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절제

아빠와 함께 2024. 4. 3. 09:33

467강-YouTube강의(절제 갈라디아서 5:23)20240402-이 근호 목사


제467강, ‘절제’. 절제라는 그 태도는 모든 종교인들이 다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목적이 뭐냐?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절제하죠. 이 말은 절제해야 될 것이 올라온다, 안 온다는 것을 누가 판단하느냐? 본인이 판단해요. 본인이 판단해서 아까처럼 또 계산하는 거예요.

본인이 판단해서 내가 여기서 더 나빠지면 구원에서 탈락될 가능성이 있다 할 때는 조바심이 나죠. 이거 선 넘었네. 아, 이거 오버했다. ‘선이 넘었다, 오버했다, 아 이것은 과하다.’ 살짝 조절이 필요하다는 느낌이 확 들죠. 그런데 그게 문제가 돼요. 왜냐하면 선을 넘는 것도 내가 알아서 판단해서 선을 넘었고, ‘아, 선 넘었네? 이거 너무 넘으면 안 되는데. 이러면 내가 천국 탈락하고 지옥가는 수가 있겠다. 후딱 선 넘지 않는 쪽으로 다시 돌아와야 되겠다.’하고 결심하는 것도 본인이 판단하는 거잖아요. 본인이 결정하는 거예요.

그러면 구원이라는 것이 지금 누구 손에서 놀아나느냐 하면 구원받는 당사자 손에서 구원이 결정되어버린다는 그러한 모습을 보이죠. 성경을 좀 봐서 겉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천 번, 백 번을 외쳐도 막상 자기 마음속에 작동하는 것은 선과 악에 대해 내가 알아서 판단하고 악은 될 수 있는 대로 멀리하고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과 악을 내가 판단하는 거예요. 일방적으로 내가 판단해놓고 이거 넘으면 악이고 이거 넘으면 선이니까 악한 쪽에서 후딱 발 빼서 선으로 옮기면 내가 구원받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진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이런 태도, 이런 행동을 어떻게 사람들은 정리하느냐 하면 특히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거룩의 농도로 결정해요. 거룩함의 농도. 거룩함에 좀더 밀착되고 많아지면 거룩의 농도가 짙어지고, 마음이 해이해졌다 싶으면 세상에 나가서 너무 논다 싶으면 거룩이 희박해지겠죠. 거룩의 농도의 짙음과 희박함으로 본인이 본인 마음가짐을 조절해서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그 말씀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하나님 보고 계시니까 자신의 노력이 가상한 노력으로 늘 보일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절제는 지금 하나님하고 거래하는 게 됩니다. ‘하나님 보고 계시죠? 최선의 노력을 다 하고 있는 거 알고 계시죠? 제 양심에 비춰서 제가 알아서 잘 조절하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는 내가 지킬 말씀만 그때그때 주시면 제가 얼마나 착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인지 내가 한번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했던 사람이 바로 누가복음 18장에 나온 바리새인이에요. 그렇게 살아간다는 티를 숨기지 못하고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 옆에 있는 세리보고 하는 말이었죠. 세리를 딱 견주고 하는 말이 “하나님이여” 성전에 가서 기도했으니까 ‘하나님’이죠. “하나님이여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함을” 그다음에 “감사하나이다.” 이렇게 한 거예요.

‘저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구제하고 지금까지 간음한 적도 없습니다. 이 정도하면 하나님이 티 잡을 거 없죠? 하나님이라도 티 잡을 거 없죠?’ 그게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 어떤 판정을 내렸는지 여러분 잘 아시죠. 바리새인보고 “네가 바로 지옥 갈 사람이고 정죄 받을 사람이고, ‘내가 죄인입니다’하는 저 세리가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고 할 것이다.”라고 이야기했어요.

자, 절제가 뭐냐 하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5장 23절 보니까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금지할 법이 없다. 성령의 열매를 거론하면서 끝부분에 나온 두 개에요. “온유와 절제니” 끝부분, 제일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이 절제에요. 십계명 제일 마지막이 뭡니까? “탐내지 말라”죠. 십계명은 ‘탐내지 말라’로 끝이 났어요.

여기 성령의 열매는 뭐로 끝나는가? 절제로 끝나요. 온유함과 절제로. 그러면 온유, 절제, 사랑, 희락 이것은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이건 누가 와도 금지될 수 없는 법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 누가 와도. 그럼 이게 금지되지 않는다는 말은, 내가 지키든 안 지키든 간에 내 의견과 상관없이 나에게 덮쳐지고 쳐들어오는 게 이 금지 못할 법이에요.

절제할 때 절제되고 절제안하면 절제 안되는 게 절제 법이 아니고 이것은 절제 자체가 그냥 덮치는 거예요. 온유 자체가 덮치는 거예요. 그럼 이것이 성령의 법에 해당되는데, 성령의 법에 해당되지 않는, 금지될 법에 해당되는 그 내용은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19) 이렇게 되어 있어요.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쭉 나오잖아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런 육체의 열매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금지한 거예요. 법적으로 금지했다 이 말이죠. 법적으로 금지했다는 증거가 어디 나오는가? 바로 갈라디아서 5장 24절, “그리스도 에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그렇다면 방금 육체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를 언급한 것은 이걸 네가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누구한테 준 거냐면 정과 욕심이 이미 십자가에 박혀버린 성도에게나 해당될 내용이에요. 성도한테는 “육체의 열매는 이거다. 성령의 열매는 이거야. 육체의 열매를 나는 천국에서 금지하는 거야.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금지할 게 아니야. 이건 그냥 천국 갈 때 다 가지고 가는 거야.”라고, 그 이야기를 성도한테만 이야기하는데 성도의 특징이 뭐냐? 정과 욕심이 십자가에 못박혔다 이 말이에요.

여기서 한번 생각해봅시다. 십자가에 못박힐 경우에 십자가에 못박힌 그 인간의 몸이 꿈틀거리고 움직이고 살아있는 거예요, 아니면 십자가의 의미와 취지가 살아있는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방학숙제 매미 표본을 곤충채집해서 핀으로 꽂았다 이 말이죠. 이 곤충 매미는 핀에(십자가에) 매달렸죠. 그다음에 그 숙제가지고 곤충채집한 표본을 들고 다니고 하는 것은 매미가 알아서 날갯짓하는 게 아니고 그 주인이 통째로 그냥 선생님 앞에 ‘숙제 했습니다.’ 내놓겠죠.

뭐가 살아있는 것이 성령의 역사냐? 성령의 역사는, 너는 죽고 십자가만 살아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뭐냐? 성도의 육체에다가 성령이 함께 있게 되면 그 성도를 통해서 나는 이미 죽은 자고 주님의 품격과 품위만 살아있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나오는 게 온유와 절제다 이 말입니다. 온유와 절제.

그러니까 온유와 절제냐 아니냐 하는 것은 십자가에 대해서 고맙게 여기면 그게 뭐라도 온유와 절제가 되고, 십자가보다도 다시 ‘내가 어느 정도 착할까? 내가 이 정도까지 거룩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계속 자기 행함과 실적과 업적에 관심 있으면 그것이 바로 육체의 열매가 되는 겁니다.

상당히 복잡한 이야기지만 성도라면 이 복잡한 논리보다도 체험될 겁니다. 여러분들이 언제 온유와 절제가 안 되던가요? 그것은 감사함이 없을 때. 예수님의 죄 사함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고마움이 없을 때. 반드시 거룩을 빙자한 육체의 소욕이 튀어나옵니다. 네가 거룩하면 얼마나 거룩해. 나는 더 거룩해. 이게 바로 육체의 일, 시기와 질투잖아요.

남하고 비교하지 말고, 주님이 나를 곤충채집 철에 박아 넣고 우리는 그 나를 어디 가서 들어 쓰시면서 주님의 죄 사함과 사랑만 드러나게 사용할 때 그게 바로 온유와 절제인 천국 백성, 성령의 열매를 갖고 있는 성도의 참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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