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1강-YouTube강의(숨겨진 것 이사야 6:13)20240507-이 근호 목사
제471강, ‘숨겨진 것’. 숨겨진 것이라고 제목을 했지만 더 정확한 것은 ‘남겨진 것’이라 해도 상관없어요. 이사야 6장에 보면 13절에 “그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이 내용에 그루터기는 남아 있다고 되어 있는 거예요. 그루터기가 어떤 식으로 남아 있느냐 하면 싹뚝 잘려서, 윗동아리에 있는 나무 전체가 싹뚝 잘린 면을 통해서 다 날아가 버리고 남아있는 것은 달랑 그 나무의 바탕이 되었던 그것만 남아있다는 거예요. 바탕이니까 그루터기다 이 말이에요. 그루터기.
그러면 하나님의 일, 이스라엘을 통해서 일관성 있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언약의 일이 궁금하다, 한번 찾아보고 싶다 이러면 어떻게 찾아보느냐 하면 언약의 하나님에 의해서 언약대로 싹뚝 잘려나간 그 사건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보면 되겠죠.
구약 이사야 같은 경우에 잘린 민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죠. 이스라엘인데 그 이스라엘 중에서 겨우 십분의 일 정도 되는 게 유다. 그런데 유다도 잘려버려요. 십분의 일 남아있을지라도 그것도 삼키운 바 되리라. 그러면 결국 남는 것은 ‘얼마나 남았느냐’는 질문은 잘못되었고 ‘잘린 면이 있느냐’ 그것이 해답이 돼요. 잘린 면이 있느냐.
하나님 믿는 민족이 자기가 믿는 하나님에 의해서 잘려서… 잘렸다는 말은 그 이스라엘의 토대, 근원과 그동안 그 위에 있었던 나무와 줄기와 많은 무수한 잎사귀들은 그 근원성과 안 맞다는 것으로 들통나서 잘리는 겁니다. 뿌리의 취지와 그 뿌리에서 자라난 그 나무 전체 덩치의 취지와 부합되지 않는다고 해서 잘라낸 거예요. 베임을 당한다고 되어 있거든요. 이사야 6장 13절. 베임을 당하는 것은 버림받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이게 바로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다 감추어진 거예요. 왜 감추었다고 말할 수 있느냐면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먼저 선점한 영적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입니다. 뱀입니다. 뱀이 인간의 마음을 완전히 장악했어요. 그래서 펼쳐진 이 세상이 바로 이 세상의 문화 또는 문명인 거예요. 속성을 유감없이 펼친 거예요. 이스라엘 빼놓고. 이스라엘은 잘렸다고 이야기했고요. 이방민족은 마음껏 펼쳤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방민족이 부러웠어요. 아, 사람이 저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 하고 따라가다가 하나님께서는 그 찬스를 놓치지 않고 완전히 나무 다 잘라버리고 남는 것은 그 잘린 면. 다시 말해서 그루터기. 그 바탕만 남았죠. 그 바탕을 이사야 6장 13절에서는 “거룩한 씨”라고 했어요. 거룩한 씨.
그럼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이런 말씀하셨거든요. 내가 온 것은 고을의 이방인을 위함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위해서 내가 구원하러 왔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 그러니까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여기 이사야 6장 13절과 결부해서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되어 있어요.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그루터기 자체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참된 이스라엘을 키우고 완성케 하는 그러한 씨앗 같은 역할, 처음 시작역할을 잘린 면이 하는 거예요. 잘린 면이. 잘려야 거기서 시작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잘렸으니까 그다음부터는 이스라엘을 잘라낸 분을 이스라엘이 메시아로 여기고 찾으면 되겠죠.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데 문제는 이스라엘이 자기를 잘라낸 그분을 인정 안했어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어요. 주님이 이스라엘의 씨인데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그래도 자기들이 명목상 유대인이고 이스라엘의 핏줄이니까 어떻게 마지막 남아있는 자기들로 인하여 새로운 이스라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이스라엘을 키워보려고 재건해보려고 그토록 애를 쓴 겁니다.
아주 쉬운 예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가 문제 있어서 교회가 잘렸을 때에 처음 그 교회를 개척했던 사람 몇몇이 모여서 ‘나가라. 다 나가라. 우리 몇 명 남아도 우리가 바로 그루터기다. 우리가 이 교회 전통과 신앙적 전통을 지키는 최후의 남은 자, 보루처럼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렇게 나오는 게 당연하죠.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그건 숨겨진 것도 아니고 감추어진 것이 아니에요. 그냥 나타난 거예요. 주님께서 의미를 두는 것은 이사야 6장에서 잘렸다는 그 점에 의미를 두라는 거예요. 잘렸다는 것. 그런데 인간들은 이 이사야 6장을 보면서 뭘 생각하느냐 하면 ‘혹시 내가 남은 자 아닌가?’ 이러고 있단 말이죠. ‘남들은 잘려나가라. 그렇지만 나는 최후로 버틸 수 있는 만큼 버티겠다.’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잘린 면을 내세워야 되는데 잘린 면은 부끄럽다고 안 내세우고 ‘여기 남아 있잖아요. 제가 존재하고 있잖아요.’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숨겨진 것조차도 인간은 제대로 뭔지 몰라요. 그러면 우리가 이제 감을 잡았죠. 이사야 6장에 의해서. 숨겨진 분이 누구냐? 이것은 여럿을 말한 게 아니고 숨겨진 분이 누구밖에 없겠어요? 예수님밖에 없겠죠. 거룩한 씨가.
그렇다면 구원된 자는 어디에 집합되어 있는가? 그게 요한계시록 2장 17절에 나와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여기 감추었던 만나에요, “감추었던(숨겨져 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은 어떤 조건을 갖춘 채 아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감추었던 만나를, 말씀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감추었던 말씀을 주는데 그 만나가 어떤 만나냐 하면 감추었던 만나에요. 감추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아무나 믿고 아무나 들을 수 있는 말씀이 아니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감추었다는 뜻이잖아요. 감추었다는 말이.
이건 돌아갈 자에게 돌아가야지, 쥐나 개나 알면 안 된다고 일부러 감추었던 것, 그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감추었던 게 뭐냐? 흰 돌. 그런데 흰 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흰 돌에 무슨 이름이 있다 했어요? 새 이름.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미 기존의 것은 잘렸어요. 따라서 우리의 이름은 잘린 이름이에요. 작살나도 마땅한 이름이에요. 우리의 인생살이가 우리의 이름을 대신한다면 내 인생 작살나도 우리는 할 말 없고 그걸 당연한 걸로 받아들여야 돼요.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네 인생 어떻게 망가졌느냐가 아니라 내가 너한테 새 이름 줬잖아. 흰 돌 줬잖아. 새로운 만나, 흰 돌 줬잖아.’라고 하는 게 중요해요.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성도가 되어서 어떻게 그걸 발견하느냐 하면 성경말씀 그대로 감추었던 만나니까 생명이죠, 감추어놓은 생명의 말씀이라 여기고 귀하게 여기겠죠. 쥐나 개나 어디 뭐 시장가면 다 파는 그런 게 아니고 감추어놓은 거예요. 그리고 흰 돌도 어떤 돌이라 했어요? 감추어놓은 흰 돌이에요.
그 말은 성도는 어떤 존재다? 숨겨진 존재에요. 하나님이 곱게 숨겨놓은 존재. “야, 이제 때가 되었어. 너는 이제 성도되어야 될 타이밍 되었어. 그동안 내가 숨겼는데 이제는 주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가라.” 뭐 이런 거. 그러면 그 사람의 뿌리, 그 사람의 과거는 뭐냐? 본인이 알죠. 나는 내가 되고 싶어서 성도된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따로 숨겨놓았다는 걸.
따라서 내가 하는 말은 예수님이 하는 말을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것처럼 성도가 하는 말을 사람들이 알아듣겠어요, 못 알아듣겠어요? 못 알아듣죠. 그러나 누구는 알아듣습니까? 나와 같이 숨겨놓은 주님의 이름이 있는 자들만, 잘렸다는 그것은 너무나 지당한 하나님의 처분이고 조치인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그 사람이 바로 숨겨진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