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없다
2026년 8월 16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4:11-12
(4:11)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4:12)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인간들은 ‘내가 여기 있다’라는 의식부터 출발하고, 하나님께서는 계약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들 때, 계약에 입각해서 만들었다는 것이 인간들 입장에서 매우 신기하게 보일 겁니다. 만약 진짜로 계약이 계약대로 성사된다면? 인간 자신들의 포부나 소원, 기대, 희망이 당연히 묵살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어떤 범위를 평생토록 구축하게 됩니다. 소위 ‘내기 인생’이지요. 즉 “나 이렇게 착실하고 열심히 한평생 살아왔다.”는 겁니다. 이 안에 ‘자기 의(義)’가 담기게 됩니다. 인간에게 있어 자기 의가 있다는 것은 주변에서 욕해보면 담박에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에 이웃이나 형제를 평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자신을 어떤 인간존재로 인식하는 이상, 나름대로 성과를 갖게 되고, 이 성과를 갖고 타인들의 성과를 비교하면서 타인이나 형제를 평하게 마련입니다. “츠츠 나처럼 살아왔으면 인생 저렇게 망가지는 을은 없었을텐데…”하면서 말입니다.
여기서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뒤집어 씌어진 게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비오지 않는 날, 수풀 속에서 보이지 않다가 비오는 날 물방울이 공중에 매달리는 것을 보고 거기에 거미줄이 있음을 알 듯이,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율법의 그물망에 붙잡혀 있는 거미 신세입니다.
인간들이 열심히 사회 활동을 하는 것도 율법망에 붙잡혀 있는 채로 살랑거리는 겁니다. 그런데 이 율법은 계약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에게 계약 맺자고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계약서는 하나님쪽에서 내민 일방적인 조치입니다. 율법대로 살면 복이요, 율법대로 못살면 저주라는 계약말입니다.
이 계약 설정이나 조건에 인간은 관여한 바가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전면적인 저주에 쫓기는 신세가 된 겁니다. 하나님께서 계약을 준비하신 것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단독적으로 상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체와 상대하십니다. 일괄적으로 상대하십니다. 개인적으로 훌륭하다고 해서 그 인간이 구원되지를 않습니다.
여기에 ‘이웃 관계’와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두 계명을 총정리를 하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5-27)
그런데 인간은 이미 자기 의가 기본 본질로 들어앉아 있는 이상 ‘목슴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에서 파생되는 계명인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도 성사될 수 없습니다. 율법사는 ‘이웃이 누구냐’에 대해서 묻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의 답변은 노상 강도 만나 거의 죽어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던져 놓습니다. 그냥 존재한다고 해서 ‘이웃’이 아닙니다. ‘이웃’이 성사되려면 모든 자기 것을 다 잃어버리고 더는 내 것이라고 할 것을 찾을 수 없는 존재‘의 등장을 중심으로 해서 드러납니다.
이웃은 도와주려는 입장에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잃은 자가 정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을 낮추지 못하고 자기 의 지키는데 충실해서 주님이 하시는 일의 장애물이 되는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두고 볼 수 없는 대상’으로서 자신을 봐야 합니다. 도대체 얼마나 자기 의에 충실해서 어디까지 주님의 일을 훼방해야 하는지 말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상호간에 율법 그물망으로 얽혀 있기에 ‘하나님 나라’과 ‘이웃 사랑’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주님의 요구는 인간에게 욕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마련입니다. 인간 내부에 자기 의로 가득차 있다는 것은 외부에서 욕보면 금방 알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도 미워하고 주변 사람이나 기족까지 미워합니다.
“제발 나 혼자 있도록 좀 내버려두라!”고 무언의 외침을 발설합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요구는 어떻게 처리하겠다는 말입니까? 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해서 어느 누구도 율법망으로 적용할 때, 복받을 만한 위인은 없다는 점이 밝혀졌습니다. 즉 모든 인간은 전면적으로 저주가 덮쳐야 합당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새계약’이 등장합니다. 옛계약이나 새계약 모두다 인간들을 철저히 배제한 채로 주어집니다. 일방적이다는 말입니다. 옛계약 안에 들어오신 예수님은 여타의 인간들과 같이 저주받게 됩니다. 그러하신 분을 아버지께서는 ‘죽음에서 부활’이 아니라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을 해주십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0:20)
이 새계약의 성경도 옛계약과 같습니다. 일방적입니다. 일방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십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2-34)
그리고 염소에 대해서는,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 이것은 일방적 통보입니다. 주님께서 그냥 그렇게 하신 겁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서 지옥가는 것이 아니라 지옥가기 위해 옛계명이 기준에 맞추어서 죄가 되어야 합니다.
다윗이 이점을 알았던 겁니다. 나단 선지자가 죄를 언급하면서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다”고 했습니다.(삼하 12:7) 이때 다윗은 단독적으로 계약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나로하여금 죄짓게 했음을 알았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4)
인간은 없습니다. 그저 죄의 종이 되든지 의의 종일 뿐입니다.(롬 6:16-18) 성도는 의인이 아니라 의가 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우리는 새로운 ‘나’가 아니라 새로움이 피조물로 된 작품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믿음보다 주님의 믿음이 선재함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7강-야고보서 4장 11-12절(인간은 없다) 260816-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4장 11-12절입니다.
야고보서 4:11-12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지난 시간에 본 야고보서 4장 10절에 보면, “주 앞에서 낮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몸을 낮추면 시선도 같이 낮춰지죠. ‘주 앞에서 낮추라’는 것은 시선을 남들에게 두지 말라는 거예요. “안녕하세요!”라고 저 문을 보고 인사하게 되면 그게 무슨 현상이겠어요? 여기 계신 분들을 이미 아는데, 그래서 시선을 두고 있는데 “안녕하세요”라고 하면서 제가 딴 데를 보고 이야기한다는 그 말은, 그게 바로 마음을 낮추는 거예요.
마음을 낮춤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제발 좀 사람한테 시선을 두지 말라’에요. 사람 좀 보지 말라는 거예요. 그럼 누굴 보느냐? “주님 안녕하세요! 주님 그동안 잘 계셨죠?” 이런 식으로. 보이지 않는 주 앞에서 낮추라고 하니까, 주 앞에서 너의 몸을 낮추라는 말은, 너의 시선을 낮출 때 비로소 ‘네 몸 자체가 주님의 살아계심과 일하심을 훼방하고 있다’라는 겁니다. 방해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사는 게 힘들다.’ 왜 사는 게 힘들겠어요? 사람만 보고 세상만 보니까 힘든 거예요. 뉴스 보고, 유튜브만 보니까 사는 게 힘든 거예요. 경상도 사람 같으면 민주당 전당 대회 하는 거 보고 힘들지 않겠어요? 지금 세상의 모든 일이 분명히 다른 분이, 우리 주님이 다 조성한 세상이잖아요. 주님이 조성했다면 이 세상을 조성하지 않은 인간들에 대해서는 신경 쓸 이유가 없는 겁니다.
비가 안 올 때는 모르지만 비가 오게 되면, 풀잎과 풀잎 사이에 물방울이 맺혀요. ‘왜 허공에 물방울이 맺히나?’ 보면 거기에 거미줄이 있어요. 비가 안 올 때는 모르지만 비가 오면 거미줄의 존재가 등장하죠. 우리 몸, 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설치해 놓은 거미줄 위에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그게 우리 인생이에요. 거미줄이 있다.
그 거미줄을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율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율법은 인간이 만든 게 아니에요. 율법은 인간이 만든 게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그러한 능력과 자질은 인간에게서 나오지를 않습니다. 나올 수가 없어요.
성경 요한복음 4장 29절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 예수님과 우물에서 만났던 그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물동이를 버려두고 이렇게 이야기해요.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여기에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와 보라.’
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 보고, ‘와 보라’라고 이야기한 것은, 그 전에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 중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려야 한다고 하고, 그리고 우리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는데 어느 게 맞습니까?”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사마리아 여인이 뭐라고 한 거냐 하면, ‘어떤 것을 행하면 우리가 구원을 받겠습니까? 구원받는 방식에 내가 어떤 행함을 집어넣으면 되겠습니까?’ 이렇게 한 거예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도 아니고 그리심산도 아니다.” 이 말은 뭐냐? ‘인간이 행한 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 말이거든요. 그것을 사마리아 여인이 눈치챘어요. 감 잡았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이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인간들 가운데서는 생명수가 안 나온다.’ 하루 온 종일 어디를 쳐다보고 살아요? 생명수 나오지 않는 유튜브, 생명수 나오지 않는 뉴스, 생명수 나오지도 않는 이웃 관계, 대인 관계, 거기 몰두하다가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잖아요, 짜증 내고.
오늘 본문 다시 이야기합니다. 주님이 하는 일을 누가 방해하느냐 하면, 우리 자신이 방해해요. 주님의 방법은 “수그리!” 경상도 말로 “수그리!”입니다. “자꾸 주님이 가리잖아, 너 때문에!” 그러니까 고개를 숙이라 그 말이죠. “낮춰!” 낮추면 뭐가 보이느냐 하면, 인간이 만들어내지 않은 그 관계가 촘촘히, 율법 관계가 세상을 덮고 있는 겁니다. 그 율법을 가지고 구약에서는 ‘계약관계’라고 하는 거예요.
구약에서 율법의 계약 관계가 따지고 보면 굉장히 엉뚱한 관계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과 계약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일방적으로 우리를 지켜주고 사랑해 주고, 비 안 올 때 비 오게 하고 이러면 되는 거지 계약이라는 것은 어떤 거냐 하면, 법대로 하겠다는 거예요, 법대로, 규칙대로, 세운 법대로 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법의 계약자가 우리 인간이라면 인간이 그 계약에 참여한 바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없어요. 인간이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지 않고, 자기가 말할 틈새도 주지 않고 그냥 하나님께서는 계약에 근거해서 계약대로 주어진 게 율법이었고, 그 율법에 의해서 하나님이 구약 이스라엘에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만약에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되 만약에 율법을 안 지키면 너는 골로 가는 거야, 저주야. 이 계약에 도장 찍어.”
도장 안 찍습니다. 도장을 못 찍어요. 내 의견은 왜 반영을 안 하는데요, 왜? 인간을 왜 그렇게 무시하는데요? 이건 일방적이어도 보통 일방적인 게 아니에요. 그래서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진짜 이건 어거지로 받은 거예요, 이 계약을! 계약이라고 법으로 되어 있는 법의 체계, 율법 체계를 모세를 통해 어거지로 받은 거예요. 어거지로 받아서 하나님께서 외통수로 밀어 넣는 겁니다.
“복 받을래, 저주받을래?” “복 받을래요.” “복 받을 거면 똑바로 율법 지키든지.” “예. 지키겠습니다.” 지켰습니까? 지켰어요? 못 지켰습니다. 지킬 수가 없어요. 히브리서 10장에서는 이걸 못 지켰다고 하지 않고 이렇게 했어요. ‘그 복 조항 하나하나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 10:1-4).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도록 율법을 줬다는 거예요. 이렇게 보면 돼요. 계약이 주어졌다는 말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간으로 여겼잖아요? 인간이 아니고 ‘죄’라는 거예요, 죄. 우리 자신이 인간이 아니고 죄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우리 자신을 ‘죄인’이라고 하는데, 아니에요. 죄인이 아니고요, 아예 인간이 아니에요. ‘죄인’이 아니고 그냥 ‘죄’에요.
죄인이라 하는 것은 주님의 은혜를 받아야 알아요. 주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죄인이 아니에요. 죄인이 못 됩니다. 뭐가 되느냐? 의인으로 행세해요, 의인으로. 그래서 인간들이 살아가면서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내쳐요. 감당할 수 없는 것은 내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교회 나와도 성경을 안 봐요. 왜?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쳐요. 감당할 수 있는 것만 골라서 환경을 만들고 그 환경에 자기 의를 담아둡니다. 이 방식으로 살아가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한평생 살면서, 아직 90까지는 아니지만 80까지 살면서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을 만들어요. 자기 인생이거든요. 그렇게 해놓고 감당할 수 있는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나 이렇게 잘났어’가 들어있어요. 인간의 자기 의가 들어있는데 이 자기 의가 들어 있는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이걸 아는 방법은 간단해요. 외부에서 우리 자신을 보고 욕하면 돼요. 못 배워도 왜 그렇게 욕하는 것은 잘 알아듣는지, 누가 욕을 하면 왈칵 성을 냅니다. 내 안에 나의 의가 들어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걸 아시고 율법을 주셨죠. 네가 만들어낸 의는 하나님께서 안 받고, 율법이라는 문제 출제를 새롭게 계약의 이름으로 딱 주면서 “이 문제를 풀어라. 이거 제대로 백 점 안 맞으면 지옥, 백 점 맞으면 천국”하고 일방적으로 들이댔던 거예요.
이 율법을 지켜야 복을 받는데, 지키려고 애는 써요. 애는 쓰는데 이게 안 돼요. 율법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이게 왜 그러냐 하면요, 내 나름대로 자기의 의로움이 있기 때문에 율법의 레벨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레벨과의 격차가 생긴 거예요.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겁니다. ‘한평생 나는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감당한 거예요.
그런데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28). 마음속으로 음욕을 품는 자가 간음한 자다? 이거는요, 감당이 안 돼요. 감당이 될 수가 없다고요. “내가 80까지 살면서 간음한 적이 없습니다.” 주께서 “딱 기다려. 81세 될 때 한번 보자.”
81살에 마음으로 음욕 품으면 간음한 거예요. ‘사람 죽였을 땐 살인죄로 교도소 간다.’ 이건 우리가 감당할 수 있어요. ‘어떤 경우에도 욱하면 안 돼. 사람 죽이면 안 돼.’ 그런데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죄다.’ 이것은 감당 못 해요. 감당이 안 되죠. 감당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늘 이렇게 씩씩거리며 살아요.
씩씩거린다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존재와 그 이웃 존재에 대해 씩씩거려요. 늘 화를 품고 살아가요, 인간은. ‘나보다 공부도 못하는 네가 왜 잘 살아?’ 이런 거요. ‘하나님은 내가 감당하지도 못하는데 왜 자꾸 너무나 엄청난 말씀을 가지고 저를 윽박지릅니까? 저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욕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어떤 식으로 욕하느냐 하면, 누가복음 10장 3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이걸로 욕합니다.
왜 욕을 하느냐 하면, 25절에 어떤 율법사가 이렇게 합니다. “율법이 너무 복잡하니까 율법을 최종 정리하면 뭐가 됩니까?” 주님께서 “네가 나름대로 정리한 걸 이야기해 봐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겁니다.” 알기는 알아요.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마 10:27).
알기는 아는데 인간이 평소에 자기 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뻔한 입장에서 목숨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못 하죠. 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넌 네 인생 살아. 나는 내 인생 살고.’ 어떻게 그 이웃의 인생까지 관여해서 내 몸보다 더 신경 쓰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이건 안 되죠.
그래서 그 율법사가 주님과 이야기하면서 질문을 이렇게 합니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데 그 이웃이 누굽니까?”라고 질문을 던져요. 이웃이 누굽니까. 뭐 알면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이웃이 누굽니까?” 하니까 거의 시체가 된 덩어리를 하나 던져 놓은 거예요. “이게 이웃이다. 거반 죽은 자가 되어가는 이웃이다.”
그걸 보고 한 제사장이 그냥 지나갔어요. 한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어요. 그런데 유대인의 입장에서 이웃이 될 자격도 없다고 배제했던 사마리아인이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돌봐줬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질문하십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6).
그러니까 ‘이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요, 이웃이 되고 싶은 사람이 결정하는 게 아니에요. 어떤 처지에 있어야 되느냐 하면, 이 세상에 치어 가지고 거반 죽게 된 그 눈, 그 시선에서만 이웃이 보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웃이라는 것은 자기 의를 가진 사람한테는요, 이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아요. 인간은 자기 의를 관리하는 데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만 챙기면 되는 겁니다.
자기만 챙기는 거기에서 율법이니까 이웃 챙긴다? 아닙니다. 그거 안 되죠. 자기 챙기는 것의 그 경계선, 자기를 포기하고 이웃으로 넘어갈 수 있는 그러한 바탕이 없어요, 인간에게는. 그렇다면 누가복음 10장에서 강도 만난 사람의 입장,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겠다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평소에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느냐?
이런 마음가짐이 돼요. ‘내가 나를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다.’ 내가 나를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다. ‘이놈의 인간은 맨날 살려고 해. 이놈의 인간은 맨날 나 의롭잖아, 그나마 잘났잖아, 이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이 이간을 도대체 어떻게 처단해야 해? 자기밖에 모르는데.’
정말 미치고 미치는 것은요, 천국 가는데 방해되는 게 ‘나’라는 사실이에요. 이게 환장할 지경이에요. 나를 버릴 수도 없고, 천국은 가고 싶고, 천국 가는데 자꾸 내가 발끝 채이고 못 가게 만들고요, 내가, 이 잘난 내가, 살려고 하는 내가! 진짜 강도를 만나보든지 해야지, 도대체…. 강도만난 자가 되어야 예수님이 이웃이 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내가 내 이웃이라 내가, 돌볼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예수는 핑계에요. 그건 그냥 관념이고 이념이에요. 그냥 오락이고 취미에요. 정작 나에게 필요한 사람은 나밖에 없는 그런 식으로 평생을 나 붙들고 살아온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그 속에 이런 마음이 있어요.
‘친구도 좋다, 가족도 좋다. 가족이 귀하고 친구도 귀하지.’ 하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나 빼놓고 다 귀찮아요, 나 빼놓고는. 나 빼놓고는 다 귀찮아요! 젊을 때는 그런 말 못 하지만 서서히 나이 80 넘어갔다 싶으면요, 그게 막 입에서 나오려고 해요. 참아야 해. 아직까지는 가족이 있기 때문에 참아야 해요. 안 그런 척을 해야 돼. 남을 위하는 척을 해야 돼요.
그러나 나 빼놓고 다 귀찮아요. 누가 귀찮으냐? 하나님이 귀찮아요. 하나님도 귀찮고, 교회도 귀찮고, 옆에 아픈 사람도 귀찮고. 도대체 내 몸이라고 여겼는데 결국 살아보니까 내 몸을 처리할 수 있는 자질이나 능력이 나에게는 없더라는 거죠. “하나님, 나는 하나님을 60년 믿었는데 이제는 솔직하게 말합니다. 안 믿습니다. 그동안 나만 믿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와 헤어집시다, 그만! 굿, 굿바이!”
그러면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계약서 내밉니다. 계약서 딱 내밀어요. “이거 안 지키면 지옥, 지키면 천국이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이 계약서 내가 합의한 적이 없는데요? 거기 동의한 적 없는데요? 그거 주님이 일방적으로 했잖아요, 일방적으로. 일방적 계약 관계잖아요.” 그게 바로 율법입니다. 일방적 계약 관계.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야고보서 4장 10절에서, ‘마음을 낮춰라. 그래야 뒤에 계신 분이 보이니까 주님 앞에 마음을 낮춰라. 모든 일은 주께서 하셨다.’ 그다음에 나오는 말이 뭐냐? ‘형제들아! 형제를 비난하거나 평가하지 말라. 형제를 평가하는 것은 율법을 평가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거든요?
‘네가 율법의 입법자냐? 율법의 입법자가 아닌 자는 율법대로 심판할 권한도 없다’라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네 눈에 보이는 형제는 움직일 때 그 움직이는 하나하나가 율법이 움직이는 거예요, 율법이. 형제를 평가하는 것은 율법을 평가하는 것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율법을 왜 평가하느냐? 인간이 평가하는 이유가, 자기 나름대로의 실적이 있기 때문에 평가하는 거예요. 자기 나름대로 인생의 성과가 있기 때문에 평가하는 거예요.
‘나는 인생 살면서 이 정도 성과를 얻었는데 저 인간은 성과가 얼마쯤 되지?’ 이게 비평이에요. 그래서 이 말을 이렇게 고치겠습니다. “다른 형제를 평가하지 말라”고 하는데 평가하는 이유는 자기가 평생 가졌던 실적과 성과를 가지고 저쪽이 가졌던 성과와 실적을 비교하면서 “인생 그렇게 사는 거 아니야, 너!”
이 말은 무슨 뜻이에요? ‘나처럼 살아야 돼.’ 그런 뜻이거든요. ‘나 봐, 잘 살잖아. 왜 그리 망가졌어? 나처럼 살아봐.’ 그렇게 하게 되는데 주님께서는 “방금 형제보고 비평한 너 잠깐만 와 봐.” 딱 세워놓고 “나는 이제 너를 율법으로 간주하거든? 율법에 의해서 율법대로 사는지 안 사는지 너에게 묻겠다. 율법대로 다 살았어?”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못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 야고보서 4장 12절,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판단하는 분의 거미줄에 모든 인간이 살랑살랑 흔들리며 살아가고 있는데, 눈에 하나님이 안 보인다고 거미줄이 안 보인다고 해서 사람 대 사람의 관계로 모든 질서를 맞춰버리면, 그 자체가 율법을 건드리는 게 되기 때문에 율법에 의해서 이것은 저주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지옥 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음을 낮추면 되겠네요? ‘마음을 낮추라’는 말은 겸손하라는 뜻이 아니고 주님과 눈 맞추면서 “주님 안녕하세요!” 하는 마음으로 주님한테 먼저 인사하고 난 뒤에 그다음에 형제들에게 “형제들아, 안녕?” 이렇게 순서를, 주님 보고 먼저 눈 맞추고 그다음에 형제에게 눈 맞추는 그 순서를 지켜야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 하면, 주님께 “안녕하세요, 주님? 잘 계시지요!” 주님하고 먼저 인사를 나누면 주님께서 온 천하에 율법을 쫙 깔아놓은 거예요. 이것은 계약을 깔아놓은 겁니다. 계약을 깔아놓게 되면, 내가 율법을 못 지키는 것처럼 어느 형제도 율법을 지킬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 파악됩니다. 나처럼 저 형제도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요, 나처럼.
그러니까 형제를 평가하거나 비판할 수 있는 그 장(場) 자체가 날아가 버렸어요. 아까 사마리아 여인 다시 이야기하지만 “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고 우리 조상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라고 하는데 둘 중에 어느 게 맞습니까?”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날이 온다”는 그 말씀을 딱 던지시니까 그때부터 사마리아 여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와 보라”로 끝났어요, 와 보라!
“넌 나보지 말고 난 너 안 볼 테니까 우리 같이 주님한테 가보자. 주님께서 뭘 했는지.” 주님께서 뭘 하셨냐면요, 계약서를 들고 온 거예요. 새로운 계약을 들고 온 거예요, 새로운 계약. 또 계약이에요. 전에 구약 때 율법을 줘서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라는 것, 그 계약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기 입장에서 새 계약을 준 거예요.
새 계약과 옛 계약에 공통점이 있어요. 공통점이 뭐냐 하면, 그 계약에 대해서 아무도 준수하거나 그 계약을 만족시킬 사람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주셨습니다. 그 계약을 언제 작성했느냐 하면,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인간이 빠져있을 때, 창세 전에 계약했어요. 인간이 끼어들 여지가 없도록 한 창세 전의 계약을 들고 주님께서 왔다 그 말이지요.
오니까 그 온 계약의 특징이 뭐냐? 어느 누구도 이 계약을 지킬 위인이 없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옛 계약과 새 계약의 공통점입니다. 아무도 이 일방적인 계약서에 대해서 다 지킬 위인이 인간 중에는 전혀 없어요.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옛 계약의 취지는 뭐냐? 모든 인간, 이 거미줄 전체를 다 저주해 버리는 거예요.
이제 많이 주무셨으니까 중요할 때 깨야 해요. 잠시 눈을 뜨세요. 하나님의 계약서가 오니까 인간들은 하나님한테 속았어요. “제가 이거 지키겠습니다” 한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뭐냐? 이 율법의 계약서가요, 너와 내가 1대1로 나오라고 준 그런 계약이 아니에요. 인류 전체에 대해서, 너를 포함한 인류 전체가 어느 누구도 율법대로 사는 사람은 없다고 전면적인, 전체적인 심판을 선언하는 계약이 바로 첫 번째 온 율법 계약이에요.
모든 자는 물로서 멸망 당하고, 모든 자는 불로서 전면적으로 저주받습니다. 지옥 가야 마땅해요, 모든 인간은. 주님의 출발점은 전체로부터 개인인데, 인간은 개인부터 나와서 개인으로 끝나요. 이게 인간들이 주님의 계약을 오해한 겁니다. 성경에서 수많은 말씀을 주니까 사람들은 이 성경을 보면서 제가 지킬게요, 제가 못 지켜서 미안합니다, 제가 이걸 잘했으면 지켰을 텐데 다음엔 지킬게요, 반성합니다, 회개합니다…, 자꾸 앞에 누가 나오느냐 하면, 자기를 말씀을 지킬 주체자로 등장시킨다고요, 개인적 자격으로.
배후에서 누가 그렇게 시키는 거냐면, 마귀가 그렇게 시킨 거예요, 마귀가! 선악과는 인류 전체에 대해 알지 말라고 준 건데 인간이 개인적으로 따먹으니까 ‘넌 몰라도 난 선악에 대해 안다’가 되어 버렸어요. 배후에서 누가 작용했느냐? 마귀가 그렇게 해서 “이제 넌 신이야.” 신이 뭐 열댓 명 있을 수 있어요? 자기가 본인이 신이라는 뜻이겠죠. “너만 잘되면 돼, 너만 잘되면.”
아, 부모들이요, 자녀들 교육할 때 기본이 그거잖아요. “다른 것은 신경 쓰지 말고 너만 백 점 맞으면 돼.” 부모가 마귀인가? 주님께서는 전체를 아울러서 준 율법인데 우리는 어떻게 마중 나오느냐 하면 “주님, 저 이 율법 지켰어요.” 또는 “못 지켰어요.” 이렇게 나온다고요. 주님께서 모든 인간을 다 멸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예루살렘도 멸망합니다. 그래서 ‘어떤 인간도 멸망하기 마땅한 자들이다.’ 배후에 악마가 있어서 그런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저주 용도의 율법에 누가 끼어드느냐 하면, 우리 주님께서 끼어들었어요. 주님께서 끼어드니까 주님도 저주받아 마땅한 세상의 일원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의 인간으로 봤으니까요. 예수님이 잘못한 것은 딱 하나에요. 하나님이면서도 사람인 척 한 거예요. 그게 잘못이었던 거예요. 하나님은 그냥 하늘에 계시지 왜 사람으로 왔느냐 그 말이지요. 우리 헷갈리게! 동네에서 동네 축구하는데 손흥민이 왜 끼어듭니까? 그래서 축구가 됩니까? 안 되죠.
모든 인간들의 가는 길은 지옥이라고 확정되었음을 알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끼어들어서 나무 위에서 저주받았어요, 십자가에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중에서 딱 한 분만 끄집어냈어요.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만 죽음 가운데서 끄집어냈어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는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건 성경적으로 틀렸어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게 아니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났어요.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0:20). 이 말은 예수님 개인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처음에 오셨던 모든 그 인간 세계가 다 애초부터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 예수님만 딱 끄집어냈단 말이죠. 딱 끄집어내면서 예수님을 부활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로 만들었다고요.
그런데 예수님을 끄집어내기 전에 예수님이 뭐라고 했느냐? 내가 너희를 택했다고 하면서 뭘 주느냐? 새 언약을 세워요. 마태복음 26장 26-28절에 새 언약을 주면서,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이것이 바로 이제 너와 내가 세우는 새 계약’이에요. 계약이 또 왔어요. 옛 계약 말고 새 계약이 또 왔어요. 이 계약도 옛 계약과 똑같아요. 뭐냐 하면, 우리에게 일체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주신 계약입니다. 옛날 계약은 물어보지도 않고 몽땅 인간은 다 저주받게 했어요.
새 계약도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이 계약에 들어온 사람은 무조건 천국이에요. “와 보라!”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릴까요, 그리심산에서 예배드릴까요?” “그런 거 따지지 말고 그냥 와 보라. 그분이 다 하셔. 예수님 혼자 다 하셔.” 그분이 계약을 만드신 분이고, 그분이 계약을 완성하신 분이고, 주께서 그 자신의 계약안에 우리를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으면 ‘죄’가 되었던 우리가 새 언약 안에서 뭐가 되느냐 하면, ‘죄인’이 돼요. 비로소 ‘죄’ 옆에 ‘인(人)’자, 사람이 붙습니다.
사무엘하 12장에서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찾아옵니다. “이 나라에 이런 일이 있는데 왕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왕이 화가 나서 “그런 빌런은 처음 봤다. 그렇게 악한 인간이 또 있나? 당장 율법대로 4배나 갚게 해야 한다. 아니 그냥 죽여 버려야 해. 자기 양들도 많은데 어떻게 하나밖에 없는 종의 양을 잡아서 손님 대접을 하느냐? 그건 정말 극악무도한 자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 이런 식으로 마땅히 죽을 자라고 그렇게 이야기했거든요.
“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삼하 12:4-5).
그러니까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삼하 12:7). 씩 웃지는 않았습니다만, “그 사람이 당신이에요!” 그 사람이 당신이라고요, 그 사람이 당신입니다! 당신은 마땅히 죽을 자의 집단의 왕이예요, 대표자예요. 그것을 통해 다윗이 알게 된 게 있습니다. 내가 ‘죄인’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죄인’이 아니고 ‘죄’라는 겁니다.
이게 뭐냐? 계약적 관점이에요. 그 시선이 계약적 관점이에요. 계약은 나의 운명에 대해서 내가 관여하는 것을 하나님 쪽에서 일체 배제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것은 계약에 의해서 인간을 만들었고, 계약에 의해서 천국을 만들고, 계약에 의해서 지옥을 만들어요. 지옥 가는 사람은 그게 죄기 때문에 지옥 가는 거예요. 왜? 계약에 의하면 저주받아야 하기 때문에.
여러분, 이게 이해가 되십니까? 이게 이해가 될 내용이에요, 이게? 나쁜짓 해야 지옥 가는 것 아니에요? 아니라니까. 나쁜 짓은요, 내가 사람일 때 나쁜 짓을 하는 거예요. 사람이기 이 전에 우리는 죄에요. 그걸 가지고 로마서 6장에서 죄의 종이라 했습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6-18).
죄의 종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성령이 오게 되면 의의 종이 되는데요, 죄든 의든 어느 쪽이든 인간은 없어요. ‘의의 종’이든 ‘죄의 종’이든 거기서는 그냥 ‘종’이에요. ‘의인’의 종이 아니고 ‘의’의 종, ‘죄인’의 종이 아니라 ‘죄’의 종, 죄의 종이니까 죄, 의의 종이니까 의! 이것은 바로 계약에 입각한 분류, 리스트, 하나의 자리 배정입니다, 계약에 입각한.
왜냐하면 계약은 지옥을 가나 천국을 가나 그 결정은 인간이 만들어지기 전의 창세 전에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결정된 내용이 계약 형식이기 때문에 끝까지 계약 형식에 충실하게 밀어붙어야 돼요. 착한 일 한 것도 없이 천국, 나쁜 일 한 것도 없이 지옥! 이게 계약이에요. 이게 하나님이십니다. 이게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성경 내용을 모르고 사람답게 살려고 했어요, 사람답게. 참 주님 보시기에 기가 찰…. 주님께서는 너무 기가 차서 막 울었어요.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막 울었다고요. 주님께서 운 대목은 잘 안 나타나는데요,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3-35).
예수님께서 통분히 여기시는 그 통분한 마음을 지금 저와 여러분도 있어야 해요. 어떤 마음이 되어야 예수님의 통분과 우리 통분이 일치되느냐 하면, 이 나사로를 구원하는 모든 것은 계약대로 된 거예요, 계약대로! 자꾸 사람을 보지 마세요. 사람하고 인사하려고 생각하지 말고, 사람하고 눈 맞출 생각하지 말고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놓으신 보이지 않는 주님과 먼저 인사하고, 그다음에 사람하고 인사하세요.
‘너는 나빠서 지옥 가야 해.’ 그렇게 평가하면 안 돼요, 인간을 그렇게 평가하면 안 돼요. 그것은 주님 소관이지 우리가 판단 내릴 소관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여러분 어떻게 평가할 거예요? ‘계약 없이’ 말고, 계약이 있는 가운데 계약에 준해서 어떻게 평가할 겁니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고전 15:10). 이 말 외에 다른 고백이 나올 수가 없지요. 그럴 수가 없어요. 아주 신나요.
내가 인간일 때 미처 알지 못한 새로움이 우리 속에서 계속 나와요. 그러니까 우리는요,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고 ‘새로움이 만든 피조물’이에요. 나에게서, 나라는 인간에서 새로움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새로움이 ‘나’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이런 희한한 인간이, 이런 인간이 없어요, 세상에.
‘인간이라면 자기 잘잘못에 따라서 천국 가고 지옥 간다.’ 이게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옛 계약이에요, 옛 계약. 고함을 지르면 안 되는데…, 이것은 율법에 의해서, 이미 그것은 무효화 된 거예요, 율법에 의해서! 뭐 간음 안 했다고, 살인 안 했다고, 나쁜 일 안 했다고요? 남을 흘겨보는 것도, 그것도 살인죄예요. 왜 자기를 그렇게 몰라요?
다윗은 알았어요. “모친의 죄가 나를 만들었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고백이에요?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4). “모친의 죄가…”, ‘내가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야를 죽이고…’ 그게 아니고, “모친의 그 죄가 나로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이게 바로 다윗 계약, 다윗 언약적 사고방식이에요, 언약적 사고방식.
주님께서는 인간들이 이걸 몰라서 통분해서 울었어요.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남들이 얼마나 비웃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또 눈물이 나오지요. 너무 모르니까! 그게 아니니까! 제가 얼마 전에 영화를 봤는데 영화제목이 <호프>입니다. 그 영화를 보면서 ‘야, 하나님께서 우리나라 영화에 이렇게 복음적인 영화를 주시는구나.’
감독의 뜻이 뭔지는 관계없이 내가 보기에는 너무 복음적인 영화라서 횡재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 뒤에 8월에 <오디세이>가 나왔습니다. <호프>라는 영화하고 <오디세이>를 비교해서 봤어요. <오디세이>라는 영화는요, “인간과 인간의 갈등을 사전에 조정해서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제우스의 법령에 따라서 전쟁을 좀 줄이고 –너무나 전쟁이 많으니까- 전쟁했더라도 화해하는 그것이 옳다. 이것이 사람다운 사람이다”라는 그 주제로 만든 거예요.
이것은 우리나라 조선시대에 나온 성리학의 원칙이나 취지에 맞는 거예요. “남편은 남편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하고, 아내는 아내다워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인간에게 희망이 있다.” 이거거든요. 그런데 <호프>라는 영화는 지질이 인간들 다 끌어모아서 그 속에 있는 잔인함을 그대로 바깥에 드러내요, 잔인함을.
점잖다, 훌륭하다, 이게 안 건드리니까 그런 거예요, 안 건드리니까! 건드리면 이게 외계인이라 할지라도 그냥 극한 분노를, 잔인한 극한 분노를 다 드러내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죽이고 싶은 거예요. 이웃을 죽이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그걸 참고 있습니다. ‘네가 나 안 건드리면 나도 너 안 건드릴게.’
그런데 주님께서는 강도 만난 시체 하나 우리 앞에 툭 던져 놓고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요하게 흘러가는 내 인생에 도발하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힘들게 한 거예요. 얼마나 착실하고 바르게 살려고 애를 썼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지가 뭔데 내 인생을 막아요?
촌에서 농사짓겠다고, 고추 농사 좀 짓겠다고 했는데 비가 안 와요. 사람들은 참아요. 저수지에서 물 퍼 나르고 해도 다 말라가고 안 돼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뭐하냐? 기우제를 드려요. 유교의 양반들 앞장세워서 기우제 드려요. 기우제가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 시위하는 겁니다. ‘하나님, 이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뭐 그렇게 나쁜 짓을 했습니까?’
그런데 고추 농사에 비가 안 옵니다. 비가 안 온다고요.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 한번 해보겠다는 거예요? 해봅시다.’ 이런 식이에요. 그런데 비가 왔습니다. 감사제 드립니까? 안 드립니다. 왜? 비 오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날 살려내야 당연하기 때문에. 이게 바로 마귀들의 집단이에요. 인간은 마귀들의 집단입니다.
나 잘났고, 나 의로운데 하나님이 팍팍 도와줘야 그게 우리가 믿을만한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은 계약서대로 하는 거예요. “내 그럴 줄 알았어. 그럴 줄 알고 내가 계약서 들고 온 거야. 너희들 몽땅 지옥이나 가거라.”
끝으로 마태복음 25장 보겠습니다. 32-33절에 보면, “모든 민족을…”,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전체, 거미줄 전체 다입니다.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냥 두리라. 잘 못 알아들어요? 그냥 두시는 거예요, 그냥.
“저 어느 쪽에 갑니까?” 그런 것은 물으면 안 돼요. 그냥 두시는 거예요. 여러분이 그런 안목이 있어야 해요. 하나는 염소, 하나는 양이예요. 46절에,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하나는 영원한 복을 받고, 다른 한쪽은 영벌, 영원한 벌을 받고, 그렇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이걸 보고 세상에 어떤 인간이 ‘아, 예! 그렇게 하시는군요. 예, 고맙습니다’ 할 인간이 어디 있어요?
그다음 날 “저는요, 저는 어느 쪽입니까?” 이렇게 나와요. 그래서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어떤 왕의 신하를 고쳐줍니다. 46-47절에,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왕의 신하가 “우리 집에 오셔서 내 아들을 고쳐주세요”라고 하니까 그 신하가 집에 가기도 전에 이미 그 아들의 병이 나았어요. 50-51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뭐냐 하면, 우리가 주님을 이용하고 믿고자 하는 그 속도보다 주께서 더 빠른 속도로, 빛보다 빠른 속도로 양과 염소를 이미 구분해 놨어요. 이게 바로 믿음이에요. 내 믿음 작살내는 거예요. 내 믿음 작살내고, 내 중심의 믿음 작살내고 주님의 계약의 완성된 거기서 나오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우리에게 집어넣는 겁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율법 당시에는 우리가 그냥 움직이는 율법이라면, 지금은 우리는 움직이는 복음 그 자체입니다. “너 뭐야?” “나 죄인이야.” ‘나를 구원해 주소서’ 전에는 그렇게 기도했는데 이제는 ‘죄인을 천국에 보내 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 언약이라는 것. 여러분, 이 믿음으로 기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날마다 저희들 새로워지게 해 주옵소서. 전까지 알았던 것 다 쓰레기로 집어넣고 오늘 이 순간 주시는 주님의 새로움이 우리를 가득 채워서 그동안 인간인 양 여겼던 모든 것을 그 새로움이 다 묵살해버리고 주님께서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는 주의 증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