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091231a행5장12절a집단적낮추심의성령언어십자가부활a
2010-02-24 17:18:14 녹취 : 이미아
성경이 이렇게 있고 지금 우리가 있잖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이렇게 본다면 성경을 볼 때 그냥 보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뭐가 있느냐면 선입견이 있죠. 선입견이라고도 선이해라고도 합니다. 가다머라는 사람은 선이해라고 했는데 선이해를 가지고 성경을 보니까 여기 두 사람 세 사람 있다면 같은 성경구절을 봐도 각각 다른 해석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각각 가지고 있는 선이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이해라는 것이 어디서 나왔느냐면 자기 나름대로의 역사가 있어요. 현상학이라는 것이 등장하는 것이 이 대목인데요. A B C 라는 사람이 자기의 과거와 자기의 현재와 자기의 미래상을 갖고 있는데 미래를 예지라고 하고 쉬운 말로 기억, 또는 어려운 말로 파지라고 하는데 어렵게 하지말고 그냥 기억. 현재는 이것을 재조립하는데. 자기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을 때 이 과거는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현재가 재조립한 과거에 일어난 일 중에서 재조립하면서 여기서 뭐가 일어나느냐면 과장, 편집이 일어납니다.
내가 고등학교 때 17대 1로 싸웠는데 과장되게 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구라(거짓말)다 싶지만 여러번 사용하면 자기를 잊어버려요. 진짜 자기가 17대 1로 싸운것 처럼 느껴져요. 사람이 자기 과거 중에서 자기가 현재 필요한 것만 골라냅니다. 참 재미있어요. 과거 여러 사건 중에서 현재 필요한 것만 끄집어 내잖아요. 이게 전체 과거를 대변하면서 하나의 층을 이루면 그 다음에 필요할 때 또 끄집어 내면 이 층 말고 또 딴 층이 있죠. 두 개 층 세 개 네 개 층 이것 자체가 현재가 조립한 또 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과거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뒤죽박죽입니다. 그저 현재 자기 과시하고자 하는 용도로서 온갖 자료를 다 끄집어 내는 것입니다. 특히 부흥사들 과거이야기 할 때 자기가 현재 유리한 것만 골라내거든요.
이렇게 과거 현재 미래가 되어버리면 이것을 가지고 가다머는 역사의 지평이라고 합니다. 역사의 지평이라는 말을 일반인들은 잘 이해를 못해요. 역사의 지평이라는 말은 뭐냐면 저 사막이나 해변가에 가면 수평선이 있죠. 그런데 멀리서 안 보이는데 해변 가까이 가면 안 보이는 돛단배가 잘 보이잖아요. 왜그러냐하면 그만큼 가까이 갔으니까 수평선이나 지평선이 더 넓어진거죠. 그러니까 이 사람의 지평이라는 것은 자기가 살아왔던 환경의 평수, 백 평 이백 평... 평수 있잖아요.
평수니까 아무래도 이것은 나이에 따라서 연세 많은 사람의 평수가 넓어지겠죠. 나이 많은 사람이 양보하라고 그러잖아요. 나이 어린 사람을 보고 철이 없다고 그러죠. 이것을 가지고 어려운 말로 하면 역사의 지평이 좁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애는 철이 없어 가지고 시험 못 치면 아파트에서 자살하는 애가 있어요. 수능 못 쳤다고 막 자살해요. 그것은 자기 과거 현재 미래에서 과거 부모님이 닥달 내는 것 반드시 성적 얼마해야 해! 현재 보니 성적이 안 나왔으니까 미래를 보니 엄마한테 꾸중듣는 미래가 예상되잖아요. 이게 바로 자기의 전이해가 되는 거예요. 미래를 먼저 생각하니 걱정이 늘어나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지라고 하는데 미리 했는데 미리가 미리가 아니라 현재 미리를 자기 것으로 소지해 버리는 거예요. 참 어리석죠. 그 때 되봐야 아는데 자기 경험상 분명히 부모님이 집 나가라 꼴 보기 싫다 그 따위 성적가지고 우리 집안 사람이 아니야 우리 집은 다 판사 의사인데 너는 어디서 돌연변이처럼 잘못 태어나서 분명히 이렇게 할거라고 미리 예상하고 그 때 자기로서 어떤 대책이 안 설 때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이래 되는 거예요.
이것이 선이해니까 이 이해를 가지고 교회와서 성경에 눈을 떠서 성경을 보게 되면 이것은 그 자체의 역사의 지평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상학이라는 것이 무엇이냐면 이것을 괄호를 치자 이 말입니다. 이제 이해됐으니까. A라는사람, B라는사람, C라는사람 다 괄호를 쳤을 때 내가 하는 판단을 없다고 치고, 없다고 해도 없는 것이 아니고 있는 것이지만. 일단 중지를 해 놓고 없다고 했을 때 ABC모두 할 것 없이 모두 공통적인 것이 뭐냐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통 작업이 아닙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것, 그걸 찾아 내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궁금한 것은 "그러면 목사님 이 사람들이 찾아 냈습니까?" 이것이 궁금하죠? 찾아 냈죠. 찾아 냈으니까 현상학을 학문으로 하는 것이죠. 찾아 냈으면 찾아 낸 내용이 뭡니까? "노에마(Noema)노에시스(Noesis)"노에마라는 것은 내가 의식하는 작용, 내가 의식하는 대상. 이것을 찾아 냈는데요 이걸 가지고 환원이라고 합니다. 판단 중지에서 환원해 버리면 그 다음에 이것이 어떤 점에서 효과가 있느냐 이것이 얼마나 참 중요한 이야기냐 어떤 점에서 중요하냐면 전에까지 이 현상학 판단중지 이것을 모르고 안하게 되면 성경을 보더라도 선입관이니까 선입관 조사해 보면 자기 존재거든요. 나는요 나는요 맨날 나는 나는.. 내 존재는 내 존재라는 이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자기 존재에서 뭐가 나오겠습니까? 질문이 나오겠죠. 그러면 성경을 보고 교회가서 하더라도 여기서 답은 어떤 범위에서만 한정이 되느냐면 내가 궁금한 것만 뽑아 낼 뿐이죠. 그러니까 성경 자체가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 하나님이 누구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필요한 것을 달라는 말이야 이 뜻입니다. 내가 필요한 것. 지금 몸 아프단 말이야 그러니까 빨리 어떻게 기도하면 병이 낫느냐 그 이야기를 해달라는 말입니다. 이런 식입니다.
자기 존재죠. B는 자기 존재. C도 자기 존재. 자기 사생활 문제 어려운 문제 이런단 이 말이죠. 그런데 판단중지가 되어 버리면 이런 존재 문제가 아니고 인간이라면 인간의 의식은 어떤 한계를 갖고 있느냐 한계가 있어 버리면 질문 자체가 한계를 가지고 있어요. 이 말은 질문이 틀릴수도 있어요. 질문 자체가 틀린 질문이니까 만약에 틀린 질문을 던져놓고 정답을 원한다면 이 정답은 필시 악마로부터 나올수가 있죠. 내 질문 자체가 나의 이기적인 욕심을 가지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응답이 그게 합당하다 하는 이 말은 분명히 이것은 내 욕망을 긍정하는 악마적인 작당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현상학에서는 악마라는 말을 하지는 않고 오류라는 말을 하지만. 분명히 오류적인 답을 나는 히히덕 거리며 좋다고 응답받았다고 "아 역시 하나님은 살아계셔!" 이렇게 혼자 착각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런 점을 어떻게 하느냐 질문 자체가 한계가 있을 때는 질문을 어디서 찾아야 하느냐 내가 성경을 질문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나에게 질문하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 오늘 교회 왔습니다 하나님 오늘 성경을 봅니다 자 하나님 저에게 뭘 원하십니까?" 질문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질문이 오게 되면 나의 주체가 누구한테서 오게 되어 있습니까? 내가 산다는 목적이 내 존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존재하는 것 때문에 내가 종으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그런 주체가 예수님한테 가 있고 나는 주님의 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인맥 관계가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특징이 뭐냐 CBA 이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동일한 질문을 던지면 동시에 그 질문 따라서 동일한 답이 나오겠죠. 그러니까 이것이 정답이잖아요.
여기는 병들었다 여기는 사업이 안된다 여기는 가정의 고부간에 갈등이 있다 이렇게 가지고 오더라도 나중에 교회와서 판단중지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하는대로 딱 해보니까 너는 병을 통해서 영광 돌리고 너는 이런 것을 통해서 영광 돌릴 수 있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하라는 공의, 보편적인 해답을 얻을 수가 있다는 이 말이죠. 그러면 서로가 서로에게 아쉬운 것을 도와줄 수가 있죠.
예를 들어서 내가 건강한 것은 기도를 많이 해서 건강한 것이 아니고 저 사람도 나보다 기도를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암에 걸렸다 그렇다면 현재 내가 건강한 것은 기도의 효과를 보는것이 아니고 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구나! 사람들은 이미 챙겼다고 여긴 것은 질문을 안 해요. 사람이 얼마나 욕심이 많은지 이미 가졌다고 여기는 것은 절대로 두 번 다시 말을 안 꺼냅니다. 하나님 이것은 기본이고 그 다음에 더 주셔야 합니다 라는 식으로 나오죠. 그런데 이렇게 되어 보니까 현재 내가 기본이라고 여기는 것도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저 사람은 아픈데 나는 아프지 않고 건강할까? 주님의 일을 하라고 건강하구나 해답이 나와요. 먹든지 마시든지. 사업이 어렵다 하지만 너보다 더 어려운 사업을 하는 사람도 있고 가정이 어렵다 하지만 부모 안 계신 분도 있고 이처럼 해서 우리를 낮추는...성경에 해답이 있는데 그 해답이 뭐냐? 십자가에 죽기까지 마음을 낮추라 너는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그 예수의 마음은 십자가의 공의에 같이 죽는 마음, 모든 것을 드리는 마음, 소지하는 마음이 아니라 내가 짐을 내려 놓는데서 오는 내 존재의 가벼움. 내 짐이 아니고 주님의 짐으로 있는 채로 다 맡겨버리는, 나는 몸무게는 느낄 수 없어도 존재의 무게는 굉장히 가볍죠. 직장에 가면 하나님 오늘도 무슨 일을 주실 것입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옛날에는 뭐냐하면 직장에 자기 계획 다 있고 이 문제는 하나님 내가 기도했으니까 반드시 응답해 주셔야 합니다 하고 하나님을 가지고 놀려는, 하나님을 종 부리듯이 부리려는 그러한 선입관. 자기 과거 현재 이렇게 해 주시면 나는 스타가 됩니다는 자기 나름대로의 역사관을 판단중지를 하는 것입니다. 괄호를 쳐 버리면 남는 것은 이 괄호 안에 있는 것이 내 욕망이고 죄고 마귀의 시험이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이번 1월 27일 저의 논문에 포인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논문 초록에 보면 제일 처음에 나오는 것을 초록이라고 하는데 전체 주제가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 우리가 이해하는 이해한 그것이 진짜 성경 말씀을 훼방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초록에...성경 말씀은 이것이다 라고 여겼던 그것이 내가 원했던, 내가 바라고 있던 그 성경 말씀의 응답이 도로 진짜 하나님의 뜻을 모독하고 짓밟는다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성경 해석을 다시 봐야 됩니까? 라고 질문을 던지면서 논문을 썼습니다.
(성경 정경 형성 근거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 신앙 공동체가 서로 동의할 수 밖에 없는 동의된 것만 추려서 된 것이다 이렇게 보죠. 그런데 그 전에 반드시 절대적인 사도권이 있습니다. 사도권의 특징은 예수님의 부활을 접한 자들 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실존이 좀 달라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 근거가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거예요.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하므로 말미암아 이 자체가 모든 성경을 결정한다든지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의 근거로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부활이!! 목사들이 이것을 놓치고 있어요. 그런데 성경의 어떤 해석을 해도 십자가 부활이 나와야 할텐데 그게 아니고 인간의 야망을 들어주는 것으로 나와 버리면 이것은 사도가 알고 있던 복음하고 달라요.
사본이 있다는 이론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새로운 것이 발견된다면 수정할 것이냐 교체할 것이냐 하는 문제, 그 이론 자체가 성경에서 나온 이론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사도가 살아 있을 때 이미 결정되어 버렸습니다.
요한 계시록 마지막에 보면 이 말씀 위에 더 보태고 빼면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은 사도가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걱정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보는 토대하고 사도가 보는 토대가 십자가 부활의 근거해서 우리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도의 성경의 촛점은 십자가 부활로 모아집니다.
그 뒤에 교회가 나오는데 교권교회, 천주교의 시작인데 이것은 교회도 아니고요. 처음의 초대 교회는 십자가 부활했기 때문에 그들이 기대한 것은 오직 재림밖에 없었어요.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만나면 인사가 그거였습니다. 할렐루야가 아니었습니다. 할렐루야는 요새 부흥회 때 지어낸 것이고요. 초대 교회의 인사는 "주께서 꼭 오시니까 조금만 참읍시다" 였습니다.
그 당시에 책이 그렇게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윤곽이 안 잡힌채, 왜냐하면 책이 필요 없는 것이 사도가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사도가 죽으면서 "내가 남긴 성경으로 결정된 것만 끝이다" 이렇게 했기 때문에 그 뒤에는 사도의 성경을 통해서 초대 교회처럼 십자가, 부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이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여기서 주의할 것은 안 계신 분이 다시 오신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 다시 오시는 거시죠. 다시 오시는 것이 아니고 이걸 가지고 현시 다시 나타남이죠.
베란다 커텐이 있는데 그런데 안 보입니다. 주님이 어디 계신가? 베란다에 주님이 계십니다. 안 보입니다. 하지만 베란다에 있는 커텐이 계시가 쫙 걷히면 예수님 거기 계셨네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 편지에 나옵니다. 주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마지막에 보면 보라 내가 너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할 것이다(마28:20).
예수님이 계시는데 문제는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왜 안보이느냐? 성령이 하실 몫이 있기 때문이죠. 지금은 보이지 않는 성령에 의해서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서 신앙의 증거를 찾는 것이 아니고 보는 것에서 신앙을 찾는 것은 다 구라고 사기다는 것입니다.)
선입감으로 이미 출발한 것은 판단중지가 되어야 하고 질문을 누가 해야 한다? 하나님이 질문을 해야하고 질문과 더불어 뭐가 겸해서 온다? 답도 함께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보면 구조라고 하는데 매트릭스 침대 밑에 있는, 매트릭스라는 영화도 원투쓰리 나왔는데 구조를 매트릭스라고 합니다. 컴퓨터에서 매트릭스라는 구조가 있죠. 여기 지점, 여기 지점, 여기 지점이 있는데 여기 지점을 예를 들어서 다니엘, 여기 지점을 예레미야, 여기 지점을 이사야 이렇게 있다면 우리는 이 지점을 간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지점을 가지고 이것을 구조에서 위치라고 하는데 이 위치를 묵시적 위치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도 성도면 지정을 해 주는데 성령께서 우리에게 점을 찍어줘요. 너 위치는 이 위치다. 그러니까 옆사람 위치를 부러워 해서는 안 돼요. "아 나는 저 집안에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으냐" 이렇게 남의 위치를 부러워 해서는 안 됩니다. 거지 나사로는 이 위치에 있죠. 각각 위치가 달라요. 문제는 이 위치가 고정적으로 나만의 위치로서 폐쇄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십자이잖아요. 옆에 위치하고 다 통하도록 되어 있고 이 통하는 위치는 전체 위치와 다 통하도록 되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 위치와 다 통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걸 가지고 고린도전서에서 같은 지체가 한 사람이 울면 같이 울고 웃으면 같이 웃는다는 것입니다. 전기가 통한다. 그런데 같은 교인들이 운다는 말이 아니고 이 성도를 이동시키는데 뭐가 이동되느냐 예수님의 피가 이동됩니다. 피가 이동되어야 어떤 효과가 있느냐면은, 완전히 매트릭스 원투쓰리 이야기 하는 것 같아~ 이 위치를 누가 공개하느냐면 악마가 공개하는데 악마가 뭘 가지고 공개하는 줄 알아요? 악마가 피 흘리고 드라큐라처럼 공개하는 것이 아니고 악마는 우리의 죄를 가지고 정죄합니다.
"너 과거에 이런 잘못했고 예수 믿고 난 뒤에 이런 죄 지었잖아!" 정죄할 때 이 선을 따라서, 이 파이프를 따라서 뭐가 흘러야 됩니까? 피가 이렇게 내통하고 흘러줘야 우리는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에 혜택을 입는 거예요. 효과를 입는 거예요. 그래서 목사는 피만을 증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각자 위치가 있으니까. 교회 온다고 교회 위치라는 것은 없어요.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 모였다고 하늘 나라와는 통하지 않습니다. 너 어느 교회 다녀서 구원 받았어? 이렇게 묻지를 않아요.
너는 어느 위치에서 구원 받았어? 이렇게 묻는 거예요. 그래서 울산에 있는 교회나 부산에 있는 교회나 의미가 없습니다. 서울에 있는 교회도 의미가 없고. 어떤 사람은 혼자 예수 믿는 사람도 있어요. 괜찮아요. 왜냐? 위치가 피가 흐르는 위치 같으면 아무리 멀리 있어도 미국에 있어도 전부 다 한 매트릭스 한 구조속에 있기 때문에. 아까 십자가 보혈, 부활의 능력이 피와 더불어서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피가, 이 죄를 용서할 수 있느냐? 여러분이 아시는 것이지만 막상 물으면 대답을 못해요. 재원이 물으면 답변 못하지? 용서한다 하니까 그걸로 알고 있으면 이래 되잖아. 신구약 따지면 이 피가 뭐냐면 새 언약이예요. 재아 들어 봤어요? 안 들어 봤어요? 들어 봤는데 잊어 버려서 그렇지~^^새 언약인데 언약 앞에 뭐가 붙었어요? "새" 새로운 언약. 새로운 언약을 알려면 무슨 언약을 알아야 되겠어요? 새로운 것 말고 옛 언약인데 이것을 두 자로 줄이면 뭐가 되겠어요? "구약"되죠. 그러면 새로운 언약을 두 자로 줄이면 뭐가 되겠어요? "신약" 참 쉽죠.
방금 이야기한 논리를 계속 전개시켜 보면 묵시적 위치에서 뭐가 적용된다? 피가 적용되므로 말미암아 묵시적 위치를 붕괴시키려고 하는 것은 현재 이 묵시적 구조말고 그 위에 있는 구조가 뭐냐하면 악마가 짜 놓은 구조가 있어요. 거기에는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고 힘이 흘러요. 힘이 흐른다고. 그 힘은 어디서 왔느냐?
다니엘 9장에 보니까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땅을 점령하니까 땅에 있는 인간들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힘을 다룰수가 없어요. 왜? 이질적이기 때문에. 짐승은 땅에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바다에서 올라온 힘을 과시해 버리니까 기껏 땅에서 힘을 조종하던 땅의 국가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힘을 당해놓을 수가 없어요. 당해낼 수가 없죠.
기껏 인간들 것을 다루다가 인간이 아니고 악마를 다루어야 하는데 다룰 수 있는 그런것을 안적도, 느낀적도, 실험한 적도 없고 실시한 적도 없기 때문에. 그래서 마지막 때는 짐승이 땅에 올라오면 완전히 땅이 뭐로 덮히냐면 짐승의 힘으로 깔리죠. 이 구조 위에 무슨 구조가 있겠습니까? 매트릭스처럼 힘의 구조가 있죠. 힘의 구조는 한 지점 한 지점마다 뭐가 있을 때만 교차 지점에서 있을 수 있느냐 힘이 있어야 돼요. 만약에 힘이 없으면 제거되는 것입니다. 힘=자리죠. 힘은 무슨 힘이다? 자리의 힘이다.
한 번 묻겠습니다. 대통령의 자리가 대통령답게 합니까? 아니면 대통령 인격이 대통령답게 합니까? 대통령 자리죠.바보라도 대통령이면 각하 하잖아요. 그러면 목사의 자리가 목사답게 합니까? 목사의 인격이 목사답게 합니까? 목사의 자리죠. 그러니까 목사는 목사의 매트릭스를 교회적으로 노회를 만들어서 그 자리의 권위를 한껏 카리스마로 높이는 거예요.
그리고 그 자리는 집사라는 자리가 감히 목사의 자리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매트릭스, 구조화시켜 놓은 것입니다. 교회 법으로. 교회 관습이 그렇다느니 관행이라느니 이런 식으로. 왜 장로한테 돈냅니까? 관행이라는 거예요. 집사에서 직분 얻을 때 왜 교회에 뭉칫돈을 내야 합니까? 관행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 다 한다는 거예요. 해 봐라 복 받지 이래 되는 거예요.
복 받는다는 말의 의미가 뭐예요? 위의 구조에서는 복 받는다는 말은 뭘 받는다? 힘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힘을 받아서 너는 인격은 개차반이라도 어떤 힘이 되는 자리에 니가 여기에 승전할 수 있고 소지할 수 있다는 거예요. 너가 어떤 지점의 힘의 자리에 들어가 버리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너를 보는 것이 아니고 너의 자리를 보고 고개를 숙일 것이다는 이 말입니다. 아! 이것이 짐승이 만든 매트릭스입니다. 자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실 때 마귀가 광야에서 시험하잖아요. 당신이 메시야라면 당신 자리를 확고히 해라 돌이 떡이 되게 해봐라 당신은 기적의 사람이라고 사람들은 주장할 것이다. 그 높은데서 뛰어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발을 다치지 않고 천사가 나타나서 갑자기 너 다리를 받친다면 너는 완전히 왔다야 끝난거야 그리고 지금의 힘은 누가 잡고 있다? 내(악마)가 잡고 있으니까 나한테 절하라 그러면 이 모든 힘을 너와 공유하겠다. 이 모든 세상 부귀영화 다 주겠다. 이러한 마귀의 유혹이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고 우리는 아담의 속성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혹을 받아서 유혹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유혹받아서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시도때도 없이 유혹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 어느 놈이 나한테 유혹이 안오나?" 유혹을 그리워해요. 왜그러냐하면 이유가 있어요. 우리가 받은 속성이 우리 부모로부터 물려 받았거든요.
그러면 우리 부모는 누구한테 물려받았습니까? 그 부모로부터 물로 받았겠죠. 그러면 최초의 인간은 누구입니까? 아담이죠. 아담이 우리에게 물려준 그 성질, 성격, 속성은 선악과를 따 먹기 전에 성질이겠어요? 아니면 이미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 성질이겠습니까? 따 먹고 난 뒤의 성질이잖아요.
따먹었다는 말은 뭘 의미하냐면, 그 성질은 주께서 금지한 것은 무조건 다 넘어가는 성질이라는 뜻이예요. 그게 로마서 7장에, 우리 속에 A층과 B층으로 나누어져 있어요. A층은 하나님의 법을 지킬려고 합니다. 또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양심, 양심이 법을 대신하니까 양심대로 살려고 해요. 또 한 층은 법을 넘어서고 싶고 법을 위반하고 싶은 성질이 있어요. 이 두 개 합쳐서 선악 지식입니다. 이 선악 지식을 누구에게 전수 받았습니까? 아담에게 전수 받았죠.
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인도 동생을 죽이는 것이 나쁜 줄 알면서도 가인 내부에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보다 더 센 놈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은 죄가, 강아지가 문만 열면 확 뛰어들듯이 죄가 문에 바짝 엎드려 있느니라 가인아 너는 그 개를, 그 죄를 쫓아내야 한다. 그 흉물을...그런데 쫓아낼 수 있는 위력이 없어요. 그 개를 허용하게 되면 그냥 동생을 죽여버리죠. 죽여 놓고 그 다음에 책임은 하나님한테 돌리죠.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이게 겉으로 보면 아우는 아우 따로 나는 나 따로 이렇게 되어있죠. 그런데 이것은 얕게 본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내가 살인할 수밖에 없는 정황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내 앞에 내 동생을 태어나게 했고 그 동생과 나 밖에 없는 구조가 아니고 동생하고 나하고 같이 엮어서 같이 돌아가는 구조를 하나님이 조성해 놓고 나는 내가 원치 않는 동생이 있는 구조를 내가 만들었습니까? 그런 뜻입니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아우가 없었으면 내가 죽일 사람도 없잖아요.
아우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은 아우의 제사는 받고 내 제사는 받지 않으므로 본의 아니게 나는 착한 인간인데 하나님이 편애를 두는, 선호하는, 편견을 갖고 있는, 차별을 둔 동생의 제사를 받으므로 말미암아 졸지에 나로 하여금 살인자로 만든 책임은, 아우를 지키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고 아우를 누가 지켜야 한다? 아우를 주신 하나님 당신이 지켜야죠. 왜 살인한 나한테 책임을 묻습니까? 살인 동기와 원인 모든 정황은 하나님이 제공했는데...가인말이 맞잖아요? 가인 말이 맞죠. 맞는 거예요.
왜? 가인의 음성은 오늘도 목사나 교인들에게 지금도 세상에 나가면 무수하게 듣습니다. 유영철에게서도 듣고 정치에서 낙선한 사람한테서도 듣고 모든 만나는 사람으로부터 가인의 음성을 듣습니다. 저는 가인의 음성이 아니고 아담의 속성, 그리고 그것은 누구 목소리냐? 그 놈의 목소리가 아니고 내 목소리인 것입니다.
내 안에 그 놈 목소리가 있는 것입니다. 넘어서라 금지한 것을 넘어서라 너가 금지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부러 너가 그것까지 알면 하나님이 될까봐 금지한 것이다. 넘어서기만 하면 하나님이 알고 있는 정보를 빼내서 너도 자립할 수 있는 하나님처럼, 힘이 되는 것이다. 이 목소리는 죽지 않고 아직도 우리 속에서 살아나고 있어요. 계속해서.
그래서 옛 언약이라는 것은 바로 이 점을 말해요. 이미 토대가 있죠. 우리 속에 이미 A층, B층이 있죠. 누가 우세합니까? B가 항상 우세해요. 이 구조를 익히 주께서 아시기 때문에 옛 언약에서는 무엇을 주었습니까?
약을 올립니다. 말씀을 지켜야지~ 안되는 줄 알면서도 말씀을 지켜야지~ 탐낼 줄 알면서도 탐내지 말아라~ 십계명 마지막에.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의도를 모르고 저는 탐내지 않았습니다. 저 놈은 탐냈지만 저는 탐내지 않았습니다.
자꾸 회칠한 무덤에, 평토장한 무덤에 페인트 칠한다고 안에는 시기와 미움과 질투가 살인과 간음이 가득 들어 있으면서도 안 그런 척 하면서 계속해서 성화라는 이름으로, 교회 열심히 봉사하는 이름으로 그 지층의 두께를 점점 더 덧칠해 가는 거예요.
이것이 뭐냐하면 옛 언약이예요. J. M 절망입니다. 어두움입니다. 이번 요한복음 강해가 어두움입니다. 어둡지 않으면 빛이 빛으로 보이질 않습니다. 꼭 어두워야 빛이 좋은 줄 알아요. 어두움, 절망 있어야 그 위에 새 언약 옵니다. 왜 주께서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고, 명령을 해 버리면 또 하나의 질문이잖아요. 지켜라 질문이잖아요. 요구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지킬수 없는 질문과 더불어서 해답이 오죠. 해답이 뭐냐? 새로운 구조에 보면 피가 오죠.
우리는 십자가 피를 보고 어째서 내 문제 사업이 안되고 몸이 아프고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는데 어째서 피가 해답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결국엔 우리 인생은 무엇을 찾아가는 인생이냐면 피만이 해답인 것을 찾아가는 한 평생입니다. 왜 피가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 가고 죄 없는 사람이 되고 모든 문제의 해결점이 예수의 피에 있는지를....우리는 이미 피를 받고 받은 그 흔적을 추정하므로 말미암아 어디서 피가 흘러 왔는지를 찾아가는 그 과정, 우리 세월의 한 평생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가 되어서 찾아가야 하고 어떤 사람은 사모가 되어서 찾아가야 하고 어떤 사람은 장로가 되어서 찾아가야 하고 어떤 사람은 집사가 되어서 찾아가야 하고. 집사라는 것은 이미 목사와 관계가 좀 멀어졌다는 말이고 장로되어서 왜 피가 내 구원이냐는 것은 목사라는 인간과 집사보다 더 가까운 사이죠. 가까운 사이라면 어떻게 됩니까?
목사의 구조가 악마가 만든 구조였다는 것을 집사는 몰라도 누구는 알아요? 장로는 알아요. 장로는 알아서 누구한테 그 정보를 알려줘야 하느냐면 초자 집사들한테 알려줘야 해요. "당신 목사가 시키는 대로 목돈 받치지 마세요. 다 후회합니다." "장로님 우에 압니까?" "나 장로될 때 돈 받쳤거든 해보니까 다 헛거더라"그래서 장로가 그 만큼 순교에 가깝죠.
24장로가 뭡니까? 다른 말로 24장로를 세 자로 하면 "순교자"라고 합니다. 장로는 순교자죠. 그러나 집사는 뭡니까? 봉사자죠. 순교자는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아이구 목사님 그냥 나 집사로 끝낼래요. 나 장로 안될래" 누구 맘대로. 결국엔 이 집사가 하나님의 뜻이 있으면 장로 되어서 순교하는 이 길을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나온 것은요, 어제 제가 21살 먹은 청년을 만났는데 그 청년이 만나자마자 대뜸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 해요. "목사님 성령의 일을 어떻게 압니까?" 하는 식으로 물었단 말입니다. 그 청년이 묻는 것은 22살 때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며 23살 때는 24살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입니까? 라고 저한테 묻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21살 까지는 본인의 힘으로, 노동으로 애써서 왔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는 그 질문을 거꾸로 돌려야죠. 지금까지 21살 때까지 너는 성령의 은혜를 받았듯이 앞으로 22살도 지금까지 해 온 대로 그대로 갈 것이다.
이 말은 내가 여기서 뭘 할까 안 할까가 지금까지 살아 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라면 앞으로 하는 것도, 내가 선택을 하고 선별을 하게 된 그 자체도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선물이요 은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청년이 묻는 말은 성령의 은사인 것과 내 욕망으로 선택한 것과 어떤 차이가 납니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반드시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죠. 그 중에 제일은 무엇입니까? 사랑이죠. 사랑으로, "주님 사랑합니다" 라고 나오면 그것이 어떤 형편이든지 상관없이 주님이 주신 지금까지 살아 온 은혜입니다.
19살 때 몰랐죠? 20살 때 몰랐습니다. 그런데 21살 때 이걸 알았으면 소급해서 지금까지 살아 온 것 전부 다, 그 때 비록 몰랐던 그런 죄까지 전부다가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이런 개념인 것입니다.
본문이 사도행전 5장인데 같이 한 번 봅시다. 지난 시간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한 날 한 시에 죽었다는 이야기였는데 오늘은 5장 12절부터 봅시다.
12절.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생각에 모이고 13절.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14절.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15절.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16절.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받는 사람 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매트릭스 구조를 다시 한 번 봅시다. A라는 위치에서 반짝 반짝 전구에 불이 들어와요. 여기가 아주 분주합니다. 여기에 베드로가 지나가는데 침상에 누워 있는 아픈 사람을 메고 여기 왔어요. 그래서 병이 나았습니다. A지점에서. 그런데 Z지점이나 Y지점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아요.
그러면 여기서 제가 임의대로 Y지점이, Z지점이 어떤 것인지 제가 한 번 성경을 통해서 보여 드릴까요? 제가 묻는 것이 잘못이지만...A지점은 방금 읽었던 사람들이 귀신이 쫓김을 당하고 병이 낫고 요란스럽고 병이 나았다고 좋아서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Y, Z지점은 아주 조용해요. 그러면 이 지점을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4절 입니다.
1절.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절.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 을 찾지 못하였노니 3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 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절.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 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4절에서는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지만 나머지기는 전부 다 흰 옷이 더럽혀졌다 이 말 아닙니까? 지금 제가 한 예를 들어서 요한계시록 3장 1절에서 4절을 보니까 여기에는 회개하라는말이 나오죠. Y지점에. 그런데 여기(A) 지점은 여기에는 회개하라는 말이 없고 뭐합니까? 병 낫고 귀신 쫓아 내고 좋아서 난리가 났어요. Y지점을 보니까 날씨가 꾸물꾸물 해요. 회개하라 하고 너희는 살았다고 하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라는 무슨 책망같은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오늘 이 시간에 해야 될 것은 뭡니까? 이것(A)하고 저것(Y)하고 같은 매트릭스 구조니까 어떻게 연결되느냐 그 문제입니다. 왜? 똑같은 지평이니까. 똑같은 구조 속에 있으니까. 안 방에서는 술 잔 나누면서 히히덕 거리고 있는데 같은 집 구조 안에 있는 부엌에서는 아낙네가 울고 있다면 그것은 필시 그 술 잔 나누고 있는 주인 양반과 그 아낙 사이에 지난번에 부부 싸움했다는 것이 밝혀지죠. 그 부부 싸움을 밝혀내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푸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병 고침 이것만 떼어내면 안되고 병 고침 붙잡을려면 무엇도 함께 가져가세요? 회개하라 너는 살았다 하지만 실상은 죽은 자로다 까지 함께 가져가 줘야 집안 전체가 뜯겨서, 매트릭스 전체가 뜯겨서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만약에 대전 관평동 한복판에 있다면 여기를 F라고 합시다. 이곳은 병도 없고 회개도 없고 아주 조용해 지금...애들 바이올린 피아노 소리만 들리고. 이 지점도 옛날의 A지점과 Y지점과 무관하지 않고 A지점이 항상 일어날 수도 있고 Y지점도 항상 일어날 수 있고. 항상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저촉을 받고 있죠. 이렇게 해 주어야 성경 전체와 관련되어 있는 나는 하나의 위치. 이 위치를 무슨 위치라고 했죠? 묵시적 위치라고 했죠.
설명을 안 했는데 묵시적 위치라는 것은 너의 역사적 위치를 판단중지 해라. 역사라는 것은 자기만의 과거 현재 미래 고리가 있다고 했죠. 이것은 일방적인 누구의 역사입니까? 자기의 역사, 자기의 역사 지평이라고 했죠. 쉽게 말해서 자기가 살아오면서 자기만의 경험한 것, 그것을 연줄로 쭉 이어 가지고 "아! 이것은 나의 역사." 그 역사를 판단중지 해서 잊어버려라 하는 그 명령이 어디서 온다? 묵시죠.
왜냐하면 역사가 있으면 역사 나름대로의 자기 매트릭스가 있어요. 저 사람은 청와대에 아는 사람이 있고 이 사람은 대전 시청에 아는 사람이 있고 자기 나름대로의 매트릭스가 있어요. 이 매트릭스가 작살나야죠. 그러지 말고 예레미야와 나는 어떤 관계가 있으며 모세와 나와 어떤 관계가 있으며 새로운 매트릭스로 갈아 치워야 하는데 그게 바로 묵시적 위치라는 것입니다. 역사적 위치를 폭격하고 폭격된 그 자리에 묵시적 위치를 새롭게 재지정 받는 그러한 일을 성령이 하신다는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 두 관계를 연결하는데 첫째 시간 다 되어 가니까 조금만 연결하고 10분 쉬도록 하겠습니다.
기적이라는 것, 병 고침, 귀신 쫓는 것 분명히 기적이죠. 이 기적을 표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기적과 표적은 어떤 차이가 있느냐면 기적은 "나는 이런 기적을 받았다" 소유죠. 소지, 갖고 있는 것. "너는 없지? 나는 있어" "봐 없잖아? 기도해야 돼. 기도해야 기적 받아. 나는 기도해서 기적 받았어" 소지의 주체가, 주체라는 말이 어려우면 주인공. 기적의 혜택을 입은 주인공이 강조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때 들고 온 사람이 뭘 들고 왔어요?
옆집 사람들 구원하라고 들고 온 것이 아니고 우리 집 아픈 우리 시어머니 우리 시아버지 우리 아버지 내 동생 혹시 내 가족이 아프기 때문에 나와 관련된 사람, 혹시 내 자신이 아프기 때문에 나만이 베드로의 그림자가 효과를 봐가지고 나한테 그 기적이 오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때문에 온 거예요. 뭐 남 잘되라고 기적이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예요.
그렇다면 ABC라는 사람, 세 사람이 기적을 받았다고 칩시다. ABC의 각자 만약에 소유자가 따라 가버리면 세 사람 사이에 뭐가 생기느냐면 경쟁이 붙겠죠. "당신 암이 나았어요?" "아 나는 감기 가지고 갔는데 감기 낫는 것이 아닌데 그럴 것 같으면 더 센 것을 가지고 가야 했었는데" 아! 참! 백화점 상품권 가지고 애들 장난감 사서 날린 것 보다 모피를 사고 날린 것이 훨씬 낫죠. 같은 상품권이라면. 그처럼 하나님의 기적을 받을 것 좀 더 센 것을 받을 것을 에이 후회된다 이래되죠. 여기서 차별, 경쟁이 생기겠죠.
그런데 이것이 표적으로 나와 버리면 차별이 없습니다. 공통적으로 기적을 베푸신 분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기적의 주인공이 누구냐면 개인이 되지만, 각각 개별자가 되지만 표적의 단계로 들어가면, 층이 높아 버리면 이건 누구냐면 예수님이 되죠. 예수님이 표적을 일으켰기 때문에 여기 표적층에 들어가면 층이 높아요. 기적층 보다 표적층이 높아요. 기적은 누구를 보고 온다? 베드로를 보고 온다. 표적층에 들어가면 눈에 보이는 베드로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하셨다고 이미 "지평" 아까 지평 배웠죠? 세상을 보는 눈이 높이 보는. 1층에서 산을 보는 것보다 2층에서 보면 산 너머까지 보이죠. 세상을 넓게 보는 거예요.
그렇다면 기적 받은 사람이 표적까지 올라가지 못하면 어디 가겠어요? 이 사람은 기적 받고 지옥 가죠. 그런 경우가 열 명의 문둥병자가 있었는데 한 명만 돌아왔죠. 똑같이 기적 받았다고 좋다 헤헤 좋다 다음에 아플 때 올께. 그런데 그 층은 각자 개별자고. 개별자를 하나에 모여서 예수님의 종,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려면 주체가 자기에서 뭐로 바뀌어야 합니까? 표적으로 바뀌어야죠.
"주님이여 왜 저에게 기적을 베풀었습니까?" "니가 나한테 병고쳐 달라고 했잖아?" "그것은 제 욕망이었고 한 때 욕심이었구요." 병 고쳐 달라고 했다고 해서 왜 병을 고쳐 주셨습니까? 하고 따집니다. "왜 제 병을 고쳤는데요?" "아니 니가 고쳐 달래서 고쳐 주었잖아?" "아 그것은 사적인 욕망이었구요. 이제는 그 욕망에 놀아나기 싫어요." "주여 왜 저를 낫게 하셨습니까?" "너는 내 증인이 되어야 해!" "아! 그렇구나!" 나의 욕망을 누가 이용했습니까? 나의 탐심을 누가 이용하였습니까? 주님이 이용하신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탐심을 부려야 되냐? 안 부려야 되냐? 탐심을 일부러 부릴 필요 없습니다. 살아가는 자체가 탐심이니까. 그냥 거기는 24시간 기도한 것이 다 탐심이예요. 그러면 기도를 어떻게 합니까? 그냥 기도하세요. 아래층으로 와야 위층에 올 것 아닙니까? 현관문 들어서야 104호에 들어오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표적 받은 예수님 좋아하는 척 하지 마시고 여러분 욕망대로 그냥 사세요. 사시면 그 다음에 필요한 사람 주의 종 되시게 하십니다. 10분 쉬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