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호

성화론과 인도철학 유사성

아빠와 함께 2026. 6. 27. 11:06

소위 '성화론'이라는 교리와 인도철학과의 유사성

2000년 11월 30일

욕망은 대상을 보고 일어난다.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소유할 가능성을 내다보면서 일어난다. 가능성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욕망이나 집착도 사라지는 법이다. 그래서 구원을 받겠다고 덤벼드는 것은 대단한 욕망의 화신이다. 반면에 천국이나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한 자에게는 구원의 소식도 욕망으로 자극받지 않는다. 소유했을 때 기쁨과 만족을 준다는 기대없이는 인간은 결코 욕망을 발산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모든 활동이 소유 행위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욕망이라는 것이 대상을 노려보면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의 존재는 욕망이 물어다 주는 것으로 지탱하고 있다. 그래서 그 몸으로 물어다 주는 것으로 동화되면서 사람이 추해진다. 강한 소유의식의 인간일수록 자아는 변질된다. 자아는 욕망의 대상에 따라 계속 변신되어 나갈 뿐이다. 그 소유 대상이 예수가 되었든 성령이 되었든 하나님이 되었든 구원이 되었든 교회가 되었든 목사직이 되었든 돈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마찬가지이다.


인도철학에서는 욕망을 욕망대로 인정하고 그 욕망을 조절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한다. 즉 욕망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조절할 수 있는 욕망으로 바꾸어나가자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행위가 나오게 되어 있는데 행위라는 것은 신체를 움직여 하는 행위뿐만 아니라 말이라는 행위와 생각이라는 행위도 다 포함된다. 그런데 이 행위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 혹은 여력'의 발로이다. 방금 작은 따온표를 한 문장에다 다시 한 군데를 따온표를 해본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 혹은 여력이다.] 여기서 '가지고' 있다는 보는 그 의식을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인간이 어떤 행위가 행위로서 간주되는 것은 그 사람이 사전이 소유해 있는 그 무엇이 밖으로 발산되어서 그런 행위적 결과를 낳았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소위 기독교계에서 말하는 성화론과 인도철학의 공통점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아무 것도 소유해 있지 않다면 그 어떤 행위도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주님을 사랑하는 행위도 미리 그 사람 속에 인간의 잠재력이나 여력이 들어 있어서 비로소 나온 결과로 해석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인도철학이 수 만가지 신은 받아드리면서도 결코 유일신을 인정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아무리 신이라 할지라도 인간 내부의 욕망이 자극되어 그 신을 필요로하고 소유하고 싶어서 욕망 달성의 파트너로 불러주지 아니하면 그 신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이라는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켜 줄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등장된다고 이해하고 있다.


소의 기독교계의 '성화론'은 인간의 행위를 출발점으로 하여 어떻게 하면 바람직한 윤리관을 도출해 낼 수 있느냐에 관한 탐구이다. 그런데 인간의 행위란 욕망의 대상이 없으면 발동하지도 않을뿐더러 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즉 아무리 신의 명령이라도 그 명령의 내용이 자신의 욕망을 자극시킬 만한 내용이어야 행위에 나서게 되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해서 성취 가능성,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는 욕망을 내며 행위에 나서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몸이 아플 때의 욕망은 건강한 몸의 소유이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야고보서 5:13-16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따라서 자신의 병을 위하여 기도하고 남의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한 것이 뭐가 나쁘냐라는 것이 것이다. 오히려 누구든지 필히 해야될 잘한 일이라고 본다. 또 술을 끊고 싶을 때는 에베소서 5:18를 자기에게 적용시킨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즉 술에서 해방된 자아의 몸을 소유하고 싶을 때, 이런 구절들을 가지고 자신을 합리화하고 싶은 것이다.

간음에서 해방된 몸이고 싶을 때는 다음의 성경 구절을 거론한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살전 4:3-6)

또는 전도하고 있는 자아상을 그릴 때는 다음의 성경 구절에 매달린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그러니까 그 어떤 성경 구절을 동원하더라도 자기 속에 들어있는 이미 여력이나 잠재력의 발휘로 얼마든지 실현 가능한 일이라고 간주하고 그 성경 구절을 실천에 옮겨야 된다는 것이 바로 성화론의 요지이다. 만약 하나님의 능력이나 힘이나 사역으로 모든 것을 다해 버리신다면 성화론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성화론'의 취지는, 어떤 자가 주님의 능력으로 병이 나았다든지, 술을 끊고 성령에 충만했다든지, 땅 끝까지 증인이 되었다든지 특별한 경우에도 간음하지 않았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결과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행함에서만 도출되어서 일어난 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어떤 결과이든 인간의 행위에서 출발하지 않는 결과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성화론을 버티고 있는 중심 기둥이다. 왜냐하면 그래야지만 신앙이라는 것도 소유의 대상으로서 '나'라는 자아가 취득 가능해야지만 나의 욕망이 관심을 둘 수 있기 때문이다.


인도철학에서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냥 무시되고 사라지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반드시 어떤 결과를 나타내고야 만다는 것이다. 이것을 '카르마의 법칙'이라고 한다. 흔히 '업(業)' 혹은 '업보(業報)'라고 한다.

선한 원인에 의한 행위는 반드시 선한 결과가 있게 마련이고, 나쁜 원인에 의한 행위는 반드시 나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자업자득이나 뿌린대로 거둔다는 식의 말이다. 그런데 이런 법칙이 성사되려면 반드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확연하게 구분지어져야 한다. 따라서 이들은 행복과 고통으로 구분했지만 실제로 세상을 살아보니 선한 일에 행복이 절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요 또한 악한 일이라고해서 비극이 절로 오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 또한 분통 터지는 모순이요 심적인 고통를 야기할만한 현상이다. 따라서 그래서 이들은 행복과 고통의 범주를 현세에 머물도록 하지 않고 내세까지 확정시켰다. 여기에 신이 등장되는 것이다. 신이 등장되는 필히 따라오는 것이 신에 대한 합당한 아부성 제사이다. 만약 규정된 제사를 드리지 않는 자에게는 지옥행이요 규정된 제사를 드린 자에게는 신의 가호와 용서가 있는 극락에 가게 된다.

따라서 천국을 선호하고 지옥을 배타시하는 것은 천국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입장에서 볼 때 행복이 좋고 고통이 싫어서 그러한 것이다. 이처럼 신이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국에 대한 묘사가 아름답고 화려해질수록 지옥은 더욱 끔찍하고 혹독한 곳으로 묘사된다. 천국이 살만한 곳이 되면 될수록 지옥은 더욱더 못 살 곳이 된다는 것, 더나아가서 저 세상에 집착한다는 것은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그다지 신통치 않는다는 증거이다. 인간이 끝까지 자기 행한대로 운명이 좌우된다. 이래서 인도철학식 운명론이 이래서 구축된다.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은 행위를 낳고 그 행위는 종교적 내용까지 거침없이 통용이 가능한 실정에 있다. 사람들이 시장에 가서 돈을 주고 물건 사서 소유하는 행위나 교회에 나가서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술 끊는 행위나 기도나 전도나 구제라는 행위로 구원을 소유하는 행위나 다같이 자신의 존재에 담겨있는 잠재력과 여력의 열매라는 점에서 거리낌없이 통용된다.

이처럼 인도철학에서나 소위 성화론에 있어서 선과 악의 구분은 자신의 욕망이 매달리는 그 행복성과 관련있다. 만약 성경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말하면 자신도 모르게 화를 낸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25)

이 말씀에 화를 내는 이유는 이 말씀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평소에 욕망하는 바가 아니지만 마지 못해 억지로는 이 말씀을 지켜드리겠다는 것이다. 평소에 '자기 부인'과 '주를 위해 목숨을 잃는 것'이 참으로 자신의 즐거운 소망이었다가 아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인간의 근원적인 '소유 의지'를 무참하게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를 가져라'라든지 '평생 목사로서 존경받고 살아라'든지 '당신은 성령의 능력을 가져라'라고 한다면 결코 화를 내지 않고 즐거워한다. 소유는 인간이 자기 욕망을 달성하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을 부인하라'라는 말이나 '죽고자 하는 자만이 산다'고 했을 때 그것을 자신의 희망으로 삼기란 기적 중에 기적에 해당되는 사람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어떠한 고백을 하고 있는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찐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1-24)

즉 위의 말씀을 보면 사도 자신의 욕망은 지금이라도 당장 죽는 것이지만 단지 너희들을 위하여 더 수고를 해야하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고린도후서 5:8에서도 마찬가지의 고백을 하고 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이 본문을 보면, '차라리'라는 말을 하고 있다. 이 뜻은 죽는 것을 사는 것 보다 더 담대하게 원한다는 뜻 외에 달리 해석이 불가능하다.

사도는 성화가 귀찮고 싫어서 도중 포기하고 싶어서 이런 고백을 하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의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의는 율법 지킴에서 나온 의가 아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9) 그렇다면 사도의 모든 행함은 그가 새삼스럽게 성화되기 위한 행함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슨 행위인가?

빌립보서 2:13에 그 답변이 될만한 것이 나온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즉 인간의 잠재력과 여력에서 행함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게 하시는 바'에 의해서만 나오는 행위이다.

바로 이런 식으로 성도의 행위를 이해하는 자는 신앙이라는 것을 기적적 선물로 받은 자에게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들 성도는 한결같이 다음과 같은 고백도 마다하지 않는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찬양이며 겸손한 진정한 고백인가!

그런데 만약 이 고백을 만약 인도철학자들이 듣는다면 얼마나 심한 화를 낼까? 엄연한 인간의 행함을 놔두고 갑자기 하나님의 행함을 왜 삽입시키느냐 따지고 들 것이다. 그런데 그들 뿐만 아니라 또 화를 낼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소위 성화론을 부르짖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새삼스럽게 성도들은 자기네들 손으로 유사 경건 행위를 흉내내게해서라도 새삼스럽게 재교육 시켜야 비로서 성화가 되고 성화가 되고 그 성화 과정을 안거치면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고 굳게 다짐하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토를 단다. "하지만…"이라고 말이다. 이들은 아무런 행함도 없이 의인될 리가 결코 없다고 버티고 있다. 예수 믿는 것도 자기 행위에서 나온 작품이어야 한다고 우기고 있다.

비록 하나님의 은혜를 도입시켜서라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래야되느냐 하며는 만약 하나님의 은혜만을 강조해버리면 방탕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이들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 그저 하나님 쪽에서 약속의 내용만 던져놓으시고 그것을 지켜 행하는 것은 인간 속에 들어있는 능력 발휘에 따라 이루어지는 인간 솜씨의 몫이라는 것이다. 그래야 인간은 로봇이 안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바로 이 사고방식 자체가 모든 보편적 인류의 이방종교의 핵심되는 사상인 줄을 모른다. 그저 삼위일체가 동원하면 그것이 참된 기독교가 구성되는 것인 줄 곡해하고 있다. 이처럼 죄란 의(義)의 반대개념으로서만 나타나게 되어 있다.

참된 의,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능력을 훼손하고 방해하는 그 모든 것이 죄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만이 성도를 의인되게 하신다. 그 때부터 그 사람은 비로소 죄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한다. 바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아는 것이다.

죄인으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죄인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아는 의인이 된 것이다. 완벽하게 살기 때문에 의인이 아니라 무엇이 완벽한 의인지를 비로소 믿고 알게 되었기에 의인다운 것이다.

결 론

어떤 목사가 화를 낸다. 좋다. 화내는 것은 누구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화를 내었느냐가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 성취를 취소했기에 화를 내는가? 성령께서 도중에 인도하심을 포기하겠다는 것 때문에 화를 내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선언하기를 택한 자라도 구원 못시켜 주겠다고 해서 화를 내는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지 안하겠다고 발표해버려서 화를 내는가?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데 왜 화를 내고 있는가?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바라보라는 말 때문에 토라져서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이 과연 화날 거리가 되는 그 사람의 정체는 무엇인가?

인간의 옳고 그름은 둘 다 자기 행위로서 얼마든지 실현 가능한 범주 안에서 해석하려고 한다. 바로 이것이 근원적인 죄임을 왜 모르는가.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자신을 쫓으라고 하셨다. 또 인간은 무엇을 실현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는가?

그것은 자기 신세의 행복과 비극을 바라보면서 욕망은 그 대상을 정한다. 그런데 이것 또한 근원적인 죄이다. 왜냐하면 고통과 복의 구분은 오직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만 결정되는데 그리스도 자체를 사랑하는 그 사랑만이 복이고 그 외 나머지 자기를 사랑하는 모든 것이 곧 저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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