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3강-YouTube강의(주제파악 전도서 11:5)20240604-이 근호 목사
제473강, ‘주제파악’. 흔히 사람들이 분수 모를 때 하는 이야기가 ‘네 주제나 파악하라.’ 이렇게 충고하죠. 주제를 파악하라고 충고할만할 정도로 이 세상에 대해서 다 아는 사람은 과연 있을까요? 없습니다. 어느 인간도 다 주제파악 못하면서 긴긴 한 평생을 보내게 됩니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자기 주제파악하고 살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공부를 많이 한다고 주제파악 되는 건 아닙니다. 주제파악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신 하나님의 계시에 입각해서 인간은 주제파악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함부로 타인이 타인에게 충고할 입장은 못 되죠.
그런데 주제파악을 하라는 것은 언뜻 들으면 ‘그래, 내가 이런 인간이라는 것이 딱 정돈되게 되면 나는 살만한 인간이다.’ 이런 것을 위한 충고처럼 느껴지잖아요. 성경에서 주제파악은 그게 아닙니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네가 어떻게 살았건 간에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을 주제파악 하라는 거예요. 그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주제파악 하는 거예요.
성경에서 말하는 주제파악이라는 것은 나는 잘났는데 너는 못났다가 아니라 어느 인간 한가운데서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 인간이 어디에도 없다는 뜻입니다. 아까 472강에서도 다윗과 아브넬의 정치적 거래 때문에 난데없이 미갈과 현재 잘 살고 있는 남편의 인생이 완전히 울면서 망가졌잖아요. 다윗이 요구할 때 미갈 남편 상황을 고려했습니까? 전혀 고려 안하죠.
우리의 인생도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주변에 있는 자연을 가지고 움직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은 고려할 만한 위치, 그런 가치가 없을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걸 누가 알았는가? 솔로몬이 알았어요.
전도서 11장 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합니다.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네가 알지 못함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이 전도서 11장 5절의 말씀을 우리가 상당히 중요시해서 봐야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보고 원한 것은 ‘네가 어떻게 풀릴지 네가 어떻게 될지 너 모르지?’ 이렇게 물으시는 게 아니고요. 그렇게 물으시는 게 아니고. ‘네 인생 정도는 네가 제대로 알고 있어야지.’ 그걸 물으시는 게 아니고요.
‘바람의 길이 어떠함을 너 모르지?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네가 모르지?’라고 해놓고 그다음에 뭐냐?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모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에 대해서 내가 모르지?’라고 묻는 게 아니고, ‘너에 대해서 네가 어떻다 하는 것은 질문 자체도 성립이 안 되고, 너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네가 모르지?’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차이점을 알아야 돼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관심이 있잖아요. 관심이 있으니까 뭐 기도를 하든 성경을 보든 우리가 하나님께 궁금한 건 묻고 싶어요. 궁금한 질문이 뭐냐 하면 ‘앞으로 제 인생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질문이다 이 말이죠. 그 질문이 과연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겠느냐 하는 겁니다.
전도서 11장 5절에 의하면 안 받아들여집니다. ‘하나님, 저 앞으로 어떻게 되겠어요?’ ‘그건 점쟁이한테 물어라.’ 그건 무당한테 묻던지 점쟁이한테 묻던지 그런 데 묻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이 질문 자체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이 현실과 맞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면 이제 질문을 또 해보겠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존재 입장에 있습니까?’라는 질문은 유효해요. 하나님의 영광이 목적이니까. 우리가 잘 되는 게 목적이 아니니까. 그 가운데서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냐고 물을 수 있어요.
그게 바로 11장 2절에 나옵니다.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그다음 3절에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
자, 비가 와서 바람이 불어서 나무가 쓰러졌습니다. 나무가 쓰러졌을 때 나무가 ‘나 남쪽으로 눕고 싶어.’ 혹은 ‘난 남쪽은 싫어. 북쪽으로 쓰러질까?’라고 결정할 수 있는 결정권이 나무한테 있습니까? 없죠.
그러면 바람 부는 것은 누구의 일입니까? 하나님의 일이죠. 하나님의 일에 대한 결과로 남겨진 일은 뭐냐? 내가 남쪽으로 쓰러질지 북쪽으로 쓰러질지 그거는 내가 알 바 아니라는 겁니다. 남쪽이 되든 북쪽이 되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벌였다는 사실이에요.
전도서 11장 4절을 보겠습니다.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리라” 이 말은 백날 봐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6절에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될는지, 저것이 잘될는지, 혹은 둘이 다 잘될는지” 그다음에 “알지 못함이니라”
지금 인간보고 농사짓지 말고 그냥 두 손 놓고 늘 놀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인간이 뭔가 부지런히 농사를 짓든 뭘 하는데 할 때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이여, 이렇게 내가 노력하고 애썼으니까 내 뜻대로 반드시 이거 해달라고 요청할 입장은 아니라는 거예요. 누가? 인간이. 그럴 입장은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말은 인간의 예상과 인간의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한테 윽박지르지 말라는 뜻이거든요. 내 뜻이 반드시 관철되어야 된다는 그러한 것은 하나님 일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일에 대드는 일이죠.
이쯤에서 이야기하면 또 상투적으로 나오는 반박이 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장래에 대해서 모르고 내가 하는 일이 주의 일이 아니라면 막 살아도 되겠네.’ 막 살아도 된다는 이 용어. 많이 듣던 용어고 많이 했던 용어잖아요. 뭔가 잔뜩 삐쳐서 그런 이야기를 하겠죠.
거기에 대한 답변이 11장 8절에 나옵니다.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자, 여기서 자기 기대대로 예상대로 되지도 않는데 뭐가 그렇게 즐겁단 말입니까? 내 뜻대로 되지도 않는데. 내 기대와 소원은 아무짝도 소용없는데 그럼에도 뭔가 즐거워하고 있다면?
무슨 뜻이냐 하면 평소에 내 기대와 예상이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즐거움을 훼방질했다. 가로막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게. 자, 예를 들어봅시다. 몸 건강할 때 열심히 일한다고 어떤 사람이 five job을 한다고 봅시다. 다섯 가지의 일을 한다고 봅시다. 즐겁습니까? ‘five job을 하지 말고 그냥 하나만 해라. 또는 둘만 해라. 건강을 생각해서.’ 이렇게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너는 다섯 개 하지 말고 그것도 욕심이다. 하나만 하라.’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다섯 개의 직업을 해도 상관없는데 그게 즐거워야 한다는 거예요. 물론 다섯 개 하는데 즐겁게 할 수는 없어요. 편하게 할 수는 없어요. 하나해도 힘드니까. 힘들지만 다섯 개를 해도 즐거운 이유는 다섯 개에서 나오는 수입보고 즐거워할 게 아니라, 다섯 개를 하게 하신 그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아까 바람 불어서 나무가 넘어졌잖아요. 비바람 불어서. 자, 그러면 남쪽으로 넘어질지 북쪽으로 쓰러질지 그걸 나무가 굳이 알아야 합니까? 나무 소관이 아니죠. 다섯 개를 하든 한 개를 하든 간에, 다섯 개 하다가 하나로 줄든, 다섯 개를 하다가 열 개를 하든 이런 일까지라도 이건 내 일이 아니고 주께서 허락해주신 주의 일인 것을 받을 때 그게 주 안에서 항상 즐거운 일이라는 거예요. 그럴 경우에만 이 인생이 헛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전도서는 구약이기 때문에 8절에서 이렇게 단정합니다. 그게 맞는데 “그러나 캄캄한 날이 많으리니 그날을 생각할지로다 장래 일은 다 헛되도다” 네가 예상하거나 기대하지 마라. 물론 힘들고 어렵고 캄캄하지만 그러나 순간 순간 이 일도 하나님 일인 걸 알고 즐거워하라. 이것이 바로 주제파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