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100429b행7장b성령을거스리는몸b
2010-11-05 23:31:45 녹취 : 이미아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예수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것도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고. 그걸 사람들이 상상을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 있고 더불어 예수님이 있는 줄 알아요.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 여기 계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더불어 예수님이 따로 계시는 줄 알아요. 작은 하나님이 따로 붙어 있는 줄 알아요. 예수님이 아들이니까. 재벌 2세보다 재벌 총수가 낫거든요. 우리는 총수 섬기지 재벌 2세 젊은애들 안 섬긴다 이 말이거든요.
이게 바리새인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이 그래요. 이럴때 우리는 자기가 신을 알고 있다고 스스로 인정받고 싶어요. 나는 이미 신을 알고 있는데 좀더 알고 있는 신의 테두리는 맞는데 거기다 정보가 조금 모자랐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 지셨다는 추가적인 정보를 합쳐서 있는 것도 그럴듯하고 유대인보다 낫고 불교보다 낫고 우리는 온전한 신앙으로 간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그리스도와 하고 여호와 하고 정반대로 투쟁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어 지키라고 했잖아요. 예수님은 나를 믿기만 하라. 내가 너희에게 뭔가 할테니까 내가 너희에게 뭔가 한 것을 은혜로 받기만 하면 되고 이쪽은 내가 신을 향해 전도, 봉사, 헌금, 기도, 계시를 받든지, 기도를 하든지 뭔가 해야 되고 주님께서는 그냥 간음한 여인도 "너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한마디에 천국 가버리고 옆에 있는 강도도 "너가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의 말빨이 우리의 행함보다 더 월등하다는 것을, 왜 그렇게 해야 되는가를 로마서, 갈라디아서에서 편지로 낱낱이 신학적이고 내용적인 것을 다 이야기 해줍니다. 왜 주님이 말빨이 우리의 행함보다 더 월등하게 구원하는지 우리로 하여금 죄인되게 하고 율법이 주어진 것은 지켜봤자 니 속에 더러운 것을 끄집어 내는 하나의 미끼.
옛날에 우리 할아버지가 담배 피우시는데 파이프가 있으면 그 안에 니코친 재가 있을 때는 어떻게 하셨느냐면 종이를 말아요. 한지를 뾰족하게 말아서 쏙 집어 넣어서 끄집어 내면 시꺼면 재가 쑥 나오거든요. 제가 그것을 잊을 수 없는데 어릴 때 그런 것만 보고 자랐어요.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율법이 우리 입에 들어가면 쑥 들어 온다구요. 율법이 들어오면 우리 본성이 이것은 지켜서 나쁜 인간에서 좋은 인간 되어야지 라는 본성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죠.
주께서 율법으로 쫙 잡아 당기면 뭐가 들어 붙냐면 내 행함으로 구원받겠다는 것이 시커멓게 들어 붙어요. "모든 율법을 지켜도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것이다. 야고보서에 2장 10절 나오죠. "너가 이 율법을 항상 지켜야 되고 모두 지키지 않으면 저주아래 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나오죠.
사도바울이 이것을 알고 즐거웠다? 슬펐다? 어느쪽이예요? 정말 죽어도 좋아. 나 그만 살래. 더 안 살아도 돼. 내 안에 성령이 와. 그걸 고백했어요. 나는 죄인중에 괴수가 되었는데 기쁘기는 한량없이 기쁜 거예요. 마치 막달라 마리아가 울면서 향수를 다 뿌린 것처럼. 그래서 사도바울의 소원이 "내가 빨리 죽어서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소원이다" 할 정도로 너무 좋은 거예요.
그게 뭐냐하면 그동안 그렇게 알고 싶고 그렇게 뭔가 진리를 파고 소유해서 소유된 그 진리로 구원받을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사도바울은 자기가 율법의 흠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 정도로 최선을 다해서 구원받을려고 했던 그것이 한방에 갔습니다. 한방에 다 알아버렸습니다. "내가 전한 복음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니라"(갈1:8). 그리고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 배운것이 아니고 내가 예수님에 사람을 기쁘게 하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갈1:10).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사람의 기쁘게 요소 속에는 뭐가 있냐면 사람을 기쁘게 하는 그리스도, 기쁘게 하는 하나님, 기쁘게 하는 성령 들어 있겠죠. 그런데 진짜 그리스도의 종 사도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는 식으로 오기 때문에 이것을 사람이 납득해서 믿는 식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임해야 믿을 수 있는 것이 지금 내가 전한 복음이다. 복음이 믿어지십니까? 여러분 속에 여러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속에 말씀하신 성령께서 이미 들어와 계시는 겁니다.
아까 한 것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귤과 사과가 있는데 이 귤과 사과를 하나님이 주셨다 말입니다. 주신 거니까. 이것을 내가 집어 먹어 버리면 내 행함이 여기 섞여서 시커멓게 썩어 버려요. 그냥 하나님이 행하신 그대로 내 속에 들어 올 때 내 내장이 해부되고 주님의 것이 그대로 담겨있죠.
이 논리에서 보게 되면 성령께서 오시면 내 속에 육을 건드리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내 안에 뭐가 벌어지냐면 전쟁이 벌어지죠. 사사기 3장 1~2절.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하사 남겨 두신 열국은" 왜 전쟁을 알지 못한 자에게 꼭 그것을 가르쳐야 됩니까?
결국은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홀로 서게 한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아니고 뭣에 둘러싸여져 있느냐 하면 전쟁이라는 분위기가 없으면 이스라엘이라는 값을 하지 못합니다. 그 구약의 전쟁이 신약에 오면 우리 내부에 전쟁으로 바뀌게 됩니다. 성령께서 항상 우리의 육을 건드리죠. 육이라는 것은 육 안에 내 나름대로의 하나님관이 들어 있고 여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행함이죠.
육이라는 것은 행함을 이야기 하고 행함이라는 것은 나에게서부터 나와서 우리 모든 가치와 모든 의미가 나에게서 나와서 나에게로 돌아 오는 것입니다. 참, 이런 것 때문에 설교 시간에 예를 들 때에 시사적인 예. 심지어 바리새인 예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최진영 자살이라든지 법정스님 죽었다는 것이라든지 천안함 사건이라든지 목사님 그런 예를 안 들면 안 됩니까? 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교인들이 올 때는 이미 육을 가지고 왔다 이 말이죠. 육을 가지고 왔다 라는 말은 해석할 때 전쟁이라 것을 고려치 않고 해석을 하는 거예요. 전쟁은 항상 뭐가 있을 때 생겨요? 적이 있을때만 전쟁을 하거든요. 평소에 사람들이 적이 없기를 원해요. 적이 없으면 전쟁도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전쟁을 치루기 때문에 그것에 스트레스 받아요.
그래서 교회에서 와서 전쟁하고 집에서 전쟁하면 골치 아파요. 그냥 돈 버는 전쟁, 그것만 인정하고 그냥 좋게 지냈으면 좋겠다 하거든요. 그런데 인간의 이런 해석 속에는 적이 없이, 전쟁이 없는 해석을 하게 되어 있어요. 전쟁이 없으면 모든 것을 동정하게 되고, 이해할려고 애를 쓰고, 그들 편에 서고, 아주 성스러운 품성을 나타내죠. 그냥 좋은게 좋은거고 다 친하게 지낼려고 하고 좋다 이 말이죠.
그런데 제가 설교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천안함 깨졌다. 그러면 유족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만약에 내 딸이 죽었고 내 아들이 죽었고 내 남편이 죽었다면 귀에 뭐가 들어 오겠어요? 그야말로 자살하고 낙담하고 말죠. 그럼 과연 그렇게 좌절하고 낙담하고 하는 것이 바른 해석인가? 보자 이 말입니다. 결국은 누구 중심입니까? "나는 무조건 살아야 돼." 이것이 중심이 되어서 해석을 이렇게 하는 거예요. 전쟁은 뭐냐하면 내 생존에 대한 전쟁만 우리는 간주할 뿐이죠. 이것이 육인 것입니다. 살아 있으니까 계속 살아 있어야 해 하고 우리교회 교인들은 온다 이 말이죠.
그럼 목사 입장에서는 성경 해석을 성령이 하는 해석을 해야 되거든요. 성령이 해석하게 되면 이 사람들에게는 뭐가 필요해요? 전쟁이 필요해요. 지금 영적 전쟁이 일어납니다 라는 설교를 해야 하는데 저 불교 신자가 어떠니, 저 아프가스탄의 유대교들이 선교사들을 공격했다니, 저쪽에 아프리카에 가서 선교하다가 토인에게 맞아 죽었다니. 남의 이야기, 다른 나라 이야기 그런 이야기 들으면 실감이 안 나죠.
직접 우리 자신이, 그러면 아프리카 가야 전쟁 합니까? 아프가니스탄 가야 전쟁하는 거예요? 선교라는 것은 현장에서 일어나지 않습니까? 일어나거든요. 이런 것 말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심사를 탁 건드리는 거예요. 탁 건드리면서 전쟁이라는 것은 육적인 해석과 성령의 해석의 차이 사이에 지금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 그것이 뭐냐하면 만약에 내가 죽어서 지금 천국 가 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뭐라고 기도하겠습니까? "너도 언젠가 죽으니까 제발 예수님 은혜 받아 들이고 천국가서 편히 쉬자 그렇게 할 거란 말이죠. 군에 제대한 사람이 군 후배들에게 뭐하고 합니까? "어이, 말뚝 박아라 이렇게 하지 않잖아요." 참고 몸 성하게 대충 때우든지 해 가지고 빨리 제대하고 나오너라 이렇게 하잖아요.
이미 죽어서 천국 갈 사람 같으면 현재 무슨 기도하겠습니까? "고생 그만하고 빨리 올라와라" 그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을 할 것이 아니냐 이 말이죠. 그 해석을 설교 시간에 하는 거예요. 만약에 천안함에 예수님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땡 잡은 거예요. 만약에 그쪽에 지옥갈 사람 있다면 평소에 예수 잘 믿어야지 늙어서 팔십, 구십되어서 교회가야지 이러지 말고 매일같이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지금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갑자기 지금 오면서 죽을수도 있고 세상만사 아무도 몰라요. 주신자도 여호와시요. 거두어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다 말입니다.
아침에 음식쓰레기 버리는데 6시에 왔다가 8시에 왔다가 들쭉날쭉이예요. 음식 쓰레기 버리는 나로서는 골치 아파요. 언제 올지 몰라요. 주님께서 언제 가져갈지 몰라요. 오늘 밤에 내 목숨 가져가면 이 모든 재산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누가복음 12장에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 했잖아요. 창고 지어 놓고. 요새 말로 유로 펀드 넣어 놓고 빼먹겠다고 하는 것 망했잖아요. "빨리 죽어서 와" 라는 마음으로 살게 되면 펀드 넣어도 내 펀드가 아니라 주님의 펀드가 되고 보험 넣어도 나를 위한 보험이 아니라 내 자식 위한 보험이 되고 모든 것이 나는 이미 손 털었다고 유언장 쓰고 이미 이 세상 사람 아니라고 손 털고 가운데서 설거지 하더라도 나는 이 세상 사람 아니라고 마지막 설거지로 여기고 설거지 하고 모든 것이 툴툴 털어버리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털은 상태에서 애들한테 뭐하나 가르쳐도 그렇게 하고 과외를 해도 나는 간다 너는 이거나 배워라 이렇게 하시고 자유로운 가운데 할 수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말했어요. 결혼이라는 것은 둘이 함께 죽자고 하는 것이 결혼이다. 신직수 전도사님이 아직 결혼을 안 한 것은 둘이 같이 죽을 사람을 못만나서 그런 것입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둘이 같이 죽자고 하는 결혼인데 둘이 같이 살자고 하니까 니는 죽어라 나는 살께 맨날 이 싸움이거든요. 해석차이라 해석차이. "니는 왜 내 대신 안 죽어?" "미쳤나! 니가 내 대신 죽어야지." 서로 죽으래 그게 부부 사이의 갈등의 요인이 아닙니까? 가정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빨리 죽을테니까 내 죽고 난 뒤에 거름이 되어서 니나 고생많이 해라 그런 식으로.
스데반 집사의 교훈을 뭐냐하면 스데반 집사는 빨리 죽었다. 이거 였습니다. 성령 받아서 빨리 죽어라 이 해석을 가지고 스데반 집사는 신구약 전체를 해석하는 겁니다. 아직 신약이 다 안 나왔지만 자기까지 알고 있는 계시를 성령에 충만해서 이 육, 하나님을 거스리고 병든 내 마음 빨리 털어 버리고 돌에 맞아서 주와 함께 영원히 살겠다는 이야기예요.이게 실제 상황이예요.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도 이대로 갈 수 밖에 없죠. 그래서 59~60절 봅시다.
59절.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스데반 돌로 치는 사람은 스데반을 도와주는 사람입니까? 방해하는 사람입니까? 도와 주는 사람입니다. 도와 주는데 곱게 안 도와 주고 거칠게 돌로 쳐 도와줘서 그렇지.
60절.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그러니까 돌로 치는 사람에게 원망합니까? 원망할 필요가 있습니까? 원망할 필요가 없어요. 내 소원을 저들이 들어주니까. 내가 죽는 일에 자살할 수 없으니까 내가 죽는 일에 그들이 협조해 주니까 얼마나 고맙습니까? 주여 저들은 저들의 짓을 모르니까 저 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나는 죽어서 좋다마는 저들이 얼마나 안 됐습니까? 나는 죽으니까 편한하다마는 저 돌 던지는 사람들은 얼마나 할례받지 못해서 마음이 꼬였으면 나한테 돌 던지겠습니까? 주여 철딱서니 없는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라고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신 용서를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존재의 가벼움. 얼마나 가벼운지.
성령께서 풍선에다 바람을 넣으려고 휙휙 불으니까 풍선이 가벼워서 뜨는 거예요. 안에 성령이 가득차 있으니까.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죠. 성령의 예수님의 영이니까 예수님 지금 어디 계시죠? 하늘나라에 계시죠. 하늘나라의 헬륨이 풍선속에 들어오니까 우리는 하늘나라로 뜨는 거예요. 어느 쪽으로?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뜨는 거예요. 하늘나라 가스가 차니까 , 성령이 차니까 우리는 항상 땅에 것 보다 하늘의 것을 더 생각하면서 존재의 가벼움. 존재의 가벼워 지면서 "너는 이 뜨는 기분 모르지?" "너는 뜨는 기분 모르는지." "주여 뜨는 기분을 모르는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저도 이런 것을 자주 경험했습니다. 얼마 전에 개혁신학회 논문 발표하면서 경험했죠. 진짜 갈굴수도 있지만 저는 갈구기 싫었어요. 저들은 복음을 모르니까. 저들이 하는 짓을 주께서는 아시니까. 저 혼자이지만 용서가 되었어요. 8장 들어가 봅시다. 8장 1절에 보면 누가 등장합니까? 사울이 등장하죠. 그리고 7장 58절에 봐도 "성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스데반 집사의 순교가 원인일까요? 결과일까요? 스데반 집사의 순교가 사울을 바울되게 했거든요. 왜냐하면 스데반 집사의 일을 일으킨 것은 성령께서, 예수님께서 하셨기 때문에 그 예수님께서 찾아 오시면서 스데반 집사를 근거로 해서 "너가 내 제자를, 내 사람들을 핍박했다." 하면서 사울을 바울되게 하셨다 이 말이죠. 자, 그러면 스데반 집사가 원인이 될까요? 결과가 될까요?
이 점이 상당히 어려운데 우주의 구조라는 책에 보면 시간을 빵 조각으로 이렇게 표현했어요. 빵을 잘라 봅시다. 빵을 자르면 이렇게 되겠죠. 아침에 토스트 하면서 빵 자르잖아요. 빵 한면 한면이 전부 다 시간의 단면이 되겠죠. 이것을 이어보면 전체 시간이 된다 이 말이죠. 보통 사람들의 상식은 흘러간다고, 강물처럼 흐른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상대성 원리에 의하면 시간은 전체가 꽁꽁 동결 되었어요. 얼어 붙었습니다. 꽉 차버렸어요.
그래서 타임머신 타고 과거에 이순신 장군에게 가도 토스트의 단면은 그 내용이 변하지 않고 있어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면 시간을 이루는 미래가 과거에 서로 영향을 준다는 거예요. 그럼 지금 질문이 뭐냐하면 사울이 바울 될 때 스데반 집사가 원인이 되었습니까? 결과가 되었습니까? 라고 물었는데 여기에 대한 답변은 상호 주고 받게 되어 있어요. 사울 위하여 스데반 집사가 죽을 수도 있고 스데반 집사가 죽기 위해 사도 바울이 등장해서 죽을 수도 있고.
이 말은 과거, 현재가 꽁꽁 묶였다면, 얼어 붙었다면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니고 미래에서 과거로 얼마든지 올 수가 있는 거예요. 그게 변화산에서 엘리야하고 모세하고 예수님하고 함께 있잖아요. 이게 시간이 꽁꽁 얼어서 그래요. 하이델베르그의 불확정 원리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전자를 틈에다가 전자 한개를 보내니까 여기서 파동처럼 간섭 효과가 나타났단 말이예요. 전자 알맹이가 하나 나오면, 총알을 탁 쏘면 총알이 딱 박혀야 잖아요. 무슨 뜻이냐면 총알이 입자가 아닙니까? 총알을 탁 쏘게 되면 뭐가 나타나요? 총알의 표적에 구멍이 딱 생겨야 잖아요.
그런데 총알을 딱 쏘니까 저기 물결이 일어났다 뭔가 이상하죠. 물결이라는 것은 한 개만 있으면 안 되고 두 개 이상의 파를 이루어야 되거든요. 전자를 한 개 탁 쏘니까, 분명이 하나를 쏘았는데 두 개로 나누어져 자기들끼리 연못에 물결을 발생한 거예요. 이게 양자 효과라는 거예요. 이 말은 이게 미래라면 미래의 기준해서 과거가 이쪽 과거로 왔는지 과거1 과거2 어느쪽으로 과거가 왔는지 이쪽에서 한 개를 취득해 버리면 한쪽이 없어져요. 파동이든 입자든, 아니면 입자든 파동이든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어느 과거를 선택하냐는 것은 지금 선택에 따라서 과거1과 과거2 중에서 한 개를 선택할 수 있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하면 시간이라는 것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지금 내가 있기 위해서 미래의 어떤 분이 계셔서 그 분을 인하여 내가 있는 셈이 된다는 겁니다. 말은 어렵게 했지만 간단하면 그렇죠. 이걸 실제로 그렇습니까? 하면 실제로 그래요.
아빠, 엄마 돌아가시면 재원이하고 재아가 그래요. "동생아, 엄마가 그 이야기를 한 것이 이제 생각난다.""그 때 엄마가 그렇게 하신것이 우리를 위해서 하셨어." 되잖아요. 분명히 되죠. 미래의 내가 되기 위해서 어느 날 과거에 하나님께서 엄마에게 그 일을 시켰다고 해석해도 되고 또는 엄마 입장에서 "애야 니 피아노 좀 쳐라" "피아노 쳐라" 지금의 키우신게 원인이 되어서 결과가 잘 치는 형이 될 수 있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분명히 시간이 흘러간다고 생각하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과거는 지나갔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식빵을 얼려 버리면 과거, 현재, 미래가 마치 변화산처럼 꽁꽁 같이 거기서 하나가 되어 있어요. 여기서 현대 물리학이 내린 결론은 이겁니다. "여분의 차원, 세계" 우리 3차원 말고 여분의 차원이 우리를 우리 현재 과거 원인 결과를 초월한 여분의 차원이 따로 있다 이 말이죠. 묵시적 차원이죠. 그렇게 되어서 여분의 차원에서 보면 너,나가 분리되야 개체인데 너가 나에게 내가 너에게 소통하면 개체가 없어지고 전부 다 한 몸이 되는 겁니다.
자, 그림 그려 볼께요. 봉우리 이렇게 있습니다. 구름이 여기 있습니다. 봉우리 몇 개 입니까? 네개죠. 낮이 되니까 안개가 걷혀 한개죠. 한 덩어리로 생겼으니까. 오륙도 한개잖아요. 어떻게 보면 다섯개 여섯개고. 그 밑둥지는 한개인데 우리는 돌출된 봉우리 가지고 싸우고 있다니까요. 니가 잘났네. 내가 잘났네. 사실은 한 몸에서 나온 사지입니다., 눈이요 코인데 바로 성경이 이것을 이야기 하거든요.
스데반 집사하고 사울하고 딴 몸이죠. 딴 몸인데 나중에 로마서나 요한복음 보면 뭡니까? 전부 다 뭐가 되요? 몸도 하나니 주도 하나요. 봉우리가 몇 개냐 소용 없어요. 이것은 이 땅에서 살면서, 태어나면서 습관이 뭐냐하면 너는 너고, 나는 나고. 아파트 홋수 다르고 출신학교 다르고 다 다르다 이 말이죠. 나중에 이걸 보니까 한 몸에서 나온 하나의 돌출된 혹 같은 거예요. 같은 사지다 이 말이죠.
주님 덕분에 나도 구원받고 너도 구원받고. 각자 자기 자랑하지 않고 자기 봉사 자랑하지 않고 주님만 자랑하고. 이것이 이 한 몸을 가지고 교회라고 합니다. 사적인 행함이나 이런 것이 안개 걷히듯 다 걷어내고 남아 있는 것. 우리가 우리되게 하신 그 무엇. 우리의 밑바탕. 존재의 기반. 그게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교회, 내교회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니 교인 내교인 있을 수 없고. 세상에 어느 교인도 없어요. 다 예수님의 교인이지. 예수님이 믿게 했는데 목사 지가 믿게 한 걸로 자꾸 우깁니까? 지는 하나의 돌출된 봉우리에 불과한데.
사람들 자꾸 뭔가 신비로운 안개를 깔지 마세요. 평신도하고 목사하고 차이를 두어서 여기는 근처에 오지 말고 목사는 인간이 다루는게 아니고 하나님이 다루지 이런 것 자꾸 깔지 말고 이것을 벗겨 내세요. 목욕탕 가보세요. 다 똑같지. 자기보다 더 큰 사람도 많고 겁나는 사람도 많은데. 전부 다 한덩어리로 되어 있죠. 그래서 로마서에 보면 나옵니다. 한쪽이 울면 같이 울고 한쪽이 웃으면 같이 웃을 수 있다. 한 몸이라는 예를 들때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재하하고 재원이 있으면 "내가 나 된 것은 그 때 동생이 없었으면 지금의 내가 될 수 없었어." "아니야 형이 없었으면 내가 없었어." 그 마음을 가지고 농심이라고 합니다. 농심 알아요? 라면 광고. 옛날 교과서에 나왔어요. 동생이 살림 없을까봐서 볏짚단을 몰래 넘겨 주는데 그 날 밤에 아이구 형은 식구가 많아서 먹는 입도 많으니까 볏짚단을 넘겨 주는데 아침에 보니까 분명히 내것은 없어지고 형 것이 많아야 하는데 똑같거든요, 그 다음에 보니까 또 똑같아요. 그러다 둘 다 볏짚단 들다가 달빛 나오고 만난 그 폼이 농심라면이예요. 그 그림이 농심라면에 나온 그 그림이예요.
이걸 가지고 상호 영향이예요. 인간은 상호 영향속에 되어 있다. 그것을 지난 시간에 이야기 했는데 구조예요. 포지션. 그냥 위치만 정할 뿐입니다. 사도바울은 열 세 번째의 사도로서 위치예요. 스데반 집사의 위치는 뭡니까? 고난을 받아 죽게 되어 있어요. 스데반 집사는 죽게 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죽은 거고. 사울은 마지막으로 부활 본 사람입니다. 죄인인 나에게도 주께서 나타나셔서 사도되게 하셨다. 그 위치예요.
그래서 하나의 역할이 다를 뿐이지 똑같은 형제고 자매고 그렇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성경 해석을 보면 경쟁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여러분들이 복 받아서 부자됩니다." 하는데 부자 되는 사람은 부자의 역할이 있어요. 잠언서에 나옵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 역할을 해줘야 되요. 구원받는데 아무 상관 없습니다.
구원받는 것은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사과나 귤이 그냥 나한테 들어오면 구원되는 것이지 가난해서, 부자되어서 그래서 구원받는 그런 코스가 있으면 가세요. 가난하다가 있는 살림도 털어 먹는 그래서 구원받으면 그런 코스로 가야되요. 어느 코스가 더 나으냐 하는 것은 관계 없습니다.
엘리베이터 하나 있지만 이 코스 있고 이 코스 있고 다 달라요. 전부 다 한 덩치에 속했으면 어떤 코스를 보여주던 그 사람 역할에 불과합니다. 사람이 얼굴이 다른데 어떻게 그것을 다 뜯어 고쳐가지고 똑같은 얼굴 만듭니까? 사람들이 성형 하는거 보면 그 사람에게 하자가 없는 한 안 뜯어 고쳤으면 좋겠어요. 어떤 사람은 성형 한 얼굴인지 모르고 했다가 나중에 DNA가 엉뚱하게 나와서, DNA는 성형이 안 되잖아요. 나중에 남편이 "분명히 이 얼굴이 아닌데 당신도 안 닮았는데 누구 닮았나?" 하니까 아내가 "나 뜯어 고쳤다." 하고 고백을 하죠. 있는 그대로 이 자체기 쓰임을 받으면 되요. 어떻게 쓰임 받는지 8장 봅시다. 빌립이 나오죠. 8장 26절.
26절.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
빌립집사가 남쪽으로 간 것이, 빌립이 가서 에디오피아 내시가 구원을 받은 것이 빌립이 원인입니까? 결과입니까? 서로가 원인도 되고 결과도 되죠. 에디오피아 내시를 위해서 빌립이 있을 수 있고 빌립을 위하여 에디오피아 내시가 그 때 마차를 타고 갈 수도 있는 거예요. 내가 전도하면 안 돼요. 내가 전도한다는 것이 있을 수가 없어요. 전도를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누가 원인? 예수님이 원인이 되어서 하나의 구조상 배치가 되어 있을 뿐이예요.
격자구조에서, 정육면체 격자 구조에서 A지점에서 B지점이 서로 이어질 줄 몰랐죠. 그런데 어떻게 C지점을 통과하면서 C와 A를 만날 때, 나는 D를 기다렸는데 C가 통과할 때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겁니다. 나는 그럼 앞으로 D 말고 C를 만나야지 하지만 A나 B나 C나 다같이 무빙, 움직인다. 누구에 의해서? 이 구조 전체가 가만히 있지 않고 주님에 의해서 움직이거든요. 움직이면서누굴 만날지 몰라요. 한 번 만났다 헤어지고 헤어졌다 또 만나고 누구를 만날지 모릅니다.
목회를 하면서 교인들 하고 헤어지면 슬퍼요. 또 만나면 반갑고 반가웠다가 또 헤어지면 또 슬프고. 복음 버리고 돌아간 사람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어요. 보고 싶어서. 다시 돌아 온 사람도 있지만. 언제 돌아갈지 모르지만. 늘 생각해요. 마주치고 마주치고 마주치는 겁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어나 내려가라 했다' 이 말이죠. 29절에
29절.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를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사람들이 성령님에게 뭘 빼냐면은, 자기가 돌아오는 행함을 주장하기 때문에 성령이 빌립더러 할 때 성령을 빼버려요. 빼버리든지 성령을 자기 힘으로 간주해서 하든지. 그럼 성령님이 주인공이 아니고 누가 주인공 입니까? 자기 자신이 주인공으로 돌변해 버립니다. 그렇게 되버리면 해석이 또 자기 위주로 해석을 하게 되요. 이것은 성령께서 빌립더러 했다 이 말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어떤 분이 질문하기를 "목사님. 빌립은 성령께서 어디 가라 하는데 지금은 성령께서 저보고 어디 가라 안 합니까?" 그럼 제가 답변하기를 "지금 성령께서 설거지 하라." 고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움직이는데, 격자구조를 움직이는데 꼭 자기가 움직여야 된다고 생각해요. 가만히 있는 것도 주께서 가만히 있게 하셨는데 그 점을 생각 못하고 자기가 예상한대로 코스를 움직여야 꼭 성령께서 움직인다고 착각을 하게 되요.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는 이유가 뭡니까? 기도원에 안 올라가고 밑에서 기도해도 되는데 꼭 지가 "분명히 기도원에 올라가서 기도하면 뭘 하게 되면 효과 보고~" 지가 시나리오를 지가 짜는 거예요.
TV드라마 같은 거 잘 안 보는데 후딱 지나가는 것을 보면 전부 다 정상인이 아닌 것 같아요. 미친사람들 같아요. 그런데 왜 사람들이 드라마에 미칩니까? 내가 평소에 꿈꾸던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TV밖에 없거든요. TV에 나오는 남자들 한결같이 젊은데 다 CEO예요. 다 사장님들이예요. 다 그래요. 그리고 전부 다 재벌들이고. 그리고 TV에 나오는 여자들도 꼭 집에서도 양장하고 화장하고. 내가 만드는 것 같으면 화장 다 지우도록 만들겠어요. 그리고 간호사도 전부 간호복 미니스커트 입고 있어요. 세상에 그런 병원 못봤거든요. 전부 다 바지 입고 돌아다니잖아요.
이것은 사람은 자기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자꾸 일어나기 때문이예요. 그런데 성령께서는 예상밖에. 너가 예상하는 것은 다 피해갑니다. 육과 성령은 전쟁중이기 때문에, 우리 속에서 자꾸 싸우기 때문에. 그래야 성령께서 우리 원대로 안 해줘야 우리가 나중에 뭐라고 하냐면은 "이것은 성령께서 하셨습니다." 하는 말을 하죠. 만약에 우리 예상대로 하게 되면 뭐라고 합니까? "이것은 사실은 제가 예상한 건데." 이렇게 된다 말이죠. 성령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는 것은 반드시 우리가 예상밖의 일을 하게도 하시고 안 하게도 하시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성령께서 인도를 하는데 어디로 가느냐면 32절에 보니까
32절.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성령께서 지적하는 중심 귀절. 성경에 많은 귀절이 있는데 중심 귀절의 핵심이 뭐냐하면 바로 어린 양이 나오죠. 성령께서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성경을 보게 하셨고 성경을 펼치게 하셨고 해석을 못하고 있을 때에 빌립이라는 사람이 와서 마차에 올라 타서 해석을 할 때 해석의 중심이 뭐였냐면 어린 양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고 난 뒤에 에디오피아 내시는 세례받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는 핵심 귀절이 있겠죠.
그 핵심 귀절은 반드시 어린 양하고 관련되어 있어요. 뭘 행하라가 아니라. 어린 양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것이 모든 성경 귀절의 해석이 됩니다. 그림 한번 그려봅시다. 예를 들어서 여기 창세기1장이 있고 이사야 53장 있고 에스겔 25장이 있고 마태복음 5장이 있고 고린도후서2장이 있고 아무거나 해봅시다. 우리는 어떤 특정 귀절이 핵심 귀절 이라고 하잖아요. 성령께서는 특정 귀절이 아니라 표면적인 문자가 아니라 밑바닥에 가서 밑바닥에 있는 어린 양을 가지고 모든 해석을 분배를 해줘버려요.
그러니까 성경 귀절 이사야 53장 뿐만 아니라 다른 귀절도 얼마든지 그 중심부에 파고 들어가면 뭐가 나옵니까? 어린 양께서 다 하셨다. 그 어린 양은 세상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거든요. 어린 양 옆에 뭐가 있어요? 우리는 뭐가 되야 되요? 죄인이 되어야 겠죠. 모든 성경의 밑바닥에는 결국은 성경 귀절은 우리를 뭘로 만든다? 바로 어린 양으로 가지 않고 세상 죄 속에 포함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어린 양의 효과, 어린 양의 영광, 어린 양의 하신 일을 우리로 하여금 증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방법 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4절. 빌립도 마찬가지지만 사도 바울이 성경해석을 어떻게 하시나 보세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게 복음 아닙니까? 이 복음외에 다른 복음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뒤에 나오잖아요. 복음이 구성될려면 우리가 악한 세대가 되어야 하고 우리가 죄인이 되어야 하고 악한 세대속에 우리가 죄인 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죄졌단 말이 아니고 간음했다 살인했다 그 말이 아니고 우리를 둘러 싼 이 세대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죄 짓게 만들죠.
우리 태어나면서 부모 교육 받습니다. 부모가 죄인 이잖아요. 부모가, 친구가 시키는대로 했을 뿐이란 말입니다. 그 자체가 악한 세대속에 악한 하나의 표적으로 있기 때문에 세대속에 죄인되고 세대가 악하니까 우리는 그 안에서 죄인될 수 밖에 없고 그 다음에 뭐와 만나게 합니까? 예수님께서 자기 몸과 만나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이야기가 나오겠죠.
구조가 어린 양이 될려면 반드시 바로 어린 양 가면 안 되고 이 말씀에 의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대가 악하고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죄인됨과 어린 양과의 매치, 연결을 통해서 이것이 모든 성경 해석을 풀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목사님은 에베소서를 하든지 사사기를 하든지 여기서 툭 들어가면 여기서 뭘로 가야 되겠습니까? 여기서 둘로 가야 되겠죠. 하나는 이래서 죄인이구, 이래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모든 성경 귀절을 가지고 요한복음을 하든지 마태복음을 하든지 툭 건드리면 이 안에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아까 이야기한 그 선교단체 UBF는 모든 선교단체는 어디까지 머뭅니까? 이 성경 귀절을 외워서 하죠. 외워버리면 누가 잘났습니까? 외우는 내가 얼마나 잘났습니까? 그러면 100가지 외운 사람보다 1000가지 외운 사람이 지도자가 되겠죠. 목사는 거기다가 신학까지 했으니까 더 지도자가 되겠죠. 그러면 그 성경 귀절이라는 하는 것은 자기 자랑할 수 밖에 없는데 이게 무슨 복음입니까? 자기가 돋보이는데. 훌륭한데. 그러면 복음이 아니죠.
사도행전 8장에서 빌립이 성령을 통해서 간 것은 어린 양과 에디오피아를 만나게 함으로써 이미 우리 죄를 위해서 해결하신 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셔 가지고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라 그 분이 나의 주가 되신다는 것을 깨달아서 그 다음에 38절에 내시가 세례를 받고 39절에 주의 영이 빌립을 다시 이끌어 가버립니다.
이것을 빌립이 예상 했을까요? 전혀 예상 못했습니다. 누굴 만날지. 격자 구조에서, 주님의 구조에서 B가 C를 만날지, C가 D를 만날지 D가 A를 만날지 모르는데 한 가지 주께서 아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뭐냐하면 항상 그 만남을 통해서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그 만남은 성령께서 주선한 만남입니다. 항상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만남은 없습니까? 그런 만남은 없어요. 왜냐하면 본인은 영광 돌리는데 상대방은 삐져 있을 수 있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것은 뭐냐하면 오른쪽과 왼쪽으로 구분시키기 때문에 그것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죠. 8장 14~15절 봅시다.
14절.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15절.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것 설명하고 오늘 강의 마치겠습니다. 먼저 잘못된 해석 해볼께요. 인간이 이렇게 있는데 여기 베드로가 기도하니까 성령께서 이 사람에게 임해서 그때부터 이 사람은 성령을 소유한 사람이 됩니다. 이 해석이 잘못된 해석입니다. 아마 제가 알기로는 모든 한국교회가 다 이렇게 할거예요. 이렇게 되버리면 주체자1, 주체자2, 사도, 주체자 주체자가 있고 성령이 오게 되면 이것은 주체1과 주체2가 그대로 살아 있는 상태가 되죠. 어떤 연관성이 없죠. 내가 성령 받기를 원해서 기도하고 성령이 오게 되고 요새 유행하는 중보기도까지 포함해서, 중보기도란 말을 쓰면 안 되는데 중복기도까지 해서 이렇게 했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참된 해석은 이렇습니다. 격자 구조입니다. 격자 구조가 되게 되면 여기 나오는 이 포지션 같은 것은 누가 무빙, 누가 움직이느냐면 우리 예수님께서 포지션을 움직이죠. 만나게 해주시고 하죠. 결과가 뭐라고 했습니까? 반드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겠죠. 그러면 여기에 있는 포지션 나름대로의 주체가 되어 버리면, 다시 말해서 개체가 되어 버리면, 독자적으로 있어 버리면 뭐가 깨졌습니까? 탈락되죠. 구조에 있지 않고 독자적으로 그냥 주는 것만 받게 되겠죠. 아무 관계가 없죠.
그런데 이 주체가 여기 이게 아니고 격자 구조속에 들어가 버리면 자기가 원인도 되고 결과도 되겠죠. 왜냐하면 자기가 원인도 되고 결과가 될 때 이 원인 결과를 조성한 하나님께 영광이 되니까. 주는것만 받게 되겠죠. 성령이 오신다는 말은 성령께서는 나 밖에 모르는 니가 이 구조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눈뜨게 만들죠. 눈 뜨게 되면 이 사람에게 성령이 오게 된다는 것은 기도해서 온 것입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이 사람을 사용해서 주신 거예요. 그냥 주님께서 주신거죠.
주실 때, 그냥 줘 버리면 주체가 따로 되는데 이 사람을 통해서 주기 때문에 너나 나나 동일하게 주님께서 주신 성령을 받았다고 인정하겠죠. 말이 어려우니까 쉽게 이야기 하면 만약에 그럴 일이 없는데 집사님이 저한테 쓰라고 돈 천만원 줬다고 해봐요. 나는 집사님이 주신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목사님이 집사님 편에 천만원 주라고 한 거예요. "아이구, 집사님 고맙습니다." 하다가 인사가 싹 바껴서 "아이구, 목사님 고맙습니다." 이렇게 바뀌겠죠. 이렇게 바뀌는 것, 성령 받아야 가능합니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예요.
이렇게 바뀌니까 목사님이 "이목사님, 지금 돈 천만원 받았죠?" 집사님 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고맙습니다." 하다가 도로 집사님에게 이 돈 다시 드리죠. 드리면 모든 구조가 마치 전류에 전기가 이동할 때 흐르잖아요. 거침없이 흐르죠. 반도체나 전기 안 통하는 것 말고 다 통하잖아요. 모든 사람이 이렇게 되버리면 영광을 누구한테 돌립니까? 하나님한테 영광 돌린다는 말이 내가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가 되고 내 가치와 존재가 사라지고 주님만 계시는, 주님만 활동하시고, 주님만 일하시는 그런 격자구조에 우리가 가입되었음을 확인케 하는 그 방법이 바로 제 삼자를 통해서 마치 성령이 주어진 것처럼 그런 구조 속에 짜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령 받고 난 뒤에, 받기 전에는 성령 받았으면 했는데 성령 받고 난 뒤에는 그 성령은 내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고 나한테 성령을 위해서 기도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나도 그 일을 해야만 하는 존재로서 또 남에게 봉사하라고 주신 성령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겠죠. 사도 바울에게 성령이 왔잖아요. 가만히 있었습니까? 안 되잖아요. 사도 바울이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우물가에 사마리아 여인에게 뭐가 왔습니까? 주께서 성령이 임해서 생수를 받았죠. 여인이 가만히 있었습니까? "아이구 나는 받았다." "나는 구원받았어." 물동이 두고 집에 가만히 있었습니까? 물동이를 버려 두었습니까? 물동이를 버려 두고 "나는 주님을 만났다" 고 돌아 다니죠. 이게 뭐냐하면 더이상 나를 위한 나는 성령받은 이후에는 이게 있을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성령받고 저런 일을 하는구나!" 하면 그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이것은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내 안에 활동하라고 하니까 활동한 거야." 그야말로 하늘나라의 헬륨이 풍선에 가득차니까 이게 붕붕 뜨는 거예요.
성령이 임할 때 비로서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남을 위해서 봉사해야 할 몸이고 희생해야 할 몸이라는 것을 같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만약에 집사님한테 성령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할 때 이것을 모르는 집사님은 오해해서 "아이구 목사님이 나를 구원하실려구 성령 받으라고 하는구나!" 이렇게 오해할 것 아니냐 이 말입니다. 막상 성령이 임하게 되면 "아 그게 오해였구나! 하나님께서 나보고 일하라고 누굴 통해서 성령 받으라고 하셨구나!" 첫번째 잘못된 해석은 받아 챙기는 것이 목적이라면, 소유라면 그 소유마저 포기하고 주의 일에 나서라고 주신 성령 그것이 바른 해석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짧은 시간이지만 성경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엄연히 살아 계시는데 우리는 자꾸만 나만 살아 있고, 나만 살아 있어 내 자존심과 내 위신과 내 체면만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가진 것 다 주님의 것이오니 주의 복음을 위해서 쓰여질 수 있는 존재가 가벼운 성령 받은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