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반감의 자리

아빠와 함께 2026. 7. 5. 16:42

반감(反感)의 자리

2026년 7월 5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3:15-18

(3: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3: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3: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천국에 받아주는 기준은 땅에 있는 인간들의 지략과 지혜가 모아서 성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아예 하늘다운 하늘이란 없습니다. 인간들이 거론하는 하늘, 천국, 하나님 나라는 지상에게 지어낸 것들입니다. 인간은 악마의 앞잡이입니다. 이점을 인간 스스로가 알 길이 없습니다.

하늘에게 내려오신 주님이 알려주셔야 압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이 말을 들었던 그 자리의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은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할 지를 몰랐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유대 지도자들은 어떻게 하든지 백성들로 하여금 철저하게 율법에 순종해서 천국 들어가기를 가르쳤고 스스로 시범자가 된다고 자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생각들은 어디까지나 선악 지식에 기조를 둔 사상입니다. “알게 되는 자는 정녕 죽으리라”에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이것도 모르는 인간들은 선을 행해서 악의 무게를 감량하고 능가해서 ‘선한 존재’이라는 평균치를 유지하는 식으로 선한 나라, 곧 천국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생각이 땅의 지혜, 곧 땅에서 악마의 전지적 관점 안에서 통용되는 인식입니다. 이들은 본인들도 천국에 못 들어가면서 들어가려는 자도 막아서는 자들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3)

문제는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이들의 주장에 모두들 수긍하고 동의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도리어 예수님의 말씀과 태도와 행위에 대해서 납득이 안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로서 위에서 오는 지혜는 땅에서 벌써 동용되는 지혜로 차단되는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천국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마 13:44) 이 밭의 보물은 결코 농부가 사전에 숨겨놓은 것이 아닙니다. 즉 농부는 자신이 태어나서 알고 있는 내용이 자기 지식의 전부입니다.

이 밭의 보물은 농부가 아는 범주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천국이나 지옥이나 하나님 나라나 미래나 모두 악마가 통제 내용에서 허용되는 지식이고 의미일 뿐입니다. 하지만 천국은 이 경계 너머에서 옵니다. 농부는 기뻐하고 놀라지 않을 뿐입니다. 천국이라는 범주를 직접 받아들인 자들은 ‘말’이 아니라 ‘하늘의 말씀’에 이처럼 삽입된 자들입니다.

히브리서 9:2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세상 사람들은 악마가 무섭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악마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소환입니다. 도망칠 수 없습니다. 개인적 자부심도 그 앞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미리 소환된 분이 구약에 나옵니다. 이사야 선지자입니다.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2-5) 그 당시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찾았지만 왜 이사야가 보았던 하나님을 알지 못한 걸까요?

그것은 자신들이 저주받을 자라는 인식이 없어서 그러합니다. “저가 판단을 받을 때에 죄를 지고 나오게 하시며 그 기도가 죄로 변케 하시며 그 년수를 단촉케 하시며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 그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 자녀가 유리 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고리대금하는 자로 저의 소유를 다 취하게 하시며 저의 수고한 것을 외인이 탈취하게 하시며”(시 109:7-11)

이 저주성은 하나님의 전지적 관점에서 나온 겁니다. 즉 ‘누가 천국에 갈 자가 인가’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누가 천국에서 거부당하고 안 받아주는 자’인가를 아는 그 자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악마의 전지적 관점의 노예가 된 인간에 합당한 겁니다. 출애굽기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먼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먼저 알려주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것을 땅에 던지라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잡으니 그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또 가라사대 이는 그들로 그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함이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 손에 문둥병이 발하여 눈 같이 흰지라”(출 4:2-6)

지팡이는 사물입니다. 모세는, 본인은 살아 있고 지팡이는 죽어 있는 사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지팡이를 뱀, 곧 주님께서 오셔서 싸워야 될 대상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이란 이 ‘유령을 입법화’한 것입니다. 이 악마가 인간들로 하여금 ‘처음 자리’와 ‘나중 자리’를 알지 못하게 만든 겁니다.

우리는 인생은 그저 과정입니다. 자신이 자리를 다루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 믿음’은 이미 예수님께서 백부장을 통해서 알려주셨습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9-10)

우리가 평소에 악마의 속성으로 인해 감추고 있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항감, 반발심, 반감(反感)입니다. 인간이 본인의 인생에 대해서 늘 원망스럽게 봅니다. 이것은 결국 그 모든 탓은 하나님 탓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본인이 본인을 용서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내일 걱정하지 않는 들풀과 참새가 되어 삽시다. 이것의 위의 지혜의 열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지식을 더하기 나아지는 자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저주받을 자임을 아는 경계선상의 존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1강-야고보서 3장 15-18절(반감(反感)의 자리) 260705-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3장 15-18절입니다.

야고보서 3:15-18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야고보’는, 흩어진 열두 지파에게 주기 때문에, ‘전에 열두 지파로 있었던 이스라엘의 그 원칙이 이제는 완성형으로서 너희에게 적용되었다’라는 것을 전제로 계속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이스라엘 때는 모든 하나님의 계시가 수평적이라서, 쉽게 말하면 ‘내가 말씀을 줄 테니까 넌 똑바로 살아.’ 하는 어떤 가능성 같은 것이 비쳐지는 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도 알다시피, 열두 제자가 다 알다시피 이미 이스라엘, 다시 말해 인간은 실패했어요. 인간은 실패했습니다. 이걸 인간들이 안 받는 거예요. 받아주질 않는 거예요. 아까 기도한 집사님이 참 멋진 대목을 언급했어요. 폭풍 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욥 42:3).

질문 자체가 이거에요. ‘무지하다’라는 것을 전제로 질문 한 거예요. 그런데 답변하는 사람이 안 무지하려고 하면, 그것은 지금 주님의 취지를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무지해요. 구약은 무지한데, 신약에 오면 인간은 무지한 게 아니고 악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저 아는 게 없습니다”가 아니라, “저 하나님께 반감(反感)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반항하고 싶어요. 그런데 그게 접니다.”

내가 반항한다, 반감 갖는다는 이게 ‘일부러 하나님께 대들자’가 아니라, 15절에 나오죠.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그러면 지혜가 위로부터 안 주어져도 지혜가 이미 땅에 있는 겁니다. 그 지혜가 뭐냐? 정욕적이고, 마귀적이고, 세상적이에요. 세상과 마귀를 같이 보고 있습니다. 왜? 악마의 통솔 아래 있으니까요.

이미 인간 세계에 지혜가 통용되고 있는데 그 지혜의 특징은 악마적이라는 거예요. 악마의 마음을 주고받고, 주고받고 하면서 살아오고 있던 것이 바로 야고보가 볼 때 이 세상의 형편입니다. 16절에 보면,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저는 무지합니다. 이제 제대로 살게 하옵소서.” 하지만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면 시기와 다툼이 끊이지를 않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좀 솔직해라.” “저는 하나님의 지식을 알고 싶습니다. 무지하니 깨닫고 싶습니다.” 하면 “그건 네가 지어낸 빈말이고 너 솔직하게 생각해 봐. 너 하나님 싫지, 그지?” 그거예요. “너 나 싫어하잖아. 싫어하면서 교회 나왔잖아. 왜 사람이 솔직하질 못해?” 구약에서 욥은 무지했죠. 신약에서는 본격적으로 하나님을 싫어해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들풀을 언급하고 참새를 언급하는 이유가 뭡니까? ‘너희는 왜 들풀이 되지 못하고 참새가 되지 못해? 그것은 너희들 안에 이미 악마의 마음을 할당받고, 그래서 다들 악마의 마음으로 무장되어서 붙었다 하면 시기와 질투, 시기와 질투가 끊어질 새가 없’어요. 그런데 이 시기하고 질투하는 본인이 좋은 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 그겁니다. 내가, 내가 싫어요. 시기 질투하는 내가 싫어요. 나밖에 모르는 내가 싫다고요. 내가, 내가 싫은데, 내가 날 보기에 내 인생 사는 게 짜증이 나는데, 중요한 것은 그 책임이 하나님한테 있다는 거예요. 짜증 안 내고 싶어도 짜증이 나요. 날씨가 더운데 짜증이 나죠. 불평 안 하고 싶은데 불평이 나와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 모든 책임이 하나님 당신 때문’이라는 거예요. 이게 악마적입니다. 제가 성경 말씀 하나 들려드릴 테니까 예로 한 번 들어보세요. 마태복음 6장 14-15절,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딱 이 말씀을 들으면 사람들에게 퍼뜩 떠오르는 것이, ‘남이 나한테 해코지해도 나는 용서할래. 보이스 피싱으로 돈 가져가도 용서할래.’ 왜? 노림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저 사람을 용서했죠? 7번 용서했죠? 이제는 하나님이 날 용서할 차례 맞죠? 우리 하나님 말씀대로 갑시다. 하나님이 분명히 우리에게 언급한 말씀대로 갑시다. 내가 저 사람을 용서했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이 날 용서할 차례입니다. 맞죠?”라고 이 말을 붙잡고 하나님께 그런 식으로 요구할 수가 있어요. 요구하고 싶어요, 이 말씀을 들으면.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 솔직하게 생각해. 남은 용서했는데 넌 너 자신이 용서가 안 되잖아. 우리 선수끼리 왜 이래? 이 마귀야, 지금 네 인생 자체가 짜증 나잖아. 네가 너 자신이 용서가 안 되는데 뭘 남을 용서해? 어디서 흉내 내고 있어?”

이 땅에 지혜가 없는 게 아니라 있어요. 있는데 그게 마귀의 지혜에요. 마귀의 전지적 관점이에요. 아래의 지혜입니다. 그 아래의 지혜, 악마에 사로잡힌 인간들, 그 인간들에 대해서 야고보는…, ‘구약 때 왜 이스라엘이 망했느냐?’ 망해도 그 이유를 몰랐어요. ‘내가 잘못해서, 내가 부족해서, 내가 다시 깨우치면 인생 역전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모든 탓을 내 탓으로 여기는 데 신약에 와서 야고보가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그것은 네 탓이 아니라는 거예요. 넌 악마의 종이 되었는데 종을 보고 탓할 수는 없다.’ 그 말이죠. ‘널 종으로 만든 마귀가 문제지 네가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악마는 자꾸 인간을 앞장세워서 ‘내 탓이요, 내 탓이요.’ 이래 나온단 말이죠.

‘하나님,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제 말씀 주셨사오니, 복음 주셨으니 이 복음 믿고 제대로 살겠습니다.’ 주께서는 “그러지 마. 너 아직도 모르겠어? 그 발언 자체가 악마의 발언이야.” 오늘 본문이 그 해답을 제시합니다. 17절에 나옵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종류의 지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이미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지혜, 악마의 지혜, 이게 마귀적이니까요, 악마의 지혜가 있어요. 이미 통용이 되었어요. 이게 표준어입니다. 모든 의미는 악마의 지혜 안에 있을 때 인간들끼리 통해요. 인간들끼리 통하는 그 의미가 이미 구축되어 있는 상태에서 인간들이 들어도 들어도 도저히 못 알아듣는 지혜가 인간 속에, 신약시대에 투입되었습니다.

그 지혜를 야고보는 ‘위에서 온 지혜’라고 했어요. 그 위에서 온 지혜가 있는데 악마의 지혜로 이미 선점을 당한 입장에서는 위에서 온 지혜를 못 알아봅니다. 인간들은 이래요. 성경 보면서 ‘아, 우리가 이런 나쁜 짓을 했구나. 내가 죄인의 괴수가 맞다.’ 그런데 ‘어, 하나님에게서 온 지혜가 있다. 자, 이 하나님에게서 온 지혜를 내가 수용하고 내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로 그 마귀 지혜를 추방하면 나는 하나님의 지혜가 되어서 구원받을 수 있겠다. 고맙다, 야고보. 고맙다, 요한. 그리고 베드로야. 사도들, 사도바울 고맙습니다.’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그게 마귀가 시키는 일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 있습니까? 분명히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사람은 빠져요. 사람은 빠지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의 문제입니다. 울산 강의에서도 했는데, 창세기 4장에서 형이 동생을 죽이는 사건이 나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어요. 그때 하나님은 이걸 아시고 벌을 내립니다.

인간들 입장에서는 ‘가인 너 이제 죽었어. 하나님이 얼마나 무섭다고. 네가 한 살인죄 다 알고 있어. 넌 이제 죽어난 거야’라고 은근히 기대하면서 동생을 죽인 살인보다 더 잔인한 벌을 내릴 거라고 기대했는데 어,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죽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가서 “누구든 가인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라고 하는 거예요.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창 4:15).

인간은 기본적으로 마귀로부터 정신을 이미 어릴 때부터 받았기 때문에 내가 사는 것이 복인 줄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 생각이 사실은 하나님의 지혜와는 다른 악마의 지혜에서 나온 생각이에요. 하나님의 징벌은 우리를 죽이지 않고 살리는 데 있습니다. 그게 저주받은 모습이에요. 우리의 소원은 남북통일이잖아요. 악마의 소원은 내가 사는 거예요. 잘 먹고 잘사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복은 뭐냐 하면, ‘말’로 통하는 인간 세계에 인간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씀’을 줘서 기존의 ‘말’로 사는 인간을 파괴하는 거예요. ‘말씀’으로 인간을 파괴하는 것, 그게 최고의 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요. 아예 나를 파괴해버리면 나에게 주어지는 천국의 영생은 인간이 빠진 상태에서 주님과 뱀의 문제였다는 사실, 이걸 날마다 새롭게 받아주는 거예요. 거기에 내가 끼어들어서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면 안 돼요, 그것은! 그건 마귀의 꾐에 빠진 거예요.

예수님에게서 나온 모든 말씀, 성경 전체 말씀은 ‘제발 너한테서 손 좀 떼’라고 주신 말씀이에요, 손 떼라고! 마태복음 8장에서 천국에 들어가는 믿음을 예수님께서 과감하게 제시했습니다. 바르게 살겠다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있는데 천국은 그런 믿음이 있는 자가 가는 게 아니고 이런 자가 천국 간다고 제시된 예가 뭐냐? 바로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 8:9).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이 사람이 천국을 차지하고 천국에 가지도 못하는 인간이 앉아 있으면 다 쫓아내는 거예요. 마태복음 5장 20절에 보면, 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들에 대해서 예수님도 알고 있어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서 천국 가려면 어느 게이지까지, 어느 정도까지 착해지고 의로워야 하는가에 대해 집중해서 평생을 소모했던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그 사람들에 대해서 마태복음 23장 33절에서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평생 지옥 가는 짓을 하면서 지옥을 피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거예요. 네가 악마로부터 얻은 지혜로 바르게 살겠다는 그 자체가 점점 더 지옥 굳히기에 들어가는 거예요, 지옥 굳히기. 그것 때문에 가인은 살아야 해요. 왜? 모든 인간은 가인의 후예가 되어야 하니까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인간은 들풀이 되지 못하고 왜 인간은 참새가 되지 못합니까? 들풀, 참새는 스스로 살 생각을 안 해요. 본인 걱정을 안 해요. Don’t worry, 걱정을 안 한다고요. ‘내가 나이가 몇 살인데…’, 그걸 카운트를 안 한다고요. 들풀과 참새는 카운트를 안 해요. 들풀은 내일 불쏘시개로 들어갈 거예요. 그래서 들풀의 마감은 사람 손에 베어져서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게 운명이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도착 환경’이에요. 인간은 왜 들풀이나 참새가 되지 못하느냐? 도착 환경을 모르고, 그다음에 ‘기원’을 몰라요. ‘내가 어디서부터 시작했는지’를 몰라요. 내가 마귀로부터 시작한 것을 모릅니다. 더 쉽게 말해서 인간은 악마와 자기의 연결점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걸 감지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서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지옥 간다.” 예수님이 이렇게 이야기 할 때 그 현장에 저와 여러분이 있다고 한다면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있다면 그들은 생각이 막 복잡해요. 악마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평생을 애썼는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게 지옥 가는 지름길이라고 했어요. 악마하고 떨어지려고 애썼는데, 악마는 악하잖아요, ‘악한 것에서 떨어져 선한 존재가 되려고 애썼는데 어떻게 그게 악마와 한통속이냐’에 대해서 논리적인 감각을 정리하는데 머리가 아주 복잡해요. 머리가 굉장히 복잡합니다.

제가 예수님은 아니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하나 던질 테니까 여러분이 그 논리성을 한 번 만들어보세요. “축구 말아먹은 홍명보 욕하는 사람 지옥 간다.” 32강 광탈당하고 한국 축구 말아먹은 홍명보 욕하면 지옥 간다. 그 논리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주 복잡할걸요? 해답이 궁금해요? 홍명보 탓을 하는 그것이 결국 누구 탓을 하는 거냐?

‘하나님, 당신 탓이에요. 나는 한국이 월드컵 탈락한 게 아주 불편해요. 내가 한평생 살면서 이 불편한 꼬라지를 왜 보게 합니까?’ 그러면 너 같으면 어떻게 하느냐? 홍명보 미국으로 도망갔으니까 한국으로 못 들어오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러면 네가 행복해? 행복하냐?” 악마의 지혜 안에서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족함이 없어요. 들풀이 되지 못하고 참새가 되지 못해요. 항상 뭔가 불안해요. 축구 말고 또 다른 일이 또 터질까 봐. 그리고 뭐라도 터지면 모든 책임은 누구냐? 하나님 당신 책임이고.

오늘 설교 제목을 정하라면 이겁니다. <반감의 자리를 찾아서>입니다. 우리 자리, 우리의 시원(始原), 우리의 시작점은 악마의 자리지, 자기가 하나님도 아닌 게 뭐 무(無)의 자리, 무의 자리 아니에요. 우리 모든 생각과 사고는 악마와 한통속이 된 그 자리부터 출발해야 돼요. 그럴 때 비로소 ‘위에서 온 지혜를 왜 내가 거부하고, 내가 싫어하고, 내가 못 알아보는지?’ 그 이유가 밝혀집니다.

왜 이 성경 말씀 듣는 게 싫은지, 말씀에 반하는 게 아니고 자꾸 자기 자신한테 반하고 싶은 이유가 있어요. 말씀은 우리를 파괴하거든요. 그래서 싫은 거예요. 말씀은 우리의 어떤 가능성도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약간, 많이는 아니고 왜 싫은지 그 이유에 대해 한 세 군데만 말씀을 찾아봅시다.

시편 109편에 7-16절 약간 길어 보이지만 쭉 읽으면 뭐 별로 안 길어요. “저가 판단을 받을 때에 죄를 지고 나오게 하시며 그 기도가 죄로 변케 하시며 그 년수를 단촉케 하시며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 그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 자녀가 유리 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고리대금하는 자로 저의 소유를 다 취하게 하시며 저의 수고한 것을 외인이 탈취하게 하시며 저에게 은혜를 계속할 자가 없게 하시며 그 고아를 연휼할 자도 없게 하시며 그 후사가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저희 이름이 도말되게 하소서
여호와는 그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 어미의 죄를 도말하지 마시고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저희 기념을 땅에서 끊으소서.”

이 말씀, 이 말씀을 딱 듣고 난 뒤에 “아멘, 감사합니다. 제가 이렇게 당해야 마땅하군요” 하고 안다면 그 사람은 자기의 시작점에 도착한 사람이에요. 주께서 우리의 시작점, 기원을 이렇게 저주로 딱 잡아줬을 때 저주로 이렇게 잡아주는 것은, ‘이제는 내가 내 인생을 개시, 실행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나에게 찾아와서 말씀이 말씀대로 끌어가고 있는 그 개시점에 서 있다’라는 것을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주여 말아먹게 하옵소서. 내 돈 번 것 보이스 피싱으로 다 가져가게 하시고,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고…’ 뭐 성경대로예요. ‘나는 죽어도 내 자식만큼은 잘돼야 한다고 했는데, 그 자식은 빌어먹게 하소서. 대대로 빌어먹게 하소서.’ 왜? 하나님께 반항의 감정을 갖고 있는 그 악마와 한통속이 된 것에 대해 정확하게 그 저주를 체험케 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될 게 아닙니까?

그래야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부터 출발한다는 것이 동의가 되지 않겠어요? 약간 지긋지긋하겠지만 두 군데를 더 찾아보면 시편 69편 22-24절,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저희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저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로 저희에게 미치게 하소서.” 뭐 그런 기도죠. 27-28절에,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신나지 않습니까? 한군데 더, 시편 35편 24-26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저희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저희로 그 마음에 이르기를 아하 소원 성취하였다 하지 못하게 하시며 우리가 저를 삼켰다 하지 못하게 하소서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들로 부끄러워 낭패하게 하시며 나를 향하여 자긍하는 자로 수치와 욕을 당케하소서.”

같은 뜻인데요, 여기서 아까 이야기한 마태복음 6장의 ‘남을 용서하는 자는 용서받는다’라는 주의 말씀을 왜 우리가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단순히 무지한 게 아니고요, 반감을 가지고 그냥 하나님이 싫어요. 이유 없이 그냥 하나님이 싫어요. 태어날 때부터 싫어요. 해 떠서 해 질 때까지 싫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싫어요. 누가? 하나님이.

그런데 주께서 오셔서 “그것은 네 잘못이 아니야!” 이게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그게 네 잘못이 아니야. 네가 배우고 들은 것이 땅의 지혜밖에 안 들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 그런데 내가 왔잖아, 내가! 위에서 내가 왔잖아.” 위의 지혜자는 예수님, 땅의 지혜자는 악마, 그 가운데 너는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나이다 하는 신세. 성경이 뭐가 그게 어렵습니까?

어려운 게 아니고 우리가 반감을 가지고 있는데, 야고보서의 이 말씀을 강력하게 거부하는 본성을, 하나님의 말씀이 오게 되면 발각당하죠. ‘아, 지금껏 내가 살아온 것이,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르고, 그냥 과정에 있으면서 그게 전부라고 여겼던 그것이 속았어, 속았어.’ 속은 거예요. 악마에게 속은 거예요.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속은 거예요.

여기서 그다음부터는 “주님이 저를 어떻게 구원하실 겁니까?”가 아니라 “맞습니다. 저는 싫어요. 주님이 싫고, 하나님도 싫고 다 싫어요. 성령이고 삼위일체고 다 싫어요.” 싫은데, 우리가 싫어서 배격하는데 주님의 그다음 조치가 뭡니까? 하나님의 조치는 뭡니까?

마태복음 13장 44절에 여러분이 잘 아는 말씀이 나옵니다. 일단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농부가 사전에 그 밭에 남몰래 보물을 본인이 감춰뒀습니까? 아니죠. 그 밭은 그냥 일반 밭이에요. 농부는 안에 보물이 들어있다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농부는 그냥 밭이 있으면 밭 갈아 농사짓는 것이 자기가 태어나 속한 그 범주에요, 범위에요. 그런데 이 농부의 경계선, 하늘의 지혜와 땅의 지혜 사이가 끊어졌어요. 절단돼서 도저히 인간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해하지 못하는데 움직인 쪽은 어느 쪽에서 움직였느냐 하면, 주님 쪽에서 움직였어요.

주님 쪽에서 움직여서 농부 몰래 농부가 접근하는 그 밭에 보물을 놔뒀단 말이죠. 그러면 이 경계선, 하늘과 땅의 경계선을 누가 알게 되었느냐? 농부가 그 경계선을 알게 된 거예요. 감지한 거예요. “그 경계선을 어떻게 넘어갑니까?”라는 그것은 농부 소관이 아니에요. 농부가 기뻐한 것은 경계선이 있다는, 그 경계선이 있음으로써 땅 말고 하늘의 세계가 따로 있다는 기쁨이에요!

뭐 인간보고 성경대로 뭐 대단하게 바르게 살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위의 세계가 있다는 거예요. 그동안 학교에서 그런 거 가르침 받은 적이 없어요. 우리 외손주 외손녀 초등학교 보내는데, 지묘초등학교 보내거든요. 목요일 셋째 시간에 “천국이 어떻게 있는지를 가르치겠습니다.” 이런 거 합니까? 그런 걸 가르쳐요? 몰랐죠.

자, 그러면 초등학교는 모른다고 치고 그러면 여러분들은 아십니까? 과연 이 말을 아는지 또 성경 구절을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장 27절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말해요.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마귀다”라고 하거든요? 악마라는 거지요.

악마는 무서운 것도 아니에요. 악마보다 더 무서운 게 있어요. ‘하나님의 소환’입니다. “이리 와, 이리 와, 이리 와! 몽땅 이리 와. 내가 분명히 히브리서 9장 27절 이야기했어, 안 했어? 사람이 죽는 것은 이미 정해진 거고, 그 뒤에 소환해서 심판한다고 했어, 안 했어?”

아직까지 성령을 받지 못해서 악마 편에 있으면 반감이 있는 사람은 교회 나가서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면 주님이여, 절 살려주세요.”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것은 기쁜 게 아닙니다. 평소의 악마 행세를 지금 교회에서 계속 발휘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이렇게 나오는 것은 그런 것은 여전히 마귀 짓이에요.

그러면 뭐냐? ‘아, 마귀 무섭다, 무섭다, 했는데 주님의 소환, 말씀으로 소환하는 게 마귀보다 더 무섭군요. 내 모든 의미가 확장되게 해 주신 것에 대해서 주여, 감사합니다.’ 내가 아는 의미 그 의미를 죽음이라는 경계선마저 더 넘어서서, 죽는 것은 정하신 것, 곧 신경 쓰지 말란 소리죠. “죽는 것은 정한 것이고 네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내가 소환할게.”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이미 안 죽어도 죽음을 넘어선 사람이 되고요, 죽음을 넘어선 사람이 어디 서느냐 하면, ‘내가 이렇게 행동한다’가 아닙니다, ‘여러분, 교회 나와서 이렇게 사세요.’ 이렇게 내가 스스로 행동하라는 말이 아니고, 누구 앞에 서라는 거예요. 말씀 앞에 늘 소환당하는 이 기쁨, 이 즐거움, 이 감격, 이게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뻐요.

주님 앞에 소환당하는 거예요. 아빠가 평소에 2주 동안 저 멀리 부산에 가 있다가 오랜만에 대구에 오면요, 아이들 둘은 아빠가 좋아서 졸졸 따라다닌다고요. 왜? 자기를 안 바라봐요. 뭘 보는가? 키 1백7십몇 센티의 그 아빠만 쳐다본다고요, 아빠만. 이것은 아빠가 소환한 게 아니고 본인들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자기가 안 좋아, 자기보다 아빠가 더 좋아요.

아빠와 더불어 있는 것을 기쁨과 고마움, 감사하고 있다고요. 누구 애들이라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겠습니다만 저와 여러분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갑니까? 바로 이걸 야고보가 알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이미 구약 때부터 수백 차례 이야기했어요. “내 앞에 서라. 나와 함께 살자.” 한두 번 이야기한 게 아닙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살려고 애쓸게요. 노력하겠습니다.” 주께서 말씀을 주신 것은, ‘나와 함께 살자’는 그 말씀을 주신 것은, 네가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게 아니라 ‘넌 그 능력이 없어. 네가 나빠서가 아니고 땅의 지혜, 귀신의 지혜에 매여 살기 때문에 그렇다’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은, 기어이 인간이 마귀한테 속아있다는 것을 들춰내고, 그런데 그 들춰내는 일을 하신 분이 곧 함께 있는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거예요. 네가 뭘 하는 게 아니고, 일은 주님이 하는데 넌 그 앞에 노출되었다는 것, 그걸 감격하고 감사하라는 거예요.

하지 말라고 하는 그게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성경 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좀 그렇게 들을 수 있는 귀 없어요? ‘내가 다 알아서 너에게 준다. 왜? 너는 들풀이니까, 너는 참새니까! 걱정 뚝! 걱정하지 말기. 걱정하기 있기, 없기? 없기!’

야고보는 이미 구약을 알고 있어요. 구약 출애굽기 4장에서 벌써 모세 자체가…, 그때는 ‘악마’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때는 ‘뱀’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이미 뱀과 한통속이었다는 것을 출애굽기 4장을 통해 직접 모세 당사자에게 보여줬어요. 그 대목을 읽어드리면 출애굽기 4장 2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모세야!” “예” “네가 들고 있는 것이 뭐냐?” “지팡이입니다.” 그 현장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면, “들고 있는 것이 뭐라고?” “지팡이입니다.” “뭐라?” “지팡이입니다.” 지팡이는 사물이죠. 지팡이는 사물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감각이 없죠. 임윤찬이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우리나라의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치니까 그 연주를 들었던 사람들이 아주 감동하면서 이런 평을 달았어요.

그 평이 너무나 적절한 평이에요. ‘연주할 때 임윤찬 연주자가 긴장하는 게 아니라 피아노가 긴장한다’는 거예요. 피아노가 긴장한다. “모세야, 네가 들고 있는 게 뭐냐?” “지팡이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는 지팡이에 대해서 ‘이미 죽어있는 사물’이죠, 사물, 사물이라는 범위에요. 악마가 준 지혜 안에서 ‘자기는 살아있고, 그것과 대비해서 나는 살아있는데 내가 들고 있는 지팡이는 죽어있다’죠.

하나님께서 “지팡이 한 번 던져봐라.” 던질 때 살아있는, 움직이는 모세가 못 움직이는 지팡이를 던졌어요. 던지니까 뱀이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가? 그게 바로 유령을 입법화시키는 거예요. 입법이라는 것은 국회의원이 하는 일이잖아요. 법을 만들잖아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상대자를 주께서 입법화, 율법화 시켜서 ‘너는 그 보이지 않는 유령으로부터 법적으로 압제 당하고 있다’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선악 지식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는 내내, ‘항상 악을 버리고 선한 쪽에 살아야 복을 받더라도 받는다’라는 악마의 갇힌 사고방식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했던 거예요. 악마가 선악과를 준 것은, 우리 자신에게 우리 자신이 스스로 덫이 되게 한 거예요, 악마가!

덫이 된 그 상태에서 성경을 백 독하고 천 독 해봐야 ‘열심을 다 합니다, 최선을 다합니다, 바쁜 와중에도 교회 나왔습니다, 주님 잊지 않기 위해 애썼습니다…’ 내가 하나님 일 하는 것에 대해 일일이 그걸 기억해서 장부 정리하듯이 해서 오늘도 봉사했다, 착한 일을 했다, 자꾸 기록하는데 ‘네가 너를 상대하는 그것이 바로 악마의 노림수’였다는 거예요, 악마의 노림수.

좀 이젠 네가 너를 놔줘야 하는데 놓지를 못해요. 하나님이 좋은 것이 아니고 내가 좋기 때문에 그래요. 애쓰고 노력하는 데 인생에 어려움이 왔다. 그러면 손가락 들고 손가락질하는 거예요. “다 하나님 때문에…”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 보내서 “이 독사의 새끼들아! 네가 독사의 새끼야. 지옥을 못 면해. 가! 지옥으로.”

바르게 살겠다는 게 지옥 가는 길이에요. 아무도 안 가지죠. 왜? 똑같이 마귀 교육을 다 받았기 때문에요. “넌 네가 아까워죽지? 아까워죽어.” ‘저를 파괴시켜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 해봤어요? 네가 너를 상대하는 그것이 바로 악마의 노림수였다는 거예요, 악마의 노림수. 이제는 좀 네가 너를 놔줘야 하는데 놓지를 못해요. 하나님이 좋은 것이 아니고 내가 좋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그렇게 노력하는 데 인생에 어려움이 왔다. 그러면 손가락 들고 하나님 탓하는 거예요. 다 하나님 너 때문이라고.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 합니까? 예수님 보내서 “이 독사의 새끼들아.” 주님은 “네가 독사의 새끼들이야 너는 지옥을 못 면해. 가 빨리 지옥으로. 바르게 살겠다는 그게 지옥 가는 길이야 그게. 아무도 안 가르쳐 줬지? 왜? 똑같이 마귀 교육을 다 받았기 때문에. 너는 네가 아까워죽지, 아까워죽어.”

“저를 파괴시켜 주옵소서.” 이런 기도 해봤어요? 지금 우리 안의 덫은 뭐냐? 우리 안의 사탄의 씨앗은 뭐냐? 나 자신이에요. 내가 날 괴롭힌다고요, 내가! 개뿔도 아무것도 아닌걸. 주님께서는 그런 기적을 일으키고 그다음에 또 모세보고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쉽게 말해서 “모세야!” “예!” “너를 애굽으로 보내는 것은 애굽이라는 뱀 국가에서 하나님의 아들 되는 민족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이 아니다.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 뱀과의 싸움이다. 그러면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가? 네 손을 한 번 봐라.” “멀쩡합니다.” 관리를 얼마나 잘했는지. “멀쩡해? 그러면 네 손을 저 더러운 물에 한 번 집어넣어봐.” 이렇게 하지 않고 “저 구정물에 네 손을 넣어봐.” 그렇게도 하지 않고요, 화장실에 넣어보라고도 하지 않고 “네 손을 네 품속에 넣어봐라.”

그래서 손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끄집어내니까 자기 손을 보고 누가 놀랬냐 하면 본인이 놀란 거예요. 어비야! 이게 얼마나 충격적인 상황인지, 손 부위만 지금 문둥병에 걸렸어요, 손 부위만. 나머지 팔 부위 이런 쪽은 아직 문둥병에 안 걸렸어요. 그런데 가만 보니 번질 낌새에요. 내가 그토록 애지중지하고 그렇게 아끼는 내가 바로 지금 무슨 상태? 저주받은 상태예요.

그런데 저주라 하는 것은 마귀한테만 저주하잖아요, 하나님이. 마귀한테만 저주하는지 알았더니만 나한테 저주가 왔다는 것은 이미 마귀와 한 자리에 같이 있다는 거예요. 맹자 엄마는 맹자를 잘 키우기 위해서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알지요. 얼만 지사충성 애를 교육시킵니까? 그 정신을 이어받아서 오늘날 서울의 강남에 있는 아줌마들도 강력하게 자식 잘 키우려고 애씁니다. 문둥병 환자가 문둥병 환자를 제대로 된 문둥병 환자 되게 하기 위해서 강력하게 교육하고 있어요.

배제 고등학교 학부모 대표가 나와서 ‘이것은 부당하다’라고 시위까지 할 정도로 얼마나 우리는 육적인 관계에 대해서 기를 쓰면서 자꾸 감추는 게 있어요. 내 자식 잘못되면 모든 탓은 누구 탓이다? ‘하나님 당신 탓입니다. 나는 열심히 하는데 하나님이 내 자식 작살냈잖아요.’ 이 성경 전체가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구조화 된 상황을 소개하는 겁니다.

그러면 머리 좋은 사람들이 보면 딱 나왔지요. ‘아, 우리는 빠지는구나.’ 우리의 운명에서 우리는 빠지세요. 빠지고 예수님하고 누구하고 상대하느냐? 하늘의 지혜자 예수님과 땅의 지혜자 뱀하고의 관계를 이 두꺼운 성경책으로 묘사해 놓은 거예요. 어떻게, 기쁘지 않습니까? 성령이 오는 것은, 지난 낮 설교에 했어요, 예수님의 관점이 오는 것은 하늘의 시선, 전지적 관점이에요.

전지적 관점, 한 주 지났다고 다 잊어버렸지요. 전지적 관점이 뭐냐? 요한복음 5장 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모든 성경은 내가 압수한다. 내가 가져간다. 가져가서 내가 다 이루고 지킨다.’ 이것이 전지적 관점이에요.

왜 주께서 그렇게 도발적인 발언을 하느냐 하면, 이미 인간들의 이 세상에 통용되는 모든 관점은 악마의 전지적 관점이에요. 악마가 우리의 정신을 다 가져갔어요. 모든 해석할 때 ‘너는 위대해, 너는 훌륭해, 너는 천국 갈 수 있어’ 이런 관점으로 성경을 보도록 악마가 뒤에서 조장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인간은 문둥병자잖아요. 우리 인간의 것은 ‘말’이고 주의 ‘말씀’이 저주받는 자리로 우리를 자꾸 데려 가요. 우리를 저주받는 자리로 데려갑니다. 저주받은 자리에 가야 천국의 믿음이 생겨요. 저주받는 자리에 가야 “아이고, 모르겠습니다.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이런 기쁨의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구약 때부터 그게 이미 있었어요, 구약 때부터. 구약 때부터 저주, 저주를 언급하는 이유가, “네 자리 빨리 찾아가야 해.” 그 자리를 주께서 찾아가게 하는 그것이 이사야 6장 1-5절에 나옵니다.

“웃시야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너무나 거룩한 공간을 보는 순간 이사야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얼마나 거룩한지 문지방의 터가 요동했어요.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했다는 말이지요. 모든 눈에 보이는 물체, 사물의 배후에는 주님이라는 영적 존재와 그리고 악마라는 영적 존재가 있었어요. 악마가 눈을 감기게 해서 못 보게 하지만. 영적 존재를 위해서 주께서는 유령을 입법화시킨 거예요.

그러고 난 뒤에 이사야 입에서 인간에게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고백, 욥이 재를 뒤집어 쓴 취지가 나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쉽게 번역하면 “주님, 제가 하늘의 것과 땅의 양쪽을 다 보는 경계선, 제가 단절의 선이군요.” 이것을 발견한 거예요. 이쪽 보고 저쪽 보고, 저쪽 보고 이쪽 보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천국에서 어떤 인간형을 받아주고, 어떤 인간형을 원하느냐?’ 이것을 인간들이 생각하잖아요. 노, 노! 그러면 안돼요.

순서가 바뀌었어요. ‘천국에서 어떤 인간을 거절하고 어떤 인간을 차단하느냐? 그것부터 시작하자.’ 순서 바꾸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천국은 어떤 인간을 안 받아주나?’ 그것부터 해야 돼요. 구약성경에서 ‘복 받을 자에게 복’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아까 구약성경에서 저주를 봤지요. 저주받을 자에게는 반드시 저주를, 이것도 나오잖아요.

그러면 그걸 보고 있는 우리는 얼른 어느 자리로 가느냐? ‘복 받을 자에게 복을’ 여기로 가면 안 돼요. 복 받을 자는 반드시 경유해야 해요. 저주받을 자에게 반드시 저주를 퍼붓는 그 자리에 가 있어야 우리가 아는 땅의 지혜가 아니고, ‘말’이 아니고, ‘말씀’께서 저주의 자리에 있는 자를 일방적으로 복 받을 자리로 옮겨놓는 작업을 우리 주님께 일임합시다.

그걸 내가 손대지 말고 주님께 일임합시다. 주께 맡기세요.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그걸 간추리면 ‘까라면 까겠나이다’ 그 말이에요. 자꾸 순서 바꾸면 안 됩니다. “저주받을 자에게 저주를!” 그거 외칠 때 “너 어디에 속했어?” “저 저주받은 자에 속했어요.” 선뜻 기쁨으로 자기를 소개하세요. “저한테 저주하는 그것이 ‘선악과 따먹은 자는 정녕 죽으리라’ 했으니까 맞습니다. 주께서 이렇게 일을 하신다는 것, 주의 세상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그 저주를 내려받으면 되는 거예요.

자, 그 저주를 내릴 때, 진짜 성령 받아서 저주받을 자에게 저주 내리는 그 자리에 내가 있어야 마땅함을 아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인간에 대해서 어떠한 동정심이나 유화적 태도를 취하지 않습니다. ‘아프리카에 우물이 하나 제대로 없단다. 우물 파기…’ 어쩌고저쩌고, ‘가자 지역에 식수가 없어서 힘들어하고, 독한 이스라엘이 다 막아서 어려움이 심하단다.’ 어쩌고저쩌고, 또 ‘인도네시아의 수도는 인구가 4천4백만인데 쓰레기 뒤지면서 산단다. 우리가 좀 후원해 줘야 하지 않겠느냐?’

이거하고 ‘독사의 새끼들아, 지옥에나 가라’ 그 주님의 말씀과 조화가 됩니까? 아모스 5장 24절에,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찌로다.” 그 말씀 딱 들을 때 백이면 백…, 물론 지옥 갈 자들의 주장이고 해석이지요, ‘이 땅에 정의가 넘치게 하옵소서.’ 신약의 주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지옥에나 가라. 네가 정의를 이야기해? 네가 누군데? 너는 아직도 네가 누군지 모르지?”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결론은 요한복음 21장에 나옵니다. 베드로가 주의 사랑을 받았어요. 베드로가 ‘이제는 주의 사랑으로 양을 잘 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인간을 아셔도 너무 잘 알아요. 베드로를 알아도 너무 잘 알아요. 18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아멘, 아멘, 그런 뜻이지요. ‘내가 진짜로 단언코 이야기할게.’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젊어서는 네가 네 마음대로 했는데 이제 늙어서는 네 마음대로 안 되고’ 그다음에 나오는 단어 ‘네가 원하지 않는 경로를 밟을 것이다.’ 원하지 않는 경로.

제발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모조리 파괴시켜서 지금껏 살아온 것과 앞으로 살아갈 것도, 일방적인 주님의 ‘복 받을 자와 저주받을 자를 구분하는 전지적 안목’이 우리를 통해서, 나라는 사물을 통해서 발휘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안일하게 인생 삽니다. ‘이것도 저것도 알고 이제는 정신 차리고 바르게 살면 이 땅에서 복 받고 죽어서 천국 가겠지’라는 이게 마귀의 대변인인지도 모르고, 이것이 요령껏 사는 모습인 줄 알았습니다. 아, 이제는 바로 이사야가 고백한 그 고백으로 그게 환희와 기쁨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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