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44 - '땅' VS '땅'
24,04,01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죽은 해골들이 일어나다 !!
오늘은 교재 198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거기에 보면, 구약성경인 에스겔서 37장의 말씀이 나오는데, 1절부터 10절을 보겠습니다.
(겔 37: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겔 37: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겔 37: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겔 37: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겔 37: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겔 37: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 37:7)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겔 37: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겔 37: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겔 37: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여기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라고 하는데, 시작이 뼈라는 겁니다. 2절도 그러한데, 온 천지에 뼈들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것도 아주 마른 뼈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10절에 가면 뭐라고 합니까?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 뼈들이 살아 일어나는데, 그것들이 아주 큰 군대가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뼈들이, 그것도 바짝 마른 뼈들이 살아나서 군대가 되었느냐는 겁니다. 여기에 누가 서있는고 하니, 인자가 서 있다는 말이죠. 선지자 곧 에스겔인데,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같이 계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고 하니, 마른 뼈들로 하여금 군대가 되는 것이었다는 겁니다.
* 마른 뼈들, 그리고 인자 !!
그렇다면 인자는 왜 그 자리에 있었을까요? 그것은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서 하나님의 군대가 되는데 있어서, 그러면 여기서 군대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군대는 전쟁을 하는데, 그 첫 번째 모델로서 누가 등장한다는 겁니까? 죽은 자들이 살아서 군대가 되는 그 절차, 그런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선지자인 인자에게 먼저 도달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신약시대에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두고 인자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이 모델이 된다는 말이죠. 즉 "예수님의 영에 의해서 알게 된 자는, 뼈들이 다시 살아나서 군대가 되는 절차를 그대로 밟게 된다" 라고 하는, 이게 의미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더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는데, "이게 어디서 일어나느냐?" 라는 것인데, 그게 어디에서 일어났습니까? 하늘이 아닌 땅에서 일어난다는 말이죠. 하늘을 쳐다본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즉 "하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라는 게 아니고,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다시 하면 !!
새로 오신 분이 있어서 다시 하겠는데, 에스겔서 37장에 보면, 뼈들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 뼈들이 살아서 무엇이 되었다는 겁니까? 이렇게 뼈가 있으면. 이 뼈에 살이 붙고 하면 사람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뼈들이 살았다는 것은, 과거의 모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살아난 게 아니고, 하나님의 군대가 되기 위해서 살아났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죽기 이전의 자기가 모델이 아니고, 인자가 모델이라는 말이죠. 그 인자가 바로 예수님인데, 즉 예수님이 모델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로마서 8장에서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라고 한다는 말이죠.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뼈들이 살아나서 전쟁을 하는 모델이 된다는 것인데, 그 첫 번째가 인자가 되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하늘이 아니고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말씀을 본다고 하는 것은, "이 땅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라는 것을, 즉 "하나님의 뜻이 듬뿍 함축이 되어있는 것이 이 땅에서 어떤 일로 나타났는가?" 라는 점을 살펴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 인자가 되신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러면 누구를 주목해야 한다는 겁니까? "인자가 되신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라는 점에 관심을 가지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것을 기록해놓은 책이 바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라는 말이죠.
이 책들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처음부터 예수님의 출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요한복음의 경우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끝은 무엇인고 하니까,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십자가 사건, 즉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말이죠.
* 쌍둥이로 태어나신 예수님 !!
그러니 "예수님이 태어나셨다" 라고 하는 것, 이것을 어제 낮 시간에 설교를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자세하게는 하지를 못하고, 간단하게 "쌍둥이로 태어났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무슨 쌍둥이입니까? 한 몸에 죽은 몸과 산 몸을 다 가진 쌍둥이라는 말이죠. 여기에서 '죽었다' 라는 것은 선악과나무와 관련이 있고, '살았다' 라는 것은 생명나무와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창세기 25장에 나오는 쌍둥이인 에서와 야곱을 보게 되면, "먼저 태어난 자는 나중에 태어난 자를 섬기리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그 절차가 어떻게 됩니까? 원래는 먼저 태어난 자가 장자이고, 나중에 태어난 자는 동생이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창 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장자를 결정함에 있어서 어떤 절차를 밟습니까? 장자도 아닌데 인간의 육으로 보면 장자와 같은 식으로 태어난 자, 그가 누구인고 하니, 그가 바로 에서가 아닌 야곱이라는 말이죠. 누가 봐도 장자인 자가 에서이고, 누가 봐도 장자가 아닌 자가 야곱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0장에서 포도원 품꾼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이 땅에서 육적으로 살아가는 그 모든 사고방식을 뒤집어놓겠다고 하신다는 말이죠. 왜 뒤집어야 합니까? 인간은 죽은 몸인데, 죽은 몸은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마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어서 이미 죽은 몸인데,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뭐라고 하십니까? "죽은 몸은 그냥 죽는다" 라고 하시는 게 아니고, "왜 죽어야 하는가?" 라는 이유에 대해서, 정작 인간들은 죽어가면서도 그것을 모른다는 겁니다. 늙어가고 있으면서도 왜 늙고 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는 말이죠.
* 죄도 모르면서 !!
이것은 나중에 다시 설명하기로 하고, 여기에 그린 이 그림을 하기 이전에 먼저 해야할 것이 있다는 겁니다. 교회에 오면 목사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하나님은 죄를 사하시는 분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렇다면 죄가 무엇입니까? 죄가 무엇인지, 그것을 알아야 그 죄를 용서해주신 것에 대해서 기뻐하든지 고마워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죠.
이 죄는 얼마나 자기 스스로를 감추는지 모르는데, 그래서 죄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 죄를 감추는 것이 곧 죄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를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죄를 모르는데, 죄를 감추는 것에 급급해하기 때문에 말이죠.
교회에 나오게 되면 누구나 다 알고 외우게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사도신경' 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그 사도신경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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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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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신 것이 나와있는데, 이번 시간에는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하신 것이 우리 인간에게 어떻게 적용이 되는지, 그것을 한번 살펴보자는 말이죠. 그것을 다음의 7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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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2) 성령을 믿사오며
(3) 거룩한 공회와
(4)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5)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6) 몸이 다시 사는 것과
(7)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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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을 압니다 !!
그렇다면 죄가 무엇인고 하니,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게 바로 죄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안다는 것이 믿음을 틀어막기 때문에 말이죠. 성령을 믿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압니다" 라고, "거룩한 공회를 압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가 자기에게 이것을 묻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너무나 사랑하는 자식이 있는데, 그 아이가 너무나도 예쁘고 자랑스럽다는 겁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다 좋은데, 그런데 그 자식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아이를 사도신경 앞에 세워서 묻는다는 것이죠.
* 부모 :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 자식 : 예, 압니다.
* 부모 : 성령을 믿습니까?
* 자식 : 예, 압니다.
* 부모 : 거룩한 공회를 믿습니까?
* 자식 : 예, 압니다.
* 부모 :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까?
* 자식 :예, 압니다.
* 부모 :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습니까?
* 자식 : 예, 압니다.
* 부모 :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습니까?
* 자식 : 예, 압니다.
* 부모 :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까?
* 자식 : 예, 압니다.
자식이 뭐라고 대답을 합니까? 그래도 어릴 때 교회에 나가서 들은 것은 있어서 "믿습니다" 라고 게 아니고, "압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교회에 나오지 않을까요? 그것은 말씀에 관심이 없기 때문인데, 그러면 무엇이 가로막고 있어서 말씀에 관심이 없느냐는 말이죠.
그러면 그 자식을 보고 "너는 왜 교회에 나오지 않지?" 라고 한번 물어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자식은 무엇이라고 나름대로 대답을 할 것인데, "너무 바빠서 그렇습니다" 라고 하든지, 아니면 "마누라 눈치가 보여서 그렇습니다" 라고 하든지, 아무튼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죄' 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여러분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자식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밉습니까? 아니면 납득이 됩니까? 납득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물론 여러분의 자식들은 교회에 잘 다닌다는 것을 아는데, 억지라도 상상을 해서 대답을 해보시라는 말이죠(ㅋㅋ).
과연 여러분은 자식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분통이 터지고 분노가 폭발하느냐는 겁니다. 만약에 아버지가 그렇게 나오면, 보통 엄마가 나서서 변명을 하게 되는데, "지금은 너무나도 바쁘고, 그리고 아직은 성령을 받지 않았는지 믿음도 없잖아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
그런데 여기 사도신경에 보면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한다는 것은 어떤 자를 심판한다는 겁니까? 우리가 알다시피 아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없는 자를 심판한다는 말이죠.
아까 에스겔서에서 우리는 이미 죽은 자인데, 즉 마른 뼈라는 겁니다. "죽은 자가 산 자가 된다" 라는 것은 성경이 아닌 다른 종교의 경전에도 다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들은 하늘을 상상하는데, "하늘에서 하나님이 오시면 죽은 자를 살릴 것이다" 라고 말이죠.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하늘이 아닌 땅에서 죽은 자가 산 자가 된 모델이 있는데, 그가 누구라는 겁니까? 그 당시에 바리새인들도 부활을 믿었는데, 그러면 그 바리새인들이 부활의 모델인가요? 예수님인데, 그러면 부활을 믿는다는 바리새인들이 누구를 죽였습니까? 예수님을 죽였다는 겁니다.
그러니 죄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모조리 죄라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죄에 대해서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가지고,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해서 심판을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지 않는 자식에게 "너도 다 컸는데, 그래서 너무 실례가 되지 않도록 너에게 내가 물어보겠다" 라고 하면서 "너는 왜 교회에 나가지 않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런 이런 것이 있는데, 너도 어릴 때 교회에 다녔잖아?" 라고 하니, "그런 것은 다 압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부모는 "그런데 왜 교회에 나가지를 않아?" 라고 하면, 그러면 자식은 뭐라고 합니까? "요즘 제가 교회에 나갈 형편이 되지 못하는데, 벌려놓은 사업도 있고 너무 바쁩니다. 그리고 나가지 않다가 보니 또 나가기가 좀 그렇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자식의 구차한 변명에 대해서 부모가 분노를 느끼는 것이 아니고,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녀교육을 하면서, 이런 믿음이나 죄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자식을 죽이듯이,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는 말이죠.
* 자식을 사랑한 부모의 죄는?
그러니 결국 죄란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님보다도 누구를 더 사랑하는 것이 죄라는 겁니까? 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이 곧 죄인데, 왜냐하면 자기 자식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죄는 무엇입니까? 예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한 것, 그게 바로 죄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죄라고 지적해도 죄라고 느껴지지 않을 때, 그 부모는 무엇을 믿는 것이 아닌, 무엇을 아는고 하니, 죄를 사해주는 것에 대해서 알기는 알지만, 그 안다는 것이 믿는 것을 틀어막고 있다는 겁니다. 부모자신이 그렇게 틀어막고 있으니, 죄를 사해주는 것이 곧 죄가 되어버린다는 말이죠.
그렇게 부모자신도 믿고 있지 않으니, 자식이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히려 변호를 주는데, "나중에 나가겠지.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시겠지" 라는 식으로 나온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렇게 변호를 한다는 것은, 부모자체가 "죄를 사해준다" 라는 것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 인간은 왜?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지금부터 알아보자는 말이죠. 아까 그렸던 그림을 다시 그려보겠는데, 여기에 뼈들이 있는데, 이 뼈들이 살아나서 군대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옛날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영적싸움을 하는 군대라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여호와께서 품고 있는 뜻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인자, 즉 예수님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 집중되어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뼈들이 다시 살아나는지, 그것이 예수님에게 먼저 그 모델로서 주어졌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복음서의 내용인데, 즉 "태어났는데 결국 십자가에서 죽었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죽었는데 그런데 다시 살아났다는 말이죠. 그러니 모델인데, 즉 여호와 하나님과 인자 사이의 모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일이 어디서 일어났는고 하니, 그게 땅에서 일어났다는 것이죠.
* 에덴동산이란 땅에서 살 때만, 인간 !!
오늘강의의 핵심은 '땅' 인데, 원래 인간은 어디서 살았습니까? 에덴동산에서 살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에덴동산에 있을 때가 인간입니까? 쫓겨났을 때가 인간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상적 인간이라는 것은, 에덴동산이란 땅에서 살 때만 비로소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여기서 벗어나면 정상적 인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에덴동산에서 떠나면 결격사유가 발생하게 되는데, 그러면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신 인간은, 에덴동산과 더불어 있을 때, 그렇게 될 때만이 온전한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결격사유가 있는 인간, 그런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나와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전부가 다 말썽꾸러기들이라는 말이죠. 그게 바로 아담인데, 그러니 그런 아담의 후손전체가 말썽꾸러기들의 연속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로마서 5장에서는 "죄가 왕 노릇을 한다" 라고 하는데, 인간은 그렇게 전부가 다 말썽꾸러기들이라는 것이죠.
(롬 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래서 문제를 일으키는데, 그러면 하나님은 과연 땅을 양보하겠습니까? "인간들은 말썽꾸러기들이라서 땅이 좀 어지러워도 할 수 없어" 라고 하면서 과연 우리 인간들에게 땅을 양보해주시겠느냐는 겁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인간들을 땅에서 내치신다는 말이죠.
* 인간은 모두가 말썽꾸러기 !!
다시 말씀을 해드리겠는데, 에덴동산에서 살아야 그것이 바로 정상적인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그 인간들이 그만 에덴동산에서 추방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이란 그 땅을 보호하겠습니까? 아니면 거기서 쫓겨난 인간을 보호하겠습니까?
에덴동산에는 아직 생명나무가 남아있는데, 그러면 하나님은 그 생명나무를 보호하겠습니까? 아니면 인간을 보호하겠습니까? 생명나무라는 겁니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도 있는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호하겠습니까? 내 자식을 보호하겠습니까?" 라고 말이죠. 예수님이라는 것이죠.
여기서 역대하 마지막인 36장을 보겠는데, 21절입니다.
(대하 36:21)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
안식일이 있는 백성이 이스라엘 백성인데, 그들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했다는 겁니다. 즉 쫓아내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쫓아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게 21절에 나오는데, 즉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토지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백성들을 쫓아내고 70년 동안 안식을 누리게 하겠다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자기 백성들을 추방시키고 땅을 유지하겠다고 나오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말썽꾸러기들이니 말이죠. 그 땅은 약속의 땅인데, 그 땅을 인간들이 훼손을 시켜놓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땅이 바른 인간과 결합될 때, 그것이 제대로 된 땅이라는 말이죠. 그런 땅에 하나님은 살고 싶어하신다는 겁니다. 땅과 바른 인간의 결합, 그것을 하나님은 원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간단한데, "제대로 된 땅이 계속해서 유지가 될 때 비로소 안식을 하겠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이 '안식' 이라는 말이 창세기 1장이 끝나고 2장에서 처음 나오는데, 2절에 보면,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라고 되어있다는 말이죠.
(창 2: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고 나서, 그것을 창세기 1장에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은 자기가 만드신 땅을 보시고 평안을 느꼈다는 겁니다. 그것이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은 이 땅을 훼손한다면 가만히 두지 않는데, 심판을 하신다는 겁니다.
(창 1: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그런데 땅은 인간에 의해서 이미 훼손이 되었는데, 그 훼손된 땅에 그 무엇을 추가하면 약속의 땅이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약속의 땅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성전의 터'가 마련된다는 겁니다. 그 과정이 길기 때문에 결론을 미리 말씀해드리면, 그게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오는데, 11절을 보겠습니다.
(고전 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 성전과 예수님 !!
계속해서 하나님이 집중적으로 관심을 두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땅이 땅답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새로운 터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터가 곧 성전의 터가 되는데, 그것이 구약에서 신약까지 하나의 프로젝트로 연결이 되어서 나온다는 말이죠.
구약에서는 예수님이 나타나지를 않는데, 그런데 예수님과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등장하는데, 그게 바로 성전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라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그 이름을 '임마누엘' 이라고 했는데,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고 하는 의미라는 겁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 땅에 주어진 율법 !!
그렇다면 하나님이 성전을 만들기 전에 무엇을 만드는고 하니, 땅에 무엇을 집어넣어서 약속의 땅을 만드시는고 하니, 이스라엘 민족을 거기에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들이 약속의 땅을 만들 수 있습니까? 없는데, 그래서 그 땅에 율법을 넣어버린다는 겁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서 일년만에 도착한 곳이 시내산인데, 그 시내산에서 무엇을 받습니까? 십계명, 즉 율법을 받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율법을 왜 받아야만 합니까? 그냥 양을 치고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가면 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렇지요?
* 너는 왜 교회에 가지 않아?
이것은 무엇과도 같은고 하니,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부모가 자식을 보고 "너는 왜 교회에 가지 않아?" 라고 했을 때, 자식이 "엄마도 알다시피 요즘 장사도 너무 힘든데, 그러니 교회를 갈 시간이 어디에 있습니까? 일요일에도 부지런히 가게를 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는 것과 같다는 말이죠.
그러면 엄마는 그것이 납득이 됩니까? 안 됩니까? 납득이 되고 설득이 되고 이해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엄마는 "그래, 네 말이 맞다. 우짜든지 먹고 살아야지. 나중에 여유가 있으면 반드시 교회에 다녀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엄마나 자식이나 똑같다는 말이죠.
그리고 직장생활을 하는 자식이라면 뭐라고 합니까? "내가 교회에 가려고 해도 마누라 눈치가 보여서 말이죠. 일요일이라도 가족과 함께 있어주어야 하고, 또 아이들과도 같이 놀아주어야 하는데, 또 혼자 교회에 가버리면, 그게 남편으로서 정말 곤란합니다. 좋은 남편이 되려면 아내를 위해서 양보를 해야 합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엄마는 "아내를 보고 같이 교회에 가지고 해보지?" 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자식은 믿는 것이 아니고 알기 때문에, 즉 "성령을 믿사오며" 라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알며" 라는 것인데,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제 아내는 아직 성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엄마는 "그러면 너 혼자라도 다니면 되잖아?" 라고 하는데, 그러면 자식은 "가정이 깨어집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성령을 믿는 것이 아니고 아는 것에 해당이 된다는 말이죠. 어제 낮 설교시간에 이것을 '개인주의' 라고 했는데, 도대체 개인주의도 이기지 못하는 성령이 어디에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도 알고, 예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도 다 안다는 말이죠.
하지만 아무리 알아도, 그 안다는 것은 개인주의를 이기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솔직하게 '모른다' 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안다' 라는 것으로 때운다는 말이죠. 그러니 지식이 믿음이 없다는 것을 틀어막아서 들키지 않게 한다는 겁니다. 즉 지식으로 숨겨버린다는 말이죠.
그래서 마지막으로 자식이 부모를 보고 뭐라고 합니까?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데, "내가 지금은 비록 교회에 나가지 않지만, 내가 엄마 아빠의 사는 것을 보니, 그것은 신앙이 아니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으로 끝나는데, 둘 다 패배자로 '퉁' 치고 만다는 것이죠.
* 약속의 땅, 광야, 그리고 율법 !!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이 주어졌을 때,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 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광야로 가는데, 그러면 광야는 무슨 땅입니까? 약속의 땅이 생명의 땅이라고 하면, 광야는 죽음의 땅이라는 말이죠. 죽음의 땅인데, 그런데 그들은 무엇 때문에 삽니까? 율법 때문에 살게 된다는 겁니다.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마른 뼈들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 뼈들이 살아났다는 말이죠. 즉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전체가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땅에서 일어나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인자가 오기 이전에 율법을 먼저 투입시켰다는 말이죠.
그러면 율법을 먼저 투입시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율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지키면 복을 받고", 즉 생명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복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고, 이게 중요한데,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복이 아니면 저주인데, 생명이 아니면 죽음인데, 그 중간은 없다는 것이죠.
여기에 대해서 "그러면 율법을 지키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할지 몰라도, 그런데 그만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 땅이 어떤 땅인고 하니, 생명이 땅이 아니고 죽음의 땅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죽음의 땅이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자기를 목 조르는 땅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무엇을 해야합니까? 열심히 일을 해서 대출이자라도 갚아야하기 때문에 교회에 나갈 시간도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은 자기를 목 조르는 세상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가고 하는데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목 조르면 목 조를수록 율법은 중요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 다시 정리하면 !!
강의를 다시 정리해보면,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사는 것이 정상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말이죠. 그러면 비정상인데, 비정상의 특징은 말썽꾸러기라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은 말썽꾸러기인데, 그런데 광야라는 것은 죽이는 땅, 즉 죽음의 땅인데, 그러니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게 딱 적합하다는 말이죠. 즉 말썽꾸러기는 죽여버린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에 반항한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데, 그렇지요? "말썽꾸러기이기 때문에 죽이겠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하나님, 참 잘 하셨습니다. 죽이세요" 라고 하는 것이 정상인데, 그런데 왜 율법에 반발을 하느냐는 말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광야에서 하나님에게 대들고 반항을 하느냐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상대로 해서 멱살을 쥐는 것이 아닌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은 모르는 것이 있다는 말이죠. 인간은 무엇을 모릅니까? 죄를 모른다는 것이죠. 만약에 죄를 안다면 "저는 죽어도 마땅합니다" 라고 나올 것인데,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죄를 대신해서 그 자리에 박혀있는 것이 있다는 말이죠.
* 하나님, 왜 때리십니까?
인간은 죄를 애써 거부하고 다른 것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 의' 라는 겁니다. 그래서 "왜 때리십니까?" 라고 하는데, 자기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느냐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수많은 민족들 중에서 샘플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시고, 그들을 이끌어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그런 와중에 반박하고 반항하는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죠.
* 뼈들이 살아났다 !!
에스겔서 37장에서 "뼈들이 살아났다" 라고 하는데, 인자 때문에 뼈들이 살아났다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에 다니던 다니지 않던 이것을 거부할 자가 과연 있을까요?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았다고 하는데, 이것을 누가 거부하겠느냐는 말이죠. 복음도 이런 복음이 없다는 겁니다. 삼성생명도 이렇게 해주지는 못한다는 말이죠(ㅋㅋ). "믿던 안 믿던 간에 일단 받아서 챙기고 보자" 라고 나온다는 것이죠.
뼈들이 살아난다고 했는데, 그러면 그 모델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모델입니까? 예수님이 모델입니까? 예수님이 모델인데,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이 이것을 받아버리면, 우리 인간은 말썽꾸러기이기 때문에, 즉 죄가 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백퍼센트 오해를 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야, 저것을 알면 구원을 받겠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은 자기가 잘 되는 것을 챙기는 것에 있어서는 전혀 빈틈이 없는데, 바로 그 오해의 증거가 십자가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으면서도 어떻게 했습니까? 정작 부활이 되신 분인 예수님을 죽였다는 말이죠. 그러니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자기 부활과 예수님의 부활은 전혀 달랐다는 겁니다.
여기서 요한복음 6장을 보겠는데, 47절에서 55절입니다.
(요 6: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 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요 6: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요 6: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요 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요 6:52)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
여기 48절에 보면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라고 하는데, 즉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거부할 사람이 있습니까?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제대로 찾아왔구나" 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반겼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생명의 떡이 내려온 것이 약속의 땅이었습니까? 광야였습니까? 광야인데, 그게 만나였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들은 누구를 기다렸는고 하니, 모세와 같은 분이 오셔서 자기들에게 만나를 베풀어주기를 학수고대했다는 겁니다. 그분을 메시야, 즉 구원자라고 여겼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그들이 오해한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들이 말썽꾸러기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고, 자기들이 비정상이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또한 자기 속에 죄가 있다는 것도 모른다는 것이죠. 자기들 속에 하나님께 바칠 저장된 의가 있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그것이 곧 죄를 저축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그들은 전혀 몰랐다는 겁니다.
* 저분이 메시야인가?
아무튼 자기들은 멀쩡하다는 것인데, 그래서 그들은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의 떡을 주시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먹기만 하면 산다" 라고 여겼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저분이 메시야인가?" 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따랐다는 겁니다.
49절과 50절에 보면, 예수님은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라고 하시는데,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기분이 좋았는데, 그야말로 신이 났다는 것이죠.
그런데 51절에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께서 갑자기 떡과 자기 자신을 결부시키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유대인들은 과거 자기의 조상들이 만나를 먹었듯이 자기들도 그렇게 떡을 먹기를 바라고 소망했는데, 즉 자기들과 떡이 직접 결부되기를 원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생명의 떡이 자기 자신이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자 이제 유대인들이 어떻게 나옵니까?
52절에 보면,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난리가 났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그들은 무엇이 틀어졌다는 겁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있던 유대인들이 왜 이렇게 나오느냐는 말이죠.
만나라는 것은 드로프스 과자와도 비슷한데, 그래서 땅에 떨어진 그것을 자기 행위로서 입에 집어넣으면, 광야에서의 하루치 식량은 챙긴 것이 된다는 겁니다. 마치 이스라엘 가자지구에 UN의 구호품이 하늘에서 떨어지면, 주민들은 그것을 챙겨서 먹으면 되듯이 말이죠.
그런데 그 생명의 떡이 자기에게 직접 오는 것이 아니고, 그만 예수님의 몸으로 가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생명의 떡을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예수님의 몸을 먹어야 한다는 말이죠. 지금 예수님이 과장해서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 아닌데, 실제로 그러하다는 겁니다.
* 생명 없다 !!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 유대인들에게 다툼이 일어났는데,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53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라고 하시는데, 여기 마지막에 보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을 간단히 줄이면 "생명 없다" 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들은 처음부터 생명이 없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에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말이죠. 오직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만이 생명을 가진다는 겁니다.
* '생명'이 아니면, '죽음' !!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에 들어왔는데,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율법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까, "지키면 생명이고, 지키지 못하면 죽음이다" 라는 겁니다. 알아서 자기가 살아가고 하는, 그런 중간은 없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사람답게 살면 되잖아" 라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생명, 즉 영생의 반대말이 그냥 자기가 알아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저주가 반대말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자리에, 요한복음 6장 53절에서 무엇을 집어넣었습니까? 예수님 자신의 살과 피를 집어넣었다는 겁니다.
율법, 즉 십계명은 그래도 뭔가 지켰다고 하면 얼추 지킨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살인하지 말라" 라고 하면,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되잖아" 라고 나올 수가 있다는 겁니다. "간음하지 말라" 라고 하면, "바람을 피우지 않으면 되잖아"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거짓말하지 말라" 라고 하면, "내가 입 단속을 제대로 해야지"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 예수님의 살과 피 !!
하지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래도 율법은 어떻게 열심히 노력하면 될 것 같은데, 그런데 이것은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예수님을 죽여서 분해를 해야하는데, 그래야 예수님의 몸을 찢겨진 살과 피로 나눌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교회에 나가지 않는 자식 문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문제라는 말이죠. 자기가 말썽꾸러기인데, 그런데 자기가 어디가 문제인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성경은 분명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그동안 자기를 단도리를 해왔습니까? 믿는 것이 아니고, 믿는 것을 아는 것으로 계속해서 대체를 해왔다는 말이죠.
그렇게 아는 것으로 대체를 하니, 계속해서 무엇이 남게 됩니까? 우리 인간이 죽음을 압니까? 죽으면 그것으로 끝인데, 그러니 죽음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니 알기 위해서는 일단 자기가 죽지 않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죽지 않고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강의 처음에 마른 뼈들이 살아난다고 했는데, 그러면 그 뼈에 들어가지도 못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살아남도 없다는 말이죠.
* "땅 대 땅" VS "인간 대 인간" !!
그러니 오늘 이 시간에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이게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겁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자식을 예로 들었는데, 안다고 하면서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식이 교회와 말씀에 관심이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땅 대 땅"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그 대신에 "인간 대 인간"으로 생각을 해왔다는 겁니다.
부모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땅 대 땅"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즉 "이 땅이 어떤 땅인가?" 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 대 인간"으로 생각해왔다는 말이죠. 즉 자기 나이 때의 교회에 잘 다니는 자식을 둔 부모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자식을 둔 부모, 그 사이를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그 사이에서 자기는 과연 어느 쪽에 속하는지, 그것을 자기가 판단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인간 대 인간"으로 생각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이 땅이 어떤 땅인가?" 라는 점을 그만 놓쳐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아니고 땅인데 말이죠.
* 저주받기에 합당한 땅, '무저갱' !!
그렇다면 여기서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해보면, "에덴동산 + 인간", 이것이 정상적인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뒤에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이 되었다는 겁니다. 에덴동산이 아닌 추방이 된 땅은 저주의 땅인데, 그렇게 되면 인간은 저주에 땅에 있게 된다는 말이죠.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자체가 저주를 받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에, 그 환경도 역시나 저주의 환경이 합당하다는 겁니다. 그것이 창세기 3장의 내용인데, 이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무저갱' 이라고 한다는 것이죠. 이 무저갱은 마귀와 그 종들이 갇혀있는 감옥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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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저갱(無低坑, Abyss) - 끝(밑)이 없이 깊은 구덩이(눅 8:31; 계 9:11). 문자적으로 '바닥이 없다', '깊다'는 뜻이다(bottomless pit). 죽은 사람이 가는 곳으로 '스올'(음부), '지옥'이라 칭하기도 하며(롬 10:7), 불순종의 영들 곧 사탄과 그의 졸개들이 들어가 영원히 벌받을 형벌의 장소로 소개되기도 한다(마 25:41; 계 20:1, 3). (라이프성경사전, 2006. 8. 15., 가스펠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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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누가복음 8장을 보겠는데, 30절과 31절입니다.
(눅 8: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눅 8:31)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1절에서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라고 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가 있다는 겁니다. 첫 번째로, 인간들 속에 설치고 있는 귀신들은 그 출처가 어디라는 겁니까? 그들은 무저갱에서 나왔다는 말이죠.
요한계시록 9장 2절에 보면 "저가 무저갱을 여니" 라고 하는데, 그렇게 무저갱을 열었기 때문에 귀신들이 이 땅에 떨어졌다는 겁니다. 인간의 이 저주받은 땅, 이 땅이 그렇게 저주받은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마귀와 그 부하들인 귀신들이 설쳐대는 땅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무저갱, 즉 저주받은 땅인데, 거기에 인간들이 한 통속이 되어서 설치고 있다는 겁니다.
(계 9:1)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저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계 9:2) 저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풀무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인하여 어두워지며
그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율법으로 주어진 약속의 땅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고, 귀신들이 설치는, 즉 귀신이 들린 똑같은 인간들끼리, 그런 "인간 대 인간"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형성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인간사회라는 말이죠. 이런 말을 처음 듣습니까? 이게 결코 낯설고 생소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죠.
* 하늘의 땅과 인간의 땅을 다 경유하신 예수님 !!
그러면 만약에 여러분이 예수님이라고 하면,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러한 땅의 실정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 인간들과 상대를 해야할까요? 아니면 두 개의 땅을 모두 다 경유할까요? 하늘의 땅과 인간의 땅, 그렇게 두 개를 다 경유하신다는 겁니다.
그게 로마서 10장에 나오는데, 6절과 7절입니다.
(롬 10: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롬 10:7)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롬 10: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개역개정판)
여기 나오는 음부가 무저갱인데, 개역개정판은 이것을 무저갱으로 번역하고 있다는 말이죠. 사도신경에 음부에까지 내려간다고 되어있는데, 그게 3일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라고 하는데, 이것을 "음부에 내려가시어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천주교나 성공회는 실제로 이렇게 사용하고 있고 말이죠.
그러니까 주님의 관심사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즉 "이제는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너를 새 사람으로 만들어주겠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는 하늘의 땅, 그리고 그 땅과 전혀 대조가 되는 인간이 사는 이 저주의 땅, 그렇게 두 개의 땅을 모두 다 거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둘 다 시찰을 하시고 내린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 '죽어야 한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죽을 자가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제대로 죽어야만 한다는 말이죠. 어떻게 말인가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그리고 죄를 지은 자는 저주를 받아서 죽는, 그렇게 둘 다 충족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 예수님만의 단독죽음 !!
그 죽음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인데, 즉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는 죽음, 그리고 "내 영혼을 받으소서" 라고 하는 상반된 고백이 터져 나오는 죽음이란 말이죠. 그러니 이 죽음은 여럿이 같이 죽는 죽음이 아니고 예수님만의 단독죽음인데, 그래서 뼈들이 살아날 때 그 모델이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오직 예수님만이 모델인데, 그 예수님의 관심사는 사람이 아닌 땅에 있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을 확장시켜보면,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이기 때문에, 인간의 배후에서 인간을 쥐고 흔드는 뱀의 후손, 즉 악마에게 관심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가 자기를 챙기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내 믿음으로 내가 구원을 받아야지"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런 것은 다 자기가 어떻게 하려고 하는 종교적인 노력에 불과한데, 즉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 광야 + 율법 = 약속의 땅 !!
그러면 누구에게 맡겨야 합니까? 율법에 맡기면 된다는 말이죠. 땅이라는 것은 인간이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광야 + 율법 = 약속의 땅",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광야에 있을 때 만나가 중지가 된 적이 없는데, 얼마나 잘 하늘에서 내려오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만나가 새벽마다 주어지는데, 그러면 그게 인간을 살리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율법을 살리기 위함입니까? 율법을 살리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율법을 살린다는 것은, "지키면 생명이고, 지키지 않으면 저주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하늘의 만나를 먹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율법을 지킨 자가 있습니까? 단 한 명도 없었다는 말이죠.
"모세는 지켰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모세는 그 소속이 시내산 아래가 아니고 시내산 위라는 겁니다. 시민권에 하늘에 있는데, 모세는 선지자라는 말이죠. 율법의 대상자로서는 그 누구도 지킬 자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년 이후에 그 후손들은 어디에 들어갑니까?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후에는 만나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더 이상 내리지 않았는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준 것은 사람을 위해서 준 것이 아니고, 실패한 자, 즉 죽었던 자를 다시 살려낸 의도를 지닌, 그런 백성들을 위해서 꾸준히 그동안 만나가 주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니 만나가 약속의 땅으로 방향을 제시해준 것인데, "그쪽이 아닌 이쪽으로 가자. 그래, 그쪽이야" 라고 하면서 데리고 갔는데, 그러면서 인간들은 광야에서 계속해서 죽어갔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죽으면서도, 애굽이 아닌 광야에서 새로 출생한 자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새로운 시대에 입각한 율법의 완성체제, 그것이 바로 '제사법' 이라는 것인데, 즉 율법이 어떻게 스스로 변천해서 완성이 되는지, 그것을 지켜보기 위해서 그들은 죽지 않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야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은 무슨 중심이라는 겁니까? 말씀, 즉 율법중심이라는 말이죠.
* 교회에 다니지 않는 자식, 과연 그 해결책은?
이 정도로 하고 다시 자식 이야기로 돌아와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자식이 있다고 하면, 그 해결책은 과연 무엇일까요? "네가 교회에 나간다면 집을 네 앞으로 해줄게" 라고 하면 됩니까? 어떻게 해야할까요? 자식의 해결책은 곧 자기의 해결책인데, 그러니 문제는 누구라는 겁니까?
바로 자기 자신이 문제라는 겁니다. 자기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해결책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예수님을 믿으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알고 있었던 자기 자신을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것을 발로 걷어 차버리면 되는데, 자기가 예수님을 안다는 것을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가 예수님을 알려고 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죽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을 알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예수님을 알려고 하는 것은 결코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것을 깨달으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자기가 안다는 것을 걷어차면 되는데, 그러면 거기서 어떤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까? ㉯믿음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이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겠다" 라고 하신, 그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죠.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 집단적 주체성 해석 !!
자기가 안다고 했을 때는 자기가 주인공인데, 어제 낮 설교시간에 이것을 어려운 말로 '주체해석' 이라고 했는데, 자기가 주체라는 것인데,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이게 용납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는고 하니, 그것을 '집단적 주체성 해석' 이라고 하는데, 즉 머리가 되는 부분이 자기 쪽에는 없다는 말이죠. 구멍이 나 있는데, 그것을 '공백'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예수님의 몸에 난 창자국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구원을 걱정할 주인공은 전혀 자기 자신이 아니었다는 말이죠. 구원에 대해서 염려를 하든 걱정을 하든 그것은 누구 소관인고 하니, 자기 소관이 아니고 예수님의 일방적인 소관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단 죽여놓고, 천국에 보내든 지옥에 보내든 하신다는 말이죠.
자기는 주인공이 아닌데, 오직 예수님만이 주인공이라는 겁니다. 다만 우리는 그 예수님에게 얻어먹는 상태라는 말이죠. 예수님의 살이고 예수님의 피인데,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놓이면 됩니까?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맺었던 그 관계에서 생긴 살과 피, 그것을 우리는 얻어먹으면 된다는 겁니다. 즉 생명을 얻어먹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가 주인입니까? 예수님이 주인입니까? 예수님이 주인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것을 '안다' 라고 하면 곤란하고, '기뻐요'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동안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서 가려졌던, 즉 자기가 어떻게 해보겠다고 하면서 수작을 부렸던 것 때문에 가려졌던 진실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기가 원했던 자들을 살리겠다고 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게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엄마가 자식에게 과연 뭐라고 하면 될까요? 자식이 "엄마는 내가 보기에 믿음이 하나도 없다" 라고 하면, 그것을 듣고 너무 흥분하지 말고(ㅋㅋ), 아주 차분하게 "나는 그것을 너의 이야기가 아닌 예수님의 이야기로 듣겠다. 나는 지금껏 믿음이 있어본 적이 없어"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 나는 지금껏 믿음이 있어본 적이 없어 !!
계속해서 말하기를, "왜냐하면 너를 낳고 난 뒤에 네가 예수님보다 더 귀하게 여겨져서, 나는 예수님을 이용할 생각만 했다. 네가 하나님의 자녀라기보다는 나의 자녀임을 더 자랑스럽게 여겼어.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을 틀어막았어. 그러니 내가 곧 바리새인이고,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어"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식은 "엄마는 그 이야기를 왜 나에게 하지?" 라고 하는데, 그러면 엄마는 "나는 지금 너에게 믿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나도 너와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게 바로 죄라는 것을 너에게 자백하고 있어" 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평소에 이 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것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죠. 우리가 자기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고 있는 상태에서, 그러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자식들에 대해서, 사실은 이것은 교회에 다니는 자식들이라고 해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자식들도 역시 자기가 다니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교회에 다니고 있기에 말이죠. 말씀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그냥 교회에만 왔다갔다한다는 겁니다. 장로집안에 덜컥 시집을 가서는 그냥 시어른들의 눈치만 보면서 습관적으로 다니고 있다는 것이죠.
* 인간들은 왜 그렇게 살아갈까?
그러면 왜 그렇게 살까요? 그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데, 왜냐하면 "사람 대 사람"의 관계로서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죠. 그래서 남들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하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것을 구약에서는 우상숭배라고 하는데, 다른 나라들이 그렇게 해서 잘사니, 이스라엘 백성들도 따라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너무나 자연스러운데, 마음을 다지고 할 필요도 없는데, 그냥 살면 그게 우상숭배라는 겁니다. 반면에 여호와에 대해서는 시큰둥하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우상 자체가 자기가 살아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가 알아서 열심히 살아가면, 그게 다 우상숭배자가 된다는 것이죠.
* 'MAN' to 'MAN' !!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하는데,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선광인효현숙경영정순헌철고순" 이라고, 이것이 조선시대의 왕들인데, 이것을 사람들은 '역사'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사람들은 이 세상을 "인간 대 인간"으로 보고 있는데, 조선왕들의 역사를 보면 쿠데타를 일으키고 죽이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것을 '사극(史劇)' 이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것이 우리 인간들의 한계인데, 요즘 국회의원 선거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러운데, 그 모든 것들이 "인간 대 인간"의 이야기들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진짜 역사는 인간이 아니라 땅의 이야기인데, 즉 "모든 역사는 에너지의 효율성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 모든 역사는 에너지의 효율성 !!
그러니 진짜 역사라는 것은, 그 시대의 인간들이 그 땅의 에너지에서 어떤 것을 뽑아내고 효율적으로 활용하느냐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몸은 양자와 전자와 중성자, 즉 에너지로 되어있다는 말이죠.
우리의 몸의 세포가 필요로 하는 3대 영양소를 단백질과 지방과 탄수화물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제공하는 인물이 있다고 하면, 인간은 그런 자를 지도자로, 즉 왕으로 만드는데, 그게 곧 인간의 역사라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누가 뭐라고 해도 에너지라는 말이죠.
*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
그러면 이게 성경이 나옵니까? 나오는데, 그게 창세기 3장이라는 겁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 난 뒤에 이마에 땀을 흘리게 되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나의 노동을 통한 에너지만큼 땅에 제대로 그 효율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사람들은 영웅을 원한다는 말이죠
(창 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 영웅의 등장 !!
그래서 창세기 10장에 보면 영웅이 한 사람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니므롯' 이라는 겁니다. 그 당시는 사냥을 하던 시절이라서 사냥을 잘하면 영웅이 될 수가 있었다는 말이죠. 물론 요즘은 임영웅이라고, 노래를 잘하면 영웅이 되지만 말이죠(ㅋㅋ). 그의 고향에 지어진 탑이 바벨탑인데, 그러니까 가인과 라멕과 같은 자들은 그 시대의 영웅들이라는 겁니다.
(창 10:8)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창 10:9)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창 10:10)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러니 누가 뭐라고 해도 에너지인데, 왜 제국주의 시대에 동양의 나라들이 서양에게 다 잡아먹혔습니까? 그 이유의 에너지 효율의 차이 때문인데, 서양에서는 석탄과 석유를 가지고 에너지화를 시켜서 고효율의 기계들을 만들었고, 그래서 산업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동양에서는 토지의 지표면에 농사를 짓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게임이 되겠습니까? 되지 않는데, 농사를 짓던 낫을 갈아서 칼을 만들어도, 상대방은 총과 대포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왜 그렇게 비참하게 깨어졌습니까? 그런 무기가 제대로 없었다는 말이죠. 인간 하나하나가 다 에너지 덩어리라는 겁니다.
* 다시, 자식은 왜 교회에 나오지 않을까?
그렇다면 자식은 왜 교회에 나오지 않을까요? 이제 답이 나왔는데, 보다 더 에너지를 많이 뽑아내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죠. 교회에 다니는 것을 효율적이지 못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래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에너지를 많이 뽑아내기 위해서는, 모든 시간을 자기에게 집중해서 투자해야 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자식이 카페를 운영한다고 하면, 그러면 교회에 나간다고 일요일에 과연 문을 닫을 수 있을까요? 없다는 겁니다. 생활비를 벌고 월세도 내야만 하는데, 그런데 하필이면 손님이 제일 많은 일요일에 어떻게 문을 닫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런데 거기에 대고 엄마가 "너, 요즘 왜 교회에 안 나오지?" 라고 하면, 자식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엄마도 알다시피 요즘 손님이 너무나 없어요. 그러니 어떻게 문을 닫겠습니까?" 라고 하면, 그러면 엄마는 납득을 합니까? 하지 않습니까? 납득을 하고 이해를 한다는 겁니다.
* 자식은 내 얼굴의 복사판 !!
그런데 믿음이 있는 부모라고 하면 어떻게 나올까요? 물론 이해를 하고 납득은 하지만, "저것이 바로 내 모습이네. 옛날에 내가 이 세상을 예수님이 없이 내 중심으로 보았을 때, 딱 저렇게 보았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즉 자식은 자기 얼굴의 복사판이라는 것인데, 그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부모가 어떻게 해야합니까? 회개를 해야합니까? 강의 마지막에는 항상 복음이 나와야 하는데(ㅋㅋ),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웠구나. 내가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구나" 라고 해야하느냐는 말이죠. 어떻게 해야할까요? 여러분이 답변을 해보시라는 겁니다.
* 아하, 주님의 뜻이구나 !!
이미 답이 다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의 뜻이구나"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나는 훌륭하다" 라는 것이 아니고, "나도 저 자식과 똑같은데, 그런데 어떻게 나는 거기에서 벗어났을까? 어떻게 무저갱에서 탈출을 했을까?" 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모든 공로가 누구의 공로라는 겁니까?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을 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그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나왔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정상적인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인데, 인자이신 정상적인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기도해서, 그 응답으로서 우리에게 믿음이 주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니 믿지 않는 가족과 자식을 통해서도 줄기차게 주님에 대한 감사와 고마움과 찬양이 나오게 된다는 말이죠. 오늘 강의시간에 배웠다고 자식에게 써먹을 생각은 하지 마시고, 그러면 자식은 "엄마는 너무 이기주의자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ㅋㅋ). 다만 "나는 너를 이해한다. 너의 모습이 곧 나의 나의 모습이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러니 주님 중심으로 살아가면 된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 전체를 다 바라보게 하옵소서. 그리고 믿는 것도 주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셨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죽인 주님의 살과 피에 저희들도 감히 동참하기를 소원하옵니다. 그렇게 해서 오직 생명이 주님의 살과 피에 있음에 항상 감격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4,4,10 오후 3시에 마침.
저도 자식들에게 시비를 거는 아빠가 되고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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