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시편-2008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3강-인간의 의를 찢고 부셔버리는 언약-너의 구원자가 누구인가를 잊었구나!

아빠와 함께 2014. 1. 6. 16:32

2008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3강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합시다. 그 그림 다시 그리면, 시편 말씀은 뭣을 겨냥하느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겨냥하는데, 우리는 시편 말씀을 다가가는 거예요. 우리라는 물체가 자신의 언어의 틀, 언어세계를 가지고 있는데 이 언어세계를 누구를 겨냥하느냐? 자기 자신의 주체 만들기에 열중하면서 나는 어떤 사람일까? 열중하면서 나는 구원된 사람일까? 나는 죽어서 천국 갈 사람 맞겠지. 나는 지옥은 안 가겠지.

항상 관심사가 자기 자신에 관심을 두면서 성경 말씀까지라도 ‘내가 무엇이다’에 여기에 내용으로 집어넣으려고 애를 쓴다 이 말이죠. 이게 종교라고 했지요. 내가 지금보다, 천국이란 말을 안 들었으면 안 가도 되는데, 천국이 있다 하니까 찝찝한 거예요. 천국이라는 그 자체가, 다시 봅시다. 그 내용을 자꾸 여러분 오해하는데.

주체라는 게 있는 게 아니에요. 달이 떴으면 빌게 돼있어요. 이번에 해가 뜨면 빌게 돼있다니까요. 이번에 확인했어요. 우리 동네 뒷산에 가서. 그 경외, 숭고지요. 그 경이로움에. 빌게 돼있어요. 남편 사업 잘 되게 애 잘 되고. 빌게 돼있다니까. 새로운 게 나왔을 때는 그 경이로움에 자기가 동일시시켜서 그 안에서 전과 다른 새로운 자아, 다시 거듭나고 싶은 게 인간입니다. 다시 태어나고 싶은 거예요.

따라서 이게 인간 속에 있는 욕망을 만들어내는 언어인데 언어로써 그렇게 표현하는데, 이게 다가올 때 시편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는데 예수님의 피를 바라보고 있는데 우리는 나를 좋은 사람, 아주 멋들어진 사람 되게 해 달라. 이런 식으로 이걸 편입시키려고 애를 쓴다 이 말이죠.

자, 여기에 대해서 그럼 이런 것을 고치면 되지 않느냐? 고칠 것 같으면 아예 쫓겨나지도 않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 고쳐서 살지, 추방되었다는 말은 우린 두 번 다시 이 짓 밖에 못한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살라고 한 거예요. 우리 이 짓 밖에 못 하는 거.

제가 이야기 다시 할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뭐가 뒤집어씌웠다? 이방인에게는 없는데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언약, 말씀이죠. 말씀이 뒤집어씌운 거예요. 뒤집어씌워서 자기들이 자기는 마치 천국 간다 하지만 예수님 보시기에는 천국에서 쫓겨날 사람이고, 천국에 사람은 따로 있다 이 말이죠.

너희들이 아브라함 본 자손이 아니란 말이죠. 너희들이 하나님의 귀한 말씀, 율법 이걸 매일같이 외워도 그것은 너희의 죄를 들춰내는 그런 기능 밖에 안 했지, 그걸 통해서 율법으로 의롭다 할 인간은 없어요. 갈라디아서 2장에 있잖아요. 율법으로 의롭다 할 것 같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지도 않았다는 것이 갈라디아서 2장에서 사도바울이 외치는 겁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될 것 같으면 십자가에 죽지도 않았다. 그런데 십자가 죽으심을 보니까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피로 의롭게 된다. 이게 갈라디아서, 로마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율법이 뭡니까? 언어체계 아닙니까? 율법이 누굴 위한 거예요? 율법 지키는 당사자 나를 잘 되기, 우수한 존재자로 만들기 위한 그러한 시도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아까 그랬지요. 인간인 이상 종교는 없어지지 않는다고. 물론 그 종교는 이단이지만. 이단은 없어지지 않아요. 더 번창할 겁니다. 그게 주의 뜻이고.

그러면 해결책이 과연 없느냐? 하고 물음을 던졌는데 시편 봅시다. 9편 20절. 해결책이 참 궁금해, 이럴 때는. 야, 진짜 이래도 안 되고 빼도 박도 못하고.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시편 9편 20절에 보니까 19절에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목전에 심판을 받게 하소서 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뿐인 줄 알게 하소서”

여기에 “인생뿐이다” 인간은 인간이다. 그 뜻이에요. 인간은 인간이다. 뭔 뜻입니까?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 인간은 추방된 존재, 그렇게 살아야 그게 당연지사다. 따라서 추방돼야 될 존재가 다시 하늘나라로 복귀하려고 맘도 먹지 마라. 그건 주제에 어긋난다. 니 분수에 어긋난다. 인생은 인생이다. 그걸로 끝이다 이 말이죠.

이승엽 선수가 국회로 나선다. 전 말리고 싶어요. 4번 타자로 끝내야지. 요미우리. 거 뭐, 국회에서 배트 흔들 일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이승엽은 야구선수로 끝내야 되듯이 우리 인생은 제발 인생으로 끝내기를 ‘가’하시면 ‘예’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인생으로 끝내주시기 바랍니다. 이게 시편이에요. 그래서 시편이 어려워요.

그런데 그걸 끝낼 때 아, 우리가 호락호락하지 않지요. 이스라엘 사람들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안 된다 해도 기어이 해보려고 애 쓰는 것이 인생이에요. 그때 하나님께서 19절, 20절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일어나사 이제는 하나님과 인생이 부딪치는데 귀엽다고 부딪치는 게 아닙니다. 심판하기 위해서 부딪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중간 결론내립니다. 아까 제가 뭘 찢었습니까? 그림을 찢었지요. 이제는 시편 가지고 우리 자신을 찢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편 말씀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발기발기 찢어버리죠. 인생이란 것은 원래 찢어도 군말 없어야 될 인생이다.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찢어버립니다.

찢을 때 잘했습니다, 잘 찢었습니다. 하는 사람은 성도고, 시편 이해하는 사람이고. 잘해볼게요, 샘님 잘해볼게요. 이런 거. 화장실에 담배 피웠을 때 이리와. 좀 맞아야 되겠어. 하는데 샘님 다시는 안 피울게요. 더 때리고 싶습니다. 사나이답게, 남자답게 한번 맞고 끝내자. 샘님, 때리면 안 돼요. 그때는 한 대 때릴 것 두 대 더 때리고 싶어요. 이런 싸가지. 더 때리고 싶어요.

하나님께서는 여호와께서 일을 하시는데 우리가 백지 순진무구가 아니고 우리는 순간순간 나밖에 모르는 거예요. 나밖에 모르면서 계속 나를 위한 신을 생산해내는 그런 도중에 있습니다. 계속 생산해서 나를 정당화하고 나를 예뻐해 주는 신을 계속해서 새끼를 까고, 새끼를 까고 계속해서 만들어내요.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활동하사 성실하심 있게 그걸 찢어버리고 부셔버립니다.

그 부수는 무기가 뭐냐? 그게 바로 언약입니다. 시편에선 이걸 두 가지로 하나는 다윗언약으로 또 하나는 모세언약도 나옵니다. 또 더 나가면 이거는 창조언약이라는 말이 사용되는데 하여튼 창조언약 말고 ‘창조성’으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던 그것으로. 여기에 대표적인 것은 천사지요. 천사 또는 대자연. 천사, 대자연을 통해서 누굴 친다? 이스라엘 백성을 계속해서 치는 겁니다.

칠 때 맞습니다. 인생입니다. 옳소이다. 우리의 모두의 인생은 한숨과 슬픔뿐이요. 라고 수용하면 그 사람이 바로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밑에서 혼자 기도하고 있을 때 나중에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나다나엘 보고 먼저 이야기를 꺼냅니다.

나다나엘이 어떤 주체인 줄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나다나엘은 너는 어떻다 하는 것을 나다나엘이 이야기한 게 아니라 다가오신 예수님이 이야기해줬다는 그것은 그대로 살아라는 말도 아니고, 고대로 되라는 말도 아닙니다. 이미 너는 합격이야. 이 합격이란 말만큼 좋은 말 이 세상에 좋은 말 없습니다. 사법고시 3차 되고 나면, 아파트 된 사람은 아파트 단지에 플래카드 걸리죠. 촌에 가면 정 씨 누구 셋째 딸 이번에 합격하다 걸리죠.

합격했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사법고시 합격했다는 말은 평생 먹고 살 것은 보장됐다는 말 아닙니까? 신분 자체가 확정됐다는 이야기거든요. 사법고시 합격하고 난 뒤에 자가 표정 관리하는 부모 없습니다. 실실 웃으면서. 왜? 내 아들 합격했기 때문에. 나는 검사 엄마고, 내 남편은 검사 아빠고. 사법고시 합격했기 때문에 그 뭐, 싱글싱글해요. 꼴랑 사법고시 합격해서 싱글싱글하는 사람 많은데, 천국에 합격해서 싱글싱글한 사람 못 봤으니 도대체 이게 무슨 십자가마을이에요.

사법고시 합격해도 그것은 이 세상에 죽을 때까지 치매 걸릴 때까지만 유효한 거고 그 외에는 소용없습니다. 치매 걸린 변호사 누가 사용하겠습니까? 벌벌벌 떨면서 무슨 변호하겠어요. 사법고시 합격할 때 기분 좋았지요. 나이 많으면 그것도 쓸모없는데.

우리 하늘나라 합격은 너무 너무 좋은 거예요. 왜냐하면 합격되고 난 뒤에 무슨 짓을 해도 합격이 취소되지 않으니까.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흠 없는 피가 거기다 개입되었거든요. 흠이 있을까 말까, 있을까 말까가 아닙니다. 아예 흠 없는 피가 들어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은 뭐냐? 흠 없는 어린양의 피가 있으면 죽음의 사자도 그냥 넘어가게 돼있어요. 그래서 피에요.

그것도 흠 없는 자의 핍니다. 그 피로 일괄적으로 일시에 한꺼번에 합격통지서를 준 겁니다. 그 다음부터 나오면 니가 무슨 짓을 해봐라. 합격 취소되는가? 한번 붙어보자. 이래 되는 거예요. 무슨 짓을 해봐라. 그게 합격 아닌가? 다른 말로 하면, 니가 무슨 짓을 해봐라. 그게 선한 일이 아닌가? 다 선한 일이 된다 이 말이에요. 아, 이거 오해할 소지 있다. 이거 무서운 이야기다. 이게 또 청교도 들으면 난리난다.  

사법고시 합격자의 관리는 본인이 해야 돼요. 합격자답게 변호사답게 처신하지 않으면 그것도 아주 심한 일해서 자격박탈 되는 수가 있을 겁니다. 나는 그런 사람 안 보았는데. 그런데 합격자 관리를 누가 하느냐 하면, 우리 손에서 떠났어요. 천국의 합격자관리는 따로 관리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따로 관리하시는 공동사무실 이름이 ‘보혜사’에요. 달리 보혜사겠습니까?

보혜사가 뭐예요? 이게 ‘간호사’란 뜻이거든요. 환자가 지 마음대로 다 할 것 같으면 간호사가 왜 필요합니까? 지가 운동하고 주사 놓고 그게 간호사가 왜 필요하겠어요. 돌봐주는 거예요. 돌봐주는 사람을 붙여주는 그 분이 관리하게 돼있습니다. 어떻게? 합격자답게 관리해요. 무슨 짓을 해도 그게 선한 일이 되도록 관리 하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그동안 우리는 뭐하면 됩니까? 우리는 백날 이것만 하면 되지, 뭐. 나는 누구고? 나는 뭐냐? 나는 오십 평, 이 짓만 하는 거예요. 더 큰 교회, 더 큰 예배당, 교인수 부흥되기를 맨 날 이 짓만 하고 있는 거죠. 숫자 적으면 안 오고, 숫자 많으면 많이 했다 이러고. 자기 핑계대면서 자기 변명하면서 맨 날 그 짓하는 거예요.

근데 그 짓을 왜 하도록 해야 되느냐 하면, 그 짓을 할 때마다 비로소 우리는 내가 죄인인 것을 아직까지 덜 알았어. 더 알아야 돼요. 죽을 때까지 더 알아야 돼요. 더더더더 하는 것처럼. 내가 왜 죄인인가를 날이 갈수록 알기 위해서는 위장하지 말고, 위장하는 것도 죄지만 그냥 우리의 본 모습대로, 근데 그 본모습을 우리는 몰라요. 아까 보이죠. 내 안 에 뭐가 들었는지 몰라요. 그건 욕망이 알지 그 다음은 모르거든요. 그대로 살아가도록 보혜사가 관리합니다.
    

제가 설교에서 예를 들었는데, 밀가루부대가 있는데 탱탱한 밀가루부대에다 칼 가지고 쫙 그려버리면 그 안에서 뭐가 터집니까? 허연 밀가루가 퍽 터져서 흩어지지요. 그처럼 성령께서 면도칼 갖고 다닙니다. 가서 교회 당회장이면 당회장되면 뒤에 가 그어버립니다. 그러면 당회장 될 때는 몰랐던 나의 죄가 당회장 되고 뒤에 터져 나옵니다. 집사들, 내 말 안 들어. 이런 거. 그 죄가 톡 튀어나옵니다. 장로가 되면 장로 되었기 때문에 나온 또 그게 나와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빨리 집사에서 장로 되기를 원해야 돼요. 합격돼야 돼요. 승진하면 그 승진한 거기에 따라서 또 거기서 죄가 나오는데 승진 안 하려고 하면 죄가 안 알죠. 안 죽입니다. 마저 알아야 되니까. 그래서 아이들은 계속 커나가야 돼요. 인간이 아이나 어른이나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은 그게 죄인이라는 의미에서 계속해서 유지해 나갑니다.

세 살 먹은 애가 골초라는 걸 알 수가 없어요. 담배를 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네 살 먹은 애가 술꾼이라 하는 것을 모릅니다. 스물다섯 쯤 되서 회사 취직해서 회식해보니 아, 내가 술에 약하구나. 두 잔 먹고 취하는구나. 그때서 아는 거예요. 그것도 미리 알겠다고 오늘 또 회식하지 마시고.

왜냐하면 십자가마을하면 다시 또 죄가 아는 게 있어요. 삐져서 십자가마을, 복음, 복음 해도 우리끼리 만나서 그 죄가 나와야 돼요. 합격했기 때문에 마음 놓고 죄를 지란 말이 아니고, 저 죄 지란 말 안 했습니다. 분명히 녹음돼있으니까. 마음 놓고 우리 허락도 안 받고 죄가 눈치도 없이 마구 튀어나옵니다. 왜? 합격된 자기 때문에. 합격해주신 은혜가 얼마나 크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죄가 막 나오네요. 방구 뿡뿡 뀌고. 방구 꿔도 구원받았다. 이거 합격입니다. 어떤 짓을 해도 이게 취소가 안 돼요.

흠 없는 그분의 피기 때문에. 바로 그 계약을 그 언약을 창세전부터 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창세 이후에 태어났거든요. 창세 이후에 태어난 인간들이 인생이 무슨 창세전의 내용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다만 주님이 어떤 사건을 일으킬 때 그때 우리는 아하, 창세전부터 예비 된 것이 나한테 쏟아졌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 창세전부터 있었던 내용이 이런 식으로 죄인을 찢어버리고 부셔버리고, 인간의 의를 파괴시키는 쪽으로 일한다는 내용이 바로 시편입니다.

여기에 시편 56편 봅시다. 이 시편이 어려워요. 목사님, 빨리 1장 들어갑시다. 하는데, 들어갈 수가 없어요. 들어갔다가는 헤맵니다. 우선 미리 사전 막을 쳐놓고 들어가야지요. 시편 56편 2절 누가 읽어보세요. “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히 치는 자 많사오니”  
보세요. 내가 적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예상치도 않은 적이 툭 튀어나와서 종일 나를 치려고 할 때 그 배후에 누가 그렇게 일하십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일하시잖아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난데없는 적을 만나서 그 적이 어떤 역할 하느냐? 나를 찢고 나를 치는 역할 하는 겁니다. 왜? 합격자기 때문에.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렇게 수모당하고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어도 그렇게 고생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고, 이미 그런 아버지의 뜻을 받았다는 자체가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 기뻐하는 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저 인생은 자기 밖에 모르는데 이걸 깨닫게 하는 방식이 뭐냐?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런 적들을 보내시고, 그 적들을 유발시키게 만들고, 그 적들로 하여금 시련을 당하도록 그렇게 하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인생의 본성상 성질나죠. 성질나니까 우리는 하소연을 하지 않습니까?

하게 될 때에 시편 50편 22절을 봅시다. 다같이 50편 22절 시작,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보세요. 하나님 배치한 적이 와서 성질 건드리네. 성질을 건드리니 우리의 인생상 성질 안 날 수 없지요. 건드리는데 뭐. 성질내죠.

그 순간 우린 뭘 잊어버렸습니까? 다시 나만 부각되고 뭘 잊어버렸어요? 하나님의 은총이고 은혜고 다 날아가 버렸죠. 잊어버렸죠. 그럴 때 시편 50편 22절은 뭐라고 하느냐면,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여. 할 때 또 나보고 하는 소리 또 나한테 해당되는구먼. 불신자 같으면 내가 성질내려했나? 하나님이 성질 건드려 놓고 성질내는 게 당연하지.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갈 때 그들이 원망을 할만 했잖아요. 왜냐하면 물을 줬어요, 어데 양식을 줬습니까? 아무것도 없는데 살라니까 이거 무슨 소립니까? 원망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원망했다고 징벌하시잖아요. 불뱀을 보내시고. 그게 바로 뭐냐? 인간이 알고 있는 구원이라 하는 것은 자기중심이지만 하나님이 생각하는 구원이라 하는 것은, 너희들이 구원자가 누구였던가를 네가 잊었구나. 라고 아까 찢어버렸는데.

아까 남자 그림 있죠. 대충 쥡시다, 이제는. 이거 퍼즐 조립하고 이거 맞추라고. 나의 구원자는 구원받을 자격도 없이 왜냐? 맨 날 잊어버리니까. 맨 날 잊어버리고 다니는 우리가 어떻게 정신 바짝 차려서 구원받습니까? 있을 수 없는데 이분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잊어버려도 구원받았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도록 그렇게 성신께서 역사하시는 겁니다.

슬슬 시편 입질이 오지요. 감이 오지요. 아, 시편이라 하는 것이 지키는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가 구원자구나. 하는 것을 알게 하는 책이다. 그렇게 정리돼요. 지키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합격 된 자에게 어떤 내력으로 합격되었는가를 알려주는 책이 시편이죠. 이거는 시편뿐만 아니고 모든 성경이 다 그렇습니다만 시편도 예외가 아니네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아까 강의 처음에 했던 것 다시 해봅시다. 처음에 “문들아 들릴지어다” 했지요. 그런데 제가 천국, 영원한 문이 있는 것을 시편에선 뭐냐? ‘시온문’ 거기 있는 성을 영원한 ‘시온성’이라 해서 시온성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이 계시는 곳, 시온성입니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했는데 바깥에 누가 일한다 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뭐가 되신다? 왕이 되시죠. 아까 했습니다. 그 다음에 여호와께서 어떤 일을 하셔요? 전쟁을 한다. 전쟁을 한다는 말은 여기 반드시 뭐가 있어야 된다? 적이 있어야 되죠. 적이 있어야 전쟁하지, 적이 없으면 전쟁을 안 하죠. 전쟁에서 승리할 때 여기에 뭐가 나오느냐? 그분에 의해서 승리한다는 ‘전리품’이 있습니다. 그 전리품이 바로 우리가 됩니다. 시편의 구조로 돼있어요. 내용상 구조가.

홀로 왕이시고. 인간은 왕이 될 수 없어요. 자기 자랑하기 바쁜데 무슨 왕이 되겠어요? 여호와께서 홀로 왕이 되시고, 전쟁을 일으키시고, 적과 승리하셔서 그 전리품으로 ‘우리’라는 것이 최초로 생산돼요. 누구에 의해서? 승리한 대가로 처음으로 우리가 성립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적은 누구의 적이 돼요? 곧 우리의 적이 돼요. 우리의 적이 되고, 예수님의 적이 됩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이런 구절들이 많이 나와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때 너희 보고 미워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너희들과 함께 있는 그분을 보고 세상과 마귀는 너희들에게 달려든다. 달려드는 것은 왜 달려드는가? 시편을 이루기 위해서. 시편에 보면 반드시 성도에겐 뭐가 있다? 적이 발생돼야 돼. 적이 발생돼야 승리는 우리가 한 것이 아니고, 누가 했다? 여호와 홀로 했다. 여호와 이름을 할렐루야 찬양할 수 있거든요.

이 시편의 구조가 그대로 신약에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왜 적용됩니까? 이 우리라는 게 그냥 생긴 것이 아니고, 여호와 안에서 우리가 발생됐기 때문에. 그러니까 여호와께서 하신 일로 인하여 슬금슬금 생긴 게 새끼 치듯 생긴 게 우리니까 우리라는 숙명, 운명, 본질은 절대로 여호와의 하신 일을 바깥으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걸 가지고 신약에선 한 마디로 뭐냐? ‘예수 안’이죠. 예수 안에는 뭐가 없다? 예수 안에는 정죄함이 없다. ‘안’이죠. 예수 바깥이 아니고 예수 안. 이걸 갈라디아서 2장에서는 ‘십자가 안’이 돼요. 십자가 안에서는 이게 똑같이 적용되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홀로 하신 일을 동시에 우리에게 그대로 예수님이 홀로 하셨다는 것을 증거하도록 우리에게 이런 상황들이 닥치죠.

그런데 다시 한번 이야기합니다. 수능 물리Ⅱ 11번 문제, 에너지 열량 문제, 열효율과 그런 문제가 그게 현실입니까, 이게 현실입니까? 자, 에너지 문제가 현실이라고 할 때 에너지를 에너지라고 알 수 있는 것은 아까 한 것이니까 복습합시다. 에너지로 돼있다는 주장은 누가 하느냐? 내가 하죠. 그러면 세상은 에너지라고 돼있다는 것은 내가 아는 세상 안에서만 통용되는 원칙이 되죠.

그런데 여기 아인쉬타인, 너도 볼트만, 너도 이렇게 자꾸 과학자를 모이는 거예요. 과학자하니까 난 과학자 말 들을래. 이 전체가 하나의 뭐가 된다 했습니까? 하나의 집단이 되지요. 이 집단에서 뭘 하느냐? 진리라는 것을 선포하고 이것이 과학적으로 옳습니다. 최요삼 선수가 뇌사 판정했잖아요. 할 때 혼자 개인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뇌사 판정했습니다. 이렇게 한다 말이에요. 뇌사 판정이 성경에 있습니까? 안 나오죠. 뇌사 판정 용어 자체가 안 나오죠.

그럼 이 용어는 어떤 용업니까? 우리라는 동일시된 주체를 핑계 삼아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마땅하다. 왜? 우리는 얼마나 똑똑한지 뇌사까지 다 안다. 심장사만 아는 게 아니라 뇌가 죽는 것도 죽음으로 알 수 있을 정도로 인류문명은 너무나 똑똑해. 그리고 우리가 더욱더 진화하고 발전해야 돼. 라는 자기의 생존을 긍정하는 자기의 주체를 긍정하는 쪽으로 필요해서 나온 용어 중에 하나가 뇌사고, 또 민주주의 같은 용어, 모든 용어.

그리고 이런 용어를 만약에 뇌사, 이거 모르면 우리라는 현실세계에서 인간 공동체에서는 살 수가 없지요. 그래서 이거 모르고 따로 사는 사람이 누굽니까? 깊은 산중에 도사들 아닙니까? 그 사람은 옛날 공자, 맹자 들고 현대 영어 같은 건 난 몰라도 돼. 나는 공자, 맹자하고 갈래. 이거는 따로 옛날에 있던 공자의 주체성을 지금의 자기 주체성으로 삼겠다고 다짐해서 격리된 사람이죠.

애들 하는 말이 뭡니까? 엄마, 공부하기 싫어. 공부 왜 해야 되는데? 그럼 엄마가 하는 말이 뭡니까? 니, 굶어 죽을래. 그러면 애가 하는 말이, 엄마가 다해. 엄마는 옛날에 많이 했다. 많이 해서 오늘 이만큼 너를 키웠다. 내가 옛날에 공부 안 했으면 너를 못 키웠어. 

그러면 그런 발언은 어디에 어긋납니까? 아까 배웠던 것 다 잊어버렸다. 시편 9편 20절에 뭡니까? 너희는 뭐 밖에 없다? 인생뿐이다 말이죠. 그러한 발언들이 주님의 심판 앞에서 그게 통합니까, 안 통합니까? 안 통하지요. 왜냐하면 니가 그따위 생각해서 추방됐어야 될 인간이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교회 안 나오고 성경 안 보려는 이유가 현재 자기가 생각한 우리라는 현실만 고수하고 그 바깥에 있는 성경이라는 현실을 그걸 수용 안 하려고 해요. 만약에 성경이라는 현실을 따로 수용을 하면, 지금 내가 하는 이 현실성을 뭔가 밀리고, 때로는 이걸 포기해야 된다는 자기 해체, 아까 찢어지죠. 자기가 찢어지는 그러한 것을 각오해야 되기 때문에 교회에 자주 안 나오려고 해요. 바빠서 안 가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현실이 따로 있으니까. 나라는 현실이 따로 있으니까.

십자가마을 참석 안 한 사람보고 이야기하는 것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하는 자체가 상당히 수상하죠. 현실이 따로 있어요. 그 현실로 인하여 자가기 살아 온 겁니다. 그런데 그 현실을 제가 바꾸라고 했습니까? 제가 강의 세 시간 하면서 바꾸라고 했습니까? 아니죠. 또 잊어버렸죠? 그게 뭐라고요? 그게 바로 내가 밀가루부대 찢어서 할 수 있는 뭐다?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그게 죄라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런 시편 말씀을 안 들으면 자기가 아는 현실을 절대로 죄라고 보지 않고, 이거는 내가 살려야 하는 최소한의 나의 정당성이고 노력이라고 우길 거다 이 말이죠. 그렇게 정당성이면 결국 그 사람은 갈수록 복음과 멀어집니다. 왜? 복음은 자기가 현실일 경우만 차용하고 현실과 충돌 될 때는 복음 쪽을 버리고, 현실 쪽으로 가겠다는 이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점점 더 뭐가 되느냐? 죄인이 안 되지요. 한 때 죄인이었다가 지금 예수 믿고 의인이라고 우기지요. 그러니까 자기가 죄인 아니니까 그 다음부터는 뭐냐 하면, 자기 세력을 지금보다 더 넓히려고 할 겁니다. 그런 짓들을 누가 했느냐? 시편을 보면 바로 다윗에게 달려드는 사울 집단들이 그 짓을 했다고 시편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네요.

그러니까 이 시편을 안 듣고 안 봤으니까 설마 그것까지 죄일 줄이야. 이래 나오거든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악한 것만 노린 게 아니고, 우리가 전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살 수 없었던 존재였단다. 따라서 너 같은 인간의 천국에 오려는 것은 아예 맘도 먹지 마라. 만약에 네가 구원받는다면 순전히 내 공로다. 이런 것을 그러한 그림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는구나.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구나.

그런 점에 정말 따지고 보면 시편이 만만하지 않고 상당히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시편은 그러면 아까 인간은 망가져야 된다. 찢어지리라. 하나님을 잊은 자여, 내가 찢으리라. 이건 다른 사람보고 하는 게 아니고 나보고 하는 건데 하나님을 잊은 자여, 너는 어떻게 한다? 내가 찢어야 된다.

그래서 누구한테 얻어맞고 뇌사 판정되어 죽어도 그걸 억울하다 할 이유가 없어요. 근데 보는 사람은 누구한테 맞아 죽으면 그 사람 때린 사람이라고 보잖아요. 그런데 시편에 뭐라고 합니까? 그 때린 사람을 누가 보냈느냐 이 말이죠. 아까 나왔는데 어디서 나왔더라? 여기 봅시다. 아까 나왔잖아요. 대자연과 뭐라고? 천사. 천사 중엔 뭐 있습니까? 악한 천사를 뭐라고 합니까? 악마.

하나님께서 대자연과 천사를 부리시는 왕이잖아요. 이걸 대자연과 천사를 부리셔서 뭘 하신다? 전쟁을 벌여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그분의 승리 대가로 들어가잖아요. 우리는 내가 어찌 되는가가 아니에요. 나는 죄인이고, 의인되려면 내가 찢어 죽고, 죽은 상태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런 경우에는 모든 공로가 주님한테 돌아가죠.

그런데 아까 어떤 사람이 날 때려서 뇌사 판정받고 죽었을 때 우리 부모님이나 내 가족이 복수하겠다고 칼을 갈고 있으면 이건 어디 해당돼요? 그 때린 사람을 누가 배치했습니까? 이 시편의 이론에 의하면 누가 배치했어요? 답변해보세요. 안 그러면 제가 흥분합니다. 누가 배치했어요? 하나님이 배치했어요.

그러면 성경에 보면 합력하여 뭘 이룬다 했습니까? 선을 이루죠. 그러면 왜 죽어야 되는 겁니까? 그러면 하나님 답은 뭡니까? 그동안 살아온 것도 복인 줄 알아라, 이놈아. 이제 와서 내가 왜 죽어야 됩니까? 그건 말이 안 되지요. 진작 죽어야 되는 걸 그동안 살아왔는데 왜 제가 죽어야 됩니까? 나이 육십도 안 됐는데 왜 죽어야 됩니까? 육십 채우라는 게 성경 어디 있습니까? 없잖아요.

그게 시편이에요. 그래 시편 내용이 어렵다니까. 왜 어려우냐? 실감 안 나니까 어려운 거예요. 체험 안 되니까 어려운 거예요. 자꾸 자기 언어체계만 시편 봐서. 여기 보면 시편 110편에 뭐냐 하면,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하거든요. 벽돌 깨서 발 찍어버려라, 씨.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그거 누구한테만 해당됩니까? 죽은 자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 해당되는 거예요? 여호와라는 그분한테만 해당되는 이야기지요.

그리고 난 뒤에 그렇게 해당된 그 말씀에 의해서 우리가 된 사람에게 적용되면 우리는 뭘 느끼느냐 하면 아, 주께서 이걸 이루었구나. 라는 식으로 적용되죠. 그리고 “말씀이 내 발의 등이요” 안에 뭐도 포함되느냐 하면, 마귀가 와서 나한테 돌 던져 내가 뇌사 판정되는 것도 어디 포함된다?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에 포함시켜 준 줄 아세요.

그런데 만약에 인간이 자기 살려고 한다면 그거는 포함을 안 시켜요. 자기 유리한 것만 포함을 시키고.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내가 기쁜 것만 하나님의 뜻이고,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전부다 마귀 짓이라고 보는 겁니다. 세상에 그런 반칙, 정말 너무 반칙.

범사에 감사하라 했는데 지가 무슨 통뼈로 성경말씀 지워버리고 좋은 것만 감사하자. 어디 이런 게 나옵니까? 성경말씀 구구절절이 우리를 쑤셔놓는 글들입니다. 네가 어디 가서 누구한테 대접하려고 하거든 평소에 너한테 잘한 사람한테 대접하지 말고, 거리의 거지나 노숙자나 가난한 사람에게 대접해 줘라. 왜? 그래야 그 사람들이 나한테 대접받고 난 뒤에 돌아서서 도로 못 갚을 처지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고스란히 그들에게 남아있다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 은혜가 남는다는 겁니다.

아이고, 갚을 것도 없는데 이렇게 해주다니 고맙습니다. 하고 누구한테 영광 돌리겠습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게 아니겠습니까? 그 가난한 자가 누구에요? 당사자가? 저와 여러분이에요. 이렇게 못난 짓만 하는데 은혜를 주시다니 고맙습니다. 이래 나와야지, 지가 테레사 수녀 되서 돌아다니고 밥 다 퍼줘 버리고. 참 기가 찰 노릇이에요.

이번에 성탄절 날 KBS에서 방송을 하는데, 천주교의 수사들이 은밀하게 폐쇄된 집단의 생활 보고 오랜만에 제 아내가 참 바른 한번 소리했어요. ‘소꼽놀이’하고 있다고. 한 마디 더 했어요. ‘폼생폼사’ 폼에 죽고 폼에 산다. 그걸 저는 달리 이야기합니다. ‘퇴행’ 도로 어린애로 돌아가는 것. 그거 우리 어린애로 안 돌아가도 나이 칠십만 넘으면 다 돌아가게 돼있어요. 그때만 기다리면 되는데 구태여 그 짓하고 있다고.

속으로 그거 하면서 얼마나 저거들이 스스로 자기들이 위선자라는 걸 얼마나 절감하겠습니까? 밭에서 일한다고 피부 그슬린다고 온 몸에다 다 바르고. 피부 그슬린다고. 진짜 같으면 다 드러내놓고 해야지.

그런데 그렇게 비난해도 그 세력은 더욱더 번창할 겁니다. 왜? 누구든지 그렇게 되고 싶으니까. 나는 깨끗하다. 평생 살면서 이건 한번 확인하고 싶거든요. 나는 어느 정도까지 깨끗해 질수 있는가? 나는 어느 정도까지 순수할 수 있는가? 키 컸으면, 키 컸으면, 키 컸으면 하는 것처럼 나는 어느 정도로 완벽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가? 이거 한번 여러분 도전할 만한 목표되잖아요. ‘깨끗’

자, 제가 적이 있어야 된다고 또는 망가진 그것만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시편 37편 10절에 봅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이게 성경에 나온다 말이죠.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우리보고 뭘 이야기한 거예요? 세상은 악인이 있음을 의식하고 살아라. 그 이야기 아닙니까. 그 말은 뭔 뜻입니까? 그렇게 악인이 있는가 살피는 그 인간들이 무슨 사람이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의인된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공자는 말하기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공자는 어떤 현실을 제공했느냐 하면, 될 수 있는 대로 누구하고 원수지고 살지 마라. 그게 너한테 편하다. 이거에요. 그게 좋은 게 안 좋으냐? 좋은 게 좋다 그거에요.

그런데 시편 37편 10절에 뭡니까? 악인이 없어지리니 니 한번 살펴봐라. 그러니 시편에 나오는 사고방식은 예수님이나 온전하게 이루지, 평소에 악인 살피는 사람 있습니까? 저 같은 경우엔 담배 피는 사람 있는가 그것만 살피지 악인은 안 살피거든요.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악인입니까? 이래 안 물어본다 이 말이죠.

교회에서 만약에 이렇게 악인인가 살피면 교회생활 화합하지 못하고 왕따 당합니다. 특히 목사한테 추방당해요. 맨 날 일러바치고. 목사님, 쟤 담배 피웠데이. 쟤 집산데 술 안 끊었어요. 이런 거. 사실은 그렇게 일러바치고 그런 충동이 우리한테 참 많이 있습니다. 그때 주께서 준비하신 말씀이 있지요. 죄 없는 자가 짱돌로 쳐라.

어쨌든 제가 시편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악인과 선인, 선인과 악인 그 두 종류 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러한 구분은 우리가 구분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약속대로 구분하기 때문에 우리는 원하든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그 구분된 것을 유일한 현실로 봐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에너지 같은 경우에 또는 협심증 같은 경우에 그런 문장 가지고는 악인, 의인이 구분되지 않아요. 협심증 걸린 사람은 악인이고, 그런 법은 없습니다. 악인, 의인이 구분되지 않는다 이 말이죠. 세상에 있는 현실은 현실답지 못하죠. 왜? 악인과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을 구분하지 못한 현실이 무슨 현실다워요. 실컷 현실대로 살았는데 죽고 난 뒤에 지옥 가더라.

지옥 간 부자가 뭐라고 합니까? 내 동생 다섯 명 있는데 걔들은 현실을 모릅니다. 나사로 보내서 다시 한번 되살려서 애야, 지옥이 있다는 현실을 믿으라. 이렇게 해달라고 요청을 하지요. 그때 아브라함이 하는 말이 이 성경 안 믿는 사람은 이 시편과 선지자를 안 믿는 사람들은 백날 와서 백날 이야기해도 그 사람은 안 믿는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제가 또다시 불가능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럼 목사님,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할까가 아니고, 이미 합격이라니까. 합격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껏 우리 자신에게 약을 올립시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합격되었기 때문에 마음껏 약을 올려보세요.

그 다음에 시편 68편 8절 봅시다. 제가 읽습니다. 누구 읽으라고 하기도 싫다.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나이다”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할 때는 대자연도 동원되고, 시편 85편 이런데 보면 천사까지 심지어 악마까지 동원됩니다. 마귀도 동원되어서 언약이란 현실대로 그대로 밀어 붙입니다.

그리고 시편 108편 이런데 보면, 그냥 말로 하겠습니다. 우리 성도는 죽으면 안 돼요. 다시 영광으로 부활돼야 됩니다. 시편에 보면 나옵니다. 부활되어야 돼요. 그러니까 이런 아이디어가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 에너지 장으로 되어 있는 물리세계 이런 현실에서는 부활 이런 아이디어가 안 나온다니까요.

이건 시편이라는 새로운 현실, 달리 이야기하면, 시편이 겨냥하는 것이 십자가니까 십자가 피 흘리신 그 낯선 사건, 아주 독특한 사건이 겨냥한 그게 중심이 된 그 현실로 인하여 우리는 기존의 우리의 현실관이 현실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다시 한번 접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시편 119편 90절. 이건 보셔야 돼요. 119편이 아주 깁니다. 거기 뭐라고 돼있지요?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니” 그 다음에 뭡니까? 90절에?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의 성실하심, 이게 시편 89편에 나오는데 언약할 때 나오는데.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이거 여러분, 온 몸으로 지금 체험하고 계십니까? 이게 현실로 다가옵니까?

전라도에 눈 온 것도 주의 성실하심이 일한 거고, 대자연이 동원된 거고. 그리고 이런 모임이나 이 모임이 흩어져도 이 모임이 안 이뤄진다 할지라도 주님의 성실하심을 우리가 부인할 수 있는 그러한 아이디어가 우리한텐 없어요. 우리는 자꾸 나 중심의 현실을 따로 챙기기 때문에 성경에 있는 것을 우리가 나를 통해서 새삼스럽게 그걸 증명하거나 확인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할 재주도 없습니다.

마귀가 예수님께서 성경대로 한다니까 마귀가 하는 말이 그럼 뛰어내려봐. 천사가 네 발을 받칠 것이니까. 이렇게 할 때 예수님 말씀은 인간 쪽에서 세상 쪽에서 말씀이 진짜 말씀 맞구나, 안 맞구나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인간 쪽에선 아예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만판 좋지요. 안 좋습니까? 지금 저 혼자 좋은데.

그.러니까 합격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우리한테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없는데 자꾸 교회에서는 당신이 구원받은 증거를 만들어보세요. 자꾸 만들어보래. 만들어보라니까 자꾸 마귀가 역사하지요. 자기에 있는 무의식이 막 튀어나오고, 욕망이 막 튀어나오고. 그런 게 없어도 믿어져야 그게 선물이잖아요. 그게 예수님이 하신 게 아닙니까? 십자가 믿으라니까 십자가 그려놓고 ‘관중’이라 하지요. 쳐다보는 것. 


불교에서는 의식이 있어요. ‘안이비설신’(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이라고 해서 다섯 개 의식이 있고, 여섯 번째 ‘의식(意識)’이 있고, 그 다음에 ‘마니식’, ‘아뢰야식’이 있는데 이게 뭐냐 하면, 의식단계에 들어가면, 유식사상에서 쫙 쳐다보면 본다, 본다 보면 그것이 내 안에 들어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믿어진다는 거예요. 믿는다, 믿는다, 믿는다 하면 믿어진다는 거예요.

그 믿음은 바로 자기 굳히기 위한 그런 믿음이기 때문에 그건 일반교회에서도 심리학을 많이 사용하지요. 그래서 손들고 나오너라. 그렇게 해보고. 엎어지고 자빠지고 물에 푹 담가서 세례주고. 물 뿌리면 안 되고, 물에 푹 잠겨야 세례고 어떻고 그런 이야기하죠.

교회사에 나오는 모든 형식들이 결국 뭐냐 하면, 과연 구원받은 거 맞다는 걸 자기가 자기한테 독촉하는 거예요. 꼭 그런 식으로 동원해야 순간적으로 안심이 된다는 거예요. 안심이 된다는 건 뭔 뜻입니까? 그만큼 뭐하다? 불안하다는 뜻이에요. 어설프다는 뜻입니다. 일시적으로 불안을 가시게 할 수는 있지만 목마른 사슴처럼 먹어도, 먹어도 또 불안해요.

아예 불안 것이 인생이고, 그렇게 사는 거다. 내가 믿는 것은 나 부활하냐, 안 하냐 확인하는 그걸 믿는 게 아니고, 나는 성경말씀을 믿는다. 로마서 나오잖아요.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 했잖아요. 말씀을 들음에서 나온다 이 말이에요. 누가 지옥 가고, 천당 가고 데려가고 분류시킨다고 되는 게 아니라 늘 가까이 있느니라. 말씀이 가까이 있을 때 그 말씀을 들어보고 믿음이 생긴다 이 말이죠. 누구나 생기는 건 아니지만. 믿음이 생기는 방법은 그러니까 증거 없는 말씀만 듣는 거예요.

주의 성실하심을 새삼스럽게 그걸 확인할 필요도 없이 이미 합격된 자는, 모든 것이 성실함으로 이미 일하게 돼있습니다. 관리를 내가 하는 게 아니다. 주께서 관리하시는데 어떻게 하신다 했습니까? 나를 뭐 되게 한다? 더욱더 죄인 되게 해서 나는 지금 당장 죽어도 손해 볼 것 없이 은혜 받은 거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식으로 쉽게 말해서 망해도 계속 망한 자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까도 했지만 왜 너는 천국을 원하느냐? 물었죠. 그러니까 기쁨이라 하는데 왜 너는 기쁜데? 할 때 이걸 라캉이나 프로이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향유’라 하지요. 기쁜 이유는 이것이 ‘리비도’라 했습니다. 리비도란 새로운 용언데 프로이드가 이런 용어를 쓰는데. 사람이 기쁜 이유는, 자기 몸이 나라는 게 있으면 안 기뻐요. 나를 늘 챙겨야 되니까.

그런데 내 몸이 해체되면서 이것이 번식될 때 그게 인간의 리비도거든요. 생식에 따른 기쁨이다. 나는 간데없고 나의 기쁨만 온 천하에 온 벽에 확 튈 때 그게 기쁘다는 거죠. 그게 뭐냐? 생물학적으로 계속 새끼 까고 번식할 때 그게 가장 기쁘듯이 그런 기쁨이 있는데, 문제는 그것이 거세된다는 거. 이 거세된다는 기쁨이니까 한시적 기쁨이니까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불안이 생겨요.

기뻐해야 될 내가 기쁨이 유지되지 못하고 언젠가 죽음을 통해서 끝장난다는 것이 나에게 심각한 불안이 돼요. 너무나 심각하고 불안하기 때문에 그걸 잊어버리기 위해서 일시적인 기쁨을 찾기 위해서 타인의 욕망에 기댄다. 이게 라캉의 후기의 이론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기쁘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왜 설교하느냐? 기쁘기 때문에. 뭐든지 기쁨 없이 억지로 하는 것보다 기뻐서 한다. 왜 기쁘냐? 내가 없어지고 나가 더 확대되니까 기쁘다. 이래 돼요. 그런데 그 기쁨은 바로 뭘 일으킨다? 그 기쁨이 없어지는 순간을 기대하니까 이게 굉장히 불안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시간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여러분들이 불안하든 우울증이 걸리든 무슨 짓을 해도 주님의 성실하심은 여러분의 그런 형편에 훼방되지 않고, 방해받지 않는다는 거예요. 아무리 한석봉이 까불어도 한석봉의 엄마 떡을 썹니다. 왜냐하면 그게 주무기기 때문에 깨끗하게 썰지요.

우리의 합격증은 내가 만드는 것 같으면 내가 합격되려고 애 쓸 것 같으면 우리는 불안해서 못 삽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내 가슴팍에는 ‘축 합격!’ 천사도 흠모함. 저건 무슨 복이 많아서 저런 복을 받았노. 야곱아. 하는 식으로 이미 우리는 새 이름으로 합격이 이미 보장 받은 채 우리는 불안에 떨든 뭘 하든 간에 잠이나 주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