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지옥하나님-자아의 뿌리

아빠와 함께 2024. 6. 4. 14:50

[24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46 - 자아의 뿌리

24,05,06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나의 뿌리는 없다 !!

오늘은 교재 203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거기 박스 안에 성경말씀이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에서 31절입니다.

(고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 1: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과 대비해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나' 라는 것은 없고 육체만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나' 라는 것을 인정해주지 않는데, 그 '나' 라는 것은 자기가 만들었다는 것이죠. 이것을 달리 말하면 "나의 뿌리는 없다" 라고 할 수 있는데, 더 자세하게 말하면 "나의 뿌리는 찾을 수 없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 라는 것은 그냥 덩거라니 남아있을 뿐인데, 그 뿌리는 없다는 말이죠. 우리는 육체인데, 그 육체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그 뿌리는 하나님인데, 즉 "육체의 뿌리는 있는데, 나의 뿌리는 없다" 라는 겁니다. 이 '나' 라는 것이 이상한 곳에서 나왔다는 말이죠. 그래서 "인간은 육체인데, 그 육체를 나가 가리고 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현재 인간들의 모습인데, 그 썩어가는 육체를 기어이 고집스럽게 자기가 가리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왜 그런 짓을 할까요? 도대체 왜 근원도 없는 '나' 라는 것을 만들어서, 육체를 가리고 있느냐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죠.

* 피도 눈물도 없이 !!

보통 드라마를 보면, 부잣집 아들과 가난한 집안의 딸이 사귀게 되면, 그 아들의 엄마가 여자를 부르는데, 물론 금테 안경을 쓰고 흰 봉투를 하나 준비해서 다방에서 만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첫 마디가 무엇인고 하니, "이 근본도 없는 것이" 라고 하면서 시작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봉투를 내미는데, 그 봉투를 먹고 떨어지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옛날 드라마이고, 요즘은 분위기가 좀 다르다는 말이죠.

남자의 엄마가 그렇게 나올 줄을 알고, 여자가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서 자기의 불룩한 아랫배를 보여준다는 겁니다. 즉 "내가 지금 임신을 했는데, 그 정도로 되겠어?"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장면이 여자의 자취방으로 바뀌면서 아주 똑똑한 남자의 누나가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임신한 그 여자의 옷을 강제로 벗기면, 복대가 나온다는 말이죠(ㅋㅋ).

다시 말해서, 가짜 임신이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사람들이 왜 이런 짓을 할까요?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육체와 육체의 싸움입니까? 자기와 자기의 싸움입니까?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겁니다. '나' 라는 것은 뿌리가 없는데, 즉 근본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고 하니, 그 없는 '나'를 건드려서 말씀으로 제거하시겠다는 것이죠. 그렇게 말씀으로 제거하면 어떻게 됩니까? 육체를 자기로 덮었다고 했는데, 그러한 '나'를 떼어내면 하나님과 관련된 육체만 덩거러니 남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이유가 그것이란 말이죠.

자기는 없고 썩어질 육체만 있는데, 그런데 그 썩어질 육체를 그동안 '나' 라는 것을 동원해서 위장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말씀은 폭격기와도 같아서, 그 있지도 않은 '나'를 육체로부터 떼어놓게 되는데,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그런 작업을 하신다는 말이죠.

다시 드라마로 돌아와서, 그 여자가 임신도 하지 않았으면서 임신한 것처럼 위장을 하기 위해서 복대를 동원했는데, 그게 바로 오늘날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 자기를 위장하는 무기가 바로 복대인데, 차마 복대가 그런 용도로 쓰일 줄은 몰랐다는 말이죠.

그러자 똑똑한 그 남자의 누나가 나타나서 그 복대를 벗겨내면서 "너는 육체 뿐이야" 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남자의 엄마는 그 여자에게 흰 봉투는 왜 줄까요? 그것도 카페가 아닌 다방에서 말이죠. 그것은 바로 "근본이 없는 너는 근본이 있는 우리 집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라는 것인데, 안 된다는 겁니다.

지금 이게 드라마의 내용인데, 좀 과장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싶은데 말이죠. 그러면 과장이 되지 않게 이야기를 해보겠는데, 마산에 롯데 백화점이 있는데, 그게 다음 달로 폐업을 한다는 겁니다. 과거에는 대우 백화점이었는데, 마산에서는 제일 유명했다는 말이죠. 그렇게 문을 닫으면, 거기에 입주해있던 업체의 점주들, 그 500명이 졸지에 실직자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 폐업을 앞둔 마산의 롯데 백화점 이야기 !!

이게 마산의 롯데 백화점 이야기인데, 지금은 창원에 흡수가 되어서 빛을 잃었지만, 그래도 과거에는 마산이 잘 나갔다는 말이죠. 창원은 그냥 시골이고 농촌이었다는 겁니다. 일제시대 때부터 이 마산이 유명했는데, 아무튼 이 마산의 롯데 백화점이 문을 닫고 500명이 실직을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매년 400억의 적자가 나서 폐업을 했는데, 그러면 그게 왜 뉴스거리가 되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500개의 입점 가게가 문을 닫으면, 실직자의 수는 거의 1,000명에 이른다는 말이죠. 그래서 일을 못하게 되면 일을 하지 않으면 되는데, 그런데 왜 일을 해야하느냐는 겁니다.

* 일상성(日常性) !!

일을 하지 않게 되면 어떤 가치가 상실이 됩니까? 육체가 날아갑니까? 자기가 날아갑니까? '나' 라는 가치가 그만 하락하고 만다는 것이죠. 이것을 두고 '일상성(日常性)' 이라고 하는데, 즉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생활 그 자체라는 겁니다. 자기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일거리를 찾아서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일상성인데, 그런데 일을 하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상세계에 그 사람은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는데, 그런 상태를 실직자라고 한다는 겁니다.

동창회에 가면 제일 먼저 하는 질문이 "요즘 너 뭐하노?" 라는 것인데, 그러면 "나는 논다" 라고 하게 되는데, 있지도 않은 '나'가 나왔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쪽에서 "우리 이제 친구하지 말자" 라고 하는데, 그러면서 헤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있지도 않은 '나'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일상성조차도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 속에 너무나 깊이 들어왔기 때문인데, 이 일상과 너무나 친근해서 그렇다는 말이죠. 이 친근함의 반대말이 낯섬인데, 그러니 친근하다는 것은 낯설지가 않다는 것인데,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는 일상적 세계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나와 나의 세계' 라는 말이죠.

* 나를 닮은 나의 이야기, 따라쟁이 !!

지금까지는 어려운 것이 없는데, '나'와 '나'의 세계, 그것이 바로 일상인데, 육체가 아니라는 겁니다. 육체를 '나' 라는 것으로 가리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을 영어로 표현하면, "I and, I and, I and, I and …",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일상적인 세상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성경에서는 '이 세대'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러한 "나, 그리고" 라는 세계, 이것이 바로 '에코' 라는 겁니다. 메아리인데, 동굴 속에서 왕왕거리면서 반복해서 울려나는 것은, 바로 "나를 닮은 나의 이야기" 라는 말이죠. 이 에코의 특징은 반복에 있는데, 네 글자로 하면 '따라쟁이'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남자는 운전석에 앉고 여자는 그 옆자리에 앉아서 드라이브를 하는데, 남자가 "밥 먹었어?" 라고 하니, 여자가 "밥 먹었어?" 라고 하고, 또 남자가 "자꾸만 따라할래?" 라고 하니, 여자가 "자꾸만 따라할래?" 라고 한다는 겁니다. 남자 "맞을래?" 라고 하니, 여자도 "맞을래?" 라고 하는데, 그러다가 진짜로 맞는다는 것이죠(ㅋㅋ).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일상세계인데, 즉 껍질의 세계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냥 따라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의 뿌리까지 파고 들어갈 재주도 없고, 파고 들어갈 생각도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게 전혀 낯설지 않고 그야말로 친근하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의대가 2,000명이 증원이 되어서 강남학원 특수반에 들어가서 누군가가 합격이 되었다고 하는 소식이 들리면, 그러면 자기도 "나도 한 번 해볼까?" 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서 따라쟁이라는 겁니다. 자기 존재가 무엇인지, 그런 뿌리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는다는 말이죠.

* 가을밤에 돌아다니는 반딧불 !!

남들이 하면 그것을 흉내내고 따라하는 연쇄적인 사슬의 관계망, 그것을 예수님은 '이 세대'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게 곧 에코인데, 이것은 석회암 동굴에 가면 실감이 난다는 겁니다. 동굴에서 말을 하면, 그 내용은 어디에서 내뱉어진 것입니까? 동굴 속에 누가 있었습니까? 자기가 동굴에 들어가서 말을 했는데, 그러니 자기가 쏟아낸 말을 자기가 되돌려서 듣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따라쟁이의 세상에서는, "나를 닮은 나 같은 인간", 다른 말로 하면, 전혀 뿌리를 캐치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유령처럼 돌아다니는, 즉 "나도 유령이지만 너도 유령이다" 라는 것인데, 뿌리도 근본도 없이 그냥 돌아다닌다는 겁니다. 마치 가을밤에 돌아다니는 반딧불과도 같은, 없는 것 같은데 가만히 보면 어둠 속에서 불빛이 반짝거리는데, 그러면서 자기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캄캄한 이 세상에서 나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 라고 하는 티를 내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자동차 트렁크에는 골프 가방을 싣고 말이죠. 그런데 모닝이나 마티즈에 실으면 폼이 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옆집에서 상추를 주면 자기는 돼지고기를 준비하는데, 상추 값보다 돼지고기 값이 더 많이 든다는 말이죠.

남들이 부르는 에코, 그렇게 모두가 '나'를 찾고 '나'를 노래부르면서 살아가는데, 그런 사람들과 계속해서 만나고 관계가 유지되려고 하면, 자기는 그런 다른 사람들을 따라해야 하는데, 즉 따라쟁이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나' 라는 존재의 뿌리는 없다는 말이죠.

* 육신은 유령이 아니지만, 나는 유령 !!

이렇게 뿌리가 없는 것을 유령이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유령과 같은 존재라는 겁니다. 육신은 유령이 아닌데, 그런데 '나' 라는 것은 귀신이라는 겁니다. 그 차이점을 우리가 알아야 하는데, 육체의 뿌리는 하나님인데, 그런데 그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나'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까 고린도전서 1장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29절에서 "이는 아무 육체라도" 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나'가 아니고 '육체' 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 '나'를 인정해준 적이 없다는 말이죠. 육체의 뿌리는 분명한데,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나'의 뿌리는 없는데, 그냥 남들을 따라한 것인데, 따라쟁이라는 말이죠.

이것을 두고 학자들은 "나의 뿌리는 타인이다" 라고 했는데, 즉 남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타인의 뿌리는 누구입니까? 바로 '나' 라는 말이죠. 이것은 "파출소는 어디에 있습니까? - 미장원 옆에 있습니다" 라고 해서, 그래서 "미장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 파출소 옆에 있습니다" 라고 하는 것과도 똑같다는 겁니다.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고, 그것은 전혀 해답도 아니라는 말이죠. 그야말로 허상인, 즉 유령인 인간들끼리 똑같이 하면서, 서로 "의미는 무엇일까?" 라고 하고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인생은 무엇인가? 이 세상은 무엇인가?" 라고 해도,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하나님은 누구인가? 예수님은 누구인가?" 라고 해도, 자기 뿌리도 모르면서 아무리 하나님과 예수님을 거론해도 역시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도 모르면서, 즉 자기를 부정하지 못하니까 그렇다는 말이죠. 인간은 자기를 부정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자기 뿌리는 타인이고 그 타인은 허상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화살표를 '↔' 라고 표시할 수밖에 없는데, 즉 상호교환이란 것이죠.

* 익세스(excess) !!

예를 들어서, "2=2" 라고 하면 분명히 맞는 말인데, 그런데 "2=2+0" 이라고 할 때는, 그것은 요술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둘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뒤에 0이 붙어있다는 말이죠. 이것을 '익세스(excess)' 라고 하는데, 미지의 여분의 것으로서, 뭔가 덧붙어있는데 나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2'와 '2+0'은 같지 않는데, 2는 결핍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숫자에서 1, 2, 3, 4는 카운터인데, 즉 헤아린다는 겁니다. 숫자가 있다고 하는 것은, 숫자는 그냥 자기가 알아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일상성에서 누군가가 헤아리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에, 그때 나타난다는 말이죠.

그래서 숫자는 언제 생겼는고 하니까, 장사할 때 생겨났다는 겁니다. 처음에 인간들은 농촌이 아니고 도시부터 시작했다는 말이죠. 도시는 이쪽과 저쪽이 물물교환을 한다는 겁니다. 옛날에는 화폐가 없었고 소금을 사용했다는 것이죠.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중기까지 종로시장에서 면포를 잘라서 교환했다는 겁니다. 물론 상평통보가 있기는 했지만, 제대로 활용되지 않았다는 말이죠.

기록에 보면, "이것은 면포 몇 자용이다" 라고 되어있는데, 돈은 현물이 아니라서 사람들이 별로 원하지 않았다는 말이죠. 일제시대에 들어와서 화폐가 제대로 통용이 되고, 세금도 화폐로 받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지금 제가 일본 때문에 한국이 잘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물론 근대화를 시키는데 영향을 준 것은 맞지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말이죠.

* 화폐에 예속된 인간 !!

아무튼 인간 대 인간으로 두게 되면, 그러면 원시사회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근대사회가 되려고 하면, 익세스, 즉 여분의 추가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게 바로 국가이고 국가는 돈을 찍어내는 힘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이 국가에 예속이 된다는 것은, 인간은 화폐에 예속이 된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러면 이제는 "나는 타인과 통용, 혹은 교환된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것은 타인의 재산, 타인의 재물과 교환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나의 것이 나의 것을 만들었다" 라고 하던 것이, 나중에는 "나의 것이 나를 만들었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여기서 굳이 다방 이야기를 다시 하지 않아도 되지 싶은데, 그래도 다시 해보면, "근본도 없는 네가 재벌인 우리 집의 며느리가 될 수 있겠어?" 라고 한다는 것은, 재벌 집이란 것은 "너는 없지만 나는 있는 것이 많다" 라는 것인데, 그렇지요? 그러니 이것은 "근본도 없는 너는 돈이 없고, 우리는 돈이 있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가진 것이 나가 된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어떤 사람이 자기가 가진 것이 없다고 하면, 그 사람의 마지막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살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가 형성되지 않으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는 겁니다.

* '나'에게서 '육체'로, '자아제거 방법' !!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셔서, 유령과 같은 이 '나' 라는 것을 육체로 돌리겠느냐는 말이죠. 무엇을 빼앗으면 될까요? 그것은 '나'를 빼앗아 가면 된다는 겁니다. 바로 그 '나'를 빼앗는 방법 중의 하나가 '나의 것' 이라는 것인데, 그래서 방금 돈 이야기까지 했다는 말이죠.

그렇게 돈이 나오면, 그 다음에는 "돈 + 자긍심, 돈 + 자부심",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추가적으로 셀프, 즉 스스로 자기가 서는 것, 그것을 '자존감'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비록 돈은 없지만 자존감으로 버티는 것, 그게 오늘날 2030세대의 특징이라는 것이죠. 그게 자기 만족에 빠지는 것인데, 그것을 '나르시스' 라고 한다는 겁니다.

* 나르시스와 에코 이야기 !!

옛날에 '나르시스' 라는 남자가 있었는데, 여자들이 자꾸 자기의 미모에 빠진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여자들이 차고 넘치니 자기는 그만 여자에게 관심이 없어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자기가 잘생겼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하게 됩니까? 연못에 있는 물을 통해서 자기의 모습을 쳐보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자 그만 자기가 자기에게 반하고 말았다는 겁니다.

이게 신화인데, 그러니까 2,500년 이전의 이야기라는 말이죠. 오늘날 청소년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라는 것인데, 다들 백설공주의 계모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그 계모가 자기의 이상형이라는 겁니다. 타인을 통해서 유령과도 같은 자기를 다듬겠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나르시즘에 누가 반했는고 하니, 그만 에코가 반하고 말았다는 겁니다. 에코는 요정인데, 이 요정이 자꾸만 신들의 사생활을 떠들면서 이야기를 하니, 그만 헤라 여신이 화가 나서 그 요정에게 벌을 내렸는데, 그래서 이 에코는 더 이상 자기 말은 하지 못하고, 남의 말만 따라서 하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에코, 즉 메아리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누가 이야기를 해주면, 즉 타인이 자기에게 말을 걸어주면, 그것을 흉내내면서 자기의 존재성을 유지하는 것이 에코라는 말이죠. 그 에코가 나르시스를 사랑했는데, 그 나르시는 에코에게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결국 나르시스는 자기의 아름다움에 그만 함몰되고 말았는데, 자기 속에 자기가 들어가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래서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는, 거기에 빠져서 죽었다는 겁니다. 즉 "내가 만든 것이 있다면 나를 잃어버려도 좋다" 라는 것인데, 자기가 만든 것이 있다면 자기를 상실해도 괜찮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으니 말이죠.

이 나르시스와 에코 이야기를 통해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까, 이 일상성의 세계, 그 세계는 왕왕거리는 세계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느 공간이 가장 잘 왕왕거릴까요? 그것을 아까 동굴이라고 했는데, 이 동굴의 특징은 막혀있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리고 동그라미도 역시 막혀있다는 말이죠.

최근에 접시가 회전하는 스시 집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보면 계란처럼 생긴 접시가 돌아다닌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만든 이 세상이 바로 계란형인데, 그게 창세기 1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여기서 1절에서 5절을 보겠습니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 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 1: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창 1: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지금 "자아를 어떻게 제거하는가?" 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이 자아는 뿌리가 없는데, 그야말로 허황된 것이라는 겁니다. 있다면 육신이 있는 것이지 자아는 없다는 말이죠. 자아는 이 일상성 세계에 농락을 당했기 때문에, 쉽게 말해서 홀렸다는 겁니다. 그러니 육체로 가야지 자아로 유지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나는 이 정도야" 라고 하는 것, 이 자아의 특징은 스스로 자기를 높이고 과시를 해야 유지가 된다는 말이죠.

여기 창세기 1장 2절에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신이 어디에 있습니까? 수면 위에, 즉 물 위에 있다는 겁니다. 그 물에서 뭍이 나오는데, 즉 땅이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물이 위와 아래로 분리가 되면서, 그 안에서 감추어진 뭍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물은 흑암 안에 있다는 말이죠. 즉 어두움 안에 물이 있고, 그 물이 위의 물과 아래 물로 갈라지면서 뭍이 등장하고, 위의 것을 하늘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창세기 1장 6절에서 7절을 보겠습니다.

(창 1:6)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창 1: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창 1: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창 1:9)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창 1: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러니까 천지창조가 되려면, 즉 뿌리를 알려고 하면, 어두움으로 가야한다는 말이죠. 물론 어두움이 창조하는 것은 아닌데, 그리고 물이 창조하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땅도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 아닌데, 인간의 육체도 인간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거기에 살아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신인데, 그게 시편 104편에 나온다는 겁니다. 여기에 공중의 새들이 나오고 레바논의 백향목이 나오고, 젊은 사자가 나오고, 또한 사람이 나온다는 말이죠. 바다와 거기에 있는 생물들, 그리고 배도 나온다는 겁니다. 동물과 식물을 비롯해서 주께서 지으신 것들아 다 나온다는 것이죠.

* 주의 영이 살아 숨쉬는 주의 영 !!

이렇게 피조물들이 살아서 숨쉰다는 것은, 실제로는 그들 속에 누가 살아 숨쉰다는 겁니까? 주의 영, 즉 주의 신이 살아 숨쉰다는 겁니다. 따라서 주의 영이 없다고 하면 그 모든 것들이 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죠. 그게 29절과 30절에 나온다는 겁니다.

(시 104:29)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시 104:30)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모든 육체는 뿌리가 있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나는 뿌리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하는 것은, "뿌리가 없는 나가 어디서 나왔는가?" 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기에 집중되고 있다는 말이죠.

그것을 하기 이전에 고린도전서 1장 27절에서 29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고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 나의 뿌리는?

여기에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라고 하는데, 미련한 것으로 출발을 한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라고 하는데, 약한 것으로 출발을 한다는 말이죠. 그 다음 2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지혜가 있다고 하는 것, 그리고 강하다고 하는 것의 뿌리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미련한 것이고, 약한 것이고, 천한 것이고, 멸시받는 것인데, 그것이 소위 "나는 괜찮은 존재다" 라는 것에 숨어있는 뿌리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미련한 것이 되고 약한 것이 되고 천한 것이 되고 멸시받는 것이 되면 되는데, 그런데 이것들이 어떻다는 겁니까? 미련하면서도 지혜롭다고 우기고, 약하면서도 강하다고 우긴다는 겁니다. 천하고 멸시를 받으면서도 존귀하다고 우기고 말이죠.

*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나와 너의 뿌리 !!

하지만 그렇게 되면 무엇이 가려지는고 하니,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다 가려진다는 겁니다. 자랑할 것은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는데, 그런데 그리스도를 방해하고 박해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나와 너의 뿌리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인간의 자아를 만들어내었고, 인간의 자존심과 자긍심을 만들어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악마는 숨어있고, 반면에 나타나는 것은 잘난 척을 하는, 강한 척을 하고 지혜로운 척을 하는, 그러면서 "나는 남들에게 멸시를 받으면 안 되는 존재다" 라고 하면서 우기는 인간들의 일상성, 그게 바로 "나와 및 타인들" 인데, 그들이 만든 에코의 세계라는 말이죠. 즉 '울림' 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아시고 막혀있는 세계로 확정을 지어버렸다는 말이죠. "너희들이 백날 까불어도 동굴 속에 있다" 라는 것인데, 즉 인간을 계란 속에 집어넣어 놓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은 동굴 속, 계란 속에 갇혀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일상성의 인간들의 삶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타인의 허물을 계속해서 깨물고 깨물면서 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남들의 약점을 캐내서 물어야, MBC를 비롯한 각종 방송국들과 신문사들이 숨을 쉬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죠.

연예인들이 모두 잘 살면 연예인 전체가 다 죽는데, 그러니 선우은숙이 이혼을 해주어야 연예가가 확 살고, 윤석열이 술을 마셔주어야, 그리고 이재명이 버텨주어야 정치가가 산다는 겁니다. 그러니 꼬리에 꼬리를 무는(and, and, …), 계속해서 메아리라는 겁니다. 남의 약점을 캐내야 자기가 사는데, 참으로 더러운 세상, 그것이 바로 일상성의 이 세상이라는 말이죠.

* 해양생물연구소 !!

예를 들어서, 해양생물연구소라고 있는데, 이곳은 해조류와 같은 바다식물과 바다동물의 다양성을 연구하는 곳인데, 이런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무엇만 생각할까요? 그 어디를 가도 "김을, 다시마를 대량생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품질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어떻게 수출이 잘 되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그런 것을 어부나 양식업자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전문적으로 연구해주는 연구원들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야 양식업자들이 살고, 또한 연구소도 계속해서 유지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은 따분하기가 짝이 없는데, 그렇게 따분하고 재미가 없으면, 이 세상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이 끊어지고 만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남들이 보기에 있으나마나한 기관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연구원들과 관련 공무원들이 통영에 다같이 단합대회를 갔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만 돌아오는 길이 어떤 공무원이 연구원 한 사람을 성폭행을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뉴스에 나오게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많은 사람들이 비로소 해양생물연구소가 있고 연구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나' 라는 것이 벗겨지고 '육체'의 수준으로 내려가게 되면, 평면의 시대에서 동굴로 변한다는 겁니다. 즉 입체화가 된다는 말이죠. 매일같이 김만 연구하고 다시마만 연구하는 사람들에게서 정말로 엉뚱하기 짝이 없는 사태가 일어났을 때, 도대체 자기가 알고 있던 지식과 인간 육체의 욕정이 무슨 관련성이 있었느냐는 겁니다. 없었는데, 그러니 인간이 아는 자식은 허깨비였다는 말이죠. 감추는 것이고 속이는 것이었다는 것이죠.

그래도 연구소의 연구원이면 그래도 대부분이 석사 이상인데, 박사들도 있고 말이죠. 그래서 사회에서는 착실하다고 인정을 해준다는 겁니다. 그것이 그들의 '나'를 형성한 것인데, 그런데 그만 여자 연구원이 성폭행을 당하고 나니, 그 연구원은 죽고 싶은 생각이 든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 '나' 라는 것이 일상세계에서 부러워하는, 즉 똑똑하고 공부를 많이 한 '나' 라는 겁니다. 그리고 월급이 따박따박 나오는 안정된 직장을 가졌다는 말이죠. 그런 직장이 '나'와 일치가 되는데, 즉 "나의 가진 것, 나의 위상과 명예가 나가 되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괴물에 의해서 괜찮은 '나'가 그만 육체로 바뀌었다는 말이죠. 갑자기 천한 것이 되고 미련한 것이 되고 약한 것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 사회에서는 부끄러운 일로 본다는 말이죠. 바로 그것을 여기 고린도전서 1장에서 지적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동안 그 여자에게 있었던 에코, 그 메아리가 다 철거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 I am dead !!

이왕 어려운 것 계속해서 어렵게 가겠는데, "I am dead" 라고 한다면, 즉 "나는 죽었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이상하지 않느냐는 말이죠. 왜냐하면 죽었다고 말하는 그 'I' 라는 것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죽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는 것이죠.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바로 3장 1절에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한다는 말이죠.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기서 사도바울은 무엇을 끄집어내는고 하니, "죽은 나를 긍정하게 만든 수상한 존재가 있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지금까지 자기를 꼬드겨왔다는 겁니다. 그게 사도가 되기 이전의 자기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바로 그런 꼬드김을 차단하는 것이 곧 십자가 사건이라는 겁니다.

우리에게 주님께서 육체를 빌려주셨는데, 주님이 사시는 육체를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이 빌려주지 못하게 차단시킨 존재가 있는데, 그게 바로 악마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영적 전쟁에서 '나' 라는 것은 빠져야 하는데, 육체만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죠. 즉 예수님과 악마의 대결이라는 겁니다.

* 아브라함과 이삭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보고 아들을 바치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바쳤습니까? 바치지 않았습니까? 분명히 바쳤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아브라함이 자기에게는 그게 '나'가 되는데, 그런데 재물이 되어서 따라가는 이삭이 있다는 겁니다. 물론 이삭도 자기에게는 '나'가 되는데, 그런데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면서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된다는 말이죠.

아브라함 이 "제사를 드리러 저 산으로 올라가자" 라고 하니, 이삭은 "아버지, 제사를 드리는 기구는 있는데, 제물은 어디 있어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나' 라는 것이 있으니 묻는다는 말이죠. 즉 "내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라는 것이 이삭의 생각이라는 것이죠. 즉 "하나님이 저기에 있고 내가 여기에 있어서, 내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둘 다 존재라는 겁니다.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받지를 않았다는 말이죠. 악마가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이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가인은 악마가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자기가 있다고 여겼다는 말이죠. 즉 "내가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내가 교회에 나간다" 라는 겁니다. 그게 납득이 되는 일상성이라고 보았다는 것이죠.

하지만 가인의 동생 아벨은 그 재물을 쪼개는데, 즉 제물을 기름부위와 살점부위로 나눈다는 겁니다. 그것은 그냥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니고, 제물을 자기 모습으로 이전해서 바치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니 제물은 통 채로 바쳐지는 것이 아니고, 쪼개져야 한다는 겁니다.

* 나는 온전치 않다 !!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나는 온전치 않다" 라는 것인데, 오늘강의에서 이 문장만 기억하면 된다는 말이죠. 즉 "나는 쪼개져야 한다" 라는 겁니다. 쪼개질 대상으로서의 '나', 그것이 바로 제대로 된 자기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쪼개지지 않으려고 버티는 것이 바로 가인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제사를 드릴 때, 그런데 그 제물에 대해서는, 물론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제물로 데리고 가지만, "아들이 제물이 되어야 한다" 라는 아이디어는 이삭의 아버지인 '나'게서 나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그 엄중한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자기가 할 일은 전혀 없는데, 그래서 자기를 빼버린다는 말이죠. 즉 "나에서 나를 뺀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2=2" 라는 것에서 "2-2=0" 라는 것인데, 즉 '없음' 이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의 '있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없음'을 끄집어낸다는 말이죠. "나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 그게 바로 나다" 라는 것인데, 즉 "육체만 있으면 되는데, 굳이 나가 있을 이유가 없다" 라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이 공식에 대입해보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헌금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왜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살게 하고, 돈을 벌게 하시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나'에서 '나'를 빼는 작업인데, 즉 자기를 부인하는 것인데, 그것을 위해서 요양병원에 집어넣어서까지 살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에게서 자기를 빼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요? 육신인데, 그 육신은 뿌리가 있다는 겁니다. 그 뿌리는 남편도 아니고 자식도 아니고, 그 육신의 주인은 주님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데, 남편이 시키는 대로 하지 말고 말이죠. 남편은 남의 편이라는 겁니다(ㅋㅋ).

* 나의 죽음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면 안 되는데,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면 우리는 죽을 수 있다는 겁니다. 어제 낮 설교 중에서 그 핵심요소를 하나 뽑아내라고 하면, "나의 죽음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라는 것인데, 상관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 육신의 주인은 따로 있는데, 그 주인이 누구입니까? 주님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나' 라는 것이 죽는 것은 죽음이 아닌데, 사람이 죽음을 느끼는 것은 아직 죽지 않아서 그렇다는 겁니다. 정작 죽게 되면 그 죽음을 느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갔을 때 그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나'를 상실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자기를 보고서 '나' 라고 하지 않고, '그' 라고 한다는 겁니다.

(고후 12: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I am dead" 라고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엇이 전제되어야 합니까? "나는 살아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을 발악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여기서 '살아있다' 라는 것은 말의 내용이고, 또한 '나는' 라는 것은 말하는 행위의 주체라고 하는데, '방스니스트' 라는 언어학자가 그런 주장을 했다는 겁니다.

* 마약보다 더 중독성이 강한 '나' !!

왜 학자들이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현대인들은 마약에 중독이 되기 이전에 마약을 먹는 자기 자신에게 중독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술과 담배도 마찬가지인데, 자기에게 중독이 되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그 '나' 라는 것은 없다는 말이죠.

자기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배후에 마귀가 있다는 겁니다. 마귀는 결코 자기를 포기할 수가 없는데, 그것을 인간세계에 그대로 유포시켰다는 겁니다. 자기와 똑같이 하면서 같이 살아보자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것이 동굴인데, 즉 똑같다는 겁니다.

마귀는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는데, 그래서 그런 자기와 똑같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에코라고 했는데, 이 에코는 동굴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and, and" 라고, 계속해서 그렇게 되는데, "아버지 그리고, 자식 그리고, 손자 그리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따라쟁인데, 계속해서 그 꽁무니를 뒤쫓아간다는 말이죠. 남들이 교회에 가니 교회에 가고, 남들이 세례를 받으니 세례를 받고, 남들이 성찬식에 참여하니 참여하는데, 그것뿐이라는 겁니다. 자기를 쪼갤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 목사님, 제물을 쪼갠 이유가 무엇입니까?

얼마 전에 어떤 분이 강의를 듣고서 전화를 하셨는데, "아브라함이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을 쪼갰는데, 왜 쪼갰습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제물을 쪼갠 이유가 마주보게 하기 위해서인데, 원래 하나인데, 하나이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해서 쪼개졌다는 말이죠.

왜 '서브웨이' 라고 먹는 지하철이 있는데(ㅋㅋ), 그 햄버그나 샌드위치를 보면 서로 마주보는데, 그렇게 마주보게 됨으로서 하나가 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아버지와 아들이 마주봄으로서, 그 마주봄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게 요한복음 5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 악마는 쪼개질 의사가 전혀 없어 !!

그런데 악마는 그런 '사이'가 없다는 겁니다. 악마는 '나' 라는 것인데, 그게 전부이고, 즉 폐쇄구조라는 겁니다. 자기가 최종적인데, 그래서 하나님에게 "당신이 나를 천국에 보내줄 거요, 말 거요?" 라고 하고 있다는 말이죠. 쪼개질 생각이 없다는 겁니다. 당장에 천국을 내놓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쪼갤 판이라는 것이죠.

실제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팼는데, 예수님을 박해하고 결국 십자가에 매달아서 죽였다는 겁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자기는 쪼개질 의사가 없다는 것인데, 바로 그런 악마의 마음으로 인해서 예수님은 죽었고, 그리고 그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 아버지의 일관된 전략이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 인간들은 헛되고 헛된 메아리의 흐름에 올라타서 가고 있을 뿐인데, 그렇게 인간은 "나밖에 없다" 라는 겁니다. 바로 그런 인간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종교가 있는데, 그게 바로 불교라는 말이죠. 즉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이라는 겁니다. 독존, 즉 자기 혼자 스스로 존재한다는 말이죠.

* 오직 하나님만이 스스로 있는 자 !!

출애굽기 3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에게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묻는데, 그러자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오직 자기뿐인데, 그러니 다른 것은 결코 스스로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이것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라고 하는, 바로 그 절차라는 겁니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 멸시를 받는 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

다시 고린도전서 1장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원래 우리의 자리는 미련해야 하고, 또한 약해야 한다는 겁니다. 즉 천하고, 멸시받고, 없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은 자기 존재의 뿌리를 모르기 때문인데,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미련하게 오셨고 약하게 오셨다는 겁니다. 특히 악마와 그 추종자들로부터 멸시를 받는 분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겁니다.

(고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그런 추종자들 중에서 한 사람이 누구인고 하니, 일상성에 빠져있는 '나'의 것으로 사는 '나', 그 '나'로 구성이 되어있는 '우리'에게서 예수님을 천대와 멸시를 받았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은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데, 그런 무용지물의 존재로 전락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마 분노를 가지는 사람도 있지 싶은데, "나는 예수님의 것이고 예수님의 소유인데, 그래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려고 다짐을 했는데, 그런 나를 보고 어떻게 주님을 천대한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런 내가 예수님을 어떻게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간주할 수 있겠는가?" 라고, 그렇게 나올 수가 있다는 말이죠.

* 자, 경매에 들어갑니다 !!

이런 사람에게 마귀가 찾아와서 경매를 붙이는데, 물론 처음에는 돈으로 시작한다는 겁니다. 100만원, 천만원, 1억, 10억, 100억, 그리고 다음에는 자식이라는 말이죠. 물론 돈에도 흔들지만, 자식이 경매에 들어가면 그야말로 혼란이 올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마귀는 항상 우리보다 더 세게 나오는데, 그것을 경험한 사람이 바로 욥이라는 겁니다. 욥은 자기의 신앙으로 자기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겼는데, 그것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는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이 인정해주는 것은, 하나님이 욥을 사용했을 경우뿐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나' 라는 것이 아닌 육신으로 간주해서 사용하실 때, 그때 욥은 구원받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욥은 그 당시의 선지자이고 메시야라는 겁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그것을 예수님만이 이야기한 것이 아닌데, 욥도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죠.

"차라리 저를 태어나지 말게 했으면 좋을 뻔했습니다" 라고, 그런데 이것은 욥만이 아니고 예레미야도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이럴려고 저를 선지자로 만들었습니까?" 라고 했는데, 어디 선지자가 믿음을 버릴려고 환장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 A : 천만원을 주면 종교를 바꾸겠습니까?
* B : 미쳤어?
* A : 10억을 주면 종교를 바꾸겠습니까?
* B : 미쳤어?
* A : 100억을 주면 종교를 바꾸겠습니까?
* B : 안 돼요요요.
* A : 자식을 내놓으라고 하면 종교를 바꾸겠습니까?
* B : ? ? ?

그러면 우리의 믿음과 각오는 무엇과 관련이 있는고 하니, '나'와 결합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나'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즉 지상에 있는 '나1'이 천국에 있는 '나2'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결심과 각오와 선택과 지식을 총동원하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성경책까지도 말이죠.

* 나의 죽음이 곧 육체 !!

하지만 주님은 이런 식으로 구원하지 않는데, 주님의 방법은 '나'로 하여금 '나'가 없는 육체로 가게 하신다는 겁니다. "나의 죽음이 곧 육체다" 라는 것인데, '나' 라는 것이 죽으면 시체가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나 자신이 미련하고, 나 자신이 멸시를 받아야 마땅하고, 나 자신은 지혜가 없다" 라고 하는 것을, 즉 "나는 나의 구원에 하등 기여를 할 수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나' 라는 것은 이 세상이 준 것이고, 타인이 인정하라고 준 것인데, 그러니 우리는 따라쟁이인데, 그것뿐이라는 말이죠. 메아리 중의 하나이고, 그냥 지나가는 물결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나' 라는 존재의 뿌리는 박해자라는 것인데, 주님을 박해하는 박해자라는 말이죠.

따라서 주님은 깊숙이 들어오시는데,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라는 소리는 듣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더 깊숙이 들어오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목자를 치니 양이 흩어진다는 말이죠. 오로지 목자만이 홀로 계시는 그 자리까지 내려가신다는 겁니다.

(마 26:31)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바로 그 목자에게서 뿜어내는 것이 있는데, 그게 창세기 1장 2절이라는 말이죠. 캄캄한데서 홀로 일하시는 분, 그분이 누구입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그때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는 겁니다. 여기에 흑암이 나오는데, 그때 하나님의 신이 일하셨다는 말이죠.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창조물 !!

그런데 이제 성령이 우리에게 오심으로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완전한 창조, 새로운 창조, 제2의 창조를, 즉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창조물을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만드신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작업이 되려고 하면, 우리는 이 땅에서 육신의 뿌리도 모르면서 그저 '나'로서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죠.

처음 시작할 때는 좀 우울해도, 강의 마지막에는 "새 사람이 됩시다" 라고 해주어야 집으로 돌아갈 때 힘이 좀 날텐데, 그런데 결론만 되면 죄인 중의 괴수로 전락하고 만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나' 라는 것이 살아있으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 달라진 '나'도 역시 '나' 라는 말이죠. 그래서 그 '나' 자리에 말씀이 와야한다는 말이죠.

여기서 고린도전서 1장 29절에서 31절을 보겠습니다.

(고전 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 1: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 예수 안과 방주 !!

여기 30절에 '예수 안' 이라는 새로운 동굴이 나오는데, 심판이 무엇인고 하니, 노아심판의 경우에는 윗물과 아랫물이 합쳐졌다는 겁니다. 하늘에서 비만 내려온 것이 아니고, 땅에서 샘도 같이 터졌다는 말이죠. 그게 노아홍수라는 겁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심판이란 것은 갇혀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와중에 동그란 것이 떠다녔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방주라는 겁니다. 그 방주 안에는 언약이 들어있었는데, 그러면 오늘날 언약은 무엇인고 하니, 방주가 아니고 '예수 안' 이라는 말이죠. 예수 안은 동그랗다는 겁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주인공이 아닌데, 만약에 예수 안에서 주인공이 되려고 하면 '나' 라는 것이 또 다시 등장하게 된다는 말이죠.

우리 육신은 '나'를 앞장세우는데, 그런데 예수 안에는 누가 활동하는고 하니, 흑암 가운데 성령께서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즉 성령의 일거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곧 "말씀과 나 사이의 괴리" 라는 것인데, 성령께서 그 괴리를 항상 유발시키신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너는 너의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세계의 위력이 성령을 통해서 너에게 나타남으로서, 너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는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주님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조금 복잡하게 되었는데, 마귀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그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라고 한다면, 그러나 이것을 알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알려고 하면 '나' 라는 것이 또 등장하는데, 그래서 알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고 후드려 팬다는 겁니다. 말씀이라는 몽둥이로 말이죠.

그러면 이제 끝으로, 그러면 그동안 이런 말씀이 왜 들리지 않았을까요? 들리지 않았던 것이 아닌데, 우리는 들어도 관심이 없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관심을 일상성에 두었기 때문인데, 하지만 그 일상성은 '나의 것'으로 자기가 안정감을 얻는 세계라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 것을 가지고 남들에게 그럴싸하게 내비칠 수 있는, 그래서 "나를 무시하지마. 나도 자랑거리가 있어. 나도 살만큼 살았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왜 자랑거리를 내세웁니까? 그것은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인데, 이 지옥의 세계에서 말이죠. 그래서 말씀을 건성으로 듣는다는 겁니다.

*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아라 !!

하지만 고린도전서 1장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 지옥에서 주님처럼 멸시를 받아라. 고난을 받아라. 하지만 네가 예수 안에서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한다고 하면, 너는 일체 그 나라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고, 오히려 천사들로부터 부러움을 살 것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천사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까, 천사들은 면류관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은 적이 없다는 말이죠. 천사는 기계인데, 그래서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천사들이 누구를 섬깁니까? 천사들이 사도요한에게 절을 한다는 말이죠.

성도에게는 주님이 일방적으로 씌어준 면류관이 있는데, 물론 천국에 가면 24장로들이 그 면류관을 벗어서 주님의 발 앞에 던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장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불타오르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이 모세를 보고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출 3:5)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 하나밖에 없는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하기 위한 인생 !!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너는 나의 종이야. 그러니 너는 나만 있으면 된다. 그러니 이 세상의 일상적인 것은 전혀 필요가 없어" 라는 겁니다. 따라서 주님이 우리는 죽이는 것은, 이제는 하나밖에 없는 죽음, 즉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이 땅에서 '나' 라는 자아가 어떻게, 즉 육신에서 나온 이 가짜 '나' 라는 것이 얼마나 주님을 박해하고 멸시했는지, 그래서 무엇이 죄인지를 체험하고 깨닫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바로 그 순간순간이 우리의 남은 인생이고,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언제나 즐거워하고 감사하게 된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가짜이면서도 무엇이 가짜인 줄 모르고, 그렇게 엉터리이면서도 애써 숨기면서 건성으로 말씀을 듣고 성경말씀을 보면서, 자기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제 성령께서 작동하셔서 그것을 쪼개주시고, 우리의 육체를 다루시는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해서 기뻐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4,5,21 오후 4시에 마침.

주님, 요즘 일상성이 많이 부자연스럽습니다. 그러니 감사하게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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