통과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시편 3편이 있습니다.

시편 3:1
“여호와의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시편을 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편을 직접 안보고, 시편 설교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들었기 때문에, 시편 설교를 듣고 나면 ‘아, 찬양해야 되겠구나. 성도라면 찬양하는 것이 하님의 영광이구나’라는 것이 각인되고 와 닿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1편, 2편, 3편, 4편, 5편이 다 전쟁 중에 있습니다.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적이 있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이 말은, 그렇게 욕하는 저희들은 하나님께 뭘 얻고 있다? ‘하나님께 도움을 받을만한 짓들을 하고 있는데 왜 너는 하나님께 도움 받을만한 짓을 안 하고 있느냐’ 이렇게 달려드는 거예요.

여러분은 하나님께 도움받을 짓을 어떻게 하고 있어요. 그 짓 하지 마세요. 하나님께 도움받을 짓을 한다는 그 자체가 시편 3편에 의하면 그것이 예수님의 주적입니다. 예수님의 적이 되고 성도들의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받는다는 그것은 바로 개체성, 개체성이라고 하면 동일성을 무시한다고 하는 오해가 있을 수 있기에, 다른 말로 주체성이라고 합시다, 하나님에게 추방된 입장에서 도로 천국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이럴 때는 ‘도움을 요청하는 ‘나’만은 버리지 마옵소서’ 라는 것이 여기에 성립되어 있습니다.

좀 어렵게 이야기 합시다. ‘내가 나를 이미 선택해 놓고 있다.’ 내가 나를 이미 선택했어요. 왜 ‘나’라는 이유 때문에. 여기서는 신도 후원해 줘야 하고 방해하면 안돼요. 따라서 내가 나를 천국까지 밀어부치는데, 여기서 내가 나를 천국까지 밀어부치는 방식은 내가 결정하고 거기에 대해서 힘주고 도움 주는 것은 누가 한다? 하나님 쪽에서 적극 후원하는 식으로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방법을 일체 쓰지 않으신 분이 딱 한분 계십니다.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살자고 한 짓인데, 주님은 죽으려고 한 짓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나는 살려고 온 것이 아니고 죽으려고 왔다. 누가 죽이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알아서 죽는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아들을 죽이시려 한 겁니다.

나를 없애는 식으로 가신 그 방향성과 나를 살리려고 한 그 차이나는 방향성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예수님 당시에 공존해 있었습니다. 어느 쪽이 진짜입니까? 진짜 정도가 아니고요, 구원받지 못할 자들이 뭐라고 비난을 하는가 하면, ‘예수여, 그런 식으로는 하나님이 안 도와준다’고 하는 겁니다.

신명기에 보면 “나무에 달린 자마다 무엇을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까? 저주 받지요. 그 점을 주님께서 놓치지 않습니다. “너는 저주받기 싫지? 내가 어떻게 저주를 통과하는지 한번 보여줄까?” 그들이 무서워하는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그 저주의 한복판으로 구멍 속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그런데 저주를 통과했더니만 부활의 세계가 나오고 축복의 세계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3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따라서 “내가 어찌하든지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 십자가에 이르려고 한다”고 합니다.

빌립보서 3:10,11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나는 죽으러 간다’는 말이죠. ‘나는 빨리 죽는 것이 소원이다.’ 그 길이 죽으러 가는 길입니다. 십자가라는 개구멍으로 들어갑니다. 그 길 외에는 다르게 하늘로 통하는 길이 없어요.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 했잖아요. 하늘과 땅의 유일한 접촉점이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 사건이죠. 다른 말로 하면 내가 피 흘린 것이 아니고, 누가 피 흘린다? 예수님의 피 흘린 그것이 유일한 하늘과 땅의 접촉 통로입니다. 벧엘, 하나님의 문입니다.

그런데 그 문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을 아는 그 계시, 십자가 계시 외에 다른 것은 계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실컷 계시 받고 천당도 못 갈것 같으면 그것은 계시 값을 못하죠. 진짜 참된 계시는 사람이 깨닫지 못하는 은밀한 것인데 그 은밀한 것은 항상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에게는 가리우고 어린애 같은 사람에게, 알려고 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그냥 알려주는 식으로 계시가 오는데, 그 계시는 뭐냐?

오직 택한자 에게만 알려주는, 막대기, 아까 이야기했는데 다시 그립니다. 예수님에게서 막대기가 나왔습니다. 거기서 같은 운동영역 속에 있는데, 이 막대기라는 이것은, 다른 계시는 소용없어요, 이 막대기는 무슨 계시? 십자가 피계시가 꽂혀야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가는데, 우리가 간다는 말은 어폐가 있고 십자가 피는 감아 당기는 힘이 있기에 그 감아 당기는 능력에 의해서 어찌되었든지 십자가로 가도록 되어 있어요.

십자가로 가는데, 십자가로 끌려간다는 말도 맞고, 다른 말로 하면 사도바울처럼 ‘나는 어찌하든지 십자가로 가고 싶다’는 고백으로 나오게 하는 방식으로 십자가로 가고 있어요. 그걸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사도바울은 아직도 구원을 못 받았구먼? 십자가를 계속 믿어야 구원받는다는데 만약에 잘 믿다가 삼년 째 안 믿으면 지옥 가겠네.’ 이렇게 놀린다고요.

우리가 일을 할 때는 ‘내가 나를 어떻게 위대하게 만드느냐, 나를 구원시킬 수 있느냐’하고 내 영역을 넓혀 가는 식으로, 이런 현상만 눈에 띄는데, 예수님께서 등장하시면 갑자기 없던 적들이 발생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가는 곳에는 친구들만 오는데 예수님 가신 곳에는 적들만 몰려온다는 말입니다. 자꾸 없었던 적들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역이 우리에게 닥치게 되면, 우리가 예상 못한 적들도 여기저기서 생기는데, 이로써 우리가 예상 못한 영역 속에 함몰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 개인적인 적이 있잖아요. 이런 것들은 예수님의 새로운 영역 앞에서 빛을 잃어버리고 다 의미 없는 거예요. 주님의 적이 이제는 우리의 적이 되는 그러한 장에 우리가 들어오게 됩니다.

“목사님! 왜 그리 어렵게 설명합니까?” 이렇게 설명하지 않으면 시편 4:1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라고 목사님이 설교하면, 교인들이 “그런 식으로 설교하지 마시고, 우리는 적을 알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고 참석했으니 축복해 주셔서 이번 한주간도 사업 잘되게 해주는 그것만 원하지 쓸데없는 소리는 관심 밖이니 그런 소리는 하지 말라”고 배척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럴 수가 있습니다.

내가 생각한 나의 절대세계를 포기하지 않은 채, 그걸 물고 들어왔기 때문에 끝까지 그걸 주장하면서 교회 문 열고 들어와도, 다시 나만의 세계요 나만의 사업체이고, 나갈 때도 주님의 세계는 오지 말라는 식으로, 복이나 받아서 나만의 세계에 관심을 두겠다는 고집이 대단하기 때문에 성경말씀과 점점 더 멀어져 가는 거예요.

그저 내 일에 도움 되는 것,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런 것이든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면 하는 일이 범사에 형통하리라”는 이런 구절만 동원하는데 이런 것이 다 거짓말입니다. 주님과의 공통영역이 없고 나만의 절대성을 포기하지 않은 채 계속 밀어부치기 때문에 무슨 말씀을 해도 전부 다, 자신에게 필요 없는 말씀, 필요한 말씀을 다 취사선택해서 자기 맘대로 뽑으니까, 성경 읽고 자기 세계 망가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니까, 결국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에 불과한데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교회 실컷 다니고 지옥 가는 무슨 그런 무서운 결과가 다 있습니까? 목사 되어서 지옥가고.

공통영역이 없어요. 선과 악은 내가 알아서 선과 악이 아니라, 내가 예상치도 못한 선과 악이 새롭게 나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새롭게 느껴야 됩니다. ‘야, 나는 좋게 지내고 싶은데 저 사람이 저렇게 나오네. 이것은 내가 의도한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나를 비난하지?’ 말하기를 ‘십자가 피로 교회 되는것 아니더라. 나도 십자가 피로 되는지 알았는데 십자가 피가 전부가 아니고, 행해야 구원된다는 그것을 추가시키고 싶다’는 거예요.

‘십자기 피로 도움을 얻지 못한다’고 자꾸 비난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이 뭡니까? 예수님의 가는 길이 십자가의 길인데 그 길은 줄줄이 뭐가 따라 온다고 했습니까? 예수님 가는 길에 자꾸 무엇이 생긴다? 난데없이 적들이 자꾸 옵니다. 그리고 점점 더 그 대결이 심화됩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것은 악한 영들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마태, 마가, 누가복음, 가면 갈수록 예수님은 점점더 몰매 맞는 지경으로 나아가고 결국 몰매 맞는 식으로 죽잖아요.

쓸모없는 인간, 목적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 예수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는 방식은 사람에게 부담만 안겨줄 뿐이지 도움이 안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예수님이 어떻게 살았고 스데반 집사가 어떻게 죽었다’는 그런 말은 안하는 것이 일종의 분위기 파악을 잘하는 목회자의 태도입니다. 고객이 원하는 것을 상품으로 제공해야 교회가 되지요.

대구 밤고개에 가면 성당이 있는데 그 입구 간판에 한주일 내내 그 성당에서 벌이는 문화활동 항목들이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현재 세상에 원하는 온갖 것들 다 적어 놓았습니다. 꺽꽃이 강좌부터 노인학교등등, 한주간이 꽉차게 적혀 있습니다. 거기에 적이 없어요. 그냥 서비스 해주는 단체지 적이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가신 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남아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이 다 떨어져 나갔습니다. 우르르 몰릴 때는 “우리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예수님의 공동체이기에 새롭게 세상을 변화시킵시다”고 해놓았는데 주님께서 일부러 다 차냅니다. 오병이어 현장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우리의 임금님으로 삼자’고 하면서 좋아했는데, 다 떨어져 나가고 다시는 그와 다니는 사람들이 없다고 했잖아요.

자꾸 예수님은 혼자서 일을 하고, 혼자만 가는 길을 갈 뿐입니다. 우리가 가까이 있다고 해서 만진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가까이해도 너무나 먼 당신이라!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저주했습니다. 얼굴 맞대놓고 저주했습니다. “나는 당신을 모른단 말이야. 저주한단 말이야.” “꼬끼오!” 주님의 성실하심이 닭에게 임했습니다.

자꾸 주님을 나의 주체에 도움 되는 사람으로 포섭하려고 하는데, 그 포섭을 인위적으로 깨려고 하는 거예요. 저리가라는 식으로 밀어 냅니다. 주님은 우리를 안 믿습니다. 에덴에서 쫒겨난 인간을 왜 믿습니까? 오죽 못 믿으면 쫒아냈겠습니까? 쫒아내고 그 다음에 모든 것이 적임을 분명히 해서, 적임에도 불구하고, 추방됨에도 불구하고나님 자기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해서, 시온, 오직 택한 자만 시온성에 들어간다는 것이 시편의 내용입니다.

교재 20페이지에 보면, “시온은 만물의 중심터”라고 되어 있는데, 다윗을 선택하셔서, 다윗을 선택하신 그것을 하나의 언약적인 구원의 유일한 방식으로 간주하셔서 하나님이 “요셉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유다지파를 택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시온을 가지고 “나의 택한 도성”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미 다윗을 택할 때 다윗처럼 택한 사람이 줄줄이 따라 나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시온에 모이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한 똑같은 방식으로 선택당한 사람들만 시온에 들어옵니다. 그 택한 사람들의 특징이란, ‘주의 성실하심으로 구원되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그 선택은 이슬람교의 주권사상, 예정론, 선택론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나’라는 주체를 내가 구원받고 싶으니까, 와서 나를 구원하라고 들이대는 식입니다.

내가 나를 이미 선택해놓고, 내가 선택한 이 귀한 나를 주님도 구원해서 내가 나를 선택한 그 이상으로 대우해 달라는 거예요. 그것은 쫒겨난 주제에 그런 생각을 가지면 안 되지요. 물론 그런 생각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것이 바로 죄인것을 아는 사람만이 유일하게 진짜로 선택된 사람입니다. 내가 나를 선택해서 내 위주로 구원받고자 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버림받은 것으로서 이 땅에서 고생해야 될 이유로 아는 사람, 그것이 죄인줄 아는 사람.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예수를 안 믿잖아요.

아브라함 자손인데 미쳤다고 예수를 믿습니까? 이미 구원받고 이미 선택되었는데, 예수님이 왜 선택합니까? 아브라함을 선택할 때 이미 그 속에 우리는 포함되었다고 유대인들은 믿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논리대로 하면 그게 맞습니다. 아브라함의 혈통들은 할례를 행했으면 이미 거룩한 백성이라는 말이죠. 이미 선택되어 있는데 새삼스럽게 선택해준다고 나오니까 ‘저리가’라고 한 겁니다.

집에 냉장고가 있는데 냉장고를 들여놓으라고 해보세요. 안 들여 놓습니다. 이미 있는데요. 그래서 오늘날 교인들이 예수 이야기를 싫어하는 이유가, 내가 이미 구원되어 있는데 왜 예수님을 또 생각해야 되느냐는 겁니다. 한번 구원했으면 예수는 집에 가라는 거죠. 하나 하나 들추어내면 문제점이 엄청납니다.

갈릴레이의 그 운동권(운동영역), 같이 운동한다는 것,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예수를 자꾸 차버립니다. 전에 있던 내 고집 중심으로 자꾸 움직여 나갑니다. 그래놓고는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명령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다 지켜내서, 결국 내가 이미 훌륭하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믿음을 증거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온 것이 ‘나’에게 오지 않으면 구원 못 받는다는 겁니다. 이런 소리를 참 많이 들었습니다. ‘십자가 마을 아니면 구원을 못 받는가?’ 안티(적)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안티가 있습니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는, 예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자는, 쉽게 말해서 다윗인데, 다윗은 본의 아니게 적들이 우글거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적들로부터 버림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순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베드로전서 1장에 나옵니다. 자기 안에 장차 오실분의 운명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의 영이 들어 있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서 고난을 받아야 영광을 받습니다.

베드로전서 1:10,11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는지 상고하니라.”

그 코스, 그 절차를 다윗이 미리 앞당겨서 그 시대에, 장차오실 예수님을 대행해서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단지 하나님으로부터 간택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적들로부터 공격을 받습니다. 드라마에 ‘이산’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세자가 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노론 측으로부터(늙은 아줌마 나오죠) 얼마나 시달립니까? 왕의 아들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세자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닌데, 세자 되었다고 그렇게 욕을 하네요.

내가 구원받고 싶어서 구원된 것도 아닌데, ‘예수님께서 내 피로 구원되었다’는 그 소리를 했다고, 그렇게 욕을 해대는 거예요. 욕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네가 뭔데 너만 구원받고 나는 구원 못 받았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왜 나보고 그럽니까? 내가 알아서 구원한 것 같으면 내가 알아서 빽을 쓰든지 할 텐데 그것이 아니고, 주께서 알아서 선택한 것이니 선택하신 분에게 따져야지 그것을 왜 나한테 따지는가 말입니다.

가슴에 합격증을 달고 다니니까,

“너는 몇 등해서 구원받았나, 전도해서 구원받았나, 헌금해서 구원받았나, 그가 뭘 했대?”
“그냥 예수의 피로 구원 했대.”
“그럼 왜 나는 구원 안 하노!”
“그걸 왜 나한테 묻노?”

‘나는 왜 구원 안 하노?’라는 사람은 솔직해서 좋지요. 그렇게 이야기 하는 사람도 없어요. ‘나도 구원받았다’고 하지요. 누가 뭐랍니까? ‘너만 구원받았나? 나도 구원받았다.’ 누가 뭐랍니까? 그러면 물어보죠.

“어떻게 구원받았는데?”
“열심히 성실하게 노력해서 구원되었느니 … .”

예수 피를 말을 못해요. 그러니까 가짜라는 겁니다.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공통통념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주님 오실 때까지 무엇을 증거 한다? 오실 때까지 주의 죽으심을 기념할 때, ‘식상하다, 권태롭다’하지 않고, 공통통념이 있게 되면 그 공통통념이 우리를 새롭게 운동영역(막대기)이 작용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죄인의 주체더라도 무엇이 더 세게 나옵니까? 공통통념이 더 세게 나오죠. 그게 뭡니까? 주께서 무엇을 흘렸다? 피를 흘렸다!

고린도전서 11:23-26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이게 나올 때 그 사람과 이야기가 통한다는 거예요. 아까 나다나엘 이야기 했지요. 나다나엘과 예수님이 이야기할 때 뭐가 있었습니까? 공통통념이 형성되었지요. “나다나엘아 네가 간사한 것이 없구나.” 나다나엘이 평소에 무엇을 기도했습니까? “주여, 약속대로 메시아가 오시옵소서.” 주님이 하신 성실하신 약속을 고대했어요. ‘약속을 고대함’은, ‘나의 간사안함’,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의 약속을 고대함은 주님 보시기에 정말 자기 생각이 없다는 뜻에서 “간사한 것이 없다”는 겁니다. 노림수도 없고, 나 잘돼야지, 이런 것도 없고, ‘주님의 약속대로 될 거예요’라고 한 겁니다. 크리스마스 때 자주 인용되고 무대에 등장하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그 인물들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여러 가지 찬양이 나옵니다.

찬양하는 사람들이 누굽니까? 엘리사벳 나오죠. 마리아 나오죠. 세번째는 사가랴가 찬양합니다. 그 세 사람의 공통통념이 뭡니까? “다윗에게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위에 앉으신 분이 오실 것입니다.” 또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오실 겁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시편에 예언한 대로 오실 것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한나가 찬양한대로 오실 것입니다.” “주께서 오시면 가난한 자가 부자를 이기고….” 이것이 시편의 내용에 나옵니다.(107:40,41)

시편 113:5-9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방백들 곧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우시며 또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가난한 자의 특징이 뭐냐? 가난하기 때문에 주의 이름만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그 가난한 자에게 주의 이름대로 권세자들을 내리치시고 가난한자를 그 위에 앉히시는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약속대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렇게 하니까, 메시아의 약속 없이 자기 힘으로 하겠다는 사람이 누구의 적이 됩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적이 되고 오늘날 성도의 적이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는, 참 말하기가 무서워요, 공통통념이 내 행함의 주체인 ‘나’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이라고 그렇게 제가 설명했건만, 부러 망하는 길로 가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미쳤어요. 수녀들이나 신부들 같은 경우입니다. 자살하려고 환장을 했어요. 다시 이야기 합니다. 가난한 자를 주께서 일으키신다는 것은, ‘공통통념인 그리스도께서 홀로 하신 공로로 된다’라는, 그리스도가 공통통념이지, 내가 가난한자가 되는 그것은 공통통념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하고 싶거든 머리 깍고 절에 가서 해야 합니다. 그런 것을 영성훈련이라고 합니다. 천주교에서는 ‘피정(避靜)’이라고 합니다. 사사로운 정을 피해서 명상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통통념이 아닙니다. 공통통념에는 ‘자기가 어떻게 하느냐’는 자기행위가 포함이 안 되어 있습니다.

시편 3:3,4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기름부음 받은 자이기에 적들이 많습니다.

시편 3:5,6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그러니까 교회 문 열면서 한 주일동안 복 받기 위해서 교회 온 사람은 시편 3편의 이런 말씀은 참으로 동떨어진, 전혀 자기가 기대했던 바와 상관없는 그런 설교 내용이 되겠지요. 그래서 어떤 분은 말하기를 “목사님! 시편 3편에 보면 적이 생기고 적들이 나를 공격하게 되어 있는데, 나는 분명히 복음을 믿는데 나는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나는 왜 이렇게 맘이 편한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적이 없습니까?”

생길 것입니다. 적의 특징은 우리가 그리스도만 바라볼 때 생깁니다. 마귀가 바보가 아닙니다. 마귀는 우리가 죄지으면 ‘회개해라. 반성하라’는 이런 쪽으로 나갑니다. 그때는 마귀가 다정한 친구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내 회개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만 의지해야지’ 할 그 때는 마귀가 적이 되어 등장합니다. “그거?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그것은 네가 도망치는 것이야. 그게 아니야. 네가 성실하게 착해야 되지. 성경 봐라. 하라, 하라, 그런 것이 얼마나 많으냐? 그걸 왜 무시해? 그리스도의 피만 바라보면 안 되는 거야.”

그러나 로마서 8장에 보면 “누가 너를 송사하리요”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내어 주실 때, 우리의 소원대로 내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어주시면서 우리를 포섭해 가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은 택배회사직원이 물건이나 배달하고 가듯이 그렇게 물건이나 배달하러 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거대하게 옵니다. 저벅! 저벅! 그렇게 오셔서 “누구야! 네가 아버지로부터 택함 받은 자야? 이제부터 이 동네는 내가 접수한다”라고 하나님께서 내어주신 분이, 이제는 점령해 버리니까, 그 옆에 누가 있느냐하면, 마귀가 있습니다.

마귀가 우리보고 나불대면서 온갖 죄를 지적합니다. “쟤는요, 저렇게 못됐고요, 맨 날 나쁜 짓을 하고요, 맨 날 자기만 생각하고요, 미주알 고주알….” 그런데 이미 누가 점령했습니까? 내어주신 분에 의해서 이미 점령당했기 때문에 “누가 너희를 송사하리오.” 그 사람을 위해서 내어주신 분이 누구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내어주셨는데 누가 너희를 송사하리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점령 안에서 어떤 세력이 와도 그 사랑이 끊어질 수 없느니라.”

그런데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나는 이 죄 어떻게 하지? 이 죄 때문에 구원 못 받게 생겼는데, 이걸 어떻게 하지’ 이렇게 주체가 살아 있으니까, 이 점령이 온 것이 아니고, “잠시 내가 도와줄게” 하고는 도로 집에 가버리는 식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그냥 계십시오.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제는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새사람답게 살 겁니다.’ 그래놓고는 예수님을 도로 보내버리니까, 마귀가 “야! 새사람 되어 놓고는 왜 행동을 그 따위로 하고 있어?” 계속해서 스스로 공격을 받고 있어요. 불안해서 안절부절 하면서 어쩔 줄 모릅니다.

예수님을 돌려보냈거든요. 그만큼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결국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끝까지 자기사랑을 포기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어느 정도로 사랑하느냐 하면, 예수를 동원해서 나를 구원시키기까지 나만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2:25에 보면 “누구든지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생명을 얻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생명이 들이닥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내가 미워! 미워! 미워! 미워! 주님 대신 내가 나서려고 하는 나의 작당과, 존재의 경련과 발작이 미워! 마귀도 못이기는 주제에, 이제는 성화되었으니 내 힘으로 이기겠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겁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찌어다.”(고린도전서 16:22) 그 정도로 주님은 좋으신 점령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