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지옥하나님-존재의 이면

아빠와 함께 2024. 4. 2. 09:47

[24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43 - 존재의 이면

24,03,18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생명은 어디에 있는가?

오늘은 교재 197페이지부터 하겠는데, 거기에 제목이 '생명의 교회' 라고 되어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생명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에는 생명이 없다는 말이죠. 그 이유가 출애굽기 33장에 나오는데, 19절부터 23절까지 보겠습니다.

(출 33: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출 33:20)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출 33:2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출 33:22)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출 33: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 생명나무에서 추방된 인간 !!

여기 19절에 보면,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그 낌새가 인간세계에는 생명이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이죠. 생명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고 싶은 자에게는 주고,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애초부터 없다는 겁니다.

또한 20절에서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라고 하는데,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은 자신을 자기의 이름으로 나타내시는데, 그 이름을 중간으로 해서, 생명이 없는 곳과 있는 곳으로 나눌 수 있다는 말이죠.

여기서 에덴동산에서 생명나무, 즉 생명과 함께 계시는 분,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반면에 우리 인간은 어떻습니까? 생명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곳에서 추방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열심히 잘 살펴보면 생명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아예 생명이 없는 곳으로 쫓겨났다는 말이죠.

그 동네가 바로 인간들이 터를 잡고 살아가는 이 세상인데, 그러니 이 세상을 규정한다면, "이 세상은 생명이 없는 곳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생명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 세상에는 생명이 없는데, 그런데 인간의 입장은 무엇인고 하니, "나는 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여기에 존재한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이란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에서는 "나는 존재한다" 라고 하는 것은 되는데, 반면에 무엇이 없다는 겁니까? "생명은 없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이 세상이라는 것이죠.

* 생명과 존재의 이면 !!

그러면 생명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존재의 뒤편', 거기에 생명이 있다는 말이죠. 혹은 '존재의 이면' 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즉 자기가 존재하는 그 뒤쪽에 생명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이 존재하는 곳에는 생명이 없다는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존재의 뒤편으로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할지 몰라도, 여기 출애굽기 33장 20절에 보면,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숨이 끊어진 게 죽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이 생명이 없는 죽은 존재인데, 그것이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생명이 있기는 있지만, 그 생명은 인간 존재의 뒤편에 있고, 그래서 생명이 없는 쪽에서 있는 쪽으로 가려고 하면, 하나님의 얼굴이 가로막고 있다는 말이죠. 물론 "얼굴을 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할지 몰라도, 얼굴을 보면 튕겨나오게 되어있고, 그런데도 얼굴을 봐야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얼굴을 봐야 비로소 "나는 죽은 존재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

그렇게 이 땅에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주시는 분으로,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라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이 오시게 되면, 인간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무엇을 보게 됩니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라는 것인데, 즉 예수님을 본 것이 곧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이 된다는 말이죠. 빌립이 질문을 하자,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을 하셨다는 겁니다.

(요 14: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요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일그러진 예수님의 얼굴 !!

그런데 그 예수님의 얼굴이 십자가에서는 일그러진 얼굴이 되는데, 인간에게 뺨까지 얻어맞은 처참한 얼굴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는 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생명과는 전혀 무관한 얼굴, 즉 죽음에 접근한 얼굴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죽음 그 자체를 함유한 얼굴을 우리 인간에게 보여주셨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얼굴이 예수님 스스로 뭉개져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누가 때렸는데, 누가 때렸습니까? 인간의 대표자들, 즉 인간 생각의 집대성이 예수님의 얼굴, 하나님의 얼굴을 일그러뜨렸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얼굴, 자기 존재를 멀쩡하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는 말이죠.

바로 그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자기들의 죄를 근원적으로 지적하는 예수님을 인간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서 망가뜨렸다는 겁니다. 그 본성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인간 속에는 악마가 들어있다고 하는데, 즉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고 있다는 말이죠.

* 유대인들이 돌을 든 이유는?

그렇게 여자의 후손을 망가뜨렸다고 하는 것, 그것은 누가 그렇게 했다는 겁니까? 뱀이 힘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언제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는고 하니, 여기서 요한복음 10장을 보겠는데, 30절과 31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요 10: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는데, 그렇게 돌을 들었다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수행하는 중이다" 라는 것을 티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약에서 돌을 들어서 죽이려고 했던 경우가 언제인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성을 정복하면서 하나님께 바칠 물건을 빼돌린 아간을 죽였을 때도 그렇고, 또한 안식일에 나무를 한 경우에도 돌로 쳐서 죽였다는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율법에는 분명히 나와있는데, 부모에게 대든 자식은 부모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다는 말이죠.

(신 21:18)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신 21:19)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신 21:20)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신 21:21)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 우리는 하나님의 편에 선 자들이다 !!

그러니 "돌을 들었다"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이것은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당신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실행에 옮기려는 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편에 선 자들이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티를 내고 폼을 잡을 수 있다는 겁니다.

사울이라는 자가 다메섹으로 내려가면서 예수를 믿는 자들을 체포하려고 했는데, 그러면 왜 그렇게 했을까요?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자기가 유대인들의 열심, 즉 하나님을 잘 섬기는 폼을 내기 위해서, 예수라는 이단을 따르는 자들을 잡아죽이려고 했다는 말이죠.

(갈 1: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갈 1: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신약에서 돌에 맞아 죽은 자가 있는데, 그가 바로 스데반 집사님이라는 겁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객을 보내서 몰래 암살을 시켜버리든지 하면 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공개적으로 스데반 집사님을 돌로 쳐서 죽였다고 하는 것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라고, 그렇게 서로 서로를 격려하는 차원에서 돌로 쳐서 죽였다는 겁니다.

* 예수님은 트러블 메이커 !!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을 때, 그런 분노를 유발하게 된 동기를 누가 제시했는고 하니까, 그것을 예수님 쪽에서 제시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도대체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그들이 예수님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을까요?

그게 바로 요한복음 10장의 말씀인데, 즉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왜 그들에게 분노를 유발시킬까요? 그 이유를 한번 생각해보자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없는 요소가 들어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 '예수님' 존재 VS '나' 존재 !!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이다"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그것은 "하나님 따로, 예수님 따로인데, 그런데 하나로 연결되었다" 라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그런 예수님의 주장에 자기들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동의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그 예수님의 한 이야기가 맞다고 하면, 그런데도 자기들이 가만히 있다고 하면, 그러면 누가 틀린 것이 됩니까? 자기들이 그만 틀린 것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들의 행동이 잘못된 정도가 아니고, 그러면 자기들은 그만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 즉 "우리는 다른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이단 정도가 아니고 "귀신이 들렸다" 라고 했는데, 즉 "너는 마귀가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 라고 보았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자기들은 정상이고 싶고, 그런 정상적인 것에 대해서 흠집을 내는 예수님이라는 존재를, 그들 존재가 도저히 살려줄 수가 없었다는 말이죠. 그런 예수와는 함께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인데, 즉 "저쪽을 제거함으로서 '나' 라는 존재는 여전히 올바른 편에 서있다" 라는 것을 계속해서 확인하고 싶었다는 겁니다.

* 가인 VS 아벨 !!

창세기 4장에 무슨 내용이 나옵니까? 가인과 아벨이 나오는데, 평소에 그들이 사이가 좋았는지, 그런 것은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형이 그만 동생을 죽이고 만다는 것이죠. 동생을 보고 "앞으로 좀 조심해서 행동해라" 라고 하면서 야단을 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아예 존재의 바탕 자체를 그만 제거해버린다는 겁니다.

이것은 형이 평소에 자기 존재의 바탕을 늘 신경을 쓰고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질문에 들어가는데, 즉 "인간의 평소 관심사는 어디서 나올까요?" 라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를 해드렸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 존재라는 겁니다. 인간은 이렇게 자기 존재를 챙기는데 전력을 기울이는데, 봄이면 봄옷을 입고 여름이면 여름옷을 입고 말이죠.

그러니 우리 인간이 평소에 하는 모든 행동이 무엇과 관련이 있는고 하니, "내 존재는 내가 챙긴다" 라는 겁니다. 전립선에 문제가 있으면 친절하게 수술도 해주고 말이죠. 그러니 인간에게 있어서 그것보다도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 과연 있을까요? 없다는 겁니다.

* 자기 존재를 챙기는데 필요한 하나님 !!

그러면 "나는 볼 일은 ( )다" 라고 한다면, 여기에서 이 ( )에 들어갈 내용은 무엇일까요? "1번) 하나님 섬기기, 2번) 하나님 사랑하기, 3번) 자기 챙기기" 라고 한다면, 당연히 3번이란 말이죠. 하나님은 뒷전이고, 누가 뭐라고 해도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존재를 챙기면서 "나는 하나님을 섬깁니다" 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자기 존재를 챙기는데 필요한 하나님이라는 것인데, 그런 용도로서 하나님을 끌어당긴다는 말이죠. 자기 존재를 제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나' 라는 것은 생명이 없는 자인데, 그런 상태에서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종교에 열심을 다한다는 말이죠. 반면에 생명이 있는 스데반 집사님은 예수님을 앞장세우다가 돌에 맞아죽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성경이 얼마나 무서운 책인지 모르는데, 우리의 본색을 모두 까발려버린다는 말이죠.

제가 어느 강의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는 것은 우리를 죽이기 위함이다" 라고 했는데, 이게 율법적 기능과 같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지난 주에 설교를 하면서 "죽으려고 하면 교회에 와서 죽어라" 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교회에 오면 말씀이 나온다는 말이죠. 즉 "오늘도 죽자" 라고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라는 것이죠.

* 이제는 짱돌을 들 이유가 없어 !!

그렇게 해서 말씀에 의해서 죽어버린 자는, 예수님을 향해서 짱돌을 들 이유가 그만 모두 다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제자들의 첫 번째 행동은 도망을 치는 것이었는데, 왜 도망을 갔을까요? 평소에 자기 존재를 챙기던 행태가 십자가 앞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러면 두 번째 행동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도 역시 자기 존재를 챙기는 것인데, 7명이 모여서 고기를 잡으러 갔다는 겁니다. 즉 "이제 예수님을 떠나고 없고, 그래서 나는 예전의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면 뭐라도 되겠지. 그냥 늙어서 죽으면 그만이지" 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렇게 해서 고기를 잡는데 누가 찾아왔습니까? 이게 참으로 중요한 사건인데, 물론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중요한 사건이지만 말이죠.

주님이 평소처럼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이 아닌데, 이미 죽고 난 뒤에 찾아오셨는데, 즉 이미 제자들이 자기들의 본색이 다 드러난 상태에서 주님이 찾아오셨다는 겁니다. 이것은 "너거들은 너거들 존재를 챙긴다고 나와 결별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은 이제 알았지?" 라는 것인데, 즉 "나는 나밖에 모른다" 라는 것이 들통난 생태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주님이 찾아온 것인데, "저는 죽어도 주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라고, 그렇게 자기도 무슨 말인지 모르면서 하는 상태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제는 자기 쪽에서 주님에게 다가간다는 것이 그야말로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자인하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주님은 찾아오신다는 말이죠.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장에서 주님이 베드로와 대화를 하시는데, 즉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여러분이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자기의 모든 것이 다 들통난 상황에서, 주님이 과도한 대화를 건네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저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라는 말조차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요 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베드로는 현재 자기의 심정을 제대로 잘 표현을 했는데, 그 대답이 무엇인고 하니까,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는 것인데, 이것은 "질문하신 그 질문내용에 답이 들어있지 않습니까? 질문자체가 답이잖아요?" 라는 것인데, 그래서 "주께서 다 아시지 않습니까?" 라고 했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질문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런데 주님이 질문을 던졌다고 하는 것은, 이제는 저를 말씀의 일부로 채용해주시겠다는 의미이지 않습니까? 주님이 이루시는 지속되는 주님의 작업에 저를 일방적으로 끌어당겨 주시지 않았습니까?"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이미 죽은 자인데, 그의 자아는 죽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베드로의 자아가 죽게 되면 무엇이 남을까요? 베드로는 찾아오신 주님의 자리가 남는다는 겁니다. 베드로의 자아, 베드로의 육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베드로의 육신이 깔고 앉았던 자리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 예수님의 이름으로 !!

그 자리는 없는 자리인데, 그런데 주님께서 생명의 세계에서 주의 이름으로 베드로에게 자리를 마련해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베드로의 자리는 누구의 자리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일그러진 얼굴, 바로 그 자리인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베드로나 오늘날 성도가 기도할 때 자기가 하면 안 되고, 자기를 죽은 자로 여기고 무엇을 경유해야한다는 겁니까? 자기를 인해서 죽어버린 자, 바로 그분의 자리를 경유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자기 이름이 아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죠.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뿜어져 나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 !!

그러니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깔고 앉아있는데, 그래서 우리의 꼬라지는 이래도 뿜어져 나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라는 겁니다. 솜사탕을 만드는 현장을 본 적이 있지요? 물론 대단한 장면은 아니지만, 주인 아저씨가 밟으면 몽실몽실한 솜사탕이 피어올라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사람들이 솜사탕을 만드는 주인의 발을 사가는 것이 아닌데, 솜사탕을 사간다는 겁니다.

여러분도 이제 주님이 하시는 일이 좀 감이 잡히지 싶은데, 그러니 우리 입장에서는 제자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는 말이죠. 우리가 직접 주님을 대하면 오해를 하는데, 그런데 우리 먼저 우리와 주님 사이에 끼어든 자들이 누구인고 하니,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는 겁니다.

존재의 뒤편, 즉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데,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얼마나 더러운 인간인지를 다 까발리는데, 그 까발림의 절정이 십자가의 죽으심이고, 그 십자가의 죽으심 속에서 예수님의 얼굴, 즉 하나님의 얼굴이 일그러진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은 우리가 때린 그 얼굴, 그 모습 그대로 찾아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깨닫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그 망가진 얼굴과 우리가 평소에 하는 생각과 행동들, 그것이 서로 관련성이 있음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종적으로 십자가 사건과 만나게 된다는 것이죠. 이제 제가 예를 하나 들어보겠는데, 여러분이 따라와 주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기 전에, 먼저 교재 197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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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 두 가지 개념이 나오는데, 하나는 '죄' 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백성' 이란 개념이다. 죄인이라고 해서 모든 죄인이 다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 이라는 제한적인 자만이 구원된다. 그런데 바로 이 제한성이 도대체 '죄가 무엇인가?' 라는 점과 관련이 있다. 이 제한성을 모르면 '죄'가 무엇인지 모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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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 죄와 자기 백성 !!

여기에 '죄' 라는 개념이 나오고 '자기 백성' 이라는 개념이 나온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자기 백성이 어떤 자들이어야 한다는 겁니까? 자기 백성은 철저히 죄만 있고 의가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자기 백성인데, 즉 잘난 것은 일체 없어야 한다는 것이죠.

*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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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바로 이 제한성이라는 것이, 도대체 '죄가 무엇이냐?' 라는 점과 관련이 있다. 이 제한성을 모르면 죄가 무엇인지 모르게 된다. 그래서 죄의 최종적 의미는,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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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5:22)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 죄를 알지 못하는 인간 !!

예수님이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주님께서 오셔서 말씀해주시지 않았다고 하면, 우리 인간은 죄를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를 지으면 그때그때 반성을 하는데, 그것으로 그만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반성을 하면 죄가 없어지고 마는데, 그런 자체적인 시스템이 우리 인간 속에는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양심' 이라는 것인데, 그래서 자기가 죄를 지었다고 하면, 그 죄에 대해서 인식을 해서 착한 일을 한다든지, 행동거지를 바르게 함으로서, 이전에 지었던 죄를 상쇄시키는 작동이 우리 속에서 진행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 인간이 왜 자꾸만 반성을 합니까? 왜 그렇습니까? 무엇이 귀해서 그런고 하니, '나' 라는 것이 귀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즉 자기가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그런 짓을 하는데, 그래서 부흥회 때 목사가 회개를 하라고 하면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라는 말이죠.

가만히 들어보면 2년 전에 지은 죄를 끄집어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기억이 나지 않아서 끙끙거리기도 한다는 겁니다. 부흥사는 회개를 하라고 하고, 그런데 막상 죄를 지은 것은 기억이 나지를 않고, 그러면 계속해서 재방송을 하게 되는데, 이제는 자기도 지겹다는 말이죠.

* 낙지의 재활용 !!

제가 자주 예를 드는 것이 있는데, 이것도 지겹지 싶은데 말이죠(ㅋㅋ). 우리 집안이 철저한 유교집안이었는데, 아마 일년에 제사가 10번은 족히 되었지 싶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할머니는 제사법을 따를까요? 돈 법을 따를까요? 제사법이라구요? 자꾸 틀리면 곤란한데(ㅋㅋ), 인간은 돈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어떻게 하는고 하니, 비싼 낙지의 경우에는 제사를 드릴 때 낙지를 사용하고는 다락에 올려놓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음 제사 때에 다시 사용을 한다는 겁니다. 즉 조상보다도 돈이라는 말이죠. 아주 지혜롭다는 겁니다. 다락에 올라가 보면 2년 전의 낙지가 그대로 있는데, 고맙게도 이게 잘 썩지를 않는다는 것이죠.

부흥회 때도 마찬가지인데, 회개를 하라고 하면 2년 전의 낙지를 또 다시 끄집어낸다는 겁니다. 술을 마시고 주사를 부릴 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했던 이야기를 또 한다는 말이죠. 교인들끼리 차를 타고 가다가보면, 나이가 든 권사님들의 경우에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이야기를 끄집어내는데, 그런데 막상 들어보면 벌써 12번째 듣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래도 이야기를 하니 맞장구를 쳐주어야 하는데, 운전을 하면서 대답을 해주려고 하면 피곤하다는 말이죠. 들어보면 이야기가 다 자기 스토리인데, 그렇다고 해서 조용히 하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라는 겁니다(ㅋㅋ). 무언수행을 하기도 그렇고, 노래를 부르기도 곤란하고 말이죠.

아무튼 죄라는 것은 자기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터져야만 가능한데, 그래서 그냥 회개하라고 하면, 이미 깔끔하게 반성으로 처리된 것들만 나온다는 겁니다. 인간은 누구로부터 비난을 받지 않는 한계 내에서만 자기 과거를 끄집어낸다는 것이죠. 그것을 '편집' 이라고 하는데, 우리 인간은 자기가 지나온 생애에 대한 편집을 날마다 하고 있는데, 물론 좋게 말이죠.

* 내가 오늘 너의 아들을 빼앗아가면? - 안 됩니다 !!

이제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를 여러분이 잘 따라오셔서, 제가 질문을 할 때마다 답변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여러분에게 "내가 오늘 너의 아들을 빼앗아가면 안 되겠어?" 라고 하신다면,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기에게는 자식이 귀하고 전부라는 겁니다. 그게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내용인데 말이죠.

그러면 여러분은 속으로든 겉으로든 "안 됩니다" 라고 나올텐데, 그렇지요?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이야기가 여기서부터 시작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미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서, 이 땅의 백성들에게 빼앗겼다는 말이죠. 그게 이 땅에 나타난 하나님 이야기의 시작이라는 겁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셨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버려지게 하셨다는 것이죠. 자기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호응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질문을 하신다는 겁니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 자식을 버렸으니 너는 너의 자식을 버리면 안 되겠어?" 라고 하신다면, 그러면 여기에 대한 인간의 답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안 됩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인데, "예, 그렇게 하세요" 라고 하는 인간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이야기가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는데, 우리 인간은 자기가 없어도 되는, 자기를 대신해줄 자식이 있다고 하면, 그 자식은 그 어떤 경우라도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말이죠. 설령 그분이 하나님이라고 해도, 자기 자식만은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우리 인간들에게는 내포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당연히 "안 됩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주님께서는 바로 여기에 대해서 시비를 걸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즉 주님께서 "왜 안 돼?" 라고, 그렇게 나오시면서 대화가 시작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은 왜 안 되는지, 그 이유를 모두 다 끄집어내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 자식이 지금 나이가 36살인데, 그 자식이 죽으면 왜 안 되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내 마음이 아파서 안 됩니다" 라고 하는데, 혹은 "기쁨이 사라져서 안 됩니다" 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게 같은 의미라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께서는 여기에 대해서 "왜 아픈데?" 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그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끝까지 추적해 들어가신다는 말이죠.

* 인간은 괴물의 표상 !!

주님이 왜 그렇게 끝까지 추궁을 하십니까? 그렇게 해야 우리 속에 들어있는 악마의 민낯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래서 주님은 계속해서 악마에게 말씀의 화살을 쏘면서 들어가신다는 겁니다. 표적을 뚫고, 방어책을 뚫고, 그렇게 계속해서 뚫고 또 뚫고 들어가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뚫고 들어가면, 최종적으로 자기 안에 들어있는 것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면 그게 누구라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악마' 라는 괴물이 자기 안에 살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무엇인고 하니, 괴물의 표상이라는 것이죠.

* 의미장애와 표현장애 !!

이것을 좀 어렵게 이야기를 하면, '의미장애'와 '표현장애' 라고 할 수가 있는데, 사실은 이게 차이가 없지만 굳이 만들어보았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십자가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하면, 이게 말은 하지만 그 의미는 모른다는 말이죠. 십자가가 무엇인지 그 의미는 모르고, 다만 성경에 나오는 표현은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이게 표현장애라는 말이죠.

그런데 의미장애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표현은 해놓았지만 그것이 의미와는 결합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즉 의미로 표현을 함에 있어서 장애가 일어난다는 말이죠. 의미를 알기는 알았는데, 하지만 그것을 표현함에 있어서 그 표현을 주님께 되돌려드린다는 겁니다.

* 주께서 아시나이다 !!

아까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하면, 그러면 "사랑합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 질문에 대한 답변에 대해서 자기는 어떻다는 겁니까? "나는 그것을 표현할 자격도 권한도 없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의미를 주신 분에게 표현마저도 담당하도록, 그 모든 것을 주님에게 넘겨버린다는 겁니다. 그러자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이제 너는 네 인생을 네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라고, 즉 "마음대로 죽지도 못한다" 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죽음과 관련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요 21:17)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 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다시 말해서, "내가 너를 죽이는데, 그것은 네가 원하는 죽음이 아니다. 너는 네가 원치 않는 길을 갈 것이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허리띠를 붙들고는 끌고 가신다는 겁니다. 그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베드로의 남은 인생이 자기 뜻에서 이탈했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 도무지 표현할 길이 없는 사랑 !!

십자가는 사랑인데, 그렇게 사랑을 받았는데도 그런데 그 사랑을 도무지 표현할 길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해서 어떻게 하십니까? 베드로의 죽음을 통해서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라고 표현을 하시는데, 그것이 주님의 자기 몫이고 담당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미장애가 아니고 표현장애인데, 즉 십자가를 이야기하면도 십자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이죠. 너무나 종교적인데, 왜 그런고 하니, 항상 자기를 살리는 것이 우선이고 근거가 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게 인간이라는 말이죠.

* 네 마음이 왜 아픈데?

아까 "내 마음이 아픕니다" 라고 대답을 했는데, 그러면 주님은 "왜 아픈데?"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두 번째로 "제가 감당이 되지 않기 때문에 아픕니다. 제가 파괴될 것 같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네가 파괴되면 되잖아"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세 번째로, "저는 그렇게 하면 되는데, 제가 아내가 도저히 안 됩니다. 제 아내가 파괴될 것 같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은 "네가 아내가 파괴되는 것과 네가 무슨 상관이 있어?"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남편으로서 아내가 아픈 것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은 "왜 네가 견디지 못하는데?" 라고 하시면서 계속해서 끝까지 파고 들어가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아내가 끼어드는데, 아내가 뭐라고 합니까? "당신은 지금 남편의 역할을 다하고 있어요? 자식을 잃어서 내가 이렇게 아픈데도, 당신은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해서 직장생활만 할 수 있어요? 나는 지금 집에서 우울증에 걸려서 죽을 맛인데"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남편은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라고 하는데, 그러면 아내는 "그것을 꼭 말도 해야 되요? 남편이 되었으면 눈치를 채고 다 알아서 해주어야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그렇게 연결이 된다는 말이죠.

* 사연이 있는 창업 !!

그러면 남편은 직장에 사표를 내고 창업을 하는데, 그래야 아내 옆에 붙어있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아내가 괴로울 때는 같이 있어주는 것이 남편의 의무라고 여기기 때문에 말이죠. 이것을 두고 '사연이 있는 창업' 이라고 하는데, 그런 창업을 하게 되면 남편은 무엇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되면 아내에 대한 남편의 도리를 다 하게 되는데,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남편이 되기 위해서 애를 썼다고 하는 자기 의로움은 훼손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식을 잃어서 힘들어하는 아내를 떠나지 않고 늘 보살펴주기 위해서, 그래서 창업을 하게 된다는 말이죠.

아직까지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의 그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는데, 그런데 막상 창업을 하게 되면 그 현장이 어떠할까요? 카페를 하든지 하면, 그 창업의 90퍼센트가 3년 이내에 문을 닫는다는 겁니다. 제가 새벽에 운동을 하면서 간판을 살펴보는데, "이 가게가 얼마나 갈까?" 라고 하면서 말이죠.

3년은 고사하고 1년을 견디기도 힘이 드는데, 우리 동네의 어떤 편의점은 9개월만에 문을 닫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창업의 조건이 무엇인고 하니, "9개가 문을 닫고 하나가 산다" 라는 것인데, 그것도 그 하나가 잘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고, 9개가 무너진 대가라는 것이죠.

그러면 아내와 같이 사연이 있는 창업을 했다고 하면, "우리 이제 아들은 잊고 우리끼리 마음을 맞추어서 잘 살아봅시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2년도 되지 못해서 망했다고 하면, 그러면 여기서 질문이 들어가는데, 그게 "인간은 돈 때문에 삽니까? 자식 때문에 삽니까?" 라는 겁니다.

* 하나님 VS 돈 !!

인간은 돈 때문에 사는데, 그것이 마태복음 6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24절에 보면, 예수님이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하나님의 마지막 라이벌이 무엇이라는 겁니까? 그게 돈이고, 그 돈의 라이벌이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에 말이죠.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러니 "하나님을 섬긴다"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아직 "돈이 다 날아가지 않았다" 라는 것인데, 즉 아직 돈을 다 잃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마지막 라이벌로 재물이 등장한다는 것인데, 이게 어려워서 설명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은데 말이죠.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당신은 이근호에게 세뇌를 당했어?" 라고 한다면, 그 질문을 한 사람은 그 질문의 취지를 자기가 모른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이 땅에서 세뇌를 당했다" 라는 것은 어떤 경우인고 하니, 돈을 빼앗겼을 경우에나 가능하다는 말이죠. 실컷 세뇌를 당했는데 돈을 빼앗기지 않았다고 하면, 그것은 아직 세뇌를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 당신은 이근호에게 세뇌를 당했어?

세뇌의 진정한 목표는 그 사람의 돈을 빼앗는데 있는데,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모든 시간을 다 바쳤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러면 저는 묻는데, "돈은 얼마나 빼앗겼습니까?" 라고 말이죠. 그래서 "돈은 별로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라고 하면, 그것은 세뇌를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ㅋㅋ).

인간에게 있어서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데, 그래서 제 아무리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결혼합시다" 라고 해도, 결정적인 것은 "돈 관리는 누가 할 건데?" 라는 것인데, 그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돈 관리는 서로 따로 합시다" 라고 하면, 그것은 결혼이 아닌 동거생활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그 대상이 하나님이든 누구든 간에, 그 모든 것이 "내 돈은 절대로 빼앗기면 안 된다" 라는 일념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성경에서 이런 점이 어려운데, 하나님께서 "네 아들을 데리고 갈 게" 라고 하시는 것으로 시작해서, 그것이 계속해서 연결이 되어서 나중에 보니까, 아들을 빼앗기는 것은 그만 날아가고, 아들보다 돈이 더 중요하더라는 겁니다. 물론 처음에는 몰랐는데, 아들이 죽을 때도 그것을 몰랐고, 주님이 찾아왔을 때도 몰랐다는 말이죠.

* 나는 돈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

결국 인간이 붙드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돈인데, 즉 "나는 돈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인간이라는 말이죠. 만약에 우리 대구모임의 회비를 10만원으로 올리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대번에 모임이 깨지고 만다는 것이죠. 그렇지요?

교회에서 텃세를 부리는 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그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보다는 더 돈을 많이 투입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를 없애려고 하면 없애라" 라고 한다면,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교회는 다녔지만, 돈을 내는 것에는 선방했다" 라는 의미인데, 돈이 자기 쪽에서 교회로 이동하는 것에 대해서는 말이죠.

그래서 "나에게 돈이 없다" 라는 것은, 자기 존재에 대한 배신인데, 그렇게 되면 자기가 자기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돈도 빼앗기지 않았으면서, "내가 세뇌를 당한 것은 아닌가?" 라고 하면서 미리 방어를 치고 있다는 말이죠. 돈에 대해서 그렇게 철저히 방호벽을 세운다는 것이죠.

* 재물인가? 아들인가?

그러면 여기서 무엇이 어려운고 하니,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라고 했는데, 즉 하나님 맞은 편에 재물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네 아들을 내게 바쳐라" 라고 하시는데, 아들을 요구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제가 다시 묻겠는데, 그 질문이 바로 "당신은 재물입니까? 아들입니까?" 라는 겁니다. 이것이 최종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게 서로 합쳐질 수는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성경에 보면 이 두 가지가 모두 다 나온다는 것이죠. 그렇지요?

* 드디어 한의사에 합격 !!

여기서 제가 힌트를 하나 드리겠는데, 어떤 이란계 미국인이 한국에서 13년을 공부했는데, 그래서 드디어 한의사가 되었다는 겁니다. 자기는 너무나 감격스러운데, 지금까지 고생한 것이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이 천국에는 과연 합격을 했을까요? 한국에서 한의사에 합격했다고 해서 천국에서 봐주는 법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아까 하나님이 "아들을 바쳐라" 라고 해서, 처음 단계, 두 번째 단계, 그렇게 계속해서 갔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왜 자꾸만 주님이 말씀으로 묻고 묻고 해서 찾아오시는고 하니, 우리가 인간으로서 해낼 수 있는 것은 다 끄집어내신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그것은 자기도 모른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모두 다 드러나게 하신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이렇게 종이가 겹쳐져 있다고 하면, 그것을 펼쳐보라는 겁니다. 중첩되어있는 것을 풀면, 그게 줄줄이 풀려져 나온다는 말이죠.

* 나의 행함 !!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나의 행함' 이라는 겁니다. 인간이 어디까지 행할 수 있는지, 즉 육의 행함이란 말이죠. 즉 "나의 행한 것이 어디까지 꽉 차여있는가?" 라는 것인데, 그것을 끝까지 잡아당기면, 그 끝에는 누가 딸려서 나온다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뱀인데, 즉 악마가 딸려 나온다는 겁니다. 악마는 인간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악마 자신을 위해서 우리 인간을 마치 맨홀 뚜껑처럼, 그렇게 덮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악마는 천사이기 때문에 육신이 없다는 겁니다. 육신이 말이죠.

* 천사는 육신이 없기에 !!

요한계시록 마지막인 22장에 보면, 요한이 천사를 보고 절을 하니까, 천사가 그만 말린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천사도 피조물이고 인간도 피조물인데, 인간이 천사보다 월등한 점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에게는 육신이 있어서, 그래서 하나님이 육신이 된 취지를 인간은 보여줄 수 있지만, 천사나 악마는 보여주지를 못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천사보다 인간이 더 위대하다는 겁니다.

(계 22:8)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계 22:9)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그것이 바로 "우리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라는 의미인데, 즉 인간에게는 몸이 있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의 몸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보여주시는 그 스토리, 그런데 몸이 없는 천사는 하나님이 펼치시는 그런 스토리를 보여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인데, 즉 죄인이라는 말이죠. 못난 인간을 통해서, 즉 못난 인간을 의로운 천국백성으로 만드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인간의 몸이라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우리 인간의 몸을 사용하셨는데, 천사는 그런 몸이 없다는 말이죠.

* 자기 행함의 끝을 모르기 때문에, 인간은 불합격 !!

아무튼 그 사람이 고생고생해서 한의사에 합격을 했는데, 그런데 천국합격은 어떻습니까? 13년 동안 공부를 한다고 해서 합격이 됩니까? 만약에 천국에 불합격이라고 하면, 그게 고생을 덜해서 그런 겁니까? 성경공부를 덜해서 불합격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 불합격이고 하니, 자기 몸으로 할 수 있는 자기 행함의 끝을 모르기 때문에 불합격이라는 말이죠. 교회에 나오면 목사가 성경말씀을 이야기하는데, 그러면 듣는 순간 어떻게 됩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자기 몸을 가지고 성경말씀과 일치시키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어떻게 나옵니까?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일치시키려고 하는데, 물론 일치시키는 것은 너무나 건방진 생각이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씀에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는 모습, 그것만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좀 알아주시겠지"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 심청전의 이단성 !!

저는 심청전을 생각할 때마다 의문점이 드는 게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공양미 3백석을 바치고 심청이가 물에 뛰어든다는 겁니다. 물론 그것이 다 사기인데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겠는데, "딸이 물에 투신하는 것과 아버지가 눈을 뜨는 것은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가?" 라는 겁니다.

저에게는 어릴 때부터 그것이 의문점이었는데, 여러분 중에서 누가 답변을 해보시라는 말이죠. (그때 장로님이 답변하기를, "심청이는 자기 몸을 던져서 물에 빠져서 죽는 순간, 자기 아버지는 눈을 뜰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라고 했음.)

13년 동안 고생고생해서 한의사가 되었다고 했는데, 그러면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면 우리 몸을 던져야할까요? 그런가요? 방금 하신 장로님의 답변을 제가 문장으로 적어보겠는데, 그게 바로 정성인데, 즉 "내 정성이 효과를 발휘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심청전인데, 그렇다면 이 심청전이 사람들에게 거부를 당하지 않고 감동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생명이 없는 인간세계에, 그 생명을 대신해서 무엇으로 가득히 차있다는 겁니까? 심청전으로 가득하다는 말이죠.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 이라고, 즉 정신을 바짝 차리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이 땅에서 진실이고, 진리처럼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라는 것은, 이 심청전의 이론에 의하면 무엇을 바치는 겁니까? 자기의 정성을 다하는 것인데, 그러니 이단도 이런 이단이 없다는 겁니다. 그 이단 덕분에 오늘날 교회가 이렇게 부흥이 되었다는 말이죠.

아무리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고 해도, 그것은 지식이고, 우리 몸은 어떻게 반응을 합니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도리는 다 하겠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놓치지 않겠다고 하면서 마지막으로 자기 목숨까지 내놓았는데, 그런데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베드로가 무엇을 빼먹었는고 하니, 베드로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누가복음 22장을 보겠는데, 31절에서 33절입니다.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3)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 악마의 존재를 간과한 베드로 !!

33절에서 베드로가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 앞에 31절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지금 베드로에게는 '나' 라는 존재와 '예수님' 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겁니다. 다른 존재는 없는데, 물론 희미하나마 예수님 뒤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말이죠. 그것이 전부인데, 그러면 무엇을 빼먹었습니까? '악마' 라는 존재, 즉 자기가 악마에게 사로잡혀있다는 사실을 간과해버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주님을 위해서 옥에도 가고 목숨을 바치겠다는 것이 누구의 아이디어라는 겁니까? 그게 심청전인데, 즉 악마의 아이디어라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일은 인간을 배제하고, 직접적으로 인간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마귀를 향한다" 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주님의 말씀이 "마귀야 꼼짝 마라. 내가 간다" 라고 하면서 베드로의 내부로 쳐들어가시는데, 물론 그냥 쳐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완성된 모습으로 간다는 말이죠.

* 성령이 오시면 !!

그러면 말씀의 완성된 모습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라고 하신 것이 바로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로 찾아가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찾아가십니까? 성령이 오시게 되면 십자가를 앞장 세워서, 마치 화살이 꽂히듯이 그렇게 찾아가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너는 입을 다물어. 나는 너와 상대하지 않아. 네가 아무리 기도하고 헌금하고 전도해도, 그런 너와는 상대하지 않아. 내가 너의 내부로 찾아갈 거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물론 그 경로가 우리에게는 매우 아픈데, 왜냐하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부정을 당하니, 아프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 표현할 길이 없어 !!

그래서 성도의 장점은 무엇인고 하니, 이미 십자가의 의미를 일방적으로 알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러면 단점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표현할 길이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말을 잘하던 사람이라도, 주님의 그 작살, 마치 포경선에서 고래를 향해 발사하는 그 무지막지한 작살이 자기 심령에 꽂히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자기가 무슨 말을 해도, 그 뜻이 그 뜻이 아니라는 것을 자기는 안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자기가 기도를 2시간을 했다고 하면, 하지만 그 기도에 동원된 낱말과 단어들이 전혀 쓸데없는 것들이라는 것을 자기는 안다는 겁니다. 그러니 기도의 응답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데, 우리는 주님의 결과물이지, 자기 기도의 응답과 결과물이 자기가 아니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에게로 돌아가는 그 회로가, 중간에 십자가가 개입함으로서 그만 잘려버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인고 하니, 그 회로가 잘렸으니 우리는 장애자가 되는데,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정신병자라는 말이죠. 그러니 "나는 누구에게 세뇌를 당했다" 라고 하는 것은 아직 자기가 멀쩡할 때 할 수 있는 이이기라는 겁니다.

* 범사에 고맙소 !!

그런데 진짜로 주님의 성령이 와서 꽂히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아까 심청전은 정성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정성의 반대말이 무엇인고 하니, 김호중이 불렀던 노래인데, 그것이 바로 '고맙소' 라는 말이죠. 이게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정성' 이라는 것은 자기가 부정을 당하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인데, 그래서 정성은 자기에게서 나오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가 죽은 다음에 나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게 바로 '고맙소' 라는 것인데, 그 가사를 보면, 처음에 "이 나이 먹도록 세상을 잘 모르나 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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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이 먹도록 세상을 잘 모르나 보다
진심을 다해도 나에게 상처를 주네
이 나이 먹도록 사람을 잘 모르나 보다
사람은 보여도 마음은 보이질 않아
이 나이 되어서 그래도 당신을 만나서
고맙소 고맙소 늘 사랑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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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가 자기에게 사기를 치는 인간 !!

물론 그 가사를 쓴 사람은 사기를 당했는지 모르겠는데, 하지만 인간에게는 사기를 당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남들에게 사기를 당하기 이전에 인간은 이미 자기가 자기에게 사기를 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사기를 치고 있으니,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온다는 말이죠.

자기는 멀쩡하고 싶은데,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야 자기 정성이 가치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정성은 자기 행함인데, 즉 자기 헌신과 투쟁과 그 모든 것들이라는 말이죠. 바로 그러한 자기 정성이 효력이 있을 것이라고 여기면서 어디에 나오는고 하니, 교회에 나온다는 것이죠.

그러면 목사의 입장에서는 교인은 고객인데, 그런데 교회든 뭐든 하나님과 재물은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돈이 없이 교회가 됩니까? 목사월급은 제대로 주지 못하더라도, 월세라도 나와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돈이 없으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만 두면 된다는 겁니다.

* 베드로의 처신 !!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다가 자기 뜻과는 달리 예수님의 십자가 근처에 가게 되는데, 그러면 여기에 대한 베드로의 처신은 무엇이었습니까? "갈 사람은 가고 살 사람은 살면 된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그 살 사람은 누구입니까? 베드로에게는 그게 자기 자신이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제가 오늘 강의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에게는 생명이 없는데, 그래서 생명이 있는 척을 하면서 살아가도록 그 배후에서 악마가 인간을 속여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게 진실이라고 여겼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자기답다고 여기면서 자기가 자기를 속여왔다는 말이죠.

* 죄를 모르는 인간 !!

그것이 죄인데, 그런데 인간은 이것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을 가지고 쳐들어올 때는 어떻게 하십니까? 강의처음에 출애굽기 33장을 보았는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고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동네는 생명이 없고, 하늘동네에만 생명이 있다는 겁니다.

(출 33:20)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니 베드로를 비롯해서 다른 제자들이 모두 다 도망을 쳤는데, 그래서 이제는 예수님과 관계가 없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래도 괜찮은데, 왜냐하면 자기만 멀쩡하면 된다는 겁니다. 자기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지 않고 아직 살아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고기를 잡고 했는데, 자기에 손해가 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죠. 잠시 예수님에게 세뇌를 당해서 3년의 청춘을 날리기는 했지만, 과거에는 군대생활도 3년이었는데, 제대를 하면 얼마든지 만회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열심히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았다는 말이죠.

* 예수님의 찾아오심 !!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누가 찾아오셨습니까? 살아있는 주님이 찾아오셨습니까? 죽은 주님은 찾아오셨습니까? 이미 죽으신 주님이 찾아오셨다는 겁니다. 이게 예수님의 찾아오심인데, 그리고 그게 오늘날의 성도라는 말이죠. 살아있으면 찾아오지 않는데, 이미 죽었기 때문에 찾아오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편에서 볼 때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그것을 마귀가 극구 거부하고 있다는 말이죠.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세뇌를 당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베드로가 돈을 얼마나 날렸겠습니까? 물론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돈을 좀 날리기는 했지 싶은데,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자기의 건강한 몸을 가지고 그 돈을 다시 벌어서 보충하면 된다는 겁니다.

* 재물인가? 아들인가?

제가 아까 질문을 던졌는데, 그 답변이 나오지 않았다는 말이죠. 최종적으로 "재물인가? 아들인가?" 라는 것인데, 성경은 둘 다를 언급하고 있는데, 어느 쪽이 정답이냐는 겁니다. 정답은 아들인데, 왜냐하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라는 말씀, 그것이 산상설교에 나오는데, 이 산상설교는 주님이 주신 추가적인 율법이라는 말이죠.

율법의 뜻은 "너는 죄인이다" 라는 것인데, 그것으로 마감이 된다는 겁니다.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으로 마감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너는 이래도 저래도 희망이 없어. 너는 끝났어. 너는 죽음의 세계에서 출생했어" 라는 것인데, 그게 율법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끝나고 난 다음에, 그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돈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가난하다고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부자청년에게 예수님께서 "너의 모든 것을 다 팔고 나를 따르라" 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구원을 받는 방법은 굉장히 쉽다는 겁니다. 가진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예수님을 따르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자기가 가진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것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없는 일입니까? 할 수 있는 일인데, 실제로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그는 아버지가 대지주였다는 말이죠. 물론 땅을 다 팔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산상설교를 읽고는 충격을 받아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자기 재산을 팔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자들이 지금도 많이 있는데, 수도원과 수녀원에 가면 수두룩하다는 말이죠. 대천득 성공회 신부가 세운 강원도에 있는 예수원도 그러하다는 겁니다. 그 근처에 자기 무덤도 있지 싶은데, 즉 "예수원에 나의 모든 것을 다 던지겠습니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심청전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인간이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그 배후에는 무엇이 있다는 겁니까? 바로 악마가 있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따르면서 자기 목숨을 바치겠다고 했는데, 그것과 다를 전혀 바가 없다는 말이죠.

* 신이시여, 나를 신앙인으로 만들어주세요 !!

그렇게 우리 내부에 옹아리를 틀고 있는 악마, 그 악마의 외침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신이시여, 나를 신앙인으로 만들어주세요" 라는 겁니다. 말이 좋아 신앙인이지, 절대적인 신으로 만들어들라는 것인데, 하지만 이게 됩니까? 결코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아무리 노력해도 신앙이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자기의 모든 재산을 다 팔아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한국에 와서 13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결과가 나왔는데, 한의사에 합격을 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대한한의사협회에 가서 불합격을 시켜달라고 요청할 수 있습니까?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한의사가 복음을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복음을 알고 나서 병원에 취직을 하려고 하니까, "외국 사람은 안 됩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게 KBS의 인간극장에 나왔던 내용이라서, 제가 다시 구성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말이죠. 만약 그 사람이 복음을 알았다고 하면, 그러면 "그까짓 것 포기하겠습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그렇게 포기한 것이 누구 덕분입니까? 자기의 결심 때문인가요? 아니면 자기에게 꽂혀있는 성령 때문인가요? 성령의 덕분이라는 말이죠.

물론 이게 자기 일이면 긴장이 안 될 수는 없는데, 아무튼 "신이시여, 나를 신앙인으로 만들어주세요" 라고 하는 것, 이것을 이시야서 6장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드디어 오늘 강의에서 결론부분에 도달했는데, 여기서 1절에서 7절을 보겠습니다.

(사 6: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사 6: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사 6: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사 6:4)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6)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사 6: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 천사 VS 이사야 !!

이사야가 어떤 환경을 마주하게 되는데, 천사가 날아다닌다는 겁니다. 그런데 천사는 이사야가 아닌 하나님을 상대하는데, 여기 2절에 보면 그 모습이 어떠한고 하니, 날개 여섯을 가지고 몸을 가린다는 말이죠. 천사의 그 깨끗한 몸도 감히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날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또 둘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둘로는 하늘을 날며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모습을 본 이사야는 그동안 무엇을 하면서 살았느냐는 것인데, 천사와 비교를 해보자는 말이죠. 천사의 몸도 감당치 못한다고 하면, 그러면 이사야의 몸은 어떠해야 하느냐는 것이죠. 답변이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데, 즉 하나님을 만날 때 이사야의 몸은 과연 어떠해야 하느냐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점점 더 십자가 사건에 접근하고 있다는 말이죠.

여기서 이사야서 53장 5절과 6절을 보겠습니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

여기 5절을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찔림은 예수님의 찔림, 즉 십자가 사건인데, 그 사건의 원인을 무엇을 봅니까? 우리의 허물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의미장애자로서, 즉 우리는 "나는 허물이 있어야 한다" 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허물로서 들통이 났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가 사는 세상에는 생명이 없다는 것이 드러난 이상, 그러면 그렇게 생명 없음을 드러나게 하는 십자가 사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한의사 면허증과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죠. 진짜 자기 모습이 어떠한지를 들통냄에 있어서는 13년 공부한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교회에 13년 다닌 것도, 열심히 성경공부를 한 것도 전혀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

진짜로 자기가 허물 덩어리라는 것을 아는 경우는, 그것을 바로 십자가를 앞장세운 성령의 찾아오심, 그것뿐이라는 겁니다. 그럴 때, 여기 6절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라고 하는데, 여기 '우리' 라는 것에는 이사야도 물론 포함이 되는데, 우리는 다 양과 같았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양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각기 제 길로 갔거늘" 라고 하는데, 즉 개인주의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챙긴다는 말이죠. 심청이가 온 마을의 소경들을 다 살리기 위해서 물에 빠진 것이 아닌데, 그렇지요? 딱 한 사람만을 지목했는데, 즉 자기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몸을 던졌다는 겁니다. 자기 아버지는 자기와 혈육관계라는 말이죠.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버렸는데, 반면에 심청이는 공양미 300석을 바쳐서, 즉 돈은 버리되 혈육과의 관계는 계속해서 유지하겠다는 겁니다. 오늘은 심청전이 없었다면 강의가 진행되지 못할 뻔했는데 말이죠(ㅋㅋ). 바로 이 심청이의 본성이 오늘날 우리에게 내재되어있는,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는, 우리의 본성 그대로라는 겁니다. 또한 마귀의 본성 그대로라는 말이죠.

* 심청이의 마음이 곧 우리의 마음이고, 악마의 마음 !!

그렇다면 그 마귀를 빼낼까요? 그 마귀가 없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래야 신앙인이 되는 겁니까? 우리는 기다리면, 십자가의 그 뾰족한 화살이 우리에게 날아오면서, 우리가 살고 있던 이 삶의 환경이, 돈이 없이는 절대로 살아갈 수가 없다고 하는 환경으로 더욱 더 노골화가 되어서 우리에게 찾아온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나의 노력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고, 성과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고, 나는 나를 지키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고" 라고 하는 것, 물론 평소에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 세상의 환경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피신을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도망을 칠 때 보따리 속에 제일 먼저 담는 것이 자기 자존심과 자기 의인데, 자기 목숨, 자기 가족의 목숨, 그런 것들이라는 겁니다. 즉 "우리식구만 살고 보자" 라는 것인데, 자기 자신이 마지막 때 자기를 살리는 벙커역할을 한다는 말이죠. 설령 핵폭탄이 터져도 죽지 않을 자기만을 위한 벙커를 챙기는데, 그것을 여기 이사야서 53장에서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라고 한다는 겁니다.

* 나는 신이다 !!

이제 이것만 하고 마치도록 하겠는데, 여러분이 맞추어 보시라는 말이죠. "나는 ( )다" 라고 한다면, 이 ( ) 속에 과연 무엇이 들어가야 하겠습니까? 한 글자인데, 즉 "나는 신이다" 라는 겁니다. 혹은 "나는 악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바로 이것이 들통나는 자가 누구인고 하니, 베드로라는 말이죠. 주님께서는 이것을 가지고 야단치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우리와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하시는데, 왜 이런 질문을 하십니까? 우리 인간은 평소에 자기 자신만을, 자기 가족만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 주님이 아십니다 !!

그래서 베드로가 뭐라고 대답을 합니까? "주님이 아십니다" 라고 하는데, 즉 "주님께서는 우리의 이런 사정을, 즉 악마가 우리 속에 있다는 것을 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셨습니까?" 라는 것인데, 그게 바로 베드로의 답변이라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이제 너는 너의 방식대로는 죽지 않고, 십자가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방식으로, 즉 십자가의 남은 고난에 너를 집어넣는 식으로, 그러한 십자가의 증인으로 내가 너를 만들겠다. 그리고 너만 그런 것이 아니고, 너의 말을 듣는 양들도 그러해야한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목회인데, 그러니 목회는 목회자가 하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목회자를 통해서 하신다는 겁니다. 즉 "내 사랑을 전하라. 복음을 전하라" 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베드로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본래 모습이 들통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자기 행함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 지식이 아니고,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이 이미 찾아오셨기에, 이미 십자가 속에 있기에, 그래서 이미 구원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4,3,28 오후 2시에 마침.

나 자신이 아닌, 주님에게만 세뇌를 당하게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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