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45 - 말씀의 레이더망
24,04,15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은사의 세계 !!
오늘은 교재 201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거기에 '은사의 세계' 라고 되어있고, "은사의 세계는 비은사인 세상과 필히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 라고 되어있는데, 당연한 이야기라는 겁니다. 은사라는 것은, 선물이라는 의미인데, 즉 "이 세상에 없는데 선물로서 주어졌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런 은사가 주어진 세계가 따로 형성이 되어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래서 은사가 연락책으로서 이 땅에 왔다는 겁니다. 그러니 "은사가 주어졌다" 라는 것은, 그것을 달리 말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 세상은 그만큼 위험하다" 라는 의미가 된다는 말이죠.
이 세상은 눈에 보이니 실선으로 표시할 수 있는데, 그리고 인간에게는 이 세상이 전부라는 겁니다. 그런데 점선으로 된 어떤 세상이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전혀 알 수 없는데, 인간에게는 오직 이 세상만 있기 때문에, 그 세상은 없는 세계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쪽 세계에서 이쪽 세계로 은사가 주어지는데, 즉 어떤 신호가, 연락이 왔다는 말이죠. 그렇게 연락이 오게 되니까, 이 세상이 아닌 은사를 집어넣는 또 다른 세상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 드디어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그러면 이 두 세계가 평화롭고 사이좋게 잘 지내면 될 것 같은데, 그런데 그게 아니고, 은사의 세계가 이 세상을 공격한다고 하면, 그러면 과연 어떻게 될까요? 이 세상이 전부라고 여겼던 이 세상 사람들은 그냥 당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즉 망하고 만다는 것이죠.
* 소돔과 고모라 !!
예를 들어서, 창세기 19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가 나오는데, 즉 눈에 보이는 세계라는 겁니다. 그러면 소돔과 고모라에 사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자기들의 마을이 아닌 다른 마을이 옆에 있다고 하는 것 정도는 안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 세계는 가봐야 거기도 여기처럼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세계는 합쳐서 넓혀도, 그게 서로 같은 인간들이 사는 세계이고 전부라는 말이죠.
(창 19:1)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에 두 명의 천사가 등장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천사는 어디서 왔을까요? 그들이 살던 동네는 어떤 동네일까요? 그것을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알 수가 없는데, 그래서 그들을 이웃동네의 청년들이라고 보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천사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났으니 말이죠.
* 나는 이제 망했다 !!
그렇게 해서 보니까, 자기 동네의 청년들보다 잘 생기고 성적인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는 겁니다. 자기 동네의 처자들보다 더 매력적이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천사들이 온 목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기 위해서, 즉 멸망시키려고 왔다는 겁니다.
그렇게 천사들은 자기들을 없애려고 왔는데, 그런데 정작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성적인 매력을 느꼈다는 말이죠. 바로 이런 마음자세 속에는 무엇이 포함되지 않는고 하니까, "나는 이제 망했다" 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전혀 그런 의식이 없다는 말이죠.
* 저 사람이 누구야? 끝 !!
방금 천사 이야기를 했는데, 그렇다면 예수님 이야기를 해보자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나는 이제 망했다" 라는 의식을 사람들이 과연 가졌습니까? 가지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뭐라고 했습니까? 그때 그들은 "저 사람이 도대체 누구야? 어, 목수의 아들이구나. 저기 베들레헴 출신이네" 라고 나왔다는 말이죠.
사람들은 그것으로 끝인데, 그런데 예수님은 자꾸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는 땅에서 났고, 나는 하늘에서 났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너희들은 땅에서 태어났으니, 너희들 자신에 대해서 관심을 끊어라"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해도, 그것은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그것은 자기에 대한 관심이지, 주님에 대한 관심은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나는 망했구나" 라고 하는 의식이 전혀 없이, "지금보다 더 나을 수는 없을까? 어디 그런 좋은 방법은 없을까?" 라고, 그런 것을 생각했다는 말이죠. 즉 보다 더 많은 지혜와 지식을 가지게 되면, 그것이 자기를 살릴 수 있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소돔과 고모라인데,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이제 자기에 대한 관심사를 멈추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계속해서 자기에 대한 관심사로 이어져 나갔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자기에 대한 관심사로 이어져 나갔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육과 영과 혼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는데, 이렇게 육과 영과 혼에 대해서 관심은, 곧 자기 구원에 대한 관심이란 겁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아닌, 자기 구원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나는 이제 망했다" 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있는데, 그리고 "이 세상은 위험한 곳이다" 라는 생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게 소돔과 고모라도 마찬가지인데, 그런 의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아무리 예수님을 연구해도,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땅에 속했다" 라는 것은,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가 이미 치워졌다는 것인데, 즉 "망했구나. 끝났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 생일 축하합니다 !!
여기서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사람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해마다 잊지 않으려고 하는 사건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자기에 대한 출생사건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생일 축하합니다 ♪" 라는 것인데, 즉 자기가 태어난 날이 있고, 그리고 지금껏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리고 또한 무엇을 생각하는고 하니, 자기가 태어난 것, 그리고 두려워하면서 자기가 죽는다는 것도 염두에 둔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들이 기억하는 사건은 출생사건과 사망사건인데, 그렇다면 이것은 둘 다 누구에 관한 사건입니까? 둘 다 자기에 관한, 즉 '나의 사건' 이라는 겁니다.
* 십자가 사건과 은사 !!
그런데 예수님께서 미지의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 즉 "너희는 땅에 속했고 나는 땅에 속했다" 라는 세계에서 오셨을 때, 그러면 예수님이 가지고 온 사건은 출생사건입니까? 사망사건입니까?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오셨다는 말이죠. 자기의 출생사건과 사망사건, 즉 자기의 구원사건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십자가 사건인데, 그러면 은사는 어디서 나옵니까? 십자가 사건에서 나와서, 자기의 출생사건과 사망사건을 그만 뭉개버린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은사' 라는 겁니다. 즉 십자가 사건이 자기의 출생사건과 사망사건을 부수어 버리는 것, 그게 은사라는 말이죠.
소돔과 고모라에 천사가 왔을 때, 그 동네 사람들은 자기들이 평생 살았던 소돔과 고모라를 결코 위험한 세계라고 여기지 않았다는 겁니다. 살 만한 세상으로 보았는데, 실제로 그 당시 소돔과 고모라는 비옥한 땅으로, 다들 부러워하는 곳이었다는 말이죠. 최고의 복된 땅으로 보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창세기 14장을 보면, 그곳을 차지하려고 전쟁을 벌이고 했다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헤어질 때, 아브라함이 롯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마음대로 선택하라고 하는데, 그럴 때 조카 롯은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롯이 보기에는 어떻다는 겁니까? 그것을 창세기 13장에서는 여호와의 동산, 즉 에덴동산과 같았다고 한다는 겁니다.
(창 13: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창 13: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창 13: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에덴동산처럼 보이는데, 그곳을 과연 위험하다고 여길까요?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러니 그들은 가장 좋은 땅에 산다고 하는 자부심까지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롯의 아내는 자기가 살던 소돔과 고모라에 미련이 너무나 가득했다는 것이죠. "이런 좋은 땅을 떠나서는 우리가 살 수 없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천사가 미리 당부를 했다는 겁니다. 미련을 가지고 뒤를 돌아다보지 말라고 말이죠.
*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
그런데 롯의 아내가 그만 뒤를 돌아다보고 말았는데, 그러자 사람으로 취급을 받지 못하고, 그만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즉 "너는 사람도 아니야. 소금이 되어라" 라는 것인데, 그 사건이 바로 언약사건인데, 즉 아브라함 언약사건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롯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롯을 소돔과 고모라에서 빼내주었다는 것이죠.
(창 19:29)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 은사의 출처가 곧 언약 !!
그러므로 결국 언약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새로운 세계, 낯선 세계,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세계, 그 세계가 인간 세계에 와서 자기 세계에 들어갈 자들을 뽑아내고 모집하는 은사를 제공하는 출처, 그것이 곧 언약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궁금해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사람들은 출생과 사망사건 사이에서 늘 자기에게 관심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은사가 와서 공격을 한다는 말이죠. 그게 지금까지 한 이야기인데, 즉 "내가 살고자 하는 것은 은사가 용납하지 않는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언약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정리를 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생각을 해봐야하는 것은, "나는 평소에 이 세상을 떠나서 구원받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과연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라는 것인데, 그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게 뭉개져야하는데, 그렇게 뭉개질 때 뭉개지더라도 어떤 것들을 하나님께서 박살을 내버리는지, 그것을 우리 자신이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 인간은 죽음에 대해서 무능력자 !!
그것을 지금부터 이야기를 해보겠는데, 인간들이 기억하는 것은 출생사건이고, 그 출생사건으로 말미암아서 등장하는 것은 '나' 라는 존재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그 '나' 라는 존재에서 행위가 나오는데, 왜냐하면 생각하고 움직여야 밥이라도 먹고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상대방이 돌을 던지면 어떻게 합니까? 살기 위해서 피하는데, 그게 행함이라는 말이죠. 남이 떠밀어서 피하는 것이 아니고,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아무튼 자기가 알아서 피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 안에 자기 존재를 자기 행위로 커버하고 키운다고 하는 요소가 들어있다는 것이죠.
여기서 더 나가보면 결국 무엇인고 하니,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인간들이 무엇을 잘못 생각하고 있는고 하니, 이 죽음에 대해서, 즉 "내가 죽는다" 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이 세상에서 이렇게 살다가 자식들을 다 모아놓고, "이제 내가 죽을 때가 되었구나" 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에게는 "내가 죽는다" 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은 죽음에 대해서 무능력자라는 겁니다. "5초 후에 죽겠네. 5초를 기다리자" 라고,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그렇게 대처를 한다는 말이죠. 인간들은 자기가 죽는 것을 '죽는다' 라고 여기는데, 그것은 오해라는 겁니다.
만약에 자기가 늙어죽는다고 하면, 그러면 죽기 전의 다른 사람은 그게 살아있는 것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세상에서 죽지 않는 사람은 없는데, 모두 다 죽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모두가 다 죽는다고 하면, 이 죽음이 자기와 관련된 사항이 아니라는 것을 감 잡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 죽음 사건은 통합적인 사건 !!
착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모두가 다 죽는데, 그게 전도서에 나오는 말씀이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 죽음의 문제는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즉 "죽음 사건은 내 사건이 아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죽음의 사건은 통합적인 사건인데, 즉 인류전체에 다 주어진 사건이라는 것이죠.
(전 7: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출생사건도 마찬가지인데, "내가 태어났다" 라는 것, 그게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엄마, 내가 태어났어" 라고 합니까? 그게 말이 됩니까? 물론 아이가 말도 못하지만, 만약에 그렇게 나온다면, 엄마는 "네가 태어난 것이 아니고, 내가 태어나게 해주었어" 라고, 그렇게 말을 고쳐준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있기 이전에 내가 있었는데, 내가 이 정도에서 태어나볼까?" 라고 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죽기 이전에 내가 있었는데, 내가 이 정도에서 죽어볼까?" 라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즉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오해와 오해 사이에 놓여있다는 말이죠. 인간은 어떤 한 순간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없는데, 그러니 그 모든 게 오해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 육과 영과 혼이 나오니까,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육과 영과 혼은 내게 속한 일이니, 그것을 잘 관리해서 지식을 확보하면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있겠네" 라고 생각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기 사건이 되고 마는데, 하지만 출생이 자기 사건이고, 또한 죽음이 자기 사건입니까? 전혀 그렇지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출생이 자기 사건이 아니고, 죽음도 자기 사건이 아니고, 심지어 그 사이에 끼인 인생도 자기에게 일임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자기 행위는 전부가 다 아무런 짝에도 소용이 없는 행위라는 겁니다. 물론 자기 생각도 마찬가지고 말이죠.
그런데 교회에 나와서 "일주일 동안 이 세상에서 살았으니, 주일이니 교회에 나가가지" 라고 한다고 하면, 그것은 무슨 사건이 됩니까? 그만 자기 사건이 되고 마는데, 그런데 은사는 그것을 무슨 사건으로 바꾸어준다고 했습니까? 자기 사건을 주님의 사건, 즉 십자가 사건으로 바꾸어준다는 겁니다.
* '나의 사건' VS '십자가 사건'
무슨 말인고 하니, "내가 죽는다" 라고 하면, 사람들은 이것을 자기 사건처럼 여기는데, 하지만 이것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한다는 겁니까?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 사건의 일부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결코 자기 사건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의 사건, 즉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이죠.
같은 말로서 "내가 태어났다" 라고 하면, 소돔과 고모라와도 같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마치 자기 사건처럼 보이는데, 하지만 주님의 나라에서 볼 때는 어떻다는 겁니까? 자기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난, 즉 예수님 사건의 일부라는 겁니다.
여기서 로마서 8장을 보겠는데, 3절입니다.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 하나님의 관심사는, 인간 구원이 아닌 율법의 완성 !!
여기 3절에서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라고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의 관심사가 율법에 있습니까? 육신에 있습니까? 율법의 완성인데, 그러니 관심사가 벌써부터 다르다는 겁니다. 인간 구원이 아니고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하나님은 하시나니" 라고 하는데, 이것이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겁니까? 기도에 응답해주는 겁니까? 자기가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사는데 도움을 주는 겁니까?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율법의 의를 완성시키는 일, 그 율법을 요구를 이루시는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관심사만 바뀌면 이 내용이 이해가 안 될 수가 없는데, '나의 구원' 이라는 관심사만 끊어버린다고 하면 말이죠. 우리 인간은 위험한 존재라는 겁니다. 인간은 망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 이야기, 성경 이야기, 즉 하늘나라의 은사가 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망한 것을 어떻게 잘해서 극복하도록 해주려는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망한 자를 하나님께서 찾아오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의 사고방식이 완전히 부서지고 바뀌어야만 하는데, 그런 상태에서의 대화가 성도간의 대화라는 겁니다.
*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 !!
예수님은 그냥 몸이 아니고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셨는데, 그게 예수님의 탄생사건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이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다른 모든 인간들은 아무리 생일을 축하하고 하더라도, 역시 죄 있는 육신의 몸이란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런 죄 있는 육신의 몸을 가지고 존재로 의식해서, 육과 영과 혼을 잘 조립해서 자기 구원을 이루려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것인데, 그렇지요? 죄가 있으면 죄가 있는 것이지, 왜 그런 죄를 구원시키려고 하느냐는 겁니다. 주님은 죄를 이용하는 것이지,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이죠. 죄가 있으면 지옥으로 가야하는데, 천국은 안 된다는 겁니다. 다만 죄를 이용할 수는 있다는 것이죠.
지금부터 우리가 살펴볼 것은, "주님이 하늘나라에서 은사를 줄 때 어떤 형식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오시는가?"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죄인으로 태어난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서 무슨 짓거리를 한다는 겁니까? 우리는 육과 영과 혼이라는 철학적 관념을 가지고 자기 구원을 시도한다는 겁니다.
* 영(靈), 육(肉), 혼(魂)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키에르케고르라는 철학자가 인간의 심리를 이미 육과 영과 혼으로 설명을 했다는 말이죠. 인간의 '육'은 생존에 대해서 열심을 내는 것인데, 즉 밥을 먹고 살아가는데 최선을 다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혼'은 바르게 살려고 하는 것인데, 남들에게 나쁜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죠. 이웃끼리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인데, 즉 윤리와 도덕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영'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윤리와 도덕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거룩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데, 이것을 누가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까? 키에르케고르라는 덴마크 철학자가 이런 주장을 했다는 겁니다.
그가 이렇게 정리한 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동의를 했는데, 반면에 그렇지 않는 자들은 무엇인고 하니, 기독교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동의하지를 않았다는 말이죠. 그들은 육과 혼, 그 두 가지로 멈추려고 했다는 겁니다.
다들 키에르케고르를 기독교 철학자라고 하는데, 물론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성도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는 육과 혼과 영, 즉 "하나님의 거룩함을 입어야 한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나의 사건', 즉 자기가 천국에 가는, 자기가 구원을 받는 사건이 되고 만다는 말이죠. 그러니 키에르케고르는 십자가 사건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즉 인간에서 출발해서,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기가 천국에 가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죄라는 말이죠.
* 언약 관계망에 합류될 때, 그게 곧 구원 !!
따라서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은, 이 땅에 올 때는 은사로서 도착을 하는데, 그런데 그 중간에 언약의 관계망으로 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라는 것은, "내가 어떻게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하는가?" 라는 것이 아니고, 언약자체의 관계망에 합류하게 될 때, 그게 곧 구원이라는 말이죠.
이 '관계망' 이란 말이 어려우면,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겠는데, 여기 가운데 언약궤가 있다고 하면, 이렇게 그 주위의 인간세계와 거미줄처럼 연결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이런 거미줄 망에 감전이 된 것, 그게 구원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이 관계망에는 예수님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관계망 하나하나가 말씀에 해당되고, 그 말씀 안에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피가 들어있어서 흐르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 관계망이 다 이루심에서 왔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새삼스럽게 무엇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전혀 없는데, 즉 육에서 혼, 그리고 혼에서 영이 되기 위해서 말씀을 지키고 말고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없는 정도가 아니고, 이 말씀 자체가 지키려고 하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그것이 죄라고 하면, 그것을 들추어내는 작용을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4장을 보겠는데, 12절과 13절입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 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라고 하는데, 이것이 얼마나 신기한 이야기인지 모른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살았다' 라는 것은 누구에게 해당이 됩니까? 보통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뛰놀고 하는 것을 보고, "야, 그놈들 참 건강하네. 살아있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런 활동성을 보일 때 '살았다' 라고 하지, 가만히 있는 이 문자를 두고 '살았다' 라고 하지 않는데, 문자는 '죽었다' 라고 본다는 말이죠. 하지만 여기 히브리서 4장 12절과 13절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죠. 그리고 마지막에는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3장을 보면 여기서 더 나아가는데, 6절과 7절입니다.
(고후 3: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후 3: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말씀이 두 가지의 기능으로 나누어지는데, ㉮"문자로 된 말씀은 그것 자체가 살아서 우리를 죽이는 용도로서 주어졌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이 돌판에 문자로 새겨서 주신 이유는, "전부 다 죽어라. 너희들은 망했어" 라는 것인데, 즉 우리는 이미 끝장난 세계에 살고있음을 일러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율법을 문자로 주셨다는 말이죠.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것도 모르고 문자를 지킨다고 하는데, 그들이 어떻게 나옵니까? 즉 "'하라' 라는 것은 365가지, '하지 말라' 라는 것은 253가지, 그렇게 해서 618개의 율법이 있다" 라고 하면서, 그것을 지키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고 할례를 행하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안식교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우리는 성경에 있는 대로, 말씀에 있는 대로 안식일을 지키는데, 그것이 뭐가 나쁘지? 주일을 지키라는 것은 없지만,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분명히 있잖아"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안상홍 집단이나 고신 측도 그렇고 말이죠.
그렇게 문자적으로 지키려고 하는 것들을 보면, 어느 특정한 집단이 이단이 아니고, 이 세상의 모든 종교가 다 이단임을 알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주님이 주신 복음을 이단화를 시키고 있지 않는지, 그것을 돌아봐야 한다는 말이죠.
* 율법의 기능 !!
그래서 주님은 율법의 돌판으로 모든 인간을 다 죽이시는데, 그런데 사도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그렇게 죽이는 기능이 있는데, 또 다른 기능이 있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게 살리는 기능인데, 그러니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는,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라는 것에 대한 답변이 아니고, "너희들은 이미 죽은 자야. 살 수 없어" 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말이죠.
이미 이 세상은 죽은 세상인데, 태어난 이유도 모르고 죽는 이유도 모르고, 물론 살아가는 이유도 모르고, 그렇게 이미 죽은 자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냥 열심히 해서 밥을 먹고 살아가면 되는 줄로 아는데, 즉 "착하게 바르게, 그리고 천국을 바라보면서 살자" 라고 하면 되는 줄로만 알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들은 모든 것이 '나의 사건', '나의 일' 인데, 즉 "내가 잘 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고, 내가 잘 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존재한다" 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렇게 마지막에는 모든 것이 자기 일이라는 겁니다. 주님은 여기에 심판을 해버리는데, 그것이 바로 은사라는 겁니다. 즉 "너희 자신을 제대로 알아라" 라고 하시면서 은사를 주신다는 말이죠.
* 죽이는 식으로 살린다 !!
그런데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주님께서는 말씀을 가지고 살리는 일도 하신다. 그게 율법 안에 같이 병존, 즉 병행해서 공존하고 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죽이는 기능이 따로 있고 살리는 기능이 따로 있는데, 여기에서 죽이는 기능과 살리는 기능을 합치게 되면, "죽이는 식으로 살린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사인데, 하지만 그것은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 자기 아들을 보내서, 즉 예수님과 그 말씀, 그게 곧 언약인데, 그렇다면 예수님과 언약이 어떤 관계인고 하니, "죽이는 식으로 살린다" 라는 것이 예수님에게 해당이 된다는 겁니다. 그게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라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었다가 3일만에 다시 부활이 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그냥 하늘로 데리고 가시는 게 아니고, 말씀대로 실현하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을 죽였다가 살린다" 라고 하는, 바로 그 방식이라는 겁니다.
*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의 단독사건 !!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는 "나도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고 하면, 그러면 예수님처럼 나도 죽을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졸지에 십자가 사건은 그만 날아가 버리고, 자기 사건, 즉 자기를 살릴 궁리를 하게 된다는 말이죠.
하지만 예수님을 죽이시고 살리실 때는, 그냥 하는 게 아니고 말씀의 사건, 즉 십자가 사건에 준해서 죽이시고 십자가 사건에 준해서 살리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의 단독사건인데, 그러니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용하면 곤란하다는 것이죠. 자기 사건이 아니기에 말이죠. 자기 구원이 아닌 예수님 구원, 그게 십자가 사건이라는 겁니다.
* 부정할 수 없는 세계에 오신 예수님 !!
아까 그렸던 거미줄을 다시 그려보면, 여전히 하늘나라는 보이지 않는 세계인데, 반면에 이쪽 세계는 우리가 충실하게 보고 있다는 말이죠. 물론 시력이 좋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세계, 즉 확실하게 있는 세계라는 겁니다. 아침에 눈만 뜨면 부정할 수 없는 세계라는 말이죠.
바로 이런 세계에 주님이 오셨는데,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이 이런 거미줄과 같은 관계망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모든 것이 예수님에게 집중이 된다는 말이죠.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이 이해하기가 좀 힘들지 싶은데, 그렇지요?
그래서 마태복음 25장을 보겠는데, 3절입니다.
(마 24:3)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여기에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라고 되어있는데, 감람산이 예루살렘보다 높고, 그게 바로 옆에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의 전경이 잘 보이는데, 예루살렘에 가본 사람이라면 알 수가 있다는 겁니다(ㅋㅋ). 예수님께서는 그 예루살렘을 보면서 "저 도성은 망한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 마지막 때에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묻기를, "마지막 때에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라고 하니, 예수님은 7절과 8절에서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마 24: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마 24:8)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
그러면 나라에 기근과 지진이 있는 것과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이 과연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관계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자기의 구원만 생각하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이 이 세상의 바깥에 있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말이죠. 자기만 챙기면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만 천국에 가면 되지, 이 세상 돌아가는 것까지 왜 신경을 써?" 라고 하는, 그런 마음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죠. 제자들이 예수님께 "마지막 때에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라고 하는데, 이게 과연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그래서 질문을 하는 것일까요?
그게 아닌데, 제자들의 마음가짐도 어떻다는 겁니까? 이 세상의 돌아가는 것이 궁금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라는 것인데, 즉 주님의 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의 살아갈 궁리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 망하는 세계에서 망하는 존재로서 태어난 인간 !!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세상 전체가 위험한 세계이고, 망한 세계다" 라고 하시는데, 그래서 그 망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신다는 겁니다. 망하는 세계는 망하는 것이지, 그것이 다시 멀쩡해지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 인간은 망하는 세계에서 망하는 존재로서 태어났다는 것이죠.
여기 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라고 하시는데, 또한 16절에서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무슨 뜻입니까? "온 천지가 혼란에 빠져서 정신이 없을 것이다" 라는 이야기라는 말이죠.
(마 24: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마 24: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
(마 24: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마 24: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 가지 말며
(마 24: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 이 세상의 멸망 징조가 곧 자기 자신 !!
이 세상이 멸망하는 징조는 딱 하나인데, 예수님을 미워했기에 망한다는 겁니다. 미워하는 것 자체가 징조인데, 더욱 노골적으로 말하면, "이 세상이 몰락하는 이유는 내가 지금 예수님에 대한 관심사가 희박하기 때문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의 멸망 징조가 곧 자기 자신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 생각만 하는 것이 멸망의 이유, 즉 징조가 된다는 것이죠.
언약에 의해서 거미줄이 이렇게 퍼졌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쪽에서 거미줄을 발산하고 있다는 겁니다. 일종의 레이더망인데 말이죠.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이번에 이스라엘과 이란이 전쟁을 하면 기름값은 얼마나 오르겠노?"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뭐라고 합니까? "내 아들이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회사에 다니는데, 기름값 때문에 회사상태가 좋지 않아져서 잘리면 어떻게 하지? 취직한지 이제 겨우 6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큰일이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 걱정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 세상의 멸망징조를 자기가 보여주고 있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 자기 관계망 VS 예수님 관계망 !!
그렇게 자기 쪽에서 발산한 레이더 관계망이 예수님의 관계망과 서로 부딪치면서 충돌을 일으키고, 그러면서 예수님에 대한 미움이 생기는데, 그렇게 번쩍 번쩍 스파크를 마구 일으키게 된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라는 말이죠.
"이스라엘은 왜 또 이란이 전쟁을 하려고 하지? 하여튼 골치 덩어리다. 그냥 조용하게 있으면 기름값도 내려가고 얼마나 좋겠노?"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코로나 때문에 망한 가게가 한 두 개가 아닌데, 카페의 경우에는 대부분이 다 망했다는 것이죠. 그 코로나가 중국에서 실험실에서 실험하다가 그만 밖으로 유출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말이죠.
그렇게 자기가 자기 걱정을 하는 것이 종말이 징조이고 종말의 증거라는 겁니다. 우리는 자기의 레이더망을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는데,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기밖에 모른다는 말이죠. 자기만 편하고 행복하면 그만인데, 그리고 거기에 성경말씀까지 알아서 천국에 가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은사가 아닌데, 그야말로 자기 노력이고 애씀이라는 말이죠. 자기 사건과 주님 사건의 스파크, 충돌, 그것은 매 순간 순간 일어난다는 겁니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는데, "나는 죽음 안에서 나의 죽음의 능력을 상실했다" 라고 말이죠.
* 진짜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 !!
늙어서 죽는 것은 죽음이 아닌데, 진짜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관심사는 자기가 늙어서 죽는 것에 있다는 말이죠. 요양병원에 가서라도, 그렇게 끝까지 죽는 순간까지도 자기 죽음만 생각한다는 겁니다. 즉 "예수의 죽음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어? 그런 것은 나는 모른다. 나는 나의 죽음만 나와 상관이 있다고 여긴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죽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자기의 일상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주님이 왜 자꾸만 나의 일상을 연장시켜주시지? 왜 아직도 이 땅에서 살아가게 하시지?" 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무엇인고 하니, "주님, 어떻게 하면 하루라도 더 배부르게 살 수 있어요?"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게 우리의 관심사인데, 우리는 하루라도 더욱 건강하게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 사건에 관심이 있으니, 그런 태도로 성경을 보고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자기 레이더망을 구축하기 위해서, 즉 자기 정당성을 보장하는 식으로 구성을 해낸다는 겁니다.
여기 교재 201페이지에 야고보서 4장 4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뭐라고 합니까?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라고 하는데, 그게 바로 자체적으로 발동시킨 자기 레이더망 때문이라는 말이죠. 이 세상에 대해서 자기 관계망을 형성시켰다는 겁니다.
(약 4: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에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혼자서 살아갈 수는 없다는 말이죠. 물건을 팔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즉 단골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인간은 그 관계망에 몰입하고 집착하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에 나와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그래서 교회에 나온다는 겁니다.
*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
하지만 예수님의 구원은 그게 아닌데, 십자가에서 나온, 즉 언약에서 나온 관계망이 대해서 자기 죽음을 상실한, 즉 자기 죽음이 아닌 다른 분의 죽음에 걸려들게 될 때, 그것이 바로 구원의 능력이라는 말이죠.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산다" 라고 하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다가 죽는 것이 아니고, 자기 나름대로 살아보려고 얼마나 몸부림을 치고 있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우리는 그렇게 부단하게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고 있는데,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진정한 죽음의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 은사란, 나의 죽음이후의 능력이다 !!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은사란 나의 죽음이후의 능력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게 곧 은사라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의 죽음이후에까지 연결되는 것이 자기 레이더망에 도달하게 될 때, 그러면 그 사람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게 곧 구원이라는 것이죠.
그러면 그게 무슨 의일까요? 자기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라는 겁니다. 자기 의는 자기 살아생전에 구축한 것이고 저장한 것인데, 남들에게 착한 일을 하고 교회에 충성해서 말이죠. 그것을 끌어모으면 자기 의가 되는데, 그런데 그 자기 의는 어디서 멈추게 됩니까? 자기가 죽을 때 멈추게 되는데, 그러면 그것은 은사가 아니라는 겁니다.
은사라는 것은 자기 죽음과 무관하게, 자기 죽음이후에도 계속해서, 그 영원의 세계까지 연결되는 의, 그 의는 바로 자기 때문에 죽으신 주님, 그분의 의라는 말이죠. 그러니 사람들을 만나면 "당신이 죽고 난 뒤에도 연속이 될 수 있는 의미가 미리 당신에게 주어졌습니까?" 라고 물어보라는 겁니다.
오늘은 목을 조심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가 없는데 말이죠(ㅋㅋ). 아무튼 예수님의 관계망에 있어서, 그 관계망이 거미줄처럼 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거미줄의 마디마디에 성도가 한 사람 한 사람씩 다 포로로 잡혀있다는 말이죠. 마치 거미줄에 날파리가 걸리듯이 성도가 그렇게 걸려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는 무엇인고 하니, 성도는 죄인인데 주의 피의 능력을 받았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도가 되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어디에 간다는 겁니까? 천국에 간다는 말이죠.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그 사람은 평생 죄밖에 지은 것이 없는데, 어디까지나 죄인이라는 겁니다. 세리와 강도와 창기처럼 말이죠. 그런데도 천국에 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도 너처럼 천국에 가고 싶다" 라고 하면 곤란한데, 왜냐하면 관계망이기 때문에 말이죠. 자기 능력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관계망, 즉 레이더망이 그 사람을 삼켜버렸다는 말이죠. 미리 쳐놓은 거미줄에 걸려들었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입에서 무엇을 토해내는고 하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의가 하늘나라에서 받아주는 유일한 의입니다" 라는 것이 터져 나오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소리를 들은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세상에 살고 있던 자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판단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이익을 줄 사람인가? 손해를 끼칠 사람인가?" 라는 것을 말이죠.
세상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해서 만나는데, 그런데 거기서 예외가 되는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이익인지 손해인지, 그것을 따져서 친구인지 원수인지를 구별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구별을 전혀 하지 않고 무조건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가족, 즉 패밀리라는 겁니다.
그래서 가족이 있어야 인간이 된다는 말이죠. 무조건 먹어주어야 하고, 입혀주어야 하고, 재워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그 아이가 자라면 "이제 우리 집에는 오지 마라. 돈을 잘 벌면 그때 와라" 라고 하면서 다시 본색을 드러내기는 하는데, 그게 바로 가족이라는 말이죠.
* 이익사회와 혈통사회 !!
이런 가족을 제외한 사회를 '이익사회' 라고 하는데, 그리고 이런 이익사회의 반대를 '혈통사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과거 동양에서는 이익사회가 아닌 혈통사회가 위주였는데, 이익사회는 서양에서 출발했다는 말이죠. 그래서 서양이 동양에게 전쟁을 벌렸는데, 그게 제국주의 시대라는 겁니다. 그 결과로 서양이 이기고 동양은 식민지가 되었다는 말이죠.
인도네시아, 베트남, 미얀마 등등, 대부분의 나라들이 네덜란드나 포르투칼, 스페인, 영국 등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필리핀은 미국에게 먹혔다는 겁니다. 아프리카는 두 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죠. 이것이 인간들이 사는 이 세상의 관계망인데, 힘이 있으면 살고 힘이 없으면 죽는다는 겁니다. 그런 이익사회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나름대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린다는 말이죠.
* 성도를 만났을 때와 교인을 만났을 때 !!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느 날 성도를 만났다는 겁니다. 그 성도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당신은 백날 해봐야 죄인이고 지옥에 갑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교인을 만나서는, "교회에 나오면 복을 받고, 죽어서 천국에 갑니다. 물론 건강한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제일 중요합니다" 라는 소리를 듣는다는 겁니다. 그게 전도지에 다 나오는 이야기인데 말이죠.
그렇다면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 성도의 말을 이해하겠습니까? 교인의 말을 이해하겠습니까? 교인의 말을 이해하게 되는데, 그래서 "믿지는 않더라도 교회에 간다고 해서 굳이 손해를 보는 것이 있을까? 그리고 하나님을 믿으면, 아버지도 나를 사랑해서 도와주는데, 사랑의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지 않을 수가 있겠어? 그러니 나가보자"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교인이 교인을 만들게 되는데, 그러면 교회는 부흥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 교인들이 교회에서 하는 말이 전부가 자기 사건인데, 즉 "내가 암에 걸렸을 때 기도했더니만 암에서 나았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십자가 사건이 아니고 자기 사건이라는 말이죠. 그렇지요?
자기가 암에서 나았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있을까요? 없다는 겁니다. "나는 이것으로 인생이 끝난 줄로 알았는데, 기도원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암에서 낫게 해주셨다" 라고 하는 것은 자기 의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이 어디에 저장이 될까요? 자기 사건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더욱 더 구축하게 만들고, 또한 저장을 시킨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간증집회인데, 사람들은 이런 간증집회가 납득이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평소에 자기 의에 환장을 해있기 때문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이 세상이 이익사회이니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복을 받는 방법이 없을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하지만 성도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게 사도바울과 똑같다는 겁니다.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 라고 말이죠. 즉 "이 세상은 필히 망한다" 라는 것인데, 아니 이미 망했다는 겁니다. 그게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데, 우리는 예수님의 전도방법이 어떠한지 여기서 확실히 알 수가 있다는 말이죠.
마태복음 13장 37절에서 43절까지 보겠습니다.
(마 13:37)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마 13: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마 13:39)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마 13: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마 13: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마 13:42)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 13: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있는 자는 들으라
* 말씀의 레이더망이 덮침으로서 !!
그렇다면 여기에서 질문에 들어가는데, "말씀의 레이더망을 누가 제시했는가?" 라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대한 것입니까? 아니면 일방적으로 주님이 제시한 것입니까? 주님이 제시했는데, 그렇다면 그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데, 그게 바로 전도이고 복음이란 것이죠.
그러니까 육과 영과 혼을 어떻게 하고 말고 할 것이 없는데, "무엇을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까?" 라는 것도 전혀 필요치가 않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거래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처지와 입장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는 자기 사건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데, 주님이 보시기에는 전부가 다 십자가 사건에 말려들었다는 겁니다. 주님의 빨간 레이더망이 시커먼 우리 인간의 레이더망이 무서워서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주님의 레이더망이 우리를 덮쳤다는 말이죠.
이것은 이사야서 40장의 말씀 그대로인데, 즉 "말씀이 말씀대로 되리라. 끝!",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영광은 풀이고 꽃과도 같아서 시들어버리지만, 주님의 말씀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단 하나도 없이, 모든 것이 다 성취가 되어서 돌아온다는 말이죠.
(사 40:6)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사 40: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그러면 전도는 어떻게 해서 되는 겁니까? 우리 인간들이 하는 것이 아니고, 은사, 즉 예수님에게 임한 그 성령이 그 사람에게 임했기 때문에, 즉 걸려들었다는 겁니다. 그 은사가 걸려든 자를, 즉 성도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만드는데, 그 사람의 입을 벌리게 해서 주님의 십자가 관계망을 가지고 외치게 한다는 말이죠.
* 은사인가? 친목인가?
그 관계망이 예수님의 은사로 되어있는데, 반면에 인간의 관계망은 교회의 친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겁니다. "집사, 장로, 목사" 라고 하는, 그게 교회의 결집력이 되는데, 그런 결집력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런 결집력은 돈을 내지 않으면 모두 다 떨어지게 되어있는데, 즉 돈으로 구성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헌금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복음은 안다" 라고 하면, 그것은 말도 안 된다는 소리라는 말이죠. "돈이 없어서 헌금은 하지를 못하지만, 복음은 안다" 라고 하면, 그것은 맞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자기 사건에 그만 미쳐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익사회' 라고 했는데,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인간이라는 겁니다. 심지어 교회에 와서도 찬가지라는 것이죠.
* Thank you so much for everything !!
그러니 교회에는 교인들밖에 없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가 등장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교인들이 하는 이야기와 이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같을까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죠. 성도는 말하는데, "주님이 이렇게 또 살려주셔서 또 다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딸이 이혼하고 다시 3년 만에 결혼식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더 살게 하셔서 딸의 결혼을 또 다시 보게 하시네요" 라고 하게 되는데, 그렇게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왜 이 세상이 망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더욱 더 깨닫게 해서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게 되는데, 그게 곧 성도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 자신의 처지를 혼동하지 않고 제대로 알게 하옵소서. 주제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천국에 가려고 교회에 나오는 이 모습이 얼마나 악마적인지, 그것을 주님의 은사를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깨닫게 하시고, 그게 우리 자신의 일이 아닌 주님의 일이라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4,4,24 오후 4시에 마침.
손주 대신 주신 강아지를 주심도 감사케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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