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100128b행5장30절b계시의종결완전성b
2010-02-24 17:22:21 녹취 : 이미아
예, 이것은 보너스인데 지금 요한계시록 3장 20절 이야기했죠. 사람들이 무엇을 모르냐면 이 말씀 구조에 의하면 3장 20절이, 3장 20절하고 나하고 연결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3장 20절은 3장 19절과 창세기 1장과 레위기 12장이나 민수기 4장이나 제가 아무데나 이야기 합니다. 이쪽에 짜여져 있어요. 실이 세로 가로 짜여지듯이 말씀으로 짜여지는 것입니다. 편물 아시죠? 짜는 것.
요한 계시록 3장 20절만 딱 떼어 가지고 나한테 만나는 것이 아니고 전체 말씀의 구조가 다 달려들어요. 그 대표적인 것이 3장 1절이고 만약에 요한계시록 1장 1절을 한다면 돌출 되는 것이 1장 1절이지만 그 배후에는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22장까지 다 달라드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라는 것이 하나의 구름이라면 나는 이 말씀의 혜택을, 먹구름에서 뭐가 내리죠? 비가 내리죠. 그 말씀이 나한테 떨어지는 거예요.
"아 이래서 구원받았구나!" 문을 열고 두드리는 것까지 이미 주께서 나한테 들어 오셨을 때 나로 하여금 어떤, 어떤 행동이 아니라 내가 이미 마음을 열 때 그 자체가 말씀에 의하면 주의 말씀을 듣고 여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그릇이니까.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어떤 남편이 교회를 안 나온다 그럴 때 아내가 화가 나가지고 "너 같은 인간은 천국에서 안 받아 줘" 라고 했을 때 그것이 성경에서 보면 복음을 전하는 것이 됩니다.
교회 오지 마라 했는데 너 같은 인간은 교회 오라고 해도 안 받아 줘 하는 그것이 성경에 보면 이웃을 사랑한 것이 됩니다. 본인은 몰랐어요. 나중에 성경을 보니까 남편의 영혼을 걱정해서 하는 그것도 내 마음이 아니고 성령께서 일으켰는데 그 성령이 일으킨 근거가 뭐냐면 성경 어느 귀절에 보니까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화가 나서 "그런 식으로 하면 교회 오지마 너 같은 인간은 천국 가면 안돼!" 라는 말로 나온 거예요. 그 마음을 누가 주셨는가 하면 성령께서 주신 거예요.
그럴 때 그 사람은 역시 내가 말씀 지켰어 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주께서 나로 하여금 사용하시는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내 행동이 어느 귀절에 맞는 줄 몰라요. 나중에 보면은 아 그때 그 행동이 여기와 연관되어 있었구나 하는 것을 다 아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요 이것은 십자가 마을에 올려 있는 글인데 어떤 중학생이 십일조를 하는데 그 중학생은 순진해서 잔돈까지 다 십일조를 했는가 봅니다.
250원 엄마한테 받았으면 25원까지 했는데 목사가 돈 계산이 귀찮아서 잔돈은 빼고 해라 반올림해라 하는 것입니다. 그 학생이 어른이 되어서 그 목사한테 당했던 것이 분통이 터져서 글을 올려 놓았는데 그러면 그 학생이 자기는 분명히 말라기에 나온 대로 하나님을 시험해 봐라 창고에 차고 넘치는지를 이러거든요.
그런데 저는 이렇게 하거든요. 십일조 안 해봐라 과연 창고가 비는지를. 성경 말씀은 해봐라 창고가 채워지는지가 성립된다면 그 다음에 뭘 안 해봐라 과연 창고가 비는지. 만약 안 해서 창고가 빈다면 하면 그만큼 하면 채운다는 거예요.
어제 수요 설교 때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내가 헌금을 안 했기 때문에 벌받아서 애가 대학에 떨어졌다면 그 다음에는 애를 대학에 합격시키는 것 쉽다고 했습니다. 뭐만하면 됩니까? 헌금을 하면 되는 거예요. 그처럼 쉬운 것이 어디 있어요? 이 말은 원인과 결과를, 내 행위로 결과를 잡는다면 일단 그것을 잡아 놓고 그 다음에 성경을 찾아갑니다. 내가 이렇게 행동했기 때문에 복을 받았는데 성경 어느 구절에 있는가 하고 나중에 차후적으로 찾죠.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 것이 나중에 엉터리인 것을 언제 아느냐면 분명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안되었을 때 이것은 뭔가 원인 결과의 고리가 연결이 안되었듯이, 줄 잇기 할 때 줄을 잘못 이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잘못 이은 것이 다행스러워요. 잘못 이은 관계에서 그 성경을 다시 보는 것입니다. 보면 안보이던 지층이 보이죠. 삼겹살 아시죠? 삼겹살의 한 겹이 전부가 아니잖아요? 1층 2층 3층을 다 먹어야 하잖아요.
그처럼 성경에서 표면적 유대인처럼 문자만 보던 층이 날라가 주는 것이 그 문자층에 가리웠던 그동안 못 보던 성경 해석을 보게 하는 길이를 하나님이 허용하셨기 때문에 보게 하는 것입니다. 아 말라기 해석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구나 의와 인과 신을 놓치면 안되는구나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뭐를 행하냐면 의와 인과 신을 보태서 십일조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2겹이라.
나중에 의와 인과 신과 겸해서 십일조 했을 때 창고가 차지 않을 때 "아! 의와 인과 신과 10퍼센트 계산한 것과 아무 상관이 없구나!" 그것도 날라가 버리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십일조 하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너의 몸 자체가 주님이 하나님께 바치는 하나의 제물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십일조를 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든지 내지 않든지 현재 존재한다는 자체가 주님의 십일조의 하나의 예물로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16절에 나옵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팁을 떼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침대 사고 애들 피아노 렛슨비 내고 이 전부가 어디에 포함됩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제물안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돈 내는 것만 헌금이 아니고 애들 피아노 렛슨비 내는 것도 내 돈 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돈 가지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모시는 것이 의와 인과 신입니다. 내가 십일조라는 것입니다. 십일조 내는 주체가 아니고 주님이 주체고 나는 그냥 어디를 가든 바쳐지는, 주님께 바쳐지는 몸입니다.
그래서 사나 죽으나 내 것이 내 것이 아니고 누구의 것이다? 주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약에 대한 말씀의 신약의 완성입니다. 주님에 의해서 완성된 거죠. 결국은 가면 갈수록 말씀 해석의 껍데기가 벗겨져서, 상식적인 것에서 벗어나서 도저히 예상 못한 법칙이 계속 나오는 것이 좋지요.
=========================================================================
대전100128c행5장30절c계시의종결완전성c
2010-02-24 17:23:21 이름 : 이미아
사도행전 5장 봅시다. 30절에 보면 사도가 해석하는 것이 구약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사도가 해석하는 것은 무엇에 바탕을 두었다? 구약에 바탕을 둔 거죠. 구약을 세자로 하면 옛 언약이죠. 그러면 옛 언약의 바탕 위에 뭐가 있느냐면 새 언약이죠. 뒤에다 해석을 붙입시다. 새 언약 해석. 구약은 옛 언약 해석. 옛 언약식으로 해석을 하면 안되고 새 언약식으로 해석을 하자는 이 말입니다.
그러면 지금 사도가 해석하는 것이, 계시 받은 것이 뭐냐하면 예수님의 행적. 행위라고 하면 행위만 포함되지만 행적이라고 하면 말씀 설교가 다 포함되니까 행적이라고 하죠. 예수님의 모든 것이 포함되니까. 구약적으로는 해석을 해서는 안되고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아는, 말 참 어렵다. 구약적으로 해석을 해서도 안되고 신약적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라는 말을 해서도 안되고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아는 해석을 하라는 이 말입니다.
학생들 컨닝할 때 "야 정답이 뭐야?" "마이너스 2" 선생님이 "어이 정답이 뭐야?" "마이너스 2입니다." "마이너스 2가 어떻게 해서 나왔어?" 모르죠. 정답만 알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은 이러이러 했었는데 이것은 아니고 이렇게 이렇게 해야 됩니다. 무엇이 아니고 했을 때는 무엇입니다 했을 때는 무엇이 아니고의 이유가 뭐냐하면 인간들이 기껏 해석을 하는 것이 결국 하나님한테 무엇 무엇이 아니고 라는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연속의 기적과 홍해의 기적,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과 말라기 십일조 해석, 예레미야 금식, 구제하라는 이 모든 해석을 인간들이 기껏 해봐야 바리새인들처럼 해석하는 것 밖에 더 있습니까? 누가복음 18장에 나오죠. 구약을 해석할 때 "이레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 했습니다" 라고 하니까 마지막 주심이 뭐라고 했습니까? "너는 지옥가라" 해버렸죠.
세리는 뭡니까? 주여 감히 얼굴을 못 들고.. 바리새인은 성전에 와서 자기 주체를 이야기하죠. 내가 주체가 되어 이러이러한 행동은 내놓았습니다 할 때 너는 지옥가거라 했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뭘 봅니까? 주체를 보지 않고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가 뭘 알았다? 나는 죄인입니다 알 때 내가 주체가 아니고 나를 정죄하신 분이 주체가 되기 때문에 최종 심판관이신 주가 너는 의인이다 너는 천국 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이 기껏 인간은 뭐뭐 아니고 라는 판정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너는 의인인 줄 알지 기껏 너는 죄인에 불과해 라는 판정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 말이죠. 우리는 아니고에 대해서 이것을 안 할려고 해요. 평소에 우리가 성경 노선에 아니고에 해당되는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마치 남의 일인양 하고 있더라 말입니다.
구약을 잊지 말고 신약만 쥐고 있으면 안되고 그 차이를, 둘의 차이를 다 가지고 예수님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면 구약은 뭐뭐 아니고고 신약은 뭐뭐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강도가 구원받은 것이 어떻게 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여러분 강도가 체포되기 전까지는 예수님 믿었겠습니까? 안 믿었겠습니까? 안 믿었죠. 체포되기 전까지는 완전 범죄인데요.
그러면 자기는 뭐하고 있었어요? 체포되기 전까지는 강도짓을 했어요. 체포되고 십자가에 달리고 난 뒤에 아 주님 3년 전에 믿을려고 했습니다 이런 강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3년 전에도 예수님이 계셨지만 자기는 강도짓 하기에 바쁜거예요.
언제 예수님이 예수님으로 의미있게 다가왔습니까? 자기가 완전히 묶여서 더이상 강도짓을 하지 못할 때 그것도 강제로 십자가에 달려 꼼짝달싹하지 못할 때, 할 짓이 이제 죽는 것 밖에 없을 때 주여 오늘 밤에 주님 나라에 임하시면 저를 생각해 달라 그 때 이야기한 것입니다.
강도가 보는 해석은 어떤 것이 구박당할 때, 속박당할 때, 뭐가 꼼짝 못할 때 이 해석이 새 언약의 해석으로 나왔습니까? 자기의 모든 행위가 의미 없음을 알 때 비로소 자기가 구원받고 안 받고는 이 개입은 지옥같은 세상에서 천국의 작두는, 이 작두의 능력은 어디서 와야 됩니까? 백퍼센트 누구의 솜씨? 주님의 건져냄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마태복음에서는 낚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너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피라는 책에 보면 나옵니다. 낚는 거예요. 개그콘서트에 보면 낚였어!! 낚였어!! 하잖아요. 낚인 것이 뭐가 좋아요? 자존심도 없지. 하지만 사랑 앞에서는 낚인 것이 최고예요.
사랑에 낚여서 구원받는 것이 최고지 거기에다 0.0000000......1%라도 이질적인 것이 들어가면 안됩니다. 그것은 낚인 것이 아니고 낚일려고 했는데 약간의 내가 보태서 구원받은 것이 되요. 그것은 거래예요. 흥정입니다. 타협입니다. 이런 구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30절에 너희가 죽인 예수를 그 앞에 무슨 단어가 나옵니까? 나무죠. 나무!! 이것이 어디에서 중요하냐면 갈라디아서 3장에서 중요합니다. 여기에 보면 나무에 달렸다 말입니다. 예수님이 매미입니까? 예수님이 왜 나무에 올라갔습니까? 예수님이 올라가신 것이 아니고 누가 올려 보냈어요? 하나님이 올려 보내셨고 사람들을 통해서 올려 보냈죠.
제가 지금 해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이 구약을 해석하고 또 누가 해석합니까? 예수님이 구약을 해석하시죠. 그런데 예수님이 구약을 해석하시면서 그냥 해석하지 않으시고 어디에 올라가셔서 해석을 하십니까? 사람들에게 타살을 당해요. 사람들에게 타살 당한 채, 나무에 올라가서 매달린 채 구약을 해석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안 달려 본 사람은 구약을 해석하지 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니들이 십자가 맛을...옆에 달린 사람이 누구입니까? 강도잖아요. 강도는 해석을 하는 거예요. 당신이 구세주 맞습니다. 당신이 오실 메시야 맞습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아무리 행해도 다윗이 원했던 것은, 주께서 원하신 제사는 바치는 것이 아니고 상한 심령을 그냥 매다는 것입니다. 주여 저 상한 심령입니다. 신종플루로 다 썩었습니다.
완전히 더 이상 내놓을 것 없습니다. 죄만 지었습니다 하고 매달리는 그 때를 주께서는 찬스하고 낚을 때 그렇게 낚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안 죽고 있습니까? 아직까지 계속해서 더 내놓아야 할 죄가 있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덜 상했어요. 국산이라 덜 상했어 중국산 되어야 해. 완전히 천국에서 제품화 될 수 없는, 천국에서 안 받아 줄 정도로 썩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천국에 들어가야지 거기에 약 2%정도 내 행함, 개척교회 했습니다 몇 명을 전도했습니다 강의하고 돌아 다녔습니다 헌금을 얼마 했습니다 라는 것이 아무 소용없습니다. 완전히 그것이 썩어야 합니다. 내가 이 교회에 헌금했다는 것이 썩기 위해서는 좀 더 살아야 합니다. 살면 맛이 나는 것을 가지고 홍어 삭힌 것이라 합니다. 냄새 죽입니다. 홍어 삭힌 것보다 더 삭혀야 합니다. 안에 뜯어보면 죄인 중에 괴수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구원받은 사람은 노선이 한 개가 아니고 두 개의 노선이 있는데 이미 우리는 구원받은 노선에 있으면서 맞은편에 뭐가 보입니까? 거울이 보이는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뭐가 비춥니까? 강도 같은 내 모습이 비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뭐가 즐겁다? 주님의 은혜로 구원된 것에 감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여 제가 교회 다니면서 장로 되어서 집사 되어서 얼마나 으시대었는지 이것을 어느 노선에서 봅니까? 이렇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았기에 저쪽 노선, 내 치졸한 내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상한 심령이면서 프랑스 화장품으로 화장질 해대고 파운데이션 바르고 눈썹을 그리는 내 모습을. 안에는 죄인 중에 괴수이면서도 종교적인 행위로서 자기 모습을 꾸미면서 성화 되었다 이러면서 내신성적 좋게 받을려고 하는 위선적인 내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나무 이야기 해 봅시다.
갈라디아서 3장을 같이 한 번 봅시다. 3장 13절 누가 읽어보세요.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 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신명기21장 23절에 보면 나무아래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는 이 대목을 유대인들은 끌어 올 생각을 안 하죠. 왜냐하면 자기들은 축복 받은 사람들이 때문에. 이것은 누구한테 해당되는 것이냐면 하나님 안 믿는 사람, 할례 안 받은 사람, 안식일 안 지키는 사람, 십일조 안 하는 사람, 율법을 안 지키는 사람에게만 나무에 달리게 하라고 하나님이 누구한테 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시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무에 매달은 것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서 완벽한 신앙에 근거해서 저런 인간은 저주받아 마땅하다고 해서 나무에 매달은 거예요.
거기에 동의한 사람이 누구냐? 사도 바울이 사도 되기 전에 사울이었던 그 때 동의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를 죽일 때 자기가 옷을 받고 거기에 찬동했죠. 이랬던 사울이 나무에 그냥 달리지 않고 주께서 귀신되서 날라간 것이 아니고 나무에 달렸다가 백퍼센트 하나님께 버림 받고 마귀중에 왕초다 악마다 라고 해서 바알세불에 속했다 해서 죽였던 그것을 경유해서, 경과를 통해서 그 분을 사흘만에 하나님께서 살리셔서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셨다면 결국은 그것을 거쳤다는 것은 누가 잘못되었단 말입니까?
그것은 그 예수님을 죽이게 했던 동원된 인간의 철학과 모든 신학과 모든 교회 조직과 목사라는 장로라는 제도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뭉쳐서 하나님을 욕되게 한 악마의 수작인 것입니다. 그게 드러난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에게 기억할 것은 하나만 기억하면 됩니다. 구원 못 받는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자진해서 죽으셨다가 자진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부활하셔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므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일어났던 성부와 성자에게 일어났던 그 사항을 이제는 너도 알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너가 모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과 무관하게 되면 너는 딴 동네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와서 우리를 그 세계에 포함시킬 때 그것을 로마서 6장에서 세례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연합이라고 합니다. 연합이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엔진은 예수님이고 우리는 뒷좌석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차에 타고 있죠. 그러나 움직이는 것은 누가 움직입니까? 예수님께서 엔진을 가동시켜서 움직이죠.
가동시킨다는 말은 우리는 말씀을 못 지킨다는 것은 물론이고 해석조차 할 자격도 못되죠. 해봤자 십자가에 예수님을 또 죽이는 짓이 되니까. 그 정도로 우리는 아담에 속한 인간들은 어떤 해석을 하든 간에 이미 선악과 따먹고 나 밖에 모르는 죄 지을 수밖에 없는 자의 해석만 나오니까 그 해석은 전부 다 죄를 유발시키고 발산시키는 해석밖에 안 나오죠.
그 죄의 발산에 누가 넘어졌느냐면 예수님마저 죽어버렸단 말이죠. 그래서 이사야 53장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제 갈 길로 갔거늘. 그러면 구원은 끝났잖아요? 우리하고 거래 끝났어요. 우리는 제 갈길 가버렸어요. 그런데 우리하고 계약한 것이 아니고 우리는 말씀을 줘도 중얼거리지만 계약은 따로 있어요. 성부께서 성자하고 계약해서 그 무리의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므로 말미암아 채찍에 맞음으로 낫기는 누가 나아요? 우리가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그것을 빌립 집사는 성령을 받아서 알았고 에디오피아 내시는 몰랐던 거예요. 이사야를 펴놓고도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성령께서 빌립을 파송 시켜서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나서 마침 이사야서 53장을 보는데 이것 해석해 봐라 했을 때 이사야 53장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부터 전부다 십자가 중심으로 해서 하나의 직물처럼 엮어요. 모든 말씀이 말씀 자체에서 조치되어 예수님의 십자가를 교차하면서 그것이 자기에게 오면 십자가 하나로 요약되어서 오죠.
그래서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의 죽으심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사람의 지혜는 오히려 십자가를 모독하게 만든다. 사람의 지혜는 하나님에게 어리석고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에게 어리석은데 그들이 어리석지 않았다면 십자가라는 사건도 발생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따라서 그들이 모르는 십자가인데 어떻게 아느냐? 모르는 십자가는 하나님의 비밀에 속하는데 그 비밀에 속한 것은 오직 성령이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파악하는 오직 성령께서 너희에게 은혜로 주실 경우에만 성령 안에서만 너희들은 십자가를 안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십자가와 바로 만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때부터는 영의 사람 따로 있고 육의 사람 따로 생기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사도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나무는 무엇의 표상입니까? 나무에 올라갔다는 말은 저주받았다. 이것은 신명기 말씀 그대로 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은 자라"(신21:23).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저주받은 쪽에다 세웠 버렸어요. 구약에 보면 산이 두 개 있죠. 하나는 그리심산과 하나는 에발산이죠. 그리심 산은 축복산으로 알려져 있고 에발산은 저주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 하나님의 법궤는 두 개가 아니고 하나밖에 없는데 하나밖에 없는 법궤가 축복산에 있겠습니까? 저주산에 있겠습니까? 놀랍게도 이것은 저주산에 법궤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축복산은 축복을 받는 산이 아니고 축복을 해주어야 할 산이고 저주산은 법궤가 없다는 것 때문에 제단이 없기 때문에 십자가가 없기 때문에 저주를 받아라 저주를 퍼붓는 산이 저주산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어떤 모르는 사람들은 목사님은 상당히 부정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부정적 사고 방식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안 보내고 낚시대를 사용합니다. "너 올라와" 낚시대에 부정적인 것이 있겠습니까? 아주 긍정적이죠. 낚였어 낚였어 하는데. 우리는 낚이기는 낚였는데 십자가에 낚이죠. 십자가에 낚여야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라는 그런 철학적인 것에 낚이면 안 됩니다. 신학에 낚이면 구원 못 받습니다. 예수님의 피에 낚여야 되요. 신학은 머리에 들어가지만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온 몸에 흐르고 있어요. 주님께 바친 제물이예요. 하나의 용기 하나의 그릇이 되요. 온 몸에 다 흐르니까. 우리가 사는 이유는 아직까지 숙성된 우리의 죄가 아직도 멀었어요. 죄 더 질라면 세월이 더 필요하기 때문에 아직 안 죽는 거예요.
어떤 분이 며칠 전에 저한테 전화왔습니다. "목사님 죽고 싶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죠. "또 직업이 없구나" 바빠보세요. 사람은 산다는 것은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타인이 나를 호출할 때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내가 사는 거예요. "엄마 밥줘" 라는 그 소리를 듣고 엄마는 죽을수가 없어요. 지금 엄마가 약틀어 먹고 있는 순간에 자식이 "엄마 밥줘" 하는 것입니다.
집사님하고 목사님하고 왜 우리는 죽어서는 안되냐면 목사님 보고 집사님 보고 복음을 듣고자 하는 사람이 있어요. 물론 들을 사람이 없슴니다만은. "복음이 무엇입니까? 한 수 가르쳐 주세요" 하는 사람은 없는데 아이구 교회 왜 이모양인지 왜 이런지 몰라 라는 말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라는 기회로 들으시면 됩니다. 또는 교회 와서 "밥이 왜 이렇게 설었지?" 라는 그런 소리, 그것을 찬스로 잡아 또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복음 전하는 것은 두 가지죠. 하나는 타인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고 또 하나는 나 자신에게는 아직 죄가, 주께서 죽으셔야 될 이유가 덜 성숙해서 입니다. 나중에 치매 걸려서 "예수 누군데?" 이렇게 고함 지르고 어느 유명한 목사님처럼 "예수는 사탄이야!!" 그런 목사가 있답니다. 나는 누구 한경직 목사라고 이야기는 안 합니다만. 여기 보면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행5:31)
그러니까 그들의 노선이 다른 겁니다. 베드로가 알고 있는 노선하고 현재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노선하고 애초부터 노선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달이 뜨면 대구의 높은 산에서 보는 달이나 대전에서 보는 달이나 그 달이 그 달이예요. 그래서 불교나 도교나 유교에서는 이 세상과 초월을 연속성으로 봅니다. 불연속성, 단절로 보지를 않아요. 불교의 유명한 도사들 있잖아요. 선불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하는 그 사람들이 진리를 이야기를 할 때 꼭 공통점을 가지고 이야기해요. 서로 단절이 없다는 거예요. 푹 꺼진데가 없이 그냥 계속 연결하면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이것을 성화론 이라고 합니다. 성화론은 있을 수 없는데 아주 무서운 것이 등장했습니다. 예수 믿는 것 은혜로 믿고 그 다음부터 영광 돌리는 것은 착해서 되는데 자꾸 내신성적, 마일리지 쌓으시면 하늘에 도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뭐와 같으냐면 성화론 주장해 버리면 마치 이와 같습니다. 신이 여기 있다면 불교에서 올라가나 힌두교에서 올라가나 이슬람교에서 올라가나 기독교에서 올라가나 결국은 다 한자리에서 만난다 이렇게 되어 버립니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존재론적 신이라고 합니다. 존재론적 신이라는 것은 뭐라고 합니까? 인간과 존재론적 신 사이에는, 신이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사이에는 존재에 연결되었다는 것을 뭐라고 합니까? 그것을 유비라고 합니다. 신학 용어 입니다.
유사성, 비슷하지는 않지만 공통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원본이 있고 우리는 복제라는 것입니다. 복제에 복제가 되었을 때는 현대에서는 유사성이라는 말도 쓰고 상사성이라고도 씁니다. 상사성이 되버리면 이미 원본과 상관이 없는 거예요. 인간이 인간을 낳았잖아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것이 아니고 자기 조상의 DNA를 물려 받았잖아요.
하나님이 형상으로 아담을 만들어 놓고 그 다음부터는 단절되어 버리고 아담의 자손은 누구를 닮았습니까? 아담을 닮은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아담의 형상을 닮았다고 합니다. 아담의 형상을 닮았으니까 그때부터 아담이 죽은 것처럼, 상사성 그대로 가니까 아담이 죽었으니까 계속 죽는 거예요. 그 다양성을 하나로 묶어 낸 것을 가지고 로마서 5장에서는 죄가 아담의 세계를 지배했기 때문에 죄가 들어오면서 죽음이, 죄가 왕노릇 하는 것 동시에 죽음이 왕노릇한다 해서 층을 나눴죠.
우리 위층은 죄가 있고 아래층은 죄에 저촉받는 죄인들이 있고 그래서 인간의 다양성은 아무리 인간이 다양해도 결국 죽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니까 자기들은 같은 인간인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가시냐면 죽음의 자리, 나무에 달렸습니다. 유대인들은 나무에 달리기 전까지 같은 죄인 줄 알았습니다. 거기서 노선이 갈라졌습니다. 한쪽은 그냥 죽고 한쪽은 사흘만에 부활하고 노선이 여기서 갈라졌죠.
이 노선 갈라지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 자식의 운명이 서로 약속과 비약속으로 갈라지는 것으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갈라짐의 출발점이고 원천지가 되기 때문에 이것을 두 자로 복음, 기쁜 소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이 복음을 거스릴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은 십자가말고 딴데서 오지를 않아요. 성령은 복음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항상 성령이 오게 되면 이 사람들을 어디로 데리고 가느냐면 프리즘, 빛을 8가지로 갈라지게도 하고 빛을 돋보기처럼 하나로 모으기도 하죠. 빛을 모으듯이 십자가에 모아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축복이라는 것이, 구약의 축복을 A라고 저주를 B라고 한다면 구약의 축복과 신약의 저주가 이렇게 있다면 십자가를 통과하면서 이게 키아니즘(chiasm), 교차적 구조라고 하는데 A는, 구약의 저주는 세상 축복으로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죄인으로, 저주받는 분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통과하면서 저주는 곧 축복이요, 축복은 곧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을 믿잖아요. 구약을 믿었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저주했잖아요. 아까 나무 이야기했죠. 나무가 뭡니까? 성경대로 저주받을 사람이 나무에 달리잖아요. 그 저주를 통과하므로, 또 성경을 통과하므로 말미암아 축복은 저주가 되고 저주는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축복을 그냥 잡아뺄려면 십자가가 있어야 됩니까? 없어야 됩니까? 십자가 없으면 유대인이고 구약의 축복을 축복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한국 교회 목사들이고 부흥사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뭘 잘못한 정도가 아니고 복음을 훼방하는 악마의 요원들입니다.
야곱이 별미를 바쳐서 복 받았잖아!! 십일조말고 별미를 바치라고!! 앞으로 목사들이 별미를 바치라고 하면 홍어회 갖다 바치세요. 그 목사들에게는 별미니까. 그들에게 별미는 현금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합니다. 목사도 십자가 통과한 적도 없고 교인들도 십자가 통과한 적이 없는 교인들이 왔기 때문에. 십자가 통과해 버리면 이것은 부정적 사고 방식이고 시대를 역행한다고 교회법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복음 전해서 몇 명 모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안 모이니까 교회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책 사러 조계사를 갔어요. 세상에 조계사인 줄 모르고 한국 교회 온 줄 알았어요. 사람들을 유인할 수 있는 것을 다 붙여 놨어요. 호객행위죠.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것 다 갖다 붙여 놓았습니다. 수능 얼마 남았다, 아이티에 헌금 모아서 이웃사랑을 합시다. 그 조계사에 십자가 이야기 없었습니다. 십자가 없으면 조계사나 한국 교회나 같은 절입니다. 한국 교회의 목사는 조계사의 주지입니다. 한국의 심성 자체가 이미 무속신앙에서 나왔기 때문에 불교가 들어오든 도교가 들어오든 기독교가 들어오든 천주교가 들어오든 다 무속신앙으로 바뀌게 되어 있어요.
이 바뀐 것을 또 십자가로 바뀌게 하는 것은 오직 누구의 덕이냐면 성령만이, 십자가의 성령이 와야 가능하지 목사가 순교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경직 목사가 훌륭한 목사라는 소리를 듣고 한경직 목사가 훌륭한 대목을 찾을려고 얼마나 애썼다고요. 심지어 그 교회까지 갔어요. 설교를 보고 책을 보고 도대체 한경직 목사가 한국 교회에서 훌륭한 목사라고 하는 그 근거가 어디 있는지 연구하다가 포기했습니다. 찾는 내가 잘못이지.
왜냐하면 한경직 목사가 훌륭하다고 여기는 자들이 이미 복음이 없는,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되어야 할텐데 사울 당시의 사고 방식을 가지고 훌륭하다고 하니까 그것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 34절 봅시다.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가말리엘은 옛날의 사도 바울의 선생이었습니다. 그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사도들을 잠시 밖으로 나가라고 합니다. 얼마나 침착합니까? 사도들 감정 상하지 않도록, 당사자에게 잠시 나가라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훌륭합니다.
당회장 목사가 부교역자 잠시 나가라고 한 것을 한 두번 당한 것이 아닙니다. 잠시 나가 주시죠. 당회를 열죠. 여러가지로 내 보내야 되겠습니다. 또 짤렸네. 여보! 구조다 구조다 어떤 집사 괜히 내 좋아한거 아무 소용없다. 주체는 구조다. 그 때는 그런 소리 안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구조라고 하죠. 교회라는 것은 구조가 우선이지 개인이 구원받는 것이 우선이 아닙니다. 교회가 구원 받아야지 개인이 구원받으면 안 됩니다. 항상 집단이기 때문에.
한 번 보세요. 이 사람은 존경받죠. 가말리엘 이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누구를 핍박합니까? 사도들을 핍박하죠. 그러면 사도하고 가말리엘하고 레벨이 같습니까? 아니죠. 결국은 노선이, 아무리 존경받아도 이 사람은 사도가 가야할 천국 노선이 아닌 다른 노선입니다. 다른 노선에선 존경받을 사람 따로 있고 존경 덜 받을 사람 따로 있고, 위계죠. 위계질서, 이것이 오늘날 성화론입니다. 참 당신은 구제도 많이 하니까 존경받으시고 저거는 교회 5년 나와도 담배도 못 끊으니까 인간 말종이고 이렇게 구분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당시에 인간을 7단계로 나누었습니다.
제일 높은 단계가 사두새인 단계. 성전과 성전에 종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궤와 하나님의 제사와 말씀에 직접 연관되기 때문에. 거룩의 공간과 거룩의 시간대에 가장 근접한 순서부터. 이렇게 해서 거룩이 바깥에 나가면 덜 거룩하고 성전 중심 안에 있으면 거룩하고 쉽죠. 성전부터 해 가지고 거리상 공간상 시간상 자주 오게 되면 거룩하고 띄엄띄엄 오면 덜 거룩하고 일주일에 세 번 오면 거룩하고 한 달에 두 번 오면 덜 거룩하고 이게 인간들의 사고 방식이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 지심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이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의 거룩이라는 것을 그냥 놔둬요. 거룩은 거룩에 의해서 추방당한 그 외곽이 거룩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라캉의 실제계라는 것인데 실제계라는 것은 상징계 바깥을 실제계라고. 교회를 부수면 안 되요. 교회를 없애면 안 됩니다. 교회 없앤다고 교회 되는 것이 아니예요. 성도는 교회 안에 있는데 그 교회하고 상관이 없어요. 파견 근무이기 때문에.
파견 근무 할 때는 재미있는 것이 파견된 근무지에서는 근무는 하지만 지시는 거기서 안 받기 때문에 내 맘대로 입니다. 외출, 외박 아주 신나요. 지시는 파견한데서 지시 받기 때문에 직접 맞닿은 대위 중령 소용없어요. 나는 거기에 파견 근무 나갔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내가 이 땅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너희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지만 데려가지는 않겠다. 파견 근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저희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합니다 하지만 데려가지는 않겠습니다. 왜? 진리를 증거 해야 하기 때문에. 고생 좀 하라 이 말입니다. 욕 좀 봐라 이 말입니다. 남들 다 하는 것 기피하라 이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것을 유지시키죠. 계속 교회 부흥되게 하실 것 부흥되게 하고 하지만 그것이 교회 아닌 것을 점점 깨닫게 하죠.
여기에 백성들이 가말리엘 이 사람을 존경하는데 사도는 핍박을 하죠.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가말리엘과 사도를 잠시 만나게 하죠. 그러면 사도의 운명은 누구 손에 달려 있습니까? 지금 가말리엘 판결에 달려 있죠. 자, 이것이 한 자로 무슨 자입니까? "힘" 그러면 이쪽의 구조가 어느 구조입니까? 지금 어려운 것 합니다. 인간은 세포로 되어 있죠.
서로 세포가 모여서 유기체가 되었죠. 세포 안에 유전 암호가 들어 있어 펼쳐질 때 거의 대부분 상하 환경에 따라서 돌연변이도 생기고 작은 차이가 큰 차이가 되어서 달라지죠. 여기에 보세요. 인간 내부에, 피부에 세포 있잖아요. 안에 힘 있죠. 인간 바깥에 중력이 있고 여러 가지 사회 구조적인 명령 체제, 법 있죠. 이것이 힘 아닙니까?
그러면 내부적인 힘과 외부적인 힘 사이에 뭐가 있습니까? 제가 피부라고 했지만 피부를 따져보면 내부에 속하니까. 이것을 가지고 미셀푸코는 주체라고 했습니다. 내부적인 힘과 외부적인 힘이 막이니까 소통하는 거예요. 통과하니까 엄마가 나무라면 애가 잠시 기가 죽죠.
왜? 엄마의 힘이 나의 어디 안에 침투되었습니까? 나의 까불락 까불락하는데 내 힘에 침투 되었죠. 적당한 선에서 어떻게 해야 해요? 전적으로 엄마 말 다 듣는 것도 아니지만 한 2주 동안은 듣는 척 해야 되죠. 그것을 조종하는 막이 뭡니까?
그 주체는 외부의 힘에 의해서 변한다? 안 변한다? 아니죠. 주체라는 막은 늘 존재하지만 내일은 내일 또 무슨 힘이 올지 모르고 내 마음도 어떻게 될지 모르고 늘 바뀌죠. 한 가지 바뀌지 않는 것은 이 힘에 눌려 살고 어떤 때는 힘에 반항한다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죠.
엄마 한 시간만 게임한단 말이야 하고 달려들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결국 뭐냐 외부의 힘, 내부의 힘의 막이 내가 되고 나는 내일 되면 또 바뀌죠. 그 힘이 구조가, 가말리엘 힘의 구조에 현재 누구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까? 사도의 운명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다들 그렇게들 생각했죠.
여기서 한 번 봅시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도를 가말리엘의 힘이 구조에 집어넣었습니까? 그것은 사도가 말하는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것이 과연 말만 그럴까요? 그것이 과거의 한 사건에 지나지 않을까요? 지금은 그게 효과 없는 일일까요? 그건 힘이 아닐까요? 아니죠. 드디어 그야말로 누가 봐도 가말리엘은 존경받고 이 힘의 구조는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가운데서도 41절의 말씀처럼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인하여 능욕 받는 것을 합당하게 여기면서 기쁨으로 공회앞에서 나와서 또 전도를 하죠.
사람들에게는 가말리엘 이 사람이 왕초가 되는데 사도들은 실제적으로 누가 왕초입니까? 그 이름? 예수님의 이름이 왕초가 되죠. 그러면 이 사람 보기에 사도들은 그냥 예수 용어만 나불나불 하는 것 같지만 막상 사도는 너희들이 가말리엘에게 굴복하는 것처럼 사도는 실제적으로 누구 힘에 굴복합니까? 말만이 아니라 살아 계신 성령의 부활의 힘에 굴복하면서 힘과 힘의 충돌이 일어나죠. 구조와 구조의 마주침. 이것이 아이티 지진이 아닙니까? 이게 지진입니다.
주님의 힘은 어두움이 있어야 빛의 값을 해요. 복음은 항상 세상 사람이 다 굴복하는 힘 속에 있을 때 복음의 값을 합니다. 모든 사람이 "예" 라고 할 때 혼자서 "아니오"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의 등뒤에는 주님의 십자가의 부활이 쫓아가기 때문에, 하나의 그릇이기 때문에 그것을 사도는 말하기를 다른 사람에게는 진노의 그릇이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여기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의 집착이다. 사도의 용기다. 자신들이 기도 많이 해서 능력 받았다. 성경 공부해서 되는 것 같다 하죠. 사도는 말합니다. "미쳤나 내가 성경 공부 많이 해서 생기게.." 지금 내 안에서 나는 하나의 껍데기, 하나의 막에 불과하고 내가 지금 세포를 유지하고 사는 것도 주님께서 살려서 사는 것이고 바깥에 있는 힘도 주님이 주신 힘 갖고 사는 것이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그래서 사도가 하는 말이 주여 어서 저를 주님의 얼굴을 보게 하옵소서. 저들은 하는 일을 모릅니다. 저들은 구조도 모르고 힘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들이 모르는 힘 안에, 구조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 구조 안에 놓인 주체입니다. 하나의 용기고 그릇이고 막이다는 것입니다. 이 가말리엘이 뭐라고 설득하느냐면 가만 내둬라 어떤 사람은 까불대다가 자진해서 무너졌고 어떤 사람은 사백이나 따르다가 흩어진 것처럼 가만 내비둬 라고 하는 것입니다(행5:36~39).
가말리엘이 이런 소리를 한 것은 성령을 안 받았으면서도 근사하게 보이고 아주 신앙적으로 보이고 성화의 최고로 거룩하게 보이는 것이 마지막 주권 사상이라는 것, 소위 칼빈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주권사상. 이게 가말리엘의 신학이예요. 칼빈 개혁주의가 구원시켜 주는 것이 아닙니다. 루터가 구원시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구원시켜 주지 신학했다고 돈벌이는 될지 모르지만 구원은 되지 않습니다. 주권사상이 아니고 오직 십자가죠.
주권사상 전하는데는 이슬람교가 주권사상이 최고 주권이예요. 얼마나 주권이면 금요일에 다 엎어집니다. 그 사람들은 자살까지 해가면서 알카에다, 자살하면 천국간다고 해서 소년들이 자살하잖아요. 주권이 아닙니다. 이것은 가말리엘의 주특기고 인간이 여기서 나오는 신학의 한계가 주권사상인데 사도는 뭐냐? 십자가가 내 안에 움직여서 나는 행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나는 백퍼센트 이미 주님의 공로로 이미 그 노선에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이런 복음은 돈 되는 것도 출세하는 것도 아니고 사업 잘 되는 것도 아닌데 이것을 백퍼센트 믿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께서 지금도 예수님과 죽으심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는 것처럼 모든 성경을 보면서 우리 대신 이미 누가 돌아가셨구나 그래서 살았구나 알고 이제부터 세상에 나가서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 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