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사도행전 13강-부정적으로 대조시키는 심판현실100531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4. 25. 18:24

100527 행 8:4 부정적으로 대조시키는 심판 현실
 관리자 (IP:124.♡.84.18) 10-05-31 09:5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대전/대전100527a행8장a부정적심판현실a.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대전/대전100527b행8장b부정적심판현실b.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대전/대전100527a행8장a부정적심판현실a.hwp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대전/대전100527b행8장b부정적심판현실b.hwp
 관리자 (IP:220.♡.41.203) 10-11-07 12:46 
대전100527a행8장a부정적심판현실a

2010-11-06 19:23:31 녹취 : 이미아


사도행전 8장 할 차례입니다. 사도행전 8장 전체적인 내용을 말씀 드리면 스데반 집사님 순교 당하시고 난 뒤에 그 주인공이 빌립으로 바꼈고 그 빌립 집사님하고 일이 있었는데 거기에 시몬이라는 그 당시 유명한 마술사가 등장해서 성령에 관해서 마술사 본인이 놀라가지고 자기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현상에 대해서 일어나는 것에 낯설어 하는 것과 그 뒤에 에디오피아 내시 만나서 이야기하는 내용이 쭉 나오거든요.

이것을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대조, 또는 대비. 하나님의 방법은 항상 대조하고 대비하는 방법을 통해서 "저건 아니고, 이거거든." 라는 식으로 됩니다. 벌판에 세례 요한을 보내셔도 세례 요한이 말을 할 때 긍정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으로 이야기 하거든요.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다. 하나님 나라라고 상당히 너희들이 반기는데 실은 내가 일러줄께. 하나님 나라는 심판의 나라다. 하나님나라 인식에서 심판의 나라로 부정적으로 이렇게 바뀌는 것은 하나님께서 대조하고 대비하는 방법으로 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이것을 특수한 용어로 이야기 한다면 없는 것이 현재 있는 것과 대비가 되면서 없는 것이 또 하나의 있는 것, 있는 것1. 있는 것2.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등장해 가지고 둘 중의 어느 것이 진짜 현실이냐를 우리 눈 앞에 들이대는 방식으로 주님께서는 심판을 하시는 겁니다. 심판할 때 주님께서 그냥 숲속에서 있으면서 그 다음 번호 26번 27번 심판 받으세요. 그 다음 번호.. 마치 은행에서 순서표 뽑듯이 30번 31번 행한대로 심판할테니 오세요. 이렇게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나가서 너희들이 스스로 자신을 한번 심판해 봐라. 살 만한 세상인지 아니면 아니면 새롭게 소개하는 세상이 진짜 현실인 세상인지 너희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고 묻는 식이죠.

결론부터 이야기 한다면 이 사람들은 심판의 나라를 거부하고 기존의 그냥 살던 세계에 편하고 좋으니까 교회 나오는 것도 그렇잖아요. 교회 살라고 오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살림집이 따로 있어 주일 날 교회에 후다닥 왔다가 빨리 원상복귀 하잖아요. 그냥 잠시 모였다가 "역시 여기가 좋아!" 라고 되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후다닥 왔다 갔을 때 그것이 현재 사는 것으로부터 사는 것으로 이어지는 반면에 없는 것은 죽음에서부터 살므로 새로운 세계죠. 이쪽에는 자기 집에서 교회 갔다가 후다닥 자기 집으로 오는 거죠. 왜냐하면 집은 나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에. 밥도 있고 잠자리도 있고 따뜻한 사랑도 있으니까 후다닥 오지만 세례요한 같은 경우에는 광야에 있잖아요. 광야에 가면 이것은 곧 죽음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세례 요한 같은 경우에는 환기구. 환기구 알죠? 바람 통하는 것. 공장에 가면 막 돌아가잖아요. 하늘나라로 통하는, 하늘나라의 공기가 들어오는 유일한 환기구가 되는 겁니다. 이 답답한 기존 세계에서 나한테 와서 공기를 마셔야 천국에 갈 수 있다 하는 이 위치에 세례 요한이 여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선택하겠어요? 그럴싸하게 보이지만 자기 것을 포기하고 여기에 모험을 걸 바보들은 여기 없죠.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있던 그 위치가 세례 요한이 죽고 난 뒤에 예수님이 서잖아요. 어제 제가 수요일에 그런 설교 했습니다. 새로운 선지자가 왔다는 것은 기존 선지자와 타협하라는 것이 아니고 기존 세계는 이미 시효 끝났다는 뜻에서 교체하라고 새로운 선지자를 보내는 겁니다. 사람들은 예레미야 말 들어 보니까 어, 다르거든요. 다르니까 하는 소리가 우리한테도 선지자 많고, 우리한테도 율법 많은데. 우리한테도 제사장 있는데. 아이구 필요없다. 필요없어. 당신 말 필요없어. 그게 예레미야 18장의 핵심이었습니다. 필요 없다는 것이. 우리가 처분할 수 있고 우리가 처리할 수 있다는 대상이 바로 당신이라고 이렇게 보는 겁니다. 까불지 마라 죽여버린다 이거죠.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자리에 서게 되면, 제가 방금 이야기 한 것처럼 아무도 이 천국에 통하는 환기통에 안 갑니다. 안 가기 때문에 여기 나온 것이 뽑음입니다. 뽑음. 선택이죠. 선택. 너희들이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들을 선택하여 세웠나니. 그래서 등장한 것이 뭐냐 열 두 제자였습니다. 뽑는 거예요. 뽑는데 그 중에 누가 들어오냐면 마귀하나 뽑히죠. 재미있는 것은 제자 열 한 명에다 마귀 하나. 분명히 11대 1이란 말입니다. 숫적으로 많죠.

그런데 결정짓는 것은 11이 결정짓는 것이 아니고 11은 전부 다 방치한 사람이고 내몰라라 하고 예수님과의 만남은 1과의 만남입니다. 그래서 가룟유다의 위치가 굉장히 중요한 것은 갈 때까지 가보는 자. 열 한 제자는 아무리 자기 힘으로 예수 믿는 것 결국은 내 힘으로 예수를 못 믿겠다 라는 것을 갈 때가지 보여주는 사람. 내 신앙으로 내 믿음과 내 소망으로 예수님 나라에 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열 한명이라면 마귀는 진짜 인간의 죄라는 것은 예수님을 팔아 먹는 것이라는 것을 갈 때까지 다 보여 주는 그 제자가 열 두 제자 입니다.

기존의 열 두 제자 해석은 잘못되었습니다. 3년 동안 훈련시킨다는 것이거든요. 교육시켜 놓으면 남들보다 더 뛰어난 희생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제자훈련 하자 이렇게 되잖아요.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고 열 두 제자 특징은 뭐냐하면 인간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열 두 제자가 이스라엘을 대표하듯이 이스라엘은 전 인류를 대표하거든요. 전 민족과 가운데 너희를 택하였다는 말은 이스라엘 뽑을 때 전 민족이 뒤에 다 포함하고 있어요. 우리의 대변자 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만나서 율법을 지켜도 율법으로 축복받지 못하고 멸망당한다 이 말은 어느 인간이 그 자리에 온다 할지라도 결국은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율법대로 지킬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는 이방인들은 양심을 아무리 선하는 선은 행치 아니하고 악만 저지른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고맙다고 해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 대신 마음껏 선을 행하고 옳은 일은  옳은 일대로 다 해 놓고 망하기는 다 망해버린.

오늘 아침에 어떤 분이 부천개혁교회 게시판에다 제 이름도 거론하고 정낙원 목사님 이름도 거론하면서 질문을 이렇게 했어요. 제가 그것을 무례한지 모르지만 십자가 마을에 올렸습니다. 왜 제 이름이 거론되었기 때문에. 그런데 그 사람이 질문하는 내용을 보게 되면, 와닿는 첫인상이 뭐냐하면 예수믿고 착한 일 하겠다는데 왜 이목사나 정목사가 그것을 반대하냐는 것입니다. 전에는 안 믿었다가 나쁜 짓 했다가 이제는 교회 나와서 예수 믿고 착한 일 해서 영광 돌리겠다는데. 이 착함의 내용, 선함에 대한 순수한, 거짓이 없는 고운 마음씨를 왜 묵사발하느냐 그것이 무슨 성경의 뜻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다는 식으로 한 거예요.

바로 바리새인들이, 그 중에서도 바리새인 중에 바리생인이 누구죠? 사도 바울되기 전에 사울이 바로 그랬던 사람입니다. 나는 율법으로는 흠이 없다는 말은 "착함에 대해서는 사족을 못쓰는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착한 일 하고 싶어서 착한 일을 누적시키고 싶어서 착한 일 대회 나가 일등하고 싶어서 착한 일 올림픽 나가서 착한 일에 대해서는 마치 배고픈 승냥이처럼 착한 일은 다 골라서 내 것으로 다 모으고 싶은 이 심정. 우리가 갖고 있는 양심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주장을 절대로 무시 안 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제 병원에 누구 심방을 갔는데 백내장 수술한 분이라서 예배 드릴 생각 않고 그냥 만나러 갔는데 예배 드립시다 해가지고 성경은 안 가져 갔지만 눈에 관한 말씀을 전합니다 하면서 요한 복음 9장 본다고 하니 소경이다 차라리 보지 못하는..그 이야기 하면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있고 하나님 있고 말씀이 있어서 그  말씀대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자 하는데 왜 예수님은 그들을 소경이라고 한 이유가 뭘까요? 라고 물어 봤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러니까 답변하기를 그들이 지식이 없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들이 지식이 없다고 하면 바리새인들이 최고의 지식가인데 그들이 지식이 없으면 우리는 아예 지식이 없는 것이다. 최고의 지식가가 최상의 노력을 다해 경주를 해서 하나님을 완벽하게 할려는 그 사람을 보고 소경이라고 했다면 도대체 뭐가 잘못 되었을까요? 답변을 못하는 거예요. 다른교회 다니고 복음을 안 듣는 인생을 살아 왔기 때문에 제 질문에 답변을 못하는 거예요.

정답은 이겁니다. 내 보고 이유도 없이 무조건 소경이라는 그 예수님의 말씀대로 내가 소경인 것을 안 믿은 거예요. 그렇죠. "너는 소경이다." 하면 "예. 그렇습니다." 소경이라고 하면 되는데 예수님의 말씀은 권위가 있는 거예요. 왜 마지막 심판자이기 때문에. 마지막 심판주이기 때문에 심판주가 심판할 때 그렇다 하면 그런 거예요. 너는 소경이라 하면 어떤 사람이 소경이 아니냐면 그 뒤의 말씀이 소경이라고 한 사람이 눈 떴거든요.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은 무조건 옳습니다. 저 소경 맞습니다. 하면 소경이 아닌데 왜? 그리스도의 권위를 인정하거든요. 내가 성실하게 살았던 나의 권위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심판하는 것은 내가 나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나를 심판하는 거야. 심판주의 권위를 주님 앞에 이미 넘겨 주었다는 자체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간단하게 말해서 예수 믿는 것입니다. 정답은 바리새인들이 뭘 안 믿었다. 예수님을 안 믿었다는 것입니다.

왜 안 믿었을까? 믿던 내 행함,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그것이 이미 꽉 차있기 때문에 내 안에는 오직 나만 있어. 내 행함만 들어있어요. 더이상 여지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뭐라고 해도 들어 올 자리가 없어요. 들어 올려면 뭔가 바꿔야 되는데 내 것 내 놓고 주님 들어와야 되는데, 제가 대조사역 이야기 했잖아요. 있는 것을 없다고 여겨야 없음이 들어 오는데 현재 있는 것 모으기 위해서 얼마나 애썼다구요.

사람이 착하다는 것은 누적이 되잖아요. 착한 것은 잊지를 못해요. 자기가 고생하고 희생한 것은 잊을 수가 없어요. 그것이 내 마음에서 안 사라집니다. 그런데 갑자가 어떤 사람이 와 가지고 회개하라 도끼가 놓여 있다 하니까 지금까지 내 인생을 내가 어떻게 살아 왔는데. 한점 흠도 없이 그저 착한 일 하면 다 달라 들어서 착한 일 하면 남한테 뒤지지 않는 쪽으로 남들이 다 존경하면서 우수한 제품이라고 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 왔는데. 이건 도끼 이야기 하고 회개이야기 하고 뭐 회개할 것이 있어야죠. 심지어 평소에 반성, 반성 합니다가 또 선한 것이 되어서 나한테 누적이 되어 있는데.

심판주께서 우리 안에 들어올 때 아까 소경이야기 했잖아요. 너가 본다고 하니까 소경이다. 보는 자라면 소경이다는 것을 함축해서 무엇에 담았느냐면 말로 하시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사건 가지고 나중에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본문 내용 3절에 보면

32절.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깍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것을 보고 에디오피아 내시가 이 분이 왜 죽어야 하는데 말을 해요. 이 분이 왜 죽어야 하는가?  항상 성경 볼 때요 매일같이 원점으로 새로 시작해야 해요. 내가 나를 봐도 굉장히 정상이고 정신도 반듯하고 하자없고 오류없고 모든 것이 정상인데 내가 봐도 특별히 나쁜적 한 적 없고 잘못한 것 없는데 어째서 나를 겨냥해서 어떤 분이 죽는다는 이야기가 성경책에 왜 있느냐? 아무리 봐도 나는 정상인데. 뭐뭐교수 성폭행하고.. 비정상이죠.

그게 아니고 물론 실수가 있겠지만 하지만 항상 생각만큼은 그 방향이 정상적인 방향, 악은 버리고 선을 행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을 정도로 정상적이고 굉장히 선에 대해서 하기를 좋아하고 남들이 나쁜짓하면 거기에 어울리지 않고 꾸중하기도 하고 그거 잘못됐다고 지적할 줄도 알고 욥처럼 말이죠.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 정숙과 간증을 모토로 하면서 살아가는데. 이 반듯한 내가, 착한 일을 더 못해서 한이 되어 있는 내가. 어떻게 나같은 인간을 위해서 누가 대신 죽는다는 이야기가 의아한 일이 아닙니까?

제가 십자가마을에 글을 쓸 때 하나님의 뜻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남자를 십자가에 못박은 거, 그거 외에는 다른 뜻은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와서 내가 바쳤습니다. 기도했습니다. 기도했으니까 날 좀 봐. 나, 나 딴 사람 보지 말고. 이렇게 섬기고 회개하고 찬양한 나를 봐달라는 거예요. 주님의 시선은 어디에 가 있느냐면 어떤 남자를 죽여 버린 거예요. 내가 죽어야 하는데 나를 죽이지 않고 내 대신 어떤 남자를, 예수라는 남자를 십자가에 죽인 것이 하나님의 뜻의 전부라는 겁니다.

시선이 이렇게 와달라고 요구하고 싶은데 "하나님 날 좀 보세요." 하는데 시선이 굴곡되어서 저쪽으로 가버려요. 십자가로 가버려요. 니가 십자가 쪽으로 가라 말입니다. 우리 거기서 만나자. 딴데서 만나지 말고. 그것이 오늘 사도행전 8장 32절 오늘 본문의 할 이야기입니다. 에디오피아 내시가 하는 말이, 최고 권력가의 계열에 있는 사람인데 성경을 보면서 어떻게 어린 양이 내 대신 죄도 없는 분이 죽느냐 이 대목을 설명해 달라고 빌립 집사한테 요구할 때 빌립 집사가 그것부터 시작해서 무엇과 연관시키냐면은, 이것이 이사야거든. 예수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까지 연관시킬 때 이 해석말고 다른 해석은 일체 하늘나라에서 용납이 안 됩니다.

모든 성경 귀절을 어디에 연관 시킨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연관시키는, 이 빌립이 해석한 그대로 해석하지 않으면 모든 해석은 다 거짓말입니다. 왜? 빌립은 현재 성령께서 해석하니까. 사람들은 교회 올 때 자기 행함을 가지고 "하나님 날 좀 봐 주세요. 제가 이런 행함을 합니다." 라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일체 우리의 행함을 보지 않고 뭘 해도 의미없고 한 남자가 죽은 사건에게만 시선을 돌아 가는데 그쪽에서 우리 눈 맞추자. 거기서 만나자 .하고 돌리죠. 이 해석.

그러면 나중에 교인들이 교회 나갈 때 뭐가 크게 다가옵니까? 지가 바친 십일조나 헌금, 예배, 기도, 전도, 찬양한 것, 어린이주일학교 봉사한 것. 이것이 크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내 대신 죽으신 십자가가 전면을 가로막죠. 이것을 3D라고 합니다. 입체, 아바타 입체. 이것이 전면으로 다가올 때 갖고 있던 스트레스, 가정문제, 남편문제, 아내문제, 교회문제, 자기 장래문제, 생활고문제 이게 다 시시합니다. 자기 몸 아픈 문제도 다 시시합니다.

아무것도 아니예요. 사업문제 이것도 아무것도 아니예요. 그전까지는 주여! 십일조했는데 미장원 가서 머리가 잘못 나왔어요. 왜? 봉사했는데 머리가 엉터리같은 미용사 만나서 머리 확 깎을 수도 없고 짜증나 죽겠습니다. 이슬람 여인처럼 수건 둘러 쓸 수도 없고 한주 쉬겠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갔다 이렇게 하고 오다가 십자가 만나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는 내 대신 죽었는데 나는 머리 잘못 나왔다고 평소에 얼마나 짜증을 냈는지.

우리 대학 떨어졌다고 교회 안 나간다고 하다가 씩씩 거리다가 십자가 만나고 난 뒤에 주여, 애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살아서 잔소리 할 수 있는 대상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것을 범사에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모든 일에 있어서 감사 안 할 것이 없고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 안 할 것이 없고 심지어 살아있다는 자체가 감사 덩어리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이 사도행전 8장에서 스데반 집사가 죽고 난 뒤에 빌립 집사가 등장하면서 시몬과 대비되어 나온 것이 뭐냐하면 이겁니다. 제품이야기 할께요. 지난 주일 낮에도 그 이야기 한 것 같은데 이것을 아프터라고 하죠. 제품이 나올려면 원료 집어 넣어야죠. 지금 원료가 들어가서 제품 나와야 하는데 원료가 들어가면 원료로서 인간의 할 도리 다해요. 착한 일, 목사가 시키는대로 다하고 봉사하고 혹시 저주받을까 싶어서 때되면 심방하고.. 이 나오는 제품이 하늘나라에서 안 받아 주는 제품같으면 이거 문제 큽니다.

하늘나라에서 제품은 뭐냐하면 빌립보서 8장에 있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인간에게 없는 것을 주고 내가 이 땅에서 생산되지 못한, 인간들이 만들어지 내지 못한, 종교적인 노력에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진짜 하늘에서 줘야만 발생되는 그것. 아직도 간직하고 있느냐 그것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그것을 보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더 중요한 말을 했어요.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시크릿. 그리고 비밀 어디서 나와요? 예수님의 피에서 나오고 그 피를 약속이라고 하고 피언약 이라 하고 피언약은 구약에서 보면 유월절의 어린 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 땅에서 인간들이 교육받는다든지 자기가 상상해서 양심껏 만들어 낼 수 없는 거예요. 그럴 때 그 제품은 하자있는 제품이 아니고 하자가 없는 제품이 되어서 천국에서 수용을 할 수 있어요. 제가 며칠 전에 동대구 세무소에 가서 소득 신고를 하는데 서류가 안되면 안 받아 주는 거예요. 그런데 답답한 것이 어떤 사람은 나는 잘 나간다. 나는 누구 국회의원 비서다. 아무리 해도 진짜 세무소 직원들은 그 사람들이 누군지 관계없이 서류가 기입이 되야 그게 서류가 되요.

하늘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얼마나 교회 봉사하고 청소하고 전도하고 성경공부하고 돌아다니고 개척교회하고 소용없어요.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에 들어 갈 만한 제품이 하자가 없을때만 받습니다. 우리의 염원하고 아무 상관이 없어요. 우리의 원료 집어 넣는 것. 개척교회 한다고 집 파는 것. 그것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제품속에 내가 준 것이 있으면 껍데기가 허접스러워도 그것은 서류로 받습니다. "당신은 거지기 때문에 서류는 맞는데 그런데 거지잖아. 그러니까 이것 안 받는다." 이런 것 없어요. 서류만 보고 천사들이 참 고맙게도 융통성이 하나도 없어요.

첫번째 유월절 날 애굽의 장자들과 이스라엘 장자 죽일 때 죽음의 천사가 융통성이 있든가요? "아, 이 집은 내가 아는 집이다." 하고 그냥 넘어갔나요? 없어요. 뭐만 보고 그냥 넘어가요? 피 피만 보고 넘어가잖아요. 참 바보같애. 피 없으면 무조건 죽이고 피 있으면 무조건 넘어가는 거예요. 왜? 하나님의 약속은 융통성이 없습니다. 약속은 우리하고 사실은 협의된게 없어요. "이쯤해서 봐주세요." 그런 것 없어요. 그냥 피 보고 넘어 가는 거예요.

그것은 이 세상 공장에서 못만들어요. 심지어 교회에서도 못만들어 냅니다. 아니 교회에서도 못만들어 내는데 어떻게서 나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모인 사람이 교회죠. 교회는 결과론 쪽이지 어떻게 해서 없는데서 모이면 생기는게 아니고 그렇게 말씀을 듣고 아 약속을 알게 된 사람끼리 모이면 교회예요. 그래서 두 세 사람 모여도 교회예요. 두 세 사람이 모였어도 천국가는 서류를 들고 오기 때문에 천사들이 와서 "서류는 맞는데 숫자가 적습니다." 이런 소리 안 한다니까요.

그래서 수천명 모여도 수천명 모여 데모하고 해도 서류 한 번 봅시다. 이 교회 왜 모였으며 무슨 목적으로 모였으며 모인 이유들이 무엇을 바라보기 위해서 모였습니까? 그 서류 내놓으라고 하면 아무도 내놓는 사람들이 없어요. 목사부터 해가지고 내논 사람이 없어요. 그냥 집단 키우는데 바빴지. 완제품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이 받아 줄 수 있는 피 약속이라는 그 기준을 내놓지 못하면 그것을 교회라고 하기에는 참 곤란하죠.

로마서 8장 한번 봅시다. 사도행전 하면서 자꾸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보는 이유는 사도 바울의 이런 이야기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보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거하면 껍데기가 너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니 속에 들어 온 새로운 하나님의 영이 주도권을 쥐는 겁니다.

성령이 없으면 뭐만 있겠어요? 육신만 있겠죠. 만약에 성령이 오게 되면 육신도 있고 영도 있고. 육신은 나중에 죽을 때 어떻게되죠? 그것은 흙이 되고 없어지고 갈아치우겠죠. 그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만약에 성령이 안 오게 되면 뭣이 뭣을 주도한다? 흙이 될 수 밖에 없는 세포, 육신, DNA. 육이 얼마나 강렬한 욕구를 발산하는지 쉽게 말해서 먹고 싶다. 자고 싶다. 목욕하고 싶다. 울고 싶다. 웃고 싶다. 내 새끼 키우고 싶다. 내 친구 아닌 것은 나는 미워한다. 이렇게 기본 욕구가 있어요. 욕구가 예수 믿는 사람도 있고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 차이는 없는 거예요.

없는데 뭐가 주입됩니까? 세상에서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 장차 제품에서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는 서류. 하늘나라에서 유일하게 통과되는 서류. 성령이 오게 되면 성도는 불신자 차이점이 뭐냐면 욕심도 있어요. 욕심 돈 좋아하는 것 다 있어요. 그것을 버리면 안 돼요. 버릴라고 해도 버릴 마음도 없고. 버릴 사람도 아니고. 평생 가면서 자기 욕심 챙기는 것 버릴 사람도 없고. 그런데 제가 말하는 것은 주도권입니다. 주도권을 누가 쥔다? 주도권을 쥐어서 있으면 비록 너희 몸은 죽을 것이나 너희 속에 있는 성령이 예수님의 부활처럼 너희도 그 성령 때문에 부활한다는 이야기가 로마서 8장 10~11절이죠.

그래서 교회에서 두 가지만 이야기하면 간단해요. "육신은 어떻게 해결해도 해결이 안 됩니다." 라는 것을 확실하게 말해줘야 합니다. 기도하고 회개해도 욕망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무슨 착한 일 해도 반드시 댓가, 기대, 음흉함. 나한테 어떤 이득이 올 것인가를 계산하고 착한 일 하고 있는 음흉한 육신적인 생각들을 설교 시간에 다 까발려야죠.

성경 본문이 나오면 그 본문을 보면서"이 본문 지키면 뭐 줄래요?" "이 본문 지키면 우리 가족화목 해줍니까?" 기대하는 그 육신적인 것을 목사가 다 설교하고  바로 그것 때문에 성령이 오셨는데 성령은 바로 십자가 이름으로 오셔서 그것이 죄라고 지적하는 것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지금 죽어도 나그네, 완제품이 되는 겁니다.

그게 빌립이 성령 받아서 하는 해석하고 똑같아요. 이사야 본문인데 주님의 부활과 관련 시켜서 주님은 우리 꼬라지 다 아니까 시선을, "뭐 들이 받치세요. 찬양합니다." 이런 시선을 비켜서 예수님 십자가 부활로 가서 우리 거기서 만나자. 너하고 거래하지 않겠다. 거기서 만나자. 소경이 본다고 하니까 소경이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니까 보는자가 되고 그 방법이, 아까 이야기한 그 방법으로 그대로 이어지는 겁니다.

성령 이야기가 사도행전 8장의 주제인데 제가 강의 처음에 이야기 했잖아요. 대조 또는 대비. 그럼 성령이 오게 되면 역시 마찬가지로 대조하고 대비가 되겠죠. 4절 봅시다.

4절.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복음의 말씀이죠.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대조하고 대비가 되니까. 항상 대조하고 대비는 이미 있는 것. 있는 세계죠. 그러면 주께서 오실 때는 있는 것에서 뽑아서 오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것이 있는 것이 되게 하죠. 그러면 있는 것이 갑자기 둘 되었죠. 기존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있는 것, 그리고 약속에 의해서 주어진 새롭게 된, 있는 것. 이 둘 사이에 대조가 되고 대비가 되죠.

사람들은 현재 있는 것을 포기하고  주님 주신 있는 것으로 갈 수 있다? 없다? 안 가죠. 왜냐하면 이것이 너무 좋기 때문에. 이것이 너무 푸근하고, 너무 아늑하기 때문에. 그래서 교회 후다닥 갔다 집으로 오죠. 교회는 약간의 취미단체이고 중요한 것은 우리 집이 중요하기 때문에. 왜? 이미 있는 거니까. 잠시 동창회 참석하고 집에 오는 것 하고 똑같은 거예요. 재미있는 것은 노아가 방주를 지었잖아요. 노아가 방주 지어놓고 후다닥 집에 옵니까? 아니죠. 방주가 더 좋죠. 왜냐하면 영원히 살 집이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 할 때 참, 미안스럽고 난처해요. 뭐냐하면 "예수 믿으면 될 거 아닙니까?" 할 때 제가 하는 답변은 "버리세요." 거든요. 아, 고난 받지 말고 버림받으세요. 주님도 버림받았습니다. 이런 해석을 할 때에 듣는 사람의 해석엘 따라서 난감하게 느껴져요. 저 미국에 집단 자살한, 사이비 집단에 돈 다 바치고 자살하고 옛날에 오대양 사건 있었잖아요. 한 25전에...이런 이야기하면 마치 오해를 낳을 수 밖에 없죠.

그런데 버림이라는 것이, 사이비는 자기가 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내 쪽으로 오기 때문에 아무리 성경에서 버려라 고난 받으라 해도 우리는 꿈쩍도 안 해요. 주도권을 누가 잡느냐면 성령이 없는 사람은 그냥 봉사를 하고 순교를 하고 희생적이고 해도 주도권이 자기한테 있어요. 이런 것은 성령이 없는 모습입니다. 진짜 성령이 오게 되면 처참한 행동을 안하고 평소에 짜장면 먹더라도 그 자체가 편한 하고 감사함 가운데서 하는 거예요.

성령이 없는 사람은 "짜장면 먹고 주의 일 봉사해야지." 하지만 성령이 있는 사람은 "아, 맛있네." 감사 하면서 먹는 거예요. 모든 것이 자연스럽죠. 범사에 감사지. 이거 독약 먹고 죽을란다 이런 객기를 부릴 필요가 없다니까요. 평소에 지가 하는 행동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아는 것. 그게 뭐 부자연스러워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런 오대양 같은 아주 괴퍅하고 막 극단적인 것이 나올 수가 없죠. 하도 성령이 없으니까 객기를 부리는 거에요. 북한처럼. 자기들이 뭔 행동을 해야. 종교라는 이름을 띤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쥐고 있는 거예요. 안에 성령이 없기 때문에. 억지가 되고 남한테 경쟁해서 안 질려고.

그런데 여기에 이 새로운 세계에는 성령이 아니면 감사함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좋은 이야기해도, 천국이야기해도 있는 것을 포기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말씀을 전할 때 복음이 하나의 튜브, 풍선, 캡슐이라고 합시다. 이 안에 누가 들어 있느냐면 예수님이 들어 있어요. 복음이 원투쓰리라면 그 세 군데 다 누가 들어 있어요? 예수님이 들어 있어요. 전에 성령이 오기 전에 열 두 제자하고 예수님이 기도할 때 예수님이 어디에만 있었습니까? 열 두 제자만 있는 곳에 계셨죠. 또 열 두 제자만 데리고 다녔으니까.

그러면 A라는 지점에 예수님 계셨다면 저 15키로 떨어진 B지점에 예수님 계십니까? 안 계신 거예요. 그것을 지리적인 제한이라고 합니다. 지리적인 제한이 있어서 뭐 예수님께 갈라고 하면 예수님께 사람들이 와야 했어요. 병 나을라면 우리 집에 오셔서 내 딸 좀 안수 해주세요. 자꾸 요청을 해야 되요. 그러면 순서대로 정해서 갈께 하는 식으로.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은 공간의 한계를 넘어 섰습니다. 복음의 비를 뿌려요. 복음의 비를 받은 사람, 다른 말로 성령받은 사람이라 할 때, 주의할 것은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맞는 말이예요. 하지만 성령은 누가 줍니까? 성령을달라해서 오는 겁니까? 성령을 줘서 주어집니까? 성령을 줘서 주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시몬 마술사는 돈 줄테니까 달라는 겁니다. 이게 사도행전 8장에서 또 다시 대비가 되고 대조가 되는 겁니다. 내가 누구한테 사로잡혔다 예를 들면 오늘 아침에 케이블 보니까 정신병이 이런 정신병이 있는데 그 남자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사랑한다고 자기한테 암시를 거는 거예요. 전화 코드가 뽑혔는데도 "민우야 너 나 사랑하지?" 하고 엄마 보란듯이 전화를 하는 거예요. 나중에 엄마가 코드가 뽑힌 것을 보고 "너 방금 누구한테 전화 했어?" 애가 발작이 되어 "엄마 저리가 미워!" 하는 거예요.

사람이 예수님 믿고 천국가고 싶은데 아까 정신병 같은 현상이 일어 나는 거예요. 주여, 주여 제가 지금 15년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자기 스스로가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 주님은 나를 사랑해. 꼭 정신병 환자 같애. 설마 내가 이렇게 기도한 것을 하나님께서 외면하지 않겠지. 우리 목사님도 인정했어. 그때부터 그 사람은 믿음이 없으니까 교회가서 자기가 믿음이 좋아서 일어난 현상들을 찾아 다니면서 그걸 억지로 수집하려 다니는 거예요. 참 우리 젊은 아이들 이 말이 굉장히 어렵죠.

자, 보세요. 성령 받아서 생긴 자연스러움과 남이 성령 받으니까 화딱지나는 거예요. 그래서 기죽긴 싫어가지고 성령받은 티를 내고 싶어서, 내가 변화된 증거들을 수집해서 교회에서 믿음 좋은 사람으로 튈려고 하는 그 차이점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중요합니다. 진짜 성령받은 사람하고 성령받은 척을 하고 있는 차이점. 문제를 이렇게 내놓으면 어려워요. 해답이 캄캄합니다. 해답을 알면 굉장히 문제가 쉬워져요.

그래서 해답부터 말씀 드릴께요. 안 해보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멈추는 거예요. 아주 좋은 방법이예요. 기도고 교회고 헌금이고 안 하는 거예요. 성경책 안 보는 거예요. 사로잡힌 바 된 사람과 주님이 나를 사로잡은. 아까 민우야,  민우야, 하지만 민우는 관심도 없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이웃에 살지만 관심도 없어요. 하지만 그 처자는 자기 집에서 계속 민우야 하면서 혼자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 민우 대신 예수님을 집어 넣읍시다. "예수님 저를 사랑하죠. 제가 얼마나 사랑한다구요." 그럴 때는 그 사람은, 자기가 있고 여기 예수님 있고 껍데기 씌운 자기가 또 있어요. 자기가 또 생깁니다. 자기 안에 예수, 자기 밖에 예수를 관리하는 겁니다. 이것이 사실은 악마지만.

진짜 신앙 생활을 안 해버리면 미쳐버린다고 합니다. 신앙생활 하지 않으면 지옥가는 줄 알고 있어요. 그러면 그동안 내 신앙 꾸려왔고. 내가 잘나서. 내가 훌륭해서 그래서 내 손에 달렸다. 이것을 가지고 십계명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다. 하나님을 니 손으로 장악할려고 하지마라. 어떤 분이 질문 했어요. "예수 이름 뜻이 뭡니까?" "왜, 예수 이름을 불러야 합니까?" 예수 이름은 나의 이름이 있습니다. 아까 한 대조와 대비. 모든 인간은 내 이름으로 해서 어떤 일을 해도 내 이름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기도해도 내가 하고. 착한 일 해도 가 하고.

남이 한 것이 아니고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내가 벌린 내 이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수 이름이 와 버리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거예요. 예수 이름을 불러서 응답 된다고 하니까 내 이름을 위하여 예수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작고 내가 더 큰 거예요. 내가 예수를 관리하는 거예요. 주도권이 누구한테 있다? 나한테 있는 거예요. 내가 기도 안 하면 응답도 없어. 은혜되는 것도 없고.  내가 기도할 때만 은혜가 주루룩 내리는 거예요. "비야 내려라" 오잖아요. 내가 기도 안 하면 오지 않게 되는 거예요. 이것이 무속 신앙이고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철야 기도를 해줘야 응답 받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평소에 철야 안 할 때도 주룩주룩 내리는 은헤의 비는 누구 이름으로? 이미 하나님 우편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는 그 응답으로 오는 거예요. 우리가 평소에 진짜 기도가 뭐냐하면 내가 기도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이 기도한 덕분으로 사는구나 그것을 새삼 파악하며 사는 것이 기도예요. 모든 매사가 내 행동 여하에 따라서 내 결정에 따라서 나한테 보상이라는 형식으로 돌아온다 이것밖에. 내가 원인 되어서 내 잘나서 이만큼 살았다. 자기 이름의 영화를 위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버릇에다 기도를 해도 소용 없어요. 왜냐하면 역시 나는 응답하는 기도는 멋지게 해. 자기 격려가 되는 것입니다. 정신차려. 요새 기가 빠졌지. 기가 빠지면 저주 받잖아. 정신차려. 자기가 자기한테 독려하고 격려하는 거예요. 자기 인생을 자기가 관리하고 있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의 이름은 인간이 신을 대하면서 자기 행함을 격려해서 신에게 하는 것을 피해 버립니다. 왜? 대조하고 대비기 때문에. 피해서 숨어 있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을 등장시키므로 말미암아 너의 이름은, 모든 신은 이런 식으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예수님 이름을 위하여 돌아간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다가오게 되면 "예상치 못한 즐거움." 즐거움이 예상치 못할 때 감사가 되기 때문에. "아, 이것은 예상치도 못했어!" 할 때 하나님께서 "그거 누가했지?"" 주님 이름으로 하셨습니다." "니가 한 것이 아니고?" "아이! 나는 그 때  내 이름은 예상도 못했는데." 이런 헤택은 내 이름으로 예상치 못한 것을 주의 이름으로 예상해서 주셨으니까 오늘날 모든 영광과 공로는 주의 이름이 받아야 합당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일용할 양식이 평소에 사람이 많고 반찬이 많을 때는 주기도문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에베레스트 산에 올라가서 사흘 양식이 똑 떨어졌을 때, 우연히 보니까 나무 위에 과실이 있을 때 기도하면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누가 주셨는데?" "주님이 주셨죠." 하고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주기도문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이 될려면 항상 어제까지 있었던 내 이름은 없다고 여기고, 없음에도 불구하고 있음은 주님의 이름의 혜택을 누려서 지금까지 왔습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이 모든 것은 내 공로로 했습니다." 바꾸면 "주님의 은혜로 창고에 넘치도록 있습니다." 하면 주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부자될 수 있는 겁니다. 부자가 지옥가는 것이 아니고 서류가 통과되면 항상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고 예수님 공로로 구원받는 것이 서류 통과입니다. 그게 예수 이름으로, 우리 대신 피를 흘려서 우리 죄를 용서함으로 피 때문에 우리는 의인이 되어 갑니다. 그것이 천국을 통과하는 완제품이고 하자없는 제품이예요. 주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 성령이 오기 때문에 성령은 성령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주의 이름을 앞장 세운다는 겁니다.요한복음 16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성령께서 오시게 되면 성령은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거예요. 예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지. 성령을 드러내는 것은 맨날 성령받은 것을 자랑하고 뜨거워! 뜨거워! 뜨거울 수 밖에 없죠. 난로 옆에서 기도하니까. 사람의 체질상 청양고추 먹으면 땀 나는 사람 있어요. 그리고 아무리 기도해도 땀 안 나는 사람은 그거 체질 문제입니다. 방언 안 터지는 것, 성격이 피곤한 사람, 느긋한 사람 방언 안 터져요. 성질 급한 사람이 말은 하고 싶고 혀의 공간은 제한되어 있고 하다보니까  말이 어눌해서 막 나온 거예요. 성령하고 관계 없어요.

성령의 은사라는 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고마움으로 나오는 거예요. 여기서 공식하나 정합시다. 성령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은 뒤로 감추고 반드시 예수님의 복음이 앞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 8장에 빌립이 성령이 비둘기 같이 충만했다. 나온 것은 뭐가 나온다? 예수님의 복음이 나온 것입니다. 성령 받았다고 촐랑댄 것이 아니고, 니 성령 안 받았지? 이게 아니고 예수님을 믿으세요. 예수님이 우리 대신 다 해 놓았습니다. 그 천당가는 그 해답이 그에게 나온 것입니다. 10분 쉽시다.
 관리자 (IP:220.♡.41.203) 10-11-08 13:38 
대전100527b행8장b부정적심판현실b

2010-11-08 11:08:34 녹취 : 이미아


자, 시작해 봅시다. 성령할 때 보통 신학책에 보면 성령이 뭐다. 성령이 하는 일이 뭐고, 성령이 어떻게 오며 어떻게 일하게 되며성령 자체를 두고 설명하는데 이것은 잘못이예요. 아까 대비와 대조. 성령은 반드시 악령과 대비해야 합니다. 선은 그냥 선으로 드러나지 않아요. 악이 무엇인지를 부각하는 시키는 가운데서 선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남자만 있다면 여자라는 것은 꿈도 못꾸죠.

그런데 어느 날 이쁘고 얼굴 작고 머리 긴 존재가 나타났다면 "어? 누구지 사람인것 같은데 우리하고 모습이 다르다." 아! 여자라는 이야기 들은 동물이구나!" 할 때 등장하죠. 처음에 인간은 남자, 여자가 없었고 그냥 사람만 있었습니다. 아담의 갈빗대로부터 여자가 만들어지면서 그 때부터 아담은 사람이 아니고 남자가 되었습니다. 남자가 되면서, 참 이런게.. 어려운 책이 있는데 소개하면 "인간속의 악마"라는 책입니다. 생물학적으로 두뇌의 기능 속에서 악마가 어떻게 작용하는가? 참, 대단한 사람이죠. 유명한 사람인데도

이게 뭐냐하면 대비되지 아니하면 의미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 방법이예요. 대비되지 아니하면 의미가 등장하지 아니한다. 어떤 의미라 할 때는 반드시 대비되는 것이 있으니까 의미가 등장하는 거예요. 빨간불은 의미 없어요. 파란불이 있을 때, 건너가세요, 건너가지 마세요 라고 등장하는 것처럼. 참, 이런 것 설명하기 어려운데요. 원래 남자는요 처음부터 사람이었기 때문에 여자로 보지 않고 그냥 사람됨을 지향합니다. 그런데 여자는 반드시 남자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남자를 거쳐서 내가 사람인가 아닌가를 알게 되어 있어요.

어떤 캐리우먼하죠. 여자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갖더라도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남자.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미칠것 같은 남자가 등장하게 되면 과감하게 그 직업도 포기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겁니다. 여자가 직업을 구하는 것은 괜찮은 남자를 구하기 위함이지 직업 자체에 대한 미련 때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남자의 특징은 뭐냐하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 그렇다고 하면 안 됩니다. 남자가 하고 싶은 일에 필요해서 하녀, 하인 하나 두는 식으로 여자가 있으면 좀 빨래하고 밥 하는데 가정적으로 좀 편안하다 싶어서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걸 어떻게 바꾸느냐면 처음엔 이렇게 되었는데 창세기 2장 타락하기 이전에는. 타락하고 난 뒤에는 남자도 곤란하게 생겼어요. 여자가 남자를 지향하다가 그 다음부터는 남자를 이용해서 자식을 두어 버렸어요. 남자는 졸지에 돈버는 머슴으로 전락하고 말았어요. 돈 벌어와. 왜? 내 새끼 키워야죠. 40대까지 몰라요. 50대 중반까지 몰라요. 남자가 퇴직하고 난 뒤에는 여자가 슬슬기어 들어 옵니다.  같이 놀아줘. 그때는 여자를 발로 차네요. 그때 처신하는 방법이 무엇이었습니까? 남자가 남편 노릇하지 말고 아들 노릇하면 자기 아내가 이쁘게 잘 키워준다는...

여자의 그늘 밑에서 여자 졸졸 따라 다니면서. 처음엔 여자가 졸졸 따라 다녔는데 이제는 나이들어서 남자가 졸졸 따라다니는.. 할게 없어서. 왜, 할게 없냐면 돈버는 재주 때문에 남자가 되는 거예요. 그것이 전부다 뭐냐? 이 책에 보면 생명과 죽음에 그냥 가지 않고 반드시 번식이 있다는 겁니다. 성이죠. 번식과정을 통해서 죽음에 이르기 때문에, 여기에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결국은 세상의 주도권을 쥔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아이가 태 안에 있을 때 엄마하고 핏줄이 연결되어 있잖아요. 타인입니까? 아닙니까? 이게 유명한 여성페미니즘은 이 관계, 자기가 아기를 놓아 가지고 남자에게 이긴 경험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성은 이미 아기를 가질 때부터 여성의 독창적인 여성성으로 굳혀져서 여성은 주변의 있는 모든 것들을 이 번식이라는 여기에 치중해서 이익과 손해를 그걸로 해석한다는 거예요. 애기 놓기 전에는 저 남자 만나면 잘났다 하지만 본성적으론 저 남자 만나면 괜찮은 DNA를 전수 받겠다. 괜찮은 DNA. 돈 있고 잘생긴 그런 사람같으면 내 새끼는...

왜그러냐하면 애기가 아무리 밖에 나와도 자아 정체성이 자식 잘되면 내가 잘되는 것이다. 그 애 내가 낳았어. 그것이 성경에 나와요. 저 예수님을 낳은 모태가 복이 있겠다 하죠. 남자들은 그런 소리 안해요. 아주머니들이 자기 신세와 유사시켜서 "세상에 나도 저런 자식있으면 얼마나 좋겠나?" 이것이 여성의 정체성이라는 거예요. 이 책에서는 생명과 죽음이라고 하지만 여기 부모잖아요. 부모는 언젠가는 죽잖아요. 결국은 이 사랑은 자식 잘 되라고 부모 양쪽다 자식을 앞장세워서 뒤에서 자식을 밀어주는 식으로 모든 행동양식이 된다는 겁니다.

육이라는 것, 혈통이라는 것이 얼마나 가족중심인가가 확연히 드러나요. 교회 갔다가 후다닥 집에 오는 이유가 내 가족중심, 혈통중심이기 때문에 그렇잖아요. 국가가 나한테 뭐해주었습니까? 결혼한, 자식있는 엄마 같으면 그 엄마는 나가 아닙니다. 항상 저 밖에서 뛰놀고 있는 이쁘장한 내 자식을 포함해서 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남자는 그게 없어요. 그냥 죽을 때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서 하는데 그 목적은 결국은 양쪽다 새로운 번식이 들어 온 겁니다. 번식안에서 인간은 불멸을 기대하게 되죠. 나는 죽지만 내 DNA살아 있다. 불멸이죠.

그래서 성경에서는 자식이 없는 것을 저주라고 했어요. 자식이 없을 때 진짜 죽는 것으로 본 거예요. 내가 비록 죽어도 자기는 자식 안에 계속 살아 있는 거예요. 죽을 때 마지막 유언이 뭐냐하면 "애야 내 죽거든 제사 드려라" 제사라는 것은 일종의 탯줄같은 것이죠. 제사드리는 안에서 계속 이어져 오는, 그리고 나는 계속 부활되고. 조상 제사는 전 세계의 보편적인 모든 토속종교의 공통점이 제사입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오고 유교가 뭐가 들어와도, 심지어 공자도 제사드리라고 하지 않았거든요. 뭐가 들어와도 뭐로 다 바꾸냐면 처음에 불교 들어왔을 때 제사 없었어요. 그것이 제사가지고 불교를 유지하는데 생명을 걸었어요. 제사 가지고 불교가 커나간 것입니다. 승부건 겁니다. 유교도 중심이 뭐가 되겠습니까? 공자는 그런 말 한적 없어요. 공자는 귀신을 모른다 했거든요. 그런데 유교 그러면 제사죠. 천주교가 승부건 것이 바로 죽은 자의 제사. 기독교가 앞으로 할 것은 뭐냐하면 중보기도와 추도입니다. 장사 안되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신학이 어떻다 어떤 성경 내용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이 어떤 교회가서 예배드리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기도 미처, 모르는 내가 얼마나 번식 중심인지, 내가 얼마나 육 중심인지 자기도 몰라요. 누가 이야기 해준 사람이 없으니까. 너무나 간절한데 자연스럽게 믿자. 자연스럽게 믿자가 결국은 내 새끼 중심이예요. 남편은 돈 벌어 줘야 되고. 내 중심으로 믿는 거예요. 그래서 보통 교회에서 남자들이 별로 없고 여자들이 많아요. 그게 교회 자체가 샤마니즘적인 요소로 이미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성경 보고 주님 배울려고 온 것이 아니예요. 다시한번 중요한 것 해봅시다. 예수님을 알려고 온 것이 아니예요. 신으로부터 복받으려고 온 것입니다. 예수는 관심 밖이예요. 내가 처음부터 유지한 틀이 있습니다. 나 여기 있고 하나님 저기 있습니다. "하나님. 내게 교회 왔으니까 복 주세요." 어, 예수믿으라고?" "그러면 복 받습니까?" "아, 그럼 예수 믿지요."

예수님은 처음부터 중심 인물이 아니었어요. 처음부터 내 있다. 하나님 있다. 하나님 존재, 내 존재가 중심인물이었고 예수님은 들어갔다 빠져야 되요. 죄만 용서 해주고 빠져 버리고 다시 원상태로 하나님앞에서 내 앞에서 자, 이제 예수까지 믿었으니까 복 더 내놓으라. 재벌 2세까지 믿었으니까 당사자가 복 내놓으라 하는 거예요. 시키는대로 믿었으니까.

성경에서는 이걸 가지고 우상이라고 합니다. 어디서 나와서 우상 입니까? 육, 번식이죠.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를 십자가에서 죽여 버렸죠.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뭘 요구합니까? 죽어야 산다. 왜? 나도 죽었으니까. 아까 이야기한 환기통, 통풍구. 천국의 바람 통하는 것을 예수님이 죽고 같이 산다. 이것을 정낙원 목사님 설교에서는 샴쌍둥이라고 했습니다. 등짝이 붙어 있고 배가 붙어 있고 머리가 붙어 있고 태어날 때부터 붙어 있는 것. 신체는 하나인데 따로 생각하는 거죠. 그러면서 신체가 같이 죽고 같이 살때 부활되는. 로마서 6장에 나오죠. 나와 함께 죽고 살면 그 때부터 너는 죄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의에 속한, 의에 종이 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쭉 나옵니다.

이런 말이 예수님이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뭐가 날라가 버리냐면 하나님은 예수님 뒤에 점선으로 숨어계신 아버지로만 있어요. 그래서 인간이 아버지에게 바로 갈 수 없고 반드시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동행해서 갈 수 있어요. 예수님 고맙습니다. 이젠 앞으로 혼자 갈께요. 이런 것이 없고 예수님과 동행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에서 제사장 제도라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더불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요. 여섯군데 도피성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도피성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남을 살인했을 때 고의가 아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고의가 아닌 남을 죽였을 때 그 죽었던 가족들이 나에게 복수를 감행하는 할 것을 대비해서 피신을 해야하는데 어디로 피신해야 하느냐? 제사장이 있는 곳에 피신해서 제사장과 함께 있을 경우에만 하나님으로부터 계속해서 어떤 복수와 저주와 심판으로부터 면제될 수 있다는 겁니다.

간통한 여인이 누구와 함께 있었죠? 예수님과 함께 있었죠. 바로 그 이야기 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것을 가지고 두자로 자유라고 하죠. 진리를 너희가 자유케 하리라.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가 뭡니까? 툭툭 털고 나혼자, 천상천하유아독존 하는 이것을 불교에서 자유라고 하잖아요. 흐르고 싶고 그런데 자유란 뭐냐하면 우리가 지옥에 있다면 지옥에서 해방되어 천국에 가있는 것이 자유죠. 그러면 천국가면 우리곁에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있죠. 이제는 악마와 함께 벌 받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복 받는 것을 자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현재 지옥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방금 이 긴 이야기를 결국엔 제가 대비와 대조에 대해서 이야기 할려고 하는데 본격적으로 악령에 대해서 이야기 해봅시다. 오늘 본문 쉽게 하기 위해서 사도행전 19장 13절 봅시다. 제가 읽어 볼께요.

13절.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악령은 무엇까지 흉내냅니까? 예수 이름을 빙자하는 것 까지 사람들이 흉내내는 거예요. 그것을 보고 진짜 악귀가 하는 말이 15절에

15절.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이거 굉장히 신기하죠. 그러니까 지금 대조, 대비를 잊지 마세요. 사람들의 틀을 뭐라고 했습니까? 신이 있고 내가 있고. 머리속은 그런데 교회가 눈에 보이죠. 교회나 부동산이 보이잖아요. 하나님 있고 인간이 있고 중간에 교회가 있죠. 이것이 현재 우리가 말하는 기독교라는 종교가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은 우리 생각이고 악마 생각에는 이게 엉터리라는 것을 악마가 아는 거예요. 악마는 예수님, 예수님 뒤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천국을 반드시 예수님을 통과해서 간다는 것을 악마가 안다니까요. 세상에 우리는 모르는데 악마는 아는 거예요. 사람들은 교회와서 예수님 있다 하니까 그들은 예수님 이름으로 흉내낸 거예요. 

마귀는 교회를 건드리면 가만히 있어요. 교회는 구원받는다고 알려진 곳은 맞지만 전혀 하늘나라에서는 교회다니는 것을 인정을 안 해주거든요. 그것을 하나님도 알고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인간들만 몰라요. 그런데 마귀는 알아요. 마귀가 싫어하는 것이 뭐냐하면 교회하면 가만히 있는데 예수님 복음 이야기 하면 마귀가 바짝 긴장을 하는데, 여기 예수님 이야기 하신 분이 바울이죠. 마귀가 사도 바울을 알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우리 악마 동네에서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바울 근처도 안 갔고 예수 근처도 안 간 것이 어디서 까불어?" 이렇게 된다 말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악마한테 유명한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무시당해요.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초라하고 복음은 전하지만 사람들 끄는 매력이 없었어요. 지도자 타입은 아니었어요. 여러분 예수님은 이런 분이고 십자가는...이런 섬기는 분이지 확확 카리스마 있게 사람들에게 다가서질 못했어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가고 난 뒤에는 누가 왔냐면은 카리스마 있는 부흥목사들이 장악하고 있었거든요.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니까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그들은 다른 예수를 전하고 다른 복음을 전하고 다른 영을 전한다. 이게 3종 셋트거든요. 너희들이 말하는 당회장 목사가 악마의 하수인들이다. 악마의 일꾼이다. 그 사람들 배후에 악마가 있다. 그런데도 너희들은 어찌하여 용납을 하면서 뺨을 치는데도 아멘 할렐루야 하느냐 이 말입니다. 너희들을 다루면서 너희들의 것을 빼먹고 있는데 아멘 할렐루야 하고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면 그쪽 당회장이나 목사들이 "그럼 당신이 진짜라는 것을 증거대봐." 이렇게 나오겠죠?

그 뒤에 나온 것이 내가 예수님 때문에 강도의 위협과 도적의 위협과 핍박을 받고 태장을 맞고 심지어 안구가 안 좋고 주님 힘듭니다. 네 은혜가 족하니라 그만 하면 됐어. 사도 바울이 알게 된 것이 내가 약한데서, 내가 약하니까 내가 장기를 드러내지 않고 그리스도만 몽땅 드러냈구나 하죠. 그 대목을 일반 교회에서는 설교를 못하죠. 그들은 권력단체고 밥벌이니까.

성령과 악령이 공통점이 있어요. 양쪽다 보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 이것은 유월절 피보고 넘어가는 것하고 마찬가지 이거든요. 뭘 다이루었느냐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룬 거예요. 그럼 약속을 우리가 다 이루었습니까? 예수님이 다 이루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다 이루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부페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너무 비싸서 못들어 가고 있는데 앞에서 어떤 분이 "어, 냈어 들어와." 뒤에서 다 이루었다고 했어요. 드디어 부페에 들어 갔습니다. 김밥 있고 잡채 있는데 김밥만 먹고 그 다음 부터는 "아, 잡채먹고 싶은데 또 돈내야하나?" 할 때 "김밥 먹어도 잡채 먹어도 돼." 라고 하죠.

그런데 사람들이 제 말을 오해하는 것이 뭐냐하면 니는 십자가가만 있고 다른 것은 없나? 김밥만 있고 잡채는 없나? 라고 묻는 거예요. 성령이 오는 것은 "너는 잡채 먹어도 돼." "또 잡채 먹고 초밥 먹어도 돼." 같은 말이예요. 이미 너는 다 이루었다는 범위한에 속해 있는 거예요. 필드죠. 나는 영역을 이야기 하는데 그 사람은 자기가 뭘 할 것만 자꾸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목사님 이것은 되는데 또 다른거 할려면 내가 결심해야 되고 회개해야 됩니까? 또 묻는 거예요.

김밥은 먹는데 잡채 먹을려면 또 돈 내야 합니까? 그런 소리하고 똑같은 소리예요. 만약에 돈 안 내면 저주받죠? 맨날 교인들이 저주받고 징계받는 걱정이 뭐냐하면 기도 안 하면 고3 자식이 대학에서 떨어지죠. 그래서 맨날 생각하는 것이 헌금이나 기도로 지불해야 되는 줄 알고. 그러나 저는 뭐냐? 다 이루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또 오해하기를 "아, 김밥만 먹는데 다 이루었구나 !" 다시 말해서 죄 용서 받는 것만 다 이루었고 다음에 뭐 행동할 때는 기도도 많이 해야하고 헌금도 많이 해야 그 복은 또 따로 복을 받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저는 그것이 영역이예요. 영역. 십자가에서 성령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성령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김밥도 나오고 잡채도 나오고 초밥도 나오고 다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이쪽은 한식 저쪽은 양식. 나올 때 절대로 뭐 내가 기도해서 얻었다. 헌금해서 얻었다. 뭐해서 얻었다. 하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것은 십자가에서 나오는 보너스들이 계속해서 나오는 거예요. 한번 주님이 다 이루었으면 보따리를 확 푸는 거예요. 마치 흥부전처럼. 흥부가 박 타니까 TV고 자동차 나오고 냉장고 나오고 모든 보물 다 나왔잖아요.

죽고 난 뒤에 천국가는 것이 완전 보장. 전부 다. 교통사고 내서 벌금내도 괜찮고 하여튼 어떤 경우라도 다 이루었음 범위내에서 추방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걸 가지고 성령의 보증금이라고 합니다. 성령은 뭘로 왔다? 성령은 이미 보증금으로. 그런데 성령이 왔다는 것이 성령받고 나서 우리가 뭘 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 받았으면 돼? 그 다음 전도 해야지." 이게 아니고 성령이 왔다는 것은 우리는 이미 다 이루었음에 혜택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성령이 온 것은 성령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바라봐라. 너가 어떤 짓을 해도 너는 다 이루심에 혜택을 받는 그 구역내에 당신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모르면 몰라요. 마술사 시몬은 그것을 모르고 자기가 여기 있고 성령을 자기가 소유, 성령을 돈 주고 사버리면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내가 내 안에 성령이 있죠? 내 범위는 내가 현재 구축한 것이 크고 그 안에 일부로 성령이 들어오죠. 내 근처에 영역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성령은 내가 다루기 나름입니다. 자기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거예요. 이짓이 바로 성령을 흉내낸 악령들이 하는 짓입니다.

"성령받을 때 니 뭐 했나?" "기도했나?" "그럼 기도해봐. 성령 받지."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하면 성령을 소유할 수 있습니까?" 하고 같은 말입니다. 교회에서 많이 들어 본 이야기 아닙니까? 여러분 성령 안 받으면 능력이 없습니다. 능력 안 받으면 전도 못하는 것도, 십일조, 헌금, 예배빠지는 것, 목사 못섬기는 것도 구원은 받았지만 능력을 못받아서 그런 겁니다. 능력은 어디서 옵니까? 성령 받아야 능력 옵니다.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지금도 현재진행형 입니다. 그거 아니면 교회가 안 되니까.

여러분 저, 성령주의 아닙니다. 은사주의 아닙니다. 저는 정통 복음주의 입니다. 오직 구원은 십자가로만 구원받습니다. 저는 그것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능력은 여러분 집구석 잘되고 못되고는 따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구원은 받아 놨지만 성령을 안 받으면 여러분 개털모자 쓰고 나중에 상급 하나도 없이 남들은 상급받아 자랑하는데 여러분은 팬티바람으로 구원받습니다. 불 가운데 구원받으면 안 되겠죠.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여러분들이 들어서 그것이 하나의 틀로 잡혔습니까? 그것이 악령이 하는 짓이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어떻게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행함으로 마치느냐? 은혜로 시작했으면 끝까지 은혜로 끝나야 하는데 은혜로 시작했다가 행함이라는 삼천포로 빠졌습니다. 교회에서 말하기를 구원받는 것은 은혜로 받고 복 받는 것은 행함에 달렸다. 바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선교에 신경쓰고,  선교만 하지 말고 선교헌금도 하고, 생각날 때마다 기도도 많이 해야 하고.

여러분, 지구가 둥글죠? 둥그면 선교지가 어딥니까? 평평하면 여기서 멀어지잖아요. 지구는 둥그니까~자꾸 어디로 옵니까? 내 등으로 오죠? 내 뒤쪽으로. 기도를 계속하면 어디로 가요? 내 등어리에 있게 되요. 결국은 내 현장이 뭐다? 성지순례입니다. 성지순례란 내 사업체, 내 가정이예요. 내 교회가 선교지예요. 왜그러냐하면 성령께서 전도하는 방법이 결국엔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로마서입니다. 로마서 11장. 사도 바울이 이방인 전도했죠?

내 백성이 구원받는다면 나는 지옥가도 좋다. 관심사가 다시 어디로 옵니까? 다시 돌아오죠. 물론 이렇게 일차원적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돌아올 때는 다른 차원에서 돌아오죠.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는 차원에서. 처음엔 출발할 때는 이방인이지만. 이방인 끌고 유대인 포함하고 온 이스라엘. 그리고 통계적으로 수치를 계산하면 현재 이스라엘은 순수 혈통이 없습니다.10대만 지나가면0.001퍼센트의 피만 있어요. 4대만 지나가면 거의 같은 혈족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같은 경우, 이렇게 각 민족들이 교류하는 입장에서는 피가 섞이기 마련입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예요. 한국도 몇 십 년, 몇 백 년 지나면 한국도 처음엔 성씨가 몇 개 안 되었어요. 한국의 성이 이백개 넘는것은 전부다 중국피가 하고 외국피가 섞여서 그래요. 대한민국 한반도라는 것은 남방계통인 베트남계통과 북방계통인 몽고계통이 섞여서 된 거예요. 북방계통 일부는 일본서 난거고. 이것은 두개골 DNA이 조사해 보면 나온다는 거예요. 순수가 없어요. 순수는 정치적 의미로 나온 겁니다. 정치적으로 같은 공산주의 하면 그것이 의미이지 순수는 없어요.

정리해 보면 악령은 따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자꾸 위장한다? 성령의 행동을 모방하고 그것을 따라 다니면서 유사품을 제조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악령은 다 이루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8장 29절을 보면 "이에 저희가 소리 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했죠. 이것을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청년이 이야기 한 거예요? 귀신이 이야기 한 거예요? 청년이 이야기 한 거예요. "아이구 저 청년 예수라는 아저씨 만나서 저런 이야기 하는구나." "저희 둘 끼리 말하는구나."

하지만 성경에 기록하니까 이것은 청년이 이야기 한 것이 아니고 속에 귀신이 이야기 하는데 "예수 당신 누구야?" 하는 것이 아니고 익히 알아요. 아까 했죠.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고. 악마는 복음 전하는데는 귀신같이 복음에 대해서 압니다. 굉장히 복음에 대해 민감해요. 교회에서 딴소리 하면 다 용서가 되요. 하지만 복음이야기만 하면 버림받습니다. 이상해요. 거기서는 복음전하면 대번 알아차려요.

그리고 이 귀신의 이야기가 우리 마음속에 이야기 입니다. "예수여 당신하고 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더 추가적으로 말한다면 "내가 어릴 때부터 모태신앙이어서 30년동안 예수 믿지만 당신이 나한테 해준것이 뭐가 있습니까? 내가 인간성 좋아서 지금까지 교회는 다니고 있지만 사실은 내가 당신 좋아한 적은 없었습니다." 라는 말이 우리의 속 마음으로서 꿈에도 나올 수 있고 의식이 잠자고 있을 때 무의식 속에서 툭툭 행동으로 나올 수가 있습니다.

딴건 다 좋지만 제발 십자가 이야기는 하지 마라. 하는 것이 우리 속에 사실은 엉겨 있어요. 엉겨 있어서 좋다 좋다 하다가 복음이야기 하면 밀쳐버리고 친구 많이 떨어 졌습니다. 복음 이야기 하면 갑자기 민감한 반응을, 딴 사람처럼 민감한 반응이 있는데 왜냐하면 인간속에 이미 귀신이 지배하고 있어요. 에베소서 2장1절 아닙니까? 세상신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신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성령이 오고 난 뒤에는 우리는 그때부터 예수님 안이 되거든요.

성령이 오게되면 성령은 빠져요. 성령과 악령이 직접 대립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성령과 악령이 뭘 쳐다보느냐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느냐? 아니면 더 보태야 되느냐? 그 문제입니다. 에베소서 2장6~8절에 보면 성령을 받게 되면 "이미 우리를 하늘에 앉히시고." 과거 완료가 되어 있습니다. 과거완료의 특징이 뭐냐하면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아니고 윗층에 올라가 있다. 과거완료가 되면 시간의 흐름은 의미가 없어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특징이, 이것이 묵시인데 특징이 뭐냐하면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같은 시간을 따지거나 묻지를 않아요. 이미 하나의 영역 속에 다 이루심의 범주에 들어가기 때문에 밑에서는 시간이 흘러가도 여기는 시간이 흘러가지 않습니다. 아예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없고 사건과 사건만 안에서 갇혀 있는 꼴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재림하심. 그 안에 우리는 곱게 들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앉히시니." 이것을 지상에 있는 육체가 믿음이라는 것을 통해서 진짜 여기에 있다는 것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펀드가 돈이 10억 있다는 것을 가끔 뭐 보면 알죠? 전화해 보면 알죠. 그 전화가 믿음이예요. 집에 있는 현찰이 별로 없어요. 한 오천 있나? 누가 와서 돈 줘버리고. "아이구, 이집 보기보단 가난하네." 속으로 쾌재를 부르죠? 혹시 펀드까지 갈까 싶어서 전화해 보니까. "주여 믿습니다. 제 약속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너는 하늘에 앉히시니." "아이구 감사합니다. 펀드 그대로 있구나." 골로새서 3장에 보면 " 우리는 이미 이땅에서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감추어졌다." 이렇게 되어 있죠.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수시로 파악하는 거예요. 믿음이 그래서 고린도후서 13장5절에 보면 너희가 믿음에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라. 하늘 나라 펀드가 잘 있는지. 펀드 회사에 전화해 보라 이 말이죠. 아직 있죠. 주식값 좀 내렸는데 삼성전자로 바꿀까요? 그러면 펀드 넣을 걸 모르는 자기 마누라가 "여보 어디에 전화했어?" "당신은 몰라도 돼." 이 사람이 미쳤구나!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은 남들보기에 미친 거예요. 자기 생명이 지금 어디에 가 있습니까? 하늘나라에 있잖아요. 예수 믿은 남편은 지금 하늘나라에 가 있는 거예요. 그쪽과 통하는 것이 믿음이예요.

그래서 에베소서 2장8절 유명한 귀절이 있죠. " 이 믿음은 행함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것이 너희 행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니 너희 행함을 자랑치 말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예수님을 자랑하라. 이 배후에 누가 있느냐? 다 이루심에서 나왔던 영,  성령께서 우리 배후에 조종한 거예요. 왜?우리는 때려 죽어도 내 이익을, 육신의 내 욕망을 포기 못하기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 그러면 우리에게 악령이 없는 겁니까? 자, 성령 받았습니다. 그러면 악령이 우리한테 상관없는 겁니까? 욥이 분명히 믿는 자 맞죠? 욥은 하늘나라에서 유명했어요. 하늘나라에서 자랑했으니까. 그런데 옆에 누가 찾아 옵니까? 악마가 찾아 오잖아요. 꼭 우리 식이예요.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니까 그래서 예수님도 바울도 악마가 안 찾아 간 거예요? 아닙니다. 끝까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까지 끝까지 예수님을 시험했어요. "니가 메시야라면 당장 내려와 봐라." 자기도 구원 못하면서 어디 주제에 남을 구원한다고." 저는 그 대목을 써 가지고 모든 절에 보내고 싶어요.

왜? 불교가 성경을 공부하거든요. 보면서 나온 결론이 그거예요. 예수 지도 구원 못하면서 남을 구원 한다고? 그런 사기가 어딨냐? 그들은 그렇게 주장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도 부처다. 인간은 다 부처다. 인간은 존재 자체가 부처가 되는 것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니까. 아무것도 믿지 말자 라는 것을 믿자라는 것이 불교의 교리입니다. 니 스스로 있으면 되지.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고. 나는 나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이고 스님을 만나면 스님을 죽여라 왜? 니가 부천데무슨 부처를 찾느냐.

그런데 욥은 어때요? 욥은 누가 찾아 왔어요? 사탄이 찾아 왔잖아요. 제가 단언합니다. 너무 심한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양해하시고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사탄이 안 찾아 오면  신자가 아닙니다. 바울에게도 끊임없이 죽을 때까지 계속 시험했고 거짓 선지자를 통해서. 예수님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누가복음 22장인가  베드로가 주여 제가 주를 버리지 않겠습니다. 아이구 인간아! 사탄이 너 눈에 안 보이지? 사탄이 보일리가 있겠습니까? 베드로가 지금 한창 믿음 좋아서 환장해 가지고 있는데. 자기 딴에 믿음인죠. 제 글에 이런 말이 있어요. "믿음의 적은 믿음" 이라고 했어요.

우리 강장로님이 이런 말을 했어요. 어떤 사람이 자꾸 엉뚱한 소리 하니까 믿지마라 했어요. 그런식으로 할 것 같으면 예수를 믿지마라. "믿지마라" 예수를 안 믿으면 자기가 믿음이 없는 것을 알게 되는데 꼭 믿는다고 하니 진짜 믿음이 가려지니까 강장로님이 화가 난 거예요. 지 자신을 믿으면서 자꾸 믿는다고 흉내를 내니까. 악마는 자꾸 흉내를 내는 거예요. 자꾸 믿는 척을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주신  선물이 아니고 내가 믿는 사람을 해야 편한 것. 아까 말한 정신병자 아가씨. 민우야! 너 내일 만나자. 전화코드 빠졌는데 자꾸 민우야! 찾는 거예요. 심지어 그 증세가 더 심해지니까 부모한테 결혼했다고 하는 거예요. 엄마 아직도 우리 동거를 허락하지 않는거야? 이렇게 하고 있는 거예요.

악령이라는 것은 항상 얼쩡거려요. 항상 복음있는 곳에 악마가 와요. 나머지기는 안 간대요. 갈 필요가 없다니까요. 거기는 이미 자기 편이기 때문에. 자기 집에 속한 가재도구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갇혀있기 때문에 필요 없어요. 육신의 영광과 세상의 부귀영화 그것으로만 전부 입이 벌어져서 헤하고 좋아 합니다. 돌이 떡이 되게 하는 것하고, 기적이 있어야 믿는 것 하고, 기적과 예수 잘 믿어서 성공하고 출세하고 좋은 대학 가고. 이것은 악마가 사람을 이미 조져 놨어요. 그것은 손 안대도 그냥 같이 가는 겁니다.

문제는 예수님에서 복음안에서 살아 있죠? 아까 지역적인 한계를 넘어서서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뭘 뿌렸다? 복음을 뿌려 보니까 복음이 하나의 비누방울처럼 안에 뭐가 들어 있어요? 예수님이 안에 들어 있죠. 성령이 안에 들어 있죠. 마치 케이크에 초코렛가루를 군데군데 폭탄 터지듯이 팍팍 뿌린 것처럼. 복음이 전파되고 보니까 그것 단도리 해야 하기 때문에 이 세상 신이 거기에다 와르르 몰두를 해가지고 핍박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 핍박 이야기가 사도행전 8장 초반의 이야기 입니다.

아무래도 에베소서 2장을 거론해야 되겠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이것을 죽은 법정 스님이 인정 하겠습니까? 안 하죠. 그들은 이미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너나 나나 똑같다는 거예요. 무슨 악마가 있고 없다는 거예요. 악마가 있다는 것은 항상 대비적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만 그 다음부터 뭐가 보이냐면 아, 저렇게 믿는 척하는 악마의 모습 자체가 보이는 거예요.

그럼 악마라는 것은 항상 처음에는 은혜로 시작한 것 같지만 끝은 행함으로 가요. 다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성령이 왔는데 , 보증금이죠. 이미 아파트가 내 이름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보증금을 내고 이미 갖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구원받는 것은 내 믿음으로 구원받고. 선물이 아니고. 사실은 선물로 와버리면 선물만 받는 것이 아니고 다 받는 것이 되는데 그들은 믿는 것도 내가 믿고 행하는 것도 내가 행하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그 행함에 대해서 남들이 다 속아 넘어갈 수 있도록 주도권을 자기가 잡고 민우야! 나 사랑하지? 예수님 저 사랑하죠? 자꾸 행한것을 수정하고 억지로 행함으로 만들어 내는 겁니다.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본인들이. 선물은요 그냥 받으면 되는 거예요.줘도 못 먹나? 그냥 맛있게 먹으면 되는데 내가 이 떡을 만들고. 뭐 어디 떡을 만들 재료 있습니까? 수박을 내가 재배하고. 이러지 말란 말입니다. 선물이네 하고 떡 하나 먹으면 되잖아요. 주께서 그냥 먹으라고 선물로 준 것을 우리가 집에서 이걸 만들고 있는 거예요.

먹는 것도 감사하고, 펀드 넣어서 폭삭 망해도 감사하고, 주식값 내려 간 것도 감사하고, 애 농땡이 친 것도 감사하고. 모든 것이 이미 다 이루었다의 범주안에서 이미 내 생명인, 펀드는 이미 하늘나라에 가있다. 가끔은 전화해서 "펀드 잘 있죠?" 믿음으로 전화해 봐라. 그런 식으로 주신 은혜로 살면 되는데. 저길 가기 위해서 지가 왜 갑니까? 저 산에. 지가 원숭이 입니까? 여기서부터 장비 꾸리고 헌금, 십일조, 봉사, 온갖 재료를 집어 넣었는데.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보니까 서류가 "뭐 이런 행함이 다 와 있나?" "아니 우리 목사님이 이렇게 들어가면 된다고 했는데, 그래서 방언도 하고 기도도 하고 부자도 되고 했는데." "내가 준 것 말야?" "주님이 뭐 줬는데요? 다 이것도 교회에서 해 온 건데요?" "내가 준 것, 그것도 거저 준 거?" "뭐요? 그런 것 못들어 봤습니다." "골치아프다. 내가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고 했잖아. 피로."  제품에 하자가 났습니다. 원료 좋은 것 넣으면 뭐합니까? 하늘나라에서 안 받아 주면 끝나는 거예요.

간통한 여자 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너를 정죄한 자들이 어디 있느냐?" 면접을 보는데 사장, 부장, 차장이 면접하면서 "저 여자 간통했으니까 우리 회사 안 됩니다." 쭉 하는데 회장님이, 주님이 회장님입니다. 너를 못 넣는다는 사람이 누가 있더냐? 사장님은 가셨고 부장님도 가셨고 차장님도 가셨고 여기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넣어 줄께. 나는 회장이니까. "너는 정죄함이 없는니라." 나중에 무엇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의 피를 근거로 해서. 장차 질 십자가 피로 "너가 간통을 했어.  그것 상관 없어. 그것 가지고 시험 문제가 아니니까." 예수님이 준 피가 마지막에 통과를 결정하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 이 복음을 여러분들이 미리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너를 정죄한 사람이 어디 있더냐? 사실은 우리자신이 우리를 정죄했습니다. 내가 잘못된 하나님과 나라는 그 종교틀을 가지고 얼마나 나를 책망하고 심판했는지 힘들어 하면서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나 자신의 행함을 보지 말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내 대신 책임져 주시고 대신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저희들이 마음속에 받아서 항상 그것을 앞장 세우면서 주님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