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아닌 존재
2026년 8월 2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4:5-6
(4:5)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상대하지 않으신 이유는, 출발점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 존재에 미쳐 삽니다. ‘나 여기 있음’에 모든 가치를 다 부여하면서 삽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를 비롯해서 자기처럼 눈에 보이는 자들을 의식하고 상대하면서 살아갑니다.
인간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일단 없다고 여기고 덜 신경 쓰도 상관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결같이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가 구원해 내신다’는 점을 말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 있다고 우기는 우리 자신을 구원’하신다는 것은 지금 우리를 산자라고 간주하게 만드는 그 세상에서 떠나야 함을 강조하시는 겁니다.
즉 계속 우리 자신을 죽기 전까지는 살아 있다고 간주하게 만드는 바로 이 세계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구원입니다. 만약 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자신을 규정하려고 든다면 이는 구원되지 않는 겁니다. 죽으신 분과 비교하고, 죽으신 분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똑같이 죽어 있는 존재인 인간의 말을 듣고 의식하는 것은 굳이 구원이 필요없다고 주장하는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시작은 ‘성령’입니다. ‘성령’은 이 땅을 떠나신 주님의 영이십니다. 따라서 이 땅이 인정하는대로 살고 싶은 자들에게 이 성령님의 말씀이나 존재는 거부하고 싶은 겁니다. 왜냐하면 기분 나빠서요. 만만한 같은 인간들과 교제와 그들의 평가와 그들과의 사귐이 편해집니다.
왜냐하면 그들과의 교제와 사귐은 우리 자신에 대한 가치를 우리가 기대한대로 충족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어떤 자식이 부모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두 분이 계셔서 내가 이 세상에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상당히 부모를 높이고 존재해 주는 발언처럼 느껴지지요.
실은 부모에 대한 모독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발언 속에 현 자신은 부재(없어져도)해도 상관없어요 라는 뜻은 담겨 있기 않습니다. 엄밀하게 말씀드려서 인간에게는 부모는 없습니다. 자신이 자신을 그동안 열심히 창조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육신의 토대는 부모의 신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신의 마음에 드는 지금의 자아는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람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이 땅에 나타나신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아들’이 되는 경우에만 사람답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든지 무엇을 보든지 인간들의 자신의 출발점이 어디에 잡을 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이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롬 7:8-10)
즉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몰랐습니다. 그냥 나다운 나를 내가 세상을 살면서 만들면 된다고 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의 활동 이전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뱀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뱀의 생각에서 시작된 겁니다. ‘보이지 않는 존재 잊고 모든 것을 보이는 것들을 상대해서 네 자신을 완전하게 하여라’ 주장을 심어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령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신경쓰지 않습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 나오면서도 그들이 예수 믿는 것이 아닌가 하며는 하나님께서 준비 해두신 것이 ‘대신 하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달리신 그 현장에 함께 했던 지옥간 강도는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나를 구원하면 당신을 믿어주겠오” 하지만 이런 태도는 구원의 달성 상태를 몰라서 그런 발언을 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4-15)
즉 주님께서는 성도 자신의 성실함에 기대를 거시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바꿔치심’에 충실한지를 보십니다. 성도는 한시라도 스스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존재로 자부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를 인간으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표적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39-40)
요나의 표적이란 바로 요나 위에 ‘죽음’ 자체가 뒤집어 씌운 것을 말합니다. 즉 죽음을 산 채로 말하기 위해서 요나는 죽음 속에 놓인 존재가 되어서 활동하도록 쓰임받은 겁니다. 반면 모든 인간들은 자기 존재에 미쳐서 자신이 마치 살아 있는 한 여기면서 일상을 보냅니다.
‘누구의 표적’으로 쓰임받는 것이 아니라 단독적으로 자기 존재성에 충성하는 겁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악령의 앞잡이로 살고 있음을 밝히 보이십니다. 즉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 겁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갈 6:15)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님과 예수님에 의해서 전면적으로 부정당할 대상이라는 겁니다. 이런 사실을 거쳐야 감사와 고마움이 나오는 겁니다.
존재를 표적으로 전환시키는 일을 우리 성령님께서 하십니다. 이미 이 일은 베드로를 통해서 예고된 바 있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눅 22:31-34) 이게 바로 성령께서 시기까지 하시면서 베드로 및 제자들을 악마에 넘겨지지 않고 애씀을 보이는 대목입니다.
주님께서 성도를 인도하는 곳은 바로 성령 안입니다. 그곳이 새롭게 나타난 새 천국입니다.(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점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 성도는 반복해서 자기 속에 악마성을 발견하면서 주님께 감사하고 고마워하며 살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매 순간 저희들 가치를 무산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5강-야고보서 4장 5-6절(아무것도 아닌 존재) 260802-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4장 5-6절입니다.
야고보서 4:5-6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여기 ‘성령이 시기한다.’ 성령이 등장합니다.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죠. 인간 세계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걸로 간주하게 됩니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인간 대 인간으로 시작해야 하지, 자꾸 없는 것을 거론해서 있는 것처럼 그쪽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면, -평소에 우리가 사는 것이 있는 인간과 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화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성경을 봐도 와닿지 않는 것은, 성경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부터 voice, 말을 하기 때문에 일단 인간들은 강력하게 거절하고, 거부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특히 신약 성경 전체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죽으신 분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겁니다. 이것도 또 말이 안 되는 거죠. 왜냐? 죽었으니까, 안 보이잖아요. 안 보이는 분이 우리를 구원하신다?
‘안 보이는 분이 우리를 구원한다.’ 구원한다는 말은 ‘너 거기 있으면 안 돼. 빨리 나와야 돼.’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미 죽었던 내가 너희들을 구원한다. 거기 있으면 안 돼. 빠져나와야 돼.” 그러면 우리는 말하기를 ‘왜 우리가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빠져 나와야 됩니까?’ 이렇게 속으로 대꾸하죠. “그것은 너희가 죽었으니 그렇다.” ‘죽었으니까 산 세계로 나와야 되지 않겠는가?’
‘살아 있는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을 구원해 주세요’라고 요청했던 그러한 의견이 있었어요. 그게 십자가 달렸을 때 지옥 가는 강도가 요청한 거예요. “예수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당신이 나를 구원 한다면 내가 당신을 믿을 용의가 있다, 지옥 가는 강도가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 23:39).
그런데 구원받은 강도는, 신세가 자기가 같이 죽어 없어지는 신세에요. 없어진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곳, 살아있는 것이 이게 비정상이고 죽어있는 것이 정상이라고 여기는 세계, ‘그 세계로 네가 이동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 번 따져보죠. 이 땅에 살면서 우리가 걱정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것, 그 이유가 뭐죠?
눈에 보이니까, 그렇죠. 눈에 보이는데 남들만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고 거울 앞에 비치는 나도 눈에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는, 눈에 보이는 내가 여기 살아있고 존재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에 최대 걸림돌이고 장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성령부터 출발을 해요. 성령, 주님 이야기, 하나님 이야기, 전부 다 인간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겁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들에게 상기시키지만, 죽으신 분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죽으신 분이! 살아있는 인간이 구원 못하고 죽으신 분이 구원한다면, 그걸 여러분들이 받아들인다면 살아있는 것에 집착하지 마시고 죽기를 부러워해야 돼요. 죽는 것을 소원해야 돼요.
그냥 딱 죽으면 아무 일이 없는 걸 가지고 괜히 살 가치도 없으면서 살아있다고 아득바득 애를 쓰니, 걱정과 고민과 괴로움은 날로 더 강화되고 마치 근육이 뭉치듯이 단단하게 동맥 경화증이 생기는 겁니다. 부질없는 걱정 근심을 자처해요. 죽으면 그만인 것을 마치 살아있는 것이 무슨 자랑인 양, 출세한 양 그렇게 여깁니다. 죽은 분이 우리를 구원하는 건 생각도 못 하고요.
성경에서 이렇게 이야기 할 때 ‘얼추 그 말이 일리가 있다’라고 생각하면서도 일리가 있어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가 그쪽 세계로 넘어갈 수가 없는데요. 내 마음이 달라질 재주가, 능력이 없는데요. ‘사나 죽으나 산 채로 빡세게 살아보자’ 이런 식인데 저쪽 세계로 옮겨질 능력도 없고, 그런 마음도 없는데 어떻게 뭐 해결책이 있어야죠. 해결책이 없잖아요.
“예수를 믿어볼까요? 성령을 믿어볼까요?”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가 예수를 믿을 능력이나 있느냐?”는 말이죠. “성령을 믿을 능력이나 있어?” 하루 종일 24시간 보이는 나를 붙잡고, 그리고 보이는 인간들을 상대하는 데 거기에 모든 진력을 다하고 힘을 에너지를 쏟으면서 어디 마음에도 없는 소리 ‘예수 믿을까요? 하나님을 믿어볼까요?” “참 한가하기도 한가하구나. 네가 그렇게도 별일이 없구나. 그렇게 심심해? 네가 살아있으면 네가 붙드는 그 일에 열중해야지.” 만약 누가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그 말이 얼마나 일리 있게 다가오겠습니까? ‘그래. 살아있는 나부터 챙겨야지.’
자, 그 원인을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경에서 예수 믿으세요, 하나님 믿으세요, 백날 해도 영 마음이 안 내키는 그 이유가 뭐냐? 출발점을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여기 살아있다’로부터 출발하니까 성경이 전혀 먹히지를 않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아주 친절하게도 우리로 하여금 뭐부터 출발하게 하느냐 하면, ‘네가 잘난 채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네가 죄인으로 살아있다’는 것부터 출발을 시킵니다.
그게 로마서 7장 8-9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그다음 말이 중요해요.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법이 없으면 죄가 죽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말씀이 없으면 너의 죄가 죽은 것이다.’ 곧 ‘말씀이 없으면 내가 잘난 사람인 양 오해하고 있다’는 말이죠.
안에는 죄가 들어 있는데, 안에는 저주가 들어있는데 마치 저주가 없는 양, 복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양, 내가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양, 죽으면 천국 갈 수 있는 존재인 양, 이게 오해에요. 이게 착각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친절에 친절을 더하면서 계명을 줍니다. 여기 로마서 7장에서 예를 들어요.
‘탐내지 말라.’ 탐내지 말라는 계명이 왔을 때 비로소 슬금슬금 이 탐심이라는 것이 우리 속 가장 기본 존재에 자리를 잡고, 마치 내 속에 탐심이 없는 양, 그리고 탐심이 없기에 복 받을 가치가 있는 양, 남한테 어려움이 와도 우리 집안에는 없어야 마땅한 양, 그렇게 위선 떨면서 살아왔던 거예요. 남들은 지옥 가도 나는 천국 가야 될 그런 사람인 양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죄를 품고 있으면서 어딜 가요? 천국을 가요? 미쳤어요?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가기는 지옥 가고 있으면서 자꾸 교회 와서 천국 간다고 우기니, 하나님 보시기에도 기가 찰 게 아니겠습니까? 자기한테 집중하고 자기 존재에 신경 쓰면서 어딜 가요? 천국엘 가요? 누구 마음대로요? 자기 존재의 고민을 하면서 언제 주님에 대해 고민해 본 적 있습니까? 없잖아요.
그걸 주께서 알아요. 인간이 망가졌다는 걸. 망가졌는데 망가진 건 문제가 아니에요. 그 망가진 것을 망가졌다고 하는 인식이 살아날 때 이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이 개시된 겁니다. 시작된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로마서 7장 9절에,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죄가 살아나고 나는 죽었더라.
자,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 세상은 원래 인간과 인간이 대화합니다. 인간과 인간이 만나요. 각자 살아 있으니까. 그렇다면 사람을 만날 때 ‘나’는…, ‘나’라고 붙여야죠. 왜? 나는 살아있으니까요. 나는 [ ]다. 빈칸에 나는 [서울대학 나왔다.] 나는 [애가 둘이다.] 이런 거, 나는 [교회 집사님이다.] 앞에 ‘나’가 붙어요.
그런데 성경은 ‘나’가 붙어서 남들과 만나는 그 모든 문장 형성, 그러한 조건들을 단번에 말씀으로 이렇게 합니다. “너는 죽었다.” 그리고 ‘너는 죽었다’의 그 문장 앞뒤를 바꿔요. “죽은 것이 바로 너다.” 이걸 더 심화해서 이야기하면, “죽음과 저주와 지옥을 묘사하고 표현하기 위해서 나는 너를 이 땅에 만들어 냈다.” 곧 ‘먹고 마시고 움직이는 모든 것이 바로 죄요, 저주요, 지옥 갈 이유들과 조건들로 평생을 꽉꽉 채우며 살아가야 해.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들 거야’라는 겁니다. 구원 끝났죠. 천국도 날아갔죠.
이 점을 이렇게 한번 생각해 봅시다. 사람들이 얼마나 평소에 무심코 살아가는지 예를 들겠습니다. 직장에서 직장 상사가 직원보고 이야기합니다. “이것 좀 해주세요.” 부하 직원이 “어제도 이야기했는데 그거 제가 못한다고 이야기했잖아요.” 여러분, 이 대화에 무슨 문제 있습니까? 그만큼 우리는 우리 자신에 문제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어요.
또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가정에서 남편이 아내한테 부탁합니다. “여보 여기 바짓단이 떨어졌는데 좀 기워줘.” 아내가 “알았어.” 이 대화, 이 대화에 문제 있습니까? 문제점이 발견됩니까? 이 대화가 우리가 지옥 가야 될 어떤 증거가 될 수 있습니까? 못 찾아내죠. 또 예를 들겠습니다. 주유소 가서 “여기 기름 좀 넣어주세요.” 이게 뭐 문제 돼요? 기름 넣어 달라고 했다고 하나님께서 지옥을 보냅니까? 내가 지옥 가는 것과 주유소 기름 넣는 것과 매치가 안 되죠, 연결이 안 되지요.
마지막 또 하나, 김밥 천국 가서 “여기 김밥 세 줄 주세요.” 이런 말을 한다고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지옥 보내는 근거나 조건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못 찾아내죠. 찾아낼 수가 없죠. 대화를 한다는 것, 일상적인 대화, 방금 이야기 한 것들은 우리가 보기에 하나 하자가 없는데, 너무나 자연스럽고 또 그렇게 소통을 위해서 대화를 하는 이것이 왜 문제냐 이 말이죠.
이게 왜 문제냐 하면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영광스럽습니다, 너무나 감격스럽습니다’ 그러한 태도가 일상적인 대화를 통해서 다 날아가는 거예요, 다 날아가 버린 거예요. 세상에 다가서면서 “이거 해주세요.” “곤란한데요.” 혹은 “이거 해주세요. 그러면 내가 이걸 해줄게요.” 이것은 뭐냐 하면, 대화를 하는 상대와 내가 둘 다 존재해야 마땅하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대화하는 거예요. ‘나는 살아있는 게 마땅하고 너도 살아있는 게 마땅하고 정당한 것이다. 살아있는 것에 대해 난 정당성을 갖고 있고 나에겐 그만한 가치가 있다.’ 이걸 대화를 통해서 지금 우기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보기엔 너무나 마땅한 이런 자연 현상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 근원적으로 완전히 박살 냅니다, 무시합니다. 제가 예를 한 번 들어볼게요.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자식이 휴가를 맞아 부모 집에 갔습니다. 이렇게 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때문에 내가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이거 문제 있어요? 문제없어 보이죠. 이것은 부모에 대한 모독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을 할 때 ‘자기가 여기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는 부재의 의미가 날아가 버렸어요. 조금 더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사실상 인간에게는 부모가 없습니다. 부모가 없고요,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내가 나를 창조한 존재로 만들기에 모든 역량을 쏟고 있습니다. ‘저분들 때문에 내가 태어났다.’ 말은 그럴싸하죠. 그러나 ‘오늘날의 내가 된 것은 내가 창조자고, 나라는 피조물은 내가 만든다는 것’, 곧장 자기중심의 인생관으로 전환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뭘로 보내냐 하면, ‘사람의 아들’로 보냈어요. 예수님 자기 자신이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로 오신 이유가, 내가 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는데 볼 일이 있어서 잠시 사람의 아들로 와야 된다고 해서 이름을 사람의 아들로 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아들인 것으로 말미암아, 어떤 인간도 사람의 아들에 합당한 존재는 일체 존재하지 않습니다. 없습니다.
진짜 인간 같은 인간은 예수님 빼놓고는 없어요. 다 인간이 아니에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나, 인간 천국 보내주세요’ 혹은 ‘지옥 보내주세요’ 할 자격이 없습니다. 애초부터 그건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인간은 인간을 인간이라고 여겼는데,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는 인간은 애초부터 인간이 아니었던 거예요. 인간 흉내를 내고 있었던 겁니다.
“왜 내가 사람인데 사람이 아니라고 그렇게 억지 부리십니까?”라고 달려드신다면 그게 바로 성경을 멀리했기 때문에, 성경에서 출발한 것…, 아까 뭐라고 출발했죠? 성경에서 출발할 때는 같은 살아있는 인간끼리의 대화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넌 죄를 품고 있고 뭘 해도 죄인이다. 저주받을 자다’라는 이 출발점을 성경에서 이야기한다고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성령이 나오잖아요? 안 보여요. 안 보이니까 인간은 그걸 배제해 버리죠. 그런데 성령을 알려면 반드시 우리가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느냐? 악령에서부터 출발해야 돼요, 악령. 악령부터 출발해서, 악령이 인간을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 놓은 겁니다. 악령부터 출발해서, 악령이 우리에게 외쳤던 것은 뭐냐?
‘이 세상엔 사람밖에 없다. 보이는 것밖에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신경 쓰지 마라. 그거 중요한 문제 아니다. 늙어 죽을 때나 가끔 생각하고 지금 살아있을 때는 보이는 네가 이 세상 어떤 것보다 소중하다.’ 그런 식으로 악령이 이야기했어요, 악령이! 그런데 인간들은 악령의 존재를 모르죠. 하지만 성경에 나온다고요. 성경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 3장 1절에 나옵니다.
창세기 1장에, 사람 없죠? 사람 안 나옵니다. 1장 끝에 나오지만 대부분 안 나와요. 창세기 2장에 ‘하나님의 형상’이 나와요. 지난 수련회 때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악령은 안 나와요. 창세기 3장에 들어가면 제일 첫 번째 나오는 게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여기 뱀이 등장합니다.
여러분들이 자식을 유치원에 보낼 때 또는 초등학교 보낼 때 선생님께서 미술 시간에 “각자 재미난 거 생각해서 편한 대로 그려보세요.” 이렇게 할 때 세상에 어떤 아이가 “선생님 그림 다 그렸어요.” “보자,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보니까 뱀을 한 마리 그려 놨다. 여러분, 이런 인간 봤습니까? 이런 인간 봤어요? 대부분의 아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려요, 눈에 보이는 것을. 시작을 눈에 보이는 것부터 출발한다고요.
그런데 하나님의 시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뱀부터 출발하잖아요. 뱀, 악령, 악마. 그리고 그 악마가, 뱀이 그냥 곱게 앉아있었습니까? 뱀이 누구하고 대화를 시도해요. 그리고 찾아가서 대화를 시도하고, 대화를 시도한 그것에 대해서 뱀이 아주 만족스러워합니다. 뱀의 목표는 ‘하나님을 전제로 한 인간이 되지 말고, 하나님을 후차로 돌리고 시작을 너부터 하는 존재로 살아라.’ 이걸 악령, 악마, 뱀이 우리에게 알려줬고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종교도 거기서 나와요. 기독교도 거기서 나오고, 교회도 거기서 나와요. 마귀가 만든 거예요, 마귀가. 시작점이 눈에 보이지 않는 악마가 시작을 했는데 인간은 악마에게 이상한 음료수라고 할까요, -선악 나무죠- 그 과일을 따 먹고 난 뒤에는 이제는 악마도 안 보이고, 성령도 안 보이고, 하나님도 안 보이고 오직 보이는 것은 나밖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달라졌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규정하든, 천국을 말하든, 지옥을 말하든 모든 시작점을, 생각 의식 자체를 내가 여기 있다, 나에게 얼마나 유리하냐,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모든 출발점을 자기로부터 하면서 진리를 따지고 하나님을 따지고 중보자를 따지고 구원을 따지는 그런 세계에 돌입하게 된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 점에 대해서, 이 마귀의 세계에 대해 가만히 지켜보겠습니까? 조치를 취하죠. 조치를 취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존재’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흔적’으로 바꾸는 거예요. 존재를 흔적으로 바꾼다. 존재를 흔적으로 바꾸는데 성경에는 흔적이라는 용어보다도 ‘표적’이라는 용어로 나옵니다. 표적으로 바뀌어요, 표적.
표적은 불연속적이에요. 있다가도 없어요. 표적은 단발성이고 우발성이에요. 사람이 살아있으니까 계속 천 년 만 년 살 것 같습니까? 야고보서 4장 끝에 보면, 있다가도 없는 게 인간이라고 했잖아요. 안개같이.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너 자신을 볼 때 “너 있어, 없어?” “있습니다.” “없어질걸?” “그러면 그 전에 ‘내가 있습니다’라는 건 뭡니까?” “그건 존재고” “그러면 없어지는 건 뭡니까?” 뭐가 묻었을 때 문질러서 없어지게 되면 그건 흔적이죠. “넌 흔적이야.” “무엇의 흔적입니까?” “영원히 살아있는 두 존재, 하나님과 악마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흔적”이죠.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예수님의 존재와 악마의 존재의 흔적을 보여주는 단발성, 일시적인 흔적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태어나고 나타난 게 바로 인간이라는 거예요, 인간!
그래서 성경은 양보가 없어요. 양보 일절 없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나오죠. 본문 다시 한번 봅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야고보서 4장 5절에,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여기 성령이 나오잖아요. 출발점이 성령이라고요. 출발점이 성령이에요.
“그러면 성령 믿으면 되잖아?” “아니?” 아니에요, 성령을 못 믿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성령은 상대방의 대립하고 대체되는 다른 영이 있어요. 그게 악령이에요. 너 나한테, 성령으로 오려면 반드시 어디를 거쳐야 되느냐 하면, ‘내가 악령에 속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성령으로 오라는 겁니다. 참, 이 점을 좀 설명 해야 해요. 이게 어려워요.
성경에 문자가 나오니까 ‘믿습니다’ 이거 안 받아줘요. 네가 믿습니다, 동의합니다, 사랑합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주께서는 모든 인간의 발언을 악령이 인간을 앞장세워 내뱉는 악령의 자기 고백으로 간주해서 다 거부해 버려요.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둘 중에 여러분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은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2번 나갑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이미 죽었음을 아십니까?’ 둘 중에 어느 쪽에 출발점을 가져야 하죠? “사랑하는 형제자매~” 교회에서 몸 대기도 싫은 사람 붙들고 귀찮은데 “여러분, 옆 사람과 할렐루야로 인사하시고, 주님이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세요.”
인간은 모든 대화에서 빠뜨리는 게 있어요. 뭘 빠트리느냐 하면, 내가 내뱉는 모든 것은 죄라는 사실과, 그 죄가 악령의 앞잡이로 나타나면서 마치 영원히 구원받아야 할 존재처럼 착각하는 그 착각, 성경에서 일체 받아주지도 않는 착각을 스스로 긍정하면서 그 조시로 인생 끝까지 밀어붙이는 거예요. “교회 50년 다녔다.” 이러면서요. 무슨 그런 억지가 다 있어요?
출발점을 보세요, 출발점을. 악마의 앞잡이잖아요. 앞잡이이면서 성경 보는데 악마가 성경을 얼마나 이용한다고요. “성령 믿습니다.” 그걸 왜 말을 못할까요? 하죠. 그런데 도대체 노리는 게 뭐냐는 말입니다. 도대체 뭘 노리는 거냐, 이 말입니다. ‘내가 여기 영원히 있습니다.’ 하는 자기의 존재성을 자기 조건으로 끌어당기려고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용납할 리가 있습니까? 절대로 용납 안 하죠. 그래서 주님께서 인간을 다룰 때 어떻게 다루는지 마태복음 12장 39-42절에 나옵니다. 자, 일단 우리는 악마에 속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것, 고백하는 거 다 마귀 소리예요. 그거 다 거짓말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가 ‘여기서 내가 내 입으로 고백합니다.’ 하는 그 전체가, 존재적인 조건을 갖춰놓고 그걸 내뱉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봅니다. 마태복음 12장 39-4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이 대목, 요나 선지자 전체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표적’, 표적이라는 말이 어렵죠? 그러면 흔적, 문대버리면 지워지는 것, 뒤에 보면 아무 실체가 없는 것, 그냥 우발적으로 나타난 어떤 현상 같은 것, 그게 요나라는 거예요.
요나보고 “구원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하고 그런 질문하지 마세요. 요나는 그런 대상이 안 돼요. 요나는 구원의 대상이 아니고, 예수님이 다루시는 표적의 대상이에요. 오늘날 성도같이. 성도는 구원받는다는 게 성립이 안 돼요. 성도는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는 흔적으로 쓰일 뿐이지, 개인이 존재도 아닌 게 왜 구원을 받죠?
성경에서는 분명히 말합니다. 구원은 누가 구원받느냐 하면, ‘그리스도 몸’이 구원받아요, 그리스도 몸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될 때 비로소 존재가 갖춰지는 거예요. 인간이 개인적으로 존재한다, 여기 있다는 말을 성경에서는 거부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몸의 지체로서 주님의 존재에 합일될 뿐이지, 사적인 구원은 없어요. 주님이 다루시는 그냥 표적이라니까요, 표적.
어떤 표적이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백날 애써 노력해도 결국 더러운 악마의 본색만 드러내더라’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주님께서는 자기 사람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 듣고는, “그런 식의 이론이라면 우린 아무것도 아니네요? 애초부터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네요?” 하는 약간의 섭섭한 마음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거예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것은 제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니고, 성경 갈라디아서 6장 15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여기 나오잖아요. 할례자 유대인, 무할례자 이방인. 이 세상은 할례받은 사람과 할례받지 않은 사람 그 둘의 집합, 종합이에요. 모든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말 설교 여기서 끝내고 싶어요.
아무것도 아닌데 교회 왜 나가요? 아무것도 아닌데 애 왜 키웁니까? 아무것도 아닌데 왜 사십니까? 살아도 사는 이유 모르고, 화내도 화내는 이유 모르고, 고민과 염려를 해도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왜 고민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자기 주제에 오버하는 그런 태도를 왜 보이는 거예요? 그게 사회포지션 때문에 그래요, 포지션, 존재의 포지션 때문에 그래요.
‘1년 뒤에는 내가 어디서 뭘 어떻게 할까.’ 이 포지션을 가지려고 하는 자체가, 자기가 우발적 존재인 것을 감추고 계속 연속해야 하는 존재인 양 하는 데 연속해야 하는 것은 딱 두 종류밖에 없어요. 예수님과 그리고 마귀, 두 종류 밖에 없습니다. 인간들은 우발적인 불연속성의 존재에요.
그래서 여기 요나를 표적으로 하는데 요나가 어떤 사람이냐? 요나가 하나님께 쓰이는 거예요. 요나는 ‘죽음에 덮이지 않으면 주의 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적이었습니다. 요나는 배 타다가 물에 빠져 죽었어요. 여기까지! 존재로서 인간이 인식하는 한계는 뭐냐? 사람은 바다에 빠지면 죽습니다. 여기까지가 배에 탔던 사람들이나 요나의 인식이고, 다 마찬가지로 여기까지가 한계에요. 이게 한계라고요, 존재의 한계에요.
백날 공부하고 열심히 책 봐도 죽으면 끝, 죽으면 끝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가지고 장차 올 진짜 인간, 가짜 인간들 말고 진짜 인간, 사람의 아들로 오시는 예수님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어떤 다른 면을 보이는가를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요나로 하여금 죽음을 본인이 자각하게 만들어요.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요.
그러면 내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그 개념을 주께서는 사라지게 하지 않고, 물고기 뱃속에서 그걸 온몸으로 느끼도록 하는 거예요. ‘아, 이게 죽음이구나. 이게 저주구나.’ 죽음, 죽음 하다가 진짜 죽음을 체험한 거예요. 죽음을 체험한 겁니다. 죽음이 나보다 더 세게 나를 덮어준다는 거예요, 죽음이.
진도 나가기 전에 다시 한번 그 점을 생각해 봅시다. 인간이 “부모님 덕분에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한다는 것은 ‘부모가 존재하지만 나도 존재한다.’ 즉 어느 점에 악센트가 있느냐? “참 고맙습니다. 부모님 덕분에 제가 살았어요.” 악센트가 어디에 가 있느냐 하면, 부모가 살아있다는 것보다는, 부모가 어쨌든저쨌든 ‘내가 여기 있음’에 방점을 둬요. ‘부모님이 날 만들었다는 것을 아는 내가 얼마나 위대하냐?’ 이 말입니다.
그렇게 되다 보니까 자기가 자기를 새롭게 만드는 창조자가 되죠. 여기서 뭐가 누락 되느냐, 뭐가 빠지느냐 하면, 고린도후서 5장이 여기 들어갈 틈이 없어요. 5장 14-15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여기 ‘대신한다’는 의미가 모든 인간 존재에 끼어들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 인생은 여태껏 내가 만들었기 때문에 ‘대신한다’라고 하면 기분이 사악 나빠요, 기분이 싸~해져요. 인생은 내가 만들기 때문에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에요. 왜? 그동안 정성이 다 들어있는 게 지금의 나거든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잖아요. 주일 날 교회 가고, 봉사도 하고, 찬양도 하고 ‘이게 왜 아무것도 아니야? 이게 의미 있는 거지. 모든 의미 있는 것들의 집합체가 지금 살아있는 나다.’ 자기를 부인할 수가 없어요.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내 인생을 내가 진짜 하나님께 내놔도 부끄러움이 없는 인간으로 제시 할 때 ‘이렇게 잘 살았어요’ 하고 내세울 만한 것을 다지고 점검하고 꾸미는 데 전력을 다할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함으로써 뭐가 날아가 버렸어요? “어이, 아무것도 아닌 거. 이리 와 봐!” “예.” “너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대신할게.” 대신할 수 있는 여지가 우리한테 꽂힐 공간이 없어요, 공간이 없다고요. 15절에 보면,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14절, 15절에 ‘대신하심’이 세 번 들어가요. 세 번 들어가는데 이 본문을 보면서도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요. ‘그동안 내가 나한테 얼마나 충실했는데.’ 충실했기 때문에 자기방어가 단단한데 거기 ‘대신하심’이 끼어든다는 이것은 열심히 살았던 나에 대한 모독이에요. ‘이 못난 자야, 아이고 인간아. 내가 대신한다.’
심지어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예요. 오늘 본문에 어떤 식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모독하느냐 하면,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라고 되어 있어요. 성령께서 성도에게 말하기를, “내가 시기, 질투할 정도로 널 악마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내 얼마나 애쓴 줄 아느냐?”라고 우리에게 묻잖아요.
물을 때 우리가 이 말씀에 대해서 기분이 안 좋아요. 왜?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아요. 교회에서 하라는 대로 다 하니까요. 얼마나 내가 대단한 존재입니까? 주위에서 막 신앙이라고 이야기 해주고, 그걸로 내가 사는 데 보람을 느끼고, 얼마나 대단해요?
그런데 이러한, 되게 안 좋은 기분은 우리보다 선배가 있어요. 베드로입니다. 누가복음 22장 31-34절에 보면,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베드로야, 네 인생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네가 너에게 충실해서 천국 가는 게 아니야. 제발 착각 좀 하지 마. 넌 나에게 붙잡혀 있어. 붙잡혀 있는데 마귀가 너를 청구하려고, 저 사람 내가 데려가야지, 하고 막 떼를 쓰니까 주님께서 마귀에게 안 뺏기기 위해서 베드로 널 위해서 다른 제자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에 널 마귀에게 뺏기지 않고 너는 내덕분에 천국에 갈 거야.’ 지금 이 말씀을 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이 말이 정말 우리에게 감격스럽고 기쁘고 고맙고, 그런 겁니까? 아니면 기분 나쁜 겁니까? 여러분에게 어떻게 들려요? ‘주님 왜 그래요. 내가 내 인생 알아서 잘하고 있는데! 남들이 나를 얼마나 칭찬하고 있다고요.’ 뭐 이런 식으로 나오고 있는 건 아니에요? 칭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러면 주님께서는 악령으로부터 시작된 우리의 이 잘못된 것, 이 현실 세계, 존재와 존재의 집합, 그들이 행동하는 것, -이게 통계 역학인데요- ‘이 공간이라는 것은 거기 소속된 존재들의 활동에서 나온 에너지, 그 전체가 현실 사회’라고 물리학에서는 그렇게 보고 있어요. 이게 공간이에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인간이 그런 공간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내가 여기 말고 다른 데 간다.” 이렇게 하니까 바리새인들도 이야기하고 제자들도 이야기했어요.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요 13:36). “다른 공간으로 간다.” 다른 공간. 자, 여기서 질문이 나올 타이밍이 됐죠?
딸과 엄마가 이야기합니다. 딸을 학교에 데려다줬는데 “엄마는 어디가?” “엄마는 집에 가지.” “난 학교에 있고 엄마는 집에 있겠네요?” “그래. 집에 있지.” “그런데 엄마 집이 어디에요?” 뻔히 알면서 이렇게 묻는다고 칩시다. 물론 말이 안 되는 질문이지만 이렇게 할 때 여러분이 엄마 같으면 “너 집도 몰라? 오늘 아침까지 있던 그 집에 가는 거야”라고 답변해야 되죠.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너의 학교, 그리고 네가 출발했던 그 집, 중간 어디에 공간이 있어요. 이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성령 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성령 안. 학교 간다, 존재죠. ‘엄마는 어디가?’ 존재지요. ‘엄마라는 존재는 어디가?’ ‘집에 가.’ 존재를 인정하는 공간은 하나님이 만든 공간이 아닙니다. 인간은 표적이어야 되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존재가 있는 공간은 성경에서 인정한 적이 없어요.
그렇다면 제가 본문을 하나 읽어드릴 테니까 이 공간은 어느 공간인지 여러분이 한 번 생각해 보세요. 5초 드리겠습니다. 5초 동안 생각해 보세요. 로마서 14장 17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여기서 질문 나갑니다. ‘성령 안’이라는 공간은 어디 있죠? ‘성령 안’이라는 그 공간은 어디 있습니까?
하늘나라 아니죠. 그건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 낸 공간 천국이고 그거 말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은, 네가 생각하는 하늘에 있지 않아요. 어디 있어요?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이라는 인간들이 들어올 수 없는,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을 따로 만들었어요, ‘성령 안’.
그렇다면 우리한테 지금 이 시간에 이게 새로운 문제 거리로 등장해요. 육의 존재, 나밖에 모르는 인간과 차이 나는 그 공간인 성령 안, 그런데 인간에게는 ‘성령 안’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에요. 귀신도 없어요. 귀신도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요. 보이는 것은 인간밖에 안 보여요. 그리고 눈에 보이는 내가 여기 보이고.
그런데 주님께서 가시는 곳, ‘성령 안’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제시했을 때 우리는 그 공간에 어떻게 가느냐 이 말입니다. 주께서 마련했기 때문에 그 ‘성령 안’에 못 들어가면 구원은 나가리 돼요. 끝났어요. 그래서 아까 본 갈라디아서 6장 15절을 다시 한번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천천히 들어가겠습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가 아니고, ‘할례받은 자, 존재, 할례받은 인간, 인간 존재, 그리고 할례 안 받은 존재, 인간, 무할례자, 할례 받은 자나 무할례자나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라고 했어요. 갑자기 인간이 할 수 있는 숙제에서 떠나버렸죠. 인간이 할례받을 수는 있어요. 여기 있는 내가 할례받으면 되잖아요. 인간은 존재가 행하니까. 무할례자는 “난 안 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주께서는 ‘둘 다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둘 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까 ‘할례와 무할례’라고 성경에 나와 있지만 ‘할례자와 무할례자’라고 ‘자(者)’를 붙여야 된다고 했지요? 둘 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둘 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라는 말이에요.
천국 가려고 교회 나왔는데 막상 성경을 딱 보니까 교회 나온 이유가, 이렇게 하면 천국 간다는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교회 나온 게 아니고 결국은 우리의 근원적인 자리로 유턴, ‘너 여기 있지 말고 원래 자리로 가, 원래의 자리, 원래 자리로 가서 성경 다시 봐’ 그 원래 자리로 보내는 일을 성령께서 하십니다.
그게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데요. 15장 24절, 역시 천천히 읽어볼게요.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한 번 더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아무 말도 안하고 말씀을 안 전했으면 너희에게는 뭐가 성립되지 않는다? 죄가 없다’는 거예요. 죄가 없는데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아고 내 아버지가 누구’라고 소개하니까 그때 나온 현상이 뭐냐? 그들이 비로소 제대로 예수님과 아버지를 미워했다는 거예요. 미워하는 자체가 죄거든요.
가만있으면 죄가 없는데, 가만있으면 하나님도 사랑하고 예수님도 사랑하는데 막상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하나의 흔적, 하나의 표적으로만 다루어서 ‘넌 개코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때 여기서 가만있을 위인들이 없고, 거기서 갑자기 싸~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아버지와 예수님에 대해 미워하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존재가 악령과 연결되어 있고, 연속되어 있다는 티를 내는 거예요.
우리가 중립 지역에 있는 게 아닙니다. 악마와 한패였습니다. 창세기 3장 6절, 한패였어요.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우리는 입술로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내심은 뭐냐? 미워죽겠어요, 주님이. 내 인생을 이 꼬라지로 만든 주님이 미워죽겠어요.
그게 답답해서 따지기 위해서 교회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가 없어요? 감사가 없고 고마움이 없어요. 기쁨이 없어요. 모든 것이 어거지고, 억지에요, 사는 게. 대놓고 원망할 수는 없고, 원망하다가 걸리면 지옥 갈까 싶어 무서워서 원망은 못하고, ‘내가 인간성이 좋아서 꾹꾹 참습니다. 하나님. 주께서도 그거 아시죠?’ 이런 식이에요.
‘성령 안’에서 그렇게 하는 이유가 그 성령에 우리가 들어갈 수가 없어요. 못 들어갑니다. 성령에 못 들어갈 줄 알고 들어갈 수 있도록 주께서 성령을 몰고 우리에게 찾아왔어요.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너라는 마귀 앞잡이가 ‘성령 안’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사건을 경유해야 한다고 제시한 것이 갈라디아서 6장 14절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한마디로 말해서 십자가 사건 앞에서 성령을 받은 자는 뭘 깨닫느냐? 내가 이미 죽은 자인데 그동안 마귀의 습성 때문에 ‘내가 살아 있어서 애도 잘 키우고, 성공도 하고…’, 내가 이것저것 잘 하니까 살아있는 것처럼 여기는 걸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들이대요. <오멘>이라는 무서운 영화에 보면 천주교 신부 퇴마사가 귀신 쫓아낼 때 이마에 뭘 자꾸 들이대요? 십자가를 들이대잖아요. 십자가 들이대면서 뭐라고 합니까? “귀신 나가라!”고 하잖아요.
주님께서 모든 말씀 안에 십자가를 포함시켜서 그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에게 들이대면서, “이 사람 내 사람이니까, 마귀야! 이 사람 그만 괴롭히라”고 성령께서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우리에게 들이대는 겁니다. 성령께서 십자가를 앞장세운다는 것은 갈라디아서 5장에 나와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그러니까 ‘넌 이미 십자가에 죽은 자야’라는 것을 반복하는 거예요, 반복. 계속 되풀이해요. 계속 되풀이합니다. 계속 되풀이하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널 얼마나…, 시기가 날 정도로 좋아했는데, 나는 너 하나 안 놓치기 위해 널 얼마나 사모했는데!” 성령께서 말합니다.
성령이 예수님의 영이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그 취지가 뭔 줄 알아? 너하고 바꿔치기 하려고, 너하고 바꿔치기 위해서. 마귀 들린 너와 성령이 있는 예수님의 그 몸의 운명과 바꿔치기 위해서 성령이 널 얼마나 사모하고 좋아하고, 마귀한테 안 뺏기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썼다.” 이걸 말씀을 통해서 늘 반복시킵니다. 우리의 본질을 파악케 하고, 본질을 드러내요.
그러니까 성도의 특징은 늘 우리 속에 나라는 고체가 아니고, 뭔가 흐르고 있어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식당에 가서 민물 장어를 먹는다고 합시다. 사람들은 장어를 딱 놓고 쌈을 싸 먹잖아요. 보통 다 그렇게 하죠. 상추에 장어를 양념장에 찍어서 올려놓고 쌈 싸잖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고기를 없애버리고 거기에 초장이나 간장, 흐르는 액체를 올려놓고 싸 먹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식당을 왜 온 거예요?
초장은 집에서나 먹지 장어집에 와서 그걸 왜 먹어요. 주께서는 우리에게 성령…, 흐르는, 우리 손에 잡히지 않는, 우리에게 포착되지 않는 성령을 날마다 찍어서 우리 안에 집어넣어요. 그게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서 죽은 자이기 때문에 세상은 나에게 관여할 게 없고, 또한 내가 세상에 관여할 것이 없고, 다만 성령께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가지고 입자, 하나의 개체, 고체같은 우리를 ‘표적’으로서 계속 사용하는데, 그 사용하는 방법이 뭐냐? 옛날에 주님께서 요나를 사용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용하는 거예요.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요나를 주께서 사용할 때 요나가 얼마나 삐졌는지 몰라요. ‘이렇게 살 것 같으면 난 죽습니다, 자살합니다’ 이럴 때 주님께서 요나에게 하는 말이 “네가 은혜를 또 날려 보냈구나. 은혜를 또 잊어버렸구나.” 이런 말로 해서 요나 이야기가 그걸로 끝나요. 주님께서 요나를 건진 줄도 모르고 요나는 자기 존재에 안 맞는 일을 한다고 불평을 늘어 놨잖아요?
똑같은 것이 반복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이미 죽은 자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했다’라는 이 끝난 이야기를 증거하려고 하는데 우리가 그렇게도 불평이 많아요. ‘내 존재는 어떻게 됩니까?’ 아무것도 아니죠.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것도 아니게 들춰내시는 그 은혜를 계속해서 감사하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뭐 하고 살았는지, 어떤 생각을 품고 살았는지 다시 말씀을 통해 돌아보게 하옵소서. 굳이 장래 일을 목표로 하지 않더라도, 몇 년 뒤를 계획하지 않더라도 그때 그 시점에 가도 난 아무것도 아니고, 지금 이 시점에서도 난 아무것도 아니고,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를 사용하시는 십자가 지신, 십자가의 의를 드러내는 주님밖에 없음을 감사와 감사로 늘 나타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