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제 4강
어제 중요한 내용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습니다. 너무 많은 내용을 한꺼번에 들어서 혼동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끝부분에서 이야기 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증거를 내가 만들어 낼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2:24,25을 보겠습니다.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사람으로부터, “나 좀 알아줘. 나 좀 알아달란 말이야”라고 할 필요가 없다는 이 말은, 일을 해도 누가 일을 하느냐 하면 주님 쪽에서 일하시면서 다가온다는 식으로 구원도, 천국도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사람들의 협조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알아달라는 요청이 없으면 일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어떤 상태인지를 친히 아시기에, 인간 쪽에서 무슨 짓을 하든지, 무슨 소리를 하든지 다 아시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네가 왜 그렇게 나오냐’고 묻지를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쪽에 대해서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냥 다가서서 일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퍽 기분 나빠 합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무시해도 너무 무시한다고 나옵니다. 어제 한 것 중에서 중요한 것을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인간은 단편적입니다. 이어졌다, 끊어졌다를 반복합니다. 24시간 주님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 생각하다가 저것을 생각하다가 또 다른 것을 생각하는 식으로 단편적인데, 이 단편적인 것을 가지고는 자아가 못 견디니까, 끊어짐이 없고, 단편적이 아닌 하나의 완결된 덩치를 나의 것으로 삼는데서, 나는 저런 덩치와 동일하다고 간주하고 싶을 때 약간의 안정감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환상이고 허구입니다.
내가 큰 덩치(구원받았다는 나)를 내가 믿을 때, 나의 이런 믿음이 과연 온전한 믿음이냐를 확정지어줄 수 있는 또 하나의 나의 시선이 또 필요합니다. 이렇게 되면 도대체 ‘나’가 몇 명입니까? “천국 가는 성도가 바로 ‘나’자신이라고 믿는 그 믿음만큼은 변함이 없다고 내가 간주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말이 안 되지요. 이걸 가지고 자꾸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데 오죽 불안했으면 이렇게 ‘믿습니다’가 나오겠습니까?
시편에서는 대부분이 ‘믿습니다’가 별로 안 나오고 ‘주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셨습니다’가 나오고 그래서 ‘나는 찬양’합니다’가 나오는 게 특징입니다. ‘내가 의지(혹은 의존)합니다’는 나오는데 의지한다는 것은 의지하는 ‘나’가 아니라, 그 대상이 ‘나’는 아무리 나를 조립해도, 온전한 ‘나’, 괜찮은 ‘나’를 소지할‘수가 없는 겁니다.
소유하다가 빠뜨리면 ‘나’는 어떻게 됩니까? ‘이것이 온전한 성도됨의 모습이고, 나의 미래의 모습이다’라고 가지고 다니다가, 나중에 죄를 짓는다든지 무슨 일을 만나서 덜렁 깨져 버리면 ‘아이고, 10년 동안 믿은 것이 허사구나’ 하고, 신주단지, 보물단지 같이 믿던 것이 깨졌을 경우를 어떻게 할 겁니까? 뭘 들고 다니지 마세요. 들고 다닐 필요 없습니다.
시편에 나오는 성도들, 이미 예수님의 영을 미리 받은 사람들의 특징은, 내가 나를 어떻게 구축하느냐에 급급한 것이 아니고, ‘나에게 향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이렇게 복잡하고 치밀하고 엄청나게 매일같이 이런 일들을 쏟아지게 하시는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주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라고 되는 겁니다. 그것만 여러분이 정리가 되신다면 오늘부터 계속할 시편강의에 대해서도 잘 이해가 될거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시편 1편에 봅시다. “복있는 사람은 … .” 이렇게 나오죠. “복있는 사람은 … ” 끝부분에 보면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제 했던 강의를 생각해 보신다면, 복있는 사람이라 하는 것은 ‘야! 복을 받았구나. 복을 받아 챙기자’라는 쪽으로 우리가 생각했던 복, 내가 평소에 원했던(이 원함이란 나를 기쁘게 하는것) 것을 주시는 것
교재 1페이지를 보시면 칸트(1724-1804)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자신을 절대화 하지 않고 상대화 할수 있는가를 생각했다.” 왜 자기를 상대화 할 것을 생각해야 하느냐 하면 사람이 다 알수 없는 것이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남아 있으니까 인간은 신이 아니라는 겁니다.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 어떻게 이것이 ‘나’라고 절대적으로 확정지을 수 있느냐는 겁니다. 확정지으면 진리거든요. 그런데 진리를 모르면서 어떻게 진리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를 연구한 사람입니다.
세상 전체를 다 모르면서 어떻게 내가 가지고 있는 부분을 가지고 전체 진리를 끄집어 낼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인식능력으로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을 나누어 버렸습니다.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을 현상계라 하고,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을 예지계라고 해서, 그것은 인간이 알 수 없기에 미지의 것으로 남겨 두라는 겁니다. 남겨두는 그 겸손이 바로 신이 원하는 인간이라는 겁니다.
‘안다. 안다’ 하지 말고 ‘제가 뭘 알겠습니까, 모릅니다’는 식으로 하는 것이 신이 보시기에 인간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진리답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두 세계를 연결하는 고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 고리를 ‘판단력’이라고 했는데 이 판단력이 둘로 됩니다. 교재 2페이지에 보면 하나는, 장미의 예를 들었는데 ‘장미가 아름답다’ 와 ‘장미가 빨갛다’는 두 가지의 예를 들었습니다.
‘빨갛다’는 것은 장미는 다 빨갛지요. 빨간 장미를 노랗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백사람에 물으면 백사람 다 빨갛다고 합니다. 물리학자들이 연구해보니까 가시광선을 빨간 파장만 반사해 내면서 빨간색만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칸트가 이런 연구를 할 당시는 뉴우턴, 갈릴레이등의 과학이 한창 인기를 얻을 때입니다. 철학이 왜소해지면서 ‘과연 과학이 전부냐’는 반발로서 나옵니다.
빨갛다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아름답다고 할 때, 장미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장미를 사들고 올 때, 돈으로 바꿔오면 좋을 것을 뭐 때문에 이런 것을 사오나, 하면서 장미를 안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름답다’는 가치판단은, 아름다움에 대한 증거가 있어서 누구나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사물에서 말고 다른 데서 내려 받은 자기만의 신적인 연결고리(매체)로 인하여, ‘저것이 아름답게 보여진다’고 한 겁니다.
칸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갑니다. 믿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믿는다는 것은 누구나 믿을 수 있는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거죠. 그것은 하나의 과학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럴 경우는 믿는다고 하지 말고 납득한다고 해야 합니다. ‘나는 비행기 파일럿이 무사고 비행할 것을 나는 납득한다. 왜? 확률적으로 사고가 적으니까. 확률적으로 사고를 많이 내는 비행기를 나는 안타겠다.’
나는 믿습니다, 할 그때의 믿음은 예지계의 믿음이 아니고, 확률적으로 통계에 의해서 제일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 믿는다는 것은 예지의 세계에서 누구나 믿을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예지의 세계(특수세계)에서는 신, 영혼불멸, 자유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몫으로 남겨두는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알수 있는 진리의 전부라고 칸트는 본겁니다.
들어 보면 그 말이 진리 같은데 그것이 나중에 깨집니다. 칸트는 ‘자기의 낮춤을 더욱 더 깨닫는 그것이 신자로서의 할일이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하고 똑같아요. 그것이 나중에 깨져 버립니다. 그렇게 생각했던 신, 영혼불멸, 자유가 실상은 깨어진 자기 주체를대충 봉합하고 연결시키기 위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외에 모르는 미지의 부분을 통합시키는 것을 신의 영역이라고 간주해서, 그것마저 아는 나를 진리를 아는 나로 세우기 위한 방도에 불과한 겁니다. 전 시간에 이야기한 종교성에 불과한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해도 ‘그게 뭐가 틀리는데요’ 라는 식으로 잘 이해가 안 될 거예요. 그런데 오늘 시편 1편에 보니까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라는 이것은 내가 뭔가 아쉬운 것이 있고, 반듯하게 살고 싶다는 나의 여망에 필요한 복이 아니라,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고” 그 다음에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는 아이디어는 주님께서 나도 모르게 이미 계획 잡힌 것입니다.
칸트와의 차이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오늘날의 정신분석과의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나도 상관없는 것을 덜렁 복이라고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시편은 ‘믿습니다’가 적고 무엇이 많으냐 하면, ‘주께서 이렇게 행하셨으니 찬송합니다’는 내용이 많다고 했습니다. 그때 주께서 행하셨다는 말이, 내가 반듯하게 살겠다는 나의 소원이나 희망과 일치되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원하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택배처럼 전달해 놓고 “먹어라. 이것이 복이다”고 덜렁 주신다는 겁니다. 오는 복을 열어보니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고 의인은 심판을 못 견딘다”는 이런 내용이 나`오더라는 말입니다. 악인 못잡아 먹어서 환장한 인간이 있습니까? 왜 그것을 복으로 내려 줍니까?
일요일에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악인! 너는 죽었어!’라고 하면서 들어오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주여, 오늘도 주일 출석했으니 한 주간동안 복 내려주시고…’ 이런 기대감으로 오는 것이지 악인에 한이 맺혔다는 식으로 시편 1편의 복을 기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식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주여, 오늘도 주님을 찾아 왔으니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 되게 하옵소서.’ 그러한 소망을 품고 내가 희망하는 반듯한, ‘지금보다 더 살기 편한, 경제적으로 부유한 내가 되게 하옵소서’라는 식으로 기대를 품고 교회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기를 원하는 그것은 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내가 평소에 분열된 나를 봉합하기 위한 임시조치란 말입니다. 돈 없어서 못살겠으니까 돈 달라는 거예요. 돈 없어서 분열되어 있으니까 불안해서 못살겠다는 겁니다. 내가 좀 안정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데, 오늘도 기도 할테니까 돈을 달라고 돈의 복을 퍼부어 달라고 오는 거예요.
그런데 와서 보니까,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라고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시편은 우리와 관계없는 엉뚱한 소리를 다 하고 있습니다. 그 집단 내에 내가 속해 있으면 그 집단이 잘되는 것이 내가 잘되는 것이라고 여기는 그것을 ‘동일시’라고 했습니다. 동일시(상상계), 곧 내가 되고 싶은 타인과 동일시함으로서 내가 되고 싶은 타인의 속성과 욕망이 곧 나의 욕망이라고 임시로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래야 그 안에서 내가 동일시하는 그 대상 안에서 일시적으로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큰 교회 당회장을 보면서, ‘나도 당회장이 되고 싶다’ 할 때에 그 상상 하는것 만으로도 목회하는 목적과 도전하는 비전이 발생하면서 목회하는 보람을 느낀다고나 할까? 이것이 목회자의 분열된 주체입니다.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이것이 기뻐서 목회하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내 교회를 갖고 싶은 겁니다. 내가 당회장이고, 내가 독점적으로 설교하는 나만의 교회를 갖고 싶다는 겁니다. 만약 협동목회를 하게 되면, “네 설교 좋아하는 교인들 다 데리고 나가라. 다 가지고 나가라”고 하면서 자기 혼자 하는 자기교회, 내 교회를 갖고 싶은 겁니다. 그것을 주의 복이라고 합니다. ‘주께서 나에게 이런 복을 주셨군요.’ 아닙니다. 요한복음 2:24에 뭐라고 했던가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시를 사람에게 측정하거나 시험할 필요 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계획한 것을 우리에게 들이닥치는 식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교재 19페이지, 시편 52:7에,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던 자라 하리로다.”
그 밑에 보면 시편 60:11에,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그 위 중간에 보면 시편 39:6에 보면,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사람들이 평소에 뭘 원하고 있는지 시편에서 하나님이 모를 리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다 아십니다. 아시는데 왜 사람들이 이렇게 자기 것으로 안심을 얻으려고 하게 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런 사람들이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게 하는 방도가 그 방도라는 겁니다. 말이 갑자기 어려워졌는데요.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는 것이 복인데, 하나님은 어쨌든 악인과 선인을 나눕니다.
그런데 우리보고 새삼스럽게 나누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부터 어떤 증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을 나누는데, 악인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고, 의인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만, 그것을 복으로 우리에게 통보해주는 겁니다. 악인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보다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구원하는 일을 좋아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생각하는 의인의 무리에 포함되지 못하게 한다는 그 분류작업이 심판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너희가 알았으니 얼마나 복되냐, 라고 다가옵니다. 이것을 복으로 알아들은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복 있는 자는 … .” 이렇게 나오면 그 뒤의 항목은 본인이 다 써버립니다. 그 빈칸을 자기가 다 메웁니다. 복있는자 뒤의 빈칸들이 있으면 그 빈칸에, 서울대학에 들어가고, 공부 잘하고, 졸업해서 돈 잘버는 회사에 취직하고, 20대에 결혼하고 등등, 자기가 채우다 보니까 칸이 모자라니까 여기서 쫒겨나는게 있습니다. “악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는 그만 추방되어 버렸습니다.
교회 부흥되게 해주시고, 헌금 많이 나오게 해주시고…, 죽 나오다 보니까 뭐가 하나 툭 떨어지니까, 나가 임마, 하고 차버리는 겁니다. 주체가 분열된 우리가 봉합하기 위해서 타인의 욕망들을 끌어다가 계속 쌓다 보니까, 발길에 채여서 추방되고 나가떨어지는 것이 뭐냐? 주님이 밖에 쫒겨나 있습니다. 주님이 왜 쫒겨났는가를 보니까, “사람의 재물은 헛됨이니이다”는 그 소리를 했다고 ‘나’에게 쫒겨나 버렸습니다.
“재물이 있어야 현실적이지, 당신은 비현실적인 소리를 하지 말라. 돈 없이 사는 놈 누가 있냐”는 겁니다. 우리가 시편을 보고, 시편을 포함한 모든 성경을 봐야 되는 이유는, 첫째는 우리가 왜 악인인가를 알아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도 모르고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 하거든요. 얼마 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나는 죄인입니다” 하면서도 “나는 말씀에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말씀에 관심이 없는데도,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것은 어떤 논리에 의해서 그렇게 하느냐. 아하! 나름대로의 의인과 죄인을 말씀과 관련짓지 않는 겁니다. 그것이 라캉에 나옵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면 그것은 의인이고, 자기를 슬프게 하면 그것은 악이 되는 겁니다. 무조건 나를 건드리고, 나를 불쾌하게 하면 악인이 되고, 나를 기쁘게 하면 그것이 다 좋은 사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누구 위주냐, 내 위주 아닙니까? 그런데 그 자체가 창세기 3:23에 의하면, 이미 에덴동산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흠뻑 담은 채 밀가루 부대를 찌르듯이 푹 찌르면, ‘아, 이 따위 사고방식으로 하기 때문에 추방될 수밖에 없었구나’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 그 방식입니다. ‘아, 이런 사고방식이니까 쫒겨나도 싸지’라는 그것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겁니다.
‘말씀에 관심 없고 누구든지 나를 기쁘게, 편하게 하면 그것을 복이라고 하고, 나를 슬프게 우울하게 하면 그것을 악이라고 본다.’ 그것은 바로 시편에서 이야기하는 악인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제가 곧바로 시편에 들어가기가 겁이 납니다. 무슨 오해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시편 초반부터 이미 하나님의 관심사는 우리의 평소 관심사와 다르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에덴동산에서 생명나무와 함께 있는 분이고, 우리는 거기서 추방된 사람인데 사고방식이 같을 리가 없습니다.
다르다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서로 적이 됩니다. 소쉬르라는 언어학자는, 의미라는 것은 차이에서 나고, 변별성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차이정도가 아니고 대립된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서로 반대가 되고 등 돌리고 대치해서 그냥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매일같이 우리 내부에서 서로 충돌하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복과 우리가 원하는 복이, 의인으로서의 복과 악인으로서의 복이 수시로 매일 충돌해서 항상 우리가 깨어지는 이것이 복입니다.
깨어지면서 우리가 뭘 느끼는가? ‘주여, 내가 전에 몰랐던 죄를 비로소 내가 알았습니다.’ 물론 그것도 그 시점까지 알고 있던 죄입니다. 그것이 업그레이드 되어서, 업그레이드 된 죄가 되는데, 죄를 알았다는데서 기쁜 것이 아니고, 그 죄마저 능가하는 합격증을 가슴팍에 붙여준 상태에서 합격증이 왜 위대하고 고귀하냐를 드러내는 식으로, 합격증이 붙어 있는 나를 뒤에서 갉아 먹는 식으로, 시편이라는 개미들이 들러붙어서 갉아먹는 식으로, 합격이라는 그것만 드러내서 ‘할렐루야’ 하고 찬양할 수 있도록, 나의 것이라는 이것은 아예 죄 덩어리인 것을 더욱더 확실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시편은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 마음 편안하게 주무실 분들은 주무시면서 그냥 편안하게 들으세요. 그렇다면 당신의 말대로라면, 아예 우리 힘으로는 의인이 안 되고, 즉 추방되었기에 의인으로 돌아갈 수가 없고, 의인이 될 수 없다면 우리는 결국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인데,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의인이 있다고 하고, 분명히 우리 힘으로는 의인이 안 되고, 그런 말이 아닙니까?
의인 되고 싶어도 안 되고, 속성 자체가 그러니까. 그런데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의인이 있다고 하고. 그러면 의인은 어디 있느냐, 어떻게 만드느냐, 그 말입니다. 그게 시편 2편에 나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나옵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자”, 동사가 두개 나오니까 복잡하니까 이것을 줄이면 “기름 발린자”가 됩니다. “기름 발린자”가 등장합니다. “기름 발린자”가 등장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는, 즉 유일하게 단독으로 그분만이 기준이 됨을 언급하는 거예요. 그게 “기름발린자”입니다.
시편 20:6에 봅시다.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바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시편 2:7에 보면,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기름부음을 받은자” 만을 하나님께서는 유일하게 아들로 간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을 교인들이 잘 못알아 듣습니다. 지상에 있는 자기를 아들로 여기면서, “제가 아들 맞죠?”라고, 현재 지상에 있는 것, 현재 존재하는 것에다가 하나님이 추가적으로 “아들 해줄게” 이렇게 나오는 줄 알고 있는데 성경의 하나님의 아들은 지상에 없는 분인데 위에서 내려오는 그분이 아들입니다.
지상에 그런 아들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위에서부터 내려 보내서 아들 중심의 나라를 새삼스럽게 구축하려고 합니다. 있는 세상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새삼스럽게 새로 구축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기존의 세상은 몽땅 다 불로서 태워버립니다. 아들과 기존의 세상을 바꿔버립니다. 그것이 히브리서 1:10부터 나옵니다.
히브리서 1:10-12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천하 모든 대자연과 위에서 내려온 아들의 세계와 맞바꿔 치기를 해서 한쪽(아들)은 남기고 나머지는 다 날아가 버리는 겁니다. 이 방식, 이 계획을 아는 사람, 이것이 복입니다. 이 지상에서 개척교회 하고, 사법시험 합격하고, 그런 것은 다 소용 없는 겁니다. 제가 과학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과학의 문제점은, 과학은 아무리 연구해도 거기서 악인과 의인이 분간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철학을 아무리 연구해도, 신이 어떻고, 인간이 어떻고, 마음을 낮추라고 하고, 불교에서 도를 닦아도 거기에서 저주받을 자와 복받을 자가 구분되지 않아요.
기독교도 마찬가지 입니다. 나 잘났다, 성화되었다, 이것만 주장해가지고는 자기 자신이 기준점이 되기 때문에 그것도 엉터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아들로서 저주받을 자와 복받을 자를 구분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겁니다. 하늘에서 따로 내려와야 된다는 겁니다. 지상의 큰 교회 하고 예수님하고 바꾸지 마세요.
시편 2:12에,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이것을 아는 자가 복있는 사람입니다. 이 내용이 들어 있는 말씀을, “복있는 사람은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참, 이게 뭐가 좋다고 묵상을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증권회사에서 묵상하고 펀드회사에서 묵상합니다. 날마다 펀드를 묵상하면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내 펀드가 올랐다. 주식이 올랐다.’ 묵상하는게 따로 있어요.
하나님의 계획이 아들과 세상을 맞바꿔 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고물이고 중고입니다. 우리는 폐기처분되어야 합니다. 리콜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폐기처분되어야 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수녀원에 있는 수녀들, 참 웃기는 아줌마들입니다. 그럴 이유가 안돼요. 그런 것이 왜 있느냐? 공동체운동이라는 것은 신의 존재하심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어떤 집단과 자기를 일치시킴으로 말미암아 신의 축복을 자신이 확인하려고 하는데, 그런 짓은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아래 있을 때에 예수님이 먼저 아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 이미 외부에서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왜 나다나엘이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합니까?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뭘 생각했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을 생각했습니다.
그 약속을 생각했기 때문에 나중에 나다나엘에게 하는 말이, “네가 놀라운 일을 볼것이다. 야곱의 약속대로 인자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볼것이다.”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한복음 1:50-5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나다나엘과 예수님과의 의사소통의 주제가 세상 볼일에 관한 것이 아니고 약속이 어떻게 주어졌으며 그것이 어떻게 성취되는가, 그 내용을 가지고 주님과 나다나엘이 왔다갔다 하니까 나다나엘은 “참 이스라엘이고, 간사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간사한 것이 없다”고 나오니까 그 본문을 Q.T해서 지킨다고 간사 안하려고 일부러 무뚝뚝 하려고 합니다. 무뚝뚝해야 구원받습니까?
그저 자기가 할 수 있는, 어떤 타인의 윤리나 도덕을 빙자해서 자기 것으로 실험해 보려고 합니다. 자기를 생각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을 고백하고 나타낸다면, 그 사람은 주님의 뜻이 아니면 그것을 기뻐하고 찬양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힘으로는 될 수 없는 겁니다. 악인이 의인되는 것은 인간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을 즐거이 묵상한다는 것은 도저히 부모로부터 타고난 우리의 성품상 이것은 우리에게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습니다. “아들에게 입맞추지 않으면 길에서 망하리라.” 이것을 어떻게 즐거워합니까? “펀드가 대박이 났다”는 이것을 즐거워하죠. “길에서 망하리라”는 저주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기쁘다는 사람은 합격된 사람뿐입니다.
합격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것은 다 불안의 요소가 됩니다. ‘아이고, 계속해서 입을 맞춰야 하는데….’ 이래가지고는 불안해서 못삽니다. 주체는 단편적이라고 오후 3시부터 4시까지 입 맞췄는데 그 다음에 좀 쉬는데 그때 예수님이 재림하면 지옥 가잖아요. 주체의 연속성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성실하게 일하시는 주님의 연속성이 우리를 건져냅니다.
따라서 신약에서 인간의 개체성이라는 것은 허물어져야 되고, 다만 주님의 속성으로 재조립되는 것이 바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개체는 없어지고 하나로 통일됩니다. 하나로 통일된 것을 신약에서 무슨 몸이라고 합니까? 그리스도의 몸. 개체는 사라지고 지체는 남죠. 팔다리.(지체, 사지) 사람이 개체를 그냥 놔두면 주체를 영속적으로 유지해야 할 부담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것을 찢어 버리는 작업에 나서는 거예요.
만들면 찢어 버리고, 만들면 찢어 버리고, 이미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인데 왜 거기서 따로이 개체를 만들려고 하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우리’라는 개념은, 없는 개념입니다. 우리는 악인밖에 안되는데, 악인밖에 안되지만 하나님의 약속가운데 악인이 생기고 의인이 생깁니다.
그러면 악인이 생기고 의인이 생기는 그 작업은 누구 몫이냐 하면, 일관된 여호와 하나님께서 왕이시니까(왕은 자기 백성을 만들어낼 임무가 있거든요. 일단 왕이 먼저고 백성은 나중입니다.) 왕이 먼저 있고, 그 왕이 하시는 일에 따라서 전리품으로 자기 백성이 생기는데, 생길 때 그 백성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호와가 나의 진정한 왕이며 나는 여호와 때문에 구원 받았습니다”라고 합니다.
교재 13페이지 중간에, 시편 20:7에 보면,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그 앞뒤에 나오는 모든 것이 다 주의 이름이 나오는 구절을 다 모았습니다.
16페이지 시편 91:14,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시편 106:8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그 큰 권능을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여기에서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재물이나, 막강한 무기, 무력이(말, 병거), 그런 것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가 의지할 것은 다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의지할만한 것은 다 뺀다는 말이죠. 그러면 요새말로 칼, 총, 탱크, 펀드, 주식, 부동산, 교회, 사람들, 군중들(집단동일시)을 대체할만한 또 다른 것을 하나님께서 뭔가는 주시면 좋겠지요.
지금 잘 들어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안 되잖아요. 내가 의지할만한 것을 의지 안하잖아요. 하나님이 의지할만한 것을 주신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그것이 내가 의지할만한 것을 줄때 우리는 안심을 하는데, 그런데 성경 시편에 보니까 우리가 의지할만한 것을 주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이 온다는 겁니다.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생각해보세요. “말, 병거, 탱크, 주식, 펀드, 부동산 같은 것들 다 의지 하지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의지할 만한 것을 주셔야죠” 할 때, 안줘야 돼요. 왜 안주느냐 하면, 주게 되면 나의 주체가 또 살아나요. 왜? 내가 기대했던 그것을 주께서 주셨기 때문에 나는 주신 분 보다 주신 그것을 더 기대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것은 어떤 노림수가 있느냐 하면, 나의 이름, 나의 주체, 나의 명예, 나는 이렇게 대단하다, 그것을 망가뜨리고 부서지게 하고 해체시키는 그 무엇이 다가올 때, 더 이상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내 믿음을 더 이상 의지하지 않게 되지요. 주님을 의지하지, 주님을 의지하는 나를 ‘안의지하게’ 된다는 말이죠. 날마다 부수는 방식으로 오는데 그것이 나의 이름, 사람이름이 아니라 누구 이름? 주의 이름입니다.
주의 이름이라는 것은 어떻게 생겼는냐고 묻는 것이 아니고, 내 이름을 박살내는 사건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이름이 주의 이름입니다. 더 풀이하면 하나님은 자기 언약밖에 몰라서 내(주체)가 뭘 원하는지는 안중에도 없고 성실하게 자기약속한대로 들이닥쳐서 에덴에서 추방된 우리의 것을 아주 작살을 내는, 아작을 내는, 박살을 내는 그런 사건, 사건으로 다가올 때 그것이 바로 주의 이름이 벌이시는 일입니다. 이게 시편에 나오는 주의 이름의 특징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새기고 또 새기고. 한번가지고 안됩니다. “목사님! 10년 전에 예수 믿었습니다.” 이거 아니에요. 10년 전에 예수 믿었으면 본격적으로 부서지고 또 부서지고 죽을 때까지 계속 부서지는 거죠. 주의 이름을 이런 식으로 모르는 채, 주의 이름을 믿는 사람은, 기도할 때 ‘예수 이름’ 붙였다고, 주문이나 부적을 붙이는 것 같이(중얼중얼 해놓고는 큰 소리로 “예수 이름으로!”라는 것을 붙이는 것으로 기도 되는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를 뭘로 물리칠까? 마늘로도 안 돼. 십자가부적으로도 안 돼. 나무 십자가 들이대도 안 돼. 옳지, 주의 이름으로 한다고 하더라. 주의 이름이 뭐라? 예수 이름이라 하더라.’ 그래서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 하거든요. 미국사람들은 화냅니다. “예수가 아니라 지저스(Jesus)야! 이 바보야! 지저스가 예수 이름이야.”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하니까, 발음을 못내는 사람들은 아예 구원을 못 받습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나올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제일 무지한 것이 뭐냐? 주의 이름이 뭔지를 몰라요. 시편에 이것이 왜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것도 모르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예수 이름만 부르면 되는지 알고 있어요. 젊은애들 찬양집회 한다고, 드럼치고, 기타 치면서 “주의 이름 높이세” 하거든요. 주의 이름이 뭔데? “몰라!” 발라드로 나옵니다. 아예 힙합으로 하지 그래요. “주의!!” “이름으로!!” “구원!!” “얻으리라!!”
그렇게 하는 것은 ‘나는 존재한다’는 것을 남에게 확인하고 싶어하는, ‘주체의 경련(발작)’입니다. 취직은 안 되고, 또 대학생활에서 시간이 되니까 교회에서 이런 발작을 하지요. 나중에 취직해서 회사에 들어가 보세요. 00회사 수련회가면 산위에 올라가서 “하면 된다!”고 외쳐야 됩니다. 주의 이름이 어디 있습니까? 사장님 이름이 최고죠.
어젯밤에 오랜만에 군대병영의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그런 것을 보면서 군대가기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트라우마(외상, 상처)라고 하죠. 군대에서 받은 정신적인 상처가 죽을 때까지 계속 갑니다. 그 외상을 잊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가 더욱 더 과거 군대생활의 흔적을 반복함으로써 잊는 방식이 구세군입니다. 제복입고, 계급장을 달고“딸랑딸랑! 사관님!” 그게 무슨 짓인지 몰라요. ‘나미아미타불’과의 다른 차이점을 몰라요.
주의 이름이라는 그 안에 무엇이 내포되어 있는가? 열대성고기압 구름 안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태풍(비바람)이 들어 있지요. 주의 이름 안에는 하나님의 약속의 태풍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상치도 못하고, 기대치도 못한 하나님의 계획이 들어 있어요. 그것이 우리에게 들이닥치면, 기름부음으로 들이닥치면 이것이 폭우로 쏟아져 버립니다.
쏟아지면, 그동안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애썼던 이 모든 것이, 그것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악인으로 분류될 수 밖에 없는 종류의, 하나의 발작이고 발악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미 합격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손 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제물도 원치 아니하고, 예물도 원치 아니하고 오직 한 사람을 준비했다는 겁니다.
시편 40:6,7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제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그분이 유일한 하나님이 아들이고 기름부은자입니다. 한 사람 그분이 오셔서 모든 말씀을 이룸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분이 만드신 그분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겁니다. 그것이 시편 71:16에 나옵니다.
시편 71:16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의 곧 주의 의만 진술하겠나이다.”
“주의 의”만 진술하겠다는 겁니다.
시편 71:18
“하나님이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그러니까 성도란 사람의 특징은, 내가 얼마나 주께 충성했느냐가 아니라, 주님께서 얼마나 우리에게 일을 벌이셨는가, 그것을 증거 하는 겁니다.
시편 73:20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리이다.”
인간이 이 땅에서 무슨 짓을 해도 주께서는 다 무엇으로 보는가? 멸시하고 무시합니다. 별로 그 가치를 쳐주지 않습니다. 시편 71:16에 있는 대로 “주의 의만 진술하겠나이다.” 주의 의로서 우리가 삽니다. 그래서 그 주의 의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만들어낸 나의 의는 그 주님의 이름에 의해서, 나의 의가 박살이 날 때, 내가 생각했던 나의 의, 나의 악 그것이 다 같이 박살 나 버려야 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나쁜 놈이라고 할 때, 그것은 내 기준에 의해서 하거든요. 내 기준은 이야기할 필요 없어요. 주님께서 이런 인간은 나쁘다, 하면 그걸 그대로 수용하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개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속성이 밀려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한 몸이고, 지체라는 것은 머리라는 물탱크에서 쏟아지는 물(피)이 쏟아지듯이 온몸의 실핏줄을 통해서 다 가잖아요.
마찬가지로 주님이 알고 있는 그것이 우리지체에게 퍼지게 되면, 내가 알고 있던 선과 악은 사라지고, 주님의 의만 우리를 통해서 활동할 때, 우리의 모든 활동은 주님이 공급하시는 은혜의 힘으로 활동하는 겁니다. 이게 어려워서 설명이 필요한데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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