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고자 하는 것은 제목 그대로 80여 명의 신학자인데, 사실은 신학자가 80여 명이 아니겠죠. 그래서 제가 지금 생각하는 것은, 100여 명의 신학자들이 아마 등장할 것 같아요. 왜냐하면 짧은 짧은 기간이 있기 때문에, 짧은 짧은 분량이기 때문에, 계산할, 넣을 거냐 말 거냐 하면, 숫자가 늘어나니까 특히 많은 숫자의 비중은, 현대 신학자들에게 많이 쏠릴 겁니다. 현대 신학자들, 하비칵스로부터 해서 존 브라운, 소위 한국의 보수주의 신학교에서는 자유주의라고 치부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도 될 수 있는대로 빠지지 않고 다 끄집어낼 거예요. 그냥 반대한다고 그냥 반대하지 말고 그쪽의 의견은 어떤 아이디어를 가지고 기존의 신학에 대해서 반발했던가. 그쪽 편에 서서 그들의 입장에 서서, 다시 소위 정통이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그런 것도 우리가 필요하거든요.
그런 신학자까지 포함시키면, 약 한 100여 명. 그런데 그 신학자들을, 이렇게 공부할 필요성이 뭐가 있느냐라는 생각부터 우리가 해야 돼요. 그럼 니는 니대로 알고 나는 나대로 알면 되지, 그쪽까지 이렇게 답습하고 이해할 필요가 뭐가 있겠나 생각이 드는데. 사람들의 그 사고 방식이 전부 다, 관행과 관습에서 나온 거예요. 이게 본인도 모르게 전통에서 왔는데, 앞에 하나 붙인다면, 공동체입니다.
직물 회사 또는 해변에 고기 잡는 사람들. 고기 기술을 어떤 천재가 나타나서 고기 기술을 아는 게 아니고 쭉 대대로 이어지는 기능과 기술이 어릴 때부터 습득이 되게 되면, 그것이 자신의 지식으로 이게 고정화됩니다. 또 그것 가지고 또 삶을 이어나가고. 그러니까 이것은 고기 잡는 기술 농사 짓는 기술뿐만 아니고 정신적인 기술. 이런 것은 관행과 관습 전통에 의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이 앞에 공동체가 중요한데요. 이 공동체는 계속해서 이제 역사를 가지고 이어져 오죠. 역사.역사적으로 관행적인 관습에서 전통적으로 이어오게 되는데, 여기서 풀풀 나타나는 이게 솟아나는 이 개념이 뭐냐 하면 이게 종교라는 겁니다. 종교. 종교의 핵심은 신을 섬기는 거예요. 신을 섬기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하면 불교는 신이 없잖아 그렇게 이야기하죠. 불교는 신이 없는 게 아니고 신을 의식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불교는 신이 없는 게 아니고 신이 있다고 하는 것들 속에는 우리는 달리 생각하자 이렇게 되는 겁니다.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 “전부는 신이 있다고 하지만 우리 불자들은 신이 없는 식으로 한번 인간이 무엇이냐를 생각해 보자”라고 하니까, 신이 없는 게 아니고 신을 의식하는 거예요. 신을 의식한다. 그러니까 이것이 뭐냐 하면 부자연스럽죠. 신 있다. 신 없다. 인간은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자연스럽고 어느 것이 부자연스러우냐 하면은. 신이 있다. 신 있음이 이것이 자연스럽고 신이 없으면 이것이 부자연스러운 거예요. 그래서 이 부자연스럽게 있기 때문에, 이 불자는 노력해야 됩니다. 계속해서 노력을 해서, 남들은 다 신에게 비겁하게 특히 신을 믿는 것은 어떤 비겁한 행동이거든요.
자기가 책임져야 될, 모든 운명을 자기 외부의 다른 초월적인 것에다가 모든 걸 맡기고 자기는 살짝 빠지고 싶은 그 충동. 그런 속성. 얼마나 비겁합니까? 정말 용기 있고, 정말 남자답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초월하고 싶으면, 신마저도 다룰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 그야말로 이건 니체가 말한 초인 대단한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것이 굉장히 자연스러운데 본인도 노력하고 주변 사람, 나는 신이 없어 신이 없어 라고 노력을 해야 된다는 것은 뭔가 신을 생각하지 않는 게 좀 약간 어색해요. 인생 자체가. 인생 자체가 굉장히 어색합니다.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그래서 스님들은 머리를 깎잖아요. 머리를 깎고, 보통 내 교회에서는 중이라고 하지만 여기서는 이게 시민단체이기 때문에, 스님이 스님들은 머리를 깎으시고, 옷도 남루한 옷을 입으시고, 그리고 생활도 포기하시고, 진리가 무엇이냐 참된 도는 무엇인가 찾아가는데 억지스러워요. 도안거에 들어가면, 벽에다가 점 하나 찍어 놓고, 거기에다가 꿇어 앉아서 수련하고. 장군 죽비로 대나무 쳐가면서 그걸 집중해야 알 수 있는, 그 도. 뭔가 자연스럽지가 않아요. 상당히 자연스럽지 않아요. 도를 닦아야 되는데, 그러면 도를 안 닦으면 어떻게 하는가? 도를 닦아야 된다는 자체가 부자연스러워요.
애들부터 태어나면서부터 도 안 닦고 태어났으면 좋겠는데, 애들은 그냥 동물처럼 살잖아요. 그러니까 차라리 동물처럼 사는 게 우리의 본모습이라고 하면 얼마나 쉬워요. 쉬운데 이걸 억지를 부려서 도를 닦아야 하니까 본인도 괴롭고 주위 사람도 괴롭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해야 되고, 그렇다고 해서 정답은 없고. 이왕 청춘은 절에서 다 보내고. 이미 지나간 세월 보상도 안 되고 골치 아픈 겁니다.
결국은 그쪽으로 또 돈과 권력을 또 추구하게 되고, 청춘을 팔아야 하는데. 결국은 신이 없다,신이 있다. 하는 이것은 전통적으로 볼 때에, 이거는 제 의견이 아니고 모든 학자들의 의견이지만, 전통적으로 볼 때에 신이 있다고 하는 것이 전통입니다. 제가 신이 있습니다라는 말을 안 했습니다. 말을 한 게 아니고, 신이 있어. 그러니까 “너는 내가 대대로 한 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말을 들어. 니가 어린 게 뭘 알아.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계셔서 신이 있어서 신이 있어서 우리의 모든 축복을 주시는데 니가 나이 어린 게 뭘 알아 그냥 우리 집안의 전통이야.
너도 나중에 어려서 모르지만 커서 어른이 되면, 신이 계신 걸 니가 알게 될 거야. 그때 엄마 아빠 생각해. 신은 있는 거야”라고 과정과 간섭 설득으로 계속 가는 거예요.
과학적 사고를 가진 고고학자들이 연구를 했어요. 연구를 하니까 모든 고대 모든 민족, 지금에 있는 모든 민족들은 다 신이 없는 게 아니고 뭐가 있습니까? 신이 있는 거예요. 신이 있다는 사람들이 있어요. 신이 있는 게 아니고, 신은 있고 없고는 그건 증거 찾을 수가 없으니까 신이 있는 게 아니고 신이 있다는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겁니다. 대다수를. 그런데 이 신이 있다는 이 전통이 이게 관념이 되고 이게 뭐가 되느냐하면 이게 철학이 돼버려요. 철학이 되니까.
서양의 예를 들면 15세기 16세기에서, 이 관념과 철학이 이것이 구름 타고 위로 올라가요. 구름 타고 위로 올라갑니다. 열대성 저기압은 위에 하늘이 있죠. 이게 위로 올라가 버리면, 밑에는 뭐냐 하면, 밑에는 뭐가 쥐느냐 하면은 과학이 주도권을, 과학이 합리적 사고방식이 주도권을 쥐게 돼요. 합리적 사고 방식에서 제가 과학이라고 말을 했지만, 사실은 과학만 나온 것이 아니고 행정, 여기 관료 체제, 이런 것들. 그리고 이런 세분화 된 모든 여기서 다 이거 과학적인, 그리고 과학쪽에서 다 파생돼서 나오는 거예요. 특히 이 국가 행정 같은 게 다 나옵니다. 치안 문제 세금 거두는 문제 나오거든요.
그러면 이 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위로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신 문제나, 종교 문제는 위로 올라갔다고 제가 했으니까, 이게 사라졌다는 말은 제가 안 했죠. 그냥 열대성 저기압처럼 구름이 위에 있는 거예요. 위에 있다가 경제 또는 사업 이런 것이 잘 안 될 때는, 갑자기 먹구름이 곧 틈새를 비집고 다시 신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사업이 잘 안 되고 자식들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는다든지, 집안에 부부 간에 갈등이 있다든지, 자기가 치료할 수 없는 어떤 질병이 있다든지 하게 되면 누구를 찾아요? 다시 열대성 저기압.떠 있는 그 신을 다시 찾게 돼요. 찾다가 얼추 문제가 해결됐다 싶으면 다시 어디로 갑니까? 참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하고 감사하다는 말 잠시 드리고 그다음부터는 새벽 기도 안 하고 다시 이쪽으로 되돌아와 버려요.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우리가 해야 될 수업의 방향은 이제는 확연해졌습니다. 뭐냐 하면은 신과 합일되었던 옛날 고대 사회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신이 그냥 필수적인 것이 아니고 그냥 기억 속에만 남는 하나의 전통 관습으로 이게 위로 올라가 버리고, 실용적인 것. 생활에 지금 딱 필요한 것. 이것이 어떻게 주도권을 쥐게 되었는가를. 여기서 갈라진 요거. 이 갈림길. 이 갈림길을 파악하게 되면, 앞으로 모든 이런 세상과 종교를 한꺼번에 아우를 수 있는 아이디어를 얻게 되는 겁니다. 아이디어를.
지금 우리 개설한 학문을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다른 개설된 학문들을 보면, 전부 다 이쪽이 이 갈라진 길을 모르고, 그냥 이것만 집중하는 거예요. 이게 당장 필요하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 머리 위에는 이런 게 있는 거예요. 양쪽 다 알아야 이쪽의 의미는 위쪽에서 파악하고 저쪽의 의미는 밑에서 파악하게 되면, 일거 양극 두 개를 한꺼번에 다 알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기회가.
그러니까 그걸 찾아내고 이 갈라진 요걸 찾아내는 거예요. 여기 찾아내는 거예요. 애들이 묻죠. “공부해!”하면 “공부해서 뭐 할 건데” “공부하면 출세하지” “출세해서 뭐 할 건데?” “출세하면 돈 벌지” “돈 벌어서 뭐 할 건데?”. 점점 부모가 약간 성질도 나면서 자신이 아는 것에 바닥이 드러난다는 불안감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그딴 소리 하지 말고 니 크면 다 알게 돼! 지금은 내 시키는 대로 해! 이건 부모의 방침이야” 라고 하죠.
애들은 질문을 어려서 못 하지만, 사실은 애들이 질문하는 것은 바로 요 갈라지는 지점을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여기에서 삼각함수가 왜 나오고 양자 역학이 나오거든요. 갈라진 틈새에서. 이게 수학이 나오고 회계, 경영학 이런 게 다 나온다 이 말이죠. 근데 이걸 왜 하느냐“ 수학을 왜 하고 경제와 경영을 왜 하고 스포츠를 왜 하고 무역을 왜 하고 왜 공무원 시험을 왜 치느냐? ”돈 벌어! 그래야 돈 벌 수 있어!“ ”돈 벌어서 뭐 할 건데? 돈 벌어서 뭐 할 건데?“ ”인간이 돈 없으면 죽어“ 결국은 니 돈 없으면 죽는다는 이야기예요. 그러면 부모가 하는 것이 애들이 하는 말이, ”내가 부모한테 배운 것은 결국 딱 한 가지. 돈이 있으면 살고, 돈 없으면 죽는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품격이나 품위는, 돈이 결정하지. 아무리 믿음 좋고 아무리 착해도 돈 없으면, 이거는 찌질이다.
그러면 수단과 방법을 다 사용해서, 뭐만 했다 획득하면, 누구를 기쁘게 한다? 부모를 기쁘게 하는 거예요. 부모가 연로해서 추석 때 찾아오면, 역시 부모가 좋아하는 사람. 자식은, 돈 봉투 가져오는 자식을 좋아하고, 돈 없는 자식은, 내색은 안 하지만, 찾아오지 마라. 유산도 없어. 처방하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인생 살다 죽으면, 결국은 해답도 몰라. 본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위도 모르고, 아래도 모르고, 또 세상도 모르고. 그냥 부모의 세속적인 호응에 만족하기 위해서. 부모라는 추상적. 일종의 전통이죠. 전통적인 권위에, 맹목적으로, 사라질 권위. 부모 죽으면 그만이거든요. 사라질 권위에, 맹목적으로 맞춰주려는, 자기 인생은 없고 자기 주위 있는 시선을 맞춰주려는, 그러한 조작된 인생을, 평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내가 뭐냐가 아니라 남들이 나를 뭐라고 이야기하느냐에 말려드는 거예요. 그걸 프로이드는 트라우마라고 했어요. 어릴 때 상처, 상흔, 정신적인 상처. 부모가 죽어도 가상적인 부모가 있어야 그 허망한 빈자리를 채워서, 나의 삶에 동기를 부여한다고, 자기몸은 거기에 따라가 주는 거에요. 하나의 그거는 가정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가정의 문제가 아니고, 모든 인간이 어디서 갈라졌는가 하는 그 문제를, 그 문제를 우리가 이번 학기에 깊이 있게 들어갈지 안 될지 범위는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팔 때까지 한번 파보자 이 말이죠. 도대체 이거 없이는 존재 의미 없으니까. 팔 때 같이 한번 파보자 이 말이죠.
기원전 3만 5천년. 여기 교재 첫 번째 나오거든요. 기원전 3만 5천년인지, 4만 5천인지 이거는 아무도 몰라요. 그 창조론자는 3만 5천년으로 보지 않습니다. 기껏 해야 6천, 7천. 좀 이렇게 융통성 부려 보면, 기원전 만년, 그런데 고고학자들은 35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했고, 거기서 사바나 지역을 지나서, 35만 년 전에, 유럽에 크로마뇽이라는 현세 인류가, 3만 5천. 4만 5천 내지 3만 5천 전에 왔다는 겁니다. 그리고 빙하기가 만년 끝나고.
그리고 연대가 쭉쭉 늘어나는데, 그 연대를 그렇게 늘리시는 당신의 그 근거가 뭡니까? 하게 되면, 근거는 뭐냐 하면, 지금 현대에 주어지는 실험실에서 일어나는 그 주기가 고대에도 똑같이 반복됐다는 조건 하에, 이 환경이 동일하다는 환경 하에, 동일 반복설로 인하여 지금을 가지고 쭉쭉 동일하게 늘려보게 되면, 방사성 동위원소의 년수에 의하면 그렇게 된다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거는 문제가 크지요. 굉장히 그 문제가 큰 거예요. 지금은 모든 학교 학생들이 다 그런 식으로 다 배우니까. 그런데 하여튼 그게 틀리다면, 그럼 당신은 몇 년이야? 그럼 우리는 몰라. 모르면 입 다물어 이렇게 되거든요.
우리가 모르는 이상은 안다는 사람을 도용할 수밖에 없어요. 어디까지나 학문이니까. 학문은 정답이 아니거든요. 우리가 그 신학을 특히 기독교 신자가 신학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무슨 의미냐 하면은 신학을 한다는 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한 그 말씀과 말씀의 1대 1의 대응을 기피한다는 뜻이에요. ”나 말씀으로 말씀 가지고 주님과 교류할래“ 하는 것을 포기하게 되면 ”그러면 그냥 신학할래“. 신학이 실제적인 말씀 교류를 대체물로 등장하게 됩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강도가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십자가 달릴 때 강도가 있었거든요. 강도가 있을 때 그 예수님이 그 강도 보고 뭐라고 했냐 하면, ”니가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했거든요. 낙원에 있으리라 할 때 예수님이 다급해서 ”어이 강도 이리 와 너 지금 오늘 밤에 나와 낙원에 가야 되는데 니 삼위일체 배웠어 안 배웠어“ ”못 배웠습니다“.”이거 빨리 속성으로 배워야겠구나 빨리 삼위일체 배워!“. 그럼 삼위일체 또 후닥닥 가르치고, 그날 밤에 낙원에 갔습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교회에서나 신학교나 삼위일체 모른다든지, 알아도 안 믿는다든지, 처음부터 알고자 하지 아니 하면, 그것은 이단이다. 이렇게 규정할 수 있는. 그걸 퀘논이라합니다. 하나의 도그마. 도그마. 확실한 경계선. 이단과 이단 아닌 그 경계선은, 도그마로 하라는, 교회에서. 신학에서. 그렇게 될 때 그것은 실제 성경에 나온 내용하고 부합되지 않아요. 그러면 왜 그런 도그마. 그런 교리 체계를 왜 했느냐. 그 배후에 뭐가 있냐 하면. 교회가 있어요. 교회가.
신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구실 하에 실제로는 교회의 자기 정체성을, 신학을 통해서 굳어진 그 결집력으로, 정체성의 내용을 채우려고 그렇게 시도한 겁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그 교회에는 배후에 누가 있느냐 하면 국가라는 권력이 있어요. 국가라는 권력이 .그 국가의 권력의 총수가 누구냐 하면은 바로 황제입니다. 그러면 황제는 국가도 지고 뭐도 지고? 교회도 지고. 황제가 국가도 지고 교회도 짐으로 말미암아, 그 국가 내에서 안정적인 질서를 도모하게 되고, 그렇게 안정적인 질서로 말미암아 확립된 힘은 주변 나라를 침공해서 전쟁에서 노예를 얻을 수 있는 잠재력을 양성할 수 있습니다. 양성할 수 있어요. 이건 여러분들이 하나 알아두면 돼요. 국가라는 것은 어떻게 생기냐 하면, 국가라는 것은 전쟁을 통해서 성립되요. 전쟁을 통해서 국가가 성립되거든요. 전쟁을 통해서. 그래서 국가가 전쟁을 하지 아니하면 국가가 소멸해요.
자전거는 달려야 자전거는 이렇게 달려야, 이게 바로 서지요. 국가는 계속 전쟁을 해야 돼요.
경제 전쟁이든 좋고 사상적인 문화 전쟁. 무조건 전쟁을 하지 아니하면 거기서 힘이 결집이 안 되고 사상들이, 백성들의 사고 방식이 성립이 안 되고, 전쟁이 될려면 무엇이 있어야 돼요? 적을 만들어내야 돼요. 적을 만들어내면 다 같이 그 적을 공격한다고 정신이 팔려서, 이쪽의 생존에 불편한 생활을 국가 책임자에게 묻지를 않게 돼 있어요. 그러면 이것이 수천만 백성 국민들이 딱 하나로 돌처럼 딱딱하게 단결이 되면서, 여기서 뭐가 하느냐? 여기서 놀라운 초인적인 힘이 나옵니다.
그건 방금 이야기하는 것은 이제 고대의 힘으로 부딪히는 그건 국가의 생존 방법이고요. 현재는 뭐냐 하면. 현재는 어떤 방법이냐하면. 현재는 경제 방법입니다. 경제를 통해서 뭐를 생산하느냐? 잉여 생산을 하게 되면, 요 나머지에 있는 잉여 생산물이, 무기와 그리고 교류가 다른 큰 나라하고 이렇게 협상할 수 있는 큰 힘이 되기 때문에, 경제를 키우는 전쟁에 나서는 것이 국가가 계속 유지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국가의 행정실이나 최고회의 보면, 항상 현재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률은 현재 OECD. 현재 주요 국가에서 우리가 몇이냐? 국가 대통령은 항상 이것을 염두에 두어서 자전거를 페달을 계속 밟아야 돼요. 계속 밟아야 돼요. 그래야 일자리가 생기거든요. 얼마나 실용적입니까? 그런데 그게 만약 안될때는. 그 다음부터는, 갑자기 이렇게 계획대로 해야 되는데 갑자기 비가 안 온다. 비가 안 오면 대통령이나 왕은 무슨 짓을 해야 됩니까? 옛날에 조선시대 때, 비가 안 와서 가뭄이 들때는 그 왕이나 세자가 무슨 짓을 해야 돼요 기우제를 드려야 되죠. 기우제를 드리면, 그 순간 왕은 뭐가 되느냐 하면, 왕은, 천자가 돼요. 신의 아들 됩니다.
그래서 이 첫 번 강의하면서 이거 알아놓으세요. 모든 지도자는 신의 아들입니다. 근데 신의 아들인데 신에는 계보가 있어요. 신에는 계보가 있어요. 헤라도토스라는 헬라 역사학자가, 기원전 6세기경에 쓴 것이, ”신의 계보“입니다. 신의 계보가 그 시대에 왜 필요하냐 하면은, 신의 계보에 따라서 왕이 되게 되면, 그 나라의 역사는 그냥 세속의 나라가 아닙니다. 무슨 나라냐? 신성한 역사에 속한 신에 택한 나라가 돼요. 택한 나라라고 하니까, 이게 이스라엘만 이것이 나오는 줄 알았죠. 모든 나라가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니 신과 내 신의 깃발로 싸우는 거예요. ”여호와 니시“라 해서. 깃발로 싸우는 겁니다. 싸워서 이쪽 승리한 쪽이 진짜 신이고, 패배한 쪽은 가짜 신이에요. 이긴 자가 없는 자를 다 먹습니다. 왜 먹어야 되는가? 먹는 이유는 신의 뜻이기 때문에. 어떤 개인적인 탐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저걸 안 먹으면 우리가 믿는 신의 뜻에 위반한 게 돼요. 우리 인간의 정신이 그냥 신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신과 연결돼 있습니다. 그래서 다 먹어야 돼요.
이스라엘 나라하고 바벨론의 신 마르둑하고 붙었습니다. 누가 이기고 누가 졌습니까? 마르둑 신이 이기고, 이스라엘 여호와가 졌어요. 사무엘상 5장에 보면 다곤 신이 있어요. 다곤 신 블레셋. 지금의 팔레스타인 신하고, 이스라엘 여호와 신하고 붙었습니다. 누가 이겼습니까? 여호와가 지고, 블레셋 다곤신이 이겼습니다. 전리품으로 이스라엘이 신이 있다고 믿는, 그 언약 상자를 가지고 다곤신 앞에 세워둡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90%가 전쟁이었고, 그 전쟁에서 대부분이 이스라엘이 패배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땅덩어리 하나 가지고 있죠. 조그마한 땅덩어리 갖고 있죠. 거기에 비해서 주변에 있는 알라신을 갖고 있는 사람 나라는, 진짜 수백 배의 넓은 영토를 갖고 있습니다.
사람이 혼자 혼자 자기 의미를 가지고 버티면 나중에 몸이 아프든지 외로울 때는 한계가 있어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내가 사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신을 자기 하고 동화시켜버립니다. 동화시키면, 슬퍼도 울지 않고 힘들어도 견딜 수 있고, 7번 넘어져도 잠언서 나오는처럼 여덟 번 일어나고. 신을 믿게 되면 하나의 목적 의식이 생기고 의미가 생기기 때문에 인생이 힘들어도 버틸 수 있는 그런 초인적인 힘이 발휘된다고 전통적으로 그렇게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이라 하는 것은, 신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 아니고, 신이 있음으로써의 그 효과가 결국은 하나의 국가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이 된다는 거. 이게 역사적으로 제가 일부러 지어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역사에서 그 전부 다 그런 것을 다 언급을 하는 겁니다.
이 첫째 시간에 제가 쭉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흐름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80인의 신학자들의 이야기를 우리가 왜 들어야 되고 왜 해야 되는가? 각 시대마다 그들은 신을 이야기하는데, 이게 조금씩 다 달라요. 조금씩 다 다른데, ”80명 중에서 누가 정답입니까?“ 하고 묻는 질문 자체가 이것이 잘못된 질문이에요. 왜냐하면 다 틀릴 수가 있기 때문에. 다 틀릴 수 있거든요. 그래서 신학에서 내린 결론이 하나 있습니다. 신학자의 결론은 뭐냐 하면. 신학이란 그 시대에 필요한 대목만 발설해서 신학이 된다. 그 시대에 필요한. 그걸 이제 토착화라 해요. 신학의 토착화. 그 시대에 필요한 것만 한다.
그러면 만약에 대전에 어떤 교회가 있다면, 아프리카에 어떤 나이지리아의 선교사가 교회를 지었다면 거기서 나오는 설교가 같을까요? 다를까요? 신학이 다를 수밖에 없죠. 호응을 해줘야 되니까. 사람들이 호응이 안 되면 수입이 없으니까. 수입이 없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회가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기본이기 때문에. 돈 없으면 교회고 국가고 전부 다 장사도 안 되고,,다 부도 되고 경매 처분 당합니다. 근데 그들이 돈을 가져 올 수 있도록, 설교도 돈과 매치되어 있는 설교를 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돈을 갖고 오게 하시는 신을 설교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느냐? 소비자는 얻는 게 없으면 내놓지 않거든요. 그렇다면 자비로운 하나님이 여러분들께 이런 걸 제공하니까. 여러분들이 양심이 좀 있으면 당신이 받은 은혜만큼 좀 내놓으세요.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고린도후서 8장에 보면 방금 제가 이야기하는 비슷한 이야기가 나와요.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같은 이야기가 아니고. 헌금이라 하는 것은 은혜 분량대로 하라.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비슷한 이야기가. 그래서 은혜를 많이 주면 헌금이 많이 나오고 은혜를 조금 주면 헌금이 안 나오죠. 이게 어떤 교회 헌금이 안 나온다면 은혜가 안 된다는 말이죠. 방금 제가 말을 은혜가 많이 하면 성경은 은혜가 있으면 헌금이 나오게 돼 있는데 사람은 그렇게 생각 못하고, 헌금이 나온다는 것은 곧 이미 은혜를 많이 받았던 걸로 그렇게 의미를 처리해 버리는 겁니다.
결국 지금까지 쭉 이야기했지만, 아직도 우리가 중요한 걸 놓친 것은 뭐냐 하면은 신이 있느냐 하는 문제예요. 신이 있는 자를 논한 게 아니고, 신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결집할 것이냐? 그래서 그것이 하나의 힘이 되고 권력을 유지, 권력으로 전환시킬 것이냐? 거기에 필요한 것이 신학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신학이란 신이 있느냐 진리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신과 진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한마음으로 결집시키는, 그런 이성적인 논리적인 합리적인 그런 사고 체제가 바로 신학이에요. 그 진리는 세월이 다르면 다른 사람들이 왔을 때는 그 진리도 바뀌어지는 겁니다.
제 9 페이지 한번 보세요. 9페이지에 보면 사람 이름 하나 나오죠 이름이 뭐죠? 프로타고라스. 프라타고라스가 하는 이야기는 여러분 이야기하면 ”아! 그 이야기한 사람!“하고 다 압니다. 뭐라고 하냐면,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했어요. 인간은 만물의 척도. 방금 제가 길게 이야기한, 40분 동안 이야기한 것이 이 사람은 한마디로 딱 정리했습니다.
진리 진리가 뭐냐고? 니 마음대로 하세요. 왜? 니가 척도야. 니가 척도야. 이게 프로타고라스예요. 이에 격분하는 사람이 누구냐? 소크라테스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이거예요. 옛날에는 전부 다 철학자들이 신학자였어요.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이겁니다. ”차선책“입니다. 소크라테스가 굉장히 현명한 사람이죠. 이 차선책은 뭡니까? 최고의 신은 남겨놓고, 우리 인간이 해야 될 것은 그다음 거. 그 다음 선이니까 뭡니까? 차선책이에요. 차선책인데 소크라테스가 살던 그 시대에는 차선책이 아니고 전부 다 각 종교마다 각 사람마다 진짜 지가 안데. 지가 똑똑하데. 지가 대장해야 돼. 지가 진리를 다 확보했데. 너무나 많이 아니까, 소크라테스가 이게 도저히 참다 못해 가지고 그 사람을 상대로 묻습니다. 하나하나 물어들어 나가요. ”아저씨 정의가 뭐예요?“ ”정의란 이런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되는 그 말에 반대되는 사례를 들고 와요. ”이래도 정의입니까?“ ”그러면 정의가 아니지“ 그러면 아니다 하는 걸 반대하는 사례를 들어요. ”그럼 이래도 정의입니까?“ ”어! 그것도 정의네“ ”아저씨 다시 묻습니다. 정의가 뭡니까? 몰라“ ”바로 그게 정답이에요“ 이걸 산파법이라. 대화법을 소크라테스가 제일 먼저 소환했어요. 대화법을. 나중에 대화법이 나아가면 변증법이 되는 겁니다.
묻고 물어서 당신이 얼마나 무식한가를 캐내는 것. 안다는 너희들이 얼마나 무식한지 캐내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차선책입니다. 그러면 소크라테스보다 먼저 온 이 프로타고라스는 이 사람이거든요. 그 사람이 뭐라고 했어요? 세상의 모든 진리고 뭐고 종교고 신이고 하는 것은 전부 다 인간의 마음하기 마련입니다. 나중에 나한테 스토아 학파 나올 때는 불교도 같이 나와요.스토아 학파라고 하는 것은 욕심을 줄임으로써 행복을 추구하는 거고요. 그게 비슷한 것이 에피크로스 학파인데, 에피크로스 학파는 뭐냐 하면 욕심을 주는 것이 아니고 공포심을 제거함으로써 행복을 추구하는 겁니다. 스토아 학파는 욕심을 줄임으로써, ”지리산 들어가자!지리산“ 욕심을 줄임으로써 행복을 얻고, 에피쿠로스 학파는, 술을 먹으니까 주사가 심하잖아요. 그러면 술을 먹되, 술을 먹어도 죄 아니라고 여기면, 술 먹어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으니까 이게 즐겁다는 겁니다. 그래서 흔히 그걸 쾌락주의라고 하죠.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가 나오게 된 그 갈림길이 있어요. 내가 강의하면서 계속 갈림길을 계속 이야기를 할겁니다. 그 갈림길에 선 사람이 누구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사람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뭐냐 하면은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이 사는 이유는, 행복에 있다. 행복에. 행복한 방법은 뭐냐? 덕을 쌓으면 되는 거예요. 덕을 쌓으면 행복한다 하니까 이것은 여러분 들으면 이거 어디서 많이 하는 이야기죠? 이게 덕쌓으면 행복하다는 게 어디에 나오냐 하면은 불교에 나오죠. 불교에. 불교에서 사람이 복 받는 방법은, 여러분들이 남들에게 많은 덕을 쌓으면, 그게 돌고 돌아와서 인연이 돌고 돌아와서, 결국 내가 복 안오면 내 자식 안에 복 없고 이래 되죠. 그게 이제 불교입니다. 그 불교에다가 이제 기독교 성경 용어를 가지고 이게 결합이 돼 버리면 오늘날 부흥되는 교회가 돼버려요.
굉장히 간단해요. 전도서 11장에 보면 뭐냐 하면은, 니가 음식을 나누어주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다. 구제해도 그냥 옆사람를 구제하지 말고, 반드시 교회를 통해서 구제하라. 그래야 교회도 커미션을 또 챙길 수 있기 때문에, 챙길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종교라는 것은 사실은 그 밑바닥에 옛날부터 있는 그 철학이 자연 철학이 있어요. 그 철학을 그 시대에 맞도록 각색을 하게 되면 그 시대에 호응을 받는 종교가 되는 겁니다. 이거는 오늘날 시대뿐만 아니고 옛날 시대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그런데 그런 것들을 안다고 해서 우리가 행복해지지 않아요. 그런 것을 우리가 비판한다고 해서 비판하면 즐겁긴 하겠다 하도 돈이 없으니까 즐겁긴 하겠는데 질투가 나서 하겠는데 그게 계속된 행보로 이어지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학문을 한다는 거 신학을 한다는 거. 80년의 신학자를 조사하자고 하는 것은, 내가 생각한 것들을 이미 남들이 생각들을 했다는 것을 확인하자 이 말입니다. 이미 내가 무엇이, 해답이 뭘까도 궁금하지만 그보다 더 기본적인 것은 내가 어떤 질문을 하면서 인생을 살아야 되는가 그것 자체도 모를 수가 있어요. 사람이 답답한 경우가 해답을 모를 경우도 답답하지만 도대체 내가 무슨 기도, 무슨 질문을 해야 돼지라는 그 출발점부터 찾지 못할 때 상당히 그건 더욱더 굉장히 괴롭게 마련이에요.
아까 그 아리스토텔레스 이야기 좀 더 해봅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뭐냐 사람은 행복해야 된다. 행복하려면 덕을 쌓아야 된다. 그것이 나중에 로마 제국에 들어가면 전 국민에게 그 사상의 파급이 교육이 됩니다. 교육이 되어서 전 국민들은 네 가지의 덕을 갖춰야 돼요. 지혜 절제용기 마지막에 정의 그것을 사덕이라고 합니다. 네 가지 중요한 덕. 그걸 학생들 자녀들 방에다가 이렇게 걸어 놓아 보세요. 빠진 게 없을 정도예요. 지혜-수능 수능 점수는 받아야 돼요. 절제-공부 잘한다고 까불면 안 돼. 사람이 듬직해야 사회에 나가서 인정을 받아요. 그 다음에 용기-싸나이가 되었으면 현재 자기 지위에 안주하지 말고 이상과 꿈을 펼칠 수 있는 추진력을 갖춰야 사회에서 우리 가정에서 인정받는 모범적인 사람이 된다. 마지막 하나가 뭐라고 했습니까? 정의-그런데 그렇게 너무 나대면, 적들이 많이 생기면 피곤해져요. 적들을 그런 덕으로 할 수 있는 정의로움. 저 사람은 돈 벌어도 깨끗하게 번다는. 요 네 가지. 옛날 사람들이 무작정 산 게 아니에요. 우리가 이 세상에 인생이 뭐냐를 연구한 것처럼 그 사람들도 무진정하게 연구를 했고 그 연구해 내놓은 결론이 바로. 요 네 가지의 덕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할 때, 그러면 ”아빠 엄마 이렇게 살면 어떻게 돼“ 그때는 돈 이야기하면 안되죠. 저 부모가 또 고상해야 되니까. ”얘야 그러면 니가 행복해질 수 있단다“ 그런데 이것은 아주 진짜 똑똑한 자식이 있다면 한 가지 질문을 더 해야 돼요. ”아빠 엄마 행복해서 뭐 할 건데“그게 바로 그 뒤에 스토어 학파가 물었던 질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선배님 행복해서 뭐 할 건데요?“ 인간이 행복해서 뭐 할 거냐는 그 질문에 대해서 사람들은 해답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해답을 제시한 쪽이 있었어요. 그쪽이 누구냐 약 200년 뒤에 들어온 유대교에서 나온 기독교가 그 해답을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200년 채 지나지 않아서 전체가 기독교 국가가 된 겁니다. 근데 그 바탕은 뭐냐 하면 행복이 전부가 아니고 행복마저 뜷어보자는 인간의 끊임없는 지혜에 대한 열망, 그 시대를 가지고 헬레니즘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로마는 헬레니즘이라는 헬라 철학과 유대교에서 건너온 히브리즘의 결합이 중세 교회의 신학을 낳았고, 거기에 신학자들도 이제 강의 지나면 거기서 이제 펼쳐질 것입니다.
첫째 시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언급하고 더 하겠습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한 가운데 뭐가 빠져 있느냐 하면 처음에 인간은 신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습니까? 그게 빠져 있어요. 그거는 빙하기가 끝났다는 1만 년 후에, 1만 년 후도 아니죠. 사실 그전이지만. 3만 5천 년에 알타미라 동굴에서 아주 능숙한 황소 그림이 나왔습니다. 저게 뭐냐? 사냥할 때 사냥하기 전에 공동체가 하나의 민족이 공동체가 사냥하기 위해서 거기서 제사를 드렸어요. 제사를 드렸는데 이것만 하고 쉽시다. 제사. 제사할 때 한 가지만 외우면 제사의 본질을 여러분 딱 압니다. 제사는 뭐냐 ‘주기적’이에요. 제사는 주기적입니다. 왜 주기적이냐? 반복하면 태초의 그 상황이 제사하는 그 순간부터 역사가 새로 시작되는 겁니다.사냥을 하잖아요. 그러면 사냥할 때 황소가 어딘지 모르죠. 찾아가야 되니까. 황소를 누가 아느냐 하면 나는 몰라도 황소 어디 있냐 하면 위에서 어떤 분이 본다면 황소 어디 있는지를 여기는 내비 찍어서 대번 알겠죠. 대번 알잖아요. 황소가 어디 있느냐 아는 그 신의 정보를 주기적인 제사를 통해서 미리 입수를 하게 되면 쉽게 사냥감을 찾을 수가 있겠죠. 그렇잖아요? 그러면 사냥감 찾아버리면 한 일주일간 우리 집안은 배 떵떵거리면서 단백질을 보충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사라하는 것은 주기인데 .그 주기는 뭘라하는 가는, 좀 어려운 말 쓰겠습니다.시원.
처음에 세상이 창조되었을 때에 그때 정보가 뭐였는가 그걸 빼내면 돼요. 그걸 빼내가지고 그다음에 제사 드리고 이게 무슨 글자죠? 낭송을 하면 돼요. 낭송을 하게 되면 여기에 낭송의 주체자가 있겠죠. 이게 바로 제사장이 되고 낭송을 듣는 사람들이 있겠죠. 이게 누구냐 하면 이것이 자손들이에요. 남송 하는 제사장 하게 되면, 이것이 뭐로 굳어지냐 하면, 이게 하나님의 계시가 되요 신의 계시. 신의 계시를 누가 수용합니까? 자식이 수행하게 되면, 여기서 이 이 자기 민족의 역사가 되는데, 이 낭송이 창조와 관련되기 때문에, 이게 무슨 역사냐면 신의 거룩한 역사가 되겠죠.
옛날 사람들은 당장에 밥 먹는 것보다도 창조에 있는 숨겨진 그 질서 체제 질서 체제 나중에 그 오르페우스 종교가 피타프라스에 의하면, 그것을 코스모스라고 하는데. 코스모스. 여자들은 화장품을 영어로 뭐라고 하죠? 코스메틱이라고 하죠 질서라는 뜻이죠.질서. 여자가 화장을 해야 질서가 잡히는 모양입니다. 원래 있던 창조의 근원을 어떻게 빼내느냐? 이제 빼내게 되면, 우리는 신과 동화하게 되고, 합의를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미리 미래를 예측을 하게 되고 예측하게 되면 위험을 줄여 나가게 되고, 줄여 나가게 되면 우리 종족은, 계속 지속적으로 존재가 되고, 존재가 되게 되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어떤 지속적인 존재가 –어려운 말로 항상성- 존재가 되게 되면. 나는 90먹고, 요새는 90이라는데, 90 먹다가 죽어도, 나는 죽어도 뭐는 살아있어요? 내가 소속돼 있던 그 정보는 우리 민족 답게 살아 있겠죠. 그러면 그거는 뭡니까? 나는 죽어도 죽음의 공포는 우리 민족 속에 내가 거기에 삽입되면서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가 있어요. 부활의 기쁨을. 죽어도 죽지 않아요.
이것은 도킨스는 이것을 뭘로 바꿨냐 하면 DNA로 바꾼 거예요. DNA로. DNA는 나누어 주기 때문에 나는 죽어도 자식들 속에 내 일부가 들어 있기 때문에, 나는 죽어도 영원하다는 그런 불멸의 사고 방식, 그런 것들이 옛날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에 넘어오면서 그러한 종교도 같이 이어지는 겁니다. 신석기 시대하고 구석기의 차이점은요. 석기를 그냥 탁 깨느냐 타자석기에서 이걸 가능하느냐 마자 석기로 바뀌면서 구석기에서 신세기로 바뀌거든요. 그럴 때 이 종교적인 유형이 어떻게 바뀌느냐를 두 번째 시간에 하겠는데요. 미리 당겨서 이야기하게 되면, 이 낭송했던 이 제사장 그게 뭐냐 하면 무당입니다. 우리나라 민족의 뿌리가 뭐라고 했습니까? 우랄 아르타이죠. 이게 무당입니다. 몽고의 무당 출신들이에요. 그리고 세계 최초의 언어를 누가 사용하느냐 무당이 사용했어요. 중국의 그 거북이 등껍데기 있죠. 상형 문자. 그거는요. 등껍데기 지 마음대로 갈라져도. 불 이렇게 갈라지거든요. 갈라져도 해석권은 누구한테 있느냐? 무당한테 있어요. 그 무당이 왕에게 그걸 알리기 위해서, 문자를 만드는 것이 뭐냐 하면은 상형 문자입니다. 문자는 신과 인간과 교류하기 위한 문자인데, 그걸 헬라말로 로고스라고 해요. 언어 그걸 로고스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 신학의 정체를 이제 파헤치면, 도대체 신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고. 신을 인정해서 자기의 존재의 정체성을 계속 영원히 영생하도록 시도하려는 그 시도 가운데서 신은 필수 요소로 담겨 있다고 보는 것이 이게 전통적으로 이게 분명한 사실입니다.10분 쉬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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