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과 질문
2026년 7월 1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8:20-24
(8:20) 여호람 때에 에돔이 배반하여 유다의 수하에서 벗어나 자기 위에 왕을 세운고로
(8:21) 여호람이 모든 병거를 거느리고 사일로 갔더니 밤에 일어나 자기를 에워싼 에돔 사람과 그 병거의 장관들을 치니 이에 백성이 도망하여 각각 그 장막으로 돌아갔더라
(8:22) 이와 같이 에돔이 배반하여 유다의 수하에서 벗어났더니 오늘날까지 그러하였으며 그 때에 립나도 배반하였더라
(8:23) 여호람의 남은 사적과 그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8:24) 여호람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열조들과 함께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하시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사람들은 답답하거나 아쉬운 것이 있을 때, 주위에 답을 구합니다. 진실, 진리를 원합니다. 최종 해답을 얻고, 알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런 요청은 자신의 현실을 좋게 유지하겠다는 의욕에서 비롯된 겁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을 진실인 줄 알고 있습니다. 이 진실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진실을 덧보태기를 원합니다.
바로 이런 상황으로 인해서 인간은 서로 말을 주고 받고 의견을 나눕니다. 자기 현실에 충실하고 현실에 열중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호람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앉아 있는 자리는 다윗이 앉았던 왕의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기대합니다. 전에 다윗에게 하나님이 주신 그 복이 자신들에게 계속 주어지기를 원합니다.
사무엘하 8:14에 보면,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되 온 에돔에 수비대를 두니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람 보기에 늘 그동안 유다에게 속해서 조공을 바쳤던 에돔이 독립해 나갔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앉은 다윗 왕위에 자리의 권위에 손상이 간다고 여기게 된 겁니다.
그래서 에돔을 손봐 줄려고 했지만 실제로는 도로 에돔 나라에 포위당해서 창피스러운 지경이 된 겁니다. 겨우 그 포위망에서 벗어났지만 기대했던 에돔의 지배는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현실적으로 유다나라는 전에 다윗이 누렸던 그 영광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초라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등불’은 유지됩니다.
“여호와께서 그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저와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하셨음이더라”(왕하 8:19) 이 ‘다윗의 등불’은 하나님께서 어떤 취지에서 주신 걸까요? 사무엘하 7:15-16에 보면,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현실이란 실은 ‘다윗의 등불’이라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나는 질문에 대한 해답 차원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언약에서 나온 결과 속에 자신들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자기를 위한 현실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등불’이라는 언약의 완성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죽으심으로 나타납니다.
즉 예수님은 이 세상이라는 현실에서 분리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공격을 받은 사실에 대해서 끝장을 보시는 겁니다. 즉 언약에 합치되는 것이 아닌 것은 모조리 저주를 내리시는 일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에게 예수님의 고통 중심으로 세상을 보시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행복과 불편한 것을 제거하는데 집중하면서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언약은 주님의 고통을 아는 사람들로 바꾸어서는 영원히 예수님 나라에 살게 하는 것으로 마감됩니다. 이 바꾸치기는 인간 개인에게 맡길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오로지 자기 행복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음의 성경 말씀의 취지를 전혀 모를 때에 나온 태도입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암 3:2) 하나님께서 사전에 친히 선택해 놓으신 자에게는 죽여서라도 바꾸치기를 하십니다. 마치 장례식에서 시체와 시체끼리 바꿔치기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 신약에 와서 이러한 바꾸치기의 원칙은 구약 다윗에게서 미리 발생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는 왕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미친광이기 되어야 했던 겁니다. 언약의 지속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고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다윗이 이 말을 그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 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아기스가 그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삼상 21:10-14) 이런 태도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요? 시편 34:5에서는 도리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시편 34편 제목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 ” 그리고 4-5절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원래 이스라엘의 적은 외부에 포진된 이방민족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언약을 버렸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니라”(신 8:19-20)
전에서 하나님께서 이방민족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에게 붙여서 자멸토록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 이후에는 이스라엘 자체가 언약을 지키는 자들을 공격하는 이방민족이 된 겁니다. 언약에서 출발한 현실인 것을 모르고 자기를 지키는 언약이라고 여기고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셔서 ‘다윗의 등불’이 꺼지지 않는 제대로 된 이스라엘이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선지자의 안목에서 볼 때, 언약의 세계란 사람들이 현실이라는 것에서 분리되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현실 자체가 모두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왕상 22:22)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을 통해서 이 세상과 분리된 생각을 가지고 살려내신 주님을 위해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22강-열왕기하 8장 20-24절(답과 질문) 260701-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8장 20절에서 24절까지입니다.
열왕기하 8:20-24
“여호람 때에 에돔이 배반하여 유다의 수하에서 벗어나 자기 위에 왕을 세운 고로 여호람이 모든 병거를 거느리고 사일로 갔더니 밤에 일어나 자기를 에워싼 에돔 사람과 그 병거의 장관들을 치니 이에 백성이 도망하여 각각 그 장막으로 돌아갔더라 이와 같이 에돔이 배반하여 유다의 수하에서 벗어났더니 오늘날까지 그러하였으며 그 때에 립나도 배반하였더라 여호람의 남은 사적과 그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여호람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열조들과 함께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하시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그러자 여호람은 병거대를 출동시켜 사일로 건너갔다. 왕과 병거대장들은 밤에 출동하였다가 도리어 에돔 군에게 포위되어 참패를 당하였다. 그래서 그의 군대는 도망쳐 각각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다윗 왕의 자리, 그 자리는 세상 왕의 자리하고 다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유지되고 그리고 지켜지는 자리, 그 자리가 유다 왕 다윗의 자리입니다. 다윗의 자리가 그만큼 중요한 이유는, 인간들이 ‘갈아치우기’ 하듯이 누가 그 자리에 앉고 또 그 자리에 누가 앉고…, 하지만 그 자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한 자리인 동시에 이 세상의 끝을 보여주는 자리입니다.
본문 열왕기하 8장 19절에, “여호와께서 그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저와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하셨음이더라.” 다윗의 자리가 끝장을 보는, 끝을 보는 등불 기능을 늘 하게끔 하나님께서 다윗의 자손, 후손들에게 일을 맡긴 거예요. ‘다윗의 등불’이 등장하니까 따뜻한 촛불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렇게 생각하시면 참 편합니다.
‘다윗의 등불은 이 세상을 끝장내는 등불이다. 다윗의 등불은 다윗의 약속하신 자손 빼놓고 다 엎어버리는, 다 멸망시키는 그러한 약속이 이어지고 있는 등불이다.’ 그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여러분,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말하잖아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말할 때 무슨 말 하지요? 우리는 사람하고 이야기할 때 ‘둘이 만나서 수다 떨었다.’ 보통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카페에서 팥빙수 하나 놓고 또는 커피 시켜놓고 한 시간 동안 이야기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하지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제가 알아맞춰 보겠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현실 이야기를 해요. 인간이 말을 한다는 것은 자기가 기억하고 있고, 자기가 익히 경험하고 있고 알고 있는 것을 이야기 해요. 그게 현실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현실이 작살나는 이야기를 할까요? 현실을 작살내는 이야기를 카페에서 팥빙수와 빵을 앞에 놓고 그렇게 안 하지요. “친구야, 오늘 저녁에 세상이 끝장난대.” “아, 즐겁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안 하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다윗의 등불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속 이 유다 나라에 하나님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계속 말을 하는 겁니다.
인간 대 인간의 말은 현실 이야기예요. 그런데 그 현실 이야기는 다윗의 등불, 다윗에게 약속한 그 약속에 대한 답변이 현실이기 때문에 다윗의 등불, 그 약속이 품고 있는 그때가 되면 인간 대 인간으로 인간끼리 이야기했던 그 모든 잡스런 이야기는 전부 다 멸망으로 끝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기억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의 다윗의 등불, 하나님의 약속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기억에서 나와요.
여기서 하나님의 기억과 인간의 기억의 차이가 나는 겁니다. 하나님의 기억은 뭐냐? 그것을 약속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윗에게 준 기억을 가지고 ‘다윗 약속’, 또는 ‘다윗 언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윗 약속, 다윗 언약은 질문이 진실돼요. 진실 된 질문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어요. 질문은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이 질문을 던지고, 인간 세계는 그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의 기억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답변형식으로 진행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 속에 있는 인간들 가운데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 던진 그 질문에 자기는 그저 답변’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께 질문을 못 해요. 자기들끼리 질문하고 답변해요. 예를 들면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 다음 감독은 누가 되겠는가?” 이 말을 한다는 것, ‘홍명보 감독 나가고 차기 국가대표팀 감독이 누가 되겠느냐?’ 하는 것은 각자 갖고 있는 기억에서 나오는데 그 기억은요, 다윗 언약에 의하면 작살나야 될 말들이에요.
없어져야 될, 끝장을 봐야 될 말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들은 끝을 모릅니다. 끝을 몰라요. 끝은 누가 알고 있느냐? 하나님의 기억, 하나님의 언약이 끝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끝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다윗의 나라 외에는 다 작살난다. 다 멸망 당한다.’ 이게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에게 준 그 하나님의 기억, 하나님의 약속과 일관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다윗의 후손들이 유다 나라의 왕 자리에 앉았고, 그다음 사람이 앉았고, 또 그다음 사람이 앉았는데 이 다윗의 자리에 앉았던 왕들이 차례차례로 자기에게 주어진 질문과 현실을 잇지를 못하고 그냥 은퇴하고, 은퇴하고, 은퇴하고, 은퇴하고,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고, 그런 식으로 교체가 되는 모습을 우리는 열왕기상과 열왕기하를 통해서 보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그들은 뭐가 뭔지를 몰라요. 진실은 모르고 현실만 쥐고 있습니다. 진실은 이 세상의 끝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현실은 현실을 붙잡고 있어요. 현실에 집중하고 현실 속에서 자기가 앞으로 뭔가 고대하고 기대하는 것이 있을 거라 하고, 거기에 관한 이야기를 자꾸 다른 사람과 주고받지요. “나 끝장날 거야.” 그렇게 발언하는 왕이 없어요. “나는 망해야 돼.” 이런 게 없다, 이 말이지요.
왜냐하면 약속은 세상을 끝장내는 것인데 막상 현실 속에 있는 어떤 인간도 “나 끝장나야 해. 나 죽어야 해. 나는 살 가치도 없어.”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그 말이지요. 성경 봐도 아무 소용 없지요. 자기 살 궁리만 하는 것이지 자기가 없어질 궁리를 안 하잖아요. 이렇게 답변할 수 있는 것은 다윗의 등불로 오신 분이 이 땅에서 이 세상과 분리된 것, 여러분 잘 아시지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죽으러 왔다고 이야기하셨어요. 마태복음 16장에서 ‘내가 온 것은 세상에서 고난받고 이 세상에서 떨어져 나가기 위해서, 분리되기 위해서 오셨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그런데 이게 바로 주께서 이 세상을 향하여 질문하는 거예요. “이 세상은 떨어져 나가고 멸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셔서 몸소 세상에서 떨어져 나갔어요. 그런데 예수님 빼놓고 열두 제자부터 해서 모든 인간이 자기가 붙들고 있는 현실이 전부인데 거기서 떨어져 나가기 위한 현실이라는 것을 누가 감히 알겠습니까? 모르지요.
그래서 다윗의 등불 되시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하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시킴으로서 이렇게 우리에게 묻습니다. “정답을 아는 진실한, 진리가 되시는 분은 이 땅에서 떨어져 나갔는데 너희들 가운데서 이 세상에서 떨어져 나가기를 원하는 사람 누구, 누구?” 누구 있어요? “없지?” 없다는 말은 현실 속에 살면서 왜 현실이 이렇게 꼬여야 하는 것을 아는 사람도 없어요.
현실은 알아도 진실은 몰라요. 진리는 모르면서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꾸 교체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저 ‘죽어서 다윗성에 장사되었더라.’ 차기 왕도 마찬가지고, 그전에 있던 왕들도 마찬가지고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고. 그러면 여러분이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을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뭘 어쩌란 말인가? 우리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그런 질문이 여러분에게서 나와야 해요. 거기에 대해서 제가 이렇게 답변하겠습니다. 산부인과에서 같은 시간대에 아기들이 여러 명 태어나잖아요. 애가 바꿔치기 될 수가 있어요. 그런데 바꿔치기 되어봐야 그 애들은 바꿔치기 된 채로 살아 있어요. 중요한 것은 장례식장에서 시체가 바뀌는 것, 장례식장에서 시체가 바뀌면 어떻게 되느냐?
유족들은 시체 바뀐 것도 몰라요. 행정착오지요. 장례사가 실수해서 그럴 수가 있는데요. 그것도 모르고 자기 선산에 남의 조상 뼈를 묻어 놓고 매년 벌초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또 다른 쪽도 그렇게 벌초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나중에 보상금이라도 나온다고 하면 돈 문제 생기잖아요. 보상금 대상자 조사할 때 DNA를 조사해 보니까 달라요. ‘99.9퍼센트 불일치’ 이렇게 나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다윗의 등불, 다윗의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를 나란히 놓고 이것을 장례식장에서 시체 바꾸듯이 바꾸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바꾸는 방식으로. 그게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나와 있어요.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진리 모르지요. 진실 모르지요. 아는 것은 자기밖에 모르고 아는 것은 현실밖에 모르는 인간, 그 인간이 하나님의 기억…, 이 땅 인간은 자기 기억밖에 없어요. 말을 해도 자기 이야기밖에 없어요. 그런 인간을 자기 기억에서 어느 쪽으로 옮겨야 되느냐 하면, 주님의 기억, 언약이지요, 주님의 기억으로 옮겨지지 아니하면 ‘산다, 영생 얻는다, 천국 간다’가 성립이 안 됩니다.
성경 왜 봅니까? 이거 지켜서 바르게 살아서 ‘하나님, 나 착하니까 천국 넣어주세요.’ 그거 하려고 성경 보는 거예요? 그것은요, 바꿔치기가 안 된 마음 상태에요. 성령이 오셨다는 그 말은 ‘네 몸부터 네 영혼까지 육과 영 모든 것을 주께서 일방적으로 약속으로 바꿔치기했다.’ 성령께서 말씀으로 알려주는 것이 그것 알려주는 거예요. ‘노선 바뀌었다.’ 그런 거예요.
천국 가는 나의 그 DNA하고 지상에 있는 DNA하고 달라요. 천국 가는 DNA는요, 예수님 DNA고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나의, 아담에서 물려받은 그 DNA, 주일 오전 설교에서 했잖아요, 쌍둥이라고, 노선이 다르다고요. 육의 노선과 영의 노선이 달라요. 그런데 그 육과 영 사이에 뭐냐 하면, 말이 들어가요, 말, 말씀이 들어간다고요, 약속이 들어가요.
약속이 들어가게 되면, 그 약속이라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뒤따라와서 하나님이 남긴 말씀에 대해서 주께서 능력으로 그 말씀을 가지고 지옥 가는 자기 백성을 천국으로 옮겨놓습니다. 옮겨놓을 때 옮김을 받은 자가 비로소 아는 게 뭐냐 하면, ‘이것이 내 뜻이 아니고 주의 일방적인 뜻인데 이게 어디서 나왔느냐? 다윗의 등불에서 나왔다’라는 거예요. 다윗의 등불.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신앙생활 좀 하고, 말씀 공부도 하고 이래서 우리가 애쓴 것은 천국 가는데 별 볼일도 없고, 효과도 없고, 뭐 그런 겁니까?” 이렇게 나올 거예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인간은 잠시도 쉬지 않고 노력해요. 무슨 노력을 하느냐 하면, 이 현실 세계에 자기가 기대하는 것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어요.
애는 둘인데 이거 키워야 하지, 디자인을 시키든지, 태권도를 시키든지 뭘 시키든 키워야 되잖아요. 자기가 할 게 남아 있잖아요, 할게. 자기 포부가 있고 자기 희망이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하는 자가 아니라 아주 열심을 다하여 자기가 현실에 대해서 집중해서 성실하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소용없다는 생각을 절대 안 하지요. 절대로 하지를 않습니다.
그 예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오늘 본문의 여호람은 왕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여호람은 현‘실을 알아요. 이 유다나라는 내가 왕이다. 백성들은 나만 쳐다보고 있다. 내가 왕 질을 제대로 해야 백성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덕을 보고 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훌륭해서 우리가 그 덕 본다, 하고 백성들의 인정을 받는 왕이 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에돔이라는 나라가 배반했어요, 남쪽에 있는 나라인데. 사무엘하 8장 13-1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다윗이 염곡에서 에돔 사람 일만 팔천을 쳐죽이고 돌아와서 명예를 얻으니라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되 온 에돔에 수비대를 두니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자, 에돔이라는 것은 다윗의 종이 되었어요. 이것은 다윗 자기가 실력이 좋아서 된 것이 아니고,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기억,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약속이 능력 있게 자기에게 임해서 에돔이라는 나라가 이스라엘 다윗이 지배하는 이스라엘의 종이 되었다’라는 관계에 있었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 열왕기하에 오게 되면, 다윗 이후에 다윗의 자손 여호람왕 때 에돔이 유다 나라로부터 독립해 나갔어요. 조공을 안 바치는 거예요. 에돔이 조공을 안 바치면 여호람왕은 뭘 생각하게 되느냐? 다윗 언약에 의하면 이 에돔이라는 나라가 마땅히 종이 되어 조공을 바쳐야 되는데 에돔 왕이 독립을 해서 “나 이제부터 당신 나라에 조공 안 바칩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뭐가 깨어졌다는 의식을 갖게 되는가?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이 유다 나라에서 철수해 버렸나? 이제는 더 이상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못 받는 거야?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거야? 그리되면 이 여호람이라는 왕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대로 못 하는 왕이야?’라고 백성들이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여호람은 자기 현실에 충실해야 돼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어딜 에돔이 우리나라에서 독립해? 쳐들어가자.’ 쳐들어갔는데 이 여호람이 도리어 에돔왕국에게 완전히 포위당했어요. 포위당해서 왕부터 장관들이며 백성들도 다 죽게 되었어요. “여호람이 모든 병거를 거느리고 사일로 갔더니 밤에 일어나 자기를 에워싼 에돔 사람과 그 병거의 장관들을 치니 이에 백성이 도망하여 각각 그 장막으로 돌아갔더라 이와 같이 에돔이 배반하여 유다의 수하에서 벗어났더니 오늘날까지 그러하였으며 그 때에 립나도 배반하였더라.”(왕하 8:21-22).
겨우 에돔에서 벗어나고, 에돔은 배반해서 유다의 수하에서 벗어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때부터는 에돔이 바이바이, 에돔이라는 곳을 자기 수하에 두려고 하다가 혼쭐이 나서 오히려 포위를 당했다가 목숨만 겨우 살았어요. 왕도 그렇게 백성도 그렇고 그런 처지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왜 현실이 이렇게 되었는지 여호람은 몰랐던 거예요.
다윗의 등불이 갖고 있던 그 취지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게 없었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알까요? 과연 여호람은 현실에 충실했는데 자기 예상 밖으로 오히려 나라가 지저분하게 되어버렸어요.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 그 말이지요. 우습게 된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어때요? 우리는 그만큼 약속대로 당당하고 대단한 겁니까? 여기서 질문하나 들어가 보면 알 수 있겠지요.
제가 던지는 질문은 이래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현실에서 하나님과 나와의 공감대,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같고 한 마음이라는 공감대를 갖고 있는지, 없는지?’는 이 질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나를 잃을까 염려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아들을 잃은 것에 대해서 더 공감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멸망할 이유가, 우리를 잃어서 멸망합니까,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잃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결과로 이 세상을 불로 멸망시키려 할까요? 어느 쪽일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 했을 때 그 이삭이 아브라함의 이삭이 아니고 약속으로 태어난 이삭이었어요. 그 이삭을 바치라 할 때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뜻에 참여했습니다. 그 이삭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에요.
그러면 우리 마음속에,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 속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서 결국 죽임을 당해서 죽음으로 추방된 것에 대해서 주께서 얼마나 가슴 아파할까?’ 그런 아픔에 공감합니까, 아니면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힘들 때마다 ‘왜 내 것을 빼앗아 갑니까? 왜 내 소원대로 안 됩니까? 왜 내 건강을 잃게 만듭니까?’ 이것 때문에 아파할까요? 어느 쪽에 하나님은 공감대를 형성하시겠습니까? 공감대를 유지하는 그 핵심이 무엇을 잃음입니까? 나 잃음입니까, 아니면 아들 잃어버림일까요?”
질문하는 취지를 보면 답변은 굳이 안 해도 알 수 있겠지요. 하나님은 예수님밖에 모르지요. 그분이 바로 우리의 심판주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얼마나 정신없이 사는지 아시겠지요. 하나님과 공감대가 되지 않으면서 기도 빡세게 했다고 응답해 달라고 요구하는 이것은 무슨 횡포입니까? 주의 마음과 합치해야지요. 성경에 여러 번 나와요. 누구든지 내 뜻대로 기도하는 자에게 기도 응답한다고.
아버지의 뜻이 뭡니까? 예수님 중심이잖아요. “예수님 중심으로 기도하면 응답해 줄게.” 이거잖아요. 자,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서 장례식장에서 시체 바꾸듯이, 내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으로 바꾸어서 죽이시는 그 이유가 뭐냐? 아무리 성경을 갖다 대도 우리는 철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의 희망과 기대로부터 손 뗄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어요.
우리는 내가 불행해지는 것, 불편해지는 것 딱 싫어요. 하나님이고 뭐고 그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위주에요. 내가 아픈 것을 내가 싫어하는 거예요. 내가 나를 안 놔주는 거예요. 떠나보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철딱서니가 없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서 강제로 이 몸과 주님의 몸을 바꿔치는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게 신약의 고린도전서 5장 15절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경우가 과연 구약에도 나오는가? 나옵니다. 구약에 있던 그 경우가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서 실현되거든요. 그러면 구약에는 어떤 경우가 바꿔치기하는 경우가 생겼느냐?
사무엘상 21장 10-14절에,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고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다윗이 이 말을 그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 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거기 그런 말은 없지만 제가 집어넣으면, ‘수염에 침을 질질 흘리매’ “…아기스가 그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이 사람은 미쳤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겼습니다. 갈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에게 원수가 된 블레셋 땅으로 갔어요. 지금의 가자지역이지요. 그 블레셋 땅으로 위장 귀순을 해요, 위장 귀순을! 그걸 고상한 말로 ‘언더커버’라 하는 겁니다. 가짜로, 가짜로 위장 귀순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똑똑한 신하들이 “다윗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사울은 천천이라도 다윗은 만만이다’라던 사람인데 이렇게 귀순하는 것이 수상하지 않습니까?” 하니까 그 이야기를 듣고 다윗이 연기를 한 거예요. 수염에 침을 흘리면서 그야말로 치매 현상을 보이는 척하면서 미친 척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왕이 속아 넘어가서 “저거 봐라. 걱정하지 말라.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미쳤어, 미쳤다. 미치광이가 들어온 거야.”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 언약을 받고, 하나님의 정통, 제대로 하나님의 미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 왜 이렇게 미친 짓까지 해야 합니까? 마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하나님이면서도 연약한 육신의 모습으로 오신 그 모습이 연상되지 않습니까? 이게 한 번이 아닙니다.
사무엘상 27장 1절,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일어나 함께 있는 육백인으로 더불어 가드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또 적들에게 간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윤석열 전 대통령이 평양 간 거예요. 월북해서 평양 간 겁니다. 언약을,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가 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유는 단 한 가지. 장차 이새의 등불, 다윗에게 언약을 줬던 그 언약에 해당되는 당사자 되신 우리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이 땅에서 분리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분리가 되시는 일을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거든요.
분리하는 거예요. 여기에 설명이 좀 필요해요. 이 정도로 해서 여러분이 좀 알았으면 좋겠는데, 구약 전체에서 다윗이 위장 귀순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약간 더 설명이 필요해요. 어렵지 않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아모스 3장 2절에,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라고 되어 있어요. 일방적 편애를 한 거예요, 이스라엘만 알았어요.
자,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만 딱 꼬집어서 ‘너희만 알았다’라고 이야기하느냐? 시편 22편 3절에 보면 “이스라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아주 짧은 거예요. “이스라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하나님께서 어디에 거하냐 하면, ‘이스라엘 중, 이스라엘이 찬송하는 가운데’서만 하나님이 거기에 거하시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애초부터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에요. 하나님의 약속으로 어떤 나라가 등장하고 어떤 민족이 등장하는데, 그 민족은 이스라엘, 그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인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 거하자.’ 그런데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속에서 찬송이 일어날 때, 그때 내가 너희 중에 거하겠다’라는 거예요, 찬송 중에.
그러면 ‘이스라엘은 찬송하면 되지.’ 맞아요. 찬송하면 되는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했다고 해보세요. 그러면 찬송이 안 되겠죠. 처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잘 인도했을 때는 그들은 수시로 찬송했어요. “다 하나님 덕분입니다, 다 하나님 은혜입니다, 하나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적들을 못 이깁니다.”
이것을 여호수아나 신명기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적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에게 붙여주시매, 붙여주시매, 그들은 이스라엘에 와서, 무조건 이스라엘에게 항복했더라, 망했더라.’ 전쟁의 양상이 이래요. 이스라엘은 철판인데, 적들은 스포츠카 타고 시속 300km로 와서 박아서 자기가 알아서 자기 차가 망가져요. 철판을 향하여 저희끼리 달려가서 ‘에이, 승리하자, 망해라.’ 해서 저희가 철판 두께에 부딪혀서, 알아서 시체가 되어 쌓였던 식의 전쟁이 뭐냐? ‘붙이시매’ 전쟁이었어요.
할 것도 없어요, 할 것도 없어요. 왜?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는 너희만 알았나니.’ 아모스 3장 2절. 참, 얼마나 편해요? 얼마나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까? 그러면 우리 같으면 ‘이제는 누구도 이스라엘 못 건드린다.’ 그렇게 생각하겠죠. 문제는 그렇게 되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기억 –내 인생 살아온 자기 기억 말고-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기억을 계속 유지를 해줘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살다가 그만 마음이 해이해졌습니다. 사는 것은 뭐 기본이고 ‘이제는 남들처럼, 다른 민족처럼 우리도 사람답게 한 번 살아보자.’ 갑자기 뭐를 잊어버렸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린 거예요.
그런데 신명기 8장 20절에 보면, 또 하나님께서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럴 줄 아시고, ‘만일 네가 너희들이 들어간 땅에서 잘 살다가 주변 다른 민족들이 사는 걸 따라서 살면 특히 그들이 하는 풍습까지, 그 신들을 섬기면 그들을 망하게 했던 그 언약대로 내가 너희를 손 볼 거야. 망하게 할 거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니라”(신 8:19-20).
신명기에 이미 예언했어요. 그러니까 너희들을 애굽에서 꺼내준 것을 잊지 말라는 말이죠.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너희들은 특별한 민족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 언약을 버렸습니다. 왜 버렸느냐? 오늘 설교의 마지막 핵심입니다.
여러분, 손톱이 주변의 살갗을 파고들면 아파요, 안 아파요? 아프죠. 사람들은 손톱이 있으면 손톱은 손톱 자리에 그대로 있고 그 주변의 살갗은 살갗대로 그대로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무슨 문제가 생겨서 손톱이 살갗을 파고 들어가면 아프죠, 괴롭죠?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해한 것은, ‘언약은 언약대로 걸치고 있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현실을 살고, 제 자리에 있다’라고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그 제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현실이 우리가 편안하다, 여기고 사는 이 살갗을 뚫고 들어올 거라는 걸 그들은 생각을 못 했어요, 생각을 못 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전쟁할 때 이런 말을 했어요. 골리앗이 강력한 무기 들고 왔을 때, 아까 ‘붙이시매’ 그 이야기했죠, 다윗이 그런 이야기 했어요. ‘이 전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붙였다.’ 붙였다는 것을 다윗은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소년 다윗은 기억을 했는데 나머지 어른들은 일체 기억을 못 했어요. 언약은 있으나 마나예요. 자기 사는 거 불편하지 않고 아프지 않으면, 그거면 끝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소년 다윗이 ‘붙이시매’ 이겼거든요. 이겼으니까 백성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 하고 좋아했습니다.
좋아했는데 사울은 그 좋아한 것이, 자기의 살갗에 다윗이라는 손톱이 파고들어온다고 느끼니까 아픈 거예요. 사울은 참을 수 없어서 다윗을 공격했고, 다윗은 그 사울의 권력에 밀려서 위장 귀순할 수밖에 없었어요, 위장 귀순.
이것은 뭐냐? 전에는 블레셋이라는 이방 민족이 이스라엘을 공격했지만, 이제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공격한 거예요. 내부의 ‘사울이라는 이스라엘’이 –백성들은 다 한패고- ‘다윗이라는 진짜 이스라엘’을 공격한 겁니다. 거기에 다윗은 아팠고, 다윗은 위장했고, 쫓겨 다녔고, 아무도 사울의 권력, 현실적 권력이 무서워서 다윗을 선뜻 도와주러 나서는 사람은 없었고, 나섰던 그 제사장들은 몰살당했고, 죽었고. 현실 이스라엘의 꼬락서니가 엉망이 된 거예요, 엉망이.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열왕기하 8장입니다. 열왕기하 8장에서 여호람왕이 현실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는지 봤습니다. 문제는 여호람이 이렇게 했을 때 어떤 백성도 ‘여호람이 문제 있다, 여호람 왕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겼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등한시했다’라고 나선 사람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우리가 살아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살아도. 현실은 그냥 곱게 망해야 돼요. 끝장을 봐야 됩니다. 끝장을 봐야 돼요. 끝이 있다는 것은, 바로 어떤 끝이냐? 끝을 미리,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끝을 미리 보여주는데 그것은 뭐냐? 나의 장례식에서 주님의 시체와 우리 시체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미리 우리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미리.
따라서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의 현실에서 ‘앞으로 내 할 일에 많은데, 나는 앞으로 이런 계획이 있는데…’ 자꾸 그런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주님의 그 십자가를 자꾸 잊어버리게 만들어요! 하나님께서 십자가 통해서 ‘이제는 네 몸이 아니고 내 몸이다. 이제는 내가 네 안에서 일한다.’ 하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최종언약을 통해서 새롭게 그걸 알아야 되거든요. 새롭게 발견해야 돼요.
우리는 이 세상과 분리되기 싫어요. 그런데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분리되기 싫어도 분리된 존재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끝으로 열왕기상 22장 19-23절을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열왕기상 22장 19절에 미가야 선지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회의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왕이여, 내가 하늘나라 가보고 왔는데 이 세상이요, 거짓말하는 영이 각 사람에게 임해서 그들이 갖고 있는 마음가짐, 그들이 내뱉는 말, 그들의 태도는 전부 다 구라입니다, 임금님!’ 미가야가 그런 얘기 했거든요. ‘여기 선지자 400명 있거든요. 400명이 전부다 가짜입니다. 진짜 아닙니다. 거짓입니다. 이 세상은 거짓된 나라일 뿐입니다. 임금님, 정신 차리세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한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왕상 22:21-23).
‘왜 내 나라가 거짓돼야 되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우리라는 현실이 하나님의 나라에 반항하고 대들고 공격하는 그런 분위기, 그런 상황, 분리되기 싫어하는 그런 분위기가 하나님을 괴롭게 하고 슬프게 하는 그런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제는 영을 받아서 이걸 똑바로 봐야 합니다. 이 세상이 끝장나는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감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이걸 미가야가 선언했던 거예요. 그러니 이것을 우리가 슬퍼할 필요가 없어요. 이러한 성령을 통해서 세상을 다 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전환이고 반전입니까! 우리가 세상을 보는 게 아니고, 우리 안의 성령을 통해서 날마다 세상을 볼 수 있는 그러한 창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의 약속이 엄연히 있는데 우리는 말씀에서 돌아서기만 하면 다시 내 슬픔과 내 걱정거리로 침울해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정말 진정한 고마움과 감사가 늘 있기 위해서 주님이 세상을 보는 관점으로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성령께서 항상 저희들에게 충만하게 작용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