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사도행전9강-사도로 인한 계시의 종결성과 완결성100129

아빠와 함께 2014. 4. 16. 08:11


2010-01-29 09:08:10 조회 : 2355         
대전 2010년 1월 31일 강의 행9강 사도로 인한 계시의 종결과 완전한 완료 이름 : 관리자  (IP:124.59.87.13)
100128 사도로 인한 계시의 종결과 완전성(행함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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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100128a행5장30절a계시의종결완전성a 

2010-02-24 17:21:30 녹취 : 이미아       


시작하겠습니다. 사도행전 5장 30~32절 말씀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30절.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절.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32절.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방금 제가 읽었던 5장 30절 말씀은 누가 이야기 하느냐면 여기 베드로가 이야기하죠. 사도가 이야기 한 그 범위, 그 내용 범위를 우리가 벗어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사도가 방금 5장 30절 가지고 핵심을 이야기했는데 우리가 이 범위 바깥으로 추가해서 자기가 꿈으로 봤다든지 기도해서 느꼈다든지 해서 집어넣을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택도 없습니다. 못넣습니다. 
그래서 사도예요.
사도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했던 교회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말고 다른 기초가 있겠어요? 사도가 주께서 원하는 교회의 기초라고 했는데 물론 밑에는 예수님 계시고. 예수님을 바탕해서 예수님께서 사도를 기초로 했는데 사도들 말고 기초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이것을 계시의 종결성이라고 합니다. 상당히 고상한 말이죠. 종결되었다. 끝났다. 

하나님의 계시는 끝났다. 어디 선에서 끝났는가? 사도의 선에서 끝났다. 몇 사도? 열 두 사도. 그렇다면 열 두 사도가 죽어 버렸다면 계시가 종결되었죠. 사도가 계시를 전했으니까 그리고 사도 외에는 계시를 전하면 안 되니까. 이것은 예수님께서 결정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가 관여하면 안되죠. 사도가 얼마 있다가 죽었다면 계시가 종결되었죠. 종결되면서 남은 것이 계시의 완성성, 완전성이 남았습니다. 사도가 죽음으로서 계시가 종결되고 종결되면서 남은 것이 있는데, 업적이 있는데 계시가 완전히 되는 것입니다. 

완전이라는 것은 요한계시록에서 나온 말씀처럼 더 빼거나 더 추가할 수 없습니다. 계시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더 추가할 수 없다 이것은 이해하기 쉽죠. 음식이 완성되었는데 "어이 후추 더 치지마 내가 맛보니까 소금 더 치지마 맛이 됐어. 완전하잖아요. 그런데 애들이 소금 막 치면 안 되잖아요. 그 작품이, 그 음식이 안 되잖아요. "야야 음식 완전했어 그러니까 후추나 소금 더 치지마 됐어." 이것은 이해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거기서 잡채할 때 시금치를 뽑아 낸다 그것은 뭐에 대한 훼손입니까? 완전한 잡채에 대한 훼손이 되겠죠. 보통 사람들은 열 두 사도가 했던 계시의 완전성에 대해서는 더 보태지 못한다는 것은 이해되는데 빼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통사람들은 잘 이해를 못해요. 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면 성경 가운데서 일부만 전해도 된다는 것은 허용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 전할 때, 아 이것은 사람 구미에 맞는 것, 입맛에 맞는 것, 골라 골라서 집어넣자 이것은 안 된다는 거예요. 아 사람들한테 이 이야기하면 교회에 잘 안 나올텐데, 아 이것은 안 전해야 돼 이럴 자격은 우리한테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은 성경 66권 계시가 종결되었다는 것은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더 추가할 수도 없고 기억할 것은 얼마를 삭제하거나 못 본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 66권이 완전한데 너무 두껍잖아요. 두꺼우니까 이 완전한 것을 66권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가 종결된 원천을, 엑기스를 소급해서 보면 바로 방금 읽었던 5장 30절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이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66권인데 우리가 더해서도 빼서도 안 된다는 것은 우리가 이해가 되죠. 그러면 더해서도 빼서도 안된다는 것을 창세기 1장부터 전부 다 실천해야 하느냐 그 문제에 대해서는 66권이 나오게 된, 배태하게 된 엑기스를 소급해서 보면 사도가 이야기 한 사도행전 5장 30절의 내용이 여기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모아보면 되죠. 그러면 이 뜻이 무슨 뜻이냐면 예를 들어 눈을 감고 빌립보서를 펼쳤다 빌립보서 어느 구절을 해석할 때 반드시 방금 사도가 이야기한 내용이 담겨있어야 되죠. 

그런데 베드로 전서를 이야기하면서 야고보서를 이야기하면서 또 로마서를 이야기하면서 아 로마서는 이런 이야기니까 따로 남겨두고 야고보서는 이렇게 이야기 하니까 그것도 따로 처리해 놓고 베드로전서는 이렇게 이야기 하니까 따로 처리해 놓고 우리는 세 가지를 다 이야기해야 된다 이래되도 안돼요. 사도들간에 의견 충돌이 있는 것처럼 오해될 수가 있잖아요. 사도 바울하고 베드로하고 멱살잡고 싸울수가 있다 이 말이죠. 야고보하고 사도바울하고 싸우면 안 되잖아요. 사도바울하고 사도 요한하고 내용이 모순되면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면 자기 취향에 맞는 것을 골라갈 수 있어요. 

쉽게 말해서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나라가 여기 있다면 어떤 사람은 베드로를 통해서 어떤 사람은 요한을 통해서 어떤 사람은 야고보를 통해서 모세는 구약이니까 이것은 신약에서 직결됐으니까 밑에 있으니까 빼고 이런 식으로 자기 구미에 맞는 사람을 해가지고 올라가고 만약에 바울 같으면 나는 요한 몰라도 돼 나는 야고보 몰라도 돼 나는 베드로 몰라도 돼 나는 이것만 고수하면 할거야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같은 66권의 완전성이니까 뺄수가 없잖아요. 뺄수가 없다면 야고보 이야기 하는 것과 바울 이야기 하는 것과 전체가 모순점이 없이 같은 한 목소리를 낸다고 봐야 합니다. 

이유가 뭐냐하면 사도 밑에 누가 있습니까? 사도에게 계시를 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12제자에게 준 계시가  66권을 해석하기 때문에 사도들의 의견이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나중에 어디서 모이느냐면 예수님 한 분에게 나왔다는 점에서는 동일하게 베드로를 하든지 로마서를 하든지 빌립보서를 하든지 어디를 하든지 나와야 합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계시라는 것은 결국은 중간단계 다 빼버리면 뭐가 통합니까? 예수님 이야기잖아요. 예수님께서 사도에게 계시를 주었기 때문에. 어떤 분은 이예수님 말고 뒤에 또 하나님 계시잖아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나오지만 이 하나님은 인간이 알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에게 가리워져서 알 수 없어요.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니까 신이 만들었을거 아니냐 하지만 이 신은 우상입니다. 왜냐하면 신이 예수님을 살해했기 때문에. 조금 있으면 내용에 나옵니다. 

그래서 인간이 알고 있는 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신학자는 말하기를 인간이 펼쳐진, 주름진 인간을 쭉쭉 펼쳐보면 무한대로 펼쳐보면 그게 신에게 다리로 건너뛰는, 인간안에 이미 신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걸 펼쳐내기만 하면 그게 곧장 신이 된다 라고 생각하는, 인간과 신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을 발굴해 내면 신에게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그것을 신학적으로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골로새서 1장 15절.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 형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거론했던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이 누구를 살해 했느냐면 예수님을 살해 했습니다. 즉 자기들이 생각했던 신학체계에 예수님이 안에 들어 오지를 않습니다. 소통이 안됩니다. 도저히 공통점이 없습니다. 둘 중에 누가 죽어야 합니다. 바리새인 자기들이 스스로 이단이라고 간주하든지 아니면 예수님이 이단이든지. 

그런데 요한복은7장에 보면 예수님을 이단이라고 했거든요. 자기 본성을 드러낸거죠. 당신은 이단이다. 이유가 뭐냐 모세 율법을 제대로 해석 못하기 때문에 당신 이단이다. 그러면 바리새인 유대인은 뭐냐 우리는 모세 율법을 바로 해석하기 때문에 우린 이단 아니다 우리가 정통이고 우리가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당신은 이유도 없이 예수와 그 무리들은 이단 맞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물을수도 있고 그들이 이야기할수도 있죠.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었죠. 

그러면 너희들이 모세 율법을 해석한다고? 해석하지 그러면 내가 물어 볼께. 다윗의 자손이 어떻게 다윗의 주가 되느냐 한 번 답변해 봐라. 문제를 내었어요. 그들은 해석이 계속해서 아브라함부터 누적된 신학체계가 있어서 우리는 빈틈이 없다는 거죠. 완벽에 완벽을 추구했기 때문에 항상 시행착오를 하면서 오류 할 수 있는 여지를 다 삭제한 거예요. 그야말로 진리 깔끔 덩어리, 진리 덩어리. 이것은 인간으로서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체계를 갖춘 거예요. 유대인들이. 

그 체제를 갖추었는데 그 체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시비를 걸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물어 볼께. 어떻게 다윗의 주가 다윗의 자손으로 올 수 있느냐 어떻게 선배가 후배를 구원하는 것은 이해되는데 후배가 선배를 구원할 수 있느냐 답변해 봐라 바리새인들은 설명 못했습니다. 지금 오늘날도 설명 못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역사라는 것은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흘러간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예수님한테는 과거에서 현재로 미래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시간은 뿌려주는 시간이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대로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 있을 거니까. 

수평적 시간에서는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흘러가잖아요. 예수님께서는 층을 달리 해요. 위에 계시니까. 과거에 내가 있게 했고 현재도 내가 있게 만들었고 미래도 내가 있게 할 것이다 라는 것이죠. 그래서 미래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있다는 것을 체험하기 위해 있어야 하고 우리는 예수님 십자가 졌다는 것을 증거 하라고 있는 것이고 과거의 사람은 예수님께서 죄를 죽으시고 고난 받으시고 영광 받아야 한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베드로전서 1장 10~11절에 나오죠. 

옛날의 선지자 속에 예수님의 영이 계시는데 그들이 할 일이 뭐냐면 장차 올 메시야는 고난 뒤에 영광을 받는다는 것을 그 사실을 알려 주려고 미리 왔다고 베드로가 이야기 해 주죠.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그렇게 보면 모든 성경 해석이 예수님에게 굳혀져 버리면 뭐가 빠져 버려요? 결국은 뭐가 빠진 거예요? 모든 사도들이 이야기 한, 진짜 예수님께 계시받은 사도들이 이야기한 모든 의인들의 소실점은 예수님인데 예수님의 소식을 전한다는 말은 결국은 뭐가 빠진다는 것입니까? 제가 어려운 문제를 내었죠. 인간의 행함은 있으나마나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 해석에서 사도 바울의 권면이나 훈계나 모든 구약의 법이나 모든 율법이나 야고보서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요한계시록이나 어떤 구절들이든 간에 어떤 명령법, 어떤 서술법이라도 훈계라도 해석할 때는 뭐가 빠진다? 인간의 행함은 의미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함이 의미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명령법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이해 못하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했다는 것은 뭘 요구한다고 본 거예요? 그 사람들은. 인간의 행함을 요구해서 행함보고 구원 받을 자냐 안 받을 자냐를 결정하겠다고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너가 이 말씀을 실천에 옮기니까 너는 구원받을 자 맞고 실천에 미달되니까 너는 탈락이야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간다는 말은 이미 바리새인들이 추구하는 그 노선은 뭐로 연결된 노선이냐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실천과 실천이 겹겹이 쌓인 그 노선으로 뭘 뚫는다? 천국의 문을 뚫겠다는 것이 그들의 노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한국 교회도 인간의 행함으로 천국문을 열어 젖히겠다는 것은 다 바리새인 계통입니다. 예를 들어서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내가 문을 두드리노니 내 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너와 함께 먹고 마시겠다 라고 했을 때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아무리 예수님이 문을 두드려도 내 쪽에서 문을 열지 않으면 구원 못 받지 않느냐로 해석이 나온다면 그들의 노선은 예수님을 죽인 바리새인들의 노선이지 사도바울이나 베드로 요한의 노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통 우리 할 말이 성경을 보면  헷갈리잖아요? 그렇게 하는데 사람들이 뭘 모르냐면 바리새인하고 우리하고 다른 계통이라고 시작을 그렇게 하는 것이 문제예요. 끝까지 예수님이 근접한 사람이 바리새인과 유대인과 사두개인들이거든요.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냐면 바로 우리 심성의 대표자요 대변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가장 근접해서 만난 겁니다. 베드로도 아니예요. 베드로도 세 번 부인하고 떠났잖아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왜 부인했습니까? 자기가 할 도리가 그것밖에 안 됩니다. 3년 동안 교육받아도 결국 인간은 자기 노선에서 예수님 노선으로 건너탈 수 있는, 차를 바꿔탈 수 있는 그런 뜀뛰기 할 수 있는 힘이 베드로에게 안 나옵니다. 베드로에게 안 나오면 우리에게도 안 나오는것 입니다. 요한복음 마지막에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하고 대화할 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씩 했죠. 예수님께서 왜 세 번씩 묻느냐면 사랑, 행함 이것이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 의미가 너가 말한 사랑이라는 의미가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의미하고 노선이 안 맞는 거예요. 안 맞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없으면 구원 못 받기 때문에 그 사랑을 행사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이 사랑해야 하는데 그 사랑의 시발점이 뭐냐하면 예수님이 계속 묻는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자꾸 묻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사랑이 개시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예 베드로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면 묻지도 않죠. 아무개야! 이종분 집사님 같으면 네가 너를 사랑하느냐 라고 주께서 물으신다는 것은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너에게 줄 사랑이 내쪽에서 실시해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남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쪽에서 주체적으로 대화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남같으면 그것은 대화조차도 찾아갈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 찾아갈 이유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실 이유도 없어요. 주님께서 찾아가서 성령을 보내신다는 말은 이미 너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나는 이것 밖에 할 수 없습니다  기껏 해봐야 이것이 한계입니다 라는 한계성을 계속해서 들추어내는 것이 우리 주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그 들추임을 당하는 것이, 발각당하는 것이 그게 우리 할 일의 전부 입니다. 더 할 것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늘 말씀을 봐야하죠. 실천하기 위해서? 아닙니다. 발각당하기 위해서 입니다. 내가 기껏 이것 밖에 못한다는 것을, 결국 이게 내 본색의 전부구나! 이것이 내가 알 수 있는 전부구나! 라는 것을 발각당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만 어디로 소급하느냐면 모든 계시가 "예수님 혼자 다했습니다!" 는 사도 바울에 소급되는, 같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는 베드로처럼 "모든 일은 주께서 혼자 다 하셨습니다!!" 

그러면 제가 문제 던집니다.예수님의 제자가 몇 명이예요? 제아. 12명. 12명 가운데 자기 힘으로 구원받은 사람 누가 있습니까? 없죠. 그러면 12명 왜 끌고 다녔습니까? 교육받아서 구원받는 것 아니잖아요. 교육받아 봐야 베드로 부인하고 다 도망하고 기껏 교육받은 결과가 그거잖아요. 그러면 왜 12제자를 끌고 다녔습니까? 예수님과 12제자 사이가 우리 사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한 수 배웠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은 예수님의 능력만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 사이에 제자가 예수님을 가까이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합니다. 왜냐하면 배반하니까. 이게 항상 여기엔갭이라고 하고 어떤 건너갈 수 없는 균열이 있어요. 균열을 주님께서 조장했지만. 제자들이 예수님께 건너가고자 하지만 건너갈 수 없는 심지어 베드로 같은 경우엔 죽는다고 해도 건너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께 건너갈 수 없는 갭을 어느 쪽에서 메꿉니까? 예수님쪽에서 뭐가 오죠. 뭐가 와서 메우셨죠. 제자들은 오해했어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간격을 줄인다고 생각했습니다. 명령하면 지키면 되고 잔소리하면 들으면 되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고 예수님이 말씀해도 그들은 배반했고 그들은 또 생각하기를 예수님의 기적이 있잖아요.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서 나았고 베드로 같은 사람은 놀랍게도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들은 숱한 기적을 보았습니다. 오병이어 기적뿐 아니라 물고기 입에서 동전 나오죠. 끝까지 고기가 안 잡혔는데...재미있죠. 고기가 안 잡혀야 돼요. 평소에 잘 잡히던 고기가 안 잡히는 것이 기적에 포함이 됩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뭔가 사업이 안되고 일이 안되고 애들 성적이 안나오면 기적이 아닌 줄 알고 있어요. 기적 받은 거예요. 고기 안 잡히도록 해 줘야...여러분 가을철에 귀뚜라미나 풀벌레가 울다가 잠시 멈추어 보세요. 그 정적이 더 고요합니다. 희한해요. 제가 이번 겨울 수련회에 요한복음 강해하면서 주님의 창조는 다시 어두움에 내려 갔다가 올라가야 창조라고요. 그냥 맨탕으로 하면 창조인지 뭔지 몰라요. 저녁이 되고 낮이 되매 하루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창조는 반드시 갭과 균열을 채워넣어야 합니다. 이런 어두움이 있어야 빛의 고마움을 알아요. 

귀뚜라미가 울기 전의 고요함보다 실컷 울다가 멈추는 난 뒤의 그 정적감. 완전히 전에 보다 더 짚은 정적입니다. 고요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기적에 포함되는 거예요. 이게 셋트인데 셋트 알죠? 콜라 햄버거 감자튀김 셋트라고 하잖아요. 고기가 안 잡히는 데 고기가 잡히고 여기서 난 셋트가 뭐냐하면 예상 밖. 철학에서는 이것을 잉여라고 합니다. 잉여, 여분의 것. 내가 예상하지도, 생각지도 못한 것이 그냥 덤탱이로 쏟아지는 것. 

그래서 죄를 씻어 주면 이것은 여분이 아니죠. 죄를 씻어주면 죄 없는 무지한 상태가 되기 때문에 이것은 항상 위험합니다. 왜 또 죄 지으면 
또 묻으니까.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어 준 것은 죄를 씻어 주는 것이 아니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의인으로 만들어 버려요. 제가 강의했잖아요. 바께스에 찌꺼기가 있는데 수도물을 틀어 놓고 잊어 버렸어요. 제가 실제로 경험한 것입니다. 바께스에 물이 삼분의 이쯤 차면 가져올려고 했는데 잊어버렸어요. 그 때 로마서 보고 있었는데. 물넘치는 소리가 나서 가보니까 찌꺼기는 간 곳이 없고 뭐만 넘치더라? 콸콸 물만 넘치는 거예요. 

그 때 안 것이 뭐냐면은 우리가 죄 씻는 정도가 아니고 우리 안에서 뭐가 넘치더라? 의가 넘치는데 이 의는 누구겁니까? 나의 실천력이라든지 나의 행함에서 나오는 의가 아니고 누구 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러 나오는 천국을 가도 천 번을 가도 천 번 다 합격되는 만 번을 가도 만 번 다 합격되는 그야말로 천국에서 언제든지 거룩게 하는 그 거룩과 의가 값없이 흐르고 넘치더란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뭡니까? 용기, 용기는 한자 말이고 우리말로 하면 그릇. 뭘 담아내는 그릇? 넘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그때마다 빨리 빨리 담아내는 그릇입니다. 이것을 엘리야하고 사렙다 과부가 먼저 실습을 했습니다. 참기름 병을 온 동네에서 다 구해다가 받으니까 참기름이 차고 넘쳤죠. 이것을 신약에서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행할 때 물고기 두 마리하고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였을 때 몇 광주리 남았습니까? 12광주리. 문제는 남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잉여입니다. 남았다는 것을 왜 남았다고 강조 하느냐면 우리가 배불리 먹은 것은 결코 인간이 도시락 바쳐서 그 바친 보상으로 우리가 배부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도시락을 들이대 가지고 그래서 우리가 도시락을 나눠 먹으면 되겠다는 그 예상을 뛰어 넘는 그냥 도시락 바친 것하고 관계없이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무상의 잉여. 여분. 차고 넘치는 것.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파악해야 하는데 어제 수요 설교에 보면 그리스도의 윤곽성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윤곽성 이라는 것은 수평이 있는데 벌에 쏘이면 어떻게 되죠? 피부가 부풀어오르죠. 이걸 가지고 융기라고 하죠. 쏟아 오르는 것. 보통 인간들은 돌출 되죠. 돌출은 뾰족하게 올라오는 것. 이게 주체입니다. 

대전시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중요한 것은 내가 중요하죠. 그러니까 대전시에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나도 나한테 내 돌출을 더욱더 돌출 되게 하는 필요한 사건을 골라서 기억해요. 나머지기는 다 삭제해요. 뭐 대전시장 이름이 뭔지 몰라요. 나하고는 관계없어요. 그런데 대전 시장이 우리 삼촌이다 하면 대번 기억해요. 

나와 관련된 것만 골라서 해야 나의 돌출 부분이 점점 더 커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커지다 보니까 지평은 그대로 있죠. 지평은 그대로 있고 내가 돌출 되니까 정신분석학에서 이것을 도착증이라고 합니다. 도착증이라는 것은 성욕에 있어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해야 하고 여자는 남자를 사랑해야 하는데 뭔가 남자의 내복을 사랑한다든지 여자의 속옷을 사랑한다든지 변태죠. 거기에 집착하는 것을 도착이라고 합니다. 

특히 개에게 살도 안 붙은 뼈다귀를 주면 개는 하루종일 그것을 가지고 놀죠. 그것이 도착증입니다. 컴퓨터 게임에 빠지는 것 도착증입니다. 비정상적인 거예요. 도착증이라는 것은 일종의 정신병이거든요. 자기 자신의 내용을 키우는 것이 아니고 껍데기만 바뀌면 내용도 바뀌는 줄 알고 착각하는 거예요. 

사람이 자꾸 뭔가 자기 자아한테 집착하면 이것이 정신병이 되어 도착증이 되어 푹 빠지는 거예요. 기원에 가서 그냥 바둑 두는 것이 아니고 돈 내기 하는 사람이 있어요. 한 판에 만원씩. 아침에 출근해야 되는데 밤새도록 그 짓하고 있어요. 화투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착증입니다. 변태죠. 세상에 다 잘라 버리고 자기 밖에 모르는. 세상의 지평선은 가만히 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벌에 쏘여 버리면 자기는 여기 있는데 주변의 수평선이 올라오죠. 수평선이 올라오면 나만의 세계에서 나는 어떤 구조에 속했다는 것을 알게 되죠. 

만약에 대학 시험을 쳤는데 자기 실력은 나는 서울대학 들어간다고 서울대학을 쳤는데 서울대학에서 떨어졌어요. 갑자기 그 다음부터 서울 대학에 떨어지기 전 까지는 수평선에 있었는데 서울 대학에서 떨어지고 난 뒤에는 서울대학이 뭡니까? 하나의 구조가 되죠. 하나의 융기가 되어 떠오르죠."저 놈의 대학은 무슨 대학인데 나를 떨어뜨렸어"  이것이 떠오른다고요. 

그러면 이 구조는 커 보이고 나는 외소하죠. 작아 보이죠. 이 서울대학에 들어갈려면 이 구조가 요구하는 내용을 쳐야되죠. 이것이 인간은 주체가 주체라는 것이 없고 이 구조가 인간의 주체를 만든다는 들뢰즈의 철학입니다. 한석봉이 엄마하고 뭐했어요? 불 꺼놓고 시합을 했잖아요. 한석봉이는 글씨를 썼고 엄마는 떡을 썰었는데 저는 그 이야기를 수 백 번 들어도 이것은 불공평한 게임이라고 본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가 유리해요. 진짜 붙을려면 엄마도 글씨를 써야 합니다. 

또 불공평한 것을 이야기 했죠. 아이티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왜 갇힌 사람이 영웅입니까? 갇힌게 왜 영웅입니까? 그 사람은 갇혀 있을 뿐인데 누가 영웅이예요? 건져 준 사람이 영웅이죠. 아직도 왜 갇혀 있는 사람이 영웅이 되는지를 이해가 안돼. 세상은 정말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아요. 

이걸 대전 시내에서 나만이 중요하다고 했다가 뭔가 대전시에 민원을 했는데 민원 처리가 제대로 안될 때 비로서 대전시가 내 맘대로 안 된다는 것을 느끼죠. 대전시라는 구조가 나한테 강력한 라이벌이 되어서 커지고 나는 갑자기 돌출되다가 음메 기죽어 하고 갑자기 왜소해지죠. 그걸 가지고 쉬운말로 사람됐다고 하죠. 세상에 지 밖에 모르다가 사회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뭘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없고 뭘 요구하는 대로 내가 살아줘야 비로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구조가 만약 여기 살다가 이민가면 무슨 구조에 맞추어야 합니까? 미국 구조에. 독일가면 독일 구조에. 그러면 대전서 살았던 구조는 교체되어야 합니다. 결국 인간은 끝까지 이렇게 아부하다가 볼일 다 보는 것입니다. 

주변과 환경에 비비면서 쏘리쏘리 아부하다가 밥 먹고 살고 아부 안 하면 밥 못 먹고 사니까. 왜냐하면 돈이 어디서 나옵니까? 주변에서 나오니까. 아부 안 할려면 어디 가야 됩니까? 자살하면 되죠. 아니면 누구한테 죽임을 당하든지 하면 되죠. 적어도 살려면 쏘리쏘리 해가지고 비벼 가지고 이 구조에 합당한 인간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점차점차 뭐가 없어집니까? 구조는 있는데 나는 누구인지 모르는데 나는 직업이 무엇이며 어느 나라 소속이며 내 회사는 뭐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말 못해요. 자꾸 자기가 속한 구조만 이야기하는 거예요. 저 의사입니다. 저 우리 집안은 보통 집안이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는 변호사입니다. 당신이 누구야? 저는 목사입니다. 목사 떼버리고 당신이 누구냐는 말입니다. 당신이 누구야? 모르죠. 목사 되니까 목사처럼 행동하고 집사 되니까 집사처럼 행동하는 것이죠. 

구조가 나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면 이거예요. 현재 너는 이 구조의 사람이라는 거예요. 구조로 구원 받은데 우리는 자꾸 성경보고 누가 구원 받으려고 합니까? 내가 구원 받으려고 하니까 맨날 묻는게 목사님 내가 뭐하면 구원 받습니까? 뭘 믿으면 구원 받습니까? 맨날 천날 만날 교회 와서 묻는것이 기도 얼마하면 응답 받습니까? 전도 몇 명 하면 전도한 댓가로 내 애가 좋은 대학 가겠습니까? 십일조, 헌금을 몇 퍼센트 하면 그 덕분에 내 사업이 잘 되겠습니까? 

성경은 니가 무엇을 할 필요도 없이 구조가 드러나면 너는 그것에 실려 가지고 너는 그릇이니까 니 안에 담긴 새로운 구조, 지평. 이 지평이 복음적인 지평. 떠오르는 천국이라고 하죠. 해가 떠오르듯이, 해가 떠오르면 해는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으니까 우리는 기껏 형광등 만들죠. 애야 불 켜라 하죠. 아침이 되면 불 꺼야 합니다. 해가 떠오르기 때문에. 떠오르는 천국의 빛이 오게 되면 우리는 졸지에 여기가 어두움이며 우리는 빛이 없이는 살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래서 복음의 빛이 없으면 어느 구조에 있느냐 하면, 이것은 언젠가 누가 3 달에 자본주의에 대해서 한 번 강의하자고 하는데 자본주의는 한 자로 뭐라고 합니까? 돈이죠.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전부거든요. 병원에 갈려고 해도 돈이잖아요. 돈이 없으면 병을 못 고치니까. 사람을 돈으로 살렸다 죽였다 하니까. 돈이 지배하고 돈 없어 보면 돈 없는 설움을 알잖아요. 돈이 지배하는 세상. 모든 활동이 돈 벌기와 관련된 활동을 하는데 여기 햇빛이 떠올라 버리면 이 햇빛은 돈하고 상관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20장인가 거기 보면 포도원 비유가 나와요. 아침에 10시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3시에 온 사람. 5시에 온 사람. 분명히 앞에 구조 설정은 포도원과 일꾼이죠. 포도원 주인과 일꾼 사이는 무슨 관계입니까? 하나는 사용자요 하나는 노동자죠. 사용자, 노동자 관계는 무슨 관계입니까? 임금, 돈의 관계죠. 

분명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국을 이야기하면서 뭘 이야기한다? 천국의 구조를 이야기하면서 돈으로 매개되는, 돈으로 연결된 그들이 익히 아는 돈과 돈으로 엮여진 인간 관계를 설명하는데 나중에 보니까 돈으로 설명하면서 돈의 의미도 날라가 버리죠. 왜? 마지막에 온 사람부터 품삯을 주니까. 처음에 온 사람은 돈에 관한 것인 줄 알았어요. 나중에 온 사람은 한 시간 일하고 하루 온 종일 품삯을 다 받으니까. 나중에 온 사람은 아 이게 돈이 아니고 돈으로 설명하면서 돈이 아닌 쪽으로 설명되는 천국의 효과. 천국의 원리원칙을 설명한 것을 알죠. 

화는 누가 냅니까? 나중에 온 사람은 화를 낼리가 없어요. 회개했기 때문에. 처음에 온 사람이 화를 내죠. 그것은 처음부터 자기 기본 선입감이 잘못된 거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처음부터 우리 계약했잖아. 한 데나리온 한다고. 그러니까 아침 열 시에 온 사람만 있으면 문제가 없어요. 문제는 제일 늦게 온 사람 때문에 먼저 온 사람의 지평, 자기 도착증, 자기 주체가 잘못된 것으로 뭉쳐진 주체라는 것. 천국 갈 수 없는 주체라는 것이 발각 당하죠. 
그래서 그 말씀 뒤에 보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그래서 나중에 온 사람은 결국 무엇을 위해서 나중에 왔습니까? 먼저 된 사람의 사고방식을 뜯어고치기 위해서 주께서 일부러 나중에 보내죠. 그래서 나중에 온 사람은 구원받기 위해서 온 사람이 아니고 나중에 온 사람은 먼저 된 사람이 잘못 되었는가를 인간대 인간 관계에서 너는 잘못이고 너는 천국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나중에 주께서 등장인물로 시나리오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누가 오든 그 사람은 먼저 된 사람들을 지적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한 달 전에 누가 왔다면 그 사람은 먼저 된 자들을 지적하기 위해서 주께서 보낸 거예요. 그런데 주께서 보낸 그 사람은 몇 개월 지나면 또 먼저 된 자가 되겠죠. 목사는 누구한테 지적 받아야 하느냐면 부교역자한테 지적 받아야 합니다. 목사보다 부교역자가 나중에 오기 때문에. 

그런데 한국 교회는 어떻게 됩니까? 거꾸로 되어 있죠. 자기 부하 직원인줄 알고 있죠. 니, 내 아니면 이 바닥에서 못 먹고 살어. 내 말 들어야 다른데 스카웃 된다. 그게 뭐냐면 바로 이 구조, 기존의 이 구조에 쏘리쏘리 하면서 빌어야 그냥 먹지 못하고 항상 빌어야 아 그 목사 참 순하더라 하면서 스카웃 하죠. 

문현교회 이태현 목사님이 10년 넘게 복음을 전했는데 다른 목사 스카웃했는데 완전히 이단이데요. 설교 한 5분 들었는데 얼마나 화가 나는지 더 이상은 들을수가 없더라구요. 왜 복음을 안 전합니까? 왜 교회 키울라고 하느냐 이 말입니다. 왜 교회가 교회가 아닌데 절인데 왜 이것 키울라고 하느냐 말입니다. 주지 못되서 난리 났습니다. 

다시 봅시다. 어두움이 어디 포함되었느냐면 기적에 포함됩니다. 어두움과 빛이 세트가 이루어져요. 어두움이 없으면 빛이 의미가 없어요. 이게 요한복음 1장이었어요. 빛이라는 것은 반드시 앞에 어두움을 깔고 들어옵니다. 어두움을 깔고 들어와야 이 빛이 말로 해서도 안 되고 잔소리해서도 안 되고 물 위를 걷는 기적을 해서도 안 되고 이것이 산상 설교 교훈을 해서도 안 되고 이 빛이라는 것은 어둠 취급받아서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 빛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의 핵심입니다. 빛인데 무슨 대우를 받았다고요? 천하에 어두움으로 대우받는 거예요. 어두움이 자칭 뭘로 행세합니까? 어두움이 빛으로 행세하니까 진짜 빛은 졸지에 이단으로 어두움으로 취급받는 거예요. 어두움이 빛으로 행세해야만 합니다. 어두움이 빛으로 행세할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빛으로 행세하는 어두움을 기다려서 어두움한테 매 맞는 식으로 빛이 등장해야 되는 겁니다. 

아내가 순교할려면 남편이 억수로 술을 먹고 왔을 때 남편한테 잔소리해야 합니다. 남편이 술 안 먹었을 때는 잔소리하면 안돼요. 왜냐? 점잖기 때문에 참아 버려요. 그런데 남편이 엄청나게 술 먹고 왔을 때 잔소리 해줘야 아내가 멍이 듭니다. 얻어맞아 가지고.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그래서 성령. 성령 이야기 할 때 많은 사람이 성령이 뜨겁다 방언한다, 뭐한다, 뭐한다 하는데 제가 제시하는 성령은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베드로 전서 4장에 14절에 나오는 복음을 인하여 핍박을 받거든 너는 기뻐하라 하나님의 영이 너 위에 임하느니라.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개인적으로 순교하라는 것이 아니고 노선문제 입니다

그 노선에는 어떤 특징이 있느냐면 이쪽 노선에 와야 저쪽 노선이 보입니다. 이쪽 노선이 안 오면 저쪽 노선이 안 보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 하나는 하갈의 노선이 있고 하나는 사라의 노선이 있잖아요. 재미있는 것은 아브라함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같은 남편이잖아요. 지금 유대인들이 아브라함 자손들이잖아요.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아브라함 자손에서 두 노선이 나오는데 이  두 노선이 평행선으로 달려서 결코 만나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쪽은 천국으로 한쪽은 지옥으로 끝까지 완전히 갈라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들이 이것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같은 아브라함 언약에서 어떻게 두 언약이 나오냐는 말입니다. 설명해 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설명을 못해요. 

아브라함 언약에서 어떻게 둘이 나오느냐는 말입니다. 아브라함 자식이 하늘에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으면 그냥 숫자만 채우면 되거든요. 아브라함아 너 자식 많다 하면 예하고 끝나면 되거든요. 끝나는 문제인데 하늘에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하면서 노선을 둘로 나누어서 이쪽 노선은 그게 아니다 한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 약속을 우리가 받는다면 우리는 무엇까지 포함해서 받아야 돼요? 

아브라함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에서 노선이, 가닥이 두 가닥이 나오는데 그 가닥 중에서 한쪽 가닥에 서야 구원받는다는 내용까지 포함해서 믿어야 돼요. 유대인들은 이 노선이, 이삭 노선이 인간이 육으로 다른 말로 할례죠. 자기 고추에다 할례를 행하면 자동적으로 이삭 노선이 되는 줄로 아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삭이 몇 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까? 8일만에 할례받은 것을 반복하는 겁니다. 인간이 육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반복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할례가 없는 자는 거룩한 자손이 아니라 했기 때문에 할례를 행하므로서 거룩하게 된다는 것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가 전부다 반복입니다. 예배도 반복 기도도 반복 헌금도 반복 되풀이 되풀이... 이 되풀이가 습관화되고 이 습관화가 하나의 노선을 만들어 내고 그 노선에는 내가 지금까지 십 년 동안 이십 년 동안 교회에 다녀왔다는 그 되풀이 한 행함이 쭉 들어 있겠죠. 

그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의 노선은 되풀이가 가능하지만 이삭 노선은 되풀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 행위 주체가 따로 계시기 때문에. 되풀이가 안 돼요. 되풀이 해봐야 자기 의만 자꾸 쌓을 뿐이지 그게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삭 노선은 항상 뭘 보느냐면 이쪽 육의 노선을 거울같이 봐요. 

거울을 보게 되면 이쪽 노선에 선 사람은 뭐가 보입니까? 거울의 노선에 거울을 보면 자기 옛 사람이 들어 있죠. 거울에 옛 사람은 누구를 비치는 모습니다? 놀랍게도 현재 구원받은 노선에 있는 내 모습을 그대로 반영해서 보여주는 것이 저쪽 노선에 비친 거울상이죠
예를 들어서 이십 년 동안 거울을 한번도 보지 않다가 이십 년 후에 거울을 보면서 "아이구 영감쟁이 하나 허연 늙으니 누구고? " 이십 년 동안 거울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지 모르다가 나중에 보니까 자기 모습을 비춘거죠. "나네 나" 

그러면 그 모습을 봤다는 것은 지금 거울 안에 들어 있다는 말입니까? 거울 밖에 있다는 말입니까? 이미 구원받은 노선에 있기 때문에 지금 내가 교회 다니면서 하는 모든 행위가 내 위로와 내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는 자기 도착증, 자기 주체. 이것 행했으니까 복 달라는 나의 더러운 모습을 비로소 볼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육에 속한 사람은 뭐가 없냐면 앞에 막힌 노선이 없어요. 자기 수평이 전부고 자기가 돌출되기 때문에, 자기가 속한 지평을 모르고 구조를 모르고 대전시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대전시에 사는 내가 중요한 거예요. 대전시에 민원 넣었더가 자기 뜻대로 잘 안돼요. 뜻대로 안 되면 자살하는 거예요. 약 먹고 술 먹고 남편 죽었다고 자살 하는 거예요. 약 먹고 술 먹고 일종의 자살 아닙니까? 그동안 나는 남편 때문에 살았는데 남편 죽어 버렸으니까 무슨 낙으로 사냐 이 말입니다. 

이것은 구조를 몰라요. 자기가 어떤 그릇이 되지를 못해요. 자기 자신이 전부예요. 완전히 도착증이라 변태예요. 변태!! 평생 지 밖에 모르는데 자기 안에 내용물을 채워 주었던 남편이 음주 운전하다가 차 사고로 죽어 버렸으니까. 그것도 음주 운전해서 누가 보상해 주지도 않는, 보상받을 길도 없이 죽어 버렸으니까. 이 못된 놈아 나는 어떻게 살라고 죽느냐 이 말이죠. 뻥하고 구멍이 뚫렸죠. 뻥뚫린 빈자리를 채울 것이 없어요. 골프치고 채울까요? 무엇으로 채울까요?  채우는게 뭐냐? 술과 마약으로 채우는 거예요. 

그러니 결국 이 말은 뭐냐면 사람이 자기가 어떤 구원받은 노선이 있지를 않으면 남편 있어도 뭐였다? 사실은 숨어있는, 은폐된 정신병자예요. 지 밖에 모르는. 남편한테 봉사하지만 결국은 남편 죽고 나서 완전히 미친 여자가 되었다면 남편 있을 때도 사실은 미친 여자였는데 그것은 한 세트가 다 나오니까 자기 안에 채울 내용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결국 그 안에는 주님이 없었던 거예요. 자기 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것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목숨이죠. 그만큼 노선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노선을 본문이 어떻게 설명하는지 다음 시간에 10분 쉬고 해봅시다.
 관리자  (IP:124.♡.86.6) 10-02-25 14:07 
대전100128b행5장30절b계시의종결완전성b 

2010-02-24 17:22:21 녹취 : 이미아        


예, 이것은 보너스인데 지금 요한계시록 3장 20절 이야기했죠. 사람들이 무엇을 모르냐면 이 말씀 구조에 의하면 3장 20절이, 3장 20절하고 나하고 연결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3장 20절은 3장 19절과 창세기 1장과 레위기 12장이나 민수기 4장이나 제가 아무데나 이야기 합니다. 이쪽에 짜여져 있어요. 실이 세로 가로 짜여지듯이 말씀으로 짜여지는 것입니다. 편물 아시죠? 짜는 것. 

요한 계시록 3장 20절만 딱 떼어 가지고 나한테 만나는 것이 아니고 전체 말씀의 구조가 다 달려들어요. 그 대표적인 것이 3장 1절이고 만약에 요한계시록 1장 1절을 한다면 돌출 되는 것이 1장 1절이지만 그 배후에는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22장까지 다 달라드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라는 것이 하나의 구름이라면 나는 이 말씀의 혜택을, 먹구름에서 뭐가 내리죠? 비가 내리죠. 그 말씀이 나한테 떨어지는 거예요.  

"아 이래서 구원받았구나!" 문을 열고 두드리는 것까지 이미 주께서 나한테 들어 오셨을 때 나로 하여금 어떤, 어떤 행동이 아니라 내가 이미 마음을 열 때 그 자체가 말씀에 의하면 주의 말씀을 듣고 여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그릇이니까.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어떤 남편이 교회를 안 나온다 그럴 때 아내가 화가 나가지고 "너 같은 인간은 천국에서 안 받아 줘" 라고 했을 때 그것이 성경에서 보면 복음을 전하는 것이 됩니다. 

교회 오지 마라 했는데 너 같은 인간은 교회 오라고 해도 안 받아 줘 하는 그것이 성경에 보면 이웃을 사랑한 것이 됩니다. 본인은 몰랐어요. 나중에 성경을 보니까 남편의 영혼을 걱정해서 하는 그것도 내 마음이 아니고 성령께서 일으켰는데 그 성령이 일으킨 근거가 뭐냐면 성경 어느 귀절에 보니까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화가 나서 "그런 식으로 하면 교회 오지마 너 같은 인간은 천국 가면 안돼!" 라는 말로 나온 거예요. 그 마음을 누가 주셨는가 하면 성령께서 주신 거예요. 

그럴 때 그 사람은 역시 내가 말씀 지켰어 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주께서 나로 하여금 사용하시는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내 행동이 어느 귀절에 맞는 줄 몰라요. 나중에 보면은 아 그때 그 행동이 여기와 연관되어 있었구나 하는 것을 다 아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요 이것은 십자가 마을에 올려 있는 글인데 어떤 중학생이 십일조를 하는데 그 중학생은 순진해서 잔돈까지 다 십일조를 했는가 봅니다. 

250원 엄마한테 받았으면 25원까지 했는데 목사가 돈 계산이 귀찮아서 잔돈은 빼고 해라 반올림해라 하는 것입니다. 그 학생이 어른이 되어서 그 목사한테 당했던 것이 분통이 터져서 글을 올려 놓았는데 그러면 그 학생이 자기는 분명히 말라기에 나온 대로 하나님을 시험해 봐라 창고에 차고 넘치는지를 이러거든요. 

그런데 저는 이렇게 하거든요. 십일조 안 해봐라 과연 창고가 비는지를. 성경 말씀은 해봐라 창고가 채워지는지가 성립된다면 그 다음에 뭘 안 해봐라 과연 창고가 비는지. 만약 안 해서 창고가 빈다면 하면 그만큼 하면 채운다는 거예요. 

어제 수요 설교 때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내가 헌금을 안 했기 때문에 벌받아서 애가 대학에 떨어졌다면 그 다음에는 애를 대학에 합격시키는 것 쉽다고 했습니다. 뭐만하면 됩니까? 헌금을 하면 되는 거예요. 그처럼 쉬운 것이 어디 있어요? 이 말은 원인과 결과를, 내 행위로 결과를 잡는다면 일단 그것을 잡아 놓고 그 다음에 성경을 찾아갑니다. 내가 이렇게 행동했기 때문에 복을 받았는데 성경 어느 구절에 있는가 하고 나중에 차후적으로 찾죠.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 것이 나중에 엉터리인 것을 언제 아느냐면 분명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안되었을 때 이것은 뭔가 원인 결과의 고리가 연결이 안되었듯이, 줄 잇기 할 때 줄을 잘못 이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잘못 이은 것이 다행스러워요. 잘못 이은 관계에서 그 성경을 다시 보는 것입니다. 보면 안보이던 지층이 보이죠. 삼겹살 아시죠? 삼겹살의 한 겹이 전부가 아니잖아요? 1층 2층 3층을 다 먹어야 하잖아요. 

그처럼 성경에서 표면적 유대인처럼 문자만 보던 층이 날라가 주는 것이 그 문자층에 가리웠던 그동안 못 보던 성경 해석을 보게 하는 길이를 하나님이 허용하셨기 때문에 보게 하는 것입니다. 아 말라기 해석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구나 의와 인과 신을 놓치면 안되는구나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뭐를 행하냐면 의와 인과 신을 보태서 십일조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2겹이라. 

나중에 의와 인과 신과 겸해서 십일조 했을 때 창고가 차지 않을 때 "아! 의와 인과 신과 10퍼센트 계산한 것과 아무 상관이 없구나!" 그것도 날라가 버리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십일조 하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너의 몸 자체가 주님이 하나님께 바치는 하나의 제물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십일조를 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든지 내지 않든지 현재 존재한다는 자체가 주님의 십일조의 하나의 예물로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16절에 나옵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팁을 떼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침대 사고 애들 피아노 렛슨비 내고 이 전부가 어디에 포함됩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제물안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돈 내는 것만 헌금이 아니고 애들 피아노 렛슨비 내는 것도 내 돈 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돈 가지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모시는 것이 의와 인과 신입니다. 내가 십일조라는 것입니다. 십일조 내는 주체가 아니고 주님이 주체고 나는 그냥 어디를 가든 바쳐지는, 주님께 바쳐지는 몸입니다. 

그래서 사나 죽으나 내 것이 내 것이 아니고 누구의 것이다? 주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약에 대한 말씀의 신약의 완성입니다. 주님에 의해서 완성된 거죠. 결국은 가면 갈수록 말씀 해석의 껍데기가 벗겨져서, 상식적인 것에서 벗어나서 도저히 예상 못한 법칙이 계속 나오는 것이 좋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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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100128c행5장30절c계시의종결완전성c 

2010-02-24 17:23:21 이름 : 이미아 


사도행전 5장 봅시다. 30절에 보면 사도가 해석하는 것이 구약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사도가 해석하는 것은 무엇에 바탕을 두었다? 구약에 바탕을 둔 거죠. 구약을 세자로 하면 옛 언약이죠. 그러면 옛 언약의 바탕 위에 뭐가 있느냐면 새 언약이죠. 뒤에다 해석을 붙입시다. 새 언약 해석. 구약은 옛 언약 해석. 옛 언약식으로 해석을 하면 안되고 새 언약식으로 해석을 하자는 이 말입니다. 

그러면 지금 사도가 해석하는 것이, 계시 받은 것이 뭐냐하면 예수님의 행적. 행위라고 하면 행위만 포함되지만 행적이라고 하면 말씀 설교가 다 포함되니까 행적이라고 하죠. 예수님의 모든 것이 포함되니까. 구약적으로는 해석을 해서는 안되고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아는, 말 참 어렵다. 구약적으로 해석을 해서도 안되고 신약적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라는 말을 해서도 안되고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아는 해석을 하라는 이 말입니다. 

학생들 컨닝할 때 "야 정답이 뭐야?" "마이너스 2" 선생님이 "어이 정답이 뭐야?" "마이너스 2입니다." "마이너스 2가 어떻게 해서 나왔어?" 모르죠. 정답만 알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은 이러이러 했었는데 이것은 아니고 이렇게 이렇게 해야 됩니다. 무엇이 아니고 했을 때는 무엇입니다 했을 때는 무엇이 아니고의 이유가 뭐냐하면 인간들이 기껏 해석을 하는 것이 결국 하나님한테 무엇 무엇이 아니고 라는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연속의 기적과 홍해의 기적,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과 말라기 십일조 해석, 예레미야 금식, 구제하라는 이 모든 해석을 인간들이 기껏 해봐야 바리새인들처럼 해석하는 것 밖에 더 있습니까? 누가복음 18장에 나오죠. 구약을 해석할 때 "이레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 했습니다" 라고 하니까 마지막 주심이 뭐라고 했습니까? "너는 지옥가라" 해버렸죠. 

세리는 뭡니까? 주여 감히 얼굴을 못 들고.. 바리새인은 성전에 와서 자기 주체를 이야기하죠. 내가 주체가 되어 이러이러한 행동은 내놓았습니다 할 때 너는 지옥가거라 했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뭘 봅니까? 주체를 보지 않고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가 뭘 알았다? 나는 죄인입니다 알 때 내가 주체가 아니고 나를 정죄하신 분이 주체가 되기 때문에 최종 심판관이신 주가 너는 의인이다 너는 천국 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이 기껏 인간은 뭐뭐 아니고 라는 판정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너는 의인인 줄 알지 기껏 너는 죄인에 불과해 라는 판정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 말이죠. 우리는 아니고에 대해서 이것을 안 할려고 해요. 평소에 우리가 성경 노선에 아니고에 해당되는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마치 남의 일인양 하고 있더라 말입니다. 

구약을 잊지 말고 신약만 쥐고 있으면 안되고 그 차이를, 둘의 차이를 다 가지고 예수님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면 구약은 뭐뭐 아니고고 신약은 뭐뭐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강도가 구원받은 것이 어떻게 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여러분 강도가 체포되기 전까지는 예수님 믿었겠습니까? 안 믿었겠습니까? 안 믿었죠. 체포되기 전까지는 완전 범죄인데요. 

그러면 자기는 뭐하고 있었어요? 체포되기 전까지는 강도짓을 했어요. 체포되고 십자가에 달리고 난 뒤에 아 주님 3년 전에 믿을려고 했습니다 이런 강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3년 전에도 예수님이 계셨지만 자기는 강도짓 하기에 바쁜거예요. 

언제 예수님이 예수님으로 의미있게 다가왔습니까? 자기가 완전히 묶여서 더이상 강도짓을 하지 못할 때 그것도 강제로 십자가에 달려 꼼짝달싹하지 못할 때, 할 짓이 이제 죽는 것 밖에 없을 때 주여 오늘 밤에 주님 나라에 임하시면 저를 생각해 달라 그 때 이야기한 것입니다. 

강도가 보는 해석은 어떤 것이 구박당할 때, 속박당할 때, 뭐가 꼼짝 못할 때 이 해석이 새 언약의 해석으로 나왔습니까? 자기의 모든 행위가 의미 없음을 알 때 비로소 자기가 구원받고 안 받고는 이 개입은 지옥같은 세상에서 천국의 작두는, 이 작두의 능력은 어디서 와야 됩니까? 백퍼센트 누구의 솜씨? 주님의 건져냄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마태복음에서는 낚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너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피라는 책에 보면 나옵니다. 낚는 거예요. 개그콘서트에 보면 낚였어!! 낚였어!! 하잖아요. 낚인 것이 뭐가 좋아요? 자존심도 없지. 하지만 사랑 앞에서는 낚인 것이 최고예요. 

사랑에 낚여서 구원받는 것이 최고지 거기에다 0.0000000......1%라도 이질적인 것이 들어가면 안됩니다. 그것은 낚인 것이 아니고 낚일려고 했는데 약간의 내가 보태서 구원받은 것이 되요. 그것은 거래예요. 흥정입니다. 타협입니다. 이런 구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30절에 너희가 죽인 예수를 그 앞에 무슨 단어가 나옵니까? 나무죠. 나무!! 이것이 어디에서 중요하냐면 갈라디아서 3장에서 중요합니다. 여기에 보면 나무에 달렸다 말입니다. 예수님이 매미입니까? 예수님이 왜 나무에 올라갔습니까? 예수님이 올라가신 것이 아니고 누가 올려 보냈어요? 하나님이 올려 보내셨고 사람들을 통해서 올려 보냈죠. 

  

제가 지금 해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이 구약을 해석하고 또 누가 해석합니까? 예수님이 구약을 해석하시죠. 그런데 예수님이 구약을 해석하시면서 그냥 해석하지 않으시고 어디에 올라가셔서 해석을 하십니까? 사람들에게 타살을 당해요. 사람들에게 타살 당한 채, 나무에 올라가서 매달린 채 구약을 해석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안 달려 본 사람은 구약을 해석하지 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니들이 십자가 맛을...옆에 달린 사람이 누구입니까? 강도잖아요. 강도는 해석을 하는 거예요. 당신이 구세주 맞습니다. 당신이 오실 메시야 맞습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아무리 행해도 다윗이 원했던 것은, 주께서 원하신 제사는 바치는 것이 아니고 상한 심령을 그냥 매다는 것입니다. 주여 저 상한 심령입니다. 신종플루로 다 썩었습니다. 

완전히 더 이상 내놓을 것 없습니다. 죄만 지었습니다 하고 매달리는 그 때를 주께서는 찬스하고 낚을 때 그렇게 낚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안 죽고 있습니까? 아직까지 계속해서 더 내놓아야 할 죄가 있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덜 상했어요. 국산이라 덜 상했어 중국산 되어야 해. 완전히 천국에서 제품화 될 수 없는, 천국에서 안 받아 줄 정도로 썩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천국에 들어가야지 거기에 약 2%정도 내 행함, 개척교회 했습니다 몇 명을 전도했습니다 강의하고 돌아 다녔습니다 헌금을 얼마 했습니다 라는 것이 아무 소용없습니다. 완전히 그것이 썩어야 합니다. 내가 이 교회에 헌금했다는 것이 썩기 위해서는 좀 더 살아야 합니다. 살면 맛이 나는 것을 가지고 홍어 삭힌 것이라 합니다. 냄새 죽입니다. 홍어 삭힌 것보다 더 삭혀야 합니다. 안에 뜯어보면 죄인 중에 괴수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구원받은 사람은 노선이 한 개가 아니고 두 개의 노선이 있는데 이미 우리는 구원받은 노선에 있으면서 맞은편에 뭐가 보입니까? 거울이 보이는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뭐가 비춥니까? 강도 같은 내 모습이 비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뭐가 즐겁다? 주님의 은혜로 구원된 것에 감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여 제가 교회 다니면서 장로 되어서 집사 되어서 얼마나 으시대었는지 이것을 어느 노선에서 봅니까? 이렇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았기에 저쪽 노선, 내 치졸한 내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상한 심령이면서 프랑스 화장품으로 화장질 해대고 파운데이션 바르고 눈썹을 그리는 내 모습을. 안에는 죄인 중에 괴수이면서도 종교적인 행위로서 자기 모습을 꾸미면서 성화 되었다 이러면서 내신성적 좋게 받을려고 하는 위선적인 내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나무 이야기 해 봅시다. 

갈라디아서 3장을 같이 한 번 봅시다. 3장 13절 누가 읽어보세요.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        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신명기21장 23절에 보면 나무아래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는 이 대목을 유대인들은 끌어 올 생각을 안 하죠. 왜냐하면 자기들은 축복 받은 사람들이 때문에. 이것은 누구한테 해당되는 것이냐면 하나님 안 믿는 사람, 할례 안 받은 사람, 안식일 안 지키는 사람, 십일조 안 하는 사람, 율법을 안 지키는 사람에게만 나무에 달리게 하라고 하나님이 누구한테 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시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무에 매달은 것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서 완벽한 신앙에 근거해서 저런 인간은 저주받아 마땅하다고 해서 나무에 매달은 거예요. 

거기에 동의한 사람이 누구냐? 사도 바울이 사도 되기 전에 사울이었던 그 때 동의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를 죽일 때 자기가 옷을 받고 거기에 찬동했죠. 이랬던 사울이 나무에 그냥 달리지 않고 주께서 귀신되서 날라간 것이 아니고 나무에 달렸다가 백퍼센트 하나님께 버림 받고 마귀중에 왕초다 악마다 라고 해서 바알세불에 속했다 해서 죽였던 그것을 경유해서, 경과를 통해서 그 분을 사흘만에 하나님께서 살리셔서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셨다면 결국은 그것을 거쳤다는 것은 누가 잘못되었단 말입니까? 

그것은 그 예수님을 죽이게 했던 동원된 인간의 철학과 모든 신학과 모든 교회 조직과 목사라는 장로라는 제도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뭉쳐서 하나님을 욕되게 한 악마의 수작인 것입니다. 그게 드러난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에게 기억할 것은 하나만 기억하면 됩니다. 구원 못 받는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자진해서 죽으셨다가 자진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부활하셔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므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일어났던 성부와 성자에게 일어났던 그 사항을 이제는 너도 알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너가 모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과 무관하게 되면 너는 딴 동네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와서 우리를 그 세계에 포함시킬 때 그것을 로마서 6장에서 세례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연합이라고 합니다. 연합이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엔진은 예수님이고 우리는 뒷좌석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차에 타고 있죠. 그러나 움직이는 것은 누가 움직입니까? 예수님께서 엔진을 가동시켜서 움직이죠. 

가동시킨다는 말은 우리는 말씀을 못 지킨다는 것은 물론이고 해석조차 할 자격도 못되죠. 해봤자 십자가에 예수님을 또 죽이는 짓이 되니까. 그 정도로 우리는 아담에 속한 인간들은 어떤 해석을 하든 간에 이미 선악과 따먹고 나 밖에 모르는 죄 지을 수밖에 없는 자의 해석만 나오니까 그 해석은 전부 다 죄를 유발시키고 발산시키는 해석밖에 안 나오죠. 

그 죄의 발산에 누가 넘어졌느냐면 예수님마저 죽어버렸단 말이죠. 그래서 이사야 53장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제 갈 길로 갔거늘. 그러면 구원은 끝났잖아요? 우리하고 거래 끝났어요. 우리는 제 갈길 가버렸어요. 그런데 우리하고 계약한 것이 아니고 우리는 말씀을 줘도 중얼거리지만 계약은 따로 있어요. 성부께서 성자하고 계약해서 그 무리의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므로 말미암아 채찍에 맞음으로 낫기는 누가 나아요? 우리가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그것을 빌립 집사는 성령을 받아서 알았고 에디오피아 내시는 몰랐던 거예요. 이사야를 펴놓고도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성령께서 빌립을 파송 시켜서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나서 마침 이사야서 53장을 보는데 이것 해석해 봐라 했을 때 이사야 53장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부터 전부다 십자가 중심으로 해서 하나의 직물처럼 엮어요. 모든 말씀이 말씀 자체에서 조치되어 예수님의 십자가를 교차하면서 그것이 자기에게 오면 십자가 하나로 요약되어서 오죠. 

그래서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의 죽으심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사람의 지혜는 오히려 십자가를 모독하게 만든다. 사람의 지혜는 하나님에게 어리석고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에게 어리석은데 그들이 어리석지 않았다면 십자가라는 사건도 발생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따라서 그들이 모르는 십자가인데 어떻게 아느냐? 모르는 십자가는 하나님의 비밀에 속하는데 그 비밀에 속한 것은 오직 성령이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파악하는 오직 성령께서 너희에게 은혜로 주실 경우에만 성령 안에서만 너희들은 십자가를 안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십자가와 바로 만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때부터는 영의 사람 따로 있고 육의 사람 따로 생기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사도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나무는 무엇의 표상입니까? 나무에 올라갔다는 말은 저주받았다. 이것은 신명기 말씀 그대로 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은 자라"(신21:23).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저주받은 쪽에다 세웠 버렸어요. 구약에 보면 산이 두 개 있죠. 하나는 그리심산과 하나는 에발산이죠. 그리심 산은 축복산으로 알려져 있고 에발산은 저주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 하나님의 법궤는 두 개가 아니고 하나밖에 없는데 하나밖에 없는 법궤가 축복산에 있겠습니까? 저주산에 있겠습니까? 놀랍게도 이것은 저주산에 법궤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축복산은 축복을 받는 산이 아니고 축복을 해주어야 할 산이고 저주산은 법궤가 없다는 것 때문에 제단이 없기 때문에 십자가가 없기 때문에 저주를 받아라 저주를 퍼붓는 산이 저주산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어떤 모르는 사람들은 목사님은 상당히 부정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부정적 사고 방식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안 보내고 낚시대를 사용합니다. "너 올라와" 낚시대에 부정적인 것이 있겠습니까? 아주 긍정적이죠. 낚였어 낚였어 하는데. 우리는 낚이기는 낚였는데 십자가에 낚이죠. 십자가에 낚여야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라는 그런 철학적인 것에 낚이면 안 됩니다. 신학에 낚이면 구원 못 받습니다. 예수님의 피에 낚여야 되요. 신학은 머리에 들어가지만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온 몸에 흐르고 있어요. 주님께 바친 제물이예요. 하나의 용기 하나의 그릇이 되요. 온 몸에 다 흐르니까. 우리가 사는 이유는 아직까지 숙성된 우리의 죄가 아직도 멀었어요. 죄 더 질라면 세월이 더 필요하기 때문에 아직 안 죽는 거예요.  

어떤 분이 며칠 전에 저한테 전화왔습니다. "목사님 죽고 싶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죠. "또 직업이 없구나" 바빠보세요. 사람은 산다는 것은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타인이 나를 호출할 때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내가 사는 거예요. "엄마 밥줘" 라는 그 소리를 듣고 엄마는 죽을수가 없어요. 지금 엄마가 약틀어 먹고 있는 순간에 자식이 "엄마 밥줘" 하는 것입니다. 

집사님하고 목사님하고 왜 우리는 죽어서는 안되냐면 목사님 보고 집사님 보고 복음을 듣고자 하는 사람이 있어요. 물론 들을 사람이 없슴니다만은. "복음이 무엇입니까? 한 수 가르쳐 주세요" 하는 사람은 없는데 아이구 교회 왜 이모양인지 왜 이런지 몰라 라는 말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라는 기회로 들으시면 됩니다. 또는 교회 와서 "밥이 왜 이렇게 설었지?" 라는 그런 소리, 그것을 찬스로 잡아 또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복음 전하는 것은 두 가지죠. 하나는 타인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고 또 하나는 나 자신에게는 아직 죄가, 주께서 죽으셔야 될 이유가 덜 성숙해서 입니다. 나중에 치매 걸려서 "예수 누군데?" 이렇게 고함 지르고 어느 유명한 목사님처럼 "예수는 사탄이야!!" 그런 목사가 있답니다. 나는 누구 한경직 목사라고 이야기는 안 합니다만. 여기 보면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행5:31) 

그러니까 그들의 노선이 다른 겁니다. 베드로가 알고 있는 노선하고 현재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노선하고 애초부터 노선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달이 뜨면 대구의 높은 산에서 보는 달이나 대전에서 보는 달이나 그 달이 그 달이예요. 그래서 불교나 도교나 유교에서는 이 세상과 초월을 연속성으로 봅니다. 불연속성, 단절로 보지를 않아요. 불교의 유명한 도사들 있잖아요. 선불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하는 그 사람들이 진리를 이야기를 할 때 꼭 공통점을 가지고 이야기해요. 서로 단절이 없다는 거예요. 푹 꺼진데가 없이 그냥 계속 연결하면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이것을 성화론 이라고 합니다. 성화론은 있을 수 없는데 아주 무서운 것이 등장했습니다. 예수 믿는 것 은혜로 믿고 그 다음부터 영광 돌리는 것은 착해서 되는데 자꾸 내신성적, 마일리지 쌓으시면 하늘에 도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뭐와 같으냐면 성화론 주장해 버리면 마치 이와 같습니다. 신이 여기 있다면 불교에서 올라가나 힌두교에서 올라가나 이슬람교에서 올라가나 기독교에서 올라가나 결국은 다 한자리에서 만난다 이렇게 되어 버립니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존재론적 신이라고 합니다. 존재론적 신이라는 것은 뭐라고 합니까? 인간과 존재론적 신 사이에는, 신이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사이에는 존재에 연결되었다는 것을 뭐라고 합니까? 그것을 유비라고 합니다. 신학 용어 입니다. 

유사성, 비슷하지는 않지만 공통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원본이 있고 우리는 복제라는 것입니다. 복제에 복제가 되었을 때는 현대에서는 유사성이라는 말도 쓰고 상사성이라고도 씁니다. 상사성이 되버리면 이미 원본과 상관이 없는 거예요. 인간이 인간을 낳았잖아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것이 아니고 자기 조상의 DNA를 물려 받았잖아요. 

하나님이 형상으로 아담을 만들어 놓고 그 다음부터는 단절되어 버리고 아담의 자손은 누구를 닮았습니까? 아담을 닮은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아담의 형상을 닮았다고 합니다. 아담의 형상을 닮았으니까 그때부터 아담이 죽은 것처럼, 상사성 그대로 가니까 아담이 죽었으니까 계속 죽는 거예요. 그 다양성을 하나로 묶어 낸 것을 가지고 로마서 5장에서는 죄가 아담의 세계를 지배했기 때문에 죄가 들어오면서 죽음이, 죄가 왕노릇 하는 것 동시에 죽음이 왕노릇한다 해서 층을 나눴죠. 

우리 위층은 죄가 있고 아래층은 죄에 저촉받는 죄인들이 있고 그래서 인간의 다양성은 아무리 인간이 다양해도 결국 죽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니까 자기들은 같은 인간인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가시냐면 죽음의 자리, 나무에 달렸습니다. 유대인들은 나무에 달리기 전까지 같은 죄인 줄 알았습니다. 거기서 노선이 갈라졌습니다. 한쪽은 그냥 죽고 한쪽은 사흘만에 부활하고 노선이 여기서 갈라졌죠

이 노선 갈라지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 자식의 운명이 서로 약속과 비약속으로 갈라지는 것으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갈라짐의 출발점이고 원천지가 되기 때문에 이것을 두 자로 복음, 기쁜 소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이 복음을 거스릴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은 십자가말고 딴데서 오지를 않아요. 성령은 복음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항상 성령이 오게 되면 이 사람들을 어디로 데리고 가느냐면 프리즘, 빛을 8가지로 갈라지게도 하고 빛을 돋보기처럼 하나로 모으기도 하죠. 빛을 모으듯이 십자가에 모아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축복이라는 것이, 구약의 축복을 A라고 저주를 B라고 한다면 구약의 축복과 신약의 저주가 이렇게 있다면 십자가를 통과하면서 이게 키아니즘(chiasm), 교차적 구조라고 하는데 A는, 구약의 저주는 세상 축복으로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죄인으로, 저주받는 분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통과하면서 저주는 곧 축복이요, 축복은 곧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을 믿잖아요. 구약을 믿었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저주했잖아요. 아까 나무 이야기했죠. 나무가 뭡니까? 성경대로 저주받을 사람이 나무에 달리잖아요. 그 저주를 통과하므로, 또  성경을 통과하므로 말미암아 축복은 저주가 되고 저주는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축복을 그냥 잡아뺄려면 십자가가 있어야 됩니까? 없어야 됩니까? 십자가 없으면 유대인이고 구약의 축복을 축복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한국 교회 목사들이고 부흥사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뭘 잘못한 정도가 아니고 복음을 훼방하는 악마의 요원들입니다. 

야곱이 별미를 바쳐서 복 받았잖아!! 십일조말고 별미를 바치라고!! 앞으로 목사들이 별미를 바치라고 하면 홍어회 갖다 바치세요. 그 목사들에게는 별미니까. 그들에게 별미는 현금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합니다. 목사도 십자가 통과한 적도 없고 교인들도 십자가 통과한 적이 없는 교인들이 왔기 때문에. 십자가 통과해 버리면 이것은 부정적 사고 방식이고 시대를 역행한다고 교회법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복음 전해서 몇 명 모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안 모이니까 교회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책 사러 조계사를 갔어요. 세상에 조계사인 줄 모르고 한국 교회 온 줄 알았어요. 사람들을 유인할 수 있는 것을 다 붙여 놨어요. 호객행위죠.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것 다 갖다 붙여 놓았습니다. 수능 얼마 남았다, 아이티에 헌금 모아서 이웃사랑을 합시다. 그 조계사에 십자가 이야기 없었습니다. 십자가 없으면 조계사나 한국 교회나 같은 절입니다. 한국 교회의 목사는 조계사의 주지입니다. 한국의 심성 자체가 이미 무속신앙에서 나왔기 때문에 불교가 들어오든 도교가 들어오든 기독교가 들어오든 천주교가 들어오든 다 무속신앙으로 바뀌게 되어 있어요. 

이 바뀐 것을 또 십자가로 바뀌게 하는 것은 오직 누구의 덕이냐면 성령만이, 십자가의 성령이 와야 가능하지 목사가 순교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경직 목사가 훌륭한 목사라는 소리를 듣고 한경직 목사가 훌륭한 대목을 찾을려고 얼마나 애썼다고요. 심지어 그 교회까지 갔어요. 설교를 보고 책을 보고 도대체 한경직 목사가 한국 교회에서 훌륭한 목사라고 하는 그 근거가 어디 있는지 연구하다가 포기했습니다. 찾는 내가 잘못이지. 

왜냐하면 한경직 목사가 훌륭하다고 여기는 자들이 이미 복음이 없는,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되어야 할텐데 사울 당시의 사고 방식을 가지고 훌륭하다고 하니까 그것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 34절 봅시다.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가말리엘은 옛날의 사도 바울의 선생이었습니다. 그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사도들을 잠시 밖으로 나가라고 합니다. 얼마나 침착합니까? 사도들 감정 상하지 않도록, 당사자에게 잠시 나가라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훌륭합니다. 

당회장 목사가 부교역자 잠시 나가라고 한 것을 한 두번 당한 것이 아닙니다. 잠시 나가 주시죠. 당회를 열죠. 여러가지로 내 보내야 되겠습니다. 또 짤렸네. 여보! 구조다 구조다 어떤 집사 괜히 내 좋아한거 아무 소용없다. 주체는 구조다. 그 때는 그런 소리 안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구조라고 하죠. 교회라는 것은 구조가 우선이지 개인이 구원받는 것이 우선이 아닙니다. 교회가 구원 받아야지 개인이 구원받으면 안 됩니다. 항상 집단이기 때문에. 

한 번 보세요. 이 사람은 존경받죠. 가말리엘 이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누구를 핍박합니까? 사도들을 핍박하죠. 그러면 사도하고 가말리엘하고 레벨이 같습니까? 아니죠. 결국은 노선이, 아무리 존경받아도 이 사람은 사도가 가야할 천국 노선이 아닌 다른 노선입니다. 다른 노선에선 존경받을 사람 따로 있고 존경 덜 받을 사람 따로 있고, 위계죠. 위계질서, 이것이 오늘날 성화론입니다. 참 당신은 구제도 많이 하니까 존경받으시고 저거는 교회 5년 나와도 담배도 못 끊으니까 인간 말종이고 이렇게 구분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당시에 인간을 7단계로 나누었습니다. 

제일 높은 단계가 사두새인 단계. 성전과 성전에 종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궤와 하나님의 제사와 말씀에 직접 연관되기 때문에. 거룩의 공간과 거룩의 시간대에 가장 근접한 순서부터. 이렇게 해서 거룩이 바깥에 나가면 덜 거룩하고 성전 중심 안에 있으면 거룩하고 쉽죠. 성전부터 해 가지고 거리상 공간상 시간상 자주 오게 되면 거룩하고 띄엄띄엄 오면 덜 거룩하고 일주일에 세 번 오면 거룩하고 한 달에 두 번 오면 덜 거룩하고 이게 인간들의 사고 방식이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 지심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이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의 거룩이라는 것을 그냥 놔둬요. 거룩은 거룩에 의해서 추방당한 그 외곽이 거룩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라캉의 실제계라는 것인데 실제계라는 것은 상징계 바깥을 실제계라고. 교회를 부수면 안 되요. 교회를 없애면 안 됩니다. 교회 없앤다고 교회 되는 것이 아니예요. 성도는 교회 안에 있는데 그 교회하고 상관이 없어요. 파견 근무이기 때문에. 

파견 근무 할 때는 재미있는 것이 파견된 근무지에서는 근무는 하지만 지시는 거기서 안 받기 때문에 내 맘대로 입니다. 외출, 외박 아주 신나요. 지시는 파견한데서 지시 받기 때문에 직접 맞닿은 대위 중령 소용없어요. 나는 거기에 파견 근무 나갔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내가 이 땅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너희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지만 데려가지는 않겠다. 파견 근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저희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합니다 하지만 데려가지는 않겠습니다. 왜? 진리를 증거 해야 하기 때문에. 고생 좀 하라 이 말입니다. 욕 좀 봐라 이 말입니다. 남들 다 하는 것 기피하라 이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것을 유지시키죠. 계속 교회 부흥되게 하실 것 부흥되게 하고 하지만 그것이 교회 아닌 것을 점점 깨닫게 하죠. 

여기에 백성들이 가말리엘 이 사람을 존경하는데 사도는 핍박을 하죠.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가말리엘과 사도를 잠시 만나게 하죠. 그러면 사도의 운명은 누구 손에 달려 있습니까? 지금 가말리엘 판결에 달려 있죠. 자, 이것이 한 자로 무슨 자입니까? "힘" 그러면 이쪽의 구조가 어느 구조입니까? 지금 어려운 것 합니다. 인간은 세포로 되어 있죠. 

서로 세포가 모여서 유기체가 되었죠. 세포 안에 유전 암호가 들어 있어 펼쳐질 때 거의 대부분 상하 환경에 따라서 돌연변이도 생기고 작은 차이가 큰 차이가 되어서 달라지죠. 여기에 보세요. 인간 내부에, 피부에 세포 있잖아요. 안에 힘 있죠. 인간 바깥에 중력이 있고 여러 가지 사회 구조적인 명령 체제, 법 있죠. 이것이 힘 아닙니까? 

그러면 내부적인 힘과 외부적인 힘 사이에 뭐가 있습니까? 제가 피부라고 했지만 피부를 따져보면 내부에 속하니까. 이것을 가지고 미셀푸코는 주체라고 했습니다. 내부적인 힘과 외부적인 힘이 막이니까 소통하는 거예요. 통과하니까 엄마가 나무라면 애가 잠시 기가 죽죠. 

왜? 엄마의 힘이 나의 어디 안에 침투되었습니까? 나의 까불락 까불락하는데 내 힘에 침투 되었죠. 적당한 선에서 어떻게 해야 해요? 전적으로 엄마 말 다 듣는 것도 아니지만 한 2주 동안은 듣는 척 해야 되죠. 그것을 조종하는 막이 뭡니까? 

그 주체는 외부의 힘에 의해서 변한다? 안 변한다? 아니죠. 주체라는 막은 늘 존재하지만 내일은 내일 또 무슨 힘이 올지 모르고 내 마음도 어떻게 될지 모르고 늘 바뀌죠. 한 가지 바뀌지 않는 것은 이 힘에 눌려 살고 어떤 때는 힘에 반항한다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죠. 

엄마 한 시간만 게임한단 말이야 하고 달려들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결국 뭐냐 외부의 힘, 내부의 힘의 막이 내가 되고 나는 내일 되면 또 바뀌죠. 그 힘이 구조가, 가말리엘 힘의 구조에 현재 누구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까? 사도의 운명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다들 그렇게들 생각했죠. 

여기서 한 번 봅시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도를 가말리엘의 힘이 구조에 집어넣었습니까? 그것은 사도가 말하는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것이 과연 말만 그럴까요? 그것이 과거의 한 사건에 지나지 않을까요? 지금은 그게 효과 없는 일일까요? 그건 힘이 아닐까요? 아니죠. 드디어 그야말로 누가 봐도 가말리엘은 존경받고 이 힘의 구조는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가운데서도 41절의 말씀처럼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인하여 능욕 받는 것을 합당하게 여기면서 기쁨으로 공회앞에서 나와서 또 전도를 하죠. 

사람들에게는 가말리엘 이 사람이 왕초가 되는데 사도들은 실제적으로 누가 왕초입니까? 그 이름? 예수님의 이름이 왕초가 되죠. 그러면 이 사람 보기에 사도들은 그냥 예수 용어만 나불나불 하는 것 같지만 막상 사도는 너희들이 가말리엘에게 굴복하는 것처럼 사도는 실제적으로 누구 힘에 굴복합니까? 말만이 아니라 살아 계신 성령의 부활의 힘에 굴복하면서 힘과 힘의 충돌이 일어나죠. 구조와 구조의 마주침. 이것이 아이티 지진이 아닙니까? 이게 지진입니다. 

주님의 힘은 어두움이 있어야 빛의 값을 해요. 복음은 항상 세상 사람이 다 굴복하는 힘 속에 있을 때 복음의 값을 합니다. 모든 사람이 "예" 라고 할 때 혼자서 "아니오"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의 등뒤에는 주님의 십자가의 부활이 쫓아가기 때문에, 하나의 그릇이기 때문에 그것을 사도는 말하기를 다른 사람에게는 진노의 그릇이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여기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의 집착이다. 사도의 용기다. 자신들이 기도 많이 해서 능력 받았다. 성경 공부해서 되는 것 같다 하죠. 사도는 말합니다. "미쳤나 내가 성경 공부 많이 해서 생기게.." 지금 내 안에서 나는 하나의 껍데기, 하나의 막에 불과하고 내가 지금 세포를 유지하고 사는 것도 주님께서 살려서 사는 것이고 바깥에 있는 힘도 주님이 주신 힘 갖고 사는 것이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그래서 사도가 하는 말이 주여 어서 저를 주님의 얼굴을 보게 하옵소서. 저들은 하는 일을 모릅니다. 저들은 구조도 모르고 힘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들이 모르는 힘 안에, 구조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 구조 안에 놓인 주체입니다. 하나의 용기고 그릇이고 막이다는 것입니다. 이 가말리엘이 뭐라고 설득하느냐면 가만 내둬라 어떤 사람은 까불대다가 자진해서 무너졌고 어떤 사람은 사백이나 따르다가 흩어진 것처럼 가만 내비둬 라고 하는 것입니다(행5:36~39). 

가말리엘이 이런 소리를 한 것은 성령을 안 받았으면서도 근사하게 보이고 아주 신앙적으로 보이고 성화의 최고로 거룩하게 보이는 것이 마지막 주권 사상이라는 것, 소위 칼빈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주권사상. 이게 가말리엘의 신학이예요. 칼빈 개혁주의가 구원시켜 주는 것이 아닙니다. 루터가 구원시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구원시켜 주지 신학했다고 돈벌이는 될지 모르지만 구원은 되지 않습니다. 주권사상이 아니고 오직 십자가죠. 

주권사상 전하는데는 이슬람교가 주권사상이 최고 주권이예요. 얼마나 주권이면 금요일에 다 엎어집니다. 그 사람들은 자살까지 해가면서 알카에다, 자살하면 천국간다고 해서 소년들이 자살하잖아요. 주권이 아닙니다. 이것은 가말리엘의 주특기고 인간이 여기서 나오는 신학의 한계가 주권사상인데 사도는 뭐냐? 십자가가 내 안에 움직여서 나는 행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나는 백퍼센트 이미 주님의 공로로 이미 그 노선에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이런 복음은 돈 되는 것도 출세하는 것도 아니고 사업 잘 되는 것도 아닌데 이것을 백퍼센트 믿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께서 지금도 예수님과 죽으심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는 것처럼 모든 성경을 보면서 우리 대신 이미 누가 돌아가셨구나 그래서 살았구나 알고 이제부터 세상에 나가서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 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