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100225b행6장b모세와하나님을모독하는해석b 아까 했던 것을 다시 한 번 요약해 보면 예수님에서 사도가 있고 사도에서 교회가 나오는데 교회라는 것은 반드시 사도성이라는 것이 안에 포함이 되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사도성이라는 것은 반드시 예수님에게서 나와야 하기 때문에 교회를 흔들어 버리면 그 안에 사도성이 있는지, 사도성이라는 것은 말씀입니다. 말씀이 있는지 또는 사도가 죽고 없어지고 사도가 순교하고 하는 그 가운데서 과연 교인들이 진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사도를 믿는 사람인지 분간이 된다 이 말이죠.
교회가 흔들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만약에 교회가 흔들리는데 짜증내고 화내버리면 이것은 교회를 자기의 주체와 일치시키는 것 밖에는 안되거든요. 그러면 그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고 자기 개인적 사업체가 되버려요. 목사 개인의 사업체, 내가 이 사업체 세우는데 얼마나 애썼는데...이런 식으로. 그것은 여행사 차린것 밖에 안되니까.
그래서 오늘 사도행전 6장에 보면 드디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고 무너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방법이 뭐냐하면 성전도 마찬가지예요. 성전에 보면 성전에 세 가지 과정을 겪는데 첫째는 사람의 손으로 성전 세우는 것이 다니엘에 보면 이것이 7이레, 이것을 7 곱하기 7 하면 안 됩니다. 그냥 7이레로 하면 됩니다. 7이레, 성전이 세워지거든요. 그 다음에 62이레, 이 세워진 성전 박살내는 기간이 62이레 입니다. 그 다음에 1이레, 다시 사람 손으로 짓지 않는 성전이 나옵니다. 다 합쳐서 70이레입니다.
70이레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 동안 남의 나라에 포로된 그 기간을 말합니다. 70년 동안 너희들은 이방나라에서 징벌을 받아야 한다는 기간이 70이레인데, 70이레라는 말은 1이레라는 말로 7로해서 490년이라고 하면 안되고 이레라는 시간을 주도하는 분이 너희들이 계산할 수 있는 1년 2년 3년 4년 5년 6년 7년...이 아니고 이레라는 특정시간을 주도하는 바로 인자되시는 분, 하나님께서 사람 손으로 지은 성전을 짓고 그 다음에 깨어지고 다시 사람 손으로 짓지 않는 성전을 짓는 이 전체를 가지고 인류역사 전체를 조망하는 것입니다. 전부 다 쫙 비춰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지었던 모든 성전은 다 부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 자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성전이라는 기구를 통해서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목이 곧은 백성이고 눈에 보이는 성전지어 놓고 눈에 보이는 것만 좋아하지 사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은 인정하지 않는 인간들의 근원적인 죄성에 대해서 까발리는 것입니다. 까발린다는 것은 사실은 그들에게 징벌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축복입니다. 그 축복된 관점에서 이제 7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가 설교에 들어 갑니다.
6장 초반에 1절에 보면 그 때 제자가 많아져 가지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와 싸워 가지고 눈에 보이니까 봉사나 구제에 몰두하고 있었고 자기 명단이 거기에서 누락이 되어가지고 여러가지 일이 있었던 모양이죠. 그런데 사도들이 거기에 대해서 하는 말이 교회가 구제할려고 온 것이 아니고 말씀과 기도가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 전하는 것에 전념하고 이러한 다른 일은 교회는 사도의 말씀에 지배를 받으면서 종속되면서 그들은 교회에 나오도록 하자 해서 그들에게 말씀 전파하는 것은, 말씀에 대한 진의는 사도가 주도권을 쥔 것입니다.
사도라는 것은 말씀이 우리를 지배하게 하면 되죠. 교회를 만들지 교회가 말씀을 소유할 입장은 안 됩니다. 말씀대로 했던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가 흔들려서 흩어진다는 것은 곧 말씀덩어리가 흩어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자꾸 안 흩어질려고 하면 안 돼요. 말씀안에 충만하면 흩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전도와 선교의 일환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누구의 일환이 되느냐면 온 세계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통일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잡혀있는 시나리오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가 슬퍼하거나 분노할 필요가 없어요.
특히 목사님들 보면 교회가 나란히 있으면 분명히 저 사람이 우리 교회 올 건데 다른 교회에 가면 얼마나 밉겠어요. 똑같은 미용실이 있는데 머리하러 저쪽으로 가면 얼마나 밉겠어요. 같은 횟집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신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의 구약 이스라엘 역사의 특징이 뭐냐하면 망할 수 밖에 없는 민족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를 전개합니다.
하나님이 뭉쳐줘도 흩어지고 뭉쳐주면 흩어지고 광야에서 인도하면 대들고 짜증내고 원망하고 그 역사예요. 이게 영적으로 보는 해석입니다. 육적으로 보면 자꾸 뭉칠려고 해요. "역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았어" 자꾸 이게 긍정적으로. 긍정적일 때 두 종류가 있습니다. 좁게 보면 나, 주체에 대해서 유리한 것을 가지고 긍정이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긍정의 범위가 넓어 버리면 내가 나에 대해서 잊어버릴 때 보이는 것이 비로소 보이는 그 세계를 긍정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고린도 후서1장 18-19절에 나오죠. 예수님은 모든 것이 아니오가 아니고 모든 것이 예가 된다고 하죠. 사도 바울은 개인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는 지금 고생 엄청나게 해요. 그런데 내가 나에 대해서 더 이상 신경쓰지 않도록 더 넓은 지붕이 더 큰 구조가 눈에 들어 온다는 것, 이것보다 더 큰 긍정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것이 아니오가 없다는 것, 모든 것이 아멘이 된다는 것.
이것을 아까 제가 이야기 했잖아요. 이 세상의 모든 일이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자기 숙제라고. 내가 성공 실패를 내가 판단하는 것 자체가 아주 건방지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미완료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번에 제가 따질 것인데 한국개혁주의신학의 문제가 이미, 아직이라는 것에 아직까지 빠져 있습니다. 아직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전부 다 미완료가 없고 모든게 완료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미완료라는 것이 없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도 완료고 인간이 저주 받아도 완료고 지옥에서 고생하는 인간들이 있더라도 완료입니다.
미완료라는 것은 누가 만들어 냈습니까? 주님의 완료를 육적인 해석을 하니까 완료와 미완료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미완료가 생각난다는 것은 그게 수상합니다. 거기에 누가 개입되었어요? 내가 경험적으로 긍정하려고 하는 시도, 과연 내가 구원받은 사람인지 내가 예수믿은 사람인지 어떤 아주 특이한 사건, 기적적인 사건을 내가 간증적으로 체험하므로 말미암아 비로소 내가 예수님을 예수님답게 믿을 수 있겠다고 그 증빙 자료를, 내가 납득이 될 수 있는 증빙 자료를 가질려고 할 때 완료와 미완료로 갈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이 자연적으로 움직인다는 생각은 아니고 내가 말씀을 지킨다는, 내 쪽에서 말씀을 잡을려고 할 때 항상 미완료가 생겨요. 또 마귀가 그렇게 하고. 마귀가 계속해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신자가 그래서 되겠느냐? 그런 죄를 지어놓고 니가 구원받는다고 하겠느냐? 성경봐라 이래놓고 니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어? 포기해라" 이런 식으로요.
욥기에 보면, 욥기에 있어서 완료는 이미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누가 내기했습니까? 하나님과 욥하고 내기했습니까? 사탄하고 내기하셨죠. 이게 중요해요. 하나님과 욥하고 내기를 안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욥기를 보면서 하나님과 누구하고 내기합니까? 나하고 내기하는 거예요. "하나님 내가 말씀 잘 지키는가 한 번 봅시다." 하나님은 그 포커판에 우리를 넣어준 적이 없어요. 하나님은 우리하고 장기를 둔 적이 없어요. 바둑을 안 두었습니다.
내기는 악마하고 내기를 했습니다. 악마가 하는 말이 "내가 욥을 한 번 손 좀 볼까요? " "손 좀 봐라 하지만 재산은 손대되 그 사람의 신체는 손대지 말고" 처음에 이렇게 하셨죠. 욥이 "주신자도 하나님이시고 취하신자도 하나님이시다" 무슨 뜻입니까? 나는 내가 나에 대해서 주목하지 않겠습니다. 그게 욥의 마지막 주제입니다. 욥은 자기가 믿으면서도 그 믿음이 얼마나 깊은지 나중에 알아요. 그 당시에는 몰라요. 그런 고백을 내뱉으면서도 몰라요. 본인이 어느 정도 깊은 신앙인지 몰라요.
나중에 하나님께서 "봐라 욥 봤지?" 자꾸 욥을 자랑하니까 악마가 화가 나서 "자기 신체를 손대면 아마 딴소리가 나올걸요?" 하고 "손대봐 다만 목숨은 하지 마라" 자기 목숨을 하지 말라는 것을 누가 알고 있느냐? 하나님과 사탄은 아는데 누구는 몰라요? 욥은 몰라요. 그래서 욥은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죠. 얼마나 좌절입니까? 죽여 달라고 하는데 우리 같으면 순교해 달라는 것이잖아요. 죽여 달라고 하는 이것이 하나님한테 응답 받습니까? 응답 못 받습니까? 묵살당하죠. 묵살의 기쁨이죠.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해야 되는 것은 하나님이 내 기도를 묵살하는데서 오는 기쁨을 맛보라예요. 만약에 하나님의 응답을 내가 응답받았다고 우겨 버리면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느냐면 내 시간 노선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거봐 내가 기도하니까 응답 되잖아 세 개 하니까 한 개 되잖아" 이게 우리가 이미 현재 내가 짐작했던 기도 응답의 여러 가지 항목중에서 그 중에 아홉개는 안 되도 한 개는 건졌으니까 내 기도가 어떤 중보적인 효능이 있다고 자부하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그 층에 그냥 머물러 있어요. 육적인 층에. 언제 우리가 위에서 밑으로 내려갈 수 있느냐면 내 기도가 응답이 안 되고 묵살될 때. 그러면 우리가 기도할 때 묵살되는 기도를 하면 돼요. "주여 부자되게 해 주세요" 안 그러면 "주여 죽게 하옵소서" 죽게 하옵소서 기도했는데 안 죽었을 때 그것은 은혜입니다. "아 내가 살아있는 것이 은혜지!!" 집사님들 애들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세요. "애들 잘되게 하옵소서" 기도 끝나자마자 묵살당합니다.
우리가 누구한테 묵살당한다는 것은 참 이것은 내 바깥에 누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 바깥에 누가 있으니까 내 맘대로 안되게 나보다 더 세신분이 내가 원하는 내가 만들어지지 않고 내가 만들어짐 조차도 그 분 권한에 소속이 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때는 바로 내가 만들기를 시도하는 그것이 장해가 일어날 때, 만만치 않을 때, 깨어질 때, 방해받을 때 다른 사람이 나를 움직인다. 그 움직일 때 뭐가 움직이냐면 말씀대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니라" 이거요, 우리가 이 말씀 알았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악의 뿌리니까 돈을 사랑하지 않게 하옵소서" 기도했다 이 말이죠. 이 기도 응답 됩니까? 안됩니까? 안됩니다. 인간은 이래요. 내가 돈을 사랑하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내가 돈을 사랑하지 않는 대신 다른 댓가를 나한테 주시옵소서. 그래서 나로 하여금 살 맛 나게 하옵소서. 그래서 내 기도는 응답된다는 그러한 과시를 남한테 보이는 그런 간증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을 은근히 노리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돈을 사랑하지 말게 하옵소서" 라고 할 때 항상 주께서 묻는 것은 무슨 의도로? 왜 그런 기도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미 돈을 사랑하지 않게 하옵소서 라는 그 자체가 관심사가 누구입니까? 주님한테 있지 않고 돈을 사랑하지 않는 내가 얼마나 근사한 존재냐, 여전히 자기 존재 가치를, 존재의 의미를 자기가 되찾아 오겠다는 심보인 거예요. 이 자체가 육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 말의 의도는 어떤 기도를 평생을 해도 기도 응답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말씀대로 기도 응답하지 내 기도한대로 응답되는 법은 없습니다. 이것이 누가복음 22장에 나오죠. 베드로가 하는 말이 "예수님 제가 죽어서라도 주님을 따라 가겠습니다." 하니까 주님께서 엉뚱한 이야기 해요. "너같은 인간 사탄이 잡아 먹을려고 노리고 있는데 내 기도 덕분에 니가 안 잡혀가고 있다고."
베드로가 언제쯤 자기 기도말고 자기 기도 하나 안 하나 주님이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것을 언제쯤 알겠습니까? 바로 자기 입으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때, 그리고 자기가 예수님을 버리고 고기 잡으러 갈 때, 주께서 "베드로야 오른 편에 그물을 던져라" 할 때 베드로 처음 봤던 그 이벤트를, 그 장면을 재현합니다. 재현이라는 것이 철학적으로 어려운 용어인데 같은 것을 절대로 되풀이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어요. 되풀이라는 것이 보통 의미가 뭐냐 같은 것을 두 번 되풀이 하는 것을 말하는데 같지 않는 것을 되풀이 하는 것. 어디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그래서 십자가 안에서 한 번 은혜받은 것은 두 번 다시 은혜를 받지 못해요. 두 번 다시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을 안다고 해서 찢을 필요가 없어요. 저 개는 계속해서 반복해서 우는데....성경 말씀을 한 번 지켰다고 해서 다시 지킬 수 있다는 능력은 우리한테 없습니다. 그 때 지키도록 했을 뿐이고. 그 성경 말씀이 살아서 그 다음에 자기가 5년 전에 알았던 말씀이라도 새롭게 다가오는 사태를 일으킵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무엇을 주십니까? 성령을 줘요. "구하라 주실 것이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안 줍니다. "두드리라 열릴 것이요" 성령을 줘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돌을 줄 자가 누가 있으며 전갈을 줄 자가 누가 있으며 생선 대신 뱀을 주겠느냐 하물며 너희 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장9-13절). 이것은 우리가 예의상 했던 뭐던 우리가 달라는 것하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달라는 애굽 것하고 안 줍니다. 만나를 줘 버립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항상 낯설게 다가오는 그 낯선데서 다가오는 참신함. 다시 말해서 더 이상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신경 쓸 이유가 없고 관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너는 흐름을 타라는 것입니다. 무슨 흐름? 성령께서 말씀대로 나를 사용했다는 것, 쪽집게로 꽂았으면 쪽집게가 더 세지 밑에 달린 것은 안 셉니다. 성령께서 어떻게 인도하는대로 하라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인도 받는가? 간단합니다. 바로 주께서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가를 날마다 들추어 내시면서 영광을 받습니다.
그래야만 저 사람하고, 절에 다니는 안 믿는 사람하고 똑같은 사람인데 "나는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에 구원을 받았구나!" 라는 것을 새롭게 느껴지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달라지지 않는다. 달라지지 않아야 됩니다. 왜? 달라지는 그 때부터 하나님을 버리게 됩니다. 절대로 달라지면 안됩니다.
어제도 계셨으면 오늘도 계셔야지 영원한 목자이어야지 양이 2년간 목자, 3년간 목자 계약됩니까? 이런 것 없습니다. 계속해서 목자가 있어야 하고 계속해서 지팡이 있어야 하고 계속해서 우리를 후려쳐야 됩니다.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더욱더 목자 뿐이어야 합니다. "저는 목자도 잘했지만 저도 근사했습니다." 라고 하는데 이제는 그게 아니라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나는 목자 뿐입니다" "나에게는 예수님 뿐입니다." 라는 것이 크게 다가와야 합니다.
그 내력으로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 7장에서 여기 중요한 개념의 키(key)를 쓸께요. "우리" 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우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속에서 뭘 끄집어 내느냐면 언약을 끄집어 내요. 우리 속에서 우리를 끄집어 내면 육적인 해석이 됩니다. "아, 그 우리가 우리구나!" 이렇게 되면 육적인 해석이 됩니다. 우리 속에서 언약을 끄집어 내면 우리는 갑자기 우리 눈이 공동체를 보다가 공동체를 보지 않고, 이스라엘 공동체를 광야 교회로 끄집어 낸 언약을 바라볼 때, 비로소 진짜 그 사람은 스데반 집사가 이야기 한 우리가 그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 끄집어 낸,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언약이 그 실상을, 자기 본질을 끄집어 낸 그 사건들을 나열한 것이 사도행전 7장의 설교입니다. 그러면 끄집어 낼 때 공동체가 언약 알아서 끄집어 냅니까? 맨날 주여 주여 하고 주의 이게 언약입니까?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죠. 이게 바로 부딪힘이죠. 우리라고 우기는 우리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요 라고 하는 부딪힘과 여기서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벨기에에서 무슨 사건이 일어났죠? 열차 충돌 사건이 일어났죠. 제가 그림 한 번 그리겠습니다. 이게 딱이예요. 진짜 그 열차 사고 난 뒤에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대번에 써 먹었습니다. 열차 앞이죠. 이쪽 열차 앞이 이렇게 가고 여기 열차 앞이 이렇게 오죠. 한 지점에서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충돌을 일으켰으니까 둘이 충돌된 이후에 사태가 이쪽이 찌그러지고 박혀서 저쪽이 찌그러지죠. 여기 결합된 이 부분을 보자는 말입니다. 이 결합된 이 부분에서 누가 죽어요? 내 앞길을, 내 미래에 비젼있는 나를 받아 버렸으니까 이게 내가 죄인되고 내가 죽게되죠. 그러면 나만 죽습니까?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고 마중나오다가 죽어버렸죠.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예수님이나 나나 둘 다 죽음에서 비로소 소통이 돼요. 대화가 돼요. 소통이 뭐냐? 죽음과 죽음에서 비로소 대화가 되는 것입니다. 반석이 깨어졌을 때 뭐가 나온다? 물이 나오죠. 그러니까 인간들은 항상 비켜라 비켜라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제일 기분 나쁜 것이 자기 노선앞에 누가 얼쩡거리면 제일 싫어해요. 전부 다 총으로 쏴 죽이고 싶어요.
우리 목사님도 부교역자 해보았지만 당회장 목사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부목사가 설교를 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용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종용히 불러서 "내 니 키워줄려고 하는데 니 내 아니면 벌써 짤렸어 내 때문에 살았어" 자기 앞길에 쪼다같은 목사면 괜찮아요. 그런데 똑똑하면 안 돼요. 자기 앞길에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정말 총으로 쏘아 죽이고 싶어요. 용서가 안됩니다. 이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남녀간의 싸움, 부부간의 싸움이 뭐냐하면 아내 앞에 남편이 있으니까 남편한테 대들고 그 대드는 것이 남편과 어떤 이해관계가 얽혀서 둘이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을 해야 해요. 결혼을 해야 싸움이 일어나고 싸움이 일어나야 나는 내 노선만 고집한다는 그 죄가 들어나요. 처녀들이 혼자사니까 고상한 줄 알고 있어요. 누구냐면 수녀들. 수녀들 결혼해야 해요. 중매 해주고 싶어요. 한 번 깨져봐야 해요.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것이 그냥 긍휼 긍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피해자로 오는 것이 긍휼입니다. 나의 죄 때문에 졸지에 나는 가해자가 되고, 나는 가인이 되어 버리고 나를 구원하신 분이 도리어 나에게 얻어 맞은 아벨이 된 상태. 그래서 피로 오잖아요. 그럴 때 비로소 언약이 그 순간 발현되는 것입니다. 발현이라는 것은 얼굴이 발갛게 피어오르는 것, 구체화 되는 것.
언약이라는 것은 우리가 말로하고 설명한다고 언약이 아니고 뭔가 누가 와서 자전거도 내 차에 받쳐봐야 우리는 벌겋게 올라오죠. "아 오늘 내가 흥분했구나" "오늘 과속했구나" "내가 욕심을 냈구나" 누가 뭔가 부딪치지 아니하면 자기 노선 수정이 안됩니다. 이게 인간들이 타고난 것입니다. 모든 목이 곧은 백성들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해서 맨날 본인이 얻어 터지는 것입니다. 혼자 원망을 다 받는데, 혼자 원망 받는다는 것이 누구를 대표하느냐면 모세가 여호와를 대표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망을 다 받으니까 나중에 모세가 참다 참다 못 참으니까 반석을 지팡이로 지시하라고 했는데 모세가 화가 나서 반석을 지팡이로 쳤죠. 보세요. 또 완료예요. 물은 물대로 나왔는데 모세는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고. 그럼 이 물은 누가 주었습니까? 물이 나오는 과정을 통해서 모세는 뭐가 됩니까? 모세는 죄인이 되죠.
모세가 지옥 갔습니까? 변화산에서 엘리야하고 주님하고 이야기한 사람이 누구예요? 모세는 천국 갔잖아요. 천국 간다는 것은 말씀을 위배해서가 아니라, 말씀을 위배 안 해서가 아니라 말씀을 위배 했음을 알므로서 천국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실천에 옮겼기 때문에 천국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가 한 개의 말씀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천국에 가서 면류관도 주님 발 앞에 반납하고 하는 말이 내가 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금까지 살아 온 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완료고 완성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 안에 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왜 하나님께서 언약을 그냥 주지 않고 공동체가 생기고 난 뒤에 언약이 생겼는가? 그 이유가 나옵니다. 사도행전 7장을 봅시다. 이것을 안 보고 그냥 육적으로 보면 무지무지 쉬워요. 스데반 집사는 왜 우리가 구약 성경 다 아는 것을 왜 쓸데없이 지루하게 두 번씩이나 했는가 할 것입니다. 38절~40절 봅시다.
38절.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39절.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에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40절.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이들이 누구냐 하면 이들이 광야 교회입니다. 38절에 나오죠. 광야 교회가 구약에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교회라는 용어가? 안 나오죠. 그러면 구약 전체를 뭐로 땡겨 봤다? 현재 교회로 땡겨오죠. 그러면 교회가 구약에 있었단 말입니까? 없었단 말입니까? 있은거로 보죠. 있었는데 우리라고 했죠. 아까 여기서 언약이 나온다고 했죠. 결국 "언약을 품은 우리" 그러면 오늘날 교회가 뭐라고요? 그냥 교회 간판걸고 심방만 하면 교회 입니까? 뭘 품고 있어야 된다? 언약을 품은 우리가 될 때 교회가 되죠.
그러면 그 언약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본체를 뭐로 바꿉니까? 우리를 죄인되게 하죠. 그럼 쉽죠. 다시 정리하면 교회가 뭡니까? 우리를 더욱더 죄인되게 만들기 위해서 언약이 상주하고 있는 집합체. 교회죠. 그것을 제 논문에서 "교회란 속죄 양의 표시를 지니고 있는 사람의 집합체." 그러면 뭐가 생각납니까? 요한계시록 생각이 나죠. 요한계시록에 두 가지 인이 있죠. 하나는 짐승의 인이 있고 하나는 어린 양의 인이 있죠.
속죄 양의 표시가 뭐냐하면 언약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의 언약을 뭐라고 했습니까? 새언약이라고 했죠. 새언약의 표시가 있는 사람의 집합체가 교회죠. 그러니까 교회는 뭐만 외치면 된다? 어떻게 지킬수 있는가를 외치면 안 되고 우리는 어떤 말씀도 결코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은혜 줄 자에게 은혜 주셔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여기 모였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면 그 교회 나올려면 우리는 성경 말씀을 전하면서 왜 인간은 이 성경 말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하라" "항상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라" 어떤 말씀이든지, 모든 말씀을 보면서 뭘 증거하면 됩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육적인 해석으로 이렇게 해서 자기가 지킨걸로 여기는 해석과 주님께서 이 해석을 어떻게 지키는가를 두 개를 제시해 가지고 그래서 우리는 육일수 밖에 없고 주님의 은혜로 용서 받는다 그런 식으로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를 스데반 집사는 7장에서 구약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편지도 없었고 초대 교회 초창기이기 때문에 논할 수 있는 성경 귀절은 구약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가지고 구약 때부터 교회가 있었다. 구약 때부터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를 무슨 교회라고 했습니까? 광야 교회라고 합니다. 광야 때만 교회가 아니라 나머지도 마찬가지로 교회인 이유가 그 당시에는 뭐가 있었습니까? 언약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교회라고 합니다.
결국 스데반 집사가 이 언약을 이야기 하면서 다윗 언약을 이야기 해요. 다윗 언약은 무슨 언약이냐면 성전에 관한 것입니다. 성전은 뭐냐하면은 "성전은 집이다." "성전은 하나님의 보좌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성전이 만약에 그냥 하나님의 보좌라면 뭐가 필요 없습니까? 성막은 필요할지 모르지만 성전, 곧 집을 지을 필요는 없잖습니까? 그럼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다윗보고 성전 짓는다고 할 때 짓지 말라고 하셔야죠. 그런데 지었잖아요.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잖아요. 그러니까 2번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죠. "나는 하나님의 보좌가 성전인데 왜 집을 지어? 짓지마!" 이러면 될 터인데 나는 하나님의 보좌라고 해 놓고는 집을 지라고 했으니까 2번 가지고는 모자란다는 이 말이죠.
두 번째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다 하면 "나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 안 들어간다" 집을 지어 놓고 안 들어간다고 하면 처음부터 짓지 말라고 하시든지. 성전이라는 개념은 이 두 가지를 다 끄집어 낸 틈바구니에서 나옵니다. "발생론적 성전 개념" 이라고 합니다. 발생론적 성전 개념은 무엇을 거부하느냐면 존재로서의 성전은 성전이 아니다. 성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전이 필요 없다? 그것은 아니고 거기에 있는 성전은 성전이 아닌데 성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삐죽삐죽 뭐가 나오는 것입니다.
일본의 괴기영화 링인가? tv에서 귀신 나오는 영화 알아요? 머리 푼 여자 귀신 나오는 거..그 영화를 보면 놀래죠. 왜냐하면 화면에 있는 여자 귀신은 절대로 화면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 상식이잖아요. 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성전 지으라고 했을 때는 절대로 하나님께서는 집 밖으로 못 나온다 그러니까 예배당 안에는 하나님이 있고 예배당 바깥에는 하나님이 없다 또는 제단 밖에는 못 나온다 하는 것이 상식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괴기 영화에 출연해서 머리 풀고 화면 밖으로 기어 나오시는 거예요. 그럴 때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는데, 인간을 tv로 만들고 tv이 만들면서 나는 tv에다 하나님을 가두어 두는 것이 인간의 속성인데 이 속성을 거부하시고 나라는 죄인에서 의인이 튀어나와 버려요. 제가 이야기 해도 무서워요. 나같은 죄인속에서 뭐가 나온다? 주님의 복음이 나온다니까요. 여러분 소름끼치지 않습니까? 뭐 복음을 전해야 소름이 끼치지...
지금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지요? 돌에 맞으면서 튀어나오는 것? 돌에 안 맞으면 나오지 않는 것? 돌에 맞아야만 나오는 것? "지금 주께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주여 저들이 하는 짓을 저들이 모르니까 주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세상에 그냥 용서하라고 하면 안 나와요. 또 돌에 맞아 가면서 자기가 천국 가면서 tv이 다 깨져가면서 머리 풀고 귀신 나오듯이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가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 "주여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압니까? 우리도 모르죠. 그런데 우리가 아는건 뭡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알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애들에게는 나타내시고 귀 있는 자는 귀 있다고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게 하시고 그렇다고 우리가 구원받을려고 어린아이처럼 된다고 됩니까? 안 됩니까? 안되죠. 어린아이에게 나타나시고 슬기로운 자에게는 감추시고 이 이야기를 듣고 나타내기를 기다려서 우리가 어른은 포기하고 어린애가 될려고 하는 그 방법, 이 방법이 육적인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주체가 뭡니까? 어른같은 내가 어린아이로 달라지겠다는 그 움직임, 그 의지와 행위는 누가 주도해서 일어납니까?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주도해서 일어나죠. 그 방법이 뭐냐? 약삭빠른 지혜로운 자의 방식이 되겠죠. 그러면 나타나면 곧 어린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 되면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나타나면 어린아이 되지 말라고 해도 "나는 내 스스로 구원될 수 없는 어린아이입니다." 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모든 수고와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는 존재의 가벼움, 아주 가벼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무겁고 나는 가볍고, 말씀이 내 안에 머리 푼 귀신처럼, 나는 고장난 tv처럼, 나를 통해서 고장난 tv가 계속해서 나오게 하시는 그 주인공은 누구냐? 내가 아니라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가 그렇게 길게 설교했는데 유대인들이 그 설교를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육적인 인간들이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쳤다는 것은 스데반 집사의 말을 알아 들었다는 거예요? 아니면 못 알아 들었다는 거예요? 아주 잘 알아 들었다는 것입니다. 잘 알아 들었죠. 스데반 집사가 성령에 충만해서 설교를 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성령이 충만하면 사람들이 감동하고 눈물 콧물 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보수측의 교회가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맨날 평양의 산정현 교회 따지면서 그 때 성령의 충만해서 설교해서 사람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는 거예요. 성령 충만 받으면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는 줄 알아요. 사도행전 마지막에 사도 바울이 성령 충만해서 설교할 때 유대인들이 화내고 그냥 갔습니다. 가고 난 뒤에 그 뒷 모습 보고 사도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역시 말씀대로 되는구나!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구나! 역시 말씀대로 되는구나!"
그러니까 성령 충만하면 그 결과든 그 과정이든 모든 원인이 말씀 안에서 말씀대로만 되는 거예요. 내 설교 잘한다는 쪽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말씀대로만 된다니까요. 그렇다면 설교자가 자기 설교 안 듣고 기분 나빠하고 삐지고 돌로 치고 그냥 간다고 해서 설교자가 삐졌다는 말은 평소에 설교자가 설교하면서도 본인은 말씀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설교하면서 "오늘 설교 잘 했고 감동적으로 뿅가게 설교 잘 했다 그러니까 다음 주일에 안 오기만 해봐!" 이렇게만 생각한다면 그 자체가 바로 죄가 되는데 그런 죄에서 목사가 평생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목사도 설교할 때 바로 그 점을 잊어버리고 설교한 사람 없습니다. 다 설교할 때는 "주여 오늘 설교 잘 됩니다. 제발 서너명이라도 은혜받게 하옵소서" 이걸 노리고 설교하는 거예요. 그래서 만약에 본인은 설교 잘 했는데 반응이 시큰둥하고 옆에 사람 자고 있고 설교 빨리 끝내라 하고 어떤 사람은 휴대폰들고 밖에 나가고 이렇게 하면 그 다음부터 목사가 좌절하죠. 그거 말씀대로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4장 13절 마지막 때에 내가 사도를 뭐같이 사용한다? "쓰레기같이" 내가 마지막 때에 사도와 목사들을 쓰레기처럼 취급해서 너희들은 망하고 구원받을 사람은 구원받게 하겠다고 사도 바울이 그런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제 논문의 마지막 결론 부분입니다. 사도와 목사들을 쓰레기 취급해서 갈구는 것입니다. 그래야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목사도 쓰레기조차도 사용하셔서 구원받게 하시니까. 세상에 이런 놀라운 주님의 현존함이, 실존함이 또 있겠습니까? 자기가 쓰레기 되면서 비로소 주님이 나같은 죄인을 용서했다. 그러니까 목사가 설교 해 놓고 다른 사람은 목사님 감사합니다. 오늘 설교 좋았습니다. 은혜받았습니다 라고 하는데 목사는 지금 기가막힌 거예요. 도저히 이것은 내가 받을 영광이 아니잖아요. 그걸 가지고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온유와 자비와 양선과 형제 우애와 이것이 뭐냐하면 항상 십자가로서 그 사람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나 나올 나의 열매가 아니고 주님의 열매, 성령의 열매가 튀어 나오는 것입니다. 한 번 정리하면 스데반 집사가 구약 역사를 우리라고 이야기 했고, 왜냐하면 구약은 지나간 시간이 아닙니다. 기억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기억은 오류입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를 기억한다고 하는데 십자가를 기억할 수가 없어요. 십자가는 지금 십자가지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억하게 되면 인간의 현재 자기 욕구와 섞여서 변양되죠. 무슨 변양? 주체의 변양. 변양이 무슨 뜻입니까? 모양새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내가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기억 못하고 현재 내 욕구와 욕망과 욕심과 섞여서 과거를 아주 아름답게 멋드러지게 조정해 들어갑니다. 그래서 간증은 전부 다 거짓말 입니다. 모든 간증은 거짓말 입니다. 왜냐하면 변양되었기 때문에, 변양된 주체에 필요한 변양이기 때문에 그 때 그 기분은 같은 장소에 두 번 다시 갈 수 없습니다.
헤라클레토스가 쓴 흘러가는 강물에 두 번 목욕할 수 없다. 목욕하게 되면 이미 다른 물에 목욕하는 것이지 같은 물이 아니다. 이게 뭐냐? 인간은 존재가 아니고 운동이다. 변한다는 것입니다. 변화되는 인간이 변화되는 주님을 우리가 잡아요?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잡는 순간 우리는 스톱되어 버립니다. 화살 잡아 버리면, 화살 앞의 색깔이 빨갛고 뒤의 색깔이 파랗다면 날라가면 모르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화살을 잡아야 "아, 앞부분은 빨갛고 뒷부분은 파랗구나!" 를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그 화살은 그 화살이 아닙니다. 무슨 화살이냐? 내 손에 잡힌 날라가는 화살이 아니고 가짜 화살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말씀을 지킬 때, 그 말씀은 움직이고 있는데 우리는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스톱시키는 거예요. 앞뒤를 짤라 버려요. 짤라 놓고 우리는"주여 이 말씀 제가 지켰습니다." 하는 거예요. 사실은 말씀을 지킨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흘러가는 주체를 고정된 주체로 만드는 반칙을 범하게 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은혜받았다고 좋다고 하죠. 나중에 돌아서면 그 때 너무너무 일방적이었다는 것을 알죠.
우리 교회에 어떤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의 아내가 아파요. 그래서 병원에 갔다가 쫌 나아지면 전화해서 "목사님 제 아내가 많이 나아 졌어요" "오래 갈건데요 오래 갈건데" 하죠. "나아졌어요." 며칠 지나면 "목사님 어쩌면 좋겠습니까? 더 아파요." 평소에 아내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하거든요. 기대를 하니까 뭐가 성급합니까? 내 기도가 과연 효과 있다는 것을, 성과를 빨리 보고 싶어하죠.
그러니까 조금만 빌붙을 것이 있으면 전부 다 자기 은덕으로 끌어 모아 가지고 주체의 변양, 이 주체가 바뀌어 가지고 주변의 것을 다 끌어 모아 가지고 "내 기도봐라 내 기도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잖아 그래서 나는 구원받은 사람 맞잖아" 이렇게 우긴다 말이죠. 이게 육의 열매입니다. 다른 사람이 은혜받으면 화가 나고 시기나고 불평하고 불화가 일어나죠.
성령의 열매라는 것은 나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현재 내가 왜 살아 있습니까? 안 살아 있어도 되는 나를 왜 살게 하십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는 너가 좋아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숙제할려고 너를 필요로 했다. 너는 필기도구다. 내가 너를 들어서 사용하기 때문에, 값을 주고 샀기 때문에 너 볼펜이 아니고 내 볼펜이다. 그러면 내 볼펜 같으면 뭐가 나와야 해요? 주께서 가신 같은 코스가 나와야 하죠. 십자가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나왔잖아요. 근데 스데반 집사 마지막 보니까 "주여 저들의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나왔잖아요.
그러면 스데반 집사 자기가 했습니까? 누가 했습니까? 성령이 충만하니까 주께서 스데반 집사를 볼펜으로 사용해 가지고 "주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쓰는 거예요. 그처럼 지금도 우리를 쓰시는 거예요. 쓸 때마다 우리가 바로 언약 때문에 산다는 것을 느끼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스데반 집사의 설교인데 이제 약간 내용을 더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처음에 언약이 나오죠. 우리가 나오고 언약이 나오죠. 여기 8절에 보면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아브라함이 먼저입니까? 언약이 먼저입니까? 언약이 먼저이죠. 간단한 문제입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가 먼저입니까? 이근호 목사가 먼저예요? 하나님의 언약이 먼저예요? 하나님의 언약이 먼저입니다. 그러면 교회 왜 있습니까? 교회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 모인 것입니다. 언약 때문에 구원받지 교회 있음이 나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렇게 모인 것이 교회이어야죠. 만약 어느 날 교회에서 십자가 새언약이 빠지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움직인다는 것이 빠져 버리면 그것은 바로 사교 단체예요. 사교 단체의 특징의 중심이 뭐냐하면 각자 각자가 주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이쁘게 해줄때만 다닌다는 거예요. 만약 어떤 노인네가 왔다. 그 노인네를 이쁘게 해줄려면 교회가 돈 모아서 뭐 해줘야 해요? 복지센타를 세워야 하죠. 복지센타 왜 세웁니까? 언약때문에 세웁니까? 아니죠. 이 복지센타 혜택을 받을, 사랑받을 노인들을 모집하는 것입니다.
대구 어떤 교회는 봉투에다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었거든요. 돈 맛을 들이니까 노인들이 모였거든요. 그 교회가 커지니까 옆에 있는 교회도 돈 줬거든요. 그래서 그 동네 노인들은 어떻게 하느냐면 1부 2부 예배가 있으니까 일단 이쪽에서 1부뛰고 저쪽가서 한 탕 더 뛰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거예요. 나를 사랑하는, 노인네를 사랑하는 좋은 교회가 되는 겁니다. 돈만 사랑하는 더러운 교회. 이게 뭐냐하면 육이 좋아는대로 해줘야 교회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이 좋아하는 교인들을 모아 놓을려면 처음에 왔던 육적인 이야기를 계속해줘야 계속 남아있지 만약에 육을 이야기 했는데 여러분 죄인입니다 이렇게 나오면 몰라도 흩어지게 되어있죠. 안 흩어질려면 계속해서 육적으로 점점 더 나아가줘야 교회가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교회들이 있다는 그자체도 이것도 하나의 언약적인 성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우리에게 은혜가 안 왔으면 우리도 그런 목회를 할 수 밖에 없는 목사였다는 것을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내면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나도 만약에 그런 교회가 원한다면 월급이 그렇게 많고 사택도 화려하다면 가능성이 있을수가 있죠.
그 다음에 14~16절을 한 번 봅시다. 14절.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15절.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16절. 세겜으로 옮기워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
여기서 아브라함이 죽고 난 다음에 뭐했습니까? 세겜에 내려가서 무덤을 샀죠. 죽으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왜 무덤이 있죠? 문제는 무덤이 죽은 자가 산 자를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덤에 언약이 있어요. 무슨 언약? 아브라함이 돈을 주고 샀죠. 아브라함 언약에 뒷사람들이 종속된다는 것입니다. 이삭 언약은 아브라함에게 종속되고 야곱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에 종속되고 나중에 모세언약도 아브라함 언약에 종속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이 긴긴 역사입니다. 모세와 함께 다니면서 계속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언약으로, 쉽게 갑시다. 그림으로 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 여기 계시면 유격 훈련할 때 줄이 있죠. 그 줄이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옆에 누가 있어요? 예수님 있어요. 그걸 가지고 오른편에 있다고 하죠. 사실 아브라함 언약에 같이 있죠. 줄이 축 늘어지면 이게 뭐가 되냐? 이게 바로 역사가 되죠.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 언약과 옆에 바로 늘 계시는 거예요. 이게 축 늘어지는 거예요. 축 늘어진다는 말은 결국은 아브라함 언약이 있지만 이삭 언약, 야곱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처음부터 어디로 옵니까? 아브라함 언약으로 돌아 오죠. 이것이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죠. 아브라함 자손이 열 명이 아니고 단 한 명 뿐이다.
그러면 중간에 축 늘어진 것을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율법이죠. 몇 년 뒤에 갔다? 430년 후에 율법을 주셨잖아요. 율법 준 것은 지키라는 말이 아니고 뭐가 축 늘어졌다? 위에 탱탱해 있는 아브라함 언약이, 묵시적으로 탱탱해 있고 역사에서는 축 늘어져 있고. 결국은 아브라함 언약은 그 사람이 행함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믿음의 의가 되죠. 그러면 믿음이 뭡니까? 뭐와 뭐가 연결이죠? 하나님과 예수님과 연결. 아브라함이 오징어처럼 쭉 뻗어 있는 거죠. 이게 믿음이예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죠.
믿음이라는 것은 자기 내용이 빠지고, 내 행함은 빠지고 뭐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아브라함한테 언약을 주어서 예수님 나오게 했다. 그러면 자기 안에 쭉 뻗으면 행함은 빠지고 뭐만 남아 있어요? 언약만 남아 있죠. 무슨 언약? 아브라함 언약만 남아 있죠. "하나님이 주신 언약 때문에 오늘날 내가 있다" 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 아브라함 언약의 완성을 누가 했어요? 예수님이 하셨죠. 자기는 쭉 뻗어 있고 자기는 다리(bridge)고 그 브릿지를 누가 했어요? 예수님이 언약을 이루므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공로로 나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한 집안 사람, 패밀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축 늘어지게 한 긴긴 언약의 노선입니다. 이게 430년 뒤에 율법을 주게 되면 사람들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줄 알고, 축 늘어진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줄 아는데 그것은 소창자인데 아브라함 창자, 축 늘어진 창자 백날 지켜봐야 율법을 주신 것은 죄로 하여금 더욱 죄되게 하고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사람의 입을 막고 심판아래 있게 하심이고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사람을 죄 안에, 저주 아래 가두어 두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육적인 사람은 말씀을 보고 지킬려고 할 것이고 영적인 사람은 내가 지킬려고 시도한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대비해 볼 때, 주님은 죽으심으로 지켰는데 나는 살려고 지키고 이 말씀 지켜서 더 살아 볼려고 지키는, 나는 어떻게 하든지 살려고 하고 예수님은 이 말씀 지켜서 어떻게 하든지 십자가에서 죽을려고 하고 방향이 다르잖아요. 죽음이 무덤 남기는 것, 무덤이 완성인데 우리는 안 죽을려고 버티는게 이게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그 육적인 것, 이 육과 영의 만남이 성령을 통해서 딱 대비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말씀을 대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약이 우리 속에 온 것은 이미 다 이루었다는 것을 통보하기 위해서 준 언약인데 우리는 자꾸 미완료로 내가 살기 위해서 지킬려고 했습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죄가 되어도 구원되는지를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셨다는 것이 실감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10-03-22 23:00:45 녹취 : 이미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