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멘
2026년 7월 19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4:3-4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4: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에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기도만 해도 그 태도를 가상이 여겨서 그냥 하나님께서 흔쾌히 응답해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왜 ‘정욕을 위한 기도는 사절’이라는 조건을 다시는 겁니까? 그것은 우리 인간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그냥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망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연물+ 사물들, 그리고 빈 자리를 합쳐서 세상 전부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세상은, 율법 앞에서 채무를 갖고 있는 대상 전부를 말합니다. 즉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이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지니라”(민 27:12-15)
특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지니라’에 유념해야 합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죽음과 삶에 대한 인식은 어디까지나 이 세상 나라에서는 통하는 개념입니다. 율법 앞에서의 죽음과 생명이란 율법에 의해서 결정지어지는 겁니다.
이점은 율법이 없는 이방나라는 모르고 오로지 이스라엘에게만 먼저 적용이 됩니다. 그런데 율법을 받은 이 세상 유일한 민족인 이스라엘이 율법에 준해서 멸망했습니다. 저주받았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율법을 지켜 지상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보겠다고 했으나 그들이 한 일의 결과는 메시야를 죽여버린 일로 마감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되시는 분이십니다. 반면에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말씀을 지켜서 자신의 구원을 도모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단언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이런 차원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대해보세요.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
이 말씀을 지키지 못한다면 이미 그 사람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들어줄 수 없는 채무자, 곧 저주를 영원토록 받을 채무자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관점에서의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이란 율법의 요구에 다 대가를 치른 자가 누리는 상태입니다. 4절에 보면, ‘세상과 벗된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계시요 율법적 기능이 발휘되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은 전혀 자신이 누군지를 모르는 채 태어납니다. 이점은 인간이 죽을 때까지 계속 됩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점검할 수 있는 능력이 박탈당했습니다. 내가 누구냐에 대해서 악마로부터 일방적으로 양육받고 교육받았습니다.
이런 인간의 속성까지 구약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예루살렘으로 그 가증한 일을 알게 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사람이라 너의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에 싸지도 아니하였나니”(겔 16:1-4)
여기서 배꼽줄이란 곧 탯줄을 말합니다. 이는 인간이 이미 태어나면서 ‘하나님의 원수’에 뿌리받고 태어났음을 뜻합니다. 빨대를 이 ‘하나님의 원수’의 사상에 막고, 생애를 살면서 학교 교육과 가정 교육과 사회 교육에서 끊임이 유입받고 삽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서 ‘자기를 위한 신’으로 신을 이해합니다.
이점 또한 구약에 나옵니다. “이제 네가 네 아비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가하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적질하였느냐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말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 하였음이니이다 외삼촌의 신은 뉘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취하소서 하니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적질한 줄을 알지 못함이었더라”(창 31:30-32)
즉 모든 인간의 근원에 이미 ‘신 소유’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에게 열심히 하려고 해도 이 근본적인 드라빔 사상이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이 드라빔 정신이 노골적으로 나와 있는 구절이 사사기 17장입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그 어미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일천일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취하였나이다 어미가 가로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미가가 은 일천일백을 그 어미에게 도로 주매 어미가 가로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만들 차로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돌리리라
미가가 그 은을 어미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미가 그 은 이백을 취하여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이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또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제사장을 삼았더라”(삿 17:1-5)
이 세상적 근원성에서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자신의 신부를 새로 만드시는 일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 따먹은 그 현장에서 남자+여자+뱀이 있었습니다. ‘여자+뱀’이 곧 세상이 되도록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뺍니다. 그리고 그 빈 남자 자리에 ‘여자의 후손’으로서 아들이 채워집니다.
그러면 그 아들은 새로운 신부를 만들게 됩니다. 그 방법은 에스겔 16:62-63에 나옵니다. “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서 너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이것이 곧 생명되시는 분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주유소에 기름채우듯이 가득 채우는 방식이 성령의 오심입니다. 성령은 여성적 영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의견을 적용하지 않고 예수님 하시는 것만 전하기 때문입니다. (요 16:13) 성도는 율법과 그 저주를 탕감해주신 생명만이 가득 차있기에 오로지 신랑과 더불어만 삽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을 위한 성령으로 채워진 상태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3강-야고보서 4장 3-4절(아멘) 260719-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4장 3-4절입니다.
야고보서 4:3-4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3절에 보면, ‘기도를 했는데, 구했는데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유를 따로 설명하지 마시고 그냥 “기도하면 응답 해줄게.” 이런 선에서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그런 식으로 거래하면 어떻겠습니까? 참 좋겠죠. “기도하라. 기도하면 그 정성을 가상하게 여겨 응답할게.” 이게 바로 인간 세계에서,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기도라는 겁니다.
기도하는데 그것도 시간 내서, 정성 들여서, 관절도 안 좋은데 무릎 꿇고 기도하는데 그 정성을 감안해서 “기도했냐? 아이고, 바쁜데 수고가 많다. 응답 해줄게. 너의 겸손함을 봐서 응답을 해줄게.” 이런 조건으로 그냥 깔끔하게, 군더더기 없는 그런 하나님이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기도했나?” “예.” “응답 안 할래.” “왜요?” “너의 정욕을 도모하기 위해 기도했잖아?” 기도해도 문제에요. 기도해도 주께서는 자동적으로 안 받아주니까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정욕에 쓰려고 기도를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기도할 때 이 대목을 감안해서 “정욕에 쓰지 않고, 사사로운 내 이익을 위해 쓰지 않고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기도를 급 수정해 가지고 하여튼 응답을 받아내려고 하나님께 이런 식으로 건의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아니래요. 정욕을 도모해도 문제, 안 하고 기도하겠다는 그 제의도 주께서 거절, 그럼 뭐 기도를 하란 말입니까, 하지 말라는 거예요? 조건이 왜 그렇게 많아요?
그게 주보에 나와 있어요. 시편 66편 18절에 보면,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그리고 잠언서 28장 9절에,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이런 조건이 붙었습니다.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은 저기 계시고 우리는 기도합니다.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뭘 들고 있느냐 하면, 요새 그 모기나 파리 잡는 전기 모기 채 있죠?
기도하고 있는데 주께서 그 전기 모기 채를 가지고 이렇게 휘젓는다고요. 거기에 날파리, 모기, 파리가 걸렸는지 안 걸렸는지 작아서 잘 모르잖아요. 걸리면 어떤 소리가 들려요. 지지직, 지지직! 주님께서 전기 모기 채 들고 휘두르면서 뭔가 지지직, 하고 기도하는 당사자가 죽는 소리를 들어요. “기도하는 사람 어디 갔나? 오, 벌써 죽었네.”
왜 죽었느냐 하면, 율법을 위반해서 죽었어요, 율법을 위반해서. 그리고 자기의 죄를 가지고 기도해서 주님께서 휘두르는, 전류가 흐르는 그 파리채에 걸려 다 죽습니다. 전기 모기 채를 주님께서 하루에 몇 시간 사용하느냐, 한 달에 며칠 사용하느냐? 매일 스물네 시간 전기 모기 채 들고 설쳐요, 매일입니다. 맨날 걸려요, 우리는. 전기 모기 채에 맨날 걸립니다.
그만큼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볼 때 우리가 세상 보는 것과 관점이 달라요. 우리가 보는 세상은 허공입니다.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은 눈에 띄고 그 외에는 자연, 산도 있고 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허공이에요. 눈에 보이는 자연의 대부분 허공이고, ‘허공 저 너머에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 이게 지금 우리가 보는 시간과 공간 개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는 현실 개념은 이 율법의 채, 말씀의 관계망이 촘촘하게 이 자연 세계, 해와 달과 별과 산과 들풀과 그리고 참새와 인간까지 그 모든 것에 율법의 파리채가 늘 조밀하게 짜여 있어요. 그래서 꼭 조청 같아요. 물엿같이 찐득해요. 예를 들어보면 ‘오늘 주일날 교회 갔다가 6시에 집에 돌아왔는데 잘 때까지 뭐 하지?’ 우리한테는 이렇게 시간과 공간이 비어 있어요.
그런데 주님의 시공간은요, 비어 있는 게 없어요. 항상 빈 곳에 율법의 관계망이 촘촘하게 작동하고 작용하고 있다고요. ‘저녁 먹을 때 감사기도 했어? 범사에 감사했어?’ 시간을 내 행위로, 내 노동으로 때우는 게 인간의 시공간이라면 주님의 시공간은 이미 말씀으로, 율법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율법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쉽고 어려운 게 있어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더라도 우리의 기도는 결국엔 응답이 안 됩니다. 응답 될 수가 없어요. 왜? 잘못 기도하기 때문에. 잘못 기도 했다는 근거가 뭐냐? 정욕에 쓰려고요, 정욕, 내 욕심을 채우려고 기도했기 때문에요. 욕심인지 아닌지 근거가 뭐냐? 율법이잖아요. 율법에 의해서 율법에 위반되면 다 욕심이 되는 겁니다.
하나 정리하고 넘어갑시다. 기도에 응답이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이 기도를 받지 않는 것은 기도를 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냐를 몰라서 그래요.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몰라서 그래요.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보면서 오늘도 생각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바르게 살겠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 앞으로 잘할게요.’ 우리의 시공간, ‘앞으로’, ‘앞으로 잘하면 되잖아요.’
이쪽 말고 집에 가서 잘하면 되잖아요, 회사 말고 따로 내 공간 내 집에서 말씀대로 살면 되잖아요…. 이렇게 우리의 시공간은 내 행함으로 채워지는 시공간이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인간들이 행한 것과 그리고 내가 행한 것이 모인 그것을 우리는 이 현실의 총합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모든 인간관계에요. 그래서 인간과 이 세상에 대해 사람들이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사람 이야기를 해요. 율법 이야기하지 않고 사람 이야기해요.
왜냐하면 현실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끝. 그걸로 끝이고 전부라고 여기기 때문에요. ‘요즘 아내가 갱년기인데 무슨 약 먹지?’ 이거 무슨 이야기에요? 이거 율법에 나옵니까? 안 나오죠. 평소의 관심사가 사람 대 사람 관계에요. ‘아내가 아플 때 남편으로서 걱정해 주는 것이 남편 된 도리이지.’ 그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율법에서 나온 거예요? 아니잖아요.
쿠팡 물류 센터에 불이 났다. 그게 뉴스에 나왔습니다. 그거 보고 막 가슴 치고 통곡하고 다들 그렇게 해요? 아니죠. 내 물건이 쿠팡에 없으니까요. 없잖아요. 홈플러스가 부도났다. 그거 때문에 막 통곡하고 죽을까, 하는 사람들은 거기 관여된 사람들만 그렇지 나머지는 별로 관심이 없죠.
이게 뭐냐?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서는 ‘내 것만 건사하고 잘 되면 나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의 연발이고 연속입니다. 이걸 우리는 ‘세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내 일이 뭔가 잘못됐다고 할 때는 갑자기 무릎 꿇고 기도한다고 하는 거예요. 뭐가 날아가 버렸느냐? 주님의 율법의 그 채가 날아가 버렸어요, 율법채가 날아가버렸다고요.
그래서 야고보서 4장 4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세상과 벗이 된 것이 곧 하나님의 원수다. ‘내가 율법적으로 이야기한다, 네가 하나님의 법이, 그 뜻이 그렇게 궁금해? 궁금하지? 내가 하나님의 뜻이 뭔지 알려줄게. 세상과 친하게 지내면 그게 하나님의 원수다. 됐냐? 됐어?’
“하나님 제가 이제부터 하나님 말씀대로 바르게 살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아까 제가 했잖아요. 주의 응답은 간단해요. “넌 네가 누군지 아느냐?” 앞으로 시간이 흘러가면 한 달 뒤에 일 년 뒤에 바르게 살겠다, 지금 우리가 제안하는 게 그건데 주께서는 딱 시작하기를 ‘네가 누군지를 아느냐? 네가 어떤 존재인지를 아느냐? 너는 세상과 벗 된 존재야. 넌 너 자신을 정당화 하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봐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율법의 관점에서 보면 너는 기도해도 소용없고, 없는 이유가 너는 세상의 벗이 된, 이미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수의 기도를 응답해 뭐 어쩌겠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자기 원수에게 응답하십니까? 턱도 없는 이야기죠. 하나님의 원수가 “이제는 나의 정욕을 위해 기도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한다고 해서 “아이고, 네가 사람 됐구나.” 이렇게 봐주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미 우리는 세상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세상과 짝이 되고 벗이 되었어요. 이 말을 어떻게 규정하느냐?
“넌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원수야, 끝!” 간단한 이야기잖아요. 오늘 본문 이야기가 아주 간단한 이야기예요. 그런데 지금 야고보 이야기가 ‘흩어진 열두 지파에게 이야기한다’고 했잖아요? 흩어진 열두 지파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말하고, 이스라엘에게는 율법을 줬어요. 다른 민족에게는 뭐가 없다? 율법이 없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뭐가 있다? 율법이 있다, 에요.
예수님께서 어디서 죽었다? 이방 나라에서 죽었다? 아니죠. 율법이 있는 유대인에게 죽으셨죠. 다른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났느냐? 안 나타났어요.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아들을 나타내시고 자기 자식을, 품에 있는 독생자를 드러내는 건 어느 나라? 율법이 있는 나라, 어느 나라? 이스라엘에 나타나신 거예요.
어떻게 구원받는가? 메시아는 누군가? 우리의 구원자는 누구냐? “그거 이스라엘에 찾아가 봐, 이스라엘. 다른 나라 미국 같은 데 가지 말고, 이탈리아, 우크라이나, 가자 지역이나 그런 데 가지 말고 이스라엘에 가봐.” 이스라엘에 무슨 일이 벌어졌어요, 일이! 하늘과 땅이 마찰을 일으킨 사건이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이라고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은 하늘에서 율법을 따라 내려왔고, 하강했고, 땅에서는 이스라엘이 율법을 쥐고 자기의 역사적 여정을 겪었고, 거기 수직과 수평이 만나는 장소가 십자가 장소에요. 철학이나 과학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인슈타인, 그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아인슈타인이 무슨 생명을 줍니까? 대통령이 문제가 아니고, 국가가, 왕이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성경 야고보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거예요. 우리가 참 열심히 살아요. 열심히 사는데 뭐가 없느냐? 열심히 사는데 생명이 없어요. 열심히는 사는데, 야무지게 사는데, 알뜰살뜰 살아요, 가계부 써가면서. 그런데 생명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율법을 가지고 오셨어요. 마태복음 5장에 나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내가 온 것은 율법이 있는 그대로 결과물을 남기겠다. 못 지키는 것이 저주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주님께서 개조된 군용 지프차 타고 오셨어요. 장갑차 같은 차 있잖아요. 거기서 창문 열고 주님께서 운전하시면서 연발 기관총으로 길에 있는 사람들 두두두두두, 다 쏘는 거예요. 율법을 쏘는 거예요.
율법을 쏘면 어떤 사람은 전 굽다가 죽고, 어떤 사람은 피아노 치다가 죽고, 어떤 사람은 월드컵 축구 보다가 죽고, 어떤 사람은 공부하다가 죽고, 어떤 사람은 낮잠 자다가 죽고, 어떤 사람은 농사짓다가 죽고, 어떤 사람은 병원에 입원해서 죽고…. 왜?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다 죽으니까요. 람보도 그런 람보가 없어요.
주님이 쏘는 율법에는 총탄이 무한대입니다, 총알이. 피곤한 줄도 몰라요.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대로 왔다.” 그냥 갈겨버립니다, 거리를 다니면서.
주께서 “너희들은 율법을 지키지? 너희는 율법을 지킨다고 애쓰잖아. 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내가 바로 율법이고 내가 바로 말씀이야”라고 하면서 율법을 가지고, 말씀을 가지고 쏘아댑니다. 바로 하나님께 귀여움받고 예쁨받는, 지상에 진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겠다는 유대인들의 그 거리를, 그 중앙을 마구 쏴댑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
‘모세는 이렇게 이야기했지만 난 이렇게 이야기할 거야. 누구든지 오른 눈이 범죄 하거든 그 눈 가지고 있으면 지옥 가. 빼버려! 누구든지 오른팔이 범죄 하거든 그 팔 가지고는 지옥 가. 그 팔 잘라버려. 더 번지기 전에 잘라버려.’
이러한 해석을 가지고 창문 열고 기관총으로 쏴대니 그 안에서 열심히 자기 인생을 사는 모든 사람 중에 그 총탄을 맞고 안 죽을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유대인들도 다 죽었는데 뭐 율법도 없는 이방인인 우리는 말할 것도 없죠.
그래서 유대인들이 마지막으로 회의를 했습니다. ‘저 예수라는 존재를 어떻게 할까?’ 그들은 만장일치였습니다, 만장일치. 어떤 이의도 없어요. “죽여라!”입니다. 그 현장에 우리가 있었어도 마찬가지예요. ‘죽여라.’입니다.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오늘 본문 4장 4절에,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 된 것이” 거기 나오는 단어, ‘세상’이죠. ‘세상’이라는 단어가 바로 그 단어입니다.
세상이라는 단어를 다시 한번 설명합니다. ‘세상’이라는 것은 뭐냐? 눈에 보이는 인간과 인간들의 관계망, 만남의 장이 세상이에요. 그래서 인간과 인간이 만날 때 각자 인간들이 자기가 문제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몰라요. 본인이 문제 있다는 것을 몰라요. 왜? 율법으로 총탄을 안 맞아 봐서 자기는 지금 정상이라고 해요, 정상.
그래서 하는 모든 것이 그냥 사람들과 사람들이 만나는 의사소통 있잖아요. 정 나눔, 의견 일치, 그걸 주목적으로 해서 나름 열심히 삽니다. 열심히 살아요. 그렇게 한평생 다 갑니다. 한평생 긴긴 세월이 다 그렇게 가요. 십 대는 십 대 나름대로 자기는 최선을 다해 살았어요. 왜냐하면 16살 애는요, 16년 동안 자기가 열심히 살아온 것을 모은 것이 16살 생일날이에요.
22살은 22살까지 열심히 살았던 그 모든 것이 22살에 집약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22살 되는 청년은 22살, 그게 자기 세계의 전부에요. 16세는 16세가 전부고, 22살은 22살이 전부고. 16세 된 아이가 말합니다. ‘내가 17살 때는 좀 쉬어야지. 16살 때까지 너무 스트레스받았어.’ 17세 되어 보세요, ‘18세 되면 쉬어야지.’ 그러다가 22살 됐다. ‘군대 가기 전에 좀 쉬어야지.’
이렇게 계속해서 시공간이 미뤄져요. 40되면 ‘50대 때 안정적으로 아이 중학교 보내면 좀 쉬어야지,’ 나중에 60 돼서 ‘아들 대학 졸업시키고 좀 쉬련다.’ 70쯤 돼서 ‘아들, 딸 장가보내고 우리끼리 좀 쉬자.’ 지난 시간에 했던 ‘백 세 인생’이랑 비슷하게 되는데요. 도대체 스트레스가요, 잠시 멈출 줄을 몰라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어요. 도대체 여러분의 집안에 뭐가 있습니까? 여러분 집안에 최종적으로 뭘 모시고 삽니까? 이 질문의 답은 구약 성경, 흩어진 열두 지파에게 줬던 구약 성경이 답변을 해줘요. 지금 질문이 뭐냐 하면, 우리 각자 집안에 최종적으로 뭐가 들어 있느냐 하는 거예요.
창세기 31장 19-20절에,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 아비의 드라빔을 도적질하고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고하지 않고 가만히 떠났더라.” 라헬이 야곱과 함께 친정아버지와 독립해서 따로 산다고 헤어지는 그 장면이에요. 그런데 딸이 아버지의 뭘 훔쳤는가? 아버지의 최종성을 훔칩니다. 그게 ‘드라빔’이에요.
드라빔은 쉽게 말하면 ‘나만을 위한 신’, 나만을 위한 신, 그게 드라빔이에요. 내가 그동안 이 나이까지 일궈 놓은 내 가족, 내 것, 내 재산을 지켜주는 신, 그게 드라빔입니다. 그 드라빔이 신상이거든요, 사물화, 물체화 된 신이에요. 물체화 된 신인데 그걸 갖고 가니까 친정아버지가 딸 찾아서 뒤늦게 막 뛰어옵니다. 3일 만에 알았고 7일 동안 쫓아왔어요(창 31:22-23).
하루에 한 20km 잡아도 야, 이것은 야무지게 따라왔어요. 140km를 따라왔어요. 따라와서 뭘 하느냐 하면요, 30-32절의 그 이야기하려고 따라왔습니다. “이제 네가 네 아비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가하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적질하였느냐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말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 외삼촌의 신은 뉘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취하소서 하니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적질한 줄을 알지 못함이었더라.”
30절에, ‘이제 네가 네 아비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가하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적질하였느냐.’ 내 신을 도둑질 한다. 특징이 뭐냐 하면, 인간 나라에서의 신은 인간의 소유가 된다는 거예요. 사적 소유가 된다는 거예요, 신이.
여러분, 이게 참 남의 이야기입니까? 이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최소한 140km를 일주일 동안 따라와서 그 드라빔 찾는다고 32절부터 35절까지 찾았는데 못 찾았어요. 왜 못 찾았느냐 하면, 딸이 자기 엉덩이로 올라앉았어요. 친정아버지가 좀 비키라고 하니까 “경수가 나서 못 비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 그럼 다른 데 찾지.” 결국 못 찾았어요. 결국 못 찾았습니다.
자 여기서 궁금한 것은, 성경에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가? 인간은 반드시 자기를 위한 신, 오늘 본문대로 하면 자기 정욕을 위한 신, 자기 정욕을 버릴 생각이 없어요. 정욕은 정욕대로 유지하는 그 세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세상은 자기만의 정욕을 위해 자기 세계를 확장시키는 그것으로 자기 평생의 세월을 투자하는 거예요. 내 것을 투자하는 거예요. 그걸 지켜내기 위해서 신이 필요했고, 그 신을 가지고 어떻게 하느냐? 사물화시킨다. 사물화, 물체화시켰다. 물체 덩어리로 만든 거예요, 신을.
자 그것 가지고 뭘 하느냐? 열왕기하 23장 24절에 보면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박수(남성 무당)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사적인 신들을 다 제거했다 이 말이죠. ‘사적인 신을 제거했다’는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은 우리 자신을 제거한다는 뜻이에요. 제거하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평생 동안 일궈 놓은 것, 그 나를 지켜주는 신, 내가 신봉하는 신을 제거한다는 말은 나를 지키는 신이 날아갔다는 말이고, 이 말은 그동안 신과 내가 결속되어 있었는데 그 신을 제거해 버리면 그동안 그 신을 믿고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게 같이 날아가 버리고, 이것은 내가 없어지는 걸 의미하는 거예요. 내가 죽어 없어지는 걸 말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바로 장갑차에서 창문 내리고 기관총 쏘듯이 율법으로 그 사람을 죽여서 없애는 기능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그 기능을 하는 율법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줬어요. 줬더니만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드라빔이에요.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드라빔이었습니다. 그 드라빔 신 가지고 뭐 하느냐?
그게 사사기 17장 5절에 나옵니다. 사사기 17장에 보면,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엄마가 돈을 잃어버렸단 말이죠. 그러니까 아들이 “잃어버린 게 아니고 내가 썼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이미 경솔하게 저주를 했어요. “내 돈 가지고 간 놈 벌받아라.” 이렇게 저주하니까 그 소리를 듣고 아들이 “엄마, 내가 가져갔어요.” 한 거예요.
“그래?” 그러면 뱉어 놓은 저주를 어떻게 해야 해요? 다시 이걸 회복하기 위해서 어떤 신상을 만들고 신상을 섬기기 위해서 제사장 하나 취업을 시켰는데 그게 5절에 나옵니다. “이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또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제사장을 삼았더라.”
그러니까 그들이 여호와를 믿어도, 여호와 믿는데 그 여호와 믿는 방법이 드라빔을 통해서 믿는 거예요, 드라빔을 통해서. 그러니까 내가 안 죽은 상태에서 여호와, 여호와 이름을 부른단 말이에요. 여러분 집에 누가 있어요? 이 질문, 각자의 집에는 나 잘되기 위해서 여호와 믿는 그러한 신상이 우리 마음속에, 뭐 마리아 상(像)처럼 실제로 물건을 만들지는 않지만, 우리 마음속에는 ‘나를 지켜주세요.’ 하는 마음으로 여호와 또는 예수 이것이 들어 있잖아요.
그게 바로 정욕에 쓰려고, 살아있는 내가 계속 하나님의 힘으로 지켜지기 위한 그런 종교 생활을 구약 때부터 이미 선배들이 해왔고, 그들은 망했다 이 말이죠. 그다음에 우리가 망할 차례고요. 하나님이 율법을, 계명을 주셨을 때 그들은 하나님 없이는 못 살겠다는 말을 해요. 참, 이게 참 놀라운 거짓말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못 살겠다.’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 출신으로서 할 소리가 아니에요. 이 세상,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원수, 이미 원수가 된 그 공간 안에서 우리가 그 원수의 일원으로서 살아왔다면 솔직하게 우리의 내면에서 나오는 그 고백은 ‘신이라면 나를 위한 신이어야 합니다.’ 하는 그 고백이 합당한 고백이에요.
그래서 여기서 여러분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겠어요. 여러분의 거실에 액자를 하나 만드는데 성경 구절로 만들어보세요. 구절은 제가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 29절, 이 구절이 우리의 속마음과 합당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예수여, 당신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게 교회 50년 60년 다녀도 가장 솔직한 고백이에요, 이 고백이. 이게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된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솔직한 고백이에요. 실컷 성경 공부하고, 복음 공부하고 다 했는데 끊임없이 밑에서 끓어오르는 것은 뭐냐? 결국 이거에요. 이것도 술 한 잔 먹어야 나오는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혀 꼬이는 소리를 해가면서 “예수여, 당신하고 내가 무슨 상관이 있어?” 이런 것, 그것도 반말로. 그걸 액자로 하나 만들어 딱 걸어놓는 거예요. 우리의 본모습입니다.
열심히 전도하고, 선교 회비 내고, 봉사하고, 뭐 할 도리들 자식보고 교회 생활, 신앙생활 다 시키고, 하여튼 성경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역량을 다 끄집어내서 했는데 결국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는 어디서 나오느냐? 우리가 남에게 보여주기식의 신앙적 흉내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어디서 나왔는가? “예수여, 솔직하게 말해서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예수 당신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어?” 그 이야기지요. 그 액자.
세상에, 우리 마음을 악마보다 더 정확히 아는 존재는 없어요. 악마가 인간에게 최초로 이야기한 그 대목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만히 들어보시고 ‘그 말이 맞네. 참 귀신이다, 정말! 악마의 그 말이 맞네’라고 여러분이 탄복할 겁니다. 이게 창세기 3장 1절에 나와요.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나님께서 동산의 모든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라고 하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귀가 뭐라고 집어넣었느냐 하면, “참으로” 경상도 말로 “진~짜로, 진~짜로 먹지 말라 했어?”라고 하는 것은 악마가 손가락 가지고 우리 두뇌를 탁탁 치는 거예요. “네가 머리가 있으면 한번 생각해 봐. 진~짜야? 진~짜로 먹지 말라고 했어?”
이 말은 뭐냐? ‘네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해서 안 먹으면 네가 가지고 있는 이 머리는 어디 써먹을 건데? 네가 너 나름대로 판단을 해보라고. 그냥 말씀에 몰빵하지 말고, 주의 말씀에 껌뻑 죽지 말고, 나는 말씀 없으면 죽겠다, 이렇게 나오지 말고 정신 차려서 한번 생각해 봐. 네 인생이야. 네가 판단해.’ “예수여,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했던 그 마귀가 끊임없이 이 말씀대로 우리의 두뇌를, 우리의 가슴을 노크합니다. 노크해요.
뭐 20년 믿었고 30년 믿고 목사, 집사, 그런 자격증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래서 지금 해결책이 나와야 해요, 해결책이. 우리의 본심은 못 고쳐요. 악마가 발목을 쥐고 있기 때문에 교회 나와도 신앙, 믿는 척 흉내 내도 하늘나라에 안 통합니다. 남들이야 속지 나도 안 속고, 가만 보면 남들도 안 속아요, 다 똑같은 사람들이니까. 주님께서 안 속기 때문에 이 문제에 어떤 해결책이 나와야 해요. 그 해결책은 이렇게 하면 돼요. 율법이 해결책입니다.
자, 마귀 나라 출신인 우리가 생각하는 그 죽고 사는 그거 말고, 하나님 입장에서, ‘죽는 게 뭐냐, 생명이 뭐냐?’를 하나님 쪽에서, 예수님 통해 그 기준을 정한 게 있어요. ‘이거 하면 생명이고 이거 하면 생명이 아니고 죽음이다.’ 이런 게 있어요. 성경에서 하늘나라 죽음이 이겁니다. 채권자의 요구 앞에서 채무자가 갚을 것이 없을 때 그걸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걸 저주라고 해요.
이건 이방인들에게는 생뚱맞은 이야기인데 신명기 27장에서 바로 이스라엘한테는 생뚱맞은 이야기가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 건너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거든 할 일을 미리 알려주는 겁니다. 열두 지파를 여섯 지파씩 나누어서 그리심산과 에발산에 세워서 한쪽에서는 축복을 외치고 한 쪽에서는 저주를 외치라고 하면서 그 저주를 외칠 때 “모든 백성이 응답하여 아멘 할찌니라”라고 합니다.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산에 서고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산에 서고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찌니라”(신 27:12-15).
‘아멘’이라고 하라. 아멘, 진실로 그러합니다. 그래서 제가 3분 동안 아멘 이야기를 할게요. ‘아멘’ 그 이야기를 3분 동안 합니다. 아멘이 무슨 뜻이냐? 내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것은 나의 시공간이거든요. 그러지 말고 내가 이미 죽었다고 치고 죽고 난 뒤에 그동안 살아있던 육체를 죽은 내가 인수인계하는 방식으로 내디딜 때 그걸 ‘아멘’이라고 해요.
어떤 사람이 90에 죽는다 칩시다. 아이고 안 되겠다, 권사님 계셔서 100살에 죽는다고 칩시다. 그러면 지금 80입니다. 20년 남았잖아요? 인간들, 이 세상에 악마 자식으로 태어난 우리는 ‘아직도 나에게는 20년이 남았다’고 생각하잖아요. 아직 살아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율법적 관점은 뭐냐?
율법적 관점에서는, 내가 20년을 더 살아도 주님이 요구하는 율법의 권리를 갚을 길이 없어요. 갚을 길이 없다고요. “네 오른눈이 범죄하거든 빼버려라.” 이걸 지킬 수도 없고 갚을 길이 없어요. 갚을 길이 없으면 채무자가 됩니다. 채무자에 대해서 주께서는 권리를 행사해서 이걸 저주해 버려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율법이 마감된 그 시간에, 그 공간에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주님이 주신 시공간입니다. 주님의 시공간은 인간들의 어떤 텀이 있는 것이 아니고 거기서 중지가 돼요. 시간과 공간이 완성이 되면서 그 공간이 십자가 공간입니다. ‘십자가에서 나는 너희와 함께 이미 죽었다’가 돼요. 죽었으면 이미 죽은 입장에서 이미 죽었으니까, 값을 치렀으니까 어떤 채무도 없어요.
그걸 생명이라고 하는 거예요. 율법을 준 이유가 그렇습니다. “내가 율법대로 네게 은혜를 줬는데 네가 그 은혜 값을 하나? 햇빛과 공기에 대해서 네가 어떤 값을 치르고, 네가 뭘 했나? 너는 네 생각만 했잖아. 마귀한테서 태어나 가지고. 나는 절대로 너한테 다 갚을 거야. 저주로 갚아줄 거야. 다 빼낼 거야.” 거기에 대해서 ‘stop’을 하는 거예요.
“내가 이미 율법에 의해서 죽었고…” 제 말이 아니잖아요. 성경에 나오잖아요. 율법은 총으로 쏘니까, 죽으라고 쏘니까 이미 죽었고, 죽고 보니까…, 내가 지금 80세라면 그리고 백 살에 죽는다면 20년 동안 살 것이라고, 아직도 살아 있다고 착각하는 우리 육체의 몸뚱아리가 있잖아요. 그 몸뚱아리를 보고 “어서 와, 어서 오라고!” 뒤늦게 인수인계하는 식으로 가면 되지요.
여기에 80대만 있는 게 아니고 지금 20대도 있으니까, 25세라 봅시다. 오늘 25세 어디 갔습니까? 시험 치러 갔는가? 스물다섯 살 이지만 이미 죽었다 치고, 내가 스물다섯 살이라는 이것은 껍데기에 불과한 거예요. 어떤 껍데기? 내가 주님의 은혜, 용서를 갚을 길이 없음을 보여주는 그러한 코스를 밟아야 할 껍데기, 그 껍데기가 남아있어요.
율법이 오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가능합니다. 자 그렇다면, 그렇다면…, 광주에서도 제가 그런 질문을 세 번이나 했는데 여러분에게도 해볼게요. 그렇다면 야고보서 4장 3절에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라는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지킬 것인가? 광주강의에서도 했고 지금도 그 질문을 합니다.
기도 해도 응답 못 받는 것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라고 했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이 말씀을 지킬 것인가?’ 하는 거예요. 1번, 정욕 빼고 기도한다. 2번, 기도하든 안 하든 소용없다. 둘 중 어느 겁니까? 빨리 대답해야 돼요. 둘 다 아무것도 아니지요. 둘 다 틀린 거지요. 정욕 빼고 기도해도 응답 없어요.
그러면 뭐냐? 광주강의 들은 분들은 다 압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라는 그 말씀을 오려요. 오려서 이미 죽어버린 육체에 하나의 광고판으로 갖다 붙입니다. 갖다 붙이면 우리는 뭐냐? 걸어 다니는 말씀의 사람이 되는 거예요. 말씀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자기 말씀이 광고판으로 걸려 있는 사람을 회수하는 식으로 구원합니다, 회수하는 식으로. 참 쉽지요.
광주강의의 예를 다시 들면, 코카콜라, 맥도날드나 코카콜라 광고 포스터가 있잖아요. 그거 보면 얼음에 보글보글 막 올라오면서 시원한 코카콜라가 있을 때 사람들이, 물론 그런 바보는 없지만 만약 진짜 어떤 바보가 ‘코카콜라가 여기 있는 모양이다.’ 하고 그 포스터를 떼버리면 거기에 딱딱한 돌벽이 나오지요, 돌벽.
벽 위에 그냥 그림만, 코카콜라 이미지만 갖다 붙여놓은 거예요. 그게 우리에요. 그게 우리라고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요한복음 1장 14절에 나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잖아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이지요.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은 천국의 백성, 예수님의 사람도 말씀과 육신이 플러스가, 결합이, 더하기가 된 거예요, 더하기가.
말씀을 지고 가는 사람이 되었다는 거예요, 말씀을 지고 가는 사람. 지키는 사람이 아니고요. 왜? 죽은 자는 왜 죽었느냐 하면, 말씀을 못 지키는 것으로 이미 확정이 났기 때문에 죽은 거예요. 죽었을 때 누가 죽였다? 이미 주님의 말씀이 나를 죽였다고 결합이 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이미 생명을 얻은 사람이에요.
여러분의 발상을 한번 바꿔보세요. 발상의 전환이 있어 보세요.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신랑과 혼인 잔치가 있는데 밤중에 혼인을 한대요. 그러면 등(燈)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등이 있는데 다섯 처녀는 등의 기름을 준비하고, 다섯 처녀는 등은 있는데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어요. 자 여기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이거예요.
‘지혜로운 자는 등을 준비했다’가 아니라 ‘지혜롭지 못한 처녀 다섯 명은 왜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는가?’ 하는 거예요. 왜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는가? 누가 더 지혜로워요? 신랑이 오지도 않았는데 기름을 준비해요? 신랑이 올 때 기름 준비하면 되잖아요. 그게 우리가 세상 사는 지혜 아닙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어리석은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다는데, 이 성경 말씀을 볼 때 우리 인간 입장에서는 그게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지혜로워요. 지혜로운 여자는 신랑 올 때 기름 준비하고 미리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신랑이 오든, 기름을 준비하든, 등을 준비하든 평소에 살아가는 것이 전부 다 나를 위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내가 좋은 신랑하고 결혼한다. 그거 누구 좋으라고? 나 좋기 위해서. 이게 바로 정욕이에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지혜롭다고 하는 그게 인간 쪽에서는 어리석은 여자예요. 성경에서 지혜로운 여자는 신랑이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이미 신랑이 우리에게 왔다고 치고 무엇이 필요한가? 신랑을 위해서 기름이 필요한 거예요. 나를 위해서 기름이 필요한 게 아니고 신랑을 위하여. 신랑이 주도권을 갖고 있고 나는 신랑에게 놀아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일찌감치 이미 확정이 되어 있었던 거예요.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기 4절에 보면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했어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정욕을 위해서, 자기 잘되려고 전부 다 예수라는 이름의 드라빔, 성령이라는 이름의 드라빔,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드라빔을 최종적으로 자기 집안에 두고 신앙도 아닌데 신앙인 척하면서 대외적으로 보이기 위한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면서 사는데, 왜 여기에 굳이 여자에 대해서만 세상과 짝하였다고 그렇게 여자를 내세우는가?
그것은 창세기 3장에서 세상을 표현할 때 하나님의 원수, 마귀죠, 마귀와 여자를 한패 먹게 해서 세상을 표현하는 방법이에요.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 따먹을 때 등장인물이 누구냐 하면, 뱀이 먼저 꾀었잖아요. 뱀, 그다음에 여자, 그다음에 남자인 아담, ‘뱀+여자+남자’ 이렇게 3인조 강도, 3인조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오늘 설교한 것이 뭐냐 하면, ‘대책 없음’입니다. 대책은 없는데 왜? 세상에서 나서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만 위하는 드라빔 섬기다가, 자기만 위하는 여호와, 예수 섬기다가 저주받는, 지옥 가는 그것은 대책이 없어요. 대책이 없는데 주께서 마련한 대책이 뭐냐? 여기서 뭘 없애느냐 하면, ‘남자’를 빼버려요. 남자, 여자, 뱀에서 남자를 빼버리면 여자와 뱀이 합쳐서(여자+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하고 단짝이 되어버렸어요. 짝이 되고 벗이 된 거예요.
그러면 남자가 빠졌잖아요. 그 남자의 자리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바로 여자의 후손이 아들로 들어가요. 아들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원수와 하나님과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들과 그리고 그 외에는 세상과 짝한 여자가 되겠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 내려와서 뭘 잃어버린 거예요. 자기 아내, 신부를 잃어버렸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악마와 짝하지 않는 새로운 신부를 만들어내요. 누가? 아들 되시는 예수님께서. 새로운 신부를 만듭니다. 어떻게 만드느냐? 자신의 영을 보내서, 성령을 보내서 자기의 신부, 자기의 색시를 만들어버려요.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세상과 짝한 이 여자와 뱀이 어떤 식으로 짝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의 역사가 바로 에스겔 16장의 이스라엘 역사에 나옵니다. 예루살렘이 문제였던 거예요, 예루살렘이.
에스겔 16장 2-5절에 “인자야 예루살렘으로 그 가증한 일을 알게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 사람이라 너의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너를 돌아보아 이 중에 한 가지라도 네게 행하여 너를 긍휼히 여긴 자가 없었으므로 네가 나던 날에 네 몸이 꺼린 바 되어 네가 들에 버리웠었느니라”
여기 ‘배꼽 줄을 자르지 아니하였다’라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원수와 연결되어 있다는 거예요. 이 탯줄은 빨대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세상 것만 쪽쪽 빨면서 살아왔어요. 학교 교육을 통해서, 세상 교육을 통해서, 세상 정보를 통해서, 유튜브를 통해서 빨대 꽂고 세상 것만 그냥 계속 빨아요. 이래서 대책이 없는 거예요.
대책은 없는데 어떻게 하느냐 하면, 새로운 신부를 만들어냅니다. 에스겔 16장 63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62절에,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서 너로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니” 여기에 언약을 세우는데 그 새로운 언약이 뭐냐 하면 63절에,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모든 일을 저지레하게 해놓고 주께서 율법을 보내서 죽게 해놓고 주께서 그 모든 빚을 탕감 해버려요. 용서를 해준다고요. 용서를 해 놓고 용서받은 새로운 신부가 등장하는데 그 신부는 나를 죽이는 말씀과…, 이제 마지막에 잘 들으세요. 나를 죽이는 그 율법과 율법을 홀로 이루신 생명 되시는 예수님, 여자의 후손 되시는 아들이 마귀를 이겨서 더 이상 마귀로부터 우리를 책망하지 못하고, 시비 걸지 못하도록 조치를 해놓고 예수님께서 자기의 생명을…, 주유소에 가면 차에다 뭐 넣지요? 기름 넣잖아요.
그 기름, ‘율법+예수님이 그 율법을 홀로 이루었다, 탕감해 줬다. 이것이 생명이다’를 우리에다 집어넣는다고요. “만 땅 넣어주세요, 만 땅!” 만 땅으로 넣게 되면 그때 차가 움직이는 데 신부는 신랑의 힘으로 움직여요. 그게 성령이에요, 성령. 나 이렇게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의 생명 때문에 움직이는 겁니다. 그 차 자체가 예수님의 신부예요.
주님께서 생명으로 주셨다는 것을 돌아다니면서 그걸 증거하는 겁니다. 따라서 아까 액자 건 것에 액자 하나 더 거세요. “예수여, 당신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것만 걸리면 안 되지요. 그 옆에 액자 하나 더 거세요. 시편 23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어떤 경우에도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게 바로 ‘아멘’입니다. 이게 바로 아멘이에요. 다 이루신 분이 내 남편이 되어서 함께 신부인 나를 신부라 인정해 줄 때 비로소 신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아까 기도하신 집사님이 하신 것처럼 신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허물도 없고, 죄책감도 없고, 갚을 것도 없고, 이미 합격 된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공로를 증거하는 것, 이것이 20년이든, 40년이든, 80년이든 남아있는 우리의 할 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새 언약을 주시니 우리 남편 되신 예수님께서 새로운 신부를 친히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서 그저 놀랍고 감사합니다. 이제는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할 수 있는 등과 기름이 우리한테 가득 찼으니, 그 기름이 가득 찼으니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이미 확정된 예수님의 구원하심과 능력과 생명을 맘껏 다 발산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