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소중한 것

아빠와 함께 2026. 7. 12. 21:12

소중한 것

2026년 7월 12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4:1-2

(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4:2)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고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야고보서 3:17-18에 보면,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난 뒤 오늘 본, ‘싸움’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안 싸우고 지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각자 정욕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하늘에서도 아니고 하늘에게 싸움의 근원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덮는 조치가 주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화평이 나타납니다. 싸움이 마감되고 난 뒤에 나타나는 효과입니다.

따라서 싸움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끼리 하는 싸움이 있습니다. 해결 안 납니다. 반면에 예수님과 악마의 싸움은 아예 근원적이고 원천적입니다. 이미 십자가로 승리를 해버렸습니다. 이 승리가 결과가 주어지게 되는 대상이 바로 하늘의 것을 은사로 받는 성도들입니다.

그렇다면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이나 혹은 인간이 자체적인 전투로서 하나님께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미 인간은 선악과 나무 과실를 따먹고 자신을 신으로 변신시키는데 열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이 세상에서 자기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는 인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자를 천국에서 받아주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3:45-46에 보면,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진주 장수는 보물을 만나는 순간 자기 내재성을 자발적으로 소실해버립니다.

즉 나 안에 뭐가 들었던지 진주 앞에서는 상관없다는 겁니다. 나의 것은 그 무엇이 되었든지 진주보다 소중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천국 이야기가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혼인잔치 이야기로 확장이 됩니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마 22:2-7)

즉 ‘자기 일이 있어 혼인잔치에는 참석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천국을 위한 싸움은 모든 인간들과 예수님의 싸움으로 정립되어 버립니다. 사람들은, 자기 일은 소중하고 그 외의 일은 결코 자기 일보다 소중하지 않다는 철칙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는 스스로를 자기 영토 안으로 감금시키는 처신입니다.

육신 자체가 일평생을 걸쳐 같이 죽겠다는 식으로 압박이 가해지는 자폭 장비같은 것입니다. 자신이 자기를 인질을 잡고 죽을 때까지 선악 지식으로 고문을 해댑니다. 지긋지긋합니다. 자기 보다 더 소중한 것이 바깥에 있는 줄을 모르고 삽니다.

[백세 인생] 이애란 2015 김종완 작사 작곡

“60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
70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할 일이 아직 남아
못 간다고 전해라
80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쓸 만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
90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알아서 갈 테니
재촉 말라 전해라”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인간은 ‘이미 너는 죽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이 죽은 존재를 살리는 방식은 하나님만의 방식이 따로 있습니다. 그 시작은 에덴동산에 흐르는 ‘물’에서 시작됩니다.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창 2:10-14)

생명을 실어나는 물은 선악과 따먹은 후, 인간에게 끊어졌습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낙원에서 쫓겨나와 자기만의 영토 마련과 확장에 몰두하는데 이게 바로 우리 인간들의 인생사입니다. 자기 영토 위주의 삶을 살면서 투쟁이 매일같이 일어나게 됩니다. 화평이나 정결은 성립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인간의 영토는 노아 홍수를 통해서 싸그리 다 실려 갔습니다. 그런데 구원되는 영토가 새로 마련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식의 ‘방주’라는 영토입니다. 심판 위의 영토입니다. 이 방주 안에서 죄를 덮어주심을 위한 정결한 피를 흘러줄 짐승과 동승하고 있습니다.

시편 32:1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사함과 가리워지는 용서의 바탕은 거룩한 제물의 피입니다.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6-8)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은 ‘주님의 영토’ 곧 ‘천국’이 따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1’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선악 의식은 ‘살아 있는 것을 1’로 카운터입니다. ‘죽은 것’은 죽어 없어지니까 ‘0’이라고 규정합니다. 1+1+1…, 곧 있음+있음+있음…의 세계가 인간 세상입니다.

이들은 0 밑에 –1이 있는 것인 줄을 모릅니다. 죽음 그 다음의 세계를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없음’ 그 아래의 세계에서 부활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내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롯의 아내가 나올 때, 결코 뒤돌아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진정 소중한 것은 하나님께서 새로 장만하신 ‘-1’의 세계입니다.

야곱에게 있어 이 ‘-1’의 세계는 야곱이라는 이름이 탈락하고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바뀌는 공간이었습니다.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비록 잉태한 자식 이름을 ‘베노니’, 곧 ‘슬픔의 자식’으로 지었지만. 천사를 만난 야곱은 그 이름을 ‘하나님의 아들’ 곧 베냐민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주님께서 새성전에서 한량에서 생명의 물이 나오듯이(겔 47:1-10) 성령의 물(요 7:37-39)을  고아같이 버려둘 수 없는 자에게 주셨습니다. (요 14:18) 그렇게 해서 성령받은 모든 자들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0-22)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하신 모든 것이 반드시 일어날 죄사함을 위한 일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2강-야고보서 4장 1-2절(소중한 것) 260712-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4장 1-2절입니다.

야고보서 4:1-2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오늘 ‘싸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야고보서 3장에 보면 17절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라고 하고, 그다음에 이 싸움 이야기를 굳이 거론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화평하면 싸움이 없어야 하는데 그 화평이 마음가짐의 문제가 아니고, 싸울 수밖에 없는 존재로 이 땅에 태어났던 우리에게, 하나님이 위에 있는 은혜를 통해서 실컷 싸우는 것만 평생을 보냈던 우리에게 화평을 선물로 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잘나서, 우리가 싸움질 잘해서 화평을 얻은 건 아니거든요.

인간의 싸움은 끝이 없기 때문에, 오늘 본문처럼 우리가 얻고자 하는 정욕 욕심이 끝도 한도 없기 때문에 뭘 얻고자 한다는 것은 싸운다는 뜻이고, 싸움은 욕심이 있는 한 중지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성결과 화평과 관용과 양순이 주어졌다는 것은 위로부터 온 선물이고요, 위로부터 오는 이 화평이라는 것, 화평의 선물, 싸우기 좋아하는 우리에게 왜 이것을 주셨죠?

우리가 개인적으로 싸우는 싸움이 있고요, 하늘에서 오신 분이 세상 전체의 권력자, 악마입니다, 인간의 정신을 장악한 권력자와 싸우는 그 싸움이 또 외부 전쟁으로 있었던 겁니다. 그 외부 전쟁의 결과로 매일 싸움박질하는 우리에게 화평과 성결과 양순과 성령의 열매를 제공한 겁니다.

그래서 “나는 안 싸울래.” 이것보다도 “우리는 싸울 수밖에 없는데 왜 이렇게 평화를 주십니까?” 하고 그 관심사가, ‘우리가 싸우지 않은, 주님이 싸웠던 싸움의 내막이 뭐기에 우리가 거저 평화를 얻게 됐는가?’ 그것을 알아야 해요. 우리 인간끼리의 평화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더 이상 미움도 없고, 주께서 지적할 것도 없고, 나무라는 것과 책임 지우는 것도 없도록, ‘너와 나 사이의 싸움은 이미 끝났어. 무조건 나의 사랑으로 갚아줄게’라는 이 은혜가 왜 난데없이 우리에게 오시게 된 겁니까?

바로 이 점을 가지고 주께서 싸웠던 싸움의 정체, 그 정체를 우리가 알아야겠죠. 로마서 12장 19절에 보면,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우리 개인적으로 싸워서 내가 스스로 쟁취하려는 목적과 목표, ‘그거? 나대지 말고 나한테 맡겨라. 넌 네 싸움에만 국한되지만 그래서는 하늘에서 오는 정결과 평화가 없다’는 거예요. 네 모든 일을 누구한테 맡기느냐 하면, 이게 주의 일로 넘어가야 해요. 주의 일로 넘어가게 되면 사적이고 개인적인 원수라는 것이 애당초 성립이 안 됩니다. “이 웬수!” 아니, 아니 없어요. 너의 원수는 존재하지 않아요.

인간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에 본인이 “저 사람은 내 원수입니다”라는 말은 입 밖에도 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주께서 우리에게는 아예 원수 자체가 성립되지 않도록 하는 것, 그럼 우리가 더 이상 남과 싸울 일이 없죠. 원수가 있어야 싸우죠. 원수도 없는데 누구하고 싸운다는 말입니까?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주님이 친히 이 땅에 와서 주님 원수와의 싸움의 그 현장,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 결과물에 참여하는 식으로 ‘우리가 할 게 없네’ 하고 손 털게 만듭니다. 그게 바로 천국의 모습인데 싸움이, 전쟁이 끝났을 때 결과의 모습에 대해서 마태복음 13장 45-4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값진 진주, 소중한 것을 발견한 기쁨이 얼마나 큰지 그걸 발견한 사람은 자진해서 스스로 자기의 내부성을 소실, 잊어버려요. 기쁘게 잃어버려요. 자아의 내부 내용을 흔쾌히 그걸 상실해 버린다고요. 내가 10살 때 뭐했고, 20살 때 뭐했고, 30살 때 뭐했고, 40살 땐 뭐 했고…, 그걸 다 쓰레기처럼 갖다 버려요.

왜? 너무 귀한 진주를 발견했기 때문에, 그 진주를 발견한 순간 그 기쁨 때문에 내가 지금껏 살면서 가지고 간직한 이딴 것, 이딴 것은 신경 쓰지도 않아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걸 한마디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이미 화평과 하나님의 하늘에 있는 은혜를 받은 사람은 뭘 간파하느냐 하면, ‘소중한 것과 소중하지 않은 것’의 투쟁이 끝났다는 겁니다.

귀한 진주를 발견했다는 것은, ‘소중한 것을 발견했다’라는 그것으로 투쟁 끝, 전쟁 끝, 싸움 끝, ‘내가 시도하는 어떠한 갈구나 투쟁, 이것은 더 이상 나에게 실시할 필요가 없다’라는 것이 이미 확정된 사람, 하나님 전쟁의 결과를 화평이라는 열매로 그냥 받은 사람은 ‘소중한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을 얻은 거예요. 내게 속한 것은 어떤 것도 소중하지 않아요, 내게 속한 것은.

소중한 것은 하늘나라 진주 같은 천국이 소중해요. 다른 것은 소중하지 않습니다. 이미 소중한 것을 얻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이 땅에서 아등바등 싸울 이유가 하나도 없죠. 이 점에 대해서 요한복음 8장 32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동안 우리가 자유치 못한 것은, 소중하지도 않은 내 것 쥐겠다고 그렇게 바짝 긴장해서 산 거예요. 자기 육체 하나, 육신 하나 귀하다고 본 거예요. 그러나 사실은 여러분, 육신이라는 것은 뭐냐? 악마가 같이 죽자고 덤벼든 자폭 장치에요, 자폭 장치. 육신의 끝은 죽음이잖아요. 죽음의 드라마에 인질 잡힌 신세, 이게 우리 신세입니다.

평생 육신이 우리를 괴롭히지 않는 순간이 한시도 없어요. 여러분, 다 육신이 있지요. 나 괴롭히는 고문 장치입니다, 고문 장치. 평생토록 고문을 했어요. 그런데 진주를 발견하고 난 뒤에는 내 것을 다 팔았다고 했잖아요. 자기 안에 내게 없어요. 남아있질 않아요, 다 팔아서. 왜 파느냐? 안 소중하거든요. 누가? 내가 안 소중해요, 내가! 내가 안 소중하니까 이게 화평이고 이게 양순이고 이게 하늘에서 온 성령의 열매입니다.

싸울 일도 없어요. “성도 같으면 양보하세요.” 아니 양보를 왜 하는데요? 양보할 일도 없어요. 내 가치가 소중해야 뭘 양보하지, 양보할 일도 없고 싸울 일도 없고, 그냥 ‘소중한 것과 소중하지 않은 것’ 그 차이만 아시고 그냥 세월을 보내면 되는 거예요. 그 차이만 아시고. 성도답게 뭐 양보를 해서 훌륭하게…, 훌륭하다는 것도 내 안에 남아있는 내용물로 되면 안 된다니까요. 훌륭한 내가 되면 안 돼요. 다 토했다니까요. 다 토해버렸어요.

자꾸 주께서 주신 자유에다 엉뚱한 구정물을 집어넣지 마세요. 내 것이 있는 자는 천국에서 안 받아줍니다. 우리가 전도한답시고 아는 사람에게 진지하게 신경 써서 이야기하잖아요. 예를 들어 자식들한테 물어봐요. “너 천국 갈래?” 그러면 자식들이 뭐 뻔한 답을 해요. “안 갈래.” “왜 안 가는데?” “아직 내 할 일이 많아서.” 자기 내용물이 있는 거예요. 자기가 할 일이 많아서 천국에 못 가겠다는 거예요.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이 점을 너무나 주님께서 아시고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천국 잔치 이야기하는 거예요. “천국 잔치가 있는데 갈래?” “안 갈래.” “왜?” 내가 밭뙈기를 샀다는 거예요. 소를 샀다는 거예요. 또 상업차 그 시간에 출장을 가야 되네요? 심지어 그날따라 자기 결혼식과 겹쳐서 하늘나라 임금님 혼인 잔치에 못 간다는 거예요.

핑계도 많아요. “천국이 소중합니까?” “소중해.” 거짓말하지 마세요. 천국보다 본인이 더 소중하잖아요, 본인이! 적재되어 있는, 내 안에 쌓여있는 게 더 중요하잖아요. 천국이 안 소중하잖아요. 안 소중하니까 천국은 그냥 듣기만 하고 실제로는 자기 일에 몰두합니다. 자기 일 때문에 천국을 못 간다는 게 이미 2015년에 노래로 나왔어요. 그 노래 가사를 알려드리겠습니다.

60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
70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할 일이 아직 남아
못 간다고 전해라

80되면 할 일 없겠네요?

80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쓸 만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
90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알아서 갈 테니
재촉 말라 전해라

알아서 간답니다. 여기에 대한 주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이미 죽었다고 전해라. 너 이미 죽었어.” 자기 것이 있는 사람은 천국에서 안 받아줍니다. 자기가 소중한 데 천국에 들어가서 살 수가 없고, 거기서 어울릴 수가 없어요. 모든 싸움은 어디서 나오는가? 욕심에서 나온다고 야고보가 이야기하잖아요.

왜 욕심이 있느냐 하면, 소중한 것이 없기 때문에 내 것이라도 소중하게 해서, 소중한 것 버리고, 위에서 준 것 버리고 내가 노력해서 얻은 그걸 쥐는 것,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멸망해서 흩어진 열두 지파가 된 겁니다. 그게 세상 것이에요, 이 세상 것.

자,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 것에 너무 미쳐가지고 내 바깥으로 못 나가죠. 뭐 진주가 있든 보물이 있든 관심도 없어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보이지 않는 힘을 포착할 수 있는, 캐치할 수 있는 힘이 없어요. 그래서 위에서 와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위에서 오는 걸 어떻게 포착할 수 있느냐?

위에서 누가 오셨어요, 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 위에서 누가 오셨다고요. 오셨는데 그분이 오실 때부터 알고 있었죠. 마귀와 같이 평생토록 육신 안에 있으면 인간이 지긋지긋하게 인질이 되어 죽음 안에서 저주받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어요. 그걸 알고 계시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어떻게 일하시느냐 하면, 바깥 전쟁을 해요.

이렇게 정리합시다. ‘우리 전쟁보다 바깥 전쟁이 먼저 있는데 그 바깥 전쟁,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과 싸워서 이기는 그 바깥 전쟁 결과물의 효과로서, 아무것도 모르고 나밖에 모르는 우리에게 그 전쟁의 결과물이 주어졌다.’ 이렇게 정리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더 정리를 한다면 바깥 전쟁을 모를 때 인간은 이 무더운 날씨에도 뭐 죽어라 살아 보겠다고 나의 전쟁을 계속해요.

전쟁하다 보니까 짜증도 나고, 신경 쓰이고, 분통 터지고, 남을 밀치고 ‘너 나하고 한 번 붙어볼까?’ 이런 식으로 계속 싸우고 나갑니다. 평화가 없어요. 평화가 성립될 수가 없죠. 주께서 이걸 익히 아십니다. 이미 그걸 알고 계셔요. 자, 우리는 못하는데 주께서 이것을 어떻게 해내시는가?

시편 32편 1절을 제가 먼저 보겠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다시 한번, “허물의 사함을 얻고” 허물의 용서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말은, ‘인간이 노력한다고 해서 자기의 소중함을 탈피할 위인은 없’어요. 자기가 제일 소중해요. 그게 지옥 가게 만들어요.

그런데 그걸 외부 전쟁의 결과로 덮어주시는 거예요. 덮어주시고 가려주시는 것, 특히 시편의 경우에는 이걸 ‘주의 그늘’이라고 해요. 주의 그늘막이라고 하는 거예요. 왜 주님의 그늘막이 필요하냐 하면, 이사야 9장 2절이죠, 이미 인간들은 죽음과 사망의 그늘 안에 놓여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마귀에게 싸움을 걸러 온 주님의 안목이에요. 그 안목으로 바뀌는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주님의 안목으로 보자. 보게 되면 아, 우리가 사망과 저주의 그늘 아래서 그냥 꼼짝 못 하고 참 지긋지긋한 인생을 사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그 그늘, 사망의 그늘에 있는 자를 그걸 걷어내시고 거기에 허물의 죄 사함의 그늘, 죄를 가리우는 그늘, 그늘막을 따로 설치해요. 횡단보도에 그늘막 있지요, 더울 때 펴잖아요. 이 사망의 그늘 그리고 그 사망의 그늘을 뜯어내는 주의 그늘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는, 주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몰아넣느냐? 실제로 현실 자체가 사망이고 저주고 고생이고 힘들다는 것을 몸소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도록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와 똑같아요. 온몸이 안 아픈 곳이 없고요, 한시도 마음 편히 깊이 잠들 때가 없어요. 마귀가 오죽 우리를 괴롭힙니까? 마귀가 괴롭히는 도구가 육신이에요. ‘네 근사한 육신, 네 인생 잘나야 하지 않느냐?’ 이게 우리로 하여금 평생 힘들게 만들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까 개인 원수가 없다고 했죠. 집단적으로 주께서 다루십니다. 어떻게 다루느냐?

노아 때 물로 다 덮어서 죽여버렸습니다. 이게 주께서 진리로 자유케 하는 방법이에요. 물로서 심판해 버려요. 이게 무슨 뜻이냐? 창세기 2장에 보면, 원래 에덴동산에 물이 있었는데 그 물이 어디서 나오냐면 생명나무가 있는 곳에서 흘렀어요. 그러니까 그 물은 생명이 들어있는 물길이었어요.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창 2:10-14).

이 물길이 생명나무가 있는 중앙부에서 내려와서 네 개로 갈라져서 온 땅을 적시고 그중에 특별히 한 동산을 에덴동산이라고 했단 말이죠. 에덴동산에 흐르는 물은, 에덴동산을 포위하는 그 물은 생명에서 나온 물이에요, 생명나무에서. 그런데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부터는 생명나무의 물길이 차단되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생명이 없는 거예요.

있다는 것은 뭐냐? 선과 악에 대해 아는 그 지식, 알아서는 안 되는 선악 지식을 가지고 마귀가 쉬지 않고 이야기해요. ‘네가 하나님이다’라고 했으니까 이제 하나님이 되려는 억지를 부리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겁니다, 선과 악으로! 그 선과 악으로 인간들이 하는 짓이 뭐냐? 자기 영토를 만드는 거예요, 자기 영토.

창세기 4장에 보면 모든 싸움은 뭐냐? 내 영토를 지키고 확장하는 그게 모든 싸움의 주 모습이에요. 내 영토, 내 것, 내 자리, 내 위치 지키는 것, 내 명예 지키는 것, 그 영토는 잠금이 되어 있어요. 잠가 버려요. 남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평생 자기가 감옥을 만들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말 하나, 행동 하나가 뭐냐 하면, 내 영토를 지키겠다는 그 의도, 의지의 발현이 내 행동이고 내 말이에요.

‘이런 말을 하면 내 영토가 잘 보존될 수 있을까? 이런 행동을 하면 내 영토가 잘 지켜질 수 있을까?’ 그 안에 자기가 스스로 죄수가 되어 갇히는 그것을 마귀가 원했던 겁니다. 말려든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은 본인, 나지요 나. 주께서는 그 어떤 인간이 자기 집구석에서, 자기가 만든 영토에서 기어 나올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걸 물로 다 덮어버렸어요.

물로 덮는데 구원이라는 것은 뭐냐? 덮힌 물, 심판하는 물, 저주하는 물, 다 죽여버리는 그 물결에 동동 떠다니는 게 구원이에요. 그게 방주입니다. 물에서 떠오르는데 그것은 뭐냐? 선악과를 따먹은 저주의 물이 홍수가 되어 이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지배하고 난 뒤에 노아는 뭐냐? 노아는 그냥 살았죠. 노아가 산 이유에 대해서 출애굽기 24장에, 나중에 모세 때 ‘왜 노아가 그 홍수 가운데서도 방주 타고 살았는지’ 그 이유가 나옵니다.

출애굽기 24장 6-8절,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하고 그 피를 확 백성들에게 뿌려버렸어요. 피를 뿌렸다고요.

그 피를 뿌림을 받은 백성들은 방금 뭘 얻게 되었느냐 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얻게 된 상태입니다. 율법을 얻은 백성에게 피를 뿌린다는 것은, 율법을 통해 ‘자기 위주로 자기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얼마나 계속해서 욕심과 죄를 양산하고 키우고 마귀로부터 공박 당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 빌미가 된다’라는 것을 끄집어내고, 그 위에 피를 바름으로써 모든 허물과 죄를 사함을 입는 거예요. 피막을 형성해서 덮어주는 거예요.

이 작업을 바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했습니다. 계속 올라오는 죄와 그 언약의 피, 그냥 피가 아니고 언약의 피와의 만남이지요. 그 언약의 피는 어떻게 마련되는가? 장차 올 예수님께서 그 언약대로 피를 흘려서 모든 일이 완료될 때 그 피만이 우리의 죄와 허물을 덮어주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은 죄를 생명나무 되시는 분이 선악과 따먹은 죄까지 본인이 가져가서 아버지한테 저주받아서 아버지가 요구하는 그 의의 대가를 혼자서 값을 치르고, 다 치른 상태에서 그 피로 우리를 덮어줌으로써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더 이상 다툼이 없게 만드는 것, 모든 분쟁을 다 없게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구원받는 성도의 특징은 자기 게 없고 자기보다 더 소중한 것이 바로 예수의 피라는 것을 알아서 모든 만사에 ‘노’가 아니라 전부 ‘예스’가 되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게 고린도후서 1장 20절에 나와요. 내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내가 ‘노’라고 할 게 아니고 모두가 “잘했습니다. 아멘, 예스, 예스, 잘하셨습니다, 패스, 패스”가 되는데 이런 것을 하게 되는 경우,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하느냐?

고린도후서 1장 20-22절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보증으로!

계약하고 계약금 500만 원을 지급했는데 그 금액을 내가 낸 게 아니고, “이 사람의 모든 허물과 죄는 이제 없어. 보증금이 더 중요해. 성령이 더 중요하단 말이야.” 하고 이 성령을 계약금으로 해서 이미 합격의 계약을 맺어버렸어요. 우리가 행한 것보다, 바르게 사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주님의 계약입니다. 주님의 계약이 더 중요하죠.

그러면 정말 성령이 와서 모든 것이 ‘예’가 되고 내 인생에 “아니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가 일체 없어졌다. 그래서 모든 게 “잘하셨습니다. 할 만 해서 하셨겠죠. 다 오케이입니다. 저는 아멘입니다”라고 하는 이 사람들, 이 사람들에 대해 골로새서 2장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2장 11절에,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육신을 벗었다는 말은 지긋지긋한 이 고문 장치, 우리를 괴롭히는 것,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됨으로써 이게 흘러내렸다는 거예요. 따라서 이미 십자가로서, 너를 고소하고 고발하던 모든 성경 구절에 대해서 주께서 십자가로 다 용서, 용서, 용서로 화답해 준 거예요.

“이거 죄지은 거 맞지?” “맞습니다.” “용서.” “네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인 줄 성경에서 알았어, 몰랐어?” “알았습니다.” “죄인 줄 알아, 몰라?” “오케이. 죄입니다.” “용서!” 그냥 용서, 그게 바로 십자가로 승리했다는 거예요. 우리 승리 아니에요.

제발 본인이 본인하고 싸우지 마세요. 본인을 질책하지 마시고, 본인과 다투지 마시고, 본인 멱살을 쥐지 마세요. ‘너 인생 왜 그렇게 살았어?’ 멱살 쥐지 마세요. 그것은 위에서 온 은혜가 없는 사람이에요. 인생은 우리 싸움이 아닙니다. 주님의 싸움 그 결과물이에요, 우리는.

이렇게 십자가로서 용서를 받은 사람의 특징이 있어요. 그 특징이 골로새서 2장 18절에 나옵니다. 십자가에요. 나머지 모든 율법은 그림자니까. 십자가로 승리했다. 18절에,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보물)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이 육체가 문제에요. 육체가 피곤하면 온갖 꿈을 다 꿔요. 육체가 문제입니다. 골로새서 2장 20절에,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무슨 뜻이냐하면요, 이 세상의 절기, 월삭이나 안식일로 인하여 신경 쓰지 말라는 겁니다.

이게 2장 16절에 나와요.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갈라디아서 4장 10절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쉽게 말해서 “너 행함으로 구원받을 거야, 아니면 나의 행함, 나 주님의 행함으로 구원받을 거야?” 그 이야기에요. ‘네가 네 행함에 대해서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은 아직 예수님의 피보다도 네 것이 더 소중하다는 그런 의식이잖아.’ 그런 의식을 천국에서 안 받아주죠. 받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약에서 주께서 피를 흘리심을 예언하시고 모든 허물을 용서한다는데 신약에 와서 그게 어떻게 성도들에게 도달되느냐 하는 겁니다. 역시 물입니다. 물인데 구약 에스겔 47장에서 이런 말씀이 나오는데 제가 읽어드릴 테니까 여러분들이 아무 생각 없이 한 번 듣기나 해보세요.

1-2절,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동(東)’이라는 것은 왕이 왔다가 빠져나가는 그 방향이 동쪽이에요. 성막에 유일하게 동쪽만 트여 있어요. 나머지는 봉쇄되어 있고요.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물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3-5절에,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내가 물에 빠지니까 이젠 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물이 움직이게 하는 거예요. 물이 얕을 때는 내가 그나마 바르게 살고, QT하고, 뭘 열심히 어떻게 하고…, 이렇게 신앙생활 해보려고 했는데 이 물, 이미 완성된 성전에서 나오는 생명수, 생명나무의 취지가 완성됐기 때문에 에덴동산처럼 나오는 그 물이 콸콸콸콸, 감당 못 할 정도로 함몰하듯이 우리 전체를 덮어버리니까 우리가 어떻게 되느냐?

붕 뜨는 거예요. 물이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는 그런 지경에 놓여있습니다. 이게 바로 성령 충만이에요.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나오는 것은 뭐냐? “모든 것이 ‘예’입니다. 잘하셨습니다, 하나님. 참 하나님의 일은 빈틈이 없군요. 참 소중하기 그지없습니다.” 에스겔에서는 이렇게 성전에서 물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그 성전이 어디지?’ 뭐 어디 KAL기 타고 한 번 가보려고요? 요한복음 7장에 보면 37-39절에,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에스겔입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에게서 나온 성령이, 물이 나와서 그 물이 천국 백성이 된 사람에게 도달해서, 버티고 서 있는 천국 백성, 요지부동으로 내가 소중하다고 우기는 그 인간에게 발목부터 물이 적시니까 그 기초가, 발목이 푹푹 빠져요. 그래도 무릎까지는 좀 버틴다고 했는데 이제는 그 뿌리까지, 성령이 우리를 그 바닥과 붕 뜨게 만들어서 이제는 몸 전체가 부력에 의해서 물에 뜨게 만들어요. 뜨게 만든다고요.

안 믿겨요? 여러분 지금 그래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닙니까? 이거 말고 소중한 게 더 따로 없지요! 이렇게 붕 뜨게 되었을 때 그때 상황이 요한복음 14장 18-26절까지 나와 있어요. 18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뭐, 세상 혼자라고요? 혼자 아닙니다. 혼자 아니에요.

그동안 혼자인 것처럼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귀한 그 인생을 자기 싸움을 벌였던 거예요. 마치 혼자인 양 여기면서. 그래서 잘되면 ‘예스!’고, 안 되면 ‘노!’라고 하나님께 삿대질하고, 그래 살았어요. “주님, 이러는 것은 아니지요! 이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주님.” 지가 주님을 가르치고 난리도 아니에요. 그런데 성령이 그 기초, 바닥부터 뜯어내요.

세상에서 붕 뜨게 만드니까 고아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찾아오시면 어떻게 되는가? 요한복음 14장 26절에 보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이 보혜사가 뭐냐? 변호사에요. 변호사, 고아 옆에 붙어 있는 변호사. 어떤 변호사? ‘저 사람의 죄는 이미 덮어졌고 없다’라는 사실을 알려줄 변호사를 보내주는 거예요.

이 변호사 작업을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을 때 …, 이렇게 봅시다. 이것 중요한 건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기억하니까 ‘내가 살아 있는 것은 선하기 때문에 살아 있다’는 거예요. 왜? 악하면 죽으니까. ‘살아 있는 것은 선함’ 선함, 이것을 숫자로 1이라고 카운트해요, 1.

그러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죽으면 없어지잖아요. 없음이 되지요. 그때는 0. 1과 0으로 해서 인간들은 0이 되지 않기 위해서, 1을 1로 버티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간의 제국입니다. 인간이 카운트를 하는 거예요. 우리 가운데 산 사람은 몇 명? 죽은 사람은 몇 명? 카운트하는 거예요. 1, 1, 1, 1…, 1+1+1…, 있음+있음…,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와서 말씀하니까 인간들은 자기가 잘났고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1로 있는 예수님을 0으로 만들었어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사형시켰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0이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이 0이 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이 어두움의 세계 밑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1이에요, -1.

모든 인간은 악마가 시키는 대로 0으로 죽지 않고 더 살기 위해서 1, 더 풍성한 1, 단단한 1이 되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주님의 성령이 와서 우리를 어디로 당겨 올리려고 하느냐? -1로 데려가요, -1. 다니엘과 다니엘 세친구가 그런 경우에요. 특히 대표적인 것이 창세기 19장에 소돔과 고모라에 심판이 있을 그때 17절에 천사가 이런 당부를 해요.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여기에 ‘돌아보지 말라’고 되어 있어요. 창세기 19장 26절에,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 본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소돔과 고모라에 주민들이 있어요.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졌습니다. 누구나 이야기해요. “저것은 죽었으니까 이미 제로(0)가 되었다.” 아닙니다. 제로(0) 그다음이 있어요. -1이에요. ‘제로(0)→-1)’ 제로(0)에서 -1이 될 때 이름이 바뀝니다. 창세기 32장에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서 죽었잖아요. 죽었는데 죽은 야곱이 살았어요.

살았는데 조건이 뭐냐? 이름이 바뀌어요. 자기 이름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이름으로 바뀌어요.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었다고요. 바뀌고 그다음에 ‘해가 돋았더라’(창 32:31) 되어 있어요. 해가 돋았다. 그러면 그전에는 뭐냐? 그전에는 어두움의 일이지요, 어두움의 일. ‘어두움의 그늘 아래’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전쟁할 때 ‘주의 그늘 아래’로 바꿔줘요.

시편 17편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8-9절에 보면,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나를 압제하는 악인과 나를 에워싼 극한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주의 그늘 아래 감추셔서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뒤돌아봤다는 것은 롯의 아내가 플러스(+)를 생각한 거예요. 내가 그때 나의 소중함을 유지했던 나의 영토가 아직도 있었던 거예요, 나의 영토가.

그러나 1이 된 영토도 아니고 제로(0)가 된 영토도 아니고, ‘네가 마이너스(-)가 되는, 마이너스(-)로 오신 주님과 합류하는 새로운 영토에 가려면 너는 네가 살았던 영토를 잊어버려라.’ 그 말입니다. 네가 소중하게 여겼던 그 영토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지옥 가는 영토예요.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욥기 42장입니다.

욥이 잘난 체하다가 하나님 직접 만난 가운데서 끽소리 못 하고 마지막에 욥기 42장 4-6절에 보면,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티끌과 재를 자기 아가리 벌리고 거기다가, 내가 옛날에 잘났던 거기다가 티끌과 재를 가득 집어넣으세요. 이게 ‘죽었다’가 아니라, 영(0)이 아니라 마이너스(-) 세계에요. 마이너스(-) 세계, 악마가 통치하는 세계, 그 저주의 세계까지 주님의 경로가, 절차가 우리 있는 곳까지 와요. 요한복음 14장에 성령이 와야 할 이유가…, 요한복음 14장 20절에,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내 안에’ 거기다가 또 23절까지 추가한다면 또 ‘성령이 내 안에’ 성령, 예수님, 아버지, 그리고 성도 이 전체가 마치 강강술래, 손잡고 있듯이 그러한 세계를 형성한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님의 기도에 나오는데 요한복음 17장 21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이렇게 되려면 독자적으로, 독립적으로 내 인생을 생각한다는 것이 왜 천국에 갈 수 없는가가 밝혀졌습니다. 독자적으로 내가 최고고, 내가 소중하고,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 천국에 가려 해도 못 가지요. 왜? 어울릴 수가 없기 때문에. 야곱은 천국을 못 가요. 이스라엘 되어야 해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야곱에게 찾아와서 야곱이 자기가 소중하게 여기는 그 힘의 근원, 환도뼈를 쳐버리잖아요.

야곱이 야곱으로서 버틸 수 있는 그 뿌리를 쳐버렸다고요, 뿌리를. 그다음부터는 야곱은 뭐냐, 절룩절룩 절지요. 이 야곱의 심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게 누구냐? 야곱이 그렇게도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름이 라헬이에요. 언니는 덤으로 붙은 거고요, 진짜 사랑은 라헬이었습니다. 자식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어요.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라헬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뭡니까? ‘라헬을 사랑한다. 누가 사랑하느냐? 내가 사랑한다. 라헬이 소중하다. 그러면 누가 소중하다? 라헬을 사랑하는 내가 소중하다.’ 주께서는 그 라헬을 죽여버렸어요. 라헬을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잡듯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죽임으로써 누가 사랑의 대상이 안 되느냐 하면, 내가 나의 사랑의 대상이 못되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가지고는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성령이 내 안에, 내가 성령 안에’, 이 천국이 성립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아무리 자기가 훌륭하게 살아도 그것은 선악, 카운트 1이에요. 살아있다, 선악이 살아 있으면 안 돼요. 선악이 살아 있는 것은 하늘나라에 못 갑니다. 제가 어느 날 강의에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제발 선을 좀 넘으세요, 선을!” 이렇게 하면 나는 살고 이렇게 하면 죽는다는 그 영토, 그 영토의 원칙을 넘어서야 해요. 살아도 오케이, 죽어도 오케이가 되는 영토가 있어요. 그게 생명의 성령의 세계에요.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미워하고 반항하고, 주의 원수가 따로 없어요. 우리가 주의 일을 얼마나 훼방질했습니까?

마귀의 종이 따로 없어요. 우리가 마귀의 종이에요. 나밖에 모르는 마귀의 종이라고요. 울고불고…. 왜 웁니까? 왜 울어요? 내 영토가 소중하기 때문에, 내 것이 소중하기 때문에 울잖아요. 그게 위협받을까 싶어서. 하나님께서 라헬을 죽입니다. 라헬을 죽일 때 라헬도 마찬가지고 야곱도 마찬가지고 자기 자신이 소중한 거예요.

라헬이 애를 낳는데 본인이 죽어가면서 급하게 애의 이름을 짓습니다. “에고, 나는 죽는데 너는 태어났구나. 불쌍한 이 자식아. 어미도 없는 자식아. 내가 네 이름을 지을게. ‘슬픔의 자식’이라고.” 그렇게 하니까 이미 하나님을 만났던 야곱은 그 이름을 휘딱 바꿔버립니다. 뭐냐? “베노니, 슬픔의 아들이 아니야. 베냐민,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야”라고.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산하여 심히 신고하더니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창 35:16-18).

1이 0으로 되는 그것이 인생이 끝나는 게 아니에요. -1이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그 마이너스 1이 이 악마의 세계에 와서 피 흘린 그분이 만날 수 있는 영토입니다. 그 영토가 -1이에요. “내가 온 것은 네 잘남을 보려고 온 것이 아니다. 내가 온 것은 죄인을 불러서 나처럼 의인되게 하기 위해서 왔다. 의인은 가라. 내가 필요한 것은 죄인밖에 없어.”

죄가 있어 줘야 피가 덮이는 효능이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주의 할 일이 빛나잖아요, 주의 할 일이. 주의 할 일이 빛날 때 우리는 누굴 찬송하겠어요? 아무 쓸모 없는 우리를 구원하신 생명 되신 주님을 찬양하고 기뻐할 게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이 소중하고, 무엇이 소중하지 않은 것을 이제는 최종적으로 알아버린 그 은혜, 그 은혜를 무엇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거 다 소중하지 않은 일이에요.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잘나도 소용없고 못나도 소용없어요. -1의 세계가 어떤 세계냐 하면, 시간이 흐르지 않는 세계에요. 그게 바로 평화의 세계입니다. 신약으로 넘어와서, 그렇게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성령이 와서 우리로 하여금 ‘네가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라는 것을 알려준 그 사람들을 교회라고, 임시적 교회지요, 임시적 교회라고 그렇게 규정하면서 고린도전서 1장 끝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 잘난 사람 없잖아. 그러나 하나님께서 미련한 자를 택해서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것들을 택해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을 택해서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신다. 이는 누구든지 성도라면 오직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하심이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26-31).

예수님만 자랑하게 하심이라. 우리 이름 말고요, 소중하지 않은 우리 이름 말고, 내 이름보다 소중한 주의 이름을 자랑하라고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주와 함께, 함께 하나 되게 견고하게 하신 겁니다. 팝송에 이런 노래가 있어요.

If you're going to San Francisco
(만일 여러분이 샌프란시스코에 가신다면)
Be sure to wear some flowers in your hair
(머리에 꽃을 꽂고 가세요)
If you're going to San Francisco
(만약 여러분이 샌프란시스코에 간다면)
You're gonna meet some gentle people there
(거기서 여러분은 점잖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노래에요. 여러분은 모르지요? ‘머리에 꽃을 꽂고 가라.’ 미쳤습니까? 그렇습니다. 미친 금달래가 꽃 꽂고 돌아다니듯이 ‘머리에 꽃을 꽂고 가세요. 거기 가게 되면 전부 다 머리에 꽃을 꽂고 있을 겁니다.’ 천국 잔치에 가십니까? 여러분의 옷을 벗으세요. 천국 잔치에 가기 위해서는 단일한, 똑같은 옷을 입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옷을 입지 않고 천국 잔치에 와 있으면 그 잔치에서 지옥으로 추방됩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성령을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새 옷을 입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갈 3:27).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옷을 여러분 머리의 꽃이라 생각하고, 여러분의 새 옷이라 생각하고 여러분이 내 목숨보다 그 옷이 더 소중한 것을 아는 것은 주께서 여러분을 고아 같이 버려두지 않고 찾아온 그 결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한 것 말고 주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돌아보게 하옵소서. 1이 된 우리가 얼마나 잘난 체했습니까? 죽으면 안 된다고 얼마나 버텼습니까? 그러나 죽음 밑에 기다리는 보물 같은, 비로소 알게 된 우리 주님, 주의 나라가 기다린다는 사실, 그분의 의가 있다는 사실, 그것이 우리보다 더 소중한 것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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