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지옥하나님-원수사랑하심

아빠와 함께 2024. 6. 25. 19:01

[24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47 - 원수사랑하심

24,06,03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달란트 비유 !!

오늘이 교재 '지옥의 하나님' 마지막 시간이 되지 싶은데, 교재 205페이지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를 하고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4절에서 31절입니다.

(마 25: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마 25: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마 25: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마 25:17)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마 25: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마 25: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마 25: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마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마 25: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마 25: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마 25: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마 25: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마 25: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But his master answered and said to him, 'You wicked, lazy slave, you knew that I reap where I did not sow, and gather where I scattered no [seed.]
(마 25: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Then you ought to have put my money in the bank, and on my arrival I would have received my [money] back with interest.
(마 25: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
(마 25: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마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여기 18절에 보면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라고 하는데, 이것이 달란트 비유인데, 이 비유를 가지고 예수님은 천국과 지옥을 설명하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이니 당연히 받아들이데,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납득이 되지 않다는 말이죠.

이게 도대체 천국과 지옥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인데, 주인은 집을 비우고 오랫동안 오지 않고,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그 주인의 돈을 땅을 파고 감추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어떻게 천국과 지옥과 연결이 되는고 하니, 한 달란트 받은 자가 보여주는 모습이 바로 지옥에 가는 자의 특징이라는 말이죠.

* 인간은 지옥에 갈 수가 없어 !!

강의초반부터 어려운 이야기를 해서 죄송한데, 인간은 지옥에 갈 수가 없는데, 인간은 천국에도 가지 못하고 지옥에도 가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천국에 갈 때는 천국에 가는 이유가 주어져야 하고, 그리고 지옥에 갈 때도 역시 지옥에 가는 이유가 주어져야만 한다는 것이죠.

물론 나쁜 짓을 하면 지옥에 가는 것은 맞는데, 그런데 그 나쁜 짓이라는 것이 자기가 생각하는 나쁜 짓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신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선악적인, 즉 윤리 도덕적으로 판단한 나쁜 것이란 말이죠.

그렇게 해서는 지옥이 설명되지 않고, "너는 예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어떻게 했지?" 라고, 그렇게 예수님과 관련지어서 지옥으로 보낸다는 말이죠. 그러니 천국도 착한 짓을 한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저는 예수님이 주신 것으로 이렇게 했습니다" 라는 것으로 천국에 간다는 겁니다.

* 땅을 파고 감추고 !!

여기 18절에 보면, 지옥에 가는 사람, 즉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주인이 준 돈을 가지고 땅을 파고 묻었는데, 그것을 '감추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주인의 돈을 감추지요? 그것은 자기 것이 아니고 남의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감춘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 사람이 감추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기 것인데, 그러니 지옥에 가는 사람은 자기 것으로 자기 인생을 산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타인의 것은 감추고 자기 것은 감추지 않는, 그런 자가 지옥에 간다는 것이죠.

* 예수님이라는 타인 !!

그러니 천국에 가는 사람은 지옥에 가는 사람과 반대라고 여기면 되는데, 즉 주인의 것으로만 평생을 살아온 자라는 겁니다. 이 주인은 남, 즉 타인이라는 말이죠. 예수님이라는 타인의 은혜를 평생 누리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사람은 천국에 간다는 겁니다. 하지만 자기가 노력해서 지금까지 이렇게 왔다고 여기는 사람은 지옥에 간다는 말이죠.

그러면 지옥에 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까? 받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받았다는 겁니다. 햇빛과 공기를 받았다는 말이죠. 하지만 지옥에 가는 사람은 그런 주인의 은혜를 감추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감출 때 무심코 감추는 것이 아니고, 땅을 파고 감추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여기에는 의도가 있는데, 주인을 무시하는, 즉 하나님의 은혜를 밟아버린다는 겁니다.

여러분의 주위에 있는 불신자들의 특징을 보라는 말이죠. 항상 자기 것을 내세우기 위해서, 거기에 걸리적거리는 것은 발로 짓밟아버린다는 겁니다. 마치 주인에게 받지 않은 것처럼 땅을 파고서 감추어버린다는 것이죠. 주인이 먼 타국으로 떠나고 없을 때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 오랫동안 인간은 홀로다 !!

그러면 이것을 좀 더 깊이 있게 생각을 해보면, 주인이 멀리 타국에 갔는데, 그것도 오랫동안 가있었다는 말이죠. 이것을 두고 "오랫동안 인간은 홀로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계속해서 주어지는데, 인간은 홀로 남아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홀로 남아있는 것은 두고, '닳아진다', '무너진다', '사라진다' 라고 하는데, 결국은 '죽음' 이라는 말이죠. 나이가 들면, 특히 '닳아진다' 라는 것이 실감이 나는데, 자기 몸이 그렇다는 겁니다. 아랫도리가 없어지는 것 같다는 말이죠(ㅋㅋ). 그러면 쓸모 없는 인간이 되고 마는데,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마치 양초가 된 느낌인데, 누군가가 자르는 것 같다는 말이죠.

자기 것을 추슬러야 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닳아진다는 겁니다. 또한 옅어진다는 말이죠. 희미해지고 얇아지는데, 그래서 옆에서 조금만 건드리고 하면 구멍이 날 것만 같다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커버할 수 있는 능력이 점점 더 없어진다는 것이죠.

그것을 '주저앉는다' 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그 주저앉은 것을 다시금 모으고 조립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어제 생각했던 그 '나'가 된다는 느낌을 가진다는 말이죠. 그러니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이 땅에 있는데 그만 사라진다" 라는 겁니다.

홀로 살면서 이런 현상을 느끼게 되는데, 그런데 사라지면서 사라지지 않는 척, 무너지면서 무너지지 않는 척, 옅어지면서도 자기 것이 두껍게 마련이 되어있다고 남들에게 비추어지도록 노력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멀쩡한 척을 하는 것, 그게 오류라는 겁니다.

* 한 달란트가 바로 '나' !!

그렇다면 조금 전에 이야기한 달란트 비유와 비교해서 일단 해답을 내려보겠는데, 여기서 한 달란트라는 것은 바로 '나' 라는 것인데, 그게 달란트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멀쩡한 척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저 주신 '나'를 땅을 파서 없애버린 것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저 주신 '나'이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고 계속해서 멀쩡한 척을 하는 '나'를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없어지면서도 계속해서 포기하지 못하고, 그럴싸한 괜찮은 존재로서, 관성적으로 버티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냥 무너지면 되는데, 버티려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천국에 가는 사람도, '닳아진다', '무너진다', '사라진다', '옅어진다', '주저 않는다', '망한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성도라면 이런 경우에 어떤 고백을 하게 될까요? 자기가 주님의 달란트라고 한다면 말이죠. 그게 바로 스데반 집사님이 죽을 때 했던 이야기라는 겁니다.

*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

그것이 사도행전 7장 56절에 나오는데, 즉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스데반 집사님은 죽을 때만 이런 말을 했습니까? 아니면 평소에 살아있을 때도 이런 마음이었을까요?

스데반 집사님은 평소에도 이런 마음이었는데, 왜냐하면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말이죠. 스데반 집사님은 자기가 닳아지면서, 예수님이 지금 하고 계시는 일을 자꾸만 들추어내었는데, 그렇게 남들에게 가득하게 예수님을 소개해주었다는 겁니다.

(행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 예수님이 지금 여기에서 활동하신다 !!

그러니까 달란트가 무엇인고 하니, 이게 참 어려운 내용인데 말이죠. 불신자는 "내가 소유하고 있다" 라는 것이고, 신자의 경우에는 "예수님이 지금 여기에서 활동하신다" 라는 겁니다. 주인은 지금 멀리 타국에 가고 없는데, 그런데 남겨준 것이 있다는 말이죠. 스데반 집사님은 그게 자기 몸이라고 본다는 말이죠.

여러분, 신기하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기 몸을 자기 것이라고 보는데, 태어날 때부터 자기 몸이라는 겁니다. 20대도 자기 몸이고, 30대도 자기 몸이고, 60대도 자기 몸이고, 80대도 역시 자기 몸이라는 말이죠. 그게 바로 지옥으로 가는 사람인데, 예수님이 주신 것이 없다는 겁니다. 주신 것이 있더라도 들키지 않게 땅을 파고 묻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에는, 물론 몇 살 때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20대든 30대든 간에 성령이 임한 순간부터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서 자기 몸이 닳아져도, 심지어 돌에 맞아서 죽는 순간에도 자기 이야기가 아닌 예수님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 우리의 몸이 곧 달란트 !!

우리는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데, 자기가 어떻게 죽든 살든 간에 항상 지금 이 순간 어떻다는 겁니까? 우리의 몸이 자기 몸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신 몸인데, 즉 주인이 맡겨놓은 달란트라는 말이죠. 그러니 병원에 가든 어디를 가든, 그 일조차도 누구의 일인고 하니,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인데, 즉 그분이 벌이신 일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몸, 주님의 달란트, 그 귀한 금전을 가지고 "지금 예수님이 일하고 계신다" 라는 것을 티내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이렇게 살아가도록 하신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런 사람이 천국에 간다는 겁니다.

반면에 지옥에 가는 사람은 땅을 파고 묻어버리는데, 즉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살겠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나이가 많아서 주저앉고 있으면서도, 자기 단도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데, 그러면서 "나는 누구의 도움도 받은 적이 없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명절에 일가친척들이 모이면, 전부가 다 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 이야기라는 말이죠. "힘들어도 나는 내 인생을 내가 알아서 살았다" 라는 것인데, 그것말고는 없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 인생을 자기가 알아서 열심히 살았다는 것인데, 그것뿐이라는 말이죠.

* 이 세상은 시체 안치소 !!

지금까지는 어렵게 했는데, 이것을 쉽게 하면, 두 개의 층, 즉 두 개의 세계가 있는데, 위에 있는 세계는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계셔서 아래 세계를 향해서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밑의 세계에는 인간들이 전부 누워있는데, 눈은 다 감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게 시체 안치소라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시체에게 말씀을 주시는데, 그러면 시체가 앉아있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눈을 뜨게 되는데, 어떻게 말인가요? 말씀을 주시니까 그렇게 되는데, 즉 말씀의 능력이라는 것이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라는 것인데, 그게 신약시대의 마지막 때에 주시는 은혜라는 말이죠.

*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

이제 모든 것이 끝났는데, 즉 "인간은 죽었다" 라는 것이 확정된 상태에서, 그 죽은 자에게 말씀으로 오셔서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살았다는 것인데, 말씀으로 말이죠.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로 살았다는 겁니다.

(엡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니 착실하게 살아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신 것으로 산다" 라고 하는 그 말씀을 듣는 것으로 산다는 말이죠. 자기가 예수님을 믿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으면 산다" 라고 하는 말씀이, 지금잠자고 있는 우리를 '탁' 친다는 겁니다.

여러분, 가만히 있는데 기왓장이 떨어져서 머리를 치면 기분이 어떨까요? 그렇지 않아도 무너지고 있는데, 더 엉망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런데 말씀이라는 기왓장이 자기를 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 세상은 시체 안치소인데, 즉 죽은 세상이란 겁니다. 산 사람은 없는데, 왜냐하면 어차피 다 늙어서 죽는다는 말이죠.

예수님은 그런 죽은 세상에 오셔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살아나셔서 하늘의 층으로 가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하늘에서 이미 완성된 말씀을 가지고 시체 안치소에 있는 자기가 택한 자들에게 말씀을 주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누워 있다가 앉아있게 되고, 그 다음에는 서서 있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눈도 뜨고 기분이 좋아서 입도 벌어져 있는데, 그분이 바로 스데반 집사님이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구원의 스토리인데, 즉 "말씀이 와서 잠자던 나를 깨워서 앉게 하고, 그리고 서게 된다" 라고,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 사람을 낚는 어부 !!

마태복음 4장 19절을 보면, 예수님은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라고 하셨는데, 여기에 사람을 낚는 어부가 등장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것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당히 기분이 나쁘게 한다는 겁니다. 즉 "당신이 뭔데 나를 낚아?"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마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사람을 낚는다는 것은, 현재 기존의 모든 세계는 살아있는 세계가 아니고 죽은 세계라는 것인데, 그렇게 죽은 세계이기 때문에 자기는 죽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겁니다. 숨도 쉬고 있고 아프면 병원에도 가고, 그러니 죽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어떤 사람이 와서는 "내가 이제 너를 낚아서 천국에 보내주겠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낚이는 사람은 그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느냐는 말이죠. 당장에 "당신이나 잘 하세요" 라고 나오는데, 즉 "당신이 내 인생을 잘 알아? 아무 것도 모르면서 내 인생에서 나를 낚아준다고?" 라고 할 것이 뻔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자기 인생을 추슬러가면서 살아왔다는 말이죠. 결코 함부로 살아온 것이 아닌데, 만전을 기하면서 살아왔다는 겁니다. 행여나 자기가 잘못해서 자기 인생을 종칠까 싶어서 조심하면서 살아왔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다가와서 "내가 당신을 낚아드리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겁니다.

* 낚인 인생 !!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나오는 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복음체제인데, 즉 "사람이 사람을 낚아서 천국에 보낸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가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누군가에게 낚인 인생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독립된 것이 아니고 예속된 것인데, 노예라는 겁니다. 자기를 낚은 사람에게 완전히 노예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낚인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감사와 고마움과 반가움이 있다는 겁니다. "나는 낚이지 않았으면 지옥에 갔다" 라는 것에 대한 말이죠. 바로 이런 감사와 고마움과 반가움과 즐거움, 이것을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선한 열매라고 한다는 겁니다.

혹시 가수 김호중을 아십니까? 콘서트를 마치고 술을 한 잔 마시고 운전을 하다가 그만 구속이 되었는데, 그런데 김호중이 신자라고 한다면, 거기서 감사와 고마움과 반가움과 즐거움이 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가수생활을 하는 것도 주님에게 낚인 것이니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살아가면서 주님의 주신 것을 드러내지 못해서 안타까워 할 정도로, 항상 그렇게 감사와 고마움과 반가움과 즐거움이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노력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게 늘 투입이 되기 때문에 말이죠.

제가 누구를 만나든지 전화통화를 하면 항상 귀담아 듣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 사람에게서 자기 신세타령이 나오는지, 아니면 주님이 주신 말씀이 나오는지, 그것을 듣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상대방에게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면서 말이죠.

왜냐하면 말씀이 교환되어야 그것이 성도의 만남이고 교제이지,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그것을 인정해달라고" 라고 하면, 그런 것은 반갑지가 않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이 주신 달란트가 티가 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분명히 그 사람에게 주님이 주신 것이 있는데, 그런데 대화를 해도 그게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만남을 지속하기가 힘들다는 것이죠.

* 그런데 우리는 왜?

지금 제가 하는 말이 틀린 것이 아닌데, 그렇지요? 스데반 집사님은 죽으면서도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하면서 감사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에게서는 왜 그런 감사가, 그런 고마움과 반가움과 즐거움이 매 순간 순간 나오지 않느냐는 말이죠. 왜 그런고 하니, 사람은 떡이 아니라 말씀을 사는데, 그런데 그 말씀이 지루하고 잠이 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이 말씀의 층을, 즉 예수님의 층을 보이지 않도록 감추어버리고는, 그러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감사와 고마움과 즐거움을 계속 발굴하면서 찾아다닌다는 말이죠. 그래서 김호중의 경우에는 보라색 옷을 입은 팬들이 자기에게 환호해주는 것, 그것이 감사와 고마움과 즐거움이라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오늘 보라색 티를 입었는데 말이죠(ㅋㅋ).

하지만 그게 말씀을 파묻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의 경우라는 겁니다. 주인이 맡겨준 것은 재미가 하나도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땅에 묻어두고는 자기의 즐거움을 자기가 만들어가겠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주님에게 낚인 것이 아닌데, 오히려 주님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는 것이죠.

그런 사람들 중에는 성경공부가 재미있다고 나오는 경우도 있는데, 하지만 그것은 말씀의 즐거움이 아니고, 자기가 성경공부를 하겠다고 결정한 것에 대한 자기 즐거움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감사가 나와도 주님이 주시는 감사가 아니라는 말이죠.

* 내가 없을 때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가 나이가 들면서 닮아지고 주저앉고 무너지고, 결국에는 죽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사라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사라진다는 것은 '나' 라는 것이 없다는 것인데, 그렇지요? 그렇다면 그때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요? 이게 당연한데도 상당히 어려운 질문으로 여겨진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내가 없을 때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겁니다.

이제부터 강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성경은 과연 여기에 대한 답변을 주었을까요? 주지 않았을까요? 이미 주었는데, 그런데 우리는 왜 선뜻 그 답변을 하지 못하는고 하니까, 그것은 "나는 평생을 내가 나를 지켜내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내가' 라는 것은, '나' 라는 것이 없을 때가 아니고 있을 때의 '나' 라는 겁니다. 거기에 우리는 모든 에너지를 다 소비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이죠.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울고불고 한다는 겁니다. "있는 나를 어떻게 더 잘 관리할까?" 라고 하면서 말이죠.

* 내가 있을 때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런데 성경적으로 답변이 되지 않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내가 있을 때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겁니다. 그것은 말씀의 층이 잘려서, 말씀이 전혀 들려오지 않을 때인데, 그런 인간이 하루 종일 생각하는 것은 "오늘 나는 무엇을 먹지?" 라는 것인데, 그게 바로 불신자라는 말이죠.

이것을 좀 더 확장을 시켜보면, "나에게 돈이 많이 생긴다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라고 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로또에 당첨이 된다든지 해서 말이죠. 혹은 "나에게 시간이 많이 생긴다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라고 할 수도 있고, 혹은 "나에게 손자가 생긴다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라고 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혹은 남편을 먼저 보내고 혼자서 사는데, 그럴 때 "나에게 남자가 생긴다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것도 남궁원과 같은 남자라고 하면 어떻겠느냐는 말이죠. 남궁원을 아세요? 이미 돌아가신 분인데, 돈도 많고 인물도 좋고 사람까지도 좋다는 겁니다. 그때는 엔돌핀이 마구 도는데, 아닌가요? (ㅋㅋ)

이러한 질문이 의미가 있는 세계가 바로 말씀이 차단된 세게라는 겁니다. 이 세계의 근원은 "내가 있다면" 라는 것인데, 이 세계가 바로 예수님이 없는, 예수님을 떠나보낸 세계라는 것이죠. 그것도 십자가에 못박아서 말이죠. 그것이 팩트(fact)인데, 사실이라는 겁니다.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는데, 하루 하루의 일과가 이것뿐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것을 의미가 있는 질문이 되게 하려고, 여기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을, 그런데 그것을 "내가 있다" 라는 것으로부터 도출해내는 세계, 그것이 바로 말씀이 없는 세계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 먼저 팩트체크부터 !!

이제 본격적으로 강의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러기에 앞서 우리의 팩트부터 체크하고 시작을 하자는 겁니다. 남편이 아플 때는 돌본다고 고생을 했는데, 이제는 남편이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시간이 남는데, 그래서 "시간이 남을 때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제 보상을 받기 위해서 크루즈 여행을 갈 거야" 라고 해서 여행을 가면 신이 나는데, 그래서 감사와 고마움이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나' 라는 것이 문제인데, 그 '나' 라는 것이 천국을 가로막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나'와 '나'가 모여서 생각을 일치시켰는데, 그래서 예수님을 죽였다는 말이죠. 즉 "당신 같은 사람은 이제 필요가 없어. 내 인생의 즐거움은 내가 알아서, 나의 있음에서 구성할 거야"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한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말이죠.

* 다시, 내가 없을 때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아직 제가 이야기하지 않은 게 있는데, 그것은 "내가 없을 때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겁니다. 지금부터 그것을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거기에 앞서서 먼저 팩트체크부터 하고 시작하자는 말이죠. 예수님은 이 팩트의 세계에 계시다가 죽으시고 천국에 가셨기 때문에, 우리가 천국에 가려고 한다면 이 팩트의 세계를 놓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 세계를 경유해서 가야한다는 말이죠.

"내가 없을 때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한 기초적 그림을 그려보면, 이렇게 동그라미가 두 개 있는데, 큰 동그라미 안에 작은 동그라미가 있다는 겁니다. 큰 동그라미는 말씀 층인데, 그리고 작은 동그라미는 자기가 알고 있는 세계, 즉 과학적인 세계라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알고 있는 세계가 말씀 층으로 포위가 된 상태라는 겁니다.

* 돌판이 불에서 나왔기에 !!

이것을 성경에선 율법세계라고 하는데, 그 율법의 돌판은 불에서 나왔다는 말이죠. 시내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 그것이 불 속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히브리서 12장 18절에 보면,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 붙는 산과" 라고 한다는 말이죠.

(히 12:18)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 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께로 간다는 것은 불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인데, 말씀을 가지고 말이죠. 어차피 무너지고 사라질 몸인데, 말씀과 더불어서 불 속으로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불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거기에는 생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인간이 사는 세계와 생명나무의 세계 사이에는 화염검이 두루 돌고 있다는 겁니다. 즉 불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그 불을 통과하게 되면, 거기에는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생명이 기다라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나는 불에 지짐을 당해도 좋습니다"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말씀, 즉 돌판 자체가 불에서 나왔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면 불신자들은 불과 상관이 없을까요? 물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예고편이고, 마지막에는 불로서 심판을 받는다는 겁니다. 인간의 세계를 불이 덮쳐서 완전히 불태워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곳은 지옥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게 이사야서에 나오는데, 벌레도 죽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 66:24)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

* 말씀 층에 둘러 쌓인 지구 !!

그러니 이것은 우리의 선택사항이 아닌데, 우리로서는 어쩔 수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이 말씀 층에 둘러싸여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말씀 층에 우리가 사는 지구가 둘러 쌓여있다는 것이 창세기 1장에 나오고, 요한복음 1장에도 나온다는 겁니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 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장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천지를 만들었다" 라고 하는데, 그게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즉 "태초에 하나님의 신이 흑암 위에 있고, 그 다음에 빛과 그 모든 것들이 만들어졌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나' 라는 것이 있으면 시체 보관소에서 노는 즐거움에 빠져들기 때문에, 말씀으로 깨우신다는 겁니다. "너는 이래도 불이고 저래도 불이다. 어느 불 속에 들어갈래?" 라는 것인데, 즉 "말씀을 따라 미리 불 속에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시체 보관소에서 놀다가 나중에 지옥 불에 갈래?" 라는 것인데, 그것을 물을 수 있는 권한이 우리 주님에게는 있다는 겁니다.

* 어항 속의 물고기 두 마리 !!

그러면 이 그림을 달리 그려보면, 아직까지 "내가 없을 때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그림부터 먼저 그려보면, 이렇게 어항이 하나 있는데 여기에 물고기가 두 마리 들어있다는 겁니다. 물론 그 안에는 물도 담겨있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어차피 불로 멸망시킬 이 세계이지만 먼저 은혜를 베풀어주셨다는 겁니다. 악인과 선인에 관계없이 골고루 햇빛과 공기를 베풀어 주셨는데, 하나님은 구분하지 않았다는 말이죠. 그게 마태복음 5장에 분명히 나온다는 겁니다.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그러니까 어항 속에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있다면, 즉 이 세상에 천국에 갈 자와 지옥에 갈 자가 있다고 하면, 그들은 그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천지도 모르고, 자기가 잘나서 지금까지 왔다고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마지막에 어항 속에 있는 물을 모두 빼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면 물고기는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동안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왔다는 겁니까? 하나님이 공짜로 베풀어주신 은혜로 살아왔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들은 그 은혜의 고마움도 모르고, 자기 잘난 맛에 춤추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남들에게 강요하는데, "나는 이렇게 대단한 존재다. 제발 좀 알아다오" 라고 말이죠. 자기가 물 속에서, 그 덕분에 살았다는 것은 관심도 없는데, 그러면 물을 빼내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겁니다.

* 아담 안 !!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내가 없을 때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 설명을 해드리겠는데, 그것을 두고 '아담 안'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로마서 5장에 나오는데, 인간은 혼자서 살아본 적이 없다는 말이죠. 인간은 타인이 없으면 외로워서 살지를 못하는데, 그래서 남들의 눈치를 보면서, 즉 그들이 요구에 순응을 하면서도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서 세상과 어울려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이제부터 좀 어렵게 해보겠는데, 여기 어항에 최초의 금붕어가 있었고, 그리고 그 뒤에 남자 금붕어가 있고, 또한 입술이 빨간 여자 금붕어가 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여자, 즉 하와라는 말이죠. 그래서 여자는 자체적인 존재에 속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 여자는, 두 번째 사람 !!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 싶은데, "여자는 사람이 아니다" 라고 말이죠. 여자는 두 번째 사람이라는 겁니다. 첫 번째 사람은 남자이고, 두 번째 사람이 여자라는 말이죠. 그런 여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사모하는 징벌을 주셨다는 겁니다.

여자는 첫 번째가 아니고 두 번째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러므로 여자가 여자가 된다는 것은 반드시 무엇을 경유해야 하는고 하니까, 자기가 소유하고 싶은 남자를 경유하게 될 때, 비로소 여자는 자기 존재가, 즉 자기 정체성이 확립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여자는 "나는 잘났어요" 라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이렇게 잘났어요"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자는 단독적이 아니고, 자기가 소유하는 남자를 앞장세우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여자라는 것이죠.

이것은 제가 인간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 보면 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가 하나님께 보호를 받습니까? 과부에게는 남자 자리가 비워져있는데, 그 자리를 여호와 하나님이 채워주시는데, 그게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고아는 "우리 아버지가 잘났어요" 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 아버지 자리가 비워져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그 자리를 채워주신다는 겁니다.

*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

그리고 나그네는 이 땅에 자기가 머물 땅도 전혀 없는 자인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그네에게 천국을 영원한 본토로 잡아주신다는 말이죠. 그런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그들을 건드리면 나를 건드리는 것이 되고, 그러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겠다" 라고 하시는데, 그게 출애굽기 22장에 나온다는 겁니다.

(출 22: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출 22: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출 22:23)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지라

* 사마리아 여인 !!

여러분, 들어보니 어떻습니까?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 그 어느 것 하나라도 말씀에서 벗어난 것이 전혀 없는데, 모든 것이 말씀대로 착착 진행이 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여자는 남자를 사모하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만약에 어떤 여자가 6명의 남자를 사귄다고 하면, 그 여인이 바로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이라는 겁니다.

(요 4: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요 4: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요 4:30)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그러면 그 여자가 최후로 만난 남자가 누구입니까? SK그룹 회장인 최태원입니까? (ㅋㅋ) 그분을 만나고 나서는 자기가 들고 있는 물동이까지 다 내던지면서 "내 인생은 이제 완료야" 라고 했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교회를 예수님의 신부라고 한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신랑을 기다리는 10명의 처녀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천국이라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구원을 하신다는 겁니까? 그냥 구원을 시키는 것이 아니고, 주님은 우리를 누구의 신부로 전환을 시켜서 구원을 해주신다는 겁니다.

(마 25: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 첫 번째, 인간은 아담 안에 있어 !!

방금 이야기한 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자기가 여기에 이렇게 있는데 예수님은 십자가로 죽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예수님을 자기가 믿으면 구원을 받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닌데, 여기에서 첫 번째 오류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아담 안에 있다는 것이죠. 즉 징벌과 저주 아래에 놓였다는 겁니다.

* 두 번째, 신부로 전환이 되어야 !!

그리고 두 번째는, 그냥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신부로, 그렇게 신분이 전환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가 예수님을 믿으면, 자기가 또 대장짓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었어. 내가 잘했지? 그렇지?" 라고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성도는 독립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의 신부라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신부가 되어서, 예수님이 첫 번째 인간이라고 하면, 자기는 첫 번째 인간에게 종속된 두 번째 존재가 된다는 말이죠. 즉 남편에게 종속된 신부라는 것이죠.

* 남자와 여자 !!

다시 말씀을 해드리겠는데, 여자는 첫 번째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고, 그게 남자인데, 그것으로 끝내버리면 여자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님이 아담만 만들었다고 하면, 여자는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담을 만들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십니까?

아담이 깨어있을 때가 아닌, 잠들었을 때 아담의 갈비뼈를 가지고 여자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자는 무엇입니까? 여자는 여자를 위한 것이 아니고, "아담은 하나님이 만들었다" 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붙여준 존재라는 말이죠.

그러니 여자가 있다는 것은, 둘이 있어도 둘로 보면 안 되고 하나로 봐야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고 난 뒤에 어떻게 됩니까?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말이죠. 설령 남궁원 같은 남자를 찾았다고 해도,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그 남자도 결국은 옅어지고 무너지고 마는데, 그러면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병간호를 한다고 말이죠.

* 누가 좀 치워주세요 !!

다시 말해서, 인간은 삭는데, 녹이 쓴다는 말이죠. 또한 정전된 냉장고 내부처럼 곰팡이가 피어나는데, 그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음식은 버릴 수라도 있지만, 인간은 어떻게 버리지도 못하고, 그야말로 처치곤란이라는 말이죠. 누군가가 와서 분리수거용 봉투에 담아서 어떻게 좀 버려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이 아닌데, 다른 남자를 찾고 싶다는 말이죠. 이것은 여자를 예로 든 경우고, 물론 남자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는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연하의 남자를 원하는데, 그것도 20대이고 돈도 많으면 더 좋다는 말이죠. 물론 겉으론 말하지 않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지만, 막상 그런 남자가 나타난다고 하면 거절하기가 힘들다는 겁니다(ㅋㅋ).

이것이 바로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의 모습인데, 하나가 될 수 없다는 말이죠. 아무리 하나가 되려고 해도, 자기는 무너지면서도 멀쩡한 척을 하는데, 그렇게 욕망은 욕망대로 살아있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전혀 대처가 안 된다는 것이죠.

* 결핍된 욕망을 채워라 !!

무슨 말인고 하니, 아담 안에 있는 인간은 예수를 믿던 무엇을 믿던 간에 자기의 결핍된 욕망을 채우려고 한다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건성이고, 진짜 마음은 자기의 결핍된 욕망을 채우는 것, 그것이란 말이죠. 그렇다면 그 결핍된 욕망은 누가 만든 겁니까?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이 결핍된 욕망이 들어왔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면서 벌을 받고 있는 중인데, 남자나 여자나 온전히 자기 욕망을 채울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계속해서 즐거움과 기쁜 일을 찾아야 하는데, 골프를 치든지 꽃꽂이를 하든지 등산을 하든지,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오늘 아침뉴스에 보니, 어떤 여자가 암벽등산을 하다가 그만 실족사를 당했다고 하는데, 가족들은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남들처럼 등산길로 올라가면 되지, 왜 위험한 바위를 탔느냐고 안타까워한다는 말이죠. 물론 그럴 수도 있는데, 그리고 아예 등산자체를 위험하다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모두 어쩔 수가 없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 그렇게 하든 말든 간에 결핍을 채울 수는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결론은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감사와 즐거움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아담 안에 있는 것은 육인데, 그런 육에서 나오는 것으로는 욕망을 채울 수가 없다는 말이죠.

* 아담 안에서 예수 안으로 !!

그렇다면 성경은 무슨 이야기를 할까요? 이것이 바로 "내가 없을 때는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문제인데, 아담 안이 예수님 안으로 바뀐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담 안에 있는 '나'를 없애주는데, 어떻게 말인가요? "너는 방금 죽었어" 라고, 즉 "너에게는 생명이 없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죽었다' 라는 것을 성경에서는 "생명나무의 과일이 없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조금 전에 "인간이 죽는다" 라는 것을, 마치 양초가 녹듯이 '닮아지고', '무너지고', '사라진다' 라고 했는데, 그러면 그와 반대로 "생명이 있다" 라는 것은 과연 어떻게 표현이 될까요? 닮아지고 무너지고 사라지는 것은 누구의 일입니까? 달리 말해서, 생명나무가 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인데, 그래서 "예수님이 그 일을 벌이고 계신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내가 없을 때 예수님께서 일을 하셔서,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나를 만들어내신다" 라는 것인데, 즉 "내가 없을 때 주님께서 일하시고, 그렇게 주님이 일하실 때, 아담 안에서 없어진 내가 예수님 안에서 신부로서 새로 만들어진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죄를 짓지 않는 신부, 신랑만 쳐다보고 사는 신부, 그런 자들이 바로 아브라함이고 이삭이고 야곱이고 모세였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영원토록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주신 주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세계가 곧 말씀의 세계라는 겁니다.

다시 해보겠는데, '닮아지고', '무너지고', '사라진다' 라고 했는데,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면서 몸이 아프지 않는 곳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렇게 아프다는 것, 그것은 아담 안에 있던 '나'를 예수님 안의 '나'로 교체로 하기 위한, 즉 신부로 교체하기 위한 현상이라는 겁니다.

* 내가 없을 때, 주님이 내 안에서 일한다 !!

우리가 '지옥의 하나님'을 끝내면서 이것으로 정리가 되어야 하는데, "내가 없을 때 주님이 내 안에서 일한다" 라는 겁니다. 그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인데, 자기 안에서 그리스도가 일한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그것을 표현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성도인데, 비록 아프더라도 말이죠. 나라꼴이 아무리 엉망이라도, 그것조차도 주님이 하신 일이라는 겁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주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

이제 남은 것은, "나를 없애고 주님 안에서 새로운 나를 만드는 작업,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라는 것인데, 그냥 말로서 "아담 안에 있는 여러분은 죽고, 이제 예수님 안에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믿습니까?" 라고 하면 되는 겁니까? 뭔가 허전한데, 그런 것이 말려들면 신천지가 되고 안상홍이 된다는 겁니다. "당신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라고 하면서 노래만 불러주면 되느냐는 말이죠

구체적인 성경의 내용이 나와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자기는 그냥 아담 안에 있다는 겁니다. 그 아담 안에서 탈출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아까 어항 그림을 그렸는데, 그 어항에서 물고기가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한다는 겁니다. "나는 자유를 얻을래" 라고 하면서 암벽등산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냥 세상과 더불어 죽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주님이 찾아오시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죄인인데, 그래서 우리는 자기 자신밖에 모른다는 겁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종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무시하고 감추고 짓밟아버리는데, 그리고는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는데, 주님이 찾아오실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 원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

그게 무엇인고 하니,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것이 레위기에 나오는 말씀인데, 그런데 말씀을 그 어떤 인간도 이룰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은 그 말씀을 가지고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원수를 찾아가신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나는 원수를 사랑한다" 라는 것을 그 원수에게 집어넣으신다는 것이죠.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러면 우리는 시체 보관소에 있다가 어떻게 됩니까?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라는 것이 들어오게 되는데, 그런데 그 말씀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됩니까?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를 사랑하신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이게 참으로 중요한데,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라고 하는 것은 한국교회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하나님은 없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원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죠. 그 차이점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는데, 그래서 신을 생각할 때는 "신이시여, 나를 좀 사랑해주세요"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평소에 가지고 있는 인식 자체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으니 그냥 방치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좀 사랑해주세요. 천국에 보내주세요" 라는 것인데, 그런 생각들이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불신자도 힘이 들면 하나님에게 기도하는데, 그게 아담 안에 있는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 아담 안에서는 하나님을 찾던 무엇을 찾던 자기밖에 모른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의 뜻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 카스트 제도 !!

기원전 1,300년 전부터 기원전 600년까지 아리안 족이 있었는데, 지금의 러시아 남쪽이라는 말이죠. 흑해와 카스피해 쪽의 유목민들이라는 겁니다. 그들이 남쪽으로 쳐들어왔는데, 그게 인도라는 것이죠. 그러면서 그들이 종교를 유포했는데, 그 땅에 살던 자들과 자기들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면서도 지배는 자기들이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카스트' 제도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계급이 5단계로 나누어져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그렇게 구별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들이 토착 민중들을 어떻게 했는고 하니, 그게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라는 것이란 말이죠.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인간은 자기 사랑에 미쳐있다는 겁니다. 아담 안에 있는 인간이 하나님에게 벌을 받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란 말이죠. "나를 사랑해줄 사람 어디 없어요?" 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나를 제거하세요. 지워버리세요"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들은 그게 아니고, 무엇을 하든지 간에 모든 의미가 다 자기에로 집중이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잘 되는 쪽으로 말이죠.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목사들이 어떻게 설교를 해야합니까? 고객만족인데, 교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서, 거기에 맞추어 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고객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저를 사랑해주세요" 라는 것인데, 저는 교인들의 이런 모습을 '환자' 라고 보고 싶은데, 정신병 환자라는 겁니다.

그런 교인들이 봉투에 '십일조' 라고 쓰고 들고 왔으니, 목사들은 어떻게 해야합니까? 고객이 왕이니,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교인들을 위로해주어야 하는데, 그게 당연한 교회의 영업컨셉이라는 겁니다. 만약에 "당신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라고 하면 영업을 종료해야 한다는 말이죠.

*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

다시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라는 것으로 돌아가서, 그게 힌두교인데, 이 힌두교는 불의 종교라는 겁니다. 그런데 불에 태우면 어떻게 됩니까? 모든 것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데, 하지만 불에 태우면 이상하게도 위로 올라간다는 말이죠. 그게 마치 누군가를 찾아가는 것 같은데, 즉 불은 위에 계신 신을 찾아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로서 제물을 태우면, 그 불이 가는 곳이 하늘이니까, 하늘에서 신이 그 제물을 만족히 받으시고, 그 불의 능력을 제물을 바친 자에게 심어준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불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그 불 덕분에 따뜻한 몸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죠.

여러분, 이 아이디어가 어떻습니까? 이 땅에서 농사를 짓는 것은 가인의 제사인데, 그렇게 가인이 농사를 지은 것을 바치면, 즉 불로 태우면 하늘로 올라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받은 것이 있으니 우리에게 뭔가를 주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 몸이 하나님이 주신 에너지로 인해서 따듯하게 되는데, 몸이 따뜻하다는 것은 모든 세포가 정상적으로 활동한다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몸을 따뜻하게 유지시켜주는 불의 장작과도 같은 것이 제사인데, 그 제사를 최고의 계급인 브라만이 주관한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하지를 못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제사를 드리는 자들이 누구를 지배하게 됩니까? 토착 민중들은 자기의 목숨이 유지되려면 누구를 찾아와야 합니까? 제사를 드리는 자를 찾아와야 하는데, 그게 정교일체의 사회라는 겁니다. 즉 종교가 일반 백성들을 지배하는 사회라는 말이죠.

이것이 비난 고대에만 그런 것이 아닌데, 조선시대도 그러했다는 겁니다. 자본주의가 도래하기 이전까지는 다 그러했다는 말이죠. 조선시대 임금도 비가 오지 않으면 제물을 바치면서 기우제를 드렸다는 겁니다. 임금이 제사장이 되는 것인데, 그러니 비가 오면 다 임금의 덕인 줄 알라는 것이죠. 그러면서 질서가 잡히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라는 것을 풀어보면, '수리' 라는 것은 라수미 여신을 의미하고, '마하' 라는 것은 위대하다는 의미이고, 또한 '수수리' 라는 것은 수마트라 산을 의미하고, 그리고 '사바하' 라는 것은 기도를 들어달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이것을 합쳐보면, "위대한 수마트라 산에 임하시는 위대한 라수미 여신이여, 제가 기도를 하오니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인간의 몫이 아닌 신의 몫인데, 바로 그 신을 찾아서 사람들은 오늘도 교회에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신이시여, 나를 사랑해주세요" 라는 것인데, 자기가 없어지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죠.

그런데 주님은 무엇입니까? "나는 원수를 사랑하러왔다. 그러니 너는 원수이어야 한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원수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원수가 되는 죄를 평생 짓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가 성질이 더럽고 악랄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아담 안에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아담의 죄를 우리가 물려받았다는 말이죠. 우리가 특별히 악하게 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고, 우리의 본성 자체가 음란하고, 본성 자체가 남들에게 지기 싫어하고, 본성 자체가 철저히 자기 위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은 바로 조상을 잘못 만나서 그렇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벌을 받은 조상의 대를 이어서 우리도 계속해서 벌을 받고 있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니 살아가는 것이 힘드는데, 그래서 같은 인간들끼리 합쳐서 법률이 생겨나고, 그리고 "당신이 똑똑해? 당신이 영웅이야?" 라고 하면서 국가가 생겨나고 했다는 겁니다.

* '지옥의 하나님'을 마치면서 !!

우리가 '지옥의 하나님'을 끝내면서 정리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개가 묶여있는데, 그게 30센티 줄에 묶여있는 게 자유롭습니까? 2미터 묶여있는 게 자유롭습니까? 둘 다 자유롭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인데, 그래도 30센티보다는 2미터가 더 자유로워 보인다는 겁니다. 30센티는 줄이 너무 탱탱해서 참으로 불쌍해 보인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이것은 인간에게 적용시켜보면, 30센티의 경우에는 가난한 사람, 2미터는 부자라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개 목줄에 묶여있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는 겁니다. 바로 이 아담을 누가 지배하고 있는고 하니, 악마가 지배하고 있고 지옥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죠. 물론 악마는 아는데, 자기는 이미 끝장이 났다는 것을 말이죠. 자기는 지옥에 갈 일만 남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악마가 물귀신 작전을 쓰는데, 자기가 천국에 가지 못할 바에는 인간도 가지 못하게 말이죠. 그래서 악마가 인간에게 접근했고, 인간은 거기에 넘어갔다는 겁니다. 그러면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아담은 닮아서 자기밖에 모르는데, 수리수리 마하수리처럼 신을 믿되 자기를 위한 신을 믿는다는 말이죠. 그것을 우상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누가 찾아옵니까? 주님이 찾아오신다는 겁니다.

*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여기까지는 여러분이 아는데, 그러면

주님이 찾아와서 우리를 무엇으로 보느냐는 말이죠.

우리를 원수로 본다는 겁니다. 이번에 외국에 나가서 강의를 하면서,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 이야기를 했는데,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무슨 질문을 했습니까? "너는 왜 간음했어?" 라고 했습니까? "너는 왜 율법을 위반했어?" 라고 했습니까?
그게 아니고 다른 질문을 했는데, "너는 찾아온 자가 있더냐?" 라고, 강제로 찾아오신 분이 그 여인에게,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묻고 계신다는 겁니다. 조금 전까지는 많이 있었는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 여인을 끌고 왔으니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바닥에 글을 써서 모두 내보냈다는 겁니다.
그렇게 다 내보내고 난 다음에, 여인에게 ㉰"너는 찾아온 자(정죄한 자)가 있더냐?" 라고 묻는다는 말이죠. 그러자 그 여인이 뭐라고 합니까? ㉱"주여, 없나이다" 라고 하는데, ㉲바로 그것이 여러분의 평생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이야기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자기 인생을 자기가 건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평생을 아담의 죄를 짊어지고 있는 우리의 인생, 그것은 우리가 알아서 천국에 보내고 말고 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요 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묻는데,

"이 웬수야? - - 누가 너를 고소하더냐? -

없나이다 -

그러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원수가 있어주어야 주님의 사랑이 빛나는데, 주님의 그 사랑을 늘 느끼면서, 그 사랑에 대한 기쁨과 감사와 고마움이 여러분에게서 항상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 주님 : 이 웬수야?
* 성도 : 예.
* 주님 : 누가 너를 고소하더냐?
* 성도 : 없나이다.
* 주님 : 그러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 성도 : 감사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이 하는 일과 주님이 하시는 일은 달라도 너무나 다릅니다. 그것을 우리의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우리의 몸으로 언제나 체험하기를 원합니다. 원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한 시도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을, 우리의 몸이 무너지고 있는 순간이지만, 남은 인생을 기쁨과 감사와 고마움으로 느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4,6,11 오후 11시에 마침.

언제나 예상치 못하는 은혜를 주시는 주님, '없나이다' !!

'대구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음과 신학의 차이  (0) 2024.07.06
십자가-시간의 인격화  (0) 2024.06.25
지옥하나님-자아의 뿌리  (2) 2024.06.04
지옥하나님-말씀의 레이더망  (0) 2024.05.08
땅 vs 땅  (0) 2024.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