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환상과 실재

아빠와 함께 2026. 6. 25. 09:24

환상과 실재 

2026년 6월 24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8:7-9

(8:7) 엘리사가 다메섹에 갔을 때에 아람 왕 벤하닷이 병들었더니 혹이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 여기 이르렀나이다
(8:8) 왕이 하사엘에게 이르되 너는 손에 예물을 가지고 가서 하나님의 사람을 맞고 저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나의 이 병이 낫겠나 물으라
(8:9) 하사엘이 드디어 맞으러 갈새 다메섹 모든 아름다운 물품으로 예물을 삼아가지고 약대 사십에 싣고 나아가서 저의 앞에 서서 가로되 당신의 아들 아람 왕 벤하닷이 나를 당신에게 보내어 가로되 나의 이 병이 낫겠나이까 하더이다

이스라엘의 선지자께서 이방민족에 해당되는 아람 나라와 상관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을 때리려는 회초리로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이 회초리로 사용되는 이방민족 내의 사정을 통해서 언약이 없는 이방민족의 의식과 언약이 함께하는 민족이 가져야 될 의식의 차이성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더불어 일하시는 선지자가 이방민족을 만나게 되면 언약으로 인해 저주를 받아야 될 이유가 나옵니다. 즉 이방민족의 수준이 나타나는 겁니다. 이방민족인 아람왕 벤하닷이 병이 났습니다. 마침 엘리사가 다메섹을 방문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벤하닷은 자신의 병에 대한 결말이 궁금해서 믿을만한 충신인 하사엘을 선지자에게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이 하사엘에 대해서 이미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차기 아람나라 왕으로 내정되어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왕상 19:15) 하지만 여기서 벤하닷의 병의 위중 여부와는 무관한 정치적 예언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하사엘이 엘리사를 만나려 온 것은 결코 자신의 권력 이양 시기를 정함이 아니었습니다. 왕의 병 상태에 대해서 심부름 온 겁니다. 하사엘은 여전히 벤하닷 왕의 권력 하에 벤하닷 사람입입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알았습니다. 하사엘에게 역모 의지가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벤하닷과 하사엘을 묶어서 예언을 내뱉게 됩니다.

“왕은 반드시 병에서 낫습니다. 그러나 왕은 반드시 죽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 연결이 어색한 문장이 의미를 가질려면, 하사엘이 죽어가는 쇠약한 왕을 대신하여 때가 되면 왕위를 물러받는 것이 아니라 병에서 벗어나 멀쩡한 상태에서 역모 당해 왕위가 뺏게 됩니다. 즉 인간 세계의 수평적 세상에서 권력 이양에서는 얼마든지 상대를 죽이는 현상이 일어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선지자의 안목에서 보면, ‘병은 낫지만 죽는다’는 사실에 하사엘이 관여되어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겁니다. 선지자는 민망할 정도로 왕의 심부름 하러 온 하사엘을 쏘아봅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웁니다. 벤하닷이 엘리사를 찾았던 이유는 사람이 감히 고칠 수 없는 문둥병을 고친 하늘의 사람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벤하닷은 선지자의 위상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인간 세상의 수평적 상황에서 누가 권력을 갖든지 간에 이미 하나님께서 사전(事前)에 집어넣으신 내용으로만 살게 될 뿐입니다. 이것을 사후효과(事後效果)라고 합니다. 인간들이 나름대로 자기 만의 인생을 갖기 위해 그 어떤 노력을 한다할지라도 그 모든 내용은 이미 주님께서 집어넣으신 내용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인간들의 모든 움직임은 그야말로 환상을 살고 있는 겁니다. 자신의 병이 낫게 될런지 여부를 걱정하는 것은 여전히 자신들이 환상 속에 놓여 있음을 모르는 데서 오는 궁금증인 겁니다. 자기 병고침에만 신경 쓰는 선지자는 제대로 실재를 말씀하십니다. “너는 죽는다”고 말입니다.

즉 자신의 죽이려는 자에게 자신의 병 여부를 묻도록 심부름 보낸 겁니다. 이것이 인간 대 인간 사이의 오해입니다. 그리고 하사엘 차이 왕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왕을 쟁취하는 과정과 그리고 왕이 되고 난 뒤에 이스라엘 백성에서 얼마나 악한 일을 저지르게 될 지를 하사엘은 알지 못합니다.

이것을 먼저 알았던 선지자는 심부름하러 온 하사엘을 쏘아봅니다. 그리고 우십니다. 이것이 바로 실재 세계에서 보게 되는 환상의 세계의 한계입니다. 엘리사는 지금 스승인 엘리야의 작업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지금 하늘에 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왕하 2:11-12)

즉 스승인 엘리야는 이미 실재의 세계로 올라갔고 엘리사는 엘리야와 한 조를 이루어 지상의 환상 세계에서 엘리야가 수행했던 실재의 일, 곧 예언과 그 실현의 일에 종사하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아무리 자기 병에 관한 궁금하고 그리고 자기에게 언제 왕권이 이양될 지를 궁금해도 그것으로 실재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솔로몬 당시에 어떤 여인이 자기 아들을 돌려받겠다고 논쟁하며 솔로몬에 재판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의 내린 재판 결론은 ‘죽음’이었습니다. 즉 억울한 여인이 진짜 자기 아들을 돌려받는다고 해도 엘리야가 먼저 올라간 그 실재의 세계에 들어 설 수가 없습니다. “왕이 가로되 이는 말하기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저는 말하기를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는도다 하고 또 가로되 칼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칼을 왕의 앞으로 가져온지라 왕이 이르되 산 아들을 둘에 나눠 반은 이에게 주고 반은 저에게 주라”(왕상 3:23-25)

그렇다면 과연 이 지상에서 태어난 인간 치고 환상 속에 헤매면서 평생을 살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엘리야가 불수레 타고 올라간 그 실재 세계에 들어설 수 있을까요? 이 말은, 그 어떤 인간이 예수님과 한조가 되어 이 땅에서 주님께서 완성한 일들을 소개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셨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눅 19:41-42) 사도 바울도 자신의 동족을 걱정하면서, 차라리 자신이 지옥가는 일이 있더라도 이 세상의 실정을 알았으면 바라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1-
3)

그러면서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왜 육으로는 안 될까요? 왜 하늘에 이미 가 계신 예수님의 영이 임해야 할까요? 이것은 이미 이사야 54:1의 예언대로 이루어지기 위함입니다.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갈 4:27) 참으로 오늘날 누가 이미 예수님의 보조로서 살아가는 사람일까요? 다음과 같은 사람입니다. “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8)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 것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이 다 주님께서 집어넣으신 주님 자신의 일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1강-열왕기하 8장 7-9절(환상과 실재) 260624-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8장 7절에서 9절까지입니다.

열왕기하 8:7-9

“엘리사가 다메섹에 갔을 때에 아람 왕 벤하닷이 병들었더니 혹이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 여기 이르렀나이다 왕이 하사엘에게 이르되 너는 손에 예물을 가지고 가서 하나님의 사람을 맞고 저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나의 이 병이 낫겠나 물으라 하사엘이 드디어 맞으러 갈쌔 다메섹 모든 아름다운 물품으로 예물을 삼아가지고 약대 사십에 싣고 나아가서 저의 앞에 서서 가로되 당신의 아들 아람 왕 벤하닷이 나를 당신에게 보내어 가로되 나의 이 병이 낫겠나이까 하더이다.”

오늘 등장하는 두 사람 벤하닷과 그의 신하 하사엘, 이 두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다.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가 관여해야 할 하등의 이유와 책임이 없는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복의 근원이고 저주의 근원이기 때문에 관여하는데, 언약이 없는 이방인들, 하나님의 언약이 없고 하나님께서 배제한, 약속의 땅에 살지도 못할 그런 민족에게 굳이 선지자가 찾아가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로 하여금 이방 나라 다메섹에 가게 하시는가?

그것은 이미 엘리야 때도 마찬가지지요. 열왕기상 19장 15-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로 하여금 다메섹, 아람 나라, 지금의 시리아, 요즘 말로 하면 다마스커스, 아람 나라에 가서 “…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흘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그렇게 지시를 내렸습니다. 여기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라는 것은 이루어졌어요. 그 뒤에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기름 부음을 받고 선지자가 되었는데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이것은 아직 정식으로 왕이 되는 것은 아니고 앞으로 네가 왕이 된다는 징조를 약간 보여주고, 그리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라고 했는데 ‘예후’라는 인물은 열왕기하 9, 10장에 가야 설쳐대고 열심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열왕기하 9장 24절에 예후가 등장하게 되는데 엘리야가 하나님의 이런 지시를 받을 때 왜 이방 민족,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이방 민족까지 하나님께서 부추기느냐? 그것은 이스라엘이 명목으로는 여호와 믿는데 완전히 이방 민족, 주변에 있는 바알 종교에 흠뻑 젖어 들었어요. 왕부터 해서 온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여호와 대신 바알 종교를 섬겼던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살게 하시고, 율법을 줬기 때문에 회초리가 필요하지요. “오늘도 맴매해야겠다. 회초리 만들어야겠다.” 그 회초리가 아람 나라에요, 아람 나라. 그런데 아람 나라가 어떻게 회초리 역할을 할 수 있느냐?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아람 나라의 권력 승계, 권력 이양에 있어서 역모가 일어나도록 조치해요.

오늘 본문에 현재 왕이 있어요. 벤하닷이라는 왕이 있는데 그 왕이 자기가 신임하는 하사엘에게 이야기해요. “내가 병들었다. 하나님의 사람…” 전에 문둥병 걸렸던 나아만 장군이 있었잖아요. 열왕기하 5장에서 나아만이 저주의 병 나았을 때 소문이 확 돌았지요. ‘야, 이것은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면 안 된다. 우리 시대에 그런 기적을 행사하는 분이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럽다.’ 주변에 소문이 확 퍼졌습니다.

아람 나라는 지금 이스라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유다도 중요하지 않고 ‘사람이 못하는데, 사람이 고치지 못하는 병을 고치는 분이 계시다.’ 거기에 대해서는 국적을 막론하고 존재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저분은 보통 인간이 아니다.’ 그런데 드디어 벤하닷 자기에게 병이 온 거예요. 병이 나니까 왕이 신임하는 하사엘을 보내는 겁니다. 예물을 약대에 싣고 엘리사를 찾아가서 “내 병이 낫겠습니까, 안 났겠습니까?” ‘낫는다, 안 낫는다.’ 부채 도사 하듯이 그렇게 물어보러 갔어요.

갔을 때 엘리사가 답변을 묘하게 합니다. 10절에 나옵니다. “엘리사가 가로되 너는 가서 저에게 고하기를 왕이 정녕 나으리라 하라…” 왕이 낫는다. 이것은 벤하닷 당사자에게는 이야기를 못 했어요. 왜냐하면 자기 집에 병들어 누워있으니까 직접은 못 들어요. “…그러나 여호와께서 저가 정녕 죽으리라고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

문장이 이게 성립되는 거예요? 몸이 아파서 한의원에 침 맞으러 가서는 “선생님, 침 맞고 낫겠습니까?” “정녕 낫는다.” “감사합니다.” “정녕 죽는다.” 그러면 그 한의사에게서 나온 ‘정녕 낫는다’도 맞는 말이고 ‘정녕 죽는다’는 그 말도 맞아요. 누구한테?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말씀도 없고, 하나님의 언약도 없고, 자기 병이나 걱정하는 인간들에게 병은 나을 수 있어요. 그러나 지옥 가는 것은 철회 못 합니다. 지옥 가는 그것은 철회 못 해요.

네가 말하는 수준 “내 병이 낫겠습니까, 안 낫겠습니까?” 그 ‘병 낫는다, 안 낫는다’의 그 정도 레벨에 맞춰서 답변해 줄게. “네 병 낫는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잠깐, 잠깐, 기다려. 네 주인 죽는다.” 이 ‘죽는다’라는 레벨, 애초부터 벤하닷이 “선지자님, 내가 죽겠습니까, 안 죽겠습니까?” 그런 질문을 한 것이 아니고, “병이 낫겠습니까, 안 낫겠습니까?” 그런 질문을 했다고요. 육적인 질문이지요.

그런데 ‘죽는다’는 말은요, 엘리사 입에서 영적인, 이스라엘의 언약적 관점에서 “너는 필히 죽는다”라는 이야기를 한 겁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늙으면 죽겠지.’ 지금 우리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돼요. 왜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느냐 하면, 그 뒤에 엘리사의 행동 때문에 그렇습니다. 11절에 “하나님의 사람이 저가 부끄러워하기까지 쏘아보다가 우니.”

‘쏘아보다가 우니.’ 주인이 아프다고 보약 지으러 와서 “낫겠습니까, 안 낫겠습니까?” 했는데 “보약 먹고 낫는다. 그러나 죽는다.” 그렇게 하게 되면 듣는 사람이 주인한테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헷갈리게 되는 거예요. “주인님, 낫는답니다. 그런데 주인님, 죽는답니다.” 이것은 지가 맞아 죽을 지경이겠지요. “똑바로 말해. 낫는 거야, 죽는 거야?” “둘 다 이야기합디다.”

이게 무슨 함축된, 농축된 이야기입니까? 그러니 육의 사람은 영의 말을, 언약적인 말을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한의사가 주인의 심부름을 온 그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거예요. 빤히 쳐다보니까 하사엘이 쳐다보는 대로 그냥 있지요. ‘왜 쳐다보지?’ 빤히 쳐다보는데, 심하게 민망할 정도로 부끄러워할 정도까지 쏘아보다가 갑자기 엘리사가 울어요.

엘리사가 우니까 심부름을 온 하사엘은 지금 엘리사하고 대화 중에 있잖아요. 상대방이 무슨 행위를 할 때는 그 취지를 빨리 체크해야 하거든요. 알아채야 된다고요. 그런데 빤히 쏘아보는 이유도 모르겠고, 그리고 말씀도 안 하시고 혼자서 울잖아요. 혼자서 우니까 하사엘은 도대체 엘리사가 무엇 때문에 우는지를 몰라요.

자,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하사엘이 “우리 주인의 병이 낫겠습니까, 안 낫겠습니다.” 요거, ‘병 낫는다, 안 낫는다.’ 엘리사는 세 가지의 난해한 답변을 줬어요. ‘너 낫는다, 죽는다…’ 그러니까 낫는다, 한가지. 죽는다, 두 가지. 빤히 쏘아보다가 운다, 세 가지, 이 세 가지를 조합해 보세요. 이 세 가지를 조합해 보라고요, 의미가 통하도록. 그 현장에 우리가 있다면, 이런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데 거기에 우리가 관객으로 앉아 있다면 도대체 이 감독이, 연출가가 무슨 뜻으로 했는지?

이렇게 해놓고 이야기 끝. 영화는 끝났어요. 자, 이걸 일단은 풀어야 해요. 오늘 말씀에 나왔으니 이걸 풀어야 하는데 일단 뭐냐 하면, 아람 나라는 못 풀어요. 풀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12절에 보니 풀 수 있는 낌새를 주십니다. “하사엘이 가로되 내 주여 어찌하여 우시나이까.” 하사엘과 단독으로, 주인 벤하닷은 병들었으니까 치우고 하사엘과 엘리사가 단독으로 대화합니다. “…대답하되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할 모든 악을 내가 앎이라 네가 저희 성에 불을 놓으며 장정을 칼로 죽이며 어린 아이를 메어치며 아이 밴 부녀를 가르리라.”

그러니까 하사엘이 ‘아, 이게 지금 주인 벤하닷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주인의 심부름을 온 나하고 뭔가 관련되어서 쏘아보고, 울고 하시는구나.’ 하사엘이 일단은 장막을 쳐요. 겸손한 척을 한다는 말이지요. 13절에 “하사엘이 가로되 당신의 개 같은 종이 무엇이관대 이런 큰 일을 행하오리이까 엘리사가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네가 아람 왕이 될 것을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

왕이 심부름 보냈고 심부름을 온 그 하사엘이 엘리사를 만났는데, ‘우리 주인 병이 낫겠습니까, 안 낫겠습니까?’ 그것 들으러 갔는데 엘리사의 대화의 관심사가 ‘네가 차기 왕’이라고 이야기했어요. “네가 차기 왕이야. 축하한다. 앞으로 북이스라엘과 잘 지내, 응? 벤하닷 왕은 죽을 거야. 너하고 잘해보자.” 이렇게 반갑게 악수하면서 해야 할 텐데 그렇게 되면 뭐가 틀어지느냐 하면, 딱 쏘아보면서 우는 이유와 충돌을 일으켜요.

이것은 뭐냐 하면, 엘리사가 하사엘, 이 심부름을 온 사람이 호시탐탐 주인 벤하닷을 살해하려는 역모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거예요. 그리고 역모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왕 자리는 아직 물려주지도 않았는데 왕이 아프거나 말거나 지금 살아 있는데 강제로 자기의 욕망 때문에 왕을 죽이고 왕이 되고, 그다음에 왕이 된 입장에서 북이스라엘을 향하여 모든 악한 짓을 하는 그것까지 이미 엘리사가 꿰뚫고 있었던 겁니다.

15절에, “그 이튿날에 하사엘이 이불을 물에 적시어 왕의 얼굴에 덮으매 왕이 죽은지라 저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여기서 여러분이 일단 어려운 것 하나 거치고 넘어갑시다. ‘사후 효과(事後效果)’라는 게 있어요. 事後, 일이 마쳐지고 난 뒤에 비로소 등장하는 효과, 그게 ‘사후 효과’에요. 그런데 그 ‘사후 효과’를 일이 터지기도 전에 미리 엘리사가 알았던 겁니다. 하사엘이라는 이 사람이 자기 주인을 강제로 죽이고, 그것도 이불을 물에 적셔서 살해하고 역모를 꾸며서 권력을 쟁취하고, 선왕을 그렇게 죽이면서까지 왕이 된 자가 할 그 일까지 엘리사가 하나님에 의해서 미리 알고 있었던 거예요.

따라서 엘리사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마음이 있느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일을 벌이시고 나중에 나타난 결과, 사후 효과가 벤하닷, 하사엘, 오늘날 우리까지 다 할당되는 거예요, 할당되는 것. 국화빵 구울 때 보세요. 뱅뱅 도는 기계틀에 각각 밀가루 넣고 그다음에 앙꼬를 각각 할당하지요. “너는 이렇게 살아. 너는 인생 이렇게 되어야 해.”

그 할당이 뭐냐? 주께서 일으킨 일의 결과에요. ‘사후 효과’에요, 사후 효과. 이것을 엘리사 선지자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좀 어렵게 말해서 하사엘, 벤하닷, 그리고 보통 인간들, 우상 섬기는 보통 인간들, 이 인간들은요, 자기는 현실, 실재,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전부 다 현실도 실재도 아니고, 환상이에요.

인간은 항상 환상 속을 통과하면서 그게 환상인 줄 몰라요. 이것은 내 힘으로 실제로 했다는 거예요. ‘내가 이불 들고 벤하닷에게 가서 그냥 안 죽을까 싶어 물에 적셔서 죽였다.’ 이불 물에 적실 때 누가 했어요. 자기가 했겠지요. 이것은 본인이 행동했기 때문에 이걸 두고 누가 환상이라 합니까? 누가 이걸 꿈이라 하겠습니까, 실제로 행동했는데.

그런데 주님의 ‘사후 효과’에서 보면 이것은 자기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주께서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이야기에요. 정리해 봅시다. 벤하닷이 병에 걸렸어요. 그래서 엘리사에게 ‘이 병이 낫겠나, 안 낫겠나?’ 그걸 왜 묻습니까? 지금 내가 병 걸렸다는 것, 내가 생각도 못 한 이 병은 자기가 예상 못 한 환상이에요.

이 환상에 대한 처리는 나아만 장군의 저주스런 문둥병을 낫게 했던 환상전담반 선지자가 담당할 몫이라 해서 ‘자기 병이 낫겠나, 안 낫겠나’를 물으러 엘리사에게 갔잖아요. 그런데 심부름하러 간 하사엘 그 사람은 문둥병이나 어떤 병도 안 걸렸지만, 그 사람이 하는 행동도 여호와에 의한 ‘사후 효과’ 속에 똑같이 들어 있어요.

문둥병이나, 병 걸린 자나 병 안 걸린 자나 자기의 미래와 운명은 자기 손에 달려 있지 않은 겁니다. 그걸 엘리사가 알고 딱 쳐다봅니다. ‘나는 네 미래를 안다.’ 그런데 딱 쳐다보면서 왜 우느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인간세계에서 수평적으로 권력을 이양한다든지 이동할 때 인간적인 생각, 언약이 없고 하나님의 약속이 없고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인간들은 이 죽음이라는 폭력을 경유해서 권력을 이양하는 경향이 있다는 거예요.

전에 엘리야가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네가 왕이 된다.’ 왕이 된다는 것은 하사엘이 엘리야를 통해서 알았는데 하사엘이 성질이 급한 거예요. ‘권력 이양 언제 해주는데? 아이고, 답답해, 답답해. 어차피 권력 이양할 거 차라리 내가 이불에 물 적셔서 내 힘으로 치루자.’ 그런데 하사엘의 그 자기가 한 행동이 환상인 줄 모르는 거예요.

그것은 누구의 계획 안에 이미 포함이 되어 있었어요. 인간들의 수평적인 권력 이동에 있어서는. 자, 여기서 문제를 너무 어렵게 하지 않고 지금부터 쉽게 가겠습니다. 선지자가 죽음에 관해서 하나님에게 예언을 듣는 것은, 인간들의 삶이 환상이기 때문이에요. 꿈같은 거예요. 꿈같은 데 실제로 꿈이 아닌 경우는 인간이 죽는다는 그 죽음입니다.

인간이 죽는 것은 본인이 알아서 죽는 경우가 별로 없거든요. 인간은 살고 싶어 해요. 환상 속의 인간은 환상이든 뭐든 간에 계속 살고 싶어요. 그런데 원치 않는 죽음이 왔을 때 이 죽음은 그동안 현실에서 착실하게 살았던 ‘나’라 할지라도 내 죽음에 대해서는 No touch, 내가 어떻게 처리가 안 된다는 거예요. 처리가 안 되는 것이 나를 기다린다는 것은, 그동안 내가 꾸역꾸역 살았던 모든 것은 애들 장난 같은 것, 소꿉놀이 같은 거예요. 환상에 불과한 거예요.

이러한 일을 미리 아는 엘리사가 왜 이렇게 이방 민족에게 찾아와서 이야기를 하느냐? 엘리사가 엘리야와 한 조를 이뤘어요. 그런데 엘리야는 뭐냐? 엘리야가 이 땅에 살 때 남들 보기에는 선지자 노릇했잖아요. 그러나 엘리야는 환상이었어요. 환상적인 작업을 한 겁니다. 그러면 엘리야의 환상 말고 진짜는 어디 있느냐?

열왕기하 2장에서 엘리야가 불 수레 타고 하늘로 올라가요. 2장 11절에 여러분이 잘 아시지요?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 수레와 불 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두 사람인데 왜 한 사람만 데려가느냐? 한 조를 이뤘으니까 수평적으로 사명이 인수되는 것이 아니고 한 사람이 수직적으로 하늘로, -진짜 현실, 진짜 엄연히 계시는 실재 세계는 하늘나라에요- 그 하늘나라에 엘리야가 올라가요.

엘리야가 올라가고 엘리사는 한 조를 이뤄서 엘리야가 하는 일의 보조지요, 보조. 엘리야가 하는 일이 연속성으로서 보조로 엘리사가 이 땅에 있다니까요. 엘리사는 보조기 때문에 아직 땅을 떠나면 안 돼요. 원래 일은 하늘에 올라가 버리고. 그래서 이미 열왕기상 19장에서 엘리야가 하사엘에 대해서 언급을 한 것처럼 그 남은 작업을 지금 땅에서 엘리사가 보조자로서 한 조를 이뤄서 계속하고 있는 겁니다.

엘리야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어요. 시체가 없어요. 시체도 없이 올라간 엘리야가 하나님의 언약 작업이잖아요. 실재, 망상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고 실제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그 일, 그 일이 지상에서 작업할 때는 무엇을 반드시 거쳐야 되느냐 하면, 죽음이라는 것을 남기면서 일이 진행이 돼요, 죽음이라는 것.

왜? 죽음만이 환상이 아니니까. 언젠가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인간이 죽게 되면 그동안 내가 애쓰고 열심히 살았던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다 사라진다고요. 사라지고 남는 것은 뭐냐? ‘어, 내가 죽네? 내가 곧 죽네. 내가 죽어가고 있네.’ 이것만 남지, 내가 뭘 얼마나 잘하고, 내가 애를 얼마나 잘 키우고, 돈을 얼마나 벌고…, 이런 것은 다 날아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언약이 지상에 실현될 때는 두 종류의 죽음이 있어요. 하나는 언약이 없는 인간들의 죽음과 언약이 계시는 예수님의 죽음, 이 두 종류밖에 없어요. 두 종류 가운데 예수님의 죽음은 빈 무덤이어서 사흘 만에 영생으로 들어가는 문으로서의 죽음이고, 나머지 인간의 죽음은 그냥 시마이죠 뭐. 소용없어요. 산 것도 환상이고 인간이 죽는 그것도 주님의 죽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금 하사엘은 선왕 죽이고 ‘나도 왕이다’ 하고 까불락대고 있지만 그것 전부 다 꿈같은 거예요. 권력 이양해도 아무 소용 없어요. 엘리야 보세요. 엘리야는 불 수레 타고 올라갔잖아요. 하늘나라 갔잖아요. 우리는 지금 뭐 하고 있어요? 우리는 월드컵 축구나 바라보고 있을 거예요. 그것도 돈 안 내면 8강부터는 못 본다는데….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문제는 딱 나오지요. 세상에서는 인간 대 인간밖에 없는데 우리에게 하늘에서 불 수레 내려올 것도 아니고, ‘어떻게 환상 속에서 벗어나서 죽기 전에 실재 세계로, 육에서 영의 세계로 올라갈 수 있습니까?’ 그 문제만 남아 있는 거예요.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은…, 엘리야가 타고 올라갔던 그 수레가 무슨 수레냐 하면, 언약이에요, 언약,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언약이라는 것이 엘리야를 그동안 꽉 잡고 왔다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언약에 의해서 잡힌 사람이 있을 거예요. 언약에 의해서 잡히려면 그 언약이 어떤 효과가 있어야 하느냐? 죽더라도 사흘 만에 살아나는 그 부활의 영으로 작용하는 언약에 붙잡힌 사람, 이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에요. 들어보니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많이 봤지요. 많이 들었잖아요.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왜 신약 로마서 8장에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까? 신약 로마서 8장에서 그 이야기하기 전에 구약 엘리야 엘리사 그 시대를 지금 우리가 보고 있어요. 엘리야 엘리사 시대에 그들은 어떻게 엘리야가 갔던 그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불 말과, 불 수레를 받는 혜택을 누려서, ‘내가 사는 것이 환상이구나. 실재는 하늘나라 가는 사람이 진짜다. 그게 생명이지 이 땅에는 죽음밖에 없어’라고 알고 벗어나는 방법이 뭐냐?

그것을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느 병원에서 산모가 동시에 애를 3명 낳았어요. 세 명 낳았는데 나이가 이제 7살쯤 됐어요. 7살 됐는데 우연한 기회에 뭔가 아이가 바뀌었다는 거, 같은 산부인과에서 동시에 태어났는데 간호사의 부주의에 의해서 그 3명 중에서 2명의 아이가 바뀌었어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 DNA로 조사를 해보니까 3명의 아이 가운데 현재 한 아이가 아버지하고 동일한 유전자의 진짜 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제 나머지는 2명이죠. 2명의 아이를 조사해 보니까 과연 바뀌었어요. 간호사의 실수로, 병원의 실수로 바뀌었어요. 그러면 우리 생각은, 우리 이 환상 속에 있는 인간의 입장은 어떻게 나옵니까? ‘바뀌었으니까, 아이도 이제 나이 7살밖에 안 됐으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애 바뀐 거 원위치시키고 거기에 대한 모든 심리적 피해 보상 같은 것을 병원에 청구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하겠죠.

그러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묻습니다. “자, 자기 애를 도로 찾았다. 그리고 내가 키운 애는 저 집 애다. 그래서 돌려줬다. 그러면 이렇게 돌려준 아이의 부모와 아이는 불 수레 타고 하늘로 갑니까?” 이 질문 자체가 좀 엉뚱해 보이죠. “목사님, 그 문제하고 어떻게 연관시킵니까? 그 문제하고 연관시키면 안 되죠.” 이거잖아요? 그렇게 보통 생각하겠죠. 지금 그래서 엘리사가 ‘낫는다, 죽는다, 그리고 쏘아보면서 운다.’ 이게 이 지상의 육적인 인간들이, 환상 속 인간들이 도저히 연결이 안 되는 답변을 성경에 언약적 흔적으로서 제시한 거예요. 그 둘이 자리가 바뀐다고 해서 우리가 하늘나라 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이 다윗 언약에 속한 솔로몬 시대에 열왕기상 3장 21-25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앞에는 생략하고요, 두 여자가 거의 동시에 애를 낳았는데, 잠을 자다가 한 여자가 뒹굴어서 밤에 자기 애를 죽였어요. 죽이고 난 뒤에 보니까 자기 아이가 죽었거든요. 후딱 자기 죽은 애를 저 옆에 있는 자기 동료한테 넘기고 그 동료의 아기는 자기 옆에 딱 데려다 놓은 채 모른 척하고 아침에 눈을 떴어요.

깨보니까 엄마가 자기 애 모르겠어요? 대번 알지요. DNA까지 동원 안 해도. 그래서 “이것은 내 애다!” “아니다, 내 애다!” 이렇게 저희끼리 하니까 해결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억울한 엄마가 솔로몬에게 재판을 청구해서 소송을 걸어가지고 재판하는 장면입니다. 그 재판 장면을 22절부터 한번 보겠습니다.

“다른 계집은 이르되 아니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이 계집은 이르되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며 왕 앞에서 그와 같이 쟁론하는지라 왕이 가로되 이는 말하기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저는 말하기를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는도다 하고 또 가로되 칼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칼을 왕의 앞으로 가져온지라 왕이 이르되 산 아들을 둘에 나눠 반은 이에게 주고 반은 저에게 주라”(왕상 3:22-25).

‘엄마가 아기 낳았다.’ 이게 환상입니까? 실제죠. 근데 ‘애가 어젯밤에 죽었다.’ 실제지요. 죽었는데 ‘내 애를 도로 찾겠다.’ 실제지요. 근데 ‘안 주겠다.’ 안 주겠다고 우기죠. 실제로 일어난 일이죠. 그 실제를 가지고 내 애를 찾기 위해서, ‘실재’로 찾기 위해서 왕에게 갔죠. 그런데 왕이, 솔로몬왕이 준비한 것은 칼이었습니다.

애를 둘로 쪼개라, 쪼개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애를 쪼갠다고 해서 두 여자가 불 수레 타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요. 신약에, 바로 갈라디아서 4장 27절에 결정적인 해답이 나옵니다.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엘리사가 하사엘을 쏘아보잖아요. 쏘아본다는 것…, 쏘아보고, 쏘아보고 그다음에 울었어요. 이것은 권력욕에 도취 돼 있는 그 하사엘이 선왕 죽일 때 어떻게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고 난 뒤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악한 짓을 할 것을, 한꺼번에 손바닥 보듯이 쫙 아니까 우시는 거예요.

누가복음 19장 41-42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와서,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예수님께서 엘리사로 오시고, 예수님께서 그 예루살렘 성을 보는데 쏘아보는 거예요. 민망할 정도로 쏘아보다가 우시는 겁니다. “이 환상과 환상밖에 모르는 인간들아, 그 환상이 깨어지는 멸망의 날을 네가 알아?” 이런 식으로 우시는 거예요.

로마서 9장 1-3절에서 사도바울도 비슷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 아니하는데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 ‘내 혈육 친척들이 예수를 안 믿어 지옥 가는 걸 보고 내가 가슴 아프다. 그들이 차후에 천국 갈 수 있다면 내가 대신 지옥 가겠다.’ 그 이야기예요. ‘내가 저주받아서 지옥 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 인간들이 이 지옥 속에서 태어나서 지옥 속으로 살다가 결국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좀 알았으면 좋겠다’라는 고통을 로마서 9장 1-3절에서 표현하고 있어요.

이게 바로 성령, 이미 하늘에 가신 예수님의 영, 하늘에 가신 그 예수님의 보조적인 역할, 엘리야의 보조적인 역할을 엘리사가 하듯이 엘리야가 예언한 것을 엘리사가 실천에 옮기듯이,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하신 그 진짜 상황 진짜 현실을, 이 땅에서 성령 받은 성도가 가슴 아파하면서 세상을 두루두루 쏴보면서 함께 우는 마음이 되는 거예요. “아이고, 이 인간들아, 너희들은 지옥 가는 거야!”라는 마음의 심령, 이런 자가 환상도 알고 진짜 현실도 아는 성도인 겁니다.

경기도 고양시에 어떤 80대 부부가 있는데 80대 부부에게 한 날, 동사무소에서 지구대에서 전화가 왔어요. “여기는 검찰청인데 지금 할아버지 계좌가 범죄에 연루돼서 범인들이 그 돈을 빼가기 때문에 계좌를 한 곳에 모아놓아야 합니다. 제가 사이트 다 보여줄 테니까 확고한, 진짜 보이스피싱이 아닌 진짜배기 검찰청 사이트에 당신 이름이 이렇게 있으니까 우리를 믿고 이 계좌로 옮기시면 돈은 안전합니다.”

그 돈이 얼마냐 하면, 15억이에요. 15억의 재산을 그 계좌로 옮기라 했습니다. 그래서 그 80대 할아버지가 “아이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아이고, 내 돈 15억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서 은행 계좌에 옮길 순간, 경찰에서 알고 은행에다가 그 계좌를 못 만들도록 전화로 연락해서 15억 원을 지켰어요.

지금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의 계좌가 이미 마귀 계좌에 다 기록돼 있습니다. 평생동안 열심히 살았던 그 계좌가 악마의 계좌였어요, 악마의 계좌. 지옥 갈 계좌에 사람들은 매여 삽니다. 따라서 인간 치고 자기 삶 고생하면서 몸이 아플 때, 아픈 이것을 환상이라고 여길 위인은 아무도 없어요. ‘죽어서 좋은 데 가겠지.’ 이런 식이에요. 왜? 죽음을 거치지 않았으니까, 죽음을 거치지 않으니까 ‘살아있는 게 환상’이라는 것은 까마득히 모르는 거예요.

아까 제가 갈라디아서 4장 27절을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방법은 이것밖에 없어요. ‘잉태치 않은 자’를 발생시켜요. 잉태치 않은 자, 잉태치 못한 자, 잉태치 못한 자가 잉태치 못했으니까 아예 태어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 우리네 상식이죠. 그런데 육에서 잉태치 못하는데, 주의 영에 의해서 이미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영에 의해서 새롭게 잉태된 자, 이미 하늘나라 영, 생명이 거기에 가 있는 그런 사람으로 변모되어서, 그자들이 이 땅에서 남은 육체를 가지고, ‘이 땅이 환상이며 모든 인간은 악마의 계좌에 이미 돈 다 날리고 있다, 속고 있다’라는 것을 외치는 증인으로 주께서 그렇게 삼으신 거예요.

끝으로, 그렇다면 ‘내가 과연 성령 받아서 이미 생명에 소속돼 있는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 그걸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구분하는 것은 여러 가지 있지만 제가 로마서 14장 8절을 가지고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로마서 14장 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다음 구절입니다. 그다음에 뭐로 돼 있지요?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영에 속한 사람의 특징은, 현재 내게 속했다고 하는 모든 것이 바로 내 것이 아니라는 의식이 발생됩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 내가 어릴 때부터 있었던 모든 이것은 ‘사후 효과’에 의해서 주께서 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미리 깔아놓은 밑밥들이에요, 밑밥들. 오늘날의 엘리사, 오늘날의 사도바울, 성령 받았으니까요.

그래서 우리의 생명, 골로새서 3장에서 우리의 생명은 엘리야처럼 이미 하늘에 가 있어요. 그리고 하늘에 가 있기 때문에 육은 남아 있잖아요. 그러니까 육은 남아 있는 이유가 뭐냐? 한 조를 이루는 거예요. 언약 때문에 엘리야하고 엘리사가 위에는 엘리야, 아래쪽은 엘리사가 한 조를 이루듯이, 사나 죽으나, 죽어도 주를 위해서 살아도 주를 위해서 주님과 우리가 한 조가 되어서 이 땅에 주님의 증인으로 살면서, 의식은 어떤 의식이냐?

어떤 것도 내 것이라고 여겼던 그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니까, 이미 우리의 모든 계좌는 주님의 소속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쏘아볼 그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너무 울지는 마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엘리야가 사람으로서는 더 있을 수 없는, 불 수레 타고 올라간 이것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와 상관없는 일로 여기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던 것도 이게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계획인 것을, 우리의 남은 운명인 것을 받아들이면서 이 땅에서 주의 증인으로 착실하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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