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100325a행7장a스데반설교와은닉된십자가의도a
2010-11-01 20:30:45 녹취 : 이미아
대전강의100325a 오늘 사도행전 7장 스데반 집사의 설교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하겠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설교할 때 어떤 관점에서 설교했는가, 그 내용이 무엇이며 스데반 집사가 성령으로 설교한 것이 무엇인지, 얼마나 난해하고 어려운지 한 번 파헤쳐 봅시다. 시간이 1분 남았는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7장 전체가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한 대목이 나옵니다. 이 설교가 성령에 의해서, 성령을 받아서 설교한 내용이니까 그 근거가 6장 10절에 보면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으로" 이렇게 해서 성령으로 말한 설교가 나오는데 7장 같은 경우에는 하나 더 보태서 성령으로 구약을 어떻게 보느냐. 성령으로 자기 신앙 고백 한다든지 이 정도가 아니고 성령으로 성경 자체에 대해서 해석하는 것이 나오죠.
그림으로 하면 이렇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여기에 있다. 자기가 성령 받았다. 성령 받았으니까 나 예수 잘 믿는다. 이렇게 떠벌리는 것이 성령 받은 것이 아니고 성령 받았으면 어디를 향하느냐면 사람들에게 성령 받았다 날 믿어라 이렇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았으면 성경책 구약이고 신약이고, 성령 받았으면 성경책을 통해서 이렇게 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전도라는 것이, 먼저 한 번 물어 볼께요. 예배당이라는 건물에 사람 데리고 오면 이것이 전도입니까? 전도가 아니죠.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뒤에서 떠밀고 만지고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만지고 떠밀고 예수님을 두 눈으로 보고 아마 사진기 있었으면 사진 찍고 그게 전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도라 하는 것은 성경이 그 사람 속에 들어와야 합니다. 성경이 들어와야 합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모습을 봤다 키는 몇 센티고 몸무게는 한 70kg 나가더라 이것이 전도가 아닌것이 전도라는 라는 것은 `전+도` 거든요. 도를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도를 알 때 구원이 되는 겁니다. 이 도가 사람이 예수님에게 딱 붙어서 잠자리 같이 한다고 해서 도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가룟유다같은 경우에는 가룟유다 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베드로 같은 경우에도 주님과 함께 식사를 같이 했지만 전혀 전도가, 도가 안되었거든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땅에 계셨을 때 만나 본적도 없고 십자가 진 적도 없고 그는 자기 일만 했을 뿐인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그 때 뭐를 알았느냐 도를 알았습니다. 그 도를 뭐라고 하냐면 십자가의 도라고 합니다. 십자가의 특징은 이게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은닉이죠. 숨어 있는 거예요. 이것을 쉽게 말하면 볼링공에 물을 넣으면 어떻게 됩니까? 볼링공에 물이 들어갑니까? 안 들어갑니까? 안 들어가죠. 당구공에 물이 들어가요? 안 들어가요? 당구공 안에 물이 스며들지 않고 흘러 내리죠.
인간은 꼭 당구공 같아요. 뭐만 보느냐면 자꾸만 예수님은 키는 몇 센티며 예수님은 누구를 닮았다든지 예수님의 첫인상은 어떻다든지 이렇게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리 이야기해도 딱딱한 볼링공이나 당구공처럼 말씀이 와도 흘러버리는 것입니다. 안에 스며 들지를 못해요.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예수 믿겠다고 병고쳐 달라고 만지고 주물럭거리고 해도 흘러내리는 반면에 딱 한 여자, 수로보니게 여인은 믿음으로 만졌더니만 그 사람의 딸이 낫고 또는 10여년 된 혈우병이 나았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구야 내 옷을 만진 사람이?" 그랬더니 베드로가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만졌습니다. 다 떠밀고 옷을 만졌습니다." "아니야 믿음으로 만진 사람이 있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나를 만진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여인이 화들짝 놀라면서 "제가 잘못했나이다. 제가 무례한 짓을 했습니다." "아니다 너만이 믿음으로 나를 만졌다!" 그외는 아닌 것입니다.
교회에 사람들 모은다고 해서 그것이 천국갈 수 있는 도를 아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교회 밖에 있다가 교회 안에 들어오고 예배당에 들어오므로 말미암아 바깥에서 살았던 그 바깥 사고방식이 전염되고 오염되듯이 교회 안에 확 퍼질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라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친목단체가 되겠죠. 바깥에서 놀던 축구 교회 안에서 축구하면 노는 것이지 도를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나 제자들이 성령을 왜 받아야 되느냐면 성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갖고 있던 세상에 대한 인식이라든지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라든지 예수님에 대한 선입관 여기에 수정작업이 일어납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수정작업이 일어나는데 성령께서는 "너는 육이었다. 너가 세상에 봤던 것은 다 육으로 본 것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이것은 천국에 가지를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강단에 섰다. 사도 바울이 강단에 서서 성령으로 설교를 하고 스데반 집사가 여기 서서 강해한다 그렇다 할지라도 육으로 난 것이 영으로 바뀌지 않는 이상에는 그 사람은 육적인 안목으로 설교 듣고 육적인 안목으로 사도 바울을 만난셈이 되죠. 그렇게 되버리면 숨어 있는 도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수정되지 않은 그냥 자기 과거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에서 성령으로 바뀔려면 성령을 따라가야 돼요. 어떻게 따라가야 하느냐면 육에서 시작해서 성령이 인도하는대로 성경 속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행전 7장 스데반 집사 설교를 하고 있는데 스데반 집사가 성령으로 설교한다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설교한다는 것은 이미 인간이 갖고 있던 육을 영으로 바꾸어서 이 육이 영이 될 때에만 하늘 나라를 갈 수 있도록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성령으로 설교를 할 때는 바로 예수님 이렇습니다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어디를 겨냥하느냐면 성경을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관심이 없다면 죄송합니다만 영적인 사람이라고 볼 수가 없어요. 어떤 전라도 마을에 어떤 목사가 가서 교인 한 명 가지고 1200명 모았다는 것입니다. 예배당 짓고 1200명 모았다는데 그것을 전도했다고 합니다. 참, 그게 무슨 전도입니까? 예배당에 사람 끌어 모은 것이지. 보험회사도 그 만큼 끌어 모을 수 있습니다. 1200명 모아도 영이 되지 못하면 하늘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그리스도 십자가 도를 전해서 그 1200명이 십자가 도 안에 들어오면 그것은 '전' '도' 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당에 1200명 모은 것은 아무리 열심을 내서 사람들을 교회오라고 한다고 해도 그 교회에서 영적으로 그 사람들이 십자가 도를 알지 못하면, 숨어 있는 십자가 도를 알지 못하면 그 사람들은 그냥 교인들이죠. "아 예배당 여기 있구나" "의자는 여기 있구나" "피아노는 여기 있구나" "올갠은 여기 있구나" 그것은 눈이 있으면 다 보는 거예요. 그거 봤다고 해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얼마나 쉽겠어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여기서 무슨 작업이 일어나야 합니까? 수정작업이 일어나야 해요.
수정작업이 뭐냐하면, 인간이 뭐에 관심이 있느냐면 성령을 따라가야 하기 때문에, 성령은 하늘에서 왔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려면 성령을 따라서 하늘로 가야하는데 성령께서는 하늘로 가기 전에 어디를 거치느냐면 성경 말씀을 거쳐서 가게 됩니다. 성경 말씀을 거친다는 것을 제가 이렇게 이야기 했지만 구약적으로 이야기 하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율법을 알 때만, 언약을 알 때만 언약이 없는 것이 바로 우상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말씀을 통과하게 되면 말씀 안에는 두 개가 나누죠. 우상과 언약의 하나님 둘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언약은 누가 어디서 받았습니까?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았죠. 우상은 그런것이 없잖아요. 그런게 없으니까 언약의 하나님이 모세 율법을 통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 우상에서 이렇게 수정해 나갑니다. 보통 거듭남이라고 하는데 이 용어가 너무 남발이 되니까 제가 수정이라고 말해 봅니다. 우상에서 언약으로 수정해서 그래서 언약을 타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데 문제는 이것이 우상인지 아닌지는 어떤 경우에만 발생되느냐면 우리곁에 언약이라는 것이 주어질 때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언약이 안 주어지면 자기가 믿는 신이 진짜 참 신이라고 확고부동하게 믿게 된다 이 말입니다. "나는 신의 존재를 인정해" "나는 하나님이 있는 것을 믿어" 저 이슬람교 보세요. 다 하나님을 믿지. 한국에 취직해서도 금요일만 되면 일 안하고 다 엎드리는데. 그리고 우리 조상들, 할머니들 보세요. 조물주 섬긴다고 다 신을 섬기죠. 그런데 그 안을 깨보세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았다는 언약이 없다는 것입니다. 언약이 없다니까요.
하나님은 약속을 가지고 구원하는데 "아, 약속 거 알아서 뭐해 내가 나를 만든 하나님을 알고 있는데" 자꾸 신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신과 당신 사이에 뭐가 있느냐?" 하면 "있기는 뭐가 있어 신만 믿고 있으면 되지." "나 여기 있고 신은 저기 있고 거기 있는 신이 나를 만들었고 나는 만든 것을 인정하고 그러고 손털면 됐지 더 뭐가 필요해?"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래서 전라도 시골 같은 곳에서 1200명 모을려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언약을 이야기해 가지고는 안 되요. "여러분 조상 때부터 섬기던 그 신이 있죠? 그 신이 바로 우리 신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어요.
새삼스럽게 언약이라는 말씀을 거치지 않고 우회해서 성경말씀 없이 "그냥 여러분 양심적으로 알고 있는 그 하나님 있죠?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 맞습니다. 이렇게 해가지고 "우리 하나님이 교회를 세워 주셨으니까 여러분에게 육적인 혜택을 많이 드리겠습니다. 오시면 점심 드리겠습니다. 차비 드리겠습니다." 얼마든지 봉투 오만원, 이만원 넣어 주면 나온다 이 말이죠. 얼마나 쉬워요. 그러나 그것은 예배당 구경하는 것이고 교회 구경하는 것이지 십자가의 도를 아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고린도 전서 1장에 보면 십자가의 도는 항상 숨어 있는 것입니다. 숨어 있고 숨어 있는 방법을 인간이 캐낼 수 있다? 없다?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도는 항상 육으로 나가면 어리석은 것이 됩니다. "아이구 쪼다야 그럴 다 믿나?" 이렇게 어리석게 되어 있습니다. "배울만큼 배운 사람이 왜 그걸 다 믿어?" 굉장히 어리석은 평가를 받게 되요. 이 십자가 도만. "교회 다녔으면 좀 똑똑하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어야지 왜 그렇게 어리석은 것을 믿어!" 이런 취급을 받아요.
어제 제가 6시 20분 경에 전화를 받았어요. 광양에 계신 40대 여자분인데 미국에서 공부하고 와서 광양 연구소에서 산업공학이란 연구원이예요. 그 사람이 7년 전부터 뭘 경험했느냐면, 모태신앙이어서 교회는 다녀왔는데 7년 전부터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완전히 나의 취미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전까지는 내가 예수를 믿는 줄 알았는데 7년 전부터는 주님께서 나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이것을 가지고 목사한테 이야기를 했더니만 목사가 자기를 비난한다는 거예요.
7년 동안 목사 말 듣고 "아 그럼 내가 신앙이 잘못되었구나" 하면서 온 인터넷을 추적하고 신앙책도 보고 신학서적도 보고 과연 지금까지 30년 동안은 내가 예수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믿음의 주체가 나라고 여기고 건성건성 그냥 가는대로 갔다고 여겼는데 7년 전 부터는 자기가 괴로워서 못살겠다는 거예요. 계속해서 주님께서 나를 믿게 했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제발 포기하라는 거예요. 너가 하나님 믿는 것 믿지 말라 말이죠. 만약 너가 하나님을 믿게 하나님이 믿게 한다는 것이 가리워져서 날라가 버리는 거예요. 그 여자분은 지금 둘 중의 하나를 지금 선택받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을거냐, 아니면 내가 하나님을 완전히 포기할거냐. 양단간에 계속해서 강요받고 있는 거예요. 7년하다가 그래서 그 분이 의도적으로 이야기 해요. 이번 달이 7년 되는 달입니다만은 목사님 설교 듣고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난 번 설교 듣고 알았답니다. 저는 지난 번 설교가 그런 이야기가 있었는지 기억이 안나는데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줄 아는데, 그 사람이 알게 된 것은 뭐냐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을 믿고 안 믿고는 인간의 의지에 달렸다고 그렇게 알고 온 거예요. 내가 믿어주면 믿고 내가 삐져서 교회 안 나가면 안 믿게 되는. 그런데 그 분이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이 믿게 하는 사람은 믿을 수 밖에 없는데 중요한 것은 안 믿는 사람도 하나님 안 믿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냈다는 그 사실. 이것은 기적입니다. 제가 전화 딱 받고 그 분이 3분 동안 자기 이야기 쭉 하는데 그 뒤에 제가 답변을 20분 동안 더 이야기 했습니다.
사람들이 뭘 하느냐 하면 교회 있잖아요? 내가 가주면 내가 그 교회에 신자되고 교인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뭘 모르느냐 하면 안 믿는 사람들이 마음씨가 나빠서 교회 안간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안 믿는 사람들이 바쁘고 자기가 마음씨가 나쁘고 성질이 고약해서 안 믿는다고 해야 나는 저 사람과 달리 나는 얼마나 성품이 좋아서 가는것이 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만약에 나를 강제로 믿게 한다면 저 사람들이 교회 못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못믿도록, 안 믿는 사람으로 제조해 낸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사실은 다 아는 것입니다. 이걸 위해서 이 분은 성령을 받아서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목사가 가르쳐 주어서 알게 된 것이 아니예요.
그렇게 된 이상 그 분은 그 교회를 더이상 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30년 동안 자기가 했던 오류를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예요. "여러분 믿으세요. 믿어야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설득하는냥 그렇게 설교를 해대기 때문에 더이상 갈 수가 없어요. 그런것은 자기가 알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목사들은 설교를 다하고 돈 이야기 하죠? 목사님 그런것은 저도 압니다. 저도 배울만큼 배웠고 이것도 고민이라고 공부를 하다보니까 아, 돈 이야기 하는 것은 사기꾼이구나! 하는 것을 압니다.
그 정도는 넘어 섰는데 문제는 뭐냐하면 과연 내가 경험한 이것이 누가 같이 경험을 했는지, 경험한 사람이 있는지 아니면 내가 혼자 착각을 해서 돌아버린 것이 아닌지 그것 때문에 괴로워 했는데 설교를 듣고 난 뒤에 아 성경 자체가 주께서 믿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차이는 뭐냐하면 내가 믿었던 30년과 주께서 믿으라고 한 7년 사이에는 완전히 반대가 되는 것이죠. 그러면 7년 동안 뭘하느냐 하면 자기가 믿은 것을 포기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 분이 "나는 이제 자유롭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이 사람이 죽을라고 환장한 사람입니다. 결국 죽었지만. 그 시대가 어떤 시대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성전을 통해서 계시를 주신다는 것이 확고하게 된 시대입니다. 그렇게 개기고 반항할 이유가 없어요. 반항하면 자기 가족들 위험하고 자기만 위험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말씀드리면 이것입니다. 이것은 상식이니까. 인간의 상식이라는 것은 이것만 외우면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힘입니다. 힘의 응축이 자아예요. 이거 하나 알았으면 법정 스님 아는 것 보다 더 많이 아는 것입니다. 법정 스님 그 사람은 얼마나 소유욕이 심했던지 죽고 난 뒤에도 간섭하잖아요. 내 책 내지 말라고. 그것을 논리로 한 번 따져 봅시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본인이 애써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이 도와줘서 사는 거예요. 여기 애들 둘이 있지만 엄마가 밥 안 해주고 용돈 안 주면 어떻게 크겠어요? 사람이 하루하루 사는 것이 남의 도움이 없이 산 적이 없어요. 그런데 살면서 잘되면 자기탓이고 못되면 꼭 누가 방해놓은 탓인줄 알고 있어요. 어떤 마을에, 어떤 공간에, 어떤 집안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의 인연이 거기에 끼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한평생 살았다 죽었다 하는 것은 남의 도움 덕으로 사는 거예요.
그래서 인생을 끝냈으면 자기로부터 자기가 벗어나야죠. 죽고 난 뒤에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 할 하등의 영향력을 행사할 권한이 죽는자에게는 없습니다. 이렇게 해야 합니다. "살아 온 것도 내 덕이 아니고 다 여러분 덕이니까 죽고 난 뒤에 어떻게 책을 내든지 말든지 다 여러분 마음대로 하세요." 이렇게 해야 무소유입니다. 죽고 난 뒤에 책 내지마라고 자기가 왜 간섭해요? 정말 머리 있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 입니다. 사람이 그냥 진짜 무소유 같으면 죽고 난 뒤에 관을 여기 써라, 저기 써라, 어디 써라 하지 말고 니맘대로 하세요.
그런데 사람은 항상 누구를 볼 때, 이것을 격자 구조라고 하죠. 격자 구조라고 할 때 여러분들이 이걸 기억하면 돼요. 여러분 건축 구조, 집지을 때 쇠막대기로 얼키설키 먼저 격자로 세우잖아요. 그걸 보면 되요. 세상이라는 것은 격자 구조인데 여기 삼촌 있고 올케 있고 이렇게 있어요. 이 사이와 이 사이는 뭐가 끼여 있느냐면 오직 힘의 관계죠. 왜그러냐 하면 자아라는 것은 뭐가 있어야 자아다? 힘이 응축, 묶어져야 자아다. 만약에 은행 계좌에 잔고가 없으면 노숙자입니다. 노숙자의 특징은 힘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격자 구조에서 밀어냅니다. 힘이 없는 인간은 격자 구조에 들어설 수가 없어요. 이 힘의 구조에.
학생들 공부해라 공부해라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어요. 다른 말로 하면 너가 어떤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리를 차지할려면 뭘 모아야 된다? 힘을 모아야 해요. "너 뭐 할 줄 아는데?" "너 피아노 어느 정도 치는데?" 꼭 힘을 물어요. "콩쿨 입상 어떻게 했는데?" "너 학력 어디까지?" 학력, 뒤에 힘력(力) 아닙니까?
목사님 교인 몇 명 입니까? 이게 무슨 뜻이예요? 교인 하나하나가 뭐가 되요? 힘이 되거든요. 그래서 목사도 중진급 목사 있고 대형급 목사 있어요. 웃기는 이야기예요. 우리 주님께서는 그런 기도 안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중진급 목사 있고 대형급 목사있고 소형급 목사가 있어요. 그럼 뭡니까? 키크다고 대형입니까? 교인수거든요.
인간이라는 것은, 자아라는 것은 이미지고요. 이미지라는 말은 허상이라는 뜻이고 안에 깨보면 안에 너가 가진 힘이 어느 정도냐 하는 것입니다. 이 힘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은 "나는 돈은 없어도 인격적이고 양심적이고.." 이렇죠. 조선시대에는 이것이 몰라요. 소위 조선시대는 이것을 선비정신 이라고 합니다. 가운데 빈터에 집하나 얻어놓고 도닦고 하는 것을 사람들이 존중해 주었어요. 이런 시대는 농경시대입니다. 지금은 농경시대가 바뀌어서 산업시대이고, 산업 후 시대인데 쉽게 말해서 자본주의 시대아닙니까? 자본주의 시대는 힘의 성격이 하나의 질, 하나의 성질로 전부다 이것을 일원화시켜 놓았습니다. 무슨 힘이겠습니까? 돈이죠. 돈이예요.
그래서 양심이 얼마치냐? 라고 물어요. 양심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얼마짜리 양심이냐고 하는 거예요. 국무총리 양심하고 노숙자 양심하고 돈 차이가 나요. 참, 제가 설교하면서 속에 불이 타는 것이 어떤 대형교회 목사가 고아원 방문해서 뭘 주면 사진을 막 찍고 그럽니다. 그런데 어떤 일반 평교인이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듯이 그냥 돌봐주면 신문에 안 나와요. 힘이 달라요. 시의원 나오고 국회의원 나올 사람들이 착한일을 하면 그게 표로 돌아 옵니다. 그런데 어떤 아줌마가 착한일을 하면 이것은 쓸데없는 짓을 한 것입니다. "집에서 애들 밥이나 해주지" 이렇게 천덕꾸러기가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착한일을 해도 그 사람이 격자 구조의, 구성의 힘에 의해서 새사회는 돈가지고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의 설교는 바로 이 힘을 빼라는 것입니다. 힘이 있으면 자아가 되고 자아가 되면 힘을 발휘하니까 여기서 성령 받아예수님과 연결되면 예수님과 이 자아는, 이 자아는 세상에서 응축된 세상의 힘이거든요. 예수님의 힘은 여기서부터 벗어나서 천국으로 인도하는 천국의 힘입니다. 힘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하면 질서거든요. 세상의 질서입니다. 질서라는 것은 말 안들으면 쫓겨나는 것입니다. 질서라는 것은 질서의 반대는 무엇이죠? 앞에 뭐가 붙죠? 무질서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은 이 세상이 보기에,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무질서죠. 예수님은 이것을 무질서로 보지 않고 자유라고 합니다. 자유라는 말은 이쪽에서 무질서라고 하지만 무질서가 아니고, 예수님은 자유가 아닙니다. 사실은 자유가 아니고 철저하게 누구에 종속되어 있어요? 천국의 힘에 종속되어 있어요. 이 힘은 성경에 적혀 있죠. 성경이라는 것은 구약에서 말하는 모세 언약이 되죠. 모세 언약이라고 하는 것이 어려우면 시내산에서 모세가 뭘 받아 왔죠? 쉽게 말해서 요새 같으면 교과서 받아 왔죠? 애들한테 외우게 하는 십계명 받아 왔죠.
십계명 받아 왔다는 말은 하늘나라에 질서가 있다는 말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 독대하고 뭘 받아 왔는데 그 받아 온 것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질겁한 것은 하늘나라가 막 가는 나라가 아니고 하늘나라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더란 말이죠. 그 질서하고 이 땅의, 시내산 밑에 사는 질서하고 이게 맞아 주면 우리가 살기 편한데 이게 맞아 주는 것이 아니고 어긋나는 거예요.
사도행전 7장 한 번 봅시다. 7장 40절.
40절.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이 모세는 어디 갔느냐? 이 양반 어디 갔지? 왜 안 내려 오느냐?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부러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에 40일 동안 한 것은 모세가 있을 때는 모세의 말을 듣는 것처럼 보이죠. 그런데 막상 모세가 부재했다. 존재하지 않는 것. 모세가 부재할 때, 참, 성경에서 중요한 개념입니다. 모세가 부재. 부재라는 말을 뭐라고 했습니까? 존재하지 않음. 그 존재하지 않음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잘 아는 예수님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게 바로 흔히 말하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달란트 비유는 재능비유가 아니고 주인이 부재했을 때 종이 비로서 자기의 본색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 열 달란트 받은 사람이 있을 때, 같이 주인이 곁에 있을 때는 충실한 종처럼 느껴지겠죠. 그러나 주인이 부재했을 때, 마치 모세처럼 없었을 때 비로소 다섯 달란트, 열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이 존재한 것처럼 있으나 없으나 했고 그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부재하므로 말미암아 그동안 자기 숨겨있던 본색을 드러낼 때 그 때 다시 찾아 오면 본색 드러낸 그 인간 작살 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광경을 달란트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 앞에 비유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어리석은 다섯 처녀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자리를 비웠을 때 비로서 그들이 뭐라고 하냐하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던 그 신을 만들자 하죠. 그러면 그 사람들이 애굽에서 벗어났습니까? 안 벗어났습니까? 이게 문제예요. 안 벗어났습니다. 공간적,지리적으로는 애굽에서 나왔는데 마음적으로는 질서가, 그들이 알고 있던 마음속의 질서는 애굽의 연속성입니다. 탈 연속성이 아니고 연속된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만든 신은 애굽에서 알던 신을 만든 겁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들의 신은 몇 가지입니까? 두 개의 신이죠. 하나는 애굽의 질서를 고수하는 신과 또 하나는 낯설기 짝이 없는, 이런 것은 모세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런 새로운 신과 충돌 되면서 십계명 제 일계명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결국 신의 문제였습니다.
인간이다. 인간은 어디서 나왔는가? 인간은 신이 만들었다. 이러면 아무 문제 없어요. 그 신이 그 신이고 그 신이 그 신이예요. 이슬람 신이 그 신이고 기독교 신이 그 신이고 천주교 신이 그 신이고 안 믿는 사람들이 믿는 조물주 신이 똑같은 그 신이예요. 그런데 여기에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을 통해서 말씀의 세계에 딱 들어와 버리면, 탁 던져 버리면 그동안 인간들이 육으로 알고 있던 신은 바로 성경에서는 우상이 되어 버리고 진짜 하나님은 십자가 도를 통해서 나온 하나님의 새 언약을 통해서만 비추이는 그런 하나님이라는 것을 새롭게 여기에 부각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신에서 온 성령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느냐 하면, 우리의 기존에 있던 신에서 어디로 데려 가느냐 하나님의 언약으로 데리고 가죠. 언약으로 데려가게 되면 여기서 데려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어디서 빠져 나와야 합니까? 기존의 힘의 격자 구조, 이 세상의 질서로부터 우리는 삐꺽거리면서 빠져 나오는 것입니다. 30년과 7년의 차이. 30년간 인간의 힘으로 육으로 할 수 있는 신은 가짜였고 7년 동안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매일같이 은혜로 인도하는 새로운 신을 알게 된 것.
그러니까 그 전에 30년 동안 알고 있던 신은 우상이였고 그것을 조장했던 교회는 우상을 가르치는 교회. 그래서 더 이상 그 교회를 다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매일 교회가면 하라 하라 하라 하시면 여러분 복 받습니다. 더 이상 할 수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라 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같으면, 할 수 있어서 알 수 있는 신 같으면 그것이 신이 아닌 것입니다. 그 분이 그 이야기를 해요. 내가 할 수 있어서 지키라 해서 믿을 것 같으면 이미 그것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갈등할 이유도 없고 고민할 이유도 없는 거예요. 좀 이렇게 하라 하면 몸이 피곤하면 하나님 피곤하니까 나중에 할께요 이렇게 나왔다가 또 몸이 건강하면 열심히 못했던 것같이 보충해가지고 하면 되는 거잖아요. 매일같이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느냐면 모든 믿음의 주체가 나고 내가 쥐고 있기 때문에 쥐었다 놨다 하나님도 쥐었다 놨다 내 손에 달린 겁니다.
그건 성령이 올 필요도 없어요. 내가 양심껏 이성적으로 논리로 잘 하면 되는 겁니다. 그것을 네자로 이야기 하면 "하면된다"죠.
하면 뭡니까? 된다죠. 하면은 이것을 원인이라고 하고 된다를 결과라고 합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결과를 만약에 복 받는 결과라면 뭐하면 됩니까? 원인을 복 받도록 내가 그 방법을 알아서 그대로 넣으면 뭐가 옵니까? 복이 오게 되어 있죠. 또 만약에 결과가 거듭남이라면 원인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나한테 있거든요. 그러면 거듭나는 비결을 알아서 그대로 행하면 뭐가 됩니까? 거듭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얼마나 단촐합니까? 이것을 사람들은 현재 힘의 구조에다 집어 넣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전부 다 우상이고 엉터리고 육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런 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원인이 되어서 결과는 주님에 의해서 믿게 된 현재 자체가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지간에 방구를 뀌든지간에 어떤 짓을 하든지간에 이것 조차도 범사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비로서 그 때 성경이 보이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주체가 누구입니까? 성경은 모든 주체가 주님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더라 너무나 간단하지 않습니까?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던 것처럼 그 빛에 우리 이름을 지어넣으면 아무개 있으라 하매 아무개가 있더라 그것을 지금 스데반 집사가 성령을 통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격적으로 스데반 집사가 어떻게 구약을 봤는지 여러분 난해하더라도 성경 자체가 그것을 이야기 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잘 따라 오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7장 5절을 한 번 봅시다.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이렇게 되어있죠. 아브라함 이야기 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디로 갔습니까? 약속의 땅에 갔었죠. 갔을 때 그 땅에서 어떻게 했다? 발 붙일 만큼의 유업을 줬다? 안 줬다? 안 줬다는 거예요.
아, 이거 정말 희한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분명이 어느 지점에서 어느 지점으로 가라 했잖아요. 가라 했으면 아브라함은 자기가 이곳에서 살다가 주께서 지시하신 곳에 가면 머물러 살거라고 생각했잖아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까 발 붙일 곳을 전혀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발 붙일 곳을 주지 않았으면 뭐가 되요?
그러면 결국은 하나님의 약속이, 언약이 없었더라면,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준 언약입니다. 언약이 없었더라면 그는 나그네라는 것을 경험했겠습니까? 안 했겠습니까? 안 했죠. 그냥 그냥 자기 땅에서 정착해서 사는거죠. 그런데 자기 땅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오라 할 때는 자기는 하란에서 정착한 것처럼 아마 가나안 땅에서도 하나님께서 정착하게 하실 줄로 알았죠.
막상 가보니까 그 땅에서 발 붙일 만큼도 안 되었어요. 나그네가 된 거예요. 스데반 집사가 여기서 구약의 핵심을 잡은 거예요. 그 땅에서 우리는 나그네 된 경험은 이런 하나님의 불러 주심이 아니면 우리는 이 땅에서 결코 나그네 생활을 할 의사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 바로 누구다? 우리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 세울 때 왜 세웁니까? 나그네 될려고 세웁니까? 미쳤습니까? 다시 이야기 할께요. 우리가 교회 다니고 하는 것은 이곳에 정착할려고 하잖아요. 정착하는데 뭐가 필요합니까? 한마디로 힘이 필요하죠. 힘이 필요할 때 여기 힘이 중간에 있는 힘들은 다 끌어 모아 응축이 될 때 뭐가 생깁니까? 자아가 생기잖아요.
자아라는 것은 거꾸로 방향을 돌려서 작게 보면 힘이 있죠. 아까 힘이 뭐라고 했습니까? 학력, 인맥, 땅, 재력, 성격, 성격도 힘이 되요. 양심이 있다는 것, 자식이 많다는 것, 자식이 똑똑하다는 것, 남한테 착하다는 것, 나쁜 짓 한적 없다는 것, 전부 다 나한테 자아로 하여금 힘을 모으는데 힘 모아서 나그네 될려고 합니까? 아니예요. 힘 모아서 바벨탑 만드는 겁니다. 여기서 대장질 할려고 하는 겁니다. 여기서 신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들뢰즈라는 철학자는 천개의 고원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고원 알죠? 개마고원. 고원의 특징이 뭡니까? 산인데 위에 올라가 보면 평평하죠. 이게 몇 개다 했습니까? 들뢰즈는. 천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천개의 고원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것을 돌출이라고 했어요.
들뢰즈라는 철학자는 천개의 고원에서 이거 한개를 뭐라고 했느냐면 제가 예를 들어 볼께요. 청과물, 청과물시장 협의회, 이쪽은 이용소, 이용이발사 협의회, 이쪽은 무안초등학교 동창회 이쪽은 삼일기업 노조 이쪽은 대한예수교 대전노회...결국은뭐예요 인간은? 이것을 가지고 아시테드는 신급이라고 했어요.
경제 구조에서 이런 힘들이 돌출된 곳에서의 모임이라는. 여기는 경주이씨가문. 여기는 어떤 교회. 그렇다면 봅시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잖아요. 일요일 날 10시 30분부터 경주이씨에서 종친회가 한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목사한테 미안하다고 가는데 그 다음 날 갈려고 하니까 청과물 시장에서 회장 투표가 있대. 또 여기 갈려고 하니까 학회가 있대. 또 여기 갈려고 하니까 아이들 운동회가 있대. 몸은 몇 개 입니까? 몸은 하나인데 부르는 신급은 걸쳐 놓은 신급은 몇 개 입니까? 또 에어로빅회에서 야유회 간다고 하고 신급이 열 개 스무 개가 되죠.
그래서 지난 수요일에 했죠. 이것을 가지고 저는 정신병자라고 했어요. 오늘날 세련된 정신병자. 내가 누군지 몰라요. 청과물시장 가면 총무되고 여기 가면.. 이것을 가지고 가면을 갈아치우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가면을 갈아치우는 것입니다. 노래방 가면 가수되고 수영장 가면 수영 선수되고 애들 앞에서는 착한 엄마되고 교회 가면 집사되고 계속 가면을 갈아 치우는 것입니다. 그 때 그 때 신급에 따라서 그들의 힘에 보조 맞추고 동조를 해줘야 비로소 우리는 이 땅에서 정착민이 되는 것입니다. 소위 산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대우받고 사는 사람.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이 오면 이 정착에서 뭐로 바뀝니까? 나그네로 바뀌죠. 히브리서 11장. 유명한 귀절이 나오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라고 하니까 갈 바를 알지 못했는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 땅에서 객이요 나그네 하나의 길손. "주모 여기 국밥 하나 말아 주소" 그냥 거쳐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방향성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있었죠.
그들은 왜 나그네 되었냐면 저 하늘의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해서 그들은 갔다 이말이죠.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무시했는데 박수치면서 그들의 마라톤을 호응하는데가 있었죠. 히브리서 12장 1절. 수다한 천군 천사와 증인들이 "화이팅! 힘내라 힘!" 격려를 해주고 격려의 박수를 쳐줍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됨을 거절하고 자기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기를 좋아했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상을 바라봄이라. 뭡니까? 나그네죠.
결국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성령을 받게 되면 믿음이 생기고 잊어버렸습니까? 내가 믿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께서 인도하는대로 가는데 성령께서 인도한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스쳐간 그 코스 그대로 그냥 가도록 우리를 인도하는데 예수님이 이 땅에서 나그네된 것처럼 우리도 같이 나그네로 데려가는 식으로 이 땅에서 힘의 구조, 격자 구조에서 벗어나도록 그렇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나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한 번 설명해 봅시다. 하나의 공간에서는 길이 성립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됩니다. 길이라는 것은 이 공간이 깨어질 때 여기서 비로서 길이 발생됩니다. 길이 있다는 말은 이곳에 우리가 살 필요가 없다는 뜻에서 길입니다. "어이, 길이 있다"는 말은 나오라 이 말입니다. 죽치고 앉아있지 말고 길따라 나오라 하는 말입니다. 그 다음 예수님이 나는 진리요 했을 때는 이 세상은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이 세상 바깥에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는 생명이다 했을 때는 이 땅은 선악구조에 의해서 자기 착한 맛에 살거든요. 사람이 김길태를 좋아하는 것은 자기보다 못하니까 좋아하는 거예요. 예수는 안 좋아해요. 왜? 자기보다 착하기 때문에.. 아닌가? 맞지요. 예수를 안 좋아해요. 왜냐하면 예수 앞에서는 자기가 초라해지잖아요. 김길태라는 성폭행 앞에서는 자기는 대단하잖아요. 나는 그런 짓은 안 했다는 이말이죠.
사람들은 자기 존재 잘난 맛에 살아 간다구요. 그런데 여기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갈 자가 없다는 이 말은 여러군데 이미 세상의 힘은 갈라지고 갈라질 것이고 깨어질 것이고 불바다 될 것이고 이쪽은 생명이기 때문에 반대는 죽음이고...
그러나 나를 믿고 죽는 자는 죽어도 여기서 빠져 나올 것이고 살 것이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다음 시간에는 본격적으로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분석해 가는데, 염두해 두고 스데반 집사는 발 붙일 곳이 없다는 테마를 가지고 구약 전체를 왜 자꾸 발 붙일 곳이 없는 이 땅에 뭐가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발을 자꾸 떼야 하는가를 스데반 집사가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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