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사도행전12강-성령을 거스르는 몸101107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4. 21. 08:25


100429 행 7:51 성령을 거스리는 신체
(목 곧고 마음 귀 할례받지못한, 조상과 동일한 짖의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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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100429a행7장a성령을거스리는몸a 

2010-11-04 11:59:18  녹취 : 이미아 

  
사도행전 7장 51절 거기서부터 시작합시다.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51절.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여기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 뭐가 붙죠?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 이라고 붙죠. 보통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너나 나나 똑같은 사람이 아닐까요? 똑같은 사람인데 천안함 사건으로 죽은 사람도 있는데, 보통 일단 사람이라면 사람의 가치는 인정해 주고 들어가는 것이 서로의 상식인데 앞에 스데반 집사가 성령에 충만해서 하는 말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이렇게 해서 이것을 한마디로 하면 욕하는 것이예요. 

성경에 욕이 나와 있었요. 욕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라고 사람이 아니라 "너 사람이라고 생각해?" "어, 사람이야!" "내가 보기에는 너 사람이 아니거든" 사람이 보통 욕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폄하해서, 낮춰서 다루는 것. 그런데 상식같으면 "여러분 다 사람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바른 사람되세요." "아이구 고맙습니다." 이것은 상식이잖아요. 처음 본 사람한테 욕하면 안 되잖아요. "당신과 나는 다같이 고귀한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 섬깁시다." "예 그렇게 합시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는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해서 앞에 사람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리죠.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 여기 있다 합시다. 그래 그럼 니대로 살아버려 그래 그렇게 해 그냥 방치하면 되는데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들이 뭘 공격합니까? 거스린다는 것은 공격한다는 뜻이거든요. 성령을 공격하죠. 

구약 전체를 뚫어 나가는데 관통하는 핵심은 뭐냐하면 "적이 있는 곳에 전쟁이 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과 싸우죠. 싸운다는 말은 뭐가 있다? 적이 있다는 말입니다. 재원이 적이 있어? 적이 없지. 평소대로 집에서 연주하고 연습하고 엄마 말씀 잘 듣고 살면 적이 없어요. 

그런데 엄마가 만약에 가출했다. 너희들 잘 먹고 잘 살아라 나 더 이상 진저리 나서 못 살겠어. 이렇게 해버리면 갑자기 재원이나 재아한테 적이 생겨요. 엄마가 적이 되요. 엄마한테 막 대들어요. 철학적으로 깊이 들어가면 적이 있는 곳에 나의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단, 내가 공격하는 적이 누구냐에 따라서 내가 누구냐가 결정되요. 나는 누구누구 싫어. 싫은 사람들 대라. 그러면 싫은 사람들 반대 자리에 내 모습이 있어요. 

한국교회는 너무 적을 없애 버렸어요. 다 사랑합니다. 교회 오자마자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부터 해서 "아이구 오셨습니까?"  적이 없으니까 내가 누군지를 감추면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다가 교회에서 웃으면서 할렐루야 하다가 교회에서 뭐 투표하면 적이 생깁니다. 적이 생겨야 하는데 그동안 우리가 너무 신사답고 숙녀답게 하다 보니까 적이 없는 상태로 있었어요. 

다시 시작합니다. 지금 사도행전 7장 51절부터 하고 있는데 스데반 집사가 욕할 줄 몰랐죠? 우리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마음이 참 착하고 성품이 착해서 욕할 줄도 모르고 상대방을 저주할 주도 모른다고 생각하는데 스데반 집사가 누구 욕을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미쳤지 왜 욕을 해" 하잖아요. 이때 스데반 집사가 성령에 충만 했습니다. 

성령에 충만해서 욕을 했다는 말은 스데반 집사가 욕을 한 것이 한게 될까요? 아니면 스데반 집사 속에 있는 성령이 하게 된 것이 될까요? 성령이죠. 마태복음 10장 20절에 나오죠.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이렇게 되있어요. 

그러면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내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할려면 그 하나님께서 먼저 누구부터 꺽어 버리겠어요? 바로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꺽어 버리시겠죠. 우리는 적이 싫어요. 남하고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요. 나는 남한테 착하고 싶어요. 항상 남한테 겸손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 아이구 성령받으셔서 너무나 거룩하십니다. 그런 소리를 듣고 싶어요. 

그런데 내 속에 있는 성령은 오히려 우리의 그러한 자존심을 위한 것을 꺽어 버리시고 "너는 너 체면과 위신을 위해서 너가 있는 것이 아니야 너는 내 할 일을 위한 하나의 재료에 불과해" 우리를 꺽어 버리고 성령께서 말하게 해버리면 우리는 상대방에게 좋게 이야기 하고 싶은 자리에서도 그 사람에게 욕 아닌 욕을 하는 스데반 집사처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우리에게 찾아 옵니다

미안하죠. 굉장히 미안하죠. 왜? 둘이 원수지간이 아니기 때문에. 스데반 집사가 이런 욕을 하게 될 때 누가 돈 떼어 먹은 것 있습니까? 아니예요. 롯데 자이언트 야구가 대단해요. 심지어 은행도 롯데 자이언트가 이기면 은행 이자가 높아지는데 거기서 만약에 전라도 기아 욕을 하면 갑자기 싸움이 일어나잖아요. 

성령이 임할 때, 스데반 집사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 롯데 자이언트 편들었습니까? 그거 아니잖아요. 일본을 싫어한다? 그것도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처음부터 뭘 배워야 하냐면 스데반 집사가 성령이 임할 때 왜 사람들을 보고 욕설에 가까운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가? 이유가 뭐냐면 적이 있는 곳에 전쟁이 벌어지고 우리는 그 전쟁에 이미 가담되어 있는 사람 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이야기 했죠? 내가 누구냐는 것은 뭘 통해서 안다? 나의 적이 누구냐에 따라서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규정할 수 있는 겁니다. 내가 미워하고 싫어하고 내가 원치 않는 사람들을 통해서 아 나는 저런저런 사람들을 적으로 두고 있으니까 저것을 반대해서 빗대어서 보면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아는 거예요. 오늘날 현대인들은 너무 적이 없어요. 너무 착하고 순수하고 곱고 이슬만 먹고 사는 사람처럼 남한테 욕도 안하고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최고의, 어떤 예수 믿는 사람의 최고의 경지에 오른 그런 훌륭한 사람으로 인식되는데 성경을 보면 그렇지 않아요. 

자, 그러면 궁금한 것이 스데반 집사의 적이 뭐냐?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들이 누구를 공격한다? 항상 성령을 거스린다 라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공격한다, 하나님을 인간이 공격할 때는 어떤 상태가 되는냐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상태가 되면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영을 공격하는 바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공격한다,  성령을 거스린다 하는 것은 성령이 하는 일을 반대한다. 성령을 공격한다는 것이 맞아요. 성령은 예수님의 영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이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 아닙니까? 하는데 이거 설명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3장17절에 나오는데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성령을 주의 영이라 합니다. 로마서 8장11절에 보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되어 있습니다. 

지난 주일 낮 설교에 보면 제가 "함께" 라는 말을 했습니다. 함께라는 말은 같이 있다는 말이죠. 예수님하고 우리하고 같이 있으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피만 제공하고 우리는 피를 받아서 피를 받는 그 현장에서 의인이 되는 거예요. 무지무지 신기하죠. 이것은 연극해야 되요. 이것은 말로 해서는 실감이 안 됩니다. 제가 강의하고 있는데 집사님이 쟁반을 들고 있다가 한마디 하니까 귤을 집어서 저한테 주는 거예요. 귤은 어디에 있습니까? 제 배 안에 있죠. 

그런데 또 강의하다가 이번엔 사과를 주는 거예요. 쟁반에 있는 사과는 없어지고 그 사과는 제 위장에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성령이 하시는 일이예요. 저는 가만히 있었어요. 저는 전도 봉사 헌금 기도 예배참석도 안 했어요.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런데 성령께서 오셔서 귤, 사과 들어 온 거예요. 나중에 주님께서 내 내장을 해부해 보니까 귤 들어 있고 사과 들어 있어요. 

그게 의인입니다. 이 말이 사람들이 너무 신기하기 때문에 안 믿어요. 꼭 이런 말 하면 그럼 뒤에 나오는 것이 전도 봉사 헌금 성경보기 예배참석 금식하기 예배당다니기 이거 필요 없습니까? 필요 없어요. 왜 그게 필요 없다고 물으신다면 그것은 쟁반이 있는 쪽으로 내쪽에서 다가갔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쟁반 주위를 뱅뱅 돌아다녀도 쟁반에 있는 사과 귤이 자동적으로 톡 튀어서 내 입으로 들어 오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내손으로 귤 사과를 집어 버리면 되잖아요? 문제는 이거예요. 집으면 썩는다는 거예요. 귤은 귤대로 사과는 사과대로 썩어 버린다는 거예요. 내 손으로 찍어서 먹는 사과 귤은 나를 의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고 이미 내가 행동을 했다는 행위가 들어가서 이미 죄가 된 채로, 죄로 변질된 채로 사과와 귤이 들어 온 것입니다. 엄청난 이야기를 해서 사람들이 안 믿어요. 

로이드 죤스 목사 책이 스물 몇 권이 있는데 그것을 제가 쭉 보면서 이 사람이 뭔가 알긴 알았는데 마지막에 가서 "그래도 내가 집어야지 이렇게 나왔어요." 이 사람이 아직도 청교도 정신에서 벗어나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내가 청교도 정신 비복음이라고 내용을 썼어요. 보통 사회에서 대인관계, 예수님 빼 놓고 보통 사람들 대인관계는 상대방에게 뭘 해줘야 합니다. 직장에서 가만히 노는데 월급을 누가 줍니까?  

제가 염색 공장에 있었는데 실내가 55도가 넘는데 80도 넘는 물튀면 화상을 입을 정도예요. 염색공장 염료, 그 냄새. 또 철강 공장에 가 봤어요. 염색 공장보다 더 심합니다. 철강을 녹여서 합금을 만드는데 그런 공장에서 일하면 생각하는 것이 뭐냐면 하루에도 때려 치우고 싶어요. 그래서 어떤 공장에서는 두시간 일하고 점심시간 되기 전에 소리없이 나가는 사람들 있습니다. 잘못 들어 왔다고. 세상 일이 다 그래요. 세상일이 처음에는 다 좋아 보이지만 막상하게 되면 이거 말고 딴 일 없나? 딴 일 있죠? 주식투자. 나이든 사람들 객장에 앉아서 하루종일 전광판만 쳐다보고. 그것도 돈이 있어야지 돈 없으면 맨날 커피만 빼먹고. 

여자같은 경우 주부하면 제일 좋아요. 주부하는데 조건이 있어요. 남편이 돈 좀 벌어 주어야 해요. 남편이 벌어주는 주부같은면 괜찮은데 남편이 못 벌어주는 주부같으면 골치 아파요. 의사남편 같으면 골프치고 나이샷 하는데 보통 그렇지가 않아요. 놀고 있으면 시댁에서 불러요. 그러면 또 나가야 되요. 보통 세상일은 내가 해야 되요. 내가 해야 돈 푼이라도 만져요. 그냥 가만히 있으면 주는 법이 없어요. 그런 사고방식 가지고 하나님을 상대합니다. 하나님도 내가 해야 하나님이 내가 한 만큼 댓가를 주는 줄로 생각한 겁니다. 

사도바울이 구원받을 때 뭐했습니까? 성령을 거스렸습니다. 오히려 반대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서 족쳤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했을까요? 하나님을 도와주기는 커녕 하나님께 대들고 반대해도 구원받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나도 구원받는데 너희들 왜 구원 못 받느냐? 나같은 죄인중에 괴수도 구원받는데 어떻게 너희들이 구원을 못 받느냐? 

너희들이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할례는 껍데기입니다. 포장지거든요. 육, 혈통을 포장하는 포장지입니다. 할례를 벗겨 버리면 착해진다? 더러워진다? 더러워지죠. 왜냐하면 죄가 돌아다니는 혈관을 할례로 육체의 껍데기를 벗겨 놨는데 연탄보다 더 시커먼 죄가 그대로 노출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마음에 할례를 행하게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전적으로 죄인되게 해서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예수님이 죄인에게 뭐가 주어진다? 귤 사과처럼 예수님의 피가 주어져서 피가 있는 현장을 가지고 약속속에 뭐가 있느냐면 이것을 가지고 화목제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뭐만 제공했습니까? 하나님의 화목제물이 이루어지는 장소 제공자예요. 나는 죄많은 너를 하나님의 화목제물의 효과를 드러내는 장소로 사용하겠다는 겁니다. 만약에 천막을 친다면 주님께서 우리 속에다 이벤트를 벌이는 장소입니다. 서울사람들 시위할 때 어디로 갑니까? 서울광장에 가죠. 주님께서 우리를 성전으로 봤습니다. 성전에서 뭐가 이루어지죠?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이런 제사가 이루어지는 것이 성전이잖아요. 

이런 제사가 이루어지는 것이 성전이잖아요. 우리를 보고 걸어다니는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직장이나 어디에 있든지 간에 그 현장에서 "아, 이래서 죄인이구나!" 를 알면 되는 거예요. 죄만 알면, 죄가 있는 곳에 주님의 용서가 발휘가 되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만난 거예요. 막달라 마리아가 해야 될 일은 뭡니까? 자기는 죄를 지은 거예요. 

예수님은 간음한 여자를 만났습니다. 간음한 여자가 할 일이 뭡니까? 자기가 알아서 알겠습니다 했습니까 아니면 그냥  이미 간통을 했잖아요. 간통을 한 그 사람이 필요한 거예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예수님은 죄인이 필요한 겁니다. 

지금 이게 하얀 보드잖아요. 색깔이 하얗잖아요. 여기 글씨가 나올라면 하얀색하면 안 되죠. 무슨 색 해야 해요? 쓰면 쓸수록 검은색이 나와야 해요. 검은색 역할을 하는 것이 우리다 이 말이죠. 검은색과 하얀색이 만나서 여기에 하나의 정보가 담겨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할례, 껍질을 벗겨서 우리의 원초적인 죄를 드러내시고 그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흘렸던 예수님의 피의 만남을 통해서 율법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장소 제공자로 삼아서 예수님이 처음부터 이루어졌던 그 일을 드러낼 때 우리는 예수님의 일의 효과를 그대로 담고 있는 그릇이 되어서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나뭇꾼이 하늘에 간 이유가 뭐냐하면 선녀의 날개 옷 때문이죠. 우리는 예수님의 날개옷을 우리 안에 갖게 된 겁니다. 이것을 방향이라고 합니다. 방향성. 인간이 이렇게 있으면 화살표 방향이 거꾸로 다시 자기를 향해서 오는 이것을 보고 행함이라고 합니다. 보세요. 모든 인간의 행함은 항상 자기부터 출발해서 그 효과와 결과를 누가 항상 관측하죠? 누가 검증하죠? 내가 검증해요. 열쇠 공장에서 여섯시간 일을 했다 돈 주세요. 내가 검증한다구요. 사장님은 내가 지켜 보니까 너 놀았잖아? 내가 보니까 오후내내 놀았어. 그러면 그 사람은 오전 임금밖에 못 받죠. 자기는 우겼지만 사장은 오후내내 놀았다는 것을 봤거든요. 그러면 네시간밖에 못준다는 겁니다. 우리의 행함은 그 어떤 일이든 항상 자기쪽으로 오게 되어 있어요.  

마태복음에 20장에 보면 포도원 비유 나와요. 아침10시에 온 사람, 오전12시에 온 사람, 오후3시에 온 사람, 오후5시에 온 사람 있잖아요. 이 네사람중에 누가 삐지죠? 제일 먼저 온 사람이 삐지죠. 왜냐하면 이 사람을 뭘 생각합니까? 행함을 생각하죠. 내가 10시부터 와서 일했는데 왜 그 값어치를 안 줍니까? 제일 좋아한 사람은 오후 5시에 와서 6시에 퇴근인데 한 시간만 일한 사람들은 왠 횡재냐 하죠. 

이게 뭐냐하면 천국이라는 것은 노동의 댓가로 주는 것이 아니고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천국은 이와 같으니 어느 사람이 포도원에 이렇게 나옵니다. 천국은 이와 같으니 포도원의 일할 사람을 뽑았는데 이렇게 나와요.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가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이 말은 인간의 행함이 항상 자기 노동쪽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행함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방향이 뭐냐하면 내쪽에서 이런게 아니라 나는 한게 없는데 방향이 주님쪽에서 이쪽으로 왔을 때 이 방향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합니다. 보통 사회에서 믿는다는 말은 나는 비행기를 탈 때 파일럿트를 믿습니다. 나는 버스를 탈 때 운전기사를 믿습니다. 할 때는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이 "아, 술 안 먹었구나. 그럼 버스 타야 되겠어" 자기에게서 나온 판단에서 나온 거니까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죠.  

믿음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면 일체 행함과 상관없이 벌어지는 사건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하나의 사건이예요. 내가 생각지도 못한 사건.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 했잖아요. 문화교실 이야기 했어요. 지금 젊은애들은 몰라요. 옛날에 우리때는 문화교실해서 단체로 영화관람하는게 있는데 선생님이 "너, 너, 두 사람 남아" 자기는 가고 싶은데 남으라고 했단 말예요. 나머지 애들은 좋다고 다 갔죠. 그런데 그 애들이 극장에 불나서 다 타죽었다면 극장에 불난다는 그 정보를 미리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몰랐죠. 

나중에 보니까 산 사람은 자기 두 사람밖에 살지 않았다면 산 사람이 그 선생님보고 "선생님 왜 저를 남겨 두었습니까?" 그게 바로 예정론입니다. 아무 이유없이 "너 가지마." "가고 싶어요." "가지마 너 남아 있어." 남아 있어가 곧 구원이예요. 왜 짜증나요? 우리는 세상사람들처럼 살고 싶은데 자꾸 남아 있으래 너는 말씀안에 남아 있으래. 나중에 보니까 그들은 멸망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주께서 미리 예정하사 너는 남아 있어. 그래서 남은 자만 구원 받는다는 겁니다.  

남은 자만 구원받는다는 로마서 9장에서는 남은자만 앞에 반드시 뭐가 붙어요. 은혜로 남은 자만 구원받는다.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가 행함으로 하는 사람은 다 남은 자가 될 수 없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우리들이 안다면 현재 등치가 있는 몸. 몸이 아프든지 말든지 덩치 자체를  하나님께서 여태 남게 하신 은혜덩어리로 보면 안 되겠습니까? 

현재 이 상태를 나는 왜 이렇게 살아가는지 이유를 모르지만 이 자체가 어떤 경우를 당해도 하나님께서 항상 "너는 남아 있어 너는 남아 있어" 라고 남겨줌으로 구원이 자동적으로 성사될 수 있도록 그런 조치가 받아질 때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그 방향성이 주님께서 남겼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정리해 보면 믿음이라는 것은 반드시 행함이 있어서 짝을 이루어서 믿음이 성사된다. 행함이 아닌 것이 믿음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인데 성령은 반드시 뭐가 있을 때 성령은 성령답게 되느냐? 성령은 바로 인간이 목이 곧고 마음의 껍질이 벗겨지지 않은 그런 사람들한테 공격받는 것이 바로 성령의 일이다. 왜그러냐면 예수님의 영이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잖아요. 

십자가 사건이 뭡니까? 예수님을 누가 죽였습니까? 마음의 껍질이 벗겨지지 않아서, 죄인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고 그 죽으심을 통해서 성령이 왔기 때문에 성령도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게 계속해서 공격을 받게 되는 겁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성령님의 선물로 주어지고 행함이라는 것은 마음의 껍질이 벗져지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 행함을 주장하죠. 자, 정리 되었죠. 

그 다음에 봅시다. 그렇게 될 경우에 믿음이라는 것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나오면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니까. 

성령께서 믿음을 주시게 되면 내 행함이 아니고 은혜로 구원받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죠. 이 그림을 보게 되면 성령과 믿음과 예수님하고 전부 다 같은 자리에 있죠. 이것이 뭐냐하면 이쪽이 바로 오른쪽이고 이쪽이 바로 왼쪽이 됩니다. 7장 52절 봅시다. 

52절.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54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절.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여기서 제일 어려운 것이 뭐냐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섰죠? 아!!!지금 여기에 대해서 논문을 쓸려고 해요. 하나님 우편이 왜 필요합니까? 그냥 하나님한테 가면 안 됩니까? 하나님의 오른쪽이 왜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오른쪽. 이것을 설명해야 되겠어요. 

이것은 오늘 십자가 마을에 글 하나 올려놨죠? 우주의 구조라는 양자역학에 관한, 상대성 원리에 대한 그 책에 대한 내용을 쓴 것이 있어요. 거기에 보면 하나님의 오른쪽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냐면 사람이 오른쪽, 왼쪽을 볼 수 있는 위치를, 자리를 허용하지 않았다는 뜻이예요. 

하나님의 오른쪽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왼쪽과 겸해서 오른쪽이 나온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어서 왼쪽, 오른쪽 자기가 골라 잡을 수 있는 권한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오른쪽, 왼쪽이라는 말은 인간의 자리를 없애서 인간 자체가 하나님에 대해서 관찰할 수 있는 어떤 자리도 여기서 허용되지 않았어요. 

왼쪽에 포함되든지 오른쪽에 포함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면 이 자리는 예수님만이 이 자리에 설 수 있고 아무도 설 수 없어요. 왼쪽에 있다는 말은 마태복음 25장 31절에 나와요. 왼쪽에 있는 것은 염소고 오른쪽에 있는 것은 양이라 했죠. 예수님께서 보좌에 앉으시면 왼쪽에는 염소로 오른쪽은 양으로 구분한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좋은 고기, 나쁜 고기를 구분하죠. 

인간이 이런 하나님의 심판을 감찰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재판정에서 방청객 있잖아요. 판사있고 피고 있는데 방청객은 이렇게 이렇게 보잖아요. 그런 방청객을 다 없애버렸어요. 그러면 피고가 되든지 아니면 판사가 되든지 둘 중의 하나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오른쪽이라는 것은 너는 오른쪽 , 왼쪽을 누가 결정한다? 하나님만 감찰해서 결정할 수 있지 오른쪽, 왼쪽을 너가 관찰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우주의 구조라는 책에 보면 이 비슷한 이야기가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무도 없는 우주에 만약에 내가 회전을 하고 있다면 과연 내가 도는 것을 느낄까요? 못 느낄까요? 그 문제 나와요. 만약에 시계가 있잖아요. 내가 돌면 돌았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왜냐하면 한바퀴 돌면 시계가 보이잖아요. 

그런데 아무도 없는 캄캄한 방에서 내가 돌았다면 느낄 수 있느냐 말입니다. 위아래 아무것도 없고 혼자 있다면 자기가 돌아도 돌고 있는지 모르는 거예요. 상대성 원리라는 겁니다. 사람은 어떤 기준점이 없으면 자기가 없는 거예요. 행함이 없으면 믿음인지 구분되지 않고, 왼쪽이 없으면 자기가 오른쪽을 가는지 왼쪽을 가는지 모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오른쪽이라는 것은 왼쪽과 오른쪽이 이미 결정되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왼쪽이 아니고 어느 쪽으로 갑니까? 오른쪽으로 가시면서 누구한테 핍박을 받아요?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으므로 말미암아 오른쪽으로 간 사람과 왼쪽으로 간 사람이 이렇게 확연하게 차이나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왼쪽, 오른쪽을 가르시는데 어느 것이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우리는 몰라요. 예수님이 뭔가 움직여서 오른쪽으로 가시므로 말미암아 무엇이 왼쪽인가를 그 순간에 드러나게 되어 있다니까요. 지금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은 뭐냐하면 자 하나님 계십니다. 우리는 여기 있습니다. 자 오세요 여기에 뭘 거론하지 않습니까? 오른쪽, 왼쪽 이야기를 안 하죠. 

오른쪽, 왼쪽 이야기를 안하고 바로 어디로 가요? 바로 하나님께로 가고자 하잖아요. 하나님 여기 계시고 우리 여기 있으니까 하나님께 바로 가고자 하잖아요. 이 앞에 십자가 이야기 하고 바로 가고자 하잖아요. 글쎄, 이게 성경에 이런 내용이 없어요. 진짜 성경 내용은 하나님 십자가 통해서 가는게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꽂혀 버리면 우리는 가는게 아니고 우리는 오른쪽이 되고 오른쪽이 되면 예수님께서 당했던 그 모습대로 당하게 되면 비로서 뭐가 생기느냐면 그 맞은편에 가보면 왼쪽이 생겨요. 성경 전체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에발산, 그리심산. 에발산은 저주산 그리심산은 축복산이거든요. 왜, 이스라엘을 둘로 쪼갭니까? 둘로 쪼개가지고 하나님의 법궤가 축복산에 있지 않고 저주산에 있습니다. 저주산에 있을 때 축복을 해주게 되면 축복을 받게 되어 있고 만약에 축복산에 있으면 여기서 날라오는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왜 둘로 구분하느냐면 처음에 이야기 했듯이 적이 누구냐를 통해서 내가 규정된다고 했습니다. 내 적이 이런 사람이구나를 통해서 나는 이쪽 편에 섰구나를 확인되게 되어 있어요. 

만약에 하나님이 있고 십자가 있고 하나님 믿고 구원받겠다 라는 이런 구조를 오늘부로 철폐하세요. 이렇게 되게 되면 우리는 오른쪽에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그냥 바로 가게 됩니다. 이것은 우상입니다. 이런 하나님 없어요. 하나님은 반드시 오른쪽에 있는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고 하나님은 뒤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드러난 적이 없어요. 

하나님은 반드시 숨으시는 분이고 이사야에 나옵니다. 앞에 앞장세우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구약에서는 주의 이름이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공격하므로 말미암아 그들이 믿던 하나님은 악마였고 그들에 의해서 핍박받은 사람은 진짜 하나님이었습니다. 이 구조말고 다른 구조를 하나님이 허락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아니고 이방인들이기 때문에 항상 뭘 생각하느냐면  신은 계시다 신은 아름답다 신은 전능하다 신은 선하시다 신은 거룩하다 신이라는 개념을 설정해 놓고 그다음에 내가 어떻게 하면 신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이것을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놓고 십자가 이야기 하고 예수님 이야기 해 버리니까 이거는 누가 터벅터벅 걸어 나옵니까? 우리가 터벅터벅 걸어서 천로역정처럼 신에게 가버리는 이런 구조외에는 생각을 못해요. 

이 신은 바로 바리새인들의 우상이거든요. 바리새인들은 우리보다 뛰어난 사람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바리새인 바깥으로 못 벗어나요. 바리새인은 유대인중에 유대인들입니다. 우리는 이방인들인데 이방인들은 개만도 못한 존재예요. 유대인들은 아들이지만 우리는 아들 아니예요. 우리는 아들에게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나 먹는 개같은 존재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이 신을 섬기는데 그 신을 세자로 뭐라고 했어요? 여호와 거든요. 

그런데 여호와 믿고 지옥 갔거든요. 우리는 그 여호와 찿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무리 날고 뛰고 바리새인보다 더 뛰어난 종교인이 될 수 없어요. 우리보다 뛰어난 바리새인들이 뭘 섬겼다? 여호와 이름의 우상을 섬긴 거예요. 그게 왜 우상이냐면 그들은 누굴 공격했어요? 예수님을 공격했기 때문에 우상이예요. 지금 그 본문을 보고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성령에 충만하고 난 뒤에 유대인들에 핍박을 받죠. 그러니까 스데반 집사는 오른편에 속한 거예요. 그리고 그들은 왼쪽에 속하고 결국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보고 찾아 오라고 한 것이 아니고 너 왼쪽이야, 너 오른쪽이야 그걸 구분하기 위해서 이미 우리는 판정을 받는 겁니다. 

그런데 오른쪽은 반드시 왼쪽과 더불어서 드러난다는 겁니다. 문제 하나. 그럼 왼쪽에 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오른쪽이라는 의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혀 없죠. 내가 알아서 가는데 무슨 왼쪽, 오른쪽이 왜 필요하냐 내가 알아서 가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오른쪽 계신 분이 일을 하셨다 했고 바리새인들은 오른쪽, 왼쪽 내가 알아서 간다라는 이 충돌이 사도행전 7장의 충돌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님을 보았다." 아! 어렵죠?  다시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은 숨어 있고 하나님이 일하실 때는 반드시 오른편에 계신 주께서 일하신다. "주께서 내 주에게" 시편 110편에 나오죠. 주가 둘로 갈라집니다. 유대인들도 이 의미를 모르고 이방인인 우리같은 자들은 하물며 그것을 몰라요. 

우리 할머니가 맨날 음력 21월 28일 되면 뭐하는 줄 아세요. 항상 궁시렁 궁시렁.. 내가 새벽에 부엌에 가서 몰래 봤어요. 새벽 네시에 종이를 태워요. 신기했어요. 거기다 종이가 중력의 법칙에 의해서 하늘로 올라가요. 사실은 종이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가스가 나와서 그 가스가 공기보다 가벼우니까 올라가는데 나는 어릴 때는 과학 공부를 안 해서 종이가 올라간 줄 알았어요. 비는 거예요. 그저 우리 새끼들 남산위에 노루새끼들마냥 잘 뛰어 놀게 하시고.. 이게 삼신 할머니에게 비는 거예요. 

나중에 신학을 공부해 보니까 정월대보름이나 명절 전날에 불켜놓고 있거든요. 불 안 끄거든요. 불 끄면 복이 안 온다고요. 새벽에 가서 비는 것은 그 할머니가 알고 있던 신은 오른쪽, 왼쪽이 없어요. 신 거기 계시고, 나 여기 있으니. 신이시여! 기다리소서. 내가 정한수 떠 놓고 내 순순한 마음을 드러 내놓고 당신에게 가리다. 그겁니다. 그것을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랐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우리 할머니의 신학이 있는데 하나밖에 없어요. "지성이면 감천이라" 이것이 그대로 오늘날 교회되었어요. 정성이 지극하면 신도 감동해서 복을 안줄래야 안 줄수가 없다는 겁니다. 성경을 다 덮어버리고 모든 교인들은 간증을 들어요. 어떻게 정성을 했더니만 어떤 효과 봤습니다. 목사님 그 이야기만 해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짓말만 해달라는 거예요. 

현재 이러한 난처한 형편에 있는 나를 벗어나게 할려면 시키는대로 할테니까 뭐뭐를 행하게 되면 빨리 이런 어려운 난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병이 낫고 애가 공부가 잘하고 사업이 잘되고 교회부흥 되고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습니까? 이거 달라는 거예요. 왼쪽, 오른쪽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 나오니까 아, 십자가 믿으면 복 주시는구나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십자가 믿으면 복을 주는 것이 아니고 이미 너는 십자가 믿게 되면 우리 자리는 없어지고, 우리 자리가 누구 자리냐면 주님의 화목제물이 설치되는, 천막이 설치되는 주님의 성전이 되는 겁니다. 성전이 되면서 우리는 졸지에 의인이 되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다 주님 좋아라 일어나는 그 일이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오른쪽 자리며 그 오른쪽 자리에 대해서 비아냥 거리고 무시하고 공격하는 그쪽이 바로 왼쪽 자리고. 다시 정리하면 하나님께서는 왼쪽과 오른쪽을 구분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다. 스데반 집사는 지금 오른쪽으로 가고 있는 겁니다. 이미 오른쪽 가게 된 사람에게만 왼쪽이 뭔가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왼쪽에 있는 사람은 오른쪽, 왼쪽 개념이 없고 신이 있고 그걸로 됐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인생을 꺽어 버리고 신은 나타나지 않고 누가 나타납니까? 오른쪽에 주님을 보내셔서 오른쪽에서 일을 다하고 오른쪽에 도착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아는. 오른쪽 이 자리가, 하나님 우편이 주의 자리입니다. 주의 자리는 신의 자리가 아니고 하나님의 오른쪽 자리가 주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제가 본 책 중에서 이것을 이야기하는 책을 본적이 없어요. 물론 있겠죠. 하지만 제가 충분히 찾아 냈겠죠. 제가 유명하다는 책을 다 봤는데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분간해서 이야기 한 책을 본적이 없어요. 그런데 막상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뒤로 물러서고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일하죠.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일하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이 명칭인줄 알고 있어요. 우리 보통 이름하듯이. 

하나님의 이름은 명칭이 아닙니다. 명칭이 아니고 이름 자체가 존재예요. 어떤 하나의 어르신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면 주의 명칭을 불러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이름 자체가 어떤 존재예요. 실존하는 존재예요.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지금 당신의 나를 지배했습니다. 당신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마치 회사의 말단 직원이 사장님 부르면 없는 사람을 이름만 부릅니까? 아니잖아요. 사장님 부르면 "어, 어디가셨나?" 이러잖아요. 

누구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종속의 의미입니다. 나는 그 이름에 종속되었다는 것은 그 명청에 종속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그 이름을 가지고 있는 주님에 나는 똘마니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것은 살아계신 분과 관계죠. 이미 예수님 부활했으니까. 그저 이름만 부르면 남묘호랑개교와 똑같은 거예요. 어떤 주문 외우면, 어떤 문장이신끼가 있어서 효과 보는 것처럼. 

그래서 기도 끝나고 마지막에 누구 이름 붙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걸 안붙이면 기도가 응답 안되는 것처럼 "아이구 잊어버렸다 다시 다시." 어떤 문장을 외우면 거기서 신끼가 나타나서 효과를 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누구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두 세사람도 내 이름을 부르면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했잖아요. 그 말은 이름을 부른다는 말이 아니고 두 세 사람이 있어도 여기 누가 있다? 주님이 여기 계심을 인정하고 이걸 하나 먹는 것 하고 주님이 안 계시다고 하는 것과는 달라요. 

주님이 계시면 실제로 앉아 계시기 때문에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게 되겠죠. 주님이 안 계시다고 하면 내 맘대로 하는 것이고. 방안에 혼자 있을 때 행동하고 여러사람 있을 때 행동이 달라지잖아요. 그것은 계시다는 느낌, 그 느낌대로 내가 어디에 가도 주님이 함께 있다는 그 느낌대로 그것이 주님과 함께 공존하는 것입니다. 10분 쉽시다.
 관리자  (IP:220.♡.41.203) 10-11-07 12:36 
대전100429b행7장b성령을거스리는몸b 

2010-11-05 23:31:45 녹취 : 이미아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예수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것도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고. 그걸 사람들이 상상을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 있고 더불어 예수님이 있는 줄 알아요.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 여기 계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더불어 예수님이 따로 계시는 줄 알아요. 작은 하나님이 따로 붙어 있는 줄 알아요. 예수님이 아들이니까. 재벌 2세보다 재벌 총수가 낫거든요. 우리는 총수 섬기지 재벌 2세 젊은애들 안 섬긴다 이 말이거든요. 

이게 바리새인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이 그래요. 이럴때 우리는 자기가 신을 알고 있다고 스스로 인정받고 싶어요. 나는 이미 신을 알고 있는데 좀더 알고 있는 신의 테두리는 맞는데 거기다 정보가 조금 모자랐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 지셨다는 추가적인 정보를 합쳐서 있는 것도 그럴듯하고 유대인보다 낫고 불교보다 낫고 우리는 온전한 신앙으로 간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그리스도와 하고 여호와 하고 정반대로 투쟁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어 지키라고 했잖아요. 예수님은 나를 믿기만 하라. 내가 너희에게 뭔가 할테니까 내가 너희에게 뭔가 한 것을 은혜로 받기만 하면 되고 이쪽은 내가 신을 향해 전도, 봉사, 헌금, 기도, 계시를 받든지, 기도를 하든지 뭔가 해야 되고 주님께서는 그냥 간음한 여인도 "너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한마디에 천국 가버리고 옆에 있는 강도도 "너가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의 말빨이 우리의 행함보다 더 월등하다는 것을, 왜 그렇게 해야 되는가를 로마서, 갈라디아서에서 편지로 낱낱이 신학적이고 내용적인 것을 다 이야기 해줍니다. 왜 주님이 말빨이 우리의 행함보다 더 월등하게 구원하는지 우리로 하여금 죄인되게 하고 율법이 주어진 것은 지켜봤자 니 속에 더러운 것을 끄집어 내는 하나의 미끼. 

옛날에 우리 할아버지가 담배 피우시는데 파이프가 있으면 그 안에 니코친 재가 있을 때는 어떻게 하셨느냐면 종이를 말아요. 한지를 뾰족하게 말아서 쏙 집어 넣어서 끄집어 내면 시꺼면 재가 쑥 나오거든요. 제가 그것을 잊을 수 없는데 어릴 때 그런 것만 보고 자랐어요.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율법이 우리 입에 들어가면 쑥 들어 온다구요. 율법이 들어오면 우리 본성이 이것은 지켜서 나쁜 인간에서 좋은 인간 되어야지 라는 본성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죠. 

주께서 율법으로 쫙 잡아 당기면 뭐가 들어 붙냐면 내 행함으로 구원받겠다는 것이 시커멓게 들어 붙어요. "모든 율법을 지켜도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것이다. 야고보서에 2장 10절 나오죠. "너가 이 율법을 항상 지켜야 되고 모두 지키지 않으면 저주아래 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나오죠. 

사도바울이 이것을 알고 즐거웠다? 슬펐다? 어느쪽이예요? 정말 죽어도 좋아. 나 그만 살래. 더 안 살아도 돼. 내 안에 성령이 와. 그걸 고백했어요. 나는 죄인중에 괴수가 되었는데 기쁘기는 한량없이 기쁜 거예요. 마치 막달라 마리아가 울면서 향수를 다 뿌린 것처럼. 그래서 사도바울의 소원이 "내가 빨리 죽어서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소원이다" 할 정도로 너무 좋은 거예요. 

그게 뭐냐하면 그동안 그렇게 알고 싶고 그렇게 뭔가 진리를 파고 소유해서 소유된 그 진리로 구원받을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사도바울은 자기가 율법의 흠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 정도로 최선을 다해서 구원받을려고 했던 그것이 한방에 갔습니다. 한방에 다 알아버렸습니다. "내가 전한 복음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니라"(갈1:8). 그리고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 배운것이 아니고 내가 예수님에 사람을 기쁘게 하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갈1:10).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사람의 기쁘게 요소 속에는 뭐가 있냐면 사람을 기쁘게 하는 그리스도, 기쁘게 하는 하나님, 기쁘게 하는 성령 들어 있겠죠. 그런데 진짜 그리스도의 종 사도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는 식으로 오기 때문에 이것을 사람이 납득해서 믿는 식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임해야 믿을 수 있는 것이 지금 내가 전한 복음이다. 복음이 믿어지십니까? 여러분 속에 여러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속에 말씀하신 성령께서 이미 들어와 계시는 겁니다. 

아까 한 것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귤과 사과가 있는데 이 귤과 사과를 하나님이 주셨다 말입니다. 주신 거니까. 이것을 내가 집어 먹어 버리면 내 행함이 여기 섞여서 시커멓게 썩어 버려요. 그냥 하나님이 행하신 그대로 내 속에 들어 올 때 내 내장이 해부되고 주님의 것이 그대로 담겨있죠. 

이 논리에서 보게 되면 성령께서 오시면 내 속에 육을 건드리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내 안에 뭐가 벌어지냐면 전쟁이 벌어지죠. 사사기 3장 1~2절.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하사 남겨 두신 열국은" 왜 전쟁을 알지 못한 자에게 꼭 그것을 가르쳐야 됩니까? 

결국은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홀로 서게 한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아니고 뭣에 둘러싸여져 있느냐 하면 전쟁이라는 분위기가 없으면 이스라엘이라는 값을 하지 못합니다. 그 구약의 전쟁이 신약에 오면 우리 내부에 전쟁으로 바뀌게 됩니다. 성령께서 항상 우리의 육을 건드리죠. 육이라는 것은 육 안에 내 나름대로의 하나님관이 들어 있고 여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행함이죠. 

육이라는 것은 행함을 이야기 하고 행함이라는 것은 나에게서부터 나와서 우리 모든 가치와 모든 의미가 나에게서 나와서 나에게로 돌아 오는 것입니다. 참, 이런 것 때문에 설교 시간에 예를 들 때에 시사적인 예. 심지어 바리새인 예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최진영 자살이라든지 법정스님 죽었다는 것이라든지 천안함 사건이라든지 목사님 그런 예를 안 들면 안 됩니까? 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교인들이 올 때는 이미 육을 가지고 왔다 이 말이죠. 육을 가지고 왔다 라는 말은 해석할 때 전쟁이라 것을 고려치 않고 해석을 하는 거예요. 전쟁은 항상 뭐가 있을 때 생겨요? 적이 있을때만 전쟁을 하거든요. 평소에 사람들이 적이 없기를 원해요. 적이 없으면 전쟁도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전쟁을 치루기 때문에 그것에 스트레스 받아요. 

그래서 교회에서 와서 전쟁하고 집에서 전쟁하면 골치 아파요. 그냥 돈 버는 전쟁, 그것만 인정하고 그냥 좋게 지냈으면 좋겠다 하거든요. 그런데 인간의 이런 해석 속에는 적이 없이, 전쟁이 없는 해석을 하게 되어 있어요. 전쟁이 없으면 모든 것을 동정하게 되고, 이해할려고 애를 쓰고, 그들 편에 서고, 아주 성스러운 품성을 나타내죠. 그냥  좋은게 좋은거고 다 친하게 지낼려고 하고 좋다 이 말이죠. 

그런데 제가 설교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천안함 깨졌다. 그러면 유족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만약에 내 딸이 죽었고 내 아들이 죽었고 내 남편이 죽었다면 귀에 뭐가 들어 오겠어요? 그야말로 자살하고 낙담하고 말죠. 그럼 과연 그렇게 좌절하고 낙담하고 하는 것이 바른 해석인가? 보자 이 말입니다. 결국은 누구 중심입니까? "나는 무조건 살아야 돼." 이것이 중심이 되어서 해석을 이렇게 하는 거예요. 전쟁은 뭐냐하면 내 생존에 대한 전쟁만 우리는 간주할 뿐이죠. 이것이 육인 것입니다. 살아 있으니까 계속 살아 있어야 해 하고 우리교회 교인들은 온다 이 말이죠. 

그럼 목사 입장에서는 성경 해석을 성령이 하는 해석을 해야 되거든요. 성령이 해석하게 되면 이 사람들에게는 뭐가 필요해요? 전쟁이 필요해요. 지금 영적 전쟁이 일어납니다 라는 설교를 해야 하는데 저 불교 신자가 어떠니, 저 아프가스탄의 유대교들이 선교사들을 공격했다니, 저쪽에 아프리카에 가서 선교하다가 토인에게 맞아 죽었다니.  남의 이야기, 다른 나라 이야기 그런 이야기 들으면 실감이 안 나죠. 

직접 우리 자신이, 그러면 아프리카 가야 전쟁 합니까? 아프가니스탄 가야 전쟁하는 거예요? 선교라는 것은 현장에서 일어나지 않습니까? 일어나거든요. 이런 것 말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심사를 탁 건드리는 거예요. 탁 건드리면서 전쟁이라는 것은 육적인 해석과 성령의 해석의 차이 사이에 지금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 그것이 뭐냐하면 만약에 내가 죽어서 지금 천국 가 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뭐라고 기도하겠습니까? "너도 언젠가 죽으니까 제발 예수님 은혜 받아 들이고 천국가서 편히 쉬자 그렇게 할 거란 말이죠. 군에 제대한 사람이 군 후배들에게 뭐하고 합니까? "어이, 말뚝 박아라 이렇게 하지 않잖아요." 참고 몸 성하게 대충 때우든지 해 가지고 빨리 제대하고 나오너라 이렇게 하잖아요. 

이미 죽어서 천국 갈 사람 같으면 현재 무슨 기도하겠습니까? "고생 그만하고 빨리 올라와라" 그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을 할 것이 아니냐 이 말이죠. 그 해석을 설교 시간에 하는 거예요. 만약에 천안함에 예수님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땡 잡은 거예요. 만약에 그쪽에 지옥갈 사람 있다면 평소에 예수 잘 믿어야지 늙어서 팔십, 구십되어서 교회가야지 이러지 말고 매일같이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지금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갑자기 지금 오면서 죽을수도 있고 세상만사 아무도 몰라요. 주신자도 여호와시요. 거두어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다 말입니다. 

아침에 음식쓰레기 버리는데 6시에 왔다가 8시에 왔다가 들쭉날쭉이예요. 음식 쓰레기 버리는 나로서는 골치 아파요. 언제 올지 몰라요. 주님께서 언제 가져갈지 몰라요. 오늘 밤에 내 목숨 가져가면 이 모든 재산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누가복음 12장에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 했잖아요. 창고 지어 놓고. 요새 말로 유로 펀드 넣어 놓고 빼먹겠다고 하는 것 망했잖아요. "빨리 죽어서 와" 라는 마음으로 살게 되면 펀드 넣어도 내 펀드가 아니라 주님의 펀드가 되고 보험 넣어도 나를 위한 보험이 아니라 내 자식 위한 보험이 되고 모든 것이 나는 이미 손 털었다고 유언장 쓰고  이미 이 세상 사람 아니라고 손 털고 가운데서 설거지 하더라도 나는 이 세상 사람 아니라고 마지막 설거지로 여기고 설거지 하고 모든 것이 툴툴 털어버리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털은 상태에서 애들한테 뭐하나 가르쳐도 그렇게 하고 과외를 해도 나는 간다 너는 이거나 배워라 이렇게 하시고 자유로운 가운데 할 수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말했어요. 결혼이라는 것은 둘이 함께 죽자고 하는 것이 결혼이다. 신직수 전도사님이 아직 결혼을 안 한 것은 둘이 같이 죽을 사람을 못만나서 그런 것입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둘이 같이 죽자고 하는 결혼인데 둘이 같이 살자고 하니까 니는 죽어라 나는 살께 맨날 이 싸움이거든요. 해석차이라 해석차이. "니는 왜 내 대신 안 죽어?" "미쳤나! 니가 내 대신 죽어야지." 서로 죽으래 그게 부부 사이의 갈등의 요인이 아닙니까? 가정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빨리 죽을테니까 내 죽고 난 뒤에 거름이 되어서 니나 고생많이 해라 그런 식으로. 

스데반 집사의 교훈을 뭐냐하면 스데반 집사는 빨리 죽었다. 이거 였습니다. 성령 받아서 빨리 죽어라 이 해석을 가지고 스데반 집사는 신구약 전체를 해석하는 겁니다. 아직 신약이 다 안 나왔지만 자기까지 알고 있는 계시를 성령에 충만해서 이 육, 하나님을 거스리고 병든 내 마음 빨리 털어 버리고 돌에 맞아서 주와 함께 영원히 살겠다는 이야기예요.이게 실제 상황이예요.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도 이대로 갈 수 밖에 없죠. 그래서 59~60절 봅시다. 

59절.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스데반 돌로 치는 사람은 스데반을 도와주는 사람입니까? 방해하는 사람입니까? 도와 주는 사람입니다. 도와 주는데 곱게 안 도와 주고 거칠게 돌로 쳐 도와줘서 그렇지. 

60절.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그러니까 돌로 치는 사람에게 원망합니까? 원망할 필요가 있습니까? 원망할 필요가 없어요. 내 소원을 저들이 들어주니까. 내가 죽는 일에 자살할 수 없으니까 내가 죽는 일에 그들이 협조해 주니까 얼마나 고맙습니까? 주여 저들은 저들의 짓을 모르니까 저 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나는 죽어서 좋다마는 저들이 얼마나 안 됐습니까? 나는 죽으니까 편한하다마는 저 돌 던지는 사람들은 얼마나 할례받지 못해서 마음이 꼬였으면 나한테 돌 던지겠습니까? 주여 철딱서니 없는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라고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신 용서를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존재의 가벼움. 얼마나 가벼운지. 

성령께서 풍선에다 바람을 넣으려고 휙휙 불으니까 풍선이 가벼워서 뜨는 거예요. 안에 성령이 가득차 있으니까.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죠. 성령의 예수님의 영이니까 예수님 지금 어디 계시죠? 하늘나라에 계시죠. 하늘나라의 헬륨이 풍선속에 들어오니까 우리는 하늘나라로 뜨는 거예요. 어느 쪽으로?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뜨는 거예요. 하늘나라 가스가 차니까 , 성령이 차니까 우리는 항상 땅에 것 보다 하늘의 것을 더 생각하면서 존재의 가벼움. 존재의 가벼워 지면서 "너는 이 뜨는 기분 모르지?" "너는 뜨는 기분 모르는지." "주여 뜨는 기분을 모르는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저도 이런 것을 자주 경험했습니다. 얼마 전에 개혁신학회 논문 발표하면서 경험했죠. 진짜 갈굴수도 있지만 저는 갈구기 싫었어요. 저들은 복음을 모르니까. 저들이 하는 짓을 주께서는 아시니까. 저 혼자이지만 용서가 되었어요. 8장 들어가 봅시다. 8장 1절에 보면 누가 등장합니까? 사울이 등장하죠. 그리고 7장 58절에 봐도 "성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스데반 집사의 순교가 원인일까요? 결과일까요? 스데반 집사의 순교가 사울을 바울되게 했거든요. 왜냐하면 스데반 집사의 일을 일으킨 것은 성령께서, 예수님께서 하셨기 때문에 그 예수님께서 찾아 오시면서 스데반 집사를 근거로 해서 "너가 내 제자를, 내 사람들을 핍박했다." 하면서 사울을 바울되게 하셨다 이 말이죠. 자, 그러면 스데반 집사가 원인이 될까요? 결과가 될까요? 

이 점이 상당히 어려운데 우주의 구조라는 책에 보면 시간을 빵 조각으로 이렇게 표현했어요. 빵을 잘라 봅시다. 빵을 자르면 이렇게 되겠죠. 아침에 토스트 하면서 빵 자르잖아요. 빵 한면 한면이 전부 다 시간의 단면이 되겠죠. 이것을 이어보면 전체 시간이 된다 이 말이죠. 보통 사람들의 상식은 흘러간다고, 강물처럼 흐른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상대성 원리에 의하면 시간은 전체가 꽁꽁 동결 되었어요. 얼어 붙었습니다. 꽉 차버렸어요. 

그래서 타임머신 타고 과거에 이순신 장군에게 가도 토스트의 단면은 그 내용이 변하지 않고 있어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면 시간을 이루는 미래가 과거에 서로 영향을 준다는 거예요. 그럼 지금 질문이 뭐냐하면 사울이 바울 될 때 스데반 집사가 원인이 되었습니까? 결과가 되었습니까? 라고 물었는데 여기에 대한 답변은 상호 주고 받게 되어 있어요. 사울 위하여 스데반 집사가 죽을 수도 있고 스데반 집사가 죽기 위해 사도 바울이 등장해서 죽을 수도 있고. 

이 말은 과거, 현재가 꽁꽁 묶였다면, 얼어 붙었다면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니고 미래에서 과거로 얼마든지 올 수가 있는 거예요. 그게 변화산에서 엘리야하고 모세하고 예수님하고 함께 있잖아요. 이게 시간이 꽁꽁 얼어서 그래요. 하이델베르그의 불확정 원리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전자를 틈에다가 전자 한개를 보내니까 여기서 파동처럼 간섭 효과가 나타났단 말이예요. 전자 알맹이가 하나 나오면, 총알을 탁 쏘면 총알이 딱 박혀야 잖아요. 무슨 뜻이냐면 총알이 입자가 아닙니까? 총알을 탁 쏘게 되면 뭐가 나타나요? 총알의 표적에 구멍이 딱 생겨야 잖아요. 

그런데 총알을 딱 쏘니까 저기 물결이 일어났다 뭔가 이상하죠. 물결이라는 것은 한 개만 있으면 안 되고 두 개 이상의 파를 이루어야 되거든요. 전자를 한 개 탁 쏘니까, 분명이 하나를 쏘았는데 두 개로 나누어져 자기들끼리 연못에 물결을 발생한 거예요. 이게 양자 효과라는 거예요. 이 말은 이게 미래라면 미래의 기준해서 과거가 이쪽 과거로 왔는지 과거1 과거2 어느쪽으로 과거가 왔는지 이쪽에서 한 개를 취득해 버리면 한쪽이 없어져요. 파동이든 입자든, 아니면 입자든 파동이든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어느 과거를 선택하냐는 것은 지금 선택에 따라서 과거1과 과거2 중에서 한 개를  선택할 수 있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하면 시간이라는 것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지금 내가 있기 위해서 미래의 어떤 분이 계셔서 그 분을 인하여 내가 있는 셈이 된다는 겁니다. 말은 어렵게 했지만 간단하면 그렇죠. 이걸 실제로 그렇습니까? 하면 실제로 그래요. 

아빠, 엄마 돌아가시면 재원이하고 재아가 그래요. "동생아, 엄마가 그 이야기를 한 것이 이제 생각난다.""그 때 엄마가 그렇게 하신것이 우리를 위해서 하셨어." 되잖아요. 분명히 되죠. 미래의 내가 되기 위해서 어느 날 과거에 하나님께서 엄마에게 그 일을 시켰다고 해석해도 되고 또는 엄마 입장에서 "애야 니 피아노 좀 쳐라" "피아노 쳐라" 지금의 키우신게 원인이 되어서 결과가 잘 치는 형이 될 수 있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분명히 시간이 흘러간다고 생각하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과거는 지나갔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식빵을 얼려 버리면 과거, 현재, 미래가 마치 변화산처럼 꽁꽁 같이 거기서 하나가 되어 있어요. 여기서 현대 물리학이 내린 결론은 이겁니다. "여분의 차원, 세계" 우리 3차원 말고 여분의 차원이 우리를 우리 현재 과거 원인 결과를 초월한 여분의 차원이 따로 있다 이 말이죠. 묵시적 차원이죠. 그렇게 되어서 여분의 차원에서 보면 너,나가 분리되야 개체인데 너가 나에게 내가 너에게 소통하면 개체가 없어지고 전부 다 한 몸이 되는 겁니다. 

자, 그림 그려 볼께요. 봉우리 이렇게 있습니다. 구름이 여기 있습니다. 봉우리 몇 개 입니까? 네개죠. 낮이 되니까 안개가 걷혀 한개죠. 한 덩어리로 생겼으니까. 오륙도 한개잖아요. 어떻게 보면 다섯개 여섯개고. 그 밑둥지는 한개인데 우리는 돌출된 봉우리 가지고 싸우고 있다니까요. 니가 잘났네. 내가 잘났네. 사실은 한 몸에서 나온 사지입니다., 눈이요 코인데 바로 성경이 이것을 이야기 하거든요. 

스데반 집사하고 사울하고 딴 몸이죠. 딴 몸인데 나중에 로마서나 요한복음 보면 뭡니까? 전부 다 뭐가 되요? 몸도 하나니 주도 하나요. 봉우리가 몇 개냐 소용 없어요. 이것은 이 땅에서 살면서, 태어나면서 습관이 뭐냐하면 너는 너고, 나는 나고. 아파트 홋수 다르고 출신학교 다르고 다 다르다 이 말이죠. 나중에 이걸 보니까 한 몸에서 나온 하나의 돌출된 혹 같은 거예요. 같은 사지다 이 말이죠. 

주님 덕분에 나도 구원받고 너도 구원받고. 각자 자기 자랑하지 않고 자기 봉사 자랑하지 않고 주님만 자랑하고. 이것이 이 한 몸을 가지고 교회라고 합니다. 사적인 행함이나 이런 것이 안개 걷히듯 다 걷어내고 남아 있는 것. 우리가 우리되게 하신 그 무엇. 우리의 밑바탕. 존재의 기반. 그게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교회, 내교회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니 교인 내교인 있을 수 없고. 세상에 어느 교인도 없어요. 다 예수님의 교인이지. 예수님이 믿게 했는데 목사 지가 믿게 한 걸로 자꾸 우깁니까? 지는 하나의 돌출된 봉우리에 불과한데. 

사람들 자꾸 뭔가 신비로운 안개를 깔지 마세요. 평신도하고 목사하고 차이를 두어서 여기는 근처에 오지 말고 목사는 인간이 다루는게 아니고 하나님이 다루지 이런 것 자꾸 깔지 말고 이것을 벗겨 내세요. 목욕탕 가보세요. 다 똑같지. 자기보다 더 큰 사람도 많고 겁나는 사람도 많은데. 전부 다 한덩어리로 되어 있죠. 그래서 로마서에 보면 나옵니다. 한쪽이 울면 같이 울고 한쪽이 웃으면 같이 웃을 수 있다. 한 몸이라는 예를 들때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재하하고 재원이 있으면 "내가 나 된 것은 그 때 동생이 없었으면 지금의 내가 될 수 없었어." "아니야 형이 없었으면 내가 없었어." 그 마음을 가지고 농심이라고 합니다. 농심 알아요? 라면 광고. 옛날 교과서에 나왔어요. 동생이 살림 없을까봐서 볏짚단을 몰래 넘겨 주는데 그 날 밤에 아이구 형은 식구가 많아서 먹는 입도 많으니까 볏짚단을 넘겨 주는데 아침에 보니까 분명히 내것은 없어지고 형 것이 많아야 하는데 똑같거든요, 그 다음에 보니까 또 똑같아요. 그러다 둘 다 볏짚단 들다가 달빛 나오고 만난 그 폼이 농심라면이예요. 그 그림이 농심라면에 나온 그 그림이예요. 

이걸 가지고 상호 영향이예요. 인간은 상호 영향속에 되어 있다. 그것을 지난 시간에 이야기 했는데 구조예요. 포지션. 그냥 위치만 정할 뿐입니다. 사도바울은 열 세 번째의 사도로서 위치예요. 스데반 집사의 위치는 뭡니까? 고난을 받아 죽게 되어 있어요. 스데반 집사는 죽게 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죽은 거고. 사울은 마지막으로 부활 본 사람입니다. 죄인인 나에게도 주께서 나타나셔서 사도되게 하셨다. 그 위치예요. 

그래서 하나의 역할이 다를 뿐이지 똑같은 형제고 자매고 그렇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성경 해석을 보면 경쟁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여러분들이 복 받아서 부자됩니다." 하는데 부자 되는 사람은 부자의 역할이 있어요. 잠언서에 나옵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 역할을 해줘야 되요. 구원받는데 아무 상관 없습니다. 

구원받는 것은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사과나 귤이 그냥 나한테 들어오면 구원되는 것이지 가난해서, 부자되어서 그래서 구원받는 그런 코스가 있으면 가세요. 가난하다가 있는 살림도 털어 먹는 그래서 구원받으면 그런 코스로 가야되요. 어느 코스가 더 나으냐 하는 것은 관계 없습니다. 

엘리베이터 하나 있지만 이 코스 있고 이 코스 있고 다 달라요. 전부 다 한 덩치에 속했으면 어떤 코스를 보여주던 그 사람 역할에 불과합니다. 사람이 얼굴이 다른데 어떻게 그것을 다 뜯어 고쳐가지고 똑같은 얼굴 만듭니까? 사람들이 성형 하는거 보면 그 사람에게 하자가 없는 한 안 뜯어 고쳤으면 좋겠어요. 어떤 사람은 성형 한 얼굴인지 모르고 했다가 나중에 DNA가 엉뚱하게 나와서, DNA는 성형이 안 되잖아요. 나중에 남편이 "분명히 이 얼굴이 아닌데 당신도 안 닮았는데 누구 닮았나?" 하니까 아내가 "나 뜯어 고쳤다." 하고 고백을 하죠. 있는 그대로 이 자체기 쓰임을 받으면 되요. 어떻게 쓰임 받는지 8장 봅시다. 빌립이 나오죠. 8장 26절. 

26절.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 

빌립집사가 남쪽으로 간 것이, 빌립이 가서 에디오피아 내시가 구원을 받은 것이 빌립이 원인입니까? 결과입니까? 서로가 원인도 되고 결과도 되죠. 에디오피아 내시를 위해서 빌립이 있을 수 있고 빌립을 위하여 에디오피아 내시가 그 때 마차를 타고 갈 수도 있는 거예요. 내가 전도하면 안 돼요. 내가 전도한다는 것이 있을 수가 없어요. 전도를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누가 원인? 예수님이 원인이 되어서 하나의 구조상 배치가 되어 있을 뿐이예요. 

격자구조에서, 정육면체 격자 구조에서 A지점에서 B지점이 서로 이어질 줄 몰랐죠. 그런데 어떻게 C지점을 통과하면서 C와 A를 만날 때, 나는 D를  기다렸는데 C가 통과할 때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겁니다. 나는 그럼 앞으로 D 말고 C를 만나야지 하지만 A나 B나 C나 다같이 무빙, 움직인다. 누구에 의해서? 이 구조 전체가 가만히 있지 않고 주님에 의해서 움직이거든요. 움직이면서누굴 만날지 몰라요. 한 번 만났다 헤어지고 헤어졌다 또 만나고 누구를 만날지 모릅니다. 

목회를 하면서 교인들 하고 헤어지면 슬퍼요. 또 만나면 반갑고 반가웠다가 또 헤어지면 또 슬프고. 복음 버리고 돌아간 사람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어요. 보고 싶어서. 다시 돌아 온 사람도 있지만. 언제 돌아갈지 모르지만. 늘 생각해요. 마주치고 마주치고 마주치는 겁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어나 내려가라 했다' 이 말이죠. 29절에 

29절.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를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사람들이 성령님에게 뭘 빼냐면은, 자기가 돌아오는 행함을 주장하기 때문에 성령이 빌립더러 할 때 성령을 빼버려요. 빼버리든지 성령을 자기 힘으로 간주해서 하든지. 그럼 성령님이 주인공이 아니고 누가 주인공 입니까? 자기 자신이 주인공으로 돌변해 버립니다. 그렇게 되버리면 해석이 또 자기 위주로 해석을 하게 되요. 이것은 성령께서 빌립더러 했다 이 말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어떤 분이 질문하기를 "목사님. 빌립은 성령께서 어디 가라 하는데 지금은 성령께서 저보고 어디 가라 안 합니까?" 그럼 제가 답변하기를 "지금 성령께서 설거지 하라." 고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움직이는데, 격자구조를 움직이는데 꼭 자기가 움직여야 된다고 생각해요. 가만히 있는 것도 주께서 가만히 있게 하셨는데 그 점을 생각 못하고 자기가 예상한대로 코스를 움직여야 꼭 성령께서 움직인다고 착각을 하게 되요.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는 이유가 뭡니까? 기도원에 안 올라가고 밑에서 기도해도 되는데 꼭 지가 "분명히 기도원에 올라가서 기도하면 뭘 하게 되면 효과 보고~" 지가 시나리오를 지가 짜는 거예요. 

TV드라마 같은 거 잘 안 보는데 후딱 지나가는 것을 보면 전부 다 정상인이 아닌 것 같아요. 미친사람들 같아요. 그런데 왜 사람들이 드라마에 미칩니까? 내가 평소에 꿈꾸던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TV밖에 없거든요. TV에 나오는 남자들 한결같이 젊은데 다 CEO예요. 다 사장님들이예요. 다 그래요. 그리고 전부 다 재벌들이고. 그리고 TV에 나오는 여자들도 꼭 집에서도 양장하고 화장하고. 내가 만드는 것 같으면 화장 다 지우도록 만들겠어요. 그리고 간호사도 전부 간호복 미니스커트 입고 있어요. 세상에 그런 병원 못봤거든요. 전부 다 바지 입고 돌아다니잖아요. 

이것은 사람은 자기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자꾸 일어나기 때문이예요. 그런데 성령께서는 예상밖에. 너가 예상하는 것은 다 피해갑니다. 육과 성령은 전쟁중이기 때문에, 우리 속에서 자꾸 싸우기 때문에. 그래야 성령께서 우리 원대로 안 해줘야 우리가 나중에 뭐라고 하냐면은 "이것은 성령께서 하셨습니다." 하는 말을 하죠. 만약에 우리 예상대로 하게 되면 뭐라고 합니까? "이것은 사실은 제가 예상한 건데." 이렇게 된다 말이죠. 성령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는 것은 반드시 우리가 예상밖의 일을 하게도 하시고 안 하게도 하시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성령께서 인도를 하는데 어디로 가느냐면 32절에 보니까

32절.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성령께서 지적하는 중심 귀절. 성경에 많은 귀절이 있는데 중심 귀절의 핵심이 뭐냐하면 바로 어린 양이 나오죠. 성령께서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성경을 보게 하셨고 성경을 펼치게 하셨고 해석을 못하고 있을 때에 빌립이라는 사람이 와서 마차에 올라 타서 해석을 할 때 해석의 중심이 뭐였냐면 어린 양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고 난 뒤에 에디오피아 내시는 세례받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는 핵심 귀절이 있겠죠. 

그 핵심 귀절은 반드시 어린 양하고 관련되어 있어요. 뭘 행하라가 아니라. 어린 양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것이 모든 성경 귀절의 해석이 됩니다. 그림 한번 그려봅시다. 예를 들어서 여기 창세기1장이 있고 이사야 53장 있고 에스겔 25장이 있고 마태복음 5장이 있고 고린도후서2장이 있고 아무거나 해봅시다. 우리는 어떤 특정 귀절이 핵심 귀절 이라고 하잖아요. 성령께서는 특정 귀절이 아니라 표면적인 문자가 아니라 밑바닥에 가서 밑바닥에 있는 어린 양을 가지고 모든 해석을 분배를 해줘버려요

그러니까 성경 귀절 이사야 53장 뿐만 아니라 다른 귀절도 얼마든지 그 중심부에 파고 들어가면 뭐가 나옵니까? 어린 양께서 다 하셨다. 그 어린 양은 세상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거든요. 어린 양 옆에 뭐가 있어요? 우리는 뭐가 되야 되요? 죄인이 되어야 겠죠. 모든 성경의 밑바닥에는 결국은 성경 귀절은 우리를 뭘로 만든다?  바로 어린 양으로 가지 않고 세상 죄 속에 포함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어린 양의 효과, 어린 양의 영광, 어린 양의 하신 일을 우리로 하여금 증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방법 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4절. 빌립도 마찬가지지만 사도 바울이 성경해석을 어떻게 하시나 보세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게 복음 아닙니까? 이 복음외에 다른 복음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뒤에 나오잖아요. 복음이 구성될려면 우리가 악한 세대가 되어야 하고 우리가 죄인이 되어야 하고 악한 세대속에 우리가 죄인 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죄졌단 말이 아니고 간음했다 살인했다 그 말이 아니고 우리를 둘러 싼 이 세대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죄 짓게 만들죠. 

우리 태어나면서 부모 교육 받습니다. 부모가 죄인 이잖아요. 부모가, 친구가 시키는대로 했을 뿐이란 말입니다. 그 자체가 악한 세대속에 악한 하나의 표적으로 있기 때문에 세대속에 죄인되고 세대가 악하니까 우리는 그 안에서 죄인될 수 밖에 없고 그 다음에 뭐와 만나게 합니까? 예수님께서 자기 몸과 만나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이야기가 나오겠죠. 

구조가 어린 양이 될려면 반드시 바로 어린 양 가면 안 되고 이 말씀에 의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대가 악하고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죄인됨과 어린 양과의 매치, 연결을 통해서 이것이 모든 성경 해석을 풀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목사님은 에베소서를 하든지 사사기를 하든지 여기서 툭 들어가면 여기서 뭘로 가야 되겠습니까? 여기서 둘로 가야 되겠죠. 하나는 이래서 죄인이구, 이래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모든 성경 귀절을 가지고 요한복음을 하든지 마태복음을 하든지 툭 건드리면 이 안에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아까 이야기한 그 선교단체 UBF는 모든 선교단체는 어디까지 머뭅니까? 이 성경 귀절을 외워서 하죠. 외워버리면 누가 잘났습니까? 외우는 내가 얼마나 잘났습니까? 그러면 100가지 외운 사람보다 1000가지 외운 사람이 지도자가 되겠죠. 목사는 거기다가 신학까지 했으니까 더 지도자가 되겠죠. 그러면 그 성경 귀절이라는 하는 것은 자기 자랑할 수 밖에 없는데 이게 무슨 복음입니까? 자기가 돋보이는데. 훌륭한데. 그러면 복음이 아니죠. 

사도행전 8장에서 빌립이 성령을 통해서 간 것은 어린 양과 에디오피아를 만나게 함으로써 이미 우리 죄를 위해서 해결하신 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셔 가지고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라 그 분이 나의 주가 되신다는 것을 깨달아서 그 다음에 38절에 내시가 세례를 받고 39절에 주의 영이 빌립을 다시 이끌어 가버립니다. 

이것을 빌립이 예상 했을까요? 전혀 예상 못했습니다. 누굴 만날지. 격자 구조에서, 주님의 구조에서 B가 C를 만날지, C가 D를 만날지 D가 A를 만날지 모르는데 한 가지 주께서 아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뭐냐하면 항상 그 만남을 통해서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그 만남은 성령께서 주선한 만남입니다. 항상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만남은 없습니까? 그런 만남은 없어요. 왜냐하면 본인은 영광 돌리는데 상대방은 삐져 있을 수 있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것은 뭐냐하면 오른쪽과 왼쪽으로 구분시키기 때문에 그것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죠. 8장 14~15절 봅시다. 

14절.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15절.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것 설명하고 오늘 강의 마치겠습니다. 먼저 잘못된 해석 해볼께요. 인간이 이렇게 있는데 여기 베드로가 기도하니까 성령께서 이 사람에게 임해서 그때부터 이 사람은 성령을 소유한 사람이 됩니다. 이 해석이 잘못된 해석입니다. 아마 제가 알기로는 모든  한국교회가 다 이렇게 할거예요. 이렇게 되버리면 주체자1, 주체자2, 사도, 주체자 주체자가 있고 성령이 오게 되면 이것은 주체1과 주체2가 그대로 살아 있는 상태가 되죠. 어떤 연관성이 없죠. 내가 성령 받기를 원해서 기도하고 성령이 오게 되고 요새 유행하는 중보기도까지 포함해서, 중보기도란 말을 쓰면 안 되는데 중복기도까지 해서 이렇게 했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참된 해석은 이렇습니다. 격자 구조입니다. 격자 구조가 되게 되면 여기 나오는 이 포지션 같은 것은 누가 무빙, 누가 움직이느냐면 우리 예수님께서 포지션을 움직이죠. 만나게 해주시고 하죠. 결과가 뭐라고 했습니까? 반드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겠죠. 그러면 여기에 있는 포지션 나름대로의 주체가 되어 버리면, 다시 말해서 개체가 되어 버리면, 독자적으로 있어 버리면 뭐가 깨졌습니까? 탈락되죠. 구조에 있지 않고 독자적으로 그냥 주는 것만 받게 되겠죠. 아무 관계가 없죠. 

그런데 이 주체가 여기 이게 아니고 격자 구조속에 들어가 버리면 자기가 원인도 되고 결과도 되겠죠. 왜냐하면 자기가 원인도 되고 결과가 될 때 이 원인 결과를 조성한 하나님께 영광이 되니까. 주는것만 받게 되겠죠. 성령이 오신다는 말은 성령께서는 나 밖에 모르는 니가 이 구조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눈뜨게 만들죠. 눈 뜨게 되면 이 사람에게 성령이 오게 된다는 것은 기도해서 온 것입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이 사람을 사용해서 주신 거예요. 그냥 주님께서 주신거죠. 

주실 때, 그냥 줘 버리면 주체가 따로 되는데 이 사람을 통해서 주기 때문에 너나 나나 동일하게 주님께서 주신 성령을 받았다고 인정하겠죠. 말이 어려우니까 쉽게 이야기 하면 만약에 그럴 일이 없는데 집사님이 저한테 쓰라고 돈 천만원 줬다고 해봐요. 나는 집사님이 주신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목사님이 집사님 편에 천만원 주라고 한 거예요. "아이구, 집사님 고맙습니다." 하다가 인사가 싹 바껴서 "아이구, 목사님 고맙습니다." 이렇게 바뀌겠죠. 이렇게 바뀌는 것, 성령 받아야 가능합니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예요. 

이렇게 바뀌니까 목사님이 "이목사님, 지금 돈 천만원 받았죠?" 집사님 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고맙습니다." 하다가 도로 집사님에게 이 돈 다시 드리죠. 드리면 모든 구조가 마치 전류에 전기가 이동할 때 흐르잖아요. 거침없이 흐르죠. 반도체나 전기 안 통하는 것 말고 다 통하잖아요. 모든 사람이 이렇게 되버리면 영광을 누구한테 돌립니까?  하나님한테 영광 돌린다는 말이 내가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가 되고 내 가치와 존재가 사라지고 주님만 계시는, 주님만 활동하시고, 주님만 일하시는 그런 격자구조에 우리가 가입되었음을 확인케 하는 그 방법이 바로 제 삼자를 통해서 마치 성령이 주어진 것처럼 그런 구조 속에 짜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령 받고 난 뒤에, 받기 전에는 성령 받았으면 했는데 성령 받고 난 뒤에는 그 성령은 내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고 나한테 성령을 위해서 기도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나도 그 일을 해야만 하는 존재로서 또 남에게 봉사하라고 주신 성령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겠죠. 사도 바울에게 성령이 왔잖아요. 가만히 있었습니까? 안 되잖아요. 사도 바울이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우물가에 사마리아 여인에게 뭐가 왔습니까? 주께서 성령이 임해서 생수를 받았죠. 여인이 가만히 있었습니까? "아이구 나는 받았다." "나는 구원받았어." 물동이 두고 집에 가만히 있었습니까? 물동이를 버려 두었습니까? 물동이를 버려 두고 "나는 주님을 만났다" 고 돌아 다니죠. 이게 뭐냐하면 더이상 나를 위한 나는 성령받은 이후에는 이게 있을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성령받고 저런 일을 하는구나!" 하면 그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이것은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내 안에 활동하라고 하니까 활동한 거야." 그야말로 하늘나라의 헬륨이 풍선에 가득차니까 이게 붕붕 뜨는 거예요. 

성령이 임할 때 비로서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남을 위해서 봉사해야 할 몸이고 희생해야 할 몸이라는 것을 같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만약에 집사님한테 성령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할 때 이것을 모르는 집사님은 오해해서 "아이구 목사님이 나를 구원하실려구 성령 받으라고 하는구나!" 이렇게 오해할 것 아니냐 이 말입니다. 막상 성령이 임하게 되면 "아 그게 오해였구나! 하나님께서 나보고 일하라고 누굴 통해서 성령 받으라고 하셨구나!" 첫번째 잘못된 해석은 받아 챙기는 것이 목적이라면, 소유라면 그 소유마저 포기하고 주의 일에 나서라고 주신 성령 그것이 바른 해석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짧은 시간이지만 성경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엄연히 살아 계시는데 우리는 자꾸만 나만 살아 있고, 나만 살아 있어 내 자존심과 내 위신과 내 체면만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가진 것 다 주님의 것이오니 주의 복음을 위해서 쓰여질 수 있는 존재가 가벼운 성령 받은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