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9강-YouTube강의(취소 디모데전서 1:20)20240416-이 근호 목사
제469강, ‘취소’. 이야기해놓고 취소하면 노쇼(no show)죠. 그건 욕 얻어먹습니다. 그러나 구원에 있어서는 취소 없는 구원이 없어요. 반드시 취소를 통해서 그 사람을 건집니다.
모든 사람이 죽어서 지옥가기 싫어해요. 천국가고 싶어해서 교회 나오고 나름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시작을 누구로부터 했는가? 자기가 구원받고 싶어서 자기로부터 출발한 거예요. 이거 취소사유입니다. 본인이 본인한테 허락을 맡고, ‘나 이제 결심했어. 나 천국갈래.’ 그런 것은 하나님께 통하지 않습니다.
전도서 7장 29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이렇게 했어요.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이 하신 일과 인간이 처신한 것과 비교를 시켜놨습니다. 대립을 시켜놨어요. 하나님은 인간을 정직하게 만들었지만 인간이 꾀를 내었다. 죄 지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원래 지었던 정직한 인간은 이 땅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구원받고자 시도하는 것, 노력하는 것 그것도 어디에 해당되는가? 얍삽한 꾀부리는 데에 해당되는 거예요. 이것도. 이것은 정직한 게 아니란 말이죠.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에게 나온 것치고 정직한 것 하나도 없습니다. 다 수작부리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내용을 오해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맞다. 저거였었어. 저거 믿으면 나 구원받아.’라고 해서 사도 바울의 복음을 손들고 ‘난 이제 믿습니다. 나 이제는 신자입니다.’ 이런 식으로 서슴없이 나오죠. 왜? 들어보니까 나쁜 소리 아니고 좋은 소리고 자기한테 이익이 되니까 마다할 사람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고린도후서 11장에 보게 되면 이상하게 이게 변질이 돼요. 참 신기해요.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분명히 복음을 전했거든요. 분명히 복음을 전했는데 11장에 나오는 거 보니까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성령이 태어나버렸어요. 고린도후서 11장 13절에 보면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했어요.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참 이상하죠. 분명히 11장 4절에 보니까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 다른 영, 또 우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사도 바울은 그러한 현상이 이상한 게 아니고, 그거 뭐 당연한 거 아니야? 원래 그래. 복음 전하는 현장에 원래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그 이유에 대해서 아까 말씀드린 전도서 7장 29절 보면 여러분 이해되시죠.
자, 한번 정리해봅시다. 우리도 들어야 돼요.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내 속에 잠재되어 있던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을 들추어내는 작용을 복음이 하는 거예요. 복음이.
이미 우리 속에는 꾀가 있는 거예요. 우리 속에. 꾀가 있는데 복음을 전하기 전까지는 내가 이렇게 꼼수를 부릴 줄 몰랐어요. 내 자신에 대해서 너무 좋게 좋게 생각한 거예요. ‘아, 복음 전하면 믿으면 되지, 뭐. 아이고 고맙다, 하면 되지.’ 이렇게 생각하지, 복음과 내가 맞닥뜨릴 때 내가 얼마나 얍삽한 생각을 하고 내 이익만 챙기는 식으로 복음을 곡해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 못하는 겁니다. 인간은.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그게 이상한 일이 아니고 그게 필연적이라는 겁니다. 반드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이상히 여기지 말고 그걸 당연시 여겨야 돼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합니다. “야 이 거짓 사도들아, 너희도 복음 받았고 나도 복음 받았는데 나한테는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도대체 감당하기 힘든 고난과 고난의 연속이다. 너희들 그렇게 복음 때문에 고난 받아봤어? 복음 때문에 고난 받아봤냐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이 생각해야 돼요. 마태복음 16장에 예수님께서 복음 이야기할 때 고난 이야기했잖아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죽기까지 하면서 나를 따라와야 돼요.
그런데 사람들은 복음을 들으면서 내가 죽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은 전혀 감안 안하고 지식으로 확보하면 천당 가는 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 때 그렇게 복음을 허술하게 대충 믿던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습니다. 많았어요.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디모데전서 1장 18절에서 20절에 나오는데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여기 양심이라 하는 것은 복음과 관련된 양심입니다. 뭐 착한 양심 그런 게 아니에요. 복음에 대해서 모든 걸 걸었던 그 양심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가운데(파선한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 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알렉산더와 후메내오가 더 이상 사도 바울과 일행에 대해서 비난하거나 공격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탄에게 붙잡히도록 내어줬다는 거예요. 더 이상 복음 전파하는 데에 방해물 안 되도록 그런 조치를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후메내오와 알렉산더 이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전혀 들은 적도 없는 사람들이에요? 아니죠. 좋다고 진짜 복음이 최고라고 따라다닌 사람이에요.
따라다닌 사람인데 무엇과 틀어졌고 뭐가 문제냐 하면 복음이라는 그것이 지식이 아니고, 디모데도 마찬가지에요, 복음이 디모데에게 왔을 때 디모데는 복음 때문에 자기의 영광, 자기 위신, 자기의 체면, 자기가 빛나는 거, 자기가 높아지는 거 디모데는 고려할 마음이 전혀 없어요. 복음으로만 충분해요.
복음 전해가지고 교인 숫자 늘리겠다든지 복음 전해서 내가 설교 잘한다, 인기 얻겠다든지 디모데는 이런 게 하나도 없어요. 복음만으로 넉넉하고 그걸로 오케이에요. 그런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어떻게 되겠어요? 디모데와 대비해서 보면? 복음 전해서 자기가 어떤 유명 강사, 또는 복음에 대해서 도사, 신학의 도사, 복음의 전문가, 남한테 인기 강사, 이거는 자기부인이 아니잖아요. 써먹을 용도로 복음을 안 게 아니란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할 때 필수적인 게 뭐냐? 너는 아니거든. 이게 바로 취소다 이 말이죠. 그래서 너는 아닌 거예요. 복음을 전하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분류하는 거고 복음에 대해서 곡해하는 인간들을 분류해서 내쫓는 그 기능이 복음 자체 내에서 발휘되고 있습니다.
자, 끝으로. 이렇게 이야기하면 듣는 사람 걱정이 또 늘어지죠. ‘가만 있어봐. 가만 있어봐. 그럼 내 인생은? 내 미래는? 나도 요새 십자가 자기부인 영 전혀 없는데, 나 알렉산더 쪽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겠죠.
여기 디모데는 특징이 뭐냐? 예언에 따라 살았어요. 그러니까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에요. 내가 말씀 지키면 사람이 한계가 있어서 스스로 좌절해요. 그런데 이상하게 말씀이 나를 떠나지 않아요. 그것도 365일 동안 말씀만 연구하는 게 아니고 하루 24시간 온종일 뭐 묵상하는 게 아니고, 이상하게 순간순간 말씀이 나를 질책하고 ‘그쪽 아니야. 그쪽 길 아니야. 그거. 그거는 세상 사람들 넓은 길이야.’하고 지적해줄 때, 내 실력이 좋아서 말씀 붙드는 게 아니고 주님 실력이 주님의 예언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믿는 내 의지보다 우세하다는 것을 그 순간에 소급해서 다 깨닫게 되는 겁니다. ‘아, 나 아무것도 아니구나. 말씀이 전부구나.’ 순간순간 그걸 깨닫게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