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가리 감사
2026년 7월 5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3:7-13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3: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3: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3: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문’이란 안의 공간과 바깥 공간 사이의 출입을 가능케 하는 지점을 말합니다. 문이 있다는 것은 안과 밖이 이미 성립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문이란 본인이 사는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유롭고 열고 닫을 수 있는 설비 장치를 말합니다. 자기 편리를 위함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문이랍니다. 이것은 인간이 출입이 불가능한 공간을 위해 지상의 인간 공간과 차이 나게 마련된 공간임을 압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계시는 공간의 바깥이 그냥 빈 공간이 아니라 인간 세상 그 자체가 됩니다.
인간 세상은 인간을 위한 공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 공간이 ‘사단’이 지배하고 설치는 공간이라고 규정하십니다.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런 세상에 휩싸이지 않는 공간이라는 겁니다. ‘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공간이기에 인간이 나서서 설칠 필요가 없는 공간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 물들지 않는 상태를 오늘 본문에서는 ‘시험의 때를 면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 빌라델비아 교회는 어떻게 세상 시험에 빠지지 않게 된 겁니까? ‘다윗의 열쇠’ 기능 때문이라는 겁니다. 열쇠 없이는 인간 세상에서 예수님 나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사단의 단체는 어떻게 세상을 미혹했습니까? 그들에게는 천국의 열쇠가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예수님 당시에도 유행한 주장들이었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 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눅 11:52)
이 본문에 대해서 마태복음 23:13에서는 이렇게 달리 표현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인간 세상에서는 어떻게든 인간들로 하여금 애쓰고 노력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이런 의욕마저 ‘욕심’이며 ‘시험에 든 모습’이라고 규정하십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생각하는 ‘다윗의 열쇠’는 무엇일까요? 시편 51:3-5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로마서 1:21를 미리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참으로 희안한 일은,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영화롭게도 안하고 감사치도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도대체 감사가 어디서 막혀 있습니까?
다윗의 말을 들어봅시다. 다윗은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가 죄로 엮어졌다고 고백하고 도리어 이 사실이 성신, 곧 성령으로 인한 결과라는 겁니다. 즉 ‘내가 죄지었다’가 아니라 죄가 나를 죄짓게 했는데 그 죄조차도 하나님의 언약 달성을 위한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언약 차원’에서 주님이 일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자신이 이스라엘 왕으로 호명되었다는 겁니다.
‘호명’은 일종의 ‘당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호명에는 다음과 같은 근거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눅 9:34-36)
이 본문에서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는 뜻은 사도로 호명됨 자체가 ‘주의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관계에 들어섰다는 뜻입니다. 즉 제자들이 예수님을 호명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불러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그냥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다윗 중심으로 ‘다윗의 열쇠’가 성립되고 그 성립된 열쇠를 통해서 새로운 공간, 즉 인간들은 손댈 것도 없는 공간이 천국으로 마련된 겁니다.
그렇다면 이는 다윗이 호명을 통해서 일방적으로 구원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일방적 구원’의 근거는 바로 ‘훼손된 선악 과일’의 후유증을 생명나무 되시는 주님으로 친히 받아내시고, 이번에는 그 생명나무 차원에서 선악과 따먹은 징벌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성도는 일단 구원부터 먼저 받고 그 다음이 예수님의 징벌, 곧 고난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주님의 남은 고난에 참여가 되는 겁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그 예 중의 하나가 고린도후서 12:7에 나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 바울에게 일반적인 고생이나 고난이 아니라 ‘사단의 가시’가 들어와 박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삼천층의 계시까지 받은 사도가 너무 자만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부러 사도의 몸에 악마의 가시를 집어넣으셨다는 겁니다. 이미 구원된 상태에서 다시 악마와 관련된 이유를 몸에 지녀야 한다는 겁니다.
몸에 질병일 수도 있지만 오늘 빌라델비아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교회 차원에서 사단 모임의 주장이 됩니다. 즉 인간의 노력과 행함으로 천국 문을 열고 들어갈 수도 있고 알아서 닫아 걸 수도 있다는 주장말입니다. 오늘날 성도는 이런 환경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미 구원받은 상태이지만 주변에서 자기 관리를 촉구하는 종교 환경이 유혹과 시험 거리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즉 늘 감사하고 신나는 일이 벌어지면 좋겠다 싶지만 자꾸만 자기 행동 여부에 따라 감사치 못하는 결과가 발생되는 것처럼 구원 공간을 곡해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소명받은 자는 자기 일로 소명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다 이루신 일에 소명받았습니다. 자아 자체를 감사의 내용으로 채우지 마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복이란 일방적 구원과 주님의 공간에 이미 들어왔기에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것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4강-요한계시록 3장 7~13절(쪼가리 감사)260705-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3장 7~13절입니다. 신약성경 377페이지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아멘.
공간 문제입니다. 공간 문제인데, 그것은 문이 있다는 거예요. 성경에서 천국 예루살렘에 가는 문이 있다는 말은, 인간들은 그 문의 존재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거기에 들어서지를 못합니다. 그게 왜냐하면, 이 땅의 인간이 사는 공간에는 자기가 출입하는 문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열면 열리고 내가 닫으면 닫히는 문들을, 각자 지니는 공간에서 그 공간을 사수하고 거기서 버텨내는 거예요.
자기에게 치중하는 공간과 거기에 출입하는 문을 본인이 확고히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이 있다는 것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그런 세계가 있느냐. 문이 없는 세계, 그런 세계가 다 있어?’ 여러분, 문이 없는 게 아니고, 내가 열어도 안 열리는 문이죠. 내가 열어도 못 여는 문, 그런데 기쁜 소식은 내가 닫아도 안 닫히는 문, 그 문이 내가 열어도 못 여는 문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장난 같지만, 한번 정리해 봅시다. 내가 닫아도 안 닫히는 문은 내가 열어도 열리지 않는 문. 따라서 이건 기존에 내 위주로 살았던 그 문의 기능과는 전혀 딴판입니다. 일방적으로 이렇게 당겨주고, 흡수하고, 강제로 그 나라에 가게 하시는 그 문, 그 문에 대해서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3장 7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문을 닫고 열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네가 손 떼라. 그 열쇠를 가진 분은 따로 계신 데, 그게 뭐냐 하면 다윗의 열쇠를 가진 분이라고 해요. 다윗의 열쇠. 다윗 시대 유대인 사회에서, 이스라엘 사회에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줬던 시대입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은 그런 다윗 시절이 다시 오기를 학수고대했어요.
무슨 뜻이냐 하면, 왕 하나 잘 만나서 우리가 호강하고 싶다는 이 말이에요. 왕 하나 잘 만나서 우리가 호강하고 싶다. 다윗과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뭐가 세워지느냐 하면, 다윗 왕국이 세워져요. 다윗 왕국에 뭐가 필요하냐 하면 백성들이 필요해요. 그렇다면 그 백성들은 알아요. 우리가 이렇게 호강하는 것은 누구 덕분이냐 하면, 하나님과 하나님이 지정한 왕, 다윗 왕의 계약에 의해서 우리는 그 효력을, 그 열매를, 그 결실을, 우리는 마음껏 지금 맛보고 있다는 거, 혜택을 입고 있다는 거, 그것을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고, 그때의 부귀영화를 그리워하고 있죠. 다윗 언약의 혜택을 많이 받은 왕이 솔로몬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 현대사회에서 솔로몬이라는 브랜드, 솔로몬 간판을 걸고 얼마나 장사들을 합니까? 솔로몬 빵집, 문제집도 솔로몬 문제집, 이런 거. 솔로몬이 그런 혜택을 입은 것은 아버지 다윗 언약의 효과라는 것을 모르고, 그냥 솔로몬처럼 되고 싶다고 이렇게 하는데, 성경은 그러지 말고 다윗처럼 되고 싶다고 해야 맞다는 겁니다. 솔로몬이 가졌다고 해서, 솔로몬처럼 되고 싶다고 이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처럼 되고 싶다고 이렇게 나와야 하는데, 그렇게 나오는 것은 인간들 인간의 본성상 그렇게 나올 수가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로마서 1장 21절에, 듣기에 아주 이상한 말이 나와요. 그게 뭐냐면, 1장 21절에, “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이렇게 했어요.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하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그다음에 나온 단어가 뭐냐.
“감사치도 아니하고” 하나님께 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안 나오는 이상한 하나님을 알고 있어요. 하나님을 알면, 감사하는 것이 저절로 따라 나와야 하는데,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정하는데, 막상 내 입에서는 감사와 고마움이 안 나오고 있더라. 이게 뭐가 문제냐. 다윗의 특징은요, 다윗은 하나님만 알았어요. 그게 특징이에요. 이것저것 아는 게 아니고 하나님만 알았어요.
그러면 하나님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내가 지은 모든 죄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친의 죄 중에서 나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게 바로 나라는 거예요. ‘나는 무엇이다’가 아니라, ‘나는 무엇이다’라는 이전에, “하나님은 누구시다”가 ‘나는 누구다’보다 먼저 앞서서 정리가 돼 있는 거예요. 다윗의 그 범죄 때문에, 졸지에 다윗의 엄마가 디스(깍아내림) 돼버렸는데, 우리 엄마의 죄에 그 여파, 그 결실이, 오늘날 죄 있는 내가 되었으니까, 죄는 내가 되었으니까, 나의 죄는 우리 엄마 덕분에, 나와 내 죄는 나와 상관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고, 바로 엄마 몸에서 만들어진 죄, 우리 하나님과 죄 문제가 성립된다고 이렇게 본 거예요.
그걸 다윗은 자기가 성신을 통해서 알게 된 거예요. 이거는 인간의 지혜가 아니고. 그렇다면 그런 자를 누구로 만들었냐. 바로 그런 나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만들었다고요. 이 말은 좀 어렵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줄 건 다 줬으니까, 이제 어렵게 이야기할게요. 인간의 근원적인 모든 욕심은 어떻게 차단되느냐. 욕심을 죽이고, 죽이고, 내 탓이라고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내 끓어오르는 욕심. 육신이 있을 때까지 계속 나오는 욕심은 어떻게 원천적으로 봉쇄가 되느냐. 그거는 호명입니다. 누가 불러주면 돼요. 누가 불러주면 돼. “너 이거 할래?”라고 일거리만 맡기면 돼요. 그러면 그 일거리가 나에게서 올라오는 어떤 죄와 욕망을, 욕망과 무관하게 진행이 되는 겁니다. 일만 되면 됐지, 내가 늘 이렇게 욕심 없고 하는 그거는 소용이 없어요.
일이 제대로 일대로 이루어지면 되는 겁니다. 이 말이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하나의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맡기느냐 하면, 아무나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고, 당첨이 되어야 해요. 이 호명이 당첨입니다. 당첨해야 하는데, 그 당첨이 딱 되면, 오늘 본문도 그 내용이 나와요. 여기 10절에 나옵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한다는 것은, 세상이 주는 유혹에서 완전히 빠져나오게 한다는 거죠. 그 빠져나오게 하는 방법은 주님께서 호명하면 되죠. 당첨해서 “너, 이거 해!”라고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너, 이거 해!”라고 하게 되면, 그 본인에게 주는 사명은 문을 열고, 닫고 하는 그 기능이,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공간이지, 내가 자유롭게 문 열고, 닫고 하는 그 공간에서는 이미 어떻게 됐어요? 이미 빠져나온 거예요.
누가복음 9장에 그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9장 35절에 보면, 변화산 이야기인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라고 나옵니다.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한 번 더 할게요.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어떻습니까? 자기의 이런 욕심과 본능, 탐욕, 이런 게 있든지 없든지 전혀 상관이 없지요.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들려오는 말을 들으라. 들리지, 그지? 그게 주께서 먼저 너에게 찾아오는 방식이야. 그지? 네가 어떻게 나를 찾는가는 내가 일체 그거는 안 받는다” 너희는 예수님이 너를 가지고 일을 맡기면, 그냥 그대로 하게 되면, 그게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말씀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하나님 쪽에서 실천하는 현장이 되는 겁니다.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그러면 듣게 되면 어떤 현상이 나오는가. 듣게 되면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이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 유대인들이 너를 시험하는 것을 네가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 말씀에서 이 말씀 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호명해서 자기 종으로 이렇게 일을 맡기니까, 그다음부터 성경에 나와 있는, 내가 떠나야 될 이 세상의 모든 표현들, 일어나는 사건들, 일들을 말씀 입장에서 하나하나 이제 감각이 오기 시작하는 게 느껴지게 하는, 이게 바로 시험이구나.
그리고 이게 바로 유대인의 사고방식이구나. 이 구경하는 즐거움, 구경하는 재미가 있어요. 왜? 이 갈고리가 “저는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 기뻐하는 자니, 택한 백성이니, 너희는 예수의 말만 들으면 끝!” 끝인 거예요. ‘하나님, 저 하나님을 아는데요. 영화롭게 못 해서 그 부분이 아쉬운데, 이제는 하나님의 존재도 알고 더하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어떻게 구원받습니까?’라는 그 모든 말씀에 대해서 자꾸 이걸 실천에 옮기려고 시도하게 되면, 이거는 내가 나를 붙잡고, 구박 주는 것밖에 안 돼요. 타인의 등장입니다.
남이, 예상밖에 남이 등장해서, 등장하는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 제자들에게 이야기하기를, “딴 소리 하지 말고,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 아마 찾아갈 거야. 찾아가게 되면 너한테 지시할 거야. 지시하게 되면, 그 지시를, 그 지시 자체를 통해서, 그동안 네가 보아왔던 모든 세상 현상에 대해서, 주님 안목으로 모든 것이 그렇게, 제대로 재해석되어서 눈에 보일 거야”
그게 영화롭게 하는 거예요. 그게 감사하는 거예요. 말씀을 영화롭게 하고, 감사하는 것을 내가 지키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빌라델비아 교회의 특징이 있는데, 다른 교회와 차이점이 뭐냐? 책망이 하나도 없어요. 책망이 하나도 없다는 말은, “저의 말을 들으라”를, 그게 제대로 됐을 때, 이런 빌라델비아 교회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 현상에 대해서 아주 압축해서 이야기하면,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 없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나대지 마라. 이 말이었거든요. 이게 나대지 마라는 거죠.
네가 사는 공간은 네가 문 열고, 닫는 공간이 아니고, 닫고 열고 하는 것이 예수님에게 일임된 그 공간에 네가 이미 놓여 있다는 겁니다. 호명만 하고, 당첨만 하는 것이 아니고, 호명과 당첨을 통해서 뭐가 형성되는가. 주께서 활동하던 영역이 어떻게 활동하느냐를 보게 되는 새로운 영역에 네가 소속돼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이제 문을 이야기하는 공간을, 이야기를 통해서 이 문이라는 걸 정립했기 때문에, 여기에 자칭 유대인이라고도 하는데, 이 유대인, 유대인이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가, 그 점에 대해서 그것이 다윗의 열쇠와 어떤 차이가 나는 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3절에 보면,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
이렇게 돼 있어요. 이거는 아버지가 말씀하기를, 아버지가 택한 사랑하는 아들이 하늘나라에 그냥 계시지 않고, 아버지의 지시에 의해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땅에 왔어요. 이 땅에 와서 비로소 마태복음 23장 13절 말씀을 이야기한 거예요. 이게 예수님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이 되면 안 되고, 성령을 받은 빌라델비아 교회 교인들, 오늘날 성도들도 똑같이 이런 장면을 보면서, 똑같은 고백을 하고 즐기면, 그게 바로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 하고 감사하는 방법이에요.
‘저래서 사람들이 교회 와도 천국을 못 가는구나. 누가 천국 문을 방해하는 그런 요소들이 있구나’ 있는데, 그들은 자기들이 유대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근데 오늘 요한계시록 3장에 보니까, 유대인이 아니고 9절에,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 그러니까 악마의 집단이, 그런 것들이 그당시 교회 내에 설쳤다는 것을 빌라델비아 교인들이 그걸 알게 된 겁니다.
‘아, 그래서 교회 와도 천국에 못 가는구나’ 거기까지는 기분이 즐거워요. 그런데 어떤 사람을 시련을 줘요. 고난을 주고. 몇 명에게 아픔을 겪게 합니다. 그러면 어지간한 사람은요, ‘하나님이여, 예수 잘 믿는데, 왜 인생에 이런 난관과 힘든 어려움이 있습니까?’라고 나자빠질 거라 이 말이죠. 그건 성령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전체적인 원칙, 구원의 원칙은 이렇습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일단 구원부터 받고 권한은 나중에 받아요. 사람들은 뭘 기대하느냐. 일단 구원부터 받고 그다음에는 아예 고난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거는 예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방식 알려드릴게요.
선악과를 누가 따 먹었느냐. 인간이 따 먹었죠. 인간이 따먹고 인간은 이 땅으로 쫓겨나서 죽도록 고생합니다. 힘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선악과가 훼손돼서 나온 그 징벌을, 생명나무 되시는 예수님이 대신 그걸 받아버려요. 받아서 구원받는 자에게는 그 예수님이 받은 고난에 참여하는, 예수님이 받은 이 땅의 징벌을 같이 받는, 그러한 두 번째 프로그램을 하나님 쪽에서 준비하신 거예요.
구원은 일단 받아놓고, 그다음에 고난, 주님이 받은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이것은 내가 고난받는 대가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자에게만 주어지는, 예수님 일에 참여하고 부름을 받았다는 그 증거로, 고난이 발생하는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여러분 별로 기쁘지도 않아요. 인상이 벌써 확 가버리죠. ‘난 고생하기 싫은데’ 여러분, 고생이 고난이 아니에요.
세상 적으로는 만사형통이, 그게 고난이에요. 고난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세상의 기준과 전혀 다른 기준으로, 세상에 타인들을 매일 같이 대해야 한다는 이게 아픈 거예요. 기준점이 다르니까 대하는 게 다 다르다고요,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예요. 사도바울은 구원을 받았지요. 고린도후서 12장 1절에 보면,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라고 하면서 삼층천 올라간 이야기 하잖아요.
그런데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 보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게 뭐냐 하면, 이게 병이 그냥 일상적인 병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박아 놓은, 평생 박아 놓은 사탄의 가시이기 때문에, 내가 빼려고 해도 뺄 수가 없어요.
왜 그렇게 하는가. 너무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한 주님의 조치예요. 주님의 조치라고요. 사도바울도 이처럼 살아가면서, 헬렐레하면서, 이 세상이 최고라고 이런 게 아닙니다. 떠나야 해요. 이 여러 가지, 최고의 성도에게 이러한 그냥 가시가 아니라, 사탄 악마의 가시를 거기다가 박아 놓은 겁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이 사도바울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탄의 가시가, 가시니까 고통이죠. 고통을 주죠.
아프죠. 아프면서 돌아서서 감사하고, 돌아서서 감사하고, 돌아서서 아프고, 아프고 또 감사하고, 아프고 감사하고, 이게 파동으로 계속 이래야 되는 거예요. 저는 이걸 쪼가리 감사라고 하는데, 쪼가리 지고, 쪼가리 지고, 쪼가리 된 감사가 반복적으로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이게 왜 쪼가리 나느냐면, 쪼가리 져야 되느냐면, 계속 감사가 되어버리면 오늘 본문 그대로예요.
고린도후서 12장 그대로예요. 내가 곧 감사의 주체가 되는 것처럼 오해하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늘 감사해. 나는 늘 훌륭해. 나는 늘 완벽해’ 사도바울이 이게 시험이거든요. 이 시험을 감당 못 한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감당 못 해요. 주님의 호명과 일 시킴으로 감사해야 될 건데, 이렇게 모든 만사가 평안하면 내가 감사가 돼요. 내가 감사해야 한다고요.
그러면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다”라는 주님의 활동은 어떻게 돼요? 없죠. 자기한테 감사하니까. 하나님은 알되, 하나님께 별로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이제는 독립 선언해도 될 만한 거니까. 그러면 마지막으로, ‘목사님 우리에게 박힌 사탄의 가시가 뭡니까?’
오늘 요한계시록에 나와요. 그게 유대인의 사상과 집합이에요. 어떤 사람은 뭐 암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자식 때문에 못 살겠다고 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아들, 딸 있어서 장가도 안 가고, 연애도 안 하고, 다 그냥 사탄의 가시 같아. 이런 것들이 있는데 그런 것은요, 그런 타인은 그냥 헤어지면 그만이잖아요. 내몸 안에 있는 사탄의 가시를 뺄 수가 없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바르게 살아야 구원받는다는 그게 사탄의 가시예요.
평생 가요. 평생. 이만큼 했는데, 이게 웬 어려움이냐는 이런 거예요. 계속해서 이 탐욕이 올라오는 거,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서 “딴 소리 하지 말고 너희는 그의 말만 들으라. 시키는 대로 하면 돼”라는 그 한 마디가 평생까지 계속 유효하게 이어지면서 우리는 다시 감사 포인트로 돌아오고, 돌아오는 겁니다.
“그냥 주여, 말씀만 하옵소서” 그걸로 됐지, 내가 따로 뭐 괜찮은 나를 마련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빌라델비아 교회는 책망이 없는 거예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시험은 나는 왜 남들처럼 그렇게 근사하게, 멋있는 나가 되지 않느냐는 자기규정인 줄 이제는 알았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내 규정, 나는 어떻다는 것은 생각하지 말고 하루하루 주님의 호명하시고 시킨 것만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